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2.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1) - 하나님의 경륜이 뭐예요?

-지방교회들에 소속된 분들은 일반 성도들이 잘 못들어 본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경륜'이란 말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뭡니까?  

한 두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인데, 한국복음서원에서 펴낸 '하나님의 경륜'(위트니스 리)이란 책을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예, 기회가 되면 한번 사서 읽어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래도 거기서 오래 생활하셨으니, 나름대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신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한번 제게 말씀해 주실 수 없을까요?  

그럼, 부족하지만 제가 이해한 하나님의 경륜을 조금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경륜은 위트니스 리나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성경 용어입니다. 디모데 전서 1장 4절을 보면 나옵니다. 거기서 앞 뒤 다 빼고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이란 말만 마음에 담아 두셨으면 합니다. 

  -제가 '경륜'이란 단어를 검색에 쳐 보았더니 일곱명이 하는 자전거 경주 이야기가 나오던데,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거구요. 아, 저 사람은 얼굴에서 경륜(연륜)이 느껴져 라는 식으로 일이나 조직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예, 저도 호기심으로 경륜이라는 단어를 검색에 쳐 본적이 있는데, 진짜 '창원경륜공단' '한국 경륜선수위원회' 이런 단어들이 뜨더라구요.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두 방면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그 단어 원문의 의미를 푸는 방식이구요, 또 하나는 그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쓰인 내용들을 몇 단어로 압축해서 요악하는 식입니다. 우선 '경륜'이란 말은 위 디모데 전서 1장 4절 말고도 엡1:10, 3:2, 9, 골1:25, 고전9:17 등에서도 쓰였어요. 헬라어 원문은 '오이코 노미아'입니다. 이것은 '집'의 의미인 '오이코스'와 '관리'의 의미인 '노모스'의 합성어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집 관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따라 말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주님자신', '분배' '표현' 이 세 단어로 압축해서 정의할 수 있어요. 

  -주님 자신을 분배해요? 아무리 이해하는 마음으로 들으려고 해도 '분배'라는 말은 좀 귀에 거슬리는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실 겁니다. 사실은 저도 처음에 그랬거든요. 그래서 나름대로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답변할 성경 구절들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위 고전 9:17을 보시면 개역성경으로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오이코노미아'인데, 이것을 KJV은 'dispensation' 이라고 번역했어요. 그 단어를 영한 사전에서 찾아보시면 첫 의미가 바로 '분배' 또는 '나누어 줌' 입니다. 

 즉 바울이 위 구절에서 '직'을 맡았다고 했는데, 무슨 직분인가 하면 쉽게 말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생명으로 나누어주는(소개하는) 직분입니다. 그런 직분을 통해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믿고 영접하게 되는 소위 복음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해석이 조금 인위적으로 느껴지시면 좀더 설득력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요한복음 10장 10절 후반절이예요.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양들인 우리 편에서는 생명을 얻고 또 얻는 것이지만, 생명을 주시는 그분 편에서 보면 생명을 주고 또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생명을 분배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분배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지요. 그런데 생명이 무엇인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에 근거해 보면 주님자신이 생명입니다. 

 이처럼 '주님자신' '분배'가 이뤄질 때 나타난 결과가 바로 '표현'입니다. 사람 안에 생명이 처음 분배된 것을 거듭남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계속 분배되는 생명을 그 거듭난 사람들을 영적으로 자라서 성숙하게 합니다. 이런 거듭난 사람들, 생명이 성숙한 사람들은 불신자와는 다른 어떤 예수 믿는 냄새가 납니다. 얼굴에서 그들의 말에서 생각하는 관점에서...그것이 표현입니다. 

 이처럼 생명이신 주님자신이 우리를 통해 안으로부터 충만히 표현되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엡1:23)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계21:11). 

 질문은 짧은데 어찌하다보니 제 답이 너무 길어것 같아 죄송하네요. 

  -예, 나름대로 성경을 토대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계시구나 하는 인상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내용들이 다 이해가 된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시간을 가지고 다시 한번 찬찬히 검토해 보고 추가 질문이 있으면 나중에 또 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참고로 시간이 나시면 엡1:4-5, 3:2-6, 골1:24-29 등도 함께 연구해 보시면 제가 오늘 설명드린 내용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좋은 시간 가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럼 나중에 또 뵙지요. 안녕히 가세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9. 05:00


재평가 된 지방교회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는 최근 “재평가 된 지방교회”(DCP Korea 출판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한국교회에서 지방교회가 오해와 편견으로 ‘이단 정죄’를 받게 된 배경과 지방교회가 어떻게 반론을 펴 왔는가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지방교회(local Churches)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미국에서 발간된 두 권의 책이 번역 소개되면서 비롯됐다. 하나는 영적사이비연구소(SCP) 닐 더디가 발간한 ‘하나님-사람(The God-Men)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투트(CRI)가 발간한 ‘신흥이단들’(The New Cults)이다. 

1982년 현대종교에서 ‘신흥이단들’을 상당부분 원문과 다르게 번역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 워치만 니 계열의 지방교회는 이단인가?”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전도출판사가 ‘하나님-사람’을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그러나 “The God-Men”은 미국에서 지방교회를 왜곡하고 폄훼했다는 이유로 법적 소송에 의해 출판금지되었고, “The New Cults”를 낸 CRI는 “우리가 틀렸었다”며, 지방교회에 대해 재평가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이 두권의 책을 진실인양 믿고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했음에도, 이들 책이 왜곡되었음이 확인된 이후에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는 않는다고 이 책은 항변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한국에서는 한 번 이단으로 정죄되면, 영원한 이단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번 이단의 누명을 쓰게 되면 벗기가 아주 어렵다는 뜻이다. 일단 이단감별사들의 표적이 되어 교계신문에 오르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인격적인 살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며, 지방교회도 이런 식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에 ‘재평가 된 지방교회’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출판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신국판 320쪽/값 12,000원/문의 010-3515-3927>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8. 05:00

미국 풀러신학교 지방교회를 ‘정통’으로 인정


미국 풀러신학교 지방교회를 ‘정통’으로 인정


“지방교회의 관심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이기는 자가 되게 하는데 있다”


한국교회에 소위 지방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까? 대부분은 이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커녕 지방교회란 말조차 생소할 것이다. 인터넷상의 부정적인 자료에 의해 그려진 지방교회 사람들은 자신들만 잘 믿는다며 다른 기독교인들을 정죄하고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다. 혹자는 지방교회 사람들은 이상은 높은데 실제 생활은 그에 못 미친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방교회 성도들에 대한 외부인들의 이러한 평가는 전혀 근거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되짚어 본다면 현실 교회에서 어떤 비판의 여지도 없이 완벽한 교단이나 단체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 약함이 있다. 그런 점에서 특정 단체가 지향하는 핵심신앙이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3절)에 부합한지는 냉철히 따지되, 성경해석상의 소소한 차이나 약함과 허물은 서로 용납하고 사랑으로 포용하는 아량이 필요하다.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길이다(엡4:3). 

