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arryking 2018. 8. 25. 00:37

지방교회(local Church) 질문과 답변 시리즈 2회 -
목사제도가 왜 지방교회에는 없나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18. 05:00

창간특집 - (지방)교회를 전격 해부한다.


"핵심적인 교리들, 정통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 확증"


 지구촌 3천여 교회 30만명 성도


한국 1백여 교회 1만5천명 성도

 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일반적으로 (지방)교회는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동역자인 위트니스 리로 이어졌다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이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1903년 중국 복주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7세에 역동적인 거듭남을 체험했고, 즉시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헌신했다. 워치만 니는 성공회가 세운 '앵그리칸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이며, 탁월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역사 전반을 망라한 약 3천 여 권의 기독서적을 독파하였다. 또한 그 당시 그의 고향에서 활동했던 전직 성공회 소속 M.E.바버 선교사를 통해 당대 유럽의 기독교 거장들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속생명파와 형제회 노선이 그에게 상호 보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총 62권의 <워치만 니 전집>(한국복음서원)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는 중국 공산화 직후 1952년에 투옥되어 20년간의 옥중 생활 끝에 1972년 5월 30일 순교하였다. 위트니스 리(Witness Lee)는 1905년 중국 산동 지방에서 삼대 째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치푸에 있는 남침례회 중국 초등학교를 다녔고, 미국 장로회가 경영하는 영어선교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19세) 4월에 왕패진(汪佩眞) 자매의 복음 전파로 구원받았다. 거듭남을 체험한 후 약 8년 동안 형제회 모임에 출석하였다. 그 후 그는 워치만 니가 발간하던 문서를 통해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워치만 니의 사역에 합류하였다. 워치만 니는 그를 약 20년 이상 직접 온전케 했고 둘은 끝까지 신실하게 동역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1949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만에서, 1962년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인 1997년까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동안 일관되게 워치만 니로부터 보고 배운 큰 틀 안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400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성경 66권을 강해한 '라이프 스타디 전집(Life-Study)'과 (지방)교회의 조직 신학에 해당되는 8권으로 된 '신약의 결론'(총 8권, 4600쪽)이 있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회복역 영어성경(1985년)은 영어권 성도들에게 성경을 사랑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1988년 대만에서 발간된 중국어 회복역 성경은 중국어권 성도들에게 진리로 조성되고 생명안에서 자라도록 이끌고 있다. 한국어 회복역 신약성경은 2007년 7월 말에 번역되어 발간되었다. 

 나. 교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귀하게 여기는 소위 (지방) 교회 성도들은 전 세계에 약 30여 만명(중국 본토 제외), 3000여 교회들이 있다. 한국은 1966년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여개의 교회들과 1만 5천명의 성도들이 실제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며(명단 상 약 2만 5천명) 전국에 200여 명의 사역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한다. 

 다. (지방)교회에 대한 미국 기독교계의 평가  
전 세계 (지방)교회 성도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신앙검증은 곧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평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미국이든 한국이든 차이가 없다. 항간에는 이들을 중국의 유교와 불교에 연관 짓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지방)교회가 중국의 토착화된 기독교라는 일각의 평가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두 사람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영국의 플리머스 형제회와 속 생명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존 넬슨 다아비의 모든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선포 된 근본주의자들의 신앙고백인 성경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육체적 재림을 확고하게 믿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저명한 이단 변증가이자 종교백과사전의 저자인 고오든 J. 맬튼 박사는 자신의 '미국 종교백과 사전'(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에서 (지방)교회를 참된 그리스도인들인 '플리머스 브레드린(Plymouth Brethren)' 과 같은 <독립 근본주의 계열>(Independent Fundamentalist Family)로 분류하고 있다(최신판, 523-525쪽).
관련 자료 - http://local-church.tistory.com/283

이단변증기관 CRI와 AIA, "이단(cult)이라는 말이 교리적. 사회학적 개념이든 (지방)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서 제출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자만을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는 한국의 '생명의 말씀사', '규장' 등이 국제 회원으로 있는 '미국 복음주의 출판사 협회'(ECPA)에서 투표권 있는 정회원 자격으로 활동 중이다. ECPA 측은 회원사가 출판하는 책자들이 복음주의적인 내용을 담았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신규회원 가입시 엄격한 사전 신앙검증을 받게 하고 기존 회원들의 무기명 투표를 거쳐 확정한다. 한국복음서원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ECPA의 회원사가 된 LSM 발행 책자를 다만 한국어로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동일한 평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유명한 이단변증기관인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 대표인 행크 해나그라프와 AIA(Answers In Action) 대표인 그레첸 패산티노는 작년 8월에 재판과 관련해서 텍사스 대법원에 제출한 공식문서에서, "이단(cult)이라는 말이 교리적으로든 사회학적 개념으로든 지방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단변증전문가의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것은 이들 두 이단변증 기관이 과거 미국에서 앞장서서 (지방)교회를 양태론자로 공격해 왔었지만, 주님의 주권적인 안배로 쌍방이 수차례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후 나온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그 중에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 3 년 동안 CRI와 AIA는 지방 교회들이 출판한 모든 책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었고, 지방 교회들에서 인도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수백 시간에 걸쳐 대화를 가짐과 동시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일반 성도들과 만나서 대화를 가졌습니다. 아울러 CRI와 AIA는 수백 시간에 걸친 신학적 분석과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다수의 신학 대학원에 요청하여 저명한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마친 후 파산티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운동이 소유한 믿음의 내용들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운동에 대해 제기한 과거의 비평들이, 비록 여타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내놓은 것들에 비해 부드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운동의 본질이 갖고 있는 정통성을 오해하고 잘못 제시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AIA와 CRI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들, LSM의 핵심적인 교리들이 전적으로 정통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바입니다.
(참고자료 - http://local-church.tistory.com/128http://local-church.tistory.com/102)


