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9.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3)


2. 신약교회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할 에클레시아 개념들

신약에서 교회 (Church)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물론 70인 역 구약에서도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에클레시아가 우리가 현재 토론하는 대상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염두에 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속성상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외시킵니다. 

 1) 이방인 폭도들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H.J 님이 용례 중 하나로 소개해 주신 사도행전 19장 32, 39, 41이 말하는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개념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부의 권세 아래 있는 무리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구약의 유대인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서두 글에서 언급되었던 케빈 길레스 책 345-346쪽에 의하면 70인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약 100번 나타났는데(이 단어의 대부분은 카할이라는 히브리어), 그중 시편 28:5와 에스겔 32:22-23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유대인은 이러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으로(롬2:28-29) 소위 표면적 유대인인 구약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모임은 에클레시아 이되 신약교회 개념(이면적 유대인)인 마태복음 16:18이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개념에서는 제외됩니다.

 3)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이 제외됨

위 책은 유대인이되 열왕기상, 역대상, 역대하 등에서 약 33번 쓰인 에클레시아는 특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 역시 신약교회의 예표와 그림자의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마태복음 16: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는 아닙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회심 전후의 사울과 바울의 모습에서 관찰되듯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일 뿐입니다. 즉 예배하는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통해 참된 신약교회의 구성원이 된후 그는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이되 그 신분과 그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었노라고 실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3:6). 그가 고린도후서 11:28에서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고 할때의 그 교회는 그가 회심 전에 몸 담았던 예배공동체인 이스라엘 개념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을 혼동할 때 그 사람의 교회론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이해에서 멀리 빗나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교회는 시점으로 볼 때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교회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들만을 염두에 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단수의 교회로서 복수의 교회들이 되는 성경적인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할 때 염두에 둔 교회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H.J 님은 위 제외된 모든 개념들을 다 포함한 신구약 전체에 나타난 '에클레시아'의 용례들을 다 교회개념으로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범위에 있어서도 단지 <특정 목적을 위하여 따로 불러 나와서 만들어진 모임> 즉 민회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 집에서 모이든 예배당에서 모이든 도시에서 모이든 다양한 범위의 모임 그 모두가 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에 다루겠지만 교회의 다른 특징들을 무시한 채 에클레시아라는 원어적 의미만을 중시함으로 본의 아니게 분열의 뒷문을 이론적으로 열어주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1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교회들을 다 포함한 하나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라는 식의 성경본문 왜곡으로 빗나갈 여지가 다분합니다. 이 점은 별도의 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6:01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아래 글은 HJ님의 '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를 기초로한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가능하다는 주장' 중 일부입니다. 즉 정관사 the 가 붙은 교회는 그 도시에 있는 유일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안에 여러 개의 교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일부 특정교회를 말한다는 논리요 주장입니다. 

이것은 문법적이고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해석이요 주장일 수 있으나 실제 성경 용례나 역사적인 사실에 이런 논리를 대입해 본다면 사실이 매우 왜곡되고 진리가 혼잡될 수 있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이제 왜 그런지를 좀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아래 꼬리글로 쓴 것을 별도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1.HJ 님 주장 

 (HJ님) 예를 들자면, <서울지역의 시장에 있는 사과>라고 할 때에, 한 편으로는 "사과"라는 말에 "정관사"를 넣어서 <the apple in the market of Seoul>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서울지역의 시장에는 사과가 하나 뿐이다고 해석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식의 극치입니다. 사과라는 일반적인 명사를 고유명사처럼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도 그렇게 "일반적인 명사"입니다. 기독교에만 특별하게 사용되던 용어가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세속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던 용어입니다. 그래서 "서울지역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Seoul)이라는 표현을 두고, 서울지역에는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식한 해석입니다. 

기본적인 문법과 용어의 개념을 해석하는 원리의 그 기초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폴님의 글을 보면, 이 두가지 면에 있어서 저와 일치가 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해석 이전에, 문법이고 상식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려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그 언어의 문법과 상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글문법을 모르고 한글성경을 해석할 수 없고, 헬라어문법을 모르고 헬라어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2. 저의 반박 

HJ님의 위 주장에 의하면 사도행전 8:1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the church at Jerusalem)에 큰 핍박이 나서..'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지역에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은데 그중 정관사 the 로 특정된 어느 한 교회에 핍박이 났다는 말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맥은 ...<사도 외에는 다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예루살렘 지역 내에 있는 다른 교회들 안의 성도들은 고스란히 다 있고 그중 일부인 위에서 지칭된 그 교회에서만 사도외에 다 흩어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이런 해석은 그야말로 논리의 함정에 빠져 사실과 역사를 왜곡시키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핍박하는 쪽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에 수 많은 교회들 중 특정교회만 핍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어느 교회에 소속되었는가 하는 것 보다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사울이 잡아다가 가두고 죽이고 했기 때문입니다(행9:14, 21). 

HJ 님의 논리와 주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지역 안에 여러 교회들(복수)이 있어야 할 것이나 그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어떤 성경근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도시에 여러 교회들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가설을 '에클레시아'라는 어원에 기초하여 입증해 가시려는 HJ 님의 시도는 숱한 분열이 팽배한 현실을 정당화해 줄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교회론으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인 실행에 있어서 수 많은 문제점들을 양산해 낼 여지가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