이런 차원에서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교회가 과연 무엇에 신앙의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본인들에게 직접 들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복음서원에서 출판된 각종 도서나 현 지방교회 인도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 ‘생명’ ‘그리스도의 몸’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이들의 주된 관심사의 주제다. 

  1. 하나님의 경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책자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워치만 니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표현함). 지방교회측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인, ‘내가 마케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다’(딤전1:3-4)라는 말씀을 자신들에게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창세전에 선택되고 예정된 우리가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엡1:4-5). 성경 말씀 그대로이니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긴 어려울 것 같다. 

  2. 생명 
‘생명의 인식’ ‘생명의 체험’ ‘생명의 성장’ ‘이기는 생명’ ‘생명주는 영’ 등 지방교회 사람들은 생명이란 단어를 유달리 많이 사용한다. 이들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는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이 오신 것은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물론 그분은 우리 죄사함을 위해 죽으셨지만 그 죄 사함조차도 결국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절차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 25),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 등에 근거하여 <주님 자신이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몸 
지방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지체들 간의 조화와 기능발휘가 현재의 교회생활 중에 실현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고 직분자들과 성도들의 각양 봉사는 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적인 출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엡4:12,16). 실천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4. 이기는 자가 됨 
성도는 누구나 ‘이기는 자’여야 한다. ‘이기는 자’라는 말은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 각각의 말미에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 모두가 비중있게 다루었던 주제이다. 이들이 말하는 이기는 자란 쉽게 말해 거듭난 후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영적생명이 성숙한 자를 말한다. 계시록 3장 12절의 필라델피아 교회의 예에서 보듯이 이기는 자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와 달리 특별한 상급이 주어진다. 따라서 모두가 이기는 자일 수 없고 추구하여 그 표준에 이른 자만이 이기는 자라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되려면 일상생활에서 자기 유익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하고 매사에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빌 1:21). 

소위 ‘지방교회 교인이 되어야만 이기는 자가 된다’고 가르친다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지방교회 교인이 되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다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소위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생명과 그리스도의 몸을 관심하고, 이기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행상으로는 만인 제사장 제도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런 사람들을 성경의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성경의 중점을 붙잡고 그것을 성취하려는 것일 수 있다. 

혹자는 위와 같은 진리와 실행은 다 좋은데 이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지나치게 따르는게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다. 즉 뛰어난 두 성경교사를 존경해서 그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와 계시를 따르는 것이지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고난당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당신은 모든 것들에서 얼굴을 돌려야 한다. 여러분의 방 친구를 보지 말라. 장로들을 보지 말라. 나이든 자매들을 보지 말라. 나를 보지 말라. 예수를 바라보라... 예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말라. 우리는 주님을 신뢰한다. 우리는 그밖에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온전케 하는 이시므로, 우리의 믿음은 바로 예수시다.”(위트니스 리, 고봉메시지 제11권 - 로마서 결정연구). 

그동안 한국 교계는 지방교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거나 일부 이단 감별사들이 특별한 의도를 전제로 연구한 자료에 의존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작 그 장본인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는 풀러신학교측에서 지난 2년여 동안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신앙고백이 주요 신조와 일치하는 정통이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제가 가능한 주 안의 형제들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지방교회를 이단시하고 형제로 여기려 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 교계 내에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특정 교단 교리가 아닌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특정교회가 믿는 진리와 실행에 관해 재평가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한국의 지방교회 인도자들이 전과 달리 다른 단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4 , 교회연합신문 660호 다운로드 하단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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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 05:00
[지방교회] 이스라엘 탐방(1) - 소개의 말

* [지방 교회](local Church) 이스라엘 탐방팀(한국35명, 미국9명)은 일반적인 성지순례자나 관광객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오는 60여 군데의 지명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자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하였다. 탐방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들은 출국하기 전에 2박 3일동안 방문지에 대하여 미리 철저하게 스타디하였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더 많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15박 16일동안(2012/10/13-28) 이스라엘을 탐방하기 위하여 10월 13일(토) 대한항공 KE957 편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출국하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서 전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방교회] 이스라엘 탐방(2) -세겜 

(창 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창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7:12-14)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수 24: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수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삿 9: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삿 21: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왕상 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메시지 3> 

아브라함은 세겜에 이르렀다.'세겜'은 원문에서 어깨라는 뜻이다. 어깨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힘있는 곳이다. 세겜 땅의 첫 번째 특징은 능력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적인 능력일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임을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주님의 생명을 얻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수 있다. 이는 그의 속이 이미 만족되었기 때문이다.속이 만족한 사람과 생명을 얻은 사람이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세겜에'모레상수리나무'가있다.'모레'는 원문에서 '교사' 혹은 '가르침'이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지식의 방면이다.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세겜땅에 있다는것은 지식이 능력으로부터 온다는 뜻이요 지식은 능력의 결과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서 참된 영적인 지식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얻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참된 영적지식이 없을 것이다.그런 지식은 사람에게 영적인 어떤 것을 줄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이 땅에서의 그분의 간증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그릇을 사용하신다면, 하나님은 그 그릇에게 어떤 교리를 들려주시는 것이아니라 먼저 그를 만족하게 하고 생명의 능력을 준 다음 참된 지식을 갖게 하신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것이다. 하나는 교리이고 하나는 생명이다. 하나는 밖에서 들은 것이고 하나는 속에서 본 바이다. 하나는 잊어버릴가능성이 있지만 하나는 항상 속에서 기억한다. 모든 참된 지식은 생명의 능력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곧 우리의 능력이다.우리안에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남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내적인 능력이자 내적인 지식이다. 

<창세기 L/S 메시지 76> 

야곱은 라반의 손으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는 또한 에서와의 문제로부터 구출되었으며 숙곳에 이르렀고 거기서 자신을 위한 집과 가축을 위한 우릿간을 지었다. 나는 거기서 머문 야곱에게 평강이 없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세겜으로 올라왔으며 그의 열조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살기 위해 제단의 간증이 있는 합당한 장막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겜에서의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표준에 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땅에서의 그분의 집인 벧엘을 갖는 것이다. 