그 외에도 한국 교계 내에 500여명 이상의 동문 목회자들을 배출한 풀러 신학교에서 '(지방)교회에 대해 이단성이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 다음과 같은 공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 역시 풀러 신학교 총장 Richard Mouw 박사, 신학부 학장 Howard Loewen 박사, 조직 신학 교수인 Veli-matti Karkkainen 박사 등이 2년에 걸쳐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폭넓은 대화를 나눈 끝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우리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 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들에 근거할 때 우리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계, 언론계, 이단 변증단체 모두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이 핵심 진리에 있어서 결코 이단이 아니며 참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고 평가한다'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해명 자료 제시와 쌍방의 추가적인 대화를 통해 한국 교계의 주류교단 중 하나인 예장통합측에서도 동일한 이해에 이르게 되시기를 희망한다.                 (후략)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참고 사이트:
워치만 니 (1903-1972. 5. 30) :
http://www.watchmannee.kr
위트니스 리 (1905-1997. 6. 9) :
http://www.witnesslee.com

미국 이단 변증 단체 AIA(Answers In Action)의 지방 교회들과 LSM(Living Stream Ministry)에 대한 입장

기독교 변증론 분야의 전문가이자 미국의 저명한 이단변증단체AIA(Answers In Action)의 공동창립자 및 책임자인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는, 같은 분야의 동료이자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대표인 행크 해너그래프(Hank Hanegraff), 그리고 CRJ(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편집장인 앨리어트 밀러(Elliot Miller)와 공동으로3년에 걸쳐 진행된 신중한 조사, 대화, 검토 및 신학적 분석의 결과, 워치만 니(Watchman Nee)와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가르침과 LSM(Living Steam Ministry)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을 수용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기독교 운동의 한 부분이며, 신학적으로 이단성의 문제가 있다거나, ‘이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이단’이라는 용어에 관해 작고한 월터 마틴 박사(Dr. Walter Martin)가 신흥 이단들(The New Cults)이라는 책에서 정의한 의미, 그리고 작고한 로버트 파산티노(Robert Passantino)와 그의 부인 그레첸 파산티노가 자신들의 공저인 당신의 문을 두드리는 이단들에 대한 답변들(Answers to the Cultist at Your Door)이라는 책에서 정의한 것처럼 순수하게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하더라도 동일함을 밝힙니다.

 이번 재평가 작업은 로버트 파산티노와 그레첸 파산티노 부부, 그리고 월터 마틴 박사가 최초 평가를 실시한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으며, 최초 관찰과 비교할 때 놀랄 만큼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최초에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는 이러한 운동이 비기독교적 이단은 아니지만 여전히 워치만 니의 저작, 특별히 위트니스 리의 저작들은 모순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운동의 신학적 배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이해는 출판물을 조사하여 얻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가 1981년 이후에 이러한 운동에 관하여 직접 글을 쓴 적은 없지만, 수년 동안 CRI는 이러한 운동에 관하여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가 최초에 제기했던 핵심적인 비판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여러 편의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약 3년 전, 이러한 운동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LSM은 대화 제의와 함께 그들의 가르침과 신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요청해 왔고, (남편이 2003년 작고한 후로 AIA를 인도한) 그레첸 파산티노, (월터 마틴 박사가 1989년 작고한 이후로 CRI를 인도한) 행크 해너그래프, 그리고 (초창기부터 CRJ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앨리어트 밀러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초기에 여러 단체들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내놓은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파산티노 부부와 앨리어트 밀러, 행크 해너그레프는 단지 해당 단체들이 출판한 서적들을 검토하는 것으로 평가 작업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관찰과 교제를 통해서 과연 상대방의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최근CRI와 AIA 는 모두, 논쟁의 소지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들에 대한 공식적인 비평서를 출판하기에 앞서 그들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의무화하는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파산티노는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 교제의 원칙은 우리가 전향적으로 사탄주의나 신흥 이교주의에 대한 검토 작업에 착수하면서, 그리고 외부에 있는 기독교 변증론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전세계 하나님의 교회(the Worldwide Church of God)나 기타 운동들 및 쟁점들에 대해 파헤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펴낸 책자에 항상 의문의 여지가 있어 왔고, 변증론 전문가들 사이에서 상이한 평가를 받은 이 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3 년 동안 CRI와 AIA는 지방 교회들이 출판한 모든 책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었고, 지방 교회들에서 인도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수백 시간에 걸쳐 대화를 가짐과 동시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일반 성도들과 만나서 대화를 가졌습니다. 아울러 CRI와 AIA는 수백 시간에 걸친 신학적 분석과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다수의 신학 대학원에 요청하여 저명한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마친 후 파산티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운동이 소유한 믿음의 내용들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운동에 대해 제기한 과거의 비평들이, 비록 여타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내놓은 것들에 비해 부드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운동의 본질이 갖고 있는 정통성을 오해하고 잘못 제시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파산티노 부부는 두 권의 소책자를 통해, 그리고 월터 마틴 박사는 신흥 이단들이라는 책을 통해 비록 이 운동이 비기독교적 이단은 아니지만,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여전히 모순적인 면이 있으며, 최악의 경우는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연구자들은 이 운동에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기 시작했고, 이 운동이 심리적 병폐나 사회적 병폐 심지어 일탈적인 범죄 행위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경고하였으며 또한 신학적으로 이단이라는 혐의도 추가되었습니다.

