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35
성경말씀 

 (롬14:16~17)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화평,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마28:20下) 나는 이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어떤 의미에서는 왕국이 여기에 있고, 다른 의미에서는 왕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 자신과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시지만 다른 의미에서 주님은 오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에도 그분은 여전히 외적으로는 오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외적으로 오시어 왕국의 나타남을 가져오실 때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왕국의 나타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왕국의 실제 안에 산다면 상점이나 식당에서 잔돈을 더 많이 받았을 때 곧 돌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러한 상황을 통해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실을 보고 놀랍니다. 사람들에게 여분의 돈을 돌려주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취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는 왕국의 실재의 한 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이것이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왕국의 나타남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왕국의 나타남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30
성경말씀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고후1:20)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아멘”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생활은 절대적으로 언약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언약 아래 있습니다. 신약의 구절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과 같이 당신이 직면하는 모든 환경을 위한 구절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든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이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살아 있는 약속인 말씀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들과 느낌들과 환경들의 구름으로 인해 염려하거나 위협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으며 그분의 완전한 축복 아래 있습니다. 더 이상 정죄가 없고, 더 이상 심판이 없고, 더 이상 저주가 없습니다. 사망은 폐하여졌습니다. 여러분의 직업이나 건강을 잃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어두움이나 소극적인 것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약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약 아래 서서 어떤 실패나 연약함이나 어두움이나 소극적인 것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주님이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어진 언약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언약의 사람들입니다. 그름은 전혀 없고 홍수도 결코 없으며 오직 생명뿐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25
성경말씀 

(빌2:12下~13)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여러분 안에서 운행하시어, 여러분이 뜻을 세우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행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15) 그러면 여러분은 나무랄 것이 없고 순결하여,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세대 가운데서 세상의 발광체들로 빛나서 

오늘의 만나 

빌립보서 2장 12절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생명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고 비추는 것이고 가르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원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구원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있습니까?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뿐 아니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에서 자기를 구원할 방주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이루어 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멸망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악한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 안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 악한 세대에서 자신을 구출하기 위한 어떤 수고도 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지은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를 구원했을 뿐 아니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로부터 그를 분별하여 새 시대 안으로 인도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언급된 구원은 멸망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로부터의 구원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20
성경말씀  

(창6:12~13)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마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39)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심판이 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하나님은 노아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노아에게 보여 주셨으며 그분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참된 상황을 몰랐습니다.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은 혼미했고 눈이 멀었으며 가리워져 있었고 분명치 못했으며 마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 그들에게 임할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눈은 멀어 있었고 정욕으로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보십시오.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묘사한 것처럼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쾌락과 자기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정욕과 쾌락과 돈과 다른 세상적인 것들로 마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모릅니다. 노아의 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비밀을 노아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에 노아는 참된 상황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에 강포가 가득하고 모든 육체의 끝 날이 이르렀으며 그분이 땅과 함께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6:13). 또한 하나님은 노아에게 할 일 곧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지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15
성경말씀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오늘의 만나  

창세기 6장 8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은혜를 언급한 곳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나에게는 매분마다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은혜로우신 분이며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가 있음을 압니다. 주여, 은혜에는 나의 동역이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은혜를 입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견딜 수 없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라는 곳이 있습니다.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여러분이 창세기 6장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여기에서의 은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많은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오셔서 그와 함께 계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노아의 힘이며 능력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누렸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혼잡한 세대, 아무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는 세대 안에서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강하게 하셨으며 그와 함께 서 계셨으며 그를 부축하셨습니다. 노아가 입은 것은 은혜였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은혜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10
성경말씀  

(사12:2~6)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라 할 것이니라 

 오늘의 만나 

 이사야서 12장에서 이사야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부르짖고 외치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4절에 언급된 부르는 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힘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긷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의 우물들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길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고 찬송하는 것이며 소리를 높여 외치는 것입니다. 4절의 찬양과 부르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6절에서는 소리를 높이는 것과 부르짖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부르짖고 외치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으로 받아들이는 길이 즐거움과 찬양으로 그분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는 것임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 앞에서 외쳐본 적이 없다면 지금 그분 앞에서 외쳐 보십시오. "오 주 예수님!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라고 외치면 외칠수록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해방되고 주님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삼층천에 있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05
성경말씀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롬10:13)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의 인생이 공허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4장 26절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제 삼대인 에노스의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과 깨지기 쉽다는 것과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의 길 안에서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부서지기 쉽고 죽어야 할 운명이며 우리의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깊은 속으로부터 기도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나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분께 기도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르는 것은 기도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도의 한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르는 것은 단지 기도만이 아닙니다. '부르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외치다 또는 호소하다 즉 부르짖다'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는 사람을 불러 일으키다,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를 뜻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부르는 것은 그가 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는 속으로 할 수 있지만, 부르는 것은 들리게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6:00
성경말씀 

 (창4:2上)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오늘의 만나  

창세기 4장에서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두 이름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름은 공허함을 뜻하는 '아벨'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결과, 인생은 공허해졌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바쁘게 움직이지만 그들 안에는 무언가 비어있고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들 속 깊은 곳에 허무함이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상관없이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밤이나 아침 일찍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당신 안에는 무언가 비어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허무감이 지금 제가 말하는 공허함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왕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1:2~3)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과 소유한 모든 것과 행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공허하고 허무한 사람일 뿐 입니다. 의미있는 특별한 두 번째 이름은 부서지기 쉬운, 죽어야 마땅한 사람을 뜻하는 '에노스'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인생은 공허해졌을 뿐 아니라 부서지기 쉽고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부서지기 쉽고 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요! 또한 사람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일주일을 더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내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과 사람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5:55
성경말씀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히11:4)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이 드린 것보다 더 뛰어난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사람이라는 증거를 지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에 대하여 증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을 통하여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아벨은 그의 관념과 사상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따라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가인과는 달리 아벨은 자신의 양 떼 중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그가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제물은 죽었을 것이고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이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기름을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자신에게 피를 흘릴 수 있는 제물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락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자신이 악하며 죄가 있고 더렵혀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구속을 위한 피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기름이 있는 첫새끼를 드렸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아벨은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자신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자기의 관년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민수기 18장 17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예표인 소나 양의 첫 새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표론에서 볼 때, 아벨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와 우리를 덮는 그리스도 자신이 필요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5:50
성경말씀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오늘의 만나

 
 가인은 주제넘게 자신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피흘릴 수 있는 제물을 관심하시며, 타락하고 벌거벗은 사람을 가릴 수 있는 희생양의 가죽을 관심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옷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속죄 제물인 양을 죽이셨고 그 양의 가죽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릴 옷을 만드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이 사실을 가인과 아벨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말을 영접하여 그 말을 따라 행동하였지만, 가인은 자신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길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관심하는 것을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 곧 자신의 관념에 따른 다른 종교를 발명했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그들의 선주자로서 자기 의를 세움으로 그리스도를 의로 취해야 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불순종한 본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우리가 가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우리가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그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