 야곱과같이 오늘날 많은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세겜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갈망은 만족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어떤 불행한 일들이 자꾸 자꾸 그들에게 발생하여 그들의 마음으로하여금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고 제단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준비 시킨다. 나는 내가 야곱과같은 일을 해온 것을 간증할 수있다. 나는 단순하게 나의 맹세와 헌신을 잊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특히 어려움과 시련의 시간 동안에, 주님께 헌신했음을 믿는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맹세를 이행했는가? 아마 우리 중 아무도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볼 때 우리 모두가 야곱들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역사는 사실상 우리의 자서전이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맹세하더라도, 우리의 맹세를 이행하고 우리의 헌신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한명의 딸, 열 한명의 아들, 세겜, 하몰,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일들의 희생이 요구될지 모른다 주의 회복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세겜을 통과하여 벧엘로 가기를 원하시고 단체적인 교회생활로 올라가기 위하여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을 통과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세겜에서 좋다할지라도 우리에게 만족할만한 평강과 안정이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겜을 떠나 이땅에서 그분의 집안에서 합당한 교회생활을 갖도록 벧엘로 올라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취하게 한다.  

A.아브라함(Abraham)

세겜(Shechem)은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땅에 대한 약속을 받으면서 구약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세겜땅모레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가나안땅을 그의 후손들에게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창12:6-7).  

B.야곱(Jacob) 

1.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경계로 인해 밧단아람 땅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이때 '숙곳(Succoth)'과 '와디 파라(Wadi Parah)'를 통해 세겜에 도착하였다. 

 2. 야곱은 잠시 세겜 근처에 머무르면서 그 지방의 하위 방백인 하몰의 아들(세겜)로부터 은 일백 개로 땅을 사서 '엘-엘로-헤이스라엘(El-Elohe-Israel,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명하고 단을 쌓았다(창 33:18-20)

3. 야곱 일가가 세겜에 머무르는 동안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창 34:2), 야곱의 두 아들(시므온과 레위)은 하몰과 세겜을 포함한 모든 남자를 살육하고 그 성을 약탈하였다(창 34:25). 이후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은 세겜을 떠나 헤브론 땅의 마므레(Mamre)에 머물렀다. 

4. 야곱의 가족들이 이곳에 묻혔으며(행 7:14-16),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요셉의 뼈도 이곳에 묻혔다(수 24:32).  

C.여호수아(Joshua)

1. 여호수아는 모세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장소로 선택한 세겜으로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소집하여 백성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세우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수 8:30-35). 

 2.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 경계에 인접한 세겜은(수 17:7)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지만, 고핫 자손에게 재분배되었고, 도피성이 세워졌다(수 20:7, 21:21)(사진2. 레위 지파의 도시와 도피성 참조). 

3. 여호수아는 죽기 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을 세겜으로 불러모아 그들과 더불어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는 언약을 세운 후 그 증거로 큰 돌을 세워 증거를 삼았다(수 24:24). 세겜에서의 의식은 시내 산에서 맺어진 언약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후 세겜은 일정 기간 동안 이스라엘 열두 지파 동맹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D.사사시대

기드온이 죽은 이후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으로 등극했다(삿9:1-6).아비멜렉은 세겜에서 3년간 통치하였으나 세겜백성들이 반기를 들자 이 성읍을 파괴해 버렸다(수9:45). 

E.분열왕국시대

40년 동안의 솔로몬의 치세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르호보암은 왕권 확인식을 하려고 세겜으로 향했다(왕상12:1,대하10:1). 그러나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처신으로 인해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북쪽지파들은르호보암으로부터 돌아섰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세겜을 북이스라엘왕국의 첫번째 수도로 정하였다(왕상12:2025).그러나 세겜은 낮은 분지라는 치명적인 약점때문에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없었고, 북이스라엘왕국은 수도를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디르사(타루자)로 옮겼다. 디르사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바아사왕(왕상15:21), 엘라왕(왕상16:8), 시므리왕(왕상16:11)을 거쳐 오므리왕 6년까지 수도였다. 오므리왕은 전쟁시 방어하기에 유리했던 사마리아 성으로 천도하였다(왕상16:23-24) 

F.이스라엘왕국의 멸망과 포로기

B.C.722년 앗수르왕 사르곤2세는 북이스라엘왕국을 점령하였고, 이스라엘민족들을 메소포타미아로 붙잡혀 가면서 앗수르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도록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이스라엘민족과 가나안족, 그리고 앗수르족의 혼혈이 생기게되었다. 이 혼혈들은 사마리아의 지명을 따라 사마리아인(Samarit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 세겜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기때문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왕국의 잔류민들은 앗수르의 민족 혼합정책, 피하여 세겜으로 모여들었고, 그리심산(Mt.Gerizim)에 성소를 세우고북이스라엘사람만의 전통을 지켜왔다. 이후 남유다왕국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갔다. 

 G.포로 해방과 귀환

그러나 바사(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하고, 고레스왕에 의해 해방된이스라엘민족은 스룹바벨의 인도아래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을 도와주려 하였으나, 이스라엘민족으로부터 거절 당하자 성전재건을 방해했다(스4장). 이들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혼합된 혈통과 종교 활동으로 끝내 정통 유대인들과는 분리되었다. 

H.신약시대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던수가(Sychar)성이 구약시대의 세겜이다(요4:3-42). 

I. 위치 및 지형 Geography

이스라엘_현대 세겜(나불루스)의 전경

A.지명-고대의 세겜(텔발라타,TelBalata)은 현재'나블루스(Nablus)'라 불리는 곳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나블루스는 새로운 도시, 즉 헬라어 네아폴리스(Neapolis)에서 기인한 이름으로 AD72년에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때 건설한 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은 세겜이 하몰의 아들 세겜(창33:18-19)으로부터 유래한 명칭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깨'라는 뜻을 지닌 세겜이란 이름은 평지보다 조금 높은 곳인 에발산 기슭쪽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B.위치-세겜은 중앙산악지대, 구체적으로 에브라임산지(사마리아지역)에 위치하고있다.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7km 떨어진 지점에 있다.세겜은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하는데, 남북과 동서로 뻗은 주요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세겜은 물공급이 용이하고 동쪽으로 쭉 뻗은 비옥한 평야, 그리고 여러 곳으로 연결된 주요도로가 통과하는 등의 여러 요건들이 합쳐진 지리적 요충지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로 인식되어 왔다. 단과 브엘세바사이의 직선 거리는 대략 230km 정도인데 그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세겜이다. 

 C.기후-세겜은 연평균 강우량이 적당하고, 물이 많은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보리나 밀, 채소가 재배되었으며, 평지를 둘러싼 산비탈에는 포도,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가 경작되었고,목축에 좋은 풀밭도 많이 있었다(창37:12-13).헤브론에 살던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세겜 근처로 보내 양을 치게 했다는 것만 보아도 세겜이 목축에 좋은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창37:12-15).