가깝게는 1999년에 존 앵커버그(John Ankerberg)와 존 웰던(John Weldon)이라는 두 저자가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Encyclopedia of Cults and New Religions)에서 이 운동을 위험하고 파괴적이며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단체들에 포함시켰으며, 신학적으로도 이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해당 운동이 중국 본토에서 시작되었고, 이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많은 믿는 이들이 여전히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관계로, 무신론을 제창하는 중국 공산정부는 이 운동과 관련된 중국 내 그리스도인들을 형사 고발하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러한 부정적인 보고서들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앵커버그와 웰던의 책에 담긴 언어도단(言語道斷)적인 비난들은 십수 년 전 닐 더디(Neil T. Duddy)의 갓맨(The God-men)과 같은 책자에서 제기된 것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중국 본토에서의 교회 활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당국의 제한과 고발 및 유죄판결에 직면해야 하는 이 운동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극도로 위험이 된다는 것을 이 운동은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협에 대항하는 시도의 일환으로, 지방 교회의 핵심적인 교사들은 - 비록 이 운동은 정식 계급 제도상의 인도직분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특정 구성원들이 그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기독교 변증론 분야를 선도하는 다양한 인사들에게 대화 및 재평가를 요청하였습니다. AIA와 CRI는 이 기회를 수용하여, 공동으로 재평가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근년에 지방 교회들과 LSM은 미국 기독교계에서 진일보적으로 폭 넓은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우선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가 AIA 와 CRI 가 수행한 것과 유사한 대화 및 검토 작업을 실시하여 “지방 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은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대표하고 있습니다.”(풀러 성명서, Fuller Statement)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아울러 LSM은 미국복음주의출판협의회(Evangelical Christian Publishers Association, ECPA)에 정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해당 단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AIA와 CRI 가 지방 교회 인도자들 및 LSM과 가진 대화에서, 양측은 모두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가 과거에 내린 대단히 비판적인 평가가 여러 요인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고의적인 왜곡이나 악한 의도는 없었다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적절한 비판들을 가져온 더 큰 이유는 상호간의 직접적인 대화 부족과 미국 내 기독교와 중국 내 기독교 사이의 문화적, 언어적, 교회론상의 차이, 그리고 양측 모두의 종교 분석적 검토 기술이 상대적으로 미숙했던 점이라는 데 공통된 결론을 얻었습니다.

... AIA와 CRI는 2007년 후반에 지방 교회의 가르침들에 관한 연구 결과를CRJ 에 실을 예정입니다. 한편, LSM이 발표한 장문의 교리 해설서인 ‘풀러 신학교 측과 대화 시 제출되었던 (지방) 교회 신앙 변증서’는 지방 교회들의 핵심적인 교리가 갖고 있는 정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교리 중 부차적인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여타 그리스도인 단체들에게는 크게 문제시되었던 부분에 관해서도 이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forthetruth.or.kr


지방교회-"핵심적인 교리들,정통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 확증"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지방교회_교성_070827창간2.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13. 05:00


창간특집 - (지방)교회를 전격 해부한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



미국 풀러신학대학교 등서 2 년여 검토후 결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가 세운 (지방)교회에 대하여 일부 교단에서 자신들의 교리와 신학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 취급을 해왔지만, 최근 미국의 저명한 이단 변증단체인 AIA(Answers In Action),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 그리고 CRJ( Christian Research Jounal)에서 공동으로 3년에 걸쳐 조사, 연구, 검증한 결과,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세운 (지방)교회가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풀러 신학대학에서 2년간 (지방)교회의 가르침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그들이 내린 결론은, (지방)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격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고 선포했다.

(관련기사 클릭 - CRI : http://local-church.tistory.com/102풀러신학 :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다수의 목회자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와 관계된 저서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그 책들을 인용하여 설교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다. 또한 기독교계 출판사 중 모 출판사는 워치만 니의 저서를 수십 권을 번역하여 보급한 바가 있으며, 그러한 책들이 한국에 있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많은 영적 양식을 공급해 주었다. 그런데 왜 한국에 있는 일부 교단들과 목회자들만이 불분명한 잣대로 가늠하여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여기고 있는지 아주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일부 이단감별사들에 의해 자신의 신학이나 교리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으로 규정하는 예가 다반사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의 기독교계(언론계, 신학계, 이단변증단체들)에서 이구동성으로 "(지방)교회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왜 한국에서만 유독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여기고 있는가? 예장통합 측 계열 신문인 목회자신문에서 조차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드러난 문제를 놓고 피차 존중하는 내용의 기획기사를 수차례에 걸쳐 다룬 바 있다. 앞으로 본 교회성장신문은 이러한 (지방)교회 문제를 해소하는 차원뿐만 아니라 (지방)교회가 갖고 있는 정통적인 신앙과 교리와 신학 등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해부하여 독자들에게 제공할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독자들이 많은 관심과 격려가 있기를 바란다.

<상세내용 6.7면서 계속>

 <교회성장신문 창간호 1면 특집기사>
 

창간특집 - 지방교회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 교성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지방교회_교성_070827창간1.pdf

다음 기사 -> 지방교회 - 창간특집 (지방)교회를 전격 해부한다. (http://local-church.tistory.com/223)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6. 05:00

아래의 글은 장로교 합동측 교육국 주관으로 펴 낸 <기독교의 이단들>이란 책자에서 (지방)교회들을 거짓되게 소개하고 비판한 것을 항의하고 시정을 요청한 서신입니다. 독자들의 공정한 판단을 위해 이곳에 소개합니다. 독자들이 성경과 신앙 양심 가운데 공정하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발신인 : 000 외 1인 - 1998. 4. 30.(미국시간)
The Church in Fullerton 1330 N. Placentia Ave Fullerton, CA 92831
전화 : 714-996-8190, 팩스 : 714-996-8195 

수신인 : 심 창섭 교수님 외 3인 서울 강남구 대치3동 1007-3 총회회관 4층 교육국
 전화 : 서울 564-0783, 팩스 : 539-0203
 참조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제목 : '기독교의 이단들' 책자 중 (지방)교회를 언급한 부분에 대한 항의 및 시정요청  

저희들은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전세계 (지방)교회들을 대표합니다. 본 서신은 귀 측이 저술하여 시판하신 '기독교의 이단들'이라는 책자에서 저희가 믿는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들을 근거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을 '이단시하는 것'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단'이라는 용어가 단순한 교리해석상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위험한 사교집단'처럼 여겨지는 한국교계의 풍토를 감안할 때 저희 측은 귀하들의 인쇄된 문서를 통한 이단정죄에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이단들

같은 믿는 이들을 이단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롬 14:10-13). 또한 이단정죄를 받는 측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가하는 행위임으로 지극히 신중하게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년 내에 한국 장로교단 내에서 너무도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남을 이단시하는 경향들이 관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에 장로교 통합측 소속 어느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삼분설을 믿으니까 이단'이라는 참으로 상식 이하의 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목사의 엉터리 이단기준에 의하면 이분설을 지지하는 장로교인들만 정통이고 삼분설을 지지하는 전세계 침례교인들, 하나님의 성회 성도들도 다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된 내용들을 반복해서 문서로 유포하는 무책임하고 불법한 행위는 이방인들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참되게 믿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한 자기 말에 대해 책임을 추궁 당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출 20:16, 마 12:36-37). 

