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범주에서는...어떻게든 자꾸 노출되고 대중에게 각인되어야 여러 가지 기회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눈 도장'이라는 말도 생겨 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든 '튀어야 ' 살아 남는다 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인 교회의 범주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교회라고는 하나 세상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런 영역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 자신의 충만인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때 앞서서 봉사를 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은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 무리의 동료들이 비슷한 시기에 교회생활을 시작했는데...지금은 자기 외에 대부분은 어떤 위치에 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소외 되었거나, 자신이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예전에는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서 아무도 관심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 때...그런 외적인 상황이 자신의 내면의 영적 실재를 악화시킬까요...
비록 인간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참기 어려운 기간일 수 있으나 영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저는 며칠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감옥에 갇힌 세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후 결례의식을 행하다 일어난 소동 이후 전개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긴장과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오고, 공회가 열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결사대가 생기고, 밤 9시에 병력이 바울을 호위하여 약 60킬로(150리)를 이동시키고, 유대인들이 변호사를 대동하여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고, 총독이 말씀을 듣고자 하니 바울은 의와 심판을 강론하고
이렇게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여, 더 자주 그를 불러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해가 지난 후에 보르기오 베스도가..."(행24:26-27).
위 구절에서 짧게 언급된 '두 해가 지난 후' 라는 부분이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신약경륜을 수행하던 바울사도에게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낭비요 큰 제약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역 성경은 27절의 각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두 해 동안 사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사도는 이 땅에서의 주님이 움직임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그가 로마에서 상소하는 동안에 썼던 그의 서신들, 즉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가장 비밀하고 깊고 풍성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서신들이 역대로 교회에 가져다 준 공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한 동역자 형제님이 주님을 오랫동안 전 시간으로 섬기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공급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리가 본 이상이 객관적인 현실을 통해 시험받을 때 ...를 잘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꿈을 꾼 후, 그가 직면한 상황 특히 감옥에 갇힌 가운데서도 요셉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는 모습...
특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40:8)의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이와 과련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스리지 못하면 나와서도 어렵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그 다음 요점은 감추인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고...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의 2년 감옥 생활, 요셉의 감옥 생활,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20년 감옥생활은...하나로 엮어져 제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생활은 영광의 때만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지체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잊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따로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기회가 아닌 땅에 묻혀 썩어 자신의 생명의 성숙과 다른 지체들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 1:14)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많은 분들에게 성육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크리스마스일 것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구주가 나신 날, 공휴일 그리고 선물 주고받는 날...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면 곤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이면에는 더 깊고 비밀스런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점점 더 알아 갈수록 성육신을 통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계획을 더 깊이 감상하며 그분을 경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처녀 마리아와 성령님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십니다.그분은 성령으로부터 '온전한 신성'을 처녀 마리아로부터 '완전한 인성'을 취하신 '온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complete God perfect Man)이십니다. 인류역사상 이런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비밀스런 성육신을 통해,
1. 자신이 입으신 육신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모셔와 '신성과 인성의 기묘한 연합'을 이루셨습니다(웨인 하우스, 신학교리도표, 생명의 말씀사, 1995년, 59-62쪽 참조).
2. '그분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장소인 속죄소(힐라스테리언) (롬 3:25 원문)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 사람'이시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단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1) 예수님은 '진짜육신'이 아니라는 이단(인성부인, 가현설).
2) 예수님은 사람의 영은 없고 몸과 혼만 사람과 같다는 이단(완전한 인성부인)
3)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는 이단(신성부인, 여호와의 증인들)
4) 아들 하나님(2격)만 육신을 입었음으로, 아버지는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안 계신다는 이단 (완전한 신성부인(삼신론) 특히 이러한 유형은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아들과 '분리'되어 하늘 저 멀리에만 계신다고 믿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입니다. 이러한 이단사상은 구원론, 내세론에 가서도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상 많은 희생을 치르고 세워진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아버지, 아들, 성령)의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하시고(coexisting), 서로 안에 계시며(coinherence),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으신다(distinguish not separated)는 것입니다.
성경도 육신 입은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요 14:10-11, 20, 8:16,29)하심으로 이러한 신학을 뒷받침합니다. 즉 1/3하나님만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 즉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를 입으신 것입니다(골 2:9, 딤전 3:16, KJV). 성경은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안에 계시고, 아버지도 땅위의 아들 안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하늘 보좌에 계신다고 말합니다(요 1:18 동사시제를 주목, 요 14:10, 마 6:9). 우리는 심오한 진리인 삼위일체를 다룰 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무리하게 체계화 할때 이단사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늘 상호 내재하시는 아버지와 성령님과도 서로 안에 계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영(요 11:33), 사람의 혼(마 26:38), 사람의 몸(요 19:34)을 가지신 '완전한 사람' 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고, 성경이 계시하는 정통 기독론입니다. 그분은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려고 보좌로부터 이 땅까지 흘러오신 것입니다(요 10:10, 4: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