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55
성경말씀 

 (창14:18~19)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히5:6) 또 하나님께서 성경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오늘의 만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축복의 첫 사례는 아브라함에 대한 멜기세덱의 축복입니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아온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듯이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로 왔습니다. 더 나아가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왔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영원한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축복은 제사장으로 인해 수행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제사장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힙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에게 축복받기 전에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당신이 축복한 후 간격은 없어지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누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을 때 그 축복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50
성경말씀  
(히7:7) 두말할 필요 없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축복을 받습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큽니다. 

 오늘의 만나 

 히브리서 7장 7절에서 우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축복하는 축복의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분량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분량에 따라 크거나 작은 것입니다. 요한이 그보다 앞서 일어났던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크기는 했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침례 요한은 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보다, 그보다 앞서 간 모든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큰 자인지 작은 자인지는 우리의 그리스도의 분량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많이 소유할 때 여러분은 큰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많이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 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언제나 큰 자가 작은 자를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큰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그리스도의 분량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보다 크다면 그것은 나보다 많은 그리스도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작은 분량을 가진 사람들은 더 큰 분량을 가진 사람들의 축복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참예하고 누리는 그 그리스도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누릴 때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를 ! 갖습니다 . 이렇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40
성경말씀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행:2:32~33上)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며, 우리 모두가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으로 높아지시고, 

 오늘의 만나  

라헬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름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름, 두 이름을 가졌습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고통을 받고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즉시 그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냐민으로 바꾸었습니다. 슬픔의 아들이자 오른손의 아들이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베노니이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냐민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두 방면을 가지고 계신 놀라운 분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만큼 슬픔 가운데서 고통 받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만큼 높이 올려진 적도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장 33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그분을 높였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1장 3절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헬은 이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역시 이런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 따르면 그 아들의 고통이 그녀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듯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3년 반 후에 부활과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냐민이 고통과 높여진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35
성경말씀 

 (빌1:21)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롬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며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의 법으로써 자연발생적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만일 그것이 법이 아니라면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인 이상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손에 물건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손을 놓으면 그 물건은 자동적으로 땅에 떨어집니다. 만유인력은 하나의 법이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일종의 현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우리가 노력해서 붙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임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 법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두셨고 기업으로서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이삭과 같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30
성경말씀 

 (롬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11:5)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을 받은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선택에 관계된 긍휼과 은혜를 이해하기는 약간 어렵습니다. 비록 영원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미리 아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가련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대적 사탄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이 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가련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탄아, 너는 이 상황이 내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인 줄 모르느냐! 이런 가련한 사람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나의 긍휼을 베풀 수 있겠느냐? 만일 모든 사람이 완전하여 너의 기준에 도달한다면, 내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탄아, 선택된 이 사람이 바로 나의 긍휼을 입을 사람이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해 들어오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은혜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고 그분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장 가련하고 비참한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우리가 회개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신성한 것-하나님의 은혜-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은혜 즉 그 영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인격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25
성경말씀 

 (창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골2:11)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곧 육체의 몸을 벗어 버리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빌3:3)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만나 

 위 신약의 두 구절은 우리에게 할례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할례는 육체를 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받은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육체에 자랑할 만한 것이 없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의미는 다름이 아닌 사람 원래의 힘과 천연적인 능력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육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육체는 죄의 문제에 관련된 것입니다. 육체가 사람으로 범죄하게 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육체가 사람으로 다만 범죄하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8절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육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경우 육체의 목적은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은 육체가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육체가 할례 받은 이후로 우리는 더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지 않게 되며 우리의 의견을 쉽게 내놓지도 않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약하고 무능하며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20
성경말씀  

(창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4~5)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오늘의 만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의 절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과 나무 그늘에 앉아 발을 씻는 것 중 어느 것이 하나님에게 더 즐겁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수준으로 인간의 형태로 그에게 오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오신 이후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장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경배나 두려움이 없고 다만 친근함이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우리를 평범한 방식으로 방문하십니다. 많은 자매들은 그들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 주님이 친밀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오신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친구로서 주님과 함께 달콤한 교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도 역시 이런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직장에서 일을 할 때나 집에서 쉬고 있을 때 주님은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오시어 그들과 함께 달콤한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친밀한 친구처럼 교통하기 위하여 인간의 수준으로 우리를 방문하신 것의 체험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15
성경말씀 

 (창14:18~19)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1~23)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오늘의 만나 

 아브라함은 이미 공과를 배웠기에 그 재물들을 전쟁에서 고생스럽게 얻은 것이니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이라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외에 누구도 그에게 무엇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칭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을 위하여 서 있는 아브라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늘만이 그분의 것이 아니라 땅도 그분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주재이실 뿐 아니라 하늘과 땅,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부른 것은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으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돌라오멜과 다른 왕들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에서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을 위하여 서 있는 한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멜기세덱은 천지의 주재라고 하나님을 칭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라고 부른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땅 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라고 불리워지실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10
성경말씀 

 (창14:12)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오늘의 만나  

아브라함은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롯은 그런 곳으로 가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난 알았었다. 그가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이 그를 억압하신 것 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창세기 14장 14절을 읽어 보십시오. 이 구절은 아 브라함이 진정으로 이기는 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아를 이기고 자신의 느낌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이끌려졌던 것입니다. 롯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그는 롯을 자신의 형제로 여겼습니다. 롯은 결코 이기지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은 메소보타미아에서, 하란에서, 가나안 땅에서도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위하여 좋은 땅을 택하고 소돔으로 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롯이 그러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를 조카로 여겼습니다. 오직 이렇게 교통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에게만 영적인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능력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불평이 없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대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변함없이 그를 도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영적인 전쟁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입장 위에 서서 싸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적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05
성경말씀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 안으로 침례 받았고, 또 모두 한 영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12:22~23) 그럴 뿐만 아니라 몸 가운데서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덜 귀하게 여기는 몸의 지체들에게 더욱 귀한 것을 입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게 되지만, 

 오늘의 만나

 
 우리가 진정으로 몸의 생명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집에는 제한이 있으며 우리가 제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몸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끊임없이 교통할 것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귀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의미를 모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하지 않습니다. 다른 형제들을 귀히 여기거나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몸의 생활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다른 형제들을 귀히 여기고 생명을 만지며 집회 가운데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집회에 올 때 우리는 도움을 받게 되고 생명을 만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집회를 마치고 나올 때 어떤 형제가 와서 좋지 않은 집회였다고 불평할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좋지 않은 것은 집회가 아니라 그 형제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의 입장 위에 있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교통하여 생명 공급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의 육체가 처리되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볼 것이고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교통할 것입니다. 그는 가장 약한 형제나 자매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