 저희들은 귀하들이 저술하신 위 책자를 심도 있게 분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위 책자에서 귀 측이 취했던 연구관점과 접근방법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을 진실 되게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시각으로 본 사물이 실제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롯한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적이고 근본주의 적인 신앙유산에 따른 지극히 건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지 귀 측의 단정처럼 이단 사교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귀하들이 <사실이 아닌 내용들>을 근거로 책자를 통해 저희들을 정죄하신 것을 공개적으로 바로잡는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우선, 저희들은 오해에 근거한 귀 측의 비판들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합니다. 

I. 귀하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근본주의의 뿌리인 존 넬슨 다비의 신앙유산을 이어 받은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채 그분들을 체계적인 신학수업도 못 받았고 소위 '정통신앙'에서 빗나간 사람들로 취급하신 것(위 책자, 163쪽)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관을 참되게 파악하려면 그 사람의 신앙배경과 그 사람이 쓴 책자들 전반에 나타나는 내용들을 파악한 후 유일한 기준인 성경말씀과 비교해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측은 문서를 통해 남을 공개적으로 이단시하는 심각한 일을 하시면서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배경을 전혀 고려치 않으셨고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시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자들은 읽어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판사가 재판기록을 보지도 않고 사형을 선고한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무책임한 일인 것입니다. 

 1. 귀하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판함에 있어서 두 분의 신앙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채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없는 사람들처럼 단정하신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교회역사를 볼 때,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신실한 믿는 이들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분들과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신앙형태를 형성하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귀하들이 장로교인들로서 칼빈의 영향을 받으셨듯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근본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넬슨 다비의 신앙유산을 이어받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미국종교백과사전'을 쓴 고오든 맬튼 박사가 최근에 5판까지 수정 보완된 자신의 백과사전에서 일관되게 (지방)교회존 넬슨 다비의 형제회와 함께 정통기독교의 범주인 '근본주의'(Fundamentalists)계열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283)

대부분의 개신 교단들이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빗나간 천주교의 오류로부터 점진적인 개혁을 꾀하는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면에, (지방)교회 성도들을 포함한 근본주의 노선은 천주교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성경자체에서 믿음생활의 본을 찾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청교도인들이나 웨슬리 파가 했던 것과는 달리 존 넬슨 다비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은 사도시대 교회(초대교회)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성경에 집중함, 성경적인 생활양식, 성경적인 신학, 성경적인 교회론'의 채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흐름이 워치만 니를 비롯한 (지방)교회 성도들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이곳 미국에서 정통 근본신앙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신학교들 - 예를 들면, 달라스 신학교, 무디 성경학교, 바욜라 신학교 - 과 D. L. 무디, 피어슨, 무어 해드, 부룩스 등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의 신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다섯 가지 근본신앙'으로 지칭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격(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포함),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리적 속죄,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실제적 부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을 굳게 믿음으로써 1920년대 현대주의 이단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수호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롯한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도 기본신앙을 구성하는 이러한 다섯 가지 항목들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믿지 않으므로 이단이다'라는 식의 귀 측의 정죄는 너무나 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비판인 것입니다. 

2. 워치만 니는 한국복음서원에서 전집형태로 발간한 62권에 해당하는 저서가 있고 위트니스 리는 약 20년에 걸쳐 완성한 신구약 전체 주석을 포함, 약 400권 분량의 저서가 있으나 귀하들은 이러한 책자들의 핵심을 충분히 파악치 못한 채 성급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신약의 결론

특히 한국복음서원이 1991년에 출판한 '신약의 결론' 8권 -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믿는 이들(1,2), 교회, 왕국, 새예루살렘 - 은 위트니스 리의 조직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관찰에 의하면 귀하들이 워치만 니를 비판하고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공개적으로 책자화하는 심각한 일을 하시면서도 그의 조직신학인 '신약의 결론' 책자들을 단 한 번도 참고하지 않으신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를 경륜적인 관점에서 쓴 몇 권의 책자(예를 들면, 하나님의 경륜, 그 영과 몸)를 그것도 처음부터 (지방)교회를 정죄할 의도로 왜곡되게 쓰여진 책(번역서)에서 거짓된 결론을 인용해서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귀하들도 언급(위 책자, 146쪽)하셨듯이, 위 내용들이 악의를 가지고 만들어진 거짓된 자료들임이 이 곳 일간신문에 수개월 동안 게재된 저희 측의 반박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바 있습니다. 저희는 이러한 모든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러한 거짓정죄가 반복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귀 측이 이러한 <사실도 아닌 내용>을 근거로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을 함부로 이단시하여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할 치외법권적인 권한을 가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귀 측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충분한 연구도 없이 경솔하게 추론하여 정죄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첫째, '지방교회의 기독론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한 변화, 또는 그 과정으로만 설명한다'(위 책자 154쪽) '성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곧 아버지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지방교회는 생각할 수 없다'(위 책자 155쪽).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적인 죽음으로 보지 않고 계략적인 죽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결과로 죽으신 것이 아니고...(위 책자, 160쪽)  

-반박 : 귀하들의 경솔한 비판과 달리, 위트니스 리는 칼케돈 신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정통기독론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믿습니다(월간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pp163-166, 98년 5월호 참조). 또한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쓴 '그리스도론' 611-612쪽에서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마태복음 20장 28절을 근거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지방)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죄의 결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귀 측의 말도 안 되는 정죄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저희들은 심창섭 교수님외 3인의 신앙양심을 향해 질문드립니다. 귀하들은 위와 같이 심히 거짓되고 엉뚱한 내용으로 (지방)교회 성도들을 이단시하는 책자를 제작 배포하는 심각한 일을 하시기 전에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장장 709쪽에 걸쳐 집대성한 위트니스 리의 조직신학 책자 '그리스도'(1991년, 한국복음서원)를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보셨습니까? 