이스라엘_성지순례_세겜의_위치

D.교통-세겜은 지정학적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통과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교통의 중심지였다. 남쪽으로는 산악지방으로 관통하는남북간도로(족장의길),곧 성경에 언급된 '큰길(삿21:19)'이 나 있어 실로, 벧엘,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었다. 세겜은 동쪽으로는 동부 고원지대(트랜스요르단)를 지나는 왕의대로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사마리아를 지나 도단에이르는 길과 이스라엘 해안지대(샤론평야)로 내려가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연결하는 해안길(ViaMaris)에 닿는 길이 있다. 특히 서에서 동으로 연결된 길(지중해해안에서요단동편)은 세겜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왔으며 강력한도시를 이루었고, 이스라엘 모임의 장소로 성경에 자주 등장하였다. 

 E.역사-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겜이 알렉산더시대(B.C.322년경)에사마리아인들의 중요한 도시였고, B.C.107년 하스모니안 왕가의 군주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요한 히르카누스(John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다. B.C.63년에 로마장군 폼페이우스는 사마리아를 주(州)로 독립시켜 세겜을 그 주도(州都)로 삼았다. 제1차 유대반란시기(A.D. 67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 정상에 군사적 보루를 쌓았다. A.D.72년경 티투스(Titus)장군은 세겜땅에 신설도시를 세워 네아폴리스라고 불렀다. A.D.16세기경 나블루스는 팔레스타인 4대도시(예루살렘,가자,제파트,나블루스)가운데 하나였다. 1948년부터 요르단에 속했던 나블루스는 1967년(제3차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Ⅱ. 유적지 및 관광지 Historic and Tourist Sites

이스라엘_성지순례_텔 발라타(고대 세겜) 전경

A.텔발라타(Tel Balata) 

1. 고대 세겜(텔 발라타) - 성경에 등장하는 세겜은 현재의 텔 발라타이다. 텔 발라타는 현대 도시인 나블루스(세겜)의 동쪽에 인접해 있으며, 남서쪽으로 그리심산을 북쪽으로 에발산을 올려다 보는 계곡인 와디 파라(Wadi Farah)에 솟아 있는 낮은 언덕이다. 아브라함이 동쪽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 세겜에 왔을 때, 이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것으로 생각되는 성문이 텔 발라타의 북쪽 부분과 동쪽 부분에 조금씩 남아 있다. 

2. 텔 발라타에서 발견된 신전- 고대의 세겜(텔발라타, 나블루스 인근)은 1913년과 1934년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발굴팀에 의해 최초로 발굴되었다. 요새화된 신전은 1926년 독일 학자 셀린(Ernst Sellin)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발굴팀은 그 당시의 최신의 방법을 활용하여 적어도 네 개의 정착층(가나안 시대, 이스라엘 시대, 유대/사마리아 시대, 헬라 시대)을 확인하였다. 또한 1956년과 1973년에 라이트(G. Ernest Wright)의 지휘 하에 미국 드루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의 공동작업으로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그들은 단단한 기반 위에 진흙 벽돌과 목재로 지은 다층식 신전이 지어졌음을 추정하였다. 이 신전은 사사기 9장에 언급되는 신당인 것으로 추측된다. 입구 좌우로 두 개의 높은 탑이 설치되었으며, 신전 위층 복도는 탑의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다(사진5. 세겜 신전 상상도 참조). 입구 전방으로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제단 앞으로는 석비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명기 27장 2절에 나타난 석회가 발라진 큰 돌이 이 석비인 것으로 추측된다(사진6. 여호수아의 석비 참조). 아비멜렉은 세겜 땅을 차지한 이후 이 신전을 곡식 창고로 사용하였다 


여호수아의 비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수24:27)_지방교회

 여호수아는 죽기 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을 세겜으로 불러모아 그들과 더불어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는 언약을 세운 후 그 증거로 큰 돌을 세워 증거를 삼았다(수 24:27). 세겜에서의 의식은 시내 산에서 맺어진 언약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_성지순례 여호수아의 증거 돌 앞
이스라엘_성지순례
여호수아의 증거 돌 앞에서 찰칵!(2012.10.15)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1. 05:00


왜 나는 지방교회들에 대한 비판을 그쳤나


더 이상 위협이 없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임

최근 지방 교회 운동에 대해 최초로 비판을 가해 이단 논쟁을 촉발했던 미국의 CRI가 지방 교회를 재평가해 ‘정통’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기관의 소장이 한기총 대표회장에게 지방 교회에 대한 재평가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지방 교회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지방 교회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CRI가 발행한 지방 교회에 대한 연구 자료를 저작권자의 동의를 받아 연재한다. 이 내용에 대한 건전하고 발전적인 반론이 제기될 경우 그 또한 가감없이 게재할 방침이다. -편집자 주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

나와 작고한 나의 남편인 밥 파산티노(Bob Passantino)는 1975년에 미국에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을 출판물을 통하여 처음으로 비판했다.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 (CARIS, 1975)은 1962년부터 미국에 존재해 왔고 공개적으로 악평을 받아 온 운동에 대해 우리(그리고 우리의 조직인 CARIS) 와 CRI 설립자인 월터 마틴(Walter Martin)이 분석이 필요하다고 믿어서 조사한 것이다. 5년에 걸쳐서 다른 출판물들이 이어졌다. 즉 내 동생인 칼 바이즈너(E. Calvin(Cal) Beisner)와 나의 남편 밥(Bob) 그리고 내가 공동 저술한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CRI, 1978), 월터 마틴의 오디오 강연, 칼 바이즈너와 내가 써서 월터 마틴의 책인 <신흥 이단들>(비젼 하우스, 1980)부록에 첨부한 것이 그것들이다. CRI 연구원인 엘리옷 밀러(Elliot Miller) 역시 조사, 편집, CRI 의 입장을 결정하는 것을 돕는 토론에 참여했다. 그후 1980년까지 CRI는 단지 짤막한 요약 정보와 몇 번의 최근 뉴스 정도를 출판했다. CARIS나 밥과 내가 나중에 만든 단체인 ‘행동하는 답변들’(AIA)은 그 주제에 대하여 그 외에 어떤 것도 출판한 적이 없다.

비록 여러 단체들이 전에 그리고 그 이래로 비평글들을 출판했지만, CARIS와 CRI가 부정적이고 공개적인 폭로를 위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일부 출판물들은 신학적인 평가에만 제한되지 않았고, 일부는 선동적이고 인격을 손상시켰음으로 지방교회들(LC)이 법적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도록 만들었다.

