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1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1 “누구든지 여호와에게 소제물을 제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가루를 바치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야 한다.”
*번제와 소제의 차이점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을 강조하며 소제는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을 강조한다. 번제의 강조점은 그분의 삶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에 있다. 번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義)이신 것을 강조한다. 소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을 강조한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그리스도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의(명사-righteousness)와 의로운(형용사-righteou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 자체이며 또한 그분이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속죄제로서 죄가 되셨고, 다른 한편으로, 속건제로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 타락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단지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죄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우리는 의로운 그리스도, 모든 방면에서 올바르신 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만족케 하는 향기를 드릴 수 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의가 아니다. 우리는 죄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번제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 우리가 의가 될 수 있는가? 우리 자신 안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것은 가능해진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의가 없다. 우리에게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의를 가질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롬 10:3). 번제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의(義)이시며, 소제로서 그분은 가장 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다.
* 고운 가루
소제는 고운 가루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가 소제의 주요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지만 우리의 인성은 거칠고 조잡하다.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온유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의 인성은 모든 방면에서 곱고, 온전하며, 균형 잡혀 있고, 올바르시다.
소제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들을 통과한 밀로부터 산출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으로 만들었다. 그분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는 슬픔 위에 슬픔을 맛보셨다.
고운 가루는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유에 있어서 완전하며 조금도 과하지 않고 균형 잡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시다. 그분의 인성과 우리의 천연적이고 타락한 인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 기름
소제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눅 4:18, 히 1:9).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그분은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영인 신성한 요소도 있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소제로서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우리는 그분에게 「기름이 발라졌다(oiled)」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기름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셨다는 뜻이다.
* 유향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아주 즐거운 느낌을 갖게 해준다. 예표에 있어서, 소제 안에 든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고난으로부터 표현되어 나온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마 11:20-30, 눅 10:21 참조). 그분의 인생의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비록 그분이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지라도,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게 하셨다.
소제에는 세 가지 요소들-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이 주로 이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었음을 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들 안에서 사시며 행하셨다.
그분의 전 생애는 사실상 십자가 아래 사신 것이다. 그분은 항상 죽임 당하셨으며, 가죽이 벗겨지셨으며, 각이 뜨이셨다. 여섯 시간 동안 지속된 그분의 십자가는 그분이 죽임당하시고, 가죽이 벗겨지시고, 각 뜨이신 것의 총체였다. 주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 사셨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으로부터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최상의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셨다. 이 인성에 기름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인생에서 그분은 고난들이 아닌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부활은 우주 안에 있는 유향, 향기로운 향기, 달콤한 맛이다. 어떤 것도 이러한 부활의 향기처럼 달콤하지 않으며 향기롭지 않다. 이것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생이다.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밤에(요18:4,7) 그분은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8절). 「이 사람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분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병정들에게 체포를 당하시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제자들을 돌보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를 돌보셨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 19:26-27上).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 받음에서 흘러나오는 부활을 본다.
주 예수님은 고난의 삶이지만,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사셨다. 모든 장소, 매 시간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 안에서의 삶과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다. 이것이 소제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이며, 그분만이 그것을 먹도록 되어 있다.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태워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번제에서 태우는 불을 하나님의 「입(mouth)」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인 반면, 소제는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음식으로서 작은 부분을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 합당한 경배
합당한 경배는 번제와 소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우리 만족을 나누기 위해 소제를 드리는 것, 이것이 실제의 경배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만족되며 이러한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실제의 경배 안에서 번제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러한 경배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며, 우리는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아멘
1. 동방교회 신화개념 “인간의 신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정교회는 먼저 다음 두 가지에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첫째, 정교회의 부정의 신학(apophatic theology)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의 신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인간 안에 일어나는 신비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고대와 현대를 포함해서 모든 동방의 신학자들은 어떤 범신론적 형태도 일심으로 그리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들은 피조물과 창조물의 구별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질과 에너지의 구분에 의존한다. 즉 인간의 신화는 하나님의 본질과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에너지와의 연합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신화는 절대적인 변형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그리고 진정한 연합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성이 훼손되는 문자적인 병합이나 혼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교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 혹은 본성에 참여할 수 있다는 관념을 일관되게 거부해 왔다. 오히려, 우리는 본질상 뚜렷하게 인간으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신적인 에너지나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 안에 참여한다. 심지어 우리가 신화된 순간에조차도 어떤 면에서든 우리의 인간성이 축소되거나 파괴되지는 않는다.”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고찰_장인관.pdf
2. 지방교회측의 신화 개념 “<동방정교회의 신화 개념>(15-16쪽) : <신화>(divinization, Theosis, deification) 진리는 동방 정교회 신학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되는 것 즉 그분의 에너지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구원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러 동방 종교들의 주장들과는 달리, 동방정교회의 신화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근접하더라도(closely linked to God) 사람의 인간적인 정체성은 여전히 보존 된다고 한다.
한 가지 특징은 동방 정교회는 하나님의 신성한 에너지(energies)와 하나님의 본질 (God's essence)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하나님의 신성한 에너지'가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에너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증과 비평' 41쪽의 Kerry S. Robichaux 의 논문을 참조). 거듭 당부하건대 누구든지 (지방)교회의 <신화>관련 주장을 판단하려면 그 이전에 위 <확증과 비평> 2002년 특집호 내용 전체를 두 세 번 읽어보기 바란다.
아래에서는 일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위 책의 첫 번째 글인 'Becoming God' 중에서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 중 일부를 인용 소개해 보겠다.