 둘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가 아닌 일위일체를 믿기 때문이다' (위 책자, 156쪽) 

-반박 : 뒤에서 항목을 달리하여 반박할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조직신학 책자 '하나님'(총 510쪽)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기초로 남을 공개적으로 정죄하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아닙니다. 

셋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신학지식의 빈곤과... 체계적인 신학지식을 갖고 있지 못함이 그들의 주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워치만 니는 그의 간증에서 1926년에 '십자가의 의미'를 1927년에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1934년에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한다. 오늘날 신학교의 초급과정에서나 다루는 그야말로 기초적인 내용을 그는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과대평가 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위 책자 163-164쪽). 

-반박 : 한국교계 내에서 비록 (지방)교회 생활을 하진 않지만, 워치만 니 책자를 통해 은혜를 받은 분들이 일반 성도들은 물론 목회자들 중에도 많이 있다는 점은 귀하들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곳 미국에는 위트니스 리의 신구약 주석서(오디오 메시지)를 매일 또는 주 1회 방송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미 전역에 걸쳐 50개(스페인어, 중국어 133개는 별도)가 넘습니다. 귀하들은 체계적인 신학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 20년에 걸쳐 신구약 전체 주석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위 두 분의 저술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경솔한 비난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워치만 니가 '십자가'나 '교회의 하나'나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실행이 없는 공허한 신학지식을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귀하들의 지적처럼 신학교 초급과정에서 위와 같은 진리를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신학생들이 '십자가'를 배웠으나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 없고, '교회의 하나'를 배우고 나와서 오히려 끊임없이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분열을 방관한다면, 또는 그리스도 이외의 것에 마음이 분산된다면 그 배운 지식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러나 귀하들이 비난하는 워치만 니는 핍박과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본 진리의 빛대로 살았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그처럼 문제가 많은 것은 신학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고 절대적으로 자기가 본 이상을 따라 사는 사람(행 26:19)이 부족해서가 아닙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공정합니다.  

II.'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성경 안에 묻혀있고 사람들에게 감취어져 있다. 그 진리는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새롭게 발견된다"는 워치만 니의 말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 했고 이것이 오늘날 지방교회의 이단적 주장의 요소가 되었다는 비판(위 책자, 148-149쪽)은 사실이 아닙니다. 

귀하들은 위 워치만 니 주장에 대해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나 있었다'는 것을 들어 반박하셨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 자체를 말할 때는 맞지만 역사적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면죄부가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다는 부끄러운 실행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속여왔으나 말틴 루터에 의해 '이신칭의'의 진리가 회복됨으로 구원관이 바로 잡아졌습니다. 하나님은 말틴 루터 이후로도 그분의 비밀한 말씀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무리들에게 계속 열어주고 계십니다(고전 2:9-10).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상실치 않는다는 진리(성도의 견인) 는 비록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주의 종이었던 캘빈을 통해 주님이 보여주신 귀한 진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의 모든 진리가 장로교인들에게만 열려졌다거나 장로교인들이 지지하는 진리는 항상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캘빈이 유일하게 주석서를 쓰지 못한 요한계시록은 여전 히 많은 장로교인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을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실제의 광물질인 금과 보석들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박형룡, 교의신학-내세론, 361쪽 1988).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계시록 21장 9-10절에 의하면 참으로 불경스럽고 이단적인 것이 됩니다.(해당 본문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곧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지 박형룡 박사의 해석처럼 새 예루살렘을 신부가 그 안에 거주하는 물질적인 성이라고 하지 않았다). 즉 성경은 일관되게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지 '광물질'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고후 11:2, 계 19:7-8, 22:17, 호 2:19-20). 물론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집의 건축재료로 언급된 금과 은과 보석이 실제 광물질이 아니듯이 새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요소인 금과 각종 보석들도 영적 해석이 필요한 표징이지 실제 광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몸인 교회(엡 1:23)(에클레시아)가 건물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 예가 전혀 없는데도(이종성, 교회론,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95, 36-42쪽). 장로교인 중에는 심지어 예배당 건물도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교회에 간다' '나가시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식의 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하들이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광물질(새 예루살렘)을 신부로 취한다고 믿고 있고 콘크리트(또는 나무)로 만들어진 예배당 건물도 주님의 몸(교회)의 일부라고 믿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이단사상이라고 비판받는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교회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리는 주님의 긍휼로 오늘날 (지방)교회 성도들에게 성경 전체의 조망가운데 투명하게 열려졌습니다. 신약의 결론-교회론, 새예루살렘 책자에서 볼 수 있듯이 위트니스 리의 성경해석 방식은 원어의 의미와 문법과 역대의 신실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감안한 균형잡힌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가 성경해석에 관해 자신이 쓴 책자(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한국복음서원, 1991년)에서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59쪽)을 최우선 원칙으로 제시한 것은 위트니스 리가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한다는 귀하들의 정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III. 귀하들은 "워치만 니 사상이나 가르침만 가지고는 그 이단성을 규명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148쪽)라고 했고,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담긴 주요 교리들을 상세히 소개(149-151쪽)한 후,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지방교회의 교리가) 정통교회의 신조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시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이 (지방)교회에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한 모든 내용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자들(하나님의 경륜, 그 영과 몸)에 대한 귀하들의 오해와 잘못된 시각에서 온 것이지 (지방)교회가 다르게 가르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희들은 (지방)교회의 신앙을 오해한 귀 측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합니다. 

  1.신론에 대한 반박 

 삼위일체의 교리는 비밀하여 사람의 제한된 머리로 체계화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진리를 다룰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겸손한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또한 역대로 신실한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의 빛들을 무시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귀 측이 제시하신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에 그 강조점이 있었습니다(이장식, 기독교신조사 1집, 11쪽). 동일 본질을 가지시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는 실질적인 위격을 가진다는 삼위일체관(실질적 삼위일체론)은 근본주의 노선 안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도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와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도 이것을 확실히 믿습니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98년 5월호 참조).  