지방교회들이 두 번의 법적인 소송에서 우세한 이후, 1999년에 존 앵커버그(John Ankerberg)와 존 웰던(John Weldon)이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ECNR)>을 출판하기 전까지는 비평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무렵 쯤, 월터 마틴과 밥 파산티노가 작고했고(1989년과 2003년), 칼빈 바이즈너는 이단 비평계 현장을 떠나 공부를 더 한 후 신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1992-2007), 행크 해나그래프(Hank Hanegraaff)는 CRI의 대표에 취임했고(1989), 엘리옷 밀러는 CRI에 CRI 저널의 편집장으로 머물렀고, 나는 계속 AIA 의 대표로 있었다. ECNR의 출판은 행크와 엘리옷과 나를 논쟁에 복귀하도록 이끌었다. 왜냐하면 ECNR의 사실에 대한 그릇된 진술과 명예훼손적인 모습(nature)은 지방교회들, 특별히 종교의 자유와 투옥을 포함한 그 외의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중국 본토 내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가혹하고 부당한 해악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엘리옷과 나의 초기 경력 가운데 과거 신학적인 조사가 해 왔던 것과 CRI대표인 행크를 위한 역사적 문서는 이제 그러한 초기 작업들을 재평가하고 우리의 성경적인 위치가 지방교회들을 변호하고자 한 것인지, 또는 단지 우리의 질투심 있고 무책임한 동료들 (앵커버그와 웰던)을 조용히 바로잡으려 한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급박하게 재촉했다. 지방교회들이 ECNR을 중재해 달라고 우리에게 접근해 왔을 때, 우리는 어떤 필요한 구속이나 화해 또는 정정을 이끌어 내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갈망했었다. 우리는 정확한 분석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상호 접촉, 긍휼어린 사랑 그리고 문맥을 감안한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함을 배웠다. 밥(Bob)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미국에서 이 운동에 대하여 처음으로 출판한 사람들로서 우리가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고 과연 분석이 옳았었는지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그는 확고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이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죽었지만, 나는 그가 지금 행크와 엘리옷과 내가 지방교회들이 본질적인 교리에 있어서 정통이고, ECNR에 의해 명예를 훼손당하고, 비판을 받게 했고 특히 중국에서 지방교회들의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자유를 박탈당하도록 우리가 해악을 끼친 것을 확증하는 일에 기꺼이 함께 했을 것을 안다.

엘리옷의 책임은 본질적인 지방교회 신학을 재검토하고 혐의를 벗겨주는 것이다. 나의 책임은 왜 우리가 처음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요약하는 것과 나의 동료 이단 변증가들에게 우리가 했던 것처럼 재조사와 보다 많은 증거들을 포함하거나 적어도 원래의 잘못된 조사에 근거하여 지방교회들을 정죄하는 일을 삼가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LC 가르침을 접했을 때, 우리는 문제가 우리 쪽의 오해보다는 그들 쪽의 이단성 또는 혼동에서 생겨났다고 가정했었다. 우리와 월터 마틴은 늘 지방교회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기를 삼가했다. 우리는 “정도를 벗어난”(aberrant)이라는 용어를 선호했고, 비록 우리가 본질적인 교리들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 중 일부가 좋게 말하면 모순되고 나쁘게 말하면 이단적(heretical) 이라는 신념이 있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과 자매들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우리는 리의 단호하게 표현하는 자극적인 습관, 즉 언뜻 보면 모순적인 문장인데 그후 그의 다른 본문 속에서 그것들을 설명하여 이단과는 구별짓고, 또한 가끔씩은 자극적인 문장들에서 멀리 벗어나는 습관을 오해했었다. 리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학생들에게 주의를 집중하고 추정하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서 이것은 혼동 그리고/ 또는 이단이라는 징후였다.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직접적인 상호 접촉과 연계된 보다 방대한 양의 자료들에 대한 우리의 최근 조사는 그러한 가르침들이 모순되지도 않고 이단적이지도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 특히 외부인들에게 혼동스러울 수 있음을 확신한다. 

둘째, 우리가 1970년대에 연구했던 자료는 다음 세 가지 주된 이유들로 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부족했었다. (1) 그 당시는 미국에서 (영문) 출판물이 많지 않았었다. (2) 상당 부분은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었는데, 특별히 지방교회 성도들이 우리가 단지 비판하기 위하여 인쇄된 어떤 자료를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꺼려 하게 되었을 때 그러했다. (3) 인쇄물로서 사용가능했던 것의 대부분은 방어용도 아니고 변증 글도 아니었다. 대신에 혼동을 명확히 하고, 이단적이라는 오해를 방지하려는 경험있는 형제들의 인도아래 성도들을 위한 가르침의 보조 도구 수단이었다. 더욱 깊은 결함은 자료들 자체보다도 오히려 우리의 경력들 중에 그 초기 당시 우리의 학문적인 깊이와 넓이에 있었다. 리의 유산은 동방이며 서방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합리적이고 교훈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학파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단지 문화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인 오류라고 의심하게 했다. 역설 그리고/또는 의미가 있는 명확히 함의 뒤로 미룸-부조리, 앞뒤가 맞지 않음, 또는 단지 상대적임 때문에 혼동될 수 없는-은 동양적인 사고와 초기 시대의 서구의 저술 속에서는 흔한 것인데, 현대 미국 저술에서는 실질적으로 잊어져 왔다.

셋째, 니와 리의 신학적인 접근은 서구 기독교계, 특히 개신교주의, 보다 특별하게는 복음주의 진영들, 각별하게는 이단 변증분야의 조직신학과는 달랐다. 지방교회 신학은 보다 실제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신학적이고 이성적인 페러다임을 묘사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특히 핍박과 반대아래서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한다. 이런 면에서 지방교회 신학은 지방교회 교사들은 그들이 동방교회로부터 배웠거나 그들의 신학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y)와 유사하다. 이 패러다임이 단지 다른 것만이 아니라 틀린 것으로 나타났었다. 

넷째, 우리는 지방교회들의 가르침들을 그들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뿌리들과 분리시킴으로 몇 가지 그들의 독특한 경험들을 이단성의 확증들이라고 잘못 이해했다. 지방교회들은 중국에서 유래되었고, 미국처럼 서구 유럽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동양적인 사고방식, 아시안의 문화적인 관습들, 그리고 오랜 뿌리들은 지방교회들 안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인의 삶(Christianity)에 독특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한 번도 노예가 되거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미국 복음주의자들, 더 구체적으로 “유럽계통” 기독교계는 사실상 분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예됨과 침략을 경험해 온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적으로 아편전쟁과, 철도 노동자로 부려먹고, 미국에게 “속여서 싫은 일을 하게 시킴” (“Shanghaied”)을 당하게 한 것과 연관된 유럽계통 기독교계는 최선으로는 호소력이 없고 최악으로는 위협적이다. 중국인 그리스도인이 믿는 이들의 모임에 있어서 그 지방(“로마에 있는 교화”) 이외에 다른 아름이나 구별이 없는 신약의 실행을 볼 때 이러한 관점은 침략자들인 로마 카톨릭교 또는 shanghaiers 의 개신교주의에 대한 교정책 이상인 것이다. 우리가 적절히 지방교회의 가르침을 그들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관계 안으로 둘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교회이다 “ 라는 배타주의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대신에 “모든 참된 믿는자들과 같이 우리는 단지 참된 교회이다”라는 비배타주의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방교회들과 대다수 미국교회들의 차이들은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신약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차이들과 아주 유사하다. 양쪽 집단들은 참된 믿는 자들이다; 그것은 2 세기의 지식을 가진 이단자들과 같은 시대의 정통의 참된 믿는 이들 간의 차이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대부분이 단지 지방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미국인이나 유럽인 LC 믿는자들에게는 동일하게 여겨진다.)