# 우리는 하나님이 된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난 이후 우리가 전적으로 거룩케 되며, 변화되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때까지 하나님으로 적셔지고(saturated), 침투됨(permeated)을 가리킨다. 이러한 하나님이 되는 신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인성(humanity)이 제해지거나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신분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토록 피조물과 인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신화>는 우리가 신격(Godhead) 의 일부가 될 만큼 높여지거나 하나님의 비고유적인 속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충분하게 신화된 이후에도 우리는 무로부터 무엇을 창조할 수 없을 것이며 무소 부재하거나 전능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계시는 조건인 스스로 존재함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위 책, 17쪽).
# 우리의 영이 그 영으로 인해 (거듭)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하나님으로 난 것이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생명과 신성한 아버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18쪽).
# (요한 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유기적인 연합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분(parts of Christ)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가 포도나무임으로, 그 포도나무의 일부인 가지들은 그리스도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의 일부이다(20쪽).
# 우리는 생명과 본성과 '오직 그분 안'(only in Him)에서만 하나님이다. 우리는 결코 신성한 능력과 특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신들"(gods)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22쪽).
# 하나님의 유기적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이 되는 과정은 우리가 거듭나서 거룩케 됨, 새롭게 됨, 변화, 형상을 본 받음을 경유하여 영화롭게 됨으로까지 나아가는 과정이다(23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 자신을 사람 안에서 표현하시려면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으로 남아 계시면서 사람이 되셔야만 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사람은 여전히 사람으로 남아있으면서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26쪽). 이외에 위 (지방)교회측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의 2002년 10월 호 <신화> 진리 특집에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 Kerry S. Robichaux, Can Human Beings Become GOD? (16쪽) * Ed Marks, Deification by Participation in God's Divinity (8쪽) * John Pester, The Gospel of the Promised Seed: Deification according to the Organic Pattern in Romans 8 and Philippians 2 (15쪽) * Ron Kangas, Creation, Satanification, Regeneration, Deification (13쪽) * Witness Lee, The Seed of david Becoming th Son of God (6쪽) * Roger Good, Children of God Becoming Deified Sons (4쪽) * John Campbell, Deified to Be the Bride of Christ (5쪽) * Bob Danker, Deification -Aspects of the New Jerusalem (5쪽) * Jim Batten, Christ, the Spirit, and the New Creation (5쪽) * Ron Kangas, Children of God, Sons of God (9쪽) * David Yoon, Misrepresented Goal: Heaven as a Restoration of the Garden of Eden (5쪽) * Nathan Vigil, The Conflicted Theological Construct of Adoption(5쪽) * Nathan Betz, Heaven: An Identity Crisis(4쪽) * Gary Kaiser, Hymns- Praise of the Lord in His Increase (4쪽).
결론적으로, <신화>(Deification) 진리의 핵심은 우리 안에 오신 주님자신인 <생명>(요14:6)과 주님 자신의 우리의 영 혼 몸 안에서의 증가인 <생명의 성장>(요10:10하 골2:19)을 관심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혹자는 천국 가는 것이 믿음생활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마7:21). 또 어떤이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예수 믿는다고 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의 참된 의미인가? 신약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이것은 어떤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어떤 단계에까지 도달하는 문제이다.
즉 사람이 주님자신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그의 영이 <거듭나고> 이 생명이 우리의 존재 안에서 자라심으로 그의 혼이 <성화 되고> 마침내 우리의 몸도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형되는 <영화>가 성취되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이처럼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안에서 하나님이 증가되시는 완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히2:10).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피조물인 그분의 택한 백성들이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다(엡1:4-5).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생명 되신 주님자신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시고(요3:6) 날마다 증가되시어 우리의 혼을 거룩케 하시고(엡5:26), 새롭게 하시고(롬12:2), 변화시키시고 (고후3:18),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롬8:29), 마침내 우리의 몸까지도 영화롭게 하심으로만 성취된다(골2:19, 롬8:23, 빌3:21). 이러한 온전한 구원의 성취는 또 다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많은 아들들인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어 온전한 사람(a perfect man)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엡4:13).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람이 하나님(하나님-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으로 충만한 <한 온전한 사람>(a perfect man)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의 왕국의 실제이며,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영원토록 만물을 다스리고 이들을 통해 표현되신다(창1:26).출처: http://tip.daum.net/openknow/50561242
3. 저의 견해 000 형제님, 참고로 말씀드리면 위 동방정교회 입장은 제가 검색을 통해 무작위로 얻은 자료입니다. 지방 교회측의 입장은 저자가 롼 캥거스 형제님입니다. 사실은 확증과 비평지 2002년 10월호 신화 특집호( http://www.affcrit.com/archives/ac_02_02.html ) 중 롼 형제님 논문을 예전에 편의상 임의 번역하여 소개한 것입니다. 저는 동방 교회쪽이 말하는 ‘에너지’라는 독특한 용어를 강 형제님을 포함한 다른 분들이 더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위 내용 중 빨간색으로 칠한 부분이 언급하듯이 이번 신화 특집호에서 케리 로비쇼우 형제님이 이 ‘에너지’(energies) 용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41쪽 에 보면, Ware의 “ These energies ..are not a thing or object, a gift that God bestows…but God Himself in his personal action..” 이란 언급을 근거로 논문 저자는 이 에너지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강 형제님도 에너지가 생명과 빛을 가리킨다고 하셨지요. 생명과 빛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들이 아니겠습니까(요11:25, 요일1:5). 000 형제님도 기회가 되시면 캐리 로비쇼우 형제님 논문 그리고 그 원출처인Ware, Kallistos, “Salvation and Theosis in Orthodox Theology” 1983. Pp.167-184를 직접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아무튼 동방교회, 지방교회측, 서방교회 구원론의 핵심 개념은 엡1:4-5가 말하는 거룩케 됨(성화) 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Theosis 와 sanctification의 차이에 대해서 위 제가 추천드린 자료를 공부해 보시고 그 개념을 염두에 두고 형제님이 먼저 말씀해 주시면 저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