'한 하나님 세 위격'이라는 말은 사람(인성)과 연관되지 않을 때는 그리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고(요 1:14, 골 2:9, 딤전 3:16), 죽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마지막 아담(예수님)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시는(고전 15:45, 골 9:39, 요 20:22) 경륜적인 방면을 언급하는 성경말씀들은 '하나님의 인성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말함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거룩한 하나님이 실제로 육신을 입으신 것(새로운 존재방식)을 부인한다면 즉시 이단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 힙폴리누스, 터툴리안 같은 초대교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구별하여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불렀습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56-262쪽). 

 만일 누구든지 '내재적 삼위일체론'만을 고집한다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경륜적인 삼위일체론'만 고집한다면 '사벨리우스적인 양태론'이 되는 것을 교회 역사 가운데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역사가인 필립 샤프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Many passages of the Nicene fathers have unquestionably a tritheistic sound, but are neutralized by others which by themselves may bear a Sabellian construction ; so that their position must be regarded as midway between these two extremes"(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I, p 674,”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165-166쪽). 

위와 같은 진리인식이 분명한 위트니스 리도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집대성한 교부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이종성, 262, 261쪽) 및 다른 정통교부들과 동일하게 이 두 방면-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모두를 취함으로 삼위일체론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위일체론은 매우 섬세하게 다뤄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은 위트니스 리의 균형 잡힌 삼위일체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저희 측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믿는 것처럼 오해하심으로 다음과 같이 거짓되게 정죄하셨습니다(위 책자, 153쪽). 

 귀측의 비판1 : "지방교회는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이라는 책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등하게 존재하는 분임을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에서는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소유하고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하나님의 세 단계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겉다르고 속다른 것이다"(위 책자, 151쪽) 

 -반박 : 귀하들이 비판을 위해 인용한 위 내용들은 오히려 위트니스 리가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 모두를 지지하는 균형 잡힌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경륜'은 책제목이 말해주듯이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방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지방)교회의 가르침이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귀하들이 오해하는 '한 하나님의 세 단계'라는 표현도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분리할 수 없는 한 하나님(삼일 하나님)으로서 거치신 단계를 말하는 것이지, 양태론자들처럼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아들이 되시고(고유한 아버지는 없어짐), 아들이 성령이 되심(고유한 아버지, 아들은 없어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판2 : "지방교회는 일신 삼위가 아니고 일신 삼역이라는 것이다'(위 책자, 152쪽), '하나님이 잠시 예수 그리스도로 변하여 나타났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고 이미 계신 하나님이... 모양만 달리하여 나타났다고 주장한다"(152-153쪽). '하나님 혼자서 자신의 경륜 을 이루실 목적으로 세 가지 역할을 하셨다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신관이 바로 이 양태론을 따르고 있다... (지방교회는) 한 위격의 하나님이 단지 삼역을 해낸다는 삼중적 의미로만 이해한다(153쪽)'. '그러나 지방교회는 삼위를 믿지 않는다..."(154쪽) 

 -반박 : 위 비판은 (지방)교회는 '삼위'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한 위격'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므로 귀하들이 비난의 근거로 삼은 동일한 책자인 '하나님의 경륜'에서 위트니스 리가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귀 측의 주장이 근거 없는 거짓말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가 귀 측의 주장처럼 정말로 '한 위격'의 하나님만 믿는다면 '삼위'를 언급하는 부분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위트니스 리는 위 책자 도처에서 세 위격의 하나님(삼일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우리가 본 것은 우리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엡 4:6), 그리스도가 계시고(고후 13:5), 성령이 계신다(롬 8:11)는 사실이다. 삼일 하나님(삼위일체)의 세 인격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31쪽). "주님을 찬양하라. 이 놀라운 분, 삼일하나님이 오늘 우리 영 안에 계신다'(38쪽). "오늘날 삼일 하나님이... 죽음에 들어 가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셨다. 그 놀라운 삼일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이 모든 실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 안에 있다"(43쪽).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이다. 부활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삼일 하나님 자신이 있고, 우리의 생명과 본성이신 그분이 있다(169쪽). "우리가 구원받을 때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셨다"(201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은 이제 우리 영 안에 계신다"(247쪽).  

위에서 보듯이 위트니스 리가 '한 위격의 하나님'을 믿는 양태론자라는 귀하들의 정죄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함께 믿는 위트니스 리의 정통적 삼위일체관을 바로 파악치 못하고 경솔하게 단언한 잘못된 정죄임이 밝혀졌습니다. 저희들은 결코 '한 위격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세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시는(상호내주)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은 귀하들의 글을 검토하면서, 귀하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하신 구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실제로는 분리된 세 분 하나님(삼신론)을 믿는 것은 아닌가-세 위격 간의 서로 안에 거하심(상호내주)을 부정함-하는 강한 의구심이 있습니다. 이 점은 추후 규명될 날이 올 것입니다.  

2. 기독론에 대한 반박 

귀 측의 (지방)교회의 신론에 대한 오해는 당연히 기독론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그분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위트니스 리의 말을 '성자가 따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뜻'(위 책자, 155쪽)이라고 엉뚱하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또한 귀하들은 위트니스 리가 쓴 '분리되어 있지 않다'라는 말을 잘못 해석한 나머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지방교회는 생각할 수도 없다'라고 말함으로 (지방)교회 성도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믿음도 없는 사람들처럼 매도하셨습니다. 

-반박 : 위와 같은 오해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구별되나(distincto)' '분리(separatio)'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전통적인 개념(이종성, 그리스도론, 1994년판, 294쪽)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위트니스 리의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귀하들이 '세 위격 간에 구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위 말은 하나님은 분리된 두 하나님 또는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분이시지만(고전 8:4,6), 그렇다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고유성이 혼잡 되지도 않으신다('구별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위트니스 리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고유하고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고 확실히 믿습니다(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지방)교회측 원고 참조). 

성경은 아들 하나님(성자)이 성육신 하셨음을 말하지만 이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과 분리된 성자가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이 상호내주하시는 아들이십니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보내는 쪽과 보냄을 받는 쪽이 분리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이고 비밀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즉 성경은 보내신 분이신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아들과 지상 사역시 서로 안에 계신다(상호내주)고 말합니다(요 8:16, 29, 14:8-11, 17:21,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162-163쪽). 