다섯째, 우리와 지방교회들 모두가 성숙되지 못했고, 경험이 부족했고, 때로는 냉담했기 때문에 지방교회들은 잘못 판단해 왔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단지 복음적인 미국 개신교주의 만을 경험했고; 우리는 주로 조직신학을 공부했고; 우리는 추론적, 논리적, 증거상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변증론법을 전개해 왔다; 우리는 좀 더 주의 깊게 의미를 파악하기보다는 (상대론인지 주관론인지 혼동되지는 않는) 종종 흑백 논리,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로 판단해 왔다. 예를 들어 그들의 자료들을 읽는 것에 대해 부적절하게 개별적 대화를 무시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서들에서 지방교회들이 오직 하나뿐인 참된 교회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것들을 배타적인 글로 이해했고, 그들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미를 볼 때, “장로교” 와 같은 구별되는 이름에 의해 서술되지 않는 오직 하나의 교회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이 모호하게 여겨졌다. 만약 우리가 모호하게 추정하지 않고 개별적인 대화에 참여 했었더라면, 우리는 지방교회들의 행동이 지난 5년 동안에 걸쳐 발견했듯이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의 초기에 양쪽이 모두 쉽게 노여워했고, 화해하는데 더디었고, 더 빨리 기만으로 결론을 내었고, 공개하는 것을 격려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의 신학적인 검토에서 엘리옷에 의해 제기된 이러한 것들과 다른 이유들은 우리가 지방교회들은 어떻게 잘못 판단해 왔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는 나의 동료들에게 호소하는 결정에 이르렀고, 특별히 나의 동생 칼빈 바이즈너, 월터 마틴과 밥 파산티노는 작고했다. 행크 해나그래프는 나의 초기 연구 후에 CRI로 돌아왔다. 공개서한에서 “증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1981년 전에 우리의 잘못된 판단을 가져오는데 처음으로 사용한 증거와 같다. 엘리옷과 나는 그 증거를 재조사 해 왔다. 더욱 중요하게 우리는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상호 접촉을 가졌고, 지금은 그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내용 면에서 더욱 이해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점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량의 자료들을 검토했고 상당히 많은 지방교회 성도들과 인터뷰해 왔다. 칼(Cal)은 원래 자료들을 재조사 해왔다. 그는 지방교회 일원들 그리고 인도자들과 직접적인 상호 접촉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칼은 인도그룹이 그들과 엘리옷과 내가 이단이 아니라고 믿고 부인할 필요가 없는 글을 번복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자료들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재조사를 해낼 수 있는 3명의 현존하는 변증자들 중에 두 사람은 그렇게 해왔고, 우리가 틀렸고 지방교회들의 가르침들은 이단이 아니며, 그들은 유사종교 또는 신흥종교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세째는 우리의 노력부족으로 해 내지 못해 왔고, 칼은 여전히 지방교회들의 가르침은 이단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진실성을 보여주는 결론은 어떤 것인가? 엘리옷과 나는 칼이 자신의 원래 입장을 고수하는 것보다 우리의 번복이 더 타당한 것이라고 여겨왔다.

나는 초기에 이러한 주제를 재조사하는 것을 꺼려했었다. 첫째, 나는 다른 필요들에 몰두해 왔었다. 둘째, 나는 나의 변증법적 연구에 거의 틀린 적이 없었고, 재조사를 위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를 거의 정당화할 수 없었다. 세째, 그것은 참된 정통성이라기보다는 지방교회의 정통신앙으로 보이도록 속이는 것으로 간주하기가 쉬웠다. 네째 지방교회들이 일반적인 복음적 미국 개신교 주의와 구별되게 나타났다는 것과 그 가르침이 이단이라는 암시(확실성은 아니지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다섯째, 나는 한 이단 단체 (the Worldwide Church of God, 전세계적 하나님의 교회)를 보아 왔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이단교리를 부인하고, 정통교리를 받아들였으며, 잘못한 형제에게 사과하는 것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여섯째,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일곱째, 이단은 적어도 잘못 이름 지워진 정통 단체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편이다.

내가 새로운 조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한 요인은 나의 동생 칼과 공유하는 한 가지 점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이 우리 자신의 연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것에 기초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만 한다. 공개서한의 서명자들은 많은 변증자들이며 밥과 월터와 엘리옷과 칼과 내가 1970년대에 한 연구보다 더 광범위한 연구를 하지는 못했다. 우리 중에 3명은 현존하고, 그 중 2명은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에 잘못했다고 했었더라면 적어도 몇몇 서명자들은 그들이 우리가 지금 한 것 만큼의 좋은 연구나 우리가 예전에 했던 보다 나은 연구를 수행할 시간과 역량이 없었을지라도, 지방교회들을 계속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꺼려했었음에 분명하다.

이전의 나의 연구(밥과 월터와 엘리옷과 칼에 의해 공동연구하고 발전된)는 나의 결론이 틀렸었다고 평가하기엔 불충분 했다. 나의 현재 연구(행크와 엘리옷에 의해 공동 연구되고 발전된)는 예전 것보다 꽤 깊고 광범위하며, 예전의 나의 결론을 번복할 정도로 충분하다. 공개서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명했는지, 얼마나 여러 번 동일한 부적절한 출처가 인용되었는 지와 상관없이, 저널의 논쟁에서 지지된 결론이 진실의 장에서 더 지배적이다. 지방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의 본질을 믿고 있고, 이단 안에서 믿는 자들로서 대립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자매들로서 그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다른 변증자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같은 깊이의 문제에 재차 참여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비판을 철회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형제를 비난하는 죄의식이나 이단이라고 받아들이는 잘못된 위험에 놓여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다시 다루지 않아야만 하는 영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레첸 파산티노 코번은

‘행동하는 답변들’(AIA)( http:// www.answers.org)의 설립자 겸 이사이고, 다작하는 저술가이며, 신학교 조교수이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어바인) 비교문학 학사와 믿음 복음주의 루터교단 신학교(Faith Evangelical Lutheran Seminary) (Tacoma, WA) 신학 석사를 가지고 있다.



