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 저집에서 모이는 가정집회가 교회의 기초이다. 대집회는 일종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것과 강다. 사실상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가정집회이다. 큰 집회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만일 가정집회가 없다면 교회의 번식과 돌봄은 없을 것이다. 가정집회는 교회 번식의 생명선이다. 사도행전 2장은 성전에서 모이는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스케이트장에서 나가 이집 저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일단 어떤 사람이 가정집회에 들어가면 그는 보호되었다. 오늘날 웅장한 건물은 세상의 허영과 육체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집회장소의 기능은 교육과 섞임과 훈련이다. 대집회는 사람들을 경직되게 하고 수동적이 되게 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특별한 집회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초기 교회 사도들도 이런 습관 때문에 건물을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건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주후 70년에 통곡의 벽만 남겨놓고 다 무너졌다.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건물을 짓기 위해서 헌금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가기 위해서 가정집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새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생아임을 앎
우리는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다룸같이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유치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다룬다.
우리가 대학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대학 졸업생들이라는 것을 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로 생각해야 된다.
새로운 사람이 "성경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린 아기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하고, 태도나 어조도 합당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많은 질문을 할 때 이러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들은 매우 관심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16-217쪽)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새 신자들을 양육함
우리는 어린 아기를 돌보고 있다는 것과 아기를 위한 음식으로 갓난아이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을 먹일 때 너무 많이 먹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너무 많이 먹이면 그들은 소화불량에 걸려 입맛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향기가 좋은 것이나 달콤한 것으로 먹여야 한다. 주 음식의 맛이 달콤하다면 그들은 잘 먹을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가이다.
새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최선의 길은 찬송이다.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찬송하기를 좋아한다. 찬송하는 것은 정말 달콤하다.
우리는 짧고 간단하며 부르기 쉬운 찬송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는 찬송을 부르면 귀 기울여 듣고 나서 그것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세 번째 우리가 그 찬송을 부르면 그들이 함께 부를 것이다.
우리가 갓난아기를 도우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항상 기쁘게 해야 하고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 그 후에야 그들은 우리가 주는 것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47-248쪽)
새 신자와 '놀기'를 배움
아기를 양육하는 어머니는 어린 아이들을 먹일 뿐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으로 소중히 품는다. 그들과 노는 것이 그들을 소중히 품는 것이다. 아기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기쁨을 느끼고 나면 어머니는 그들을 먹인다. 우리는 반드시 새 신자들과 함께 '어떻게 노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과 함께 놀면서 우리의 손은 그들을 먹인다. 새 신자가 크리스마스라는 질문을 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크리스마스 주제에 점유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크리스마스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님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가져야 합니다. "라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크리스마스에 관한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라는 실제로 돌이키게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교통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어서 기뻐할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 신자들에게 자양분인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57-258 쪽)
가정 집회에 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을 만지고,
열게 하고, 소생시켜야 한다
새로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의 영을 만져야 한다. 우리는 생명 공과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어떤 중점이나 구절이 새로운 사람의 영을 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영이 만져진바 되면 우리는 좀 더 전진된 빛 비춤이나 계시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속에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영 안에 사시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영이 이제 한 영이 되기 위하여 연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 신자가 생각 안에서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영을 만지도록 이끌려 질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접촉한 체험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가 설명해준 후에 그는 즉시 이해할 것이다. 가정 집회에 갈 때에, 체험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을 만져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열려지게 하고 그들의 영을 소생시켜야 한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예비, 60-61쪽)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분별함 - (2)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의 양면성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롬8:34는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롬8:10은 동시에 또 다른 방면에서 주 예수님이 거듭 난 사람 안에 (생명으로) 계심을 증거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 안에 살고계십니다(골1:18, 엡1:23).
그러나 로마서 8:10은 위 양 방면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되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지만)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거듭난 우리의 영>은 살았고, 심지어 생명(조에) (spirit is life) 이라고까지 롬8:10 후반부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는 사실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한 고전6:17에서 더 선명하게 확증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 불신자였을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습니다(엡 2 :1).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생명으로 영접할 때 그분은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 영이신 주님이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심지어 우리 영과 연합하여 한 영(one spirit)이 되셨다고 고전6:17은 말합니다. 이제 이분은 여기서 더 전진하여 우리의 영 뿐 아니라 마음(heart)에도 거처를 얻기 원하시며(엡3:17), 우리의 죽을 몸, 사망의 몸에게도 생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롬7:24, 8:11). 이것이 구속의 피로 인한 죄사함 이후에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생명에 의한 유기적인 구원의 과정입니다(롬5:10, 빌2:12). 이러한 지속적인 생명의 역사 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되고 마침내 영광 안으로 이끌려 질 것입니다(히2:10). 이것이 로마서 8장 전체에 흐르는 사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쟁점이 되는 것은 롬8:10이 말하는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 할 때의 영이 과연 사람의 영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원래 신약원문 상의 영을 가리키는 '(푸)뉴마'는 대 소문자 구별이 없음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는 전후 문맥을 따라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캘빈을 포함한 소수의 신학자들은 이 영을 성령으로 보지만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롬8:10이 언급하는 이 영을 사람의 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장로교단 내에서 존경받는 주경 신학자인 이상근 박사의 아래 자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 영(롬8:10)을 성령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나(Calvin, Dickinson), 신자의 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Meyer, Bengel, S&H, Vincent 등). 전구(몸)와 댓귀적 성격으로 보아 후설이 타당하다(고전2:11). 영이란 인격의 본질이며 영성의 최고의 부분으로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좌소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이다'(이상근, 신약 주해 로마서, 성등사, 205쪽).
이외에도 롬8:10의 영을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수 의견임을 인정하는 자료로는 죤 머리의 로마서 주석(권혁봉 역, 생명의 말씀사) 33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문맥을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위 롬8:10이 언급하는 영은 사람의 영이며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의하면 여기에 언급된 영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 하는 조건하에서만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생명이심에는 어떤 특별한 조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앞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에서의 몸이 사람의 몸을 가리킴으로 뒤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에서 영도 당연히 사람의 영을 가리켜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으니 우리 안에 성령만 계신다는 사상은 매우 위험한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삼위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빛 가운데 거하심으로 사람 안에 오면 타 죽고 성령님은 사람 안에 오실 수 있다는 주장은 성령님이 아버지와 다른 본성 또는 열등한 본성을 가진 하나님이라야 말이 되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둘째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는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성령만 우리 안에 계시고 아들 하나님 자신은 '구겨지지 않는 한' 사람 안에 계실 수 없다는 말(기독신문 게시판 안0식 목사님 주장)도 삼위를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말들은 참된 신자가 소유하는 아들 안에 있는 생명(요일5:12)이 본인에게는 아직 없음으로 자신이 가라지라는 부끄러운 고백이 될 뿐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기독론과 구원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입니다.
PS: 누구든지 성경해석에 오해가 있어서 잠시 성경적인 가르침과 다른 주장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또 틀린 것은 고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 성경적이고 이단적임이 선명하게 밝혀졌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오히려 성경적인 가르침을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런 비 진리와 비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유다서 1:3은 우리에게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라'고 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