정통 신학자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상호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증거 합니다. 즉 어거스틴은 상호내재를 "both( 아버지, 아들, 성령님)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로 정의했고, George Bull 주교는 "상호내주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재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로 정의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스트롱도 상호내주를 "거룩한 삼위일체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지방)교회측 원고 참조). 

이처럼 위트니스 리는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기독론을 가지고 있음(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163-169쪽)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이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신 것은 사신 하나님 앞에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3. 인간관에 대한 반박 

 (지방)교회의 인간관에 대한 귀하들의 비판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사람 안에 사탄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요, 위트니스 리가 로마서 6:6과 7:24를 해석하면서 죄와 사망을 사탄과 동일시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차례로 반박하고자 합니다. 

 비판1 : 성경은 사람 안에 사탄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박 : 이러한 주제는 대단히 복잡한 신학적 논쟁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서신 안에서 자세히 다루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추후에 있을 진리 토론시 충분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원칙적인 면만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선 위트니스 리는 사탄을 인격적 존재를 가진 타락한 천사장으로 보며 주관적으로는 타락시 사람 안에 죄(Sin,롬 5;12)로 들어와서 사람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역사하고 있고(롬 7장, 엡 2:2, 마 16:23, 베드로=사탄), 객관적으로는 공중에서 역사 하다가 결박당한 후 무저갱에 갇힐 존재(계 12:9-10, 20:1-3)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의 '사탄이 사람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한 면으로는 사탄이 여전히 사람 밖에서 존재하며 역사 하지만 타락한 사람 안에서도 죄성을 통해 역사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들을 마귀의 자녀- 독사의 자식-라고 말합니다(요일 3:10, 8, 12, 요 8:44, 마 3:7, 23:33). 이러한 말씀들은 사탄이 사람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사탄(마귀)의 자녀 안에서도 유기적인 관계(자녀관계)를 통해 역사 하는 자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요한 복음 8장 44절에서 보듯이 사탄의 자녀들은 아비인 사탄에게서 전수받은 어떠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내주하는 죄(Sin)를 악(the evil)과 동일시했는데(롬7:0-21), 이 '악'은 또한 사탄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악한 자는 사탄 자신인 것입니다(요일 5:18-19, 2:13-14, 3:12, 마 6:13, 요 17:15 원문참조) 

 그러나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자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은 강조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마귀의 자녀(요일 3:10)'가 되었는지 그리고 주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요 3:14, 12:31, 히 2:14)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신학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적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저희들이 귀하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마귀의 자녀가 되었으며 마귀의 자녀들은 그 아비인 마귀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도 다만 비유일 뿐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비판2 : 위트니스 리가 사탄과 죄와 사망을 동일시했다는 비판에 대하여

-반박 : 우선 귀하들이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용했다는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book of Romans uses two terms, "the body of sin(6:6) and "the body of death" (7:24). The body is called "the body of sin" because Sin is in the body. The body simply became the residence of Sin, which is the embodiment of Satan. What, then is "the body of death"? The source and power of death is Satan. Sin is the embodiment of Satan and death is the issue or effect of Satan"(Witness Lee, The Economy of God, P109)

위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는 '사탄의 체현'(the embodiment of Satan)이 죄'(단수인 Sin)라고 했고, '사탄에게서 나온 결과'(the issue or effect of Satan)가 '사망'이라고 했지 귀하들의 비판처럼 죄=사망=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이지만 죄와 사망은 결코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죄와 사망과 사탄을 동일시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는 귀하들의 비판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비판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 말하는 사람 안에 들어온 '죄'가 다만 '불순종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죄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람 속에 들어와서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타락한 사람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인지는 추후 토론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교회와 신앙 97년 9월호, 162-164쪽 참조). 또한 사망이 사탄에게서 나온 결과라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성경이 말하는 바(히 2:14)임으로 별도의 입증이 필요없다고 봅니다.

4. 구원에 관한 반박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과거시제)고도 말하고(엡 2:8), 더욱 구원을 이루라거나(빌 2:12), 더욱 구원을 얻을 것(미래시제)(롬 5:10)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만도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박상걸, 성경적 구원론, 1995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은 위트니스 리의 구원관에 대한 진지한 연구도 없이 함부로 (지방)교회의 구원관이 성경적인 구원관이 아니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저희는 '(지방)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사탄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지 않는다'라는 등 귀 측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단언에 대해 경악할 뿐입니다. 귀 측은 주님 앞에서 충분한 기도 후에 이러한 책자를 발간하셨습니까?

귀 측이 참되게 (지방)교회 성도들의 구원관을 알고자 하신다면 위트니스 리가 장장 천 페이지가 넘게(1084쪽) 믿는 이들의 구원에 관해 밝혀 놓은 책자들인 '신약의 결론-믿는 이들 I, II'(한국복음서원, 1991년)를 정독하여 보실 것을 권하겠습니다. 그러나 귀하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저희의 구원관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삼일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요 1;14, 29, 19:30, 행 20:28). 부활하신 후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요 6:63, 10:10 원문). 그 후 그 영은 믿는 사람들 안에 영원한 생명(요 3:16, 요일 5:11-12)으로 들어오셔서 믿는 이들의 영을 거듭나게(구원)하시고(요 3:6), 점차적으로 혼을 구원하고 계시며(벧전 1:9 원문, 고후 3;18), 결국엔 몸을 구속하심(롬 8:23, 빌 3:21)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롬 5:10 원문참조, 히 2:10).

이러한 (지방)교회의 구원관은 귀하들의 거짓된 정죄(위 책자, 158-161쪽)와 달리 지극히 성경적인 구원관이라고 저희들은 확신합니다.