류재광 기자 입력 : 2010.06.28 06:00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09355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25. 22:01


5. 영원한 심판에 관하여

이단의 다섯 번째 항목은 심판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인격을 믿고 주 예수님의 역사도 믿으며, 사람에게 죄가 있음을 믿고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도 믿지만, 영원한 심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에 관한 두 종류의 가르침을 가지고 영원한 심판을 뒤집는다. 첫 번째 그들은 사람의 죽음은 바로 잠을 자는 것이며, 신체가 잠을 잘 뿐 아니라 영혼도 잠을 잔다고 주장한다. 신체는 더 이상 감각이 없으며 영혼도 감각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주님이 부활하실 때 깨어나게 되며, 오늘의 죽음은 다만 일단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데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후에도 감각이 있다고 하셨다. 주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 이야기에서 나사로와 부자는 죽은 후에 음부에 있으며, 그들은 분명히 감각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죄의 결과를 경감시키려는 것으로, 이것은 이단이다. 두 번째 어떤 사람들은 두 번째의 죽음이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10:28). 또한 불 못에서는 벌레도 죽지 않으며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셨다(9:48). 불신자들은 영원히 불 못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사람이 두 번째 죽음을 취소하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6. 기적과 신유의 일에 관하여

이단의 여섯 번째 항목은 기적과 신유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기적과 신유는 대부분 병의 치료를 위한 것이다. 이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표적들이다. 어떤 이단들은 많은 이적과 기사들로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주님은 그분이 다시 오실 날이 이르기 전에 많은 기적들이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24:24). 어떤 이단들은 병을 고침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믿지 않게 만든다. 성경에서 참된 기적과 초자연적인 일들은 반드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어야 한다. 누가 1717절은 그러자 예수님께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셨다. 즉 한 사람만 구원받고 아홉 명은 병을 고쳤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병 고침과 기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것이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어떤 병은 자연적인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어떤 병은 사단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며, 어떤 병은 죄로 인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인한 병 고침과 기적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믿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기괴한 일들에 대해서 분별의 영을 가져야 한다. 악한 자의 역사는 오히려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7. 예언에 관하여

이단의 일곱째 항목은 예언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는다.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짜에 대하여, 주님은 아무도 알지 못하며 천사도 아들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다시 오시는 날짜에 관한 기본 원칙이다. 어떤 사람은 1874년에 주님이 이미 왔다고 믿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인 러셀(Russell)이 전한 것이며, 또한 그의 후계자인 요셉 루더포드(Joseph Rutherford)가 전한 교리이다. 그들은 지금이 이미 천년왕국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기, 전화, 기차 등이 발명된 것이라고 말한다. 다니엘서의 칠십 이레를 연()으로 계산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경우는 하루는 바로 하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한다면, 천년왕국은 삼십육만 년이나 된다. 이 일에 대해 변론하는 것은 사람을 번거롭게 하는 일밖에 안 되므로 우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누구든지 하루를 연()으로 계산하여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날을 계산하는 것은 다 이단이다.

8.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왕래에 대하여

이단의 여덟 번째 항목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왕래에 대한 것이다. 신명기 189~13절과 레위기 206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왕래를 금지하고 계신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부자가 음부에서 나사로를 살아 있는 사람의 땅으로 보내어 주기를 간구했지만 허락지 않으셨다. 죽은 사람은 음부에서 혹은 낙원에서 산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이 있는 땅으로 돌아오게 하거나 혹 산 사람을 죽은 사람과 왕래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귀신과 왕래하는 일이며 성경은 이를 절대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무당은 바로 귀신과 왕래하는 여인이다. 이러한 여인은 오직 한 귀신과만 서로 왕래할 수 있다. 그러한 여인은 사악한 영과 친숙한 여인이다. 그러므로 무당이 귀신과 왕래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귀신이 많은 사람의 영혼으로 가장하는 것이다. 귀신과 왕래하는 무당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귀신을 불러오는 것이다. 성경에서 오직 사무엘상 28장에서만 영혼이 음부에서 올라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불려 올려 졌으며, 올려진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였다(삼상28:15-19).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사울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오직 역대상 1013,14절에서만 사울이 귀신과 왕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로 죽게 하셨다고 말한다. 모세의 율법도 여인이 귀신과 왕래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여인이 귀신과 왕래할 때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귀신과 왕래한다면, 그것이 이단이다.

9. 여자가 가르치는 것에 관하여

이단의 아홉 번째 항목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2, 고린도전서 14, 계시록 2장은 모두 하나님께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심을 언급하고 있다. 어떤 교파든 여자가 머리가 되거나, 여자를 우두머리로 하거나, 여자의 지위를 남자와 동등하게 두는 것을 크게 의문시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주된 이단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여자가 그 발기인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 과학회의 에디 여사, 안식교의 화이트 여사(Mrs White) 등이 있다. 성경은 로마 천주교에 대해 말하면서 여자 이세벨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2:20).

10.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하여

이단의 열 번째 항목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것이다. 이단의 원칙은 바로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시면 사단도 그렇게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주님이 병을 고치시면 사단도 병을 고친다. 주님의 다시 오심에 관해서 이단 역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어떤 장소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안에 있는 주님의 다시 오심의 일에 관하여 관심하지 않게 하거나, 혹은 이 일을 경홀히 여기게 만든다. 사단은 바로 하나의 불명예스러운 일을 가지고 들어와서 주님의 다시 오심의 진리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주님은 확실히 속히 오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더욱 예언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이후로도 여전히 예언에 있어서 많은 이단의 형태들이 생겨날 것이다. 만일 어떤 교파든지 어느 날 어떤 장소에 가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고 예언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가 두 증인중 하나라고 말하거나 나팔을 부는 세 천사중 하나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성경에서 말한 어떤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믿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여기저기 계십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셨다(24:23). 당신은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 이것이 바로 허황된 이단이다.

우리는 계시록 3장의 빌라델비아교회가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믿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그가 계시록 혹은 다니엘서 가운데 나오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마지막 날에는 이단이 증가할 것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대조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상한 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하며, 혹은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호기심은 결국 영성을 손상시키고,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마치 독약을 한번 먹어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출처: 워치만 니 전집(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25. 21:59


1. 성경의 권위에 관하여

이단의 첫 번째 항목은 성경의 권위와 관계된다. 디모데후서 316절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된 것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는 다 성경을 표준삼아야 한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표준으로 삼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말한 율법과 증거의 말씀은 성경을 가리킨다. 성경은 1차 계시이다.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계시가 반드시 1차 계시인 성경과 일치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천주교는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중하게 여긴다. 개신교는 성경 이외의 많은 부칙을 가지고 있다. 장로교는 그들이 만든 교회헌법을 기준으로 이단을 감별하고 있다. 성경 외에 더해진 것이 바로 이단이다. 여호와 증인들(Jehovah's Witnesses)은 그들의 성경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도 그들의 말이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무릇 자기의 말을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움직이신다. 2, 3차 계시는 반드시 1차 계시인 성경과 일치되어야 옳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 어떤 것을 권위로 삼는 것이 바로 이단이다.

