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25
성경말씀 

 (창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골2:11)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곧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빌3:3)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만나 

 위 신약의 두 구절은 우리에게 할례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할례는 육체를 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받은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육체에 자랑할 만한 것이 없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의미는 다름이 아닌 사람 원래의 힘과 천연적인 능력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육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육체는 죄의 문제에 관련된 것입니다. 육체가 사람으로 범죄하게 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육체가 사람으로 다만 범죄하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8절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 육체의 목적은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은 육체가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육체가 할례 받은 이후로 우리는 더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지 않게 되며 우리의 의견을 쉽게 내놓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약하고 무능하며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20
성경말씀  

(창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4~5)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오늘의 만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의 절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과 나무 그늘에 앉아 발을 씻는 것 중 어느 것이 하나님에게 더 즐겁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수준으로 인간의 형태로 그에게 오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신 이후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경배나 두려움이 없고 다만 친근함이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를 평범한 방식으로 방문하십니다. 많은 자매들은 그들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 주님이 친밀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오신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친구로서 주님과 함께 달콤한 교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도 역시 이런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직장에서 일을 할 때나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주님은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오시어 그들과 함께 달콤한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친밀한 친구처럼 교통하기 위하여 인간의 수준으로 우리를 방문하신 것의 체험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15
성경말씀 

 (창14:18~19)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1~23)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늘의 만나 

 아브라함은 이미 공과를 배웠기에 그 재물들을 전쟁에서 고생스럽게 얻은 것이니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외에 누구도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칭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을 위하여 서 있는 아브라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만이 그분의 것이 아니라 땅도 그분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주재이실 뿐 아니라 하늘과 땅,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부른 것은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으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돌라오멜과 다른 왕들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에서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을 위하여 서 있는 한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천지의 주재라고 하나님을 칭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부른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땅 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고 불리워지실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10
성경말씀 

 (창14:12)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오늘의 만나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롯은 그런 곳으로 가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난 알았었다. 그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그를 억압하신 것 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4장 14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 구절은 아 브라함이 진정으로 이기는 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아를 이기고 자신의 느낌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이끌려졌던 것입니다. 롯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그는 롯을 자신의 형제로 여겼습니다. 롯은 결코 이기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은 메소보타미아에서,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서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위하여 좋은 땅을 택하고 소돔으로 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롯이 그러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를 조카로 여겼습니다. 오직 이렇게 교통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에게만 영적인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능력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불평이 없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대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변함없이 그를 도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적인 전쟁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입장 위에 서서 싸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적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05
성경말씀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12:22~23) 그럴 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덜 귀하게 여기는 몸의 지체들에게 더욱 귀한 것을 입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되지만, 

 오늘의 만나

 
 우리가 진정으로 몸의 생명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집에는 제한이 있으며 우리가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몸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끊임없이 교통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의미를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하지 않습니다. 다른 형제들을 귀히 여기거나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의 생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다른 형제들을 귀히 여기고 생명을 만지며 집회 가운데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집회에 올 때 우리는 도움을 받게 되고 생명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집회를 마치고 나올 때 어떤 형제가 와서 좋지 않은 집회였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좋지 않은 것은 집회가 아니라 그 형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의 입장 위에 있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교통하여 생명 공급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의 육체가 처리되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볼 것이고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교통할 것입니다. 그는 가장 약한 형제나 자매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00
성경말씀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만나

 
 “헤브론”은 원문에서 “교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생명의 문제이며 교통은 생활의 문제입니다. 벧엘을 거치지 않고서 헤브론에 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벧엘 다음에 헤브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통이라는 것은 몇몇의 사람들로 조직화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없이 교통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처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통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이 처리되어야만 우리는 몸 안에서 살며 교통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사실이며 실제이며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과 교통합니다. 우리가 천연적인 생명을 처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 안으로 들어가며 끊임없이 교통 안으로 이끌어 질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몸을 아는 사람들은 개인주의로부터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며 그들이 아주 약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통 없이는 할 수 없다는 것을 보는 시점까지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교통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이것이 헤브론의 의미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55
성경말씀  

(창6:12~13)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마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39)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심판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하나님은 노아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노아에게 보여 주셨으며 그분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참된 상황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혼미했고 눈이 멀었으며 가리워져 있었고 분명치 못했으며 마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그들에게 임할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눈은 멀어 있었고 정욕으로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보십시오.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묘사한 것처럼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쾌락과 자기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정욕과 쾌락과 돈과 다른 세상적인 것들로 마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모릅니다. 노아의 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비밀을 노아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노아는 참된 상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에 강포가 가득하고 모든 육체의 끝 날이 이르렀으며 그분이 땅과 함께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13). 또한 하나님은 노아에게 할 일 곧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지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50
성경말씀 

 (롬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향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향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살전5: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분께서 또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의 모든 것과 가진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드렸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며칠이 지난 후에 잊어버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분은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가끔 우리에게 오셔서 그분께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너는 그날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약속한 것의 의미를 몰랐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가 이렇게 약속할 때 그 의미가 분명치 않았음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말한 짧은 한마디 안에 하나님과 관계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는지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로 인해 하나님께 묶였습니다. 그분은 부르신 분이고 우리는 부르심 받은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미치기를 원하지만 우리 안에는 그렇게 할 동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는 미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오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얻으소서. 주여!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소서. 나는 모든 것을 당신께 드립니다.” 사람들을 주님께 헌신하게 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헌신하도록 동기를 주는 것은 주님의 나타나심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오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라거나 모든 것을 제단 위에서 주님께 드리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시면 그 어느 것도 그들을 헌신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여,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의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45
성경말씀 

 (행7:2下~4上)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땅과 너의 친척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거라.’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들의 땅을 떠나 (마4:19~2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람 얻는 어부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동기와 힘은 첫 번째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었습니다. 만일 내가 여러분에게 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방문한다면 여러분은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밤새 잠을 설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습니까?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 예수님은 다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주님을 따랐습니다. 수 년 동안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사렛 사람인 보잘것없는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따랐던 것입니다. 나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던 예수님이 큰 빛(마4:16)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모두 그 큰 빛에 이끌렸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부르실 때 그들은 예수님께 이끌렸습니다. 외관상으로 볼 때 그들을 부른 분은 가난한 나사렛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영광의 하나님이 귀신의 땅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40
성경말씀  

(창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수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오늘의 만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가장 어두운 배경가운데 있었습니다. 그의 배경은 아주 강한 것이었습니다. 이 배경의 첫 번째 측면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은 그가 쌓은 성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사람은 그의 보호가 되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을 쌓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방어해 주시는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을 방어할 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을 쌓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떠나게 하라. 나는 자신을 방어할 성을 쌓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버렸을 뿐 아니라 자신을 높일 탑을 건축했습니다. 탑은 사람이 자신을 높이는 것에 대한 상징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순간 자동적으로 자신들을 높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성을 쌓을 때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을 높일 탑을 건축합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 24장 2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바벨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로, 즉 다른 신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할 때마다 귀신들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우상을 숭배하지만 사실상 귀신들을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계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