2.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하여

이단의 두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것이다. 사단은 이 땅위에 처음으로 교회가 산출된 이후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공격하였다. 성경은 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지만(1:1~3), 사단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시인하지 못하게 했다. 주 예수님의 인격에 관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첫째로, 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둘째로,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셋째로, 주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이시며, 넷째로, 주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시며, 다섯째로, 주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 여전히 사람이시자 또한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부활 후에 하나님은 그분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그리스도 역시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11:27). 이단은 그리스도의 인격 가운데서 하나만을 인정할 뿐 나머지 방면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 가운데서 한 항목만 말살해도 그것은 이단이 되기에 충분하다. 어떤 사람은 주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인성을 부인하면 예수님의 구속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말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격의 한 방면만 말살하더라도 이단이라 칭함을 받기에 족하다. 성경에 대한 사람의 잘못된 이해는 어떤 것은 용납할 수 없고 또 어떤 것은 용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천년 동안 대다수의 이단이 모두 그리스도의 인격의 어떤 한 부분을 공격한다. 1세기 말 사도 요한의 시대에 이미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는 죽었다고 말하면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는 살아지고 살아난 것은 단지 영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이단이다(영지주의). 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가 영이라고 말하면서, 그분은 하나님보다 아래이고 천사들보다는 위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셨는데 이 땅에 와서 사람이 되셨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이단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과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사신 예수를 분리하거나 또는 땅 위에서 사람이셨던 예수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나누려고 한다.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오늘날 하늘 위에 계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악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이신 예수를 나누려고 하며, 사람이신 예수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인 사실을 나누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이단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혼란시키는 것을 기뻐한다. 요한일서 3장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 사단의 일을 멸하려 함이라고 말한다(8). 만일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되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주님께서 마귀를 멸하신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요한 27절은 무릇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바로 그 미혹하는 자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땅의 그리스도가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만, 그분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는 것은 믿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과 이 땅의 사람을 나누는 것이다. 요한 210절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을 지니지 않고 여러분에게 오거든, 그를 그대의 집에 들이지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11절은 왜냐하면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의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인격을 수호해야 한다. 요한일서 41절은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들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많은 거짓 신언자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고 말한다. 2절은 요한이서 2절과 앞뒤가 바뀌었을 뿐 상응하는 구절이다. 3절은 고린도전서 123절과 상통하며,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것은 그를 주 예수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바로 이 땅에 내려오심의 한 부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심은 바로 영광 안에서의 한 부분이다. 이것이 오순절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가 죽고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서 삼일 후에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출생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단이지 성경 해석이 다른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님의 인격을 분리시키는 사람이 바로 이단이다. 이단은 언제나 주 예수님의 인격을 나누고 파괴시킨다.

3. 사람의 죄에 대하여

이단의 세 번째 항목은 죄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단들은 죄를 제거하려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사람의 죄를 언급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다. 즉 하나님을 떠난 죄이다(단수 죄). 둘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범한 죄의 행위들이다(복수죄). 이 두 종류는 성경 안에서 다 죄이며, 다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좋지만,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가 있다. 어떠한 교리도 이 두 가지 죄의 사실을 뒤집는다면 이단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으로 사람에게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고 하고, 혹은 과학으로 사람의 신체의 내분비를 연구함으로 사람에게 죄가 없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나 여호와의 증인(Russellites, Jehovah's Witnesses) 등이다. 이들은 다 이단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로 구속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며, 또한 구주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하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공허하고 황당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을 뒤집는 것은 바로 이단이다.

4.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하여

이단의 네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한다(요일1:7).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두 가지 요건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인격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역사 곧 사람을 위하여 피 흘려 속죄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부족해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이 한 가지 일에서, 사람은 사단의 지시를 받아 생각에서 다른 길로 가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주 예수님의 역사를 뒤집어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폐하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순교의 피라고 말한다. 베드로 후서 21절은 거짓교사들이 사람들을 파멸시킬 이단들을 몰래 끌어들인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을 부인하여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불러들일 것이라고 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25. 21:57

어떻게 이단을 분별하는가?(1)

 

마태복음 24:23 그때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십니다!’ 혹은 저기 계십니다!’라고 하여도, 믿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24:24 왜냐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신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이한 일들을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사람들까지도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1:13~15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들이며, 속이는 일꾼들이어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가장하는 이들입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사역자들이 자기들을 의의 사역자들로 가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최후는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1 “그러나 전에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여러분 가운데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파멸시킬 이단들을 몰래 끌어들이고, 더욱이 자기들을 값 주고 사신 주인을 부인하여,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서 언

 

주 예수님은 마태 2423절에서 말세에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선택된 사람들조차도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오직 참된 빌라델피아 교회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이단들을 구별하고 교회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이단에 대한 호기심을 버려야 한다. 누가 독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독을 마셔보겠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이단에 들어갔다가 그것이 이단임을 확정하고 정죄한 다음 나와서 다시 다른 이단에 들어가고, 그것이 이단임을 확정하고 정죄한 다음 나와서 또 다시 다른 이단에 들어가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일단 이상한 교리를 들어도 그것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단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호기심을 갖지 말라. 사단은 순수한 이단을 만들어 낼 만큼 어리석지 않다. 이단은 늘 가장 좋은 진리 가운데 섞여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한 방면으로 그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또 한 방면으로는 그들을 이단에 빠지게 한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이단들을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이단을 접촉하지 않기를 배워야 하며, 이단을 피하고 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조심스러운 사람만이 위험을 만나지 않을 수 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쉽게 이단에 빠진다.

이단을 검증하는 열 가지 표준

 


우리는 이단을 시험할 수 있는 열 가지 검증 방법을 알아야 한다. 열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해당된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어떤 단체에 진리가 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이단이 있는가가 문제이다. 만일 이단에 해당되는 항목이 하나라도 있다면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소량의 독이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마치 고운 가루 속에 약간의 누룩만 있어도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단은 전문적으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분별할 수 없다. 이러한 이단을 분별하고 분석하는 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분별하기는 어렵다. 이단의 종류는 아주 많다. 그러나 아래의 열 가지 항목 중 한 가지라도 잘못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이제 우리는 열 가지 검증 방법을 알고 이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5:40




지방교회를 양태론으로 몰아가는 김홍기 목사의 '삼신론 이단 사상' 2 - '신격' 개념의 무지

지방 교회측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거주하는 김홍기 목사와 교회와 신앙 인터넷 신문에서 수 개월에 걸쳐 진리 토론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이와 별도로 유튜브를 통하여 지방 교회측이 양태론을 가르친다고 공격하는 동영상을 올려놓았습니다.

이 동영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거짓된 내용이 많고 억지 주장이 지나치게 심하여 지방 교회측은 이에 대한 대응차원에서 김홍기 목사가 주장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차례대로 반론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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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포이멘 칼럼 - 항주 송성천고정 가무쇼를 보고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