5. 교회관에 대한 반박

교회관에 대한 귀하들의 비판 요지는 지방교회가 배타적인 교회관을 가졌고,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교회관을 고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난1 (지방)교회가 배타적인 교회관을 가지고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 : 저희들은 '배타적인 교회관'이 아니라 정상적인 모든 믿는 이들이 동일하게 인정하는 '성경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는 저희가 보고 믿는 진리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신실하게 실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1) 교회관 : 성경은 교회(그리스도의 몸)가 주님이 갈망하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마 16:18, 엡 3:9-10). 그리고 목회자들을 포함한 모든 은사자들은 이러한 교회건축을 위해 부르심 받았습니다(엡 4:11-12). 그러므로 무엇을 교회로 볼 것인가는 신앙생활의 목표와 연관지어 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그리스도)의 충만'(엡 1:23)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주님과 하나된 유기체(행 9:4, 요 15:5)만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성교회는 건물이나 사람이 만든 조직(또는 기관)도 교회라는 잘못된 인식(이종성, 교회론, 153쪽 참조)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들인 유기체만'이 교회라고 성경적으로 말하는 (지방)교회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생명도 없는 조직이나 건물이 주님의 몸을 구성한다는 발상은 신앙생활의 핵심을 빗나가게 할 뿐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2) 교회직분 : (지방)교회는 장로와 집사라는 성경상의 직분(딤전 3:1-13)을 인정합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이 다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진리도 믿고 실행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주일 날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소위 목회자만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성직자는 물론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함으로써 직접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고전 14:4 원문참조, 14:1, 31, 벧전 4:10-11, 엡 4:15). 특별히 고린도 전서 14장 4절의 원문에 따르면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하는 자가 교회(그리스도의 몸)를 건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31절은 '너희는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갈망인 교회를 건축하도록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3) 주님의 몸의 분열 : 저희들은 주님의 몸은 하나이며 믿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든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엡 4:4, 고전 1:10-13, 3:3)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교회를 건축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성교회의 태도는 믿는 이들 간의 분열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처럼 보입니다(예를 들면, 통합 측의 최삼경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교파의 분열도 있다고 하고, 고신 측의 전용복 목사님은 분열의 유익성을 말하기까지 함). 그러나 개신교 측의 한 양심적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분열'을 '죄악'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개신 교회는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다. 종교개혁자들 자신이 분열 상태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각기 자신들의 교파교회를 세웠다. ... 1517년부터 개신 교회는 분열, 따라서 예수의 몸을 찢는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빈은 보이는 교회는 분열되어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고 하지만 그것은 성서적 교훈이 아니다"(이종성, 교회론, 152쪽).

비판2 :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교회관은 터무니없고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 : 많은 분들이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한 지방에 한 교회'를 ' 한 지방에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무리로 구성된 교회'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배타적인 교회관을 가졌다는 비판도 이러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귀하들도 인용하셨듯이, (지방)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기성교회 교인들까지)을 그 지방에 있는 한 교회의 지체로 인정(위 책자, 161쪽)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장로교인, 침례교인, (지방)교회 교인의 구분이 따로 없고 거듭난 사람들은 다 '그 지방에 있는 교회(단수)의 구성원'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교회관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귀 측의 교회관은 무엇입니까?

또한 지방의 범위의 문제는 믿는 이들 사이의 분열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한 지방, 한 교회' 원칙은 대부분의 서신서의 명칭(제목)과 각 서신서의 수신인의 범위(고후 8:1, 갈 1:2, 계 1:11, 롬 1:7, 빌 1:1, 골 1:2)를 볼 때 초대교회에서 일관되게 실행된 진리였습니다('도'(province)를 언급할 때는 '교회들'(복수)로, 한 도시(city)를 지칭할 때는 '단수의 교회(행 8:1)'로 구분함).

이처럼 우주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인데 공간과 시간의 제한이 있음으로 편의상의 주거지역인 지방을 기준으로 00교회라고 부를 때(행 8:1, 13:1, 14:23, 딛 1:5) 모든 분열은 즉각 폭로될 것입니다. 주거지역을 기준으로 교회를 구분하는 원칙이 분열을 방지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개신교 신학자의 글을 통해서도 확증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큰 문제중 하나를... 개교회주의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이에 대한 해결책은) 한 교회가 한 지역을 책임지는 형태이다. 이 제도가 정말로 정착되면 교회나 교단 사이의 대립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같은 교단 소속 교인들을 주거지역의 교회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불필요하리 만치 갈갈이 찢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재결합과 연합이 우리의 최대과제라 생각한다"(정훈택, 총신대교수, 교회와 신앙 96년 12월호, 99-101쪽)

지금까지 본 것처럼 귀하들이 (지방)교회를 이단시한 내용들은 오해(양태론, 일신삼역)였거나 성경진리(사탄의 소재, 교회의 범위)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귀 측의 문서를 통한 이단정죄는 한 무리의 신실한 믿는이들에게 반영구적인 상처를 주었습니다.

저희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와 부활 생명의 능력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너무도 쉽게 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현실에 대해 깊은 아픔을 느낍니다. 더구나 비교적 균형있는 관점을 가지고 계신 합동측 목회자(신학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신앙관을 오해함으로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을 문서로 이단시 한 것은 피차를 위해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서에 의한 상처는 반영구적인 것이며 반드시 문서로 치유되어야 합니다. 저희들은 <기독교의 이단들> 책자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조치들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대화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다음 사항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1. <기독교의 이단들>에서의 (지방)교회에 대한 입장은 귀하들 개인의견인지 아니면 합동측 교단의 공식의견인지를 밝혀 주십시오.

2. 앞으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지방)교회를 이단시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 주십시오.

3. <기독교의 이단들>책자는 (지방)교회와 관련하여 <허위사실>을 담고 있음으로 서점재고를 즉각 회수하여 주시고, 재판 발행의 중단을 문서로 약속하여 주십시오.

4. <기독교의 이단들> 책자로 인해 (지방)교회가 입은 심각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귀 교단 소속 신문을 포함한 2개 기독교 신문에 저희들의 본 항의서한 전문과 귀 측의 해명서를 게재하여 주십시오.

5. 만일 귀 측의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다고 느끼신다면 우리는 제 3자가 진실을 판단 할 수 있도록 귀 측이 선정하는 기독교신문 또는 월간지를 통한 지상토론을 제안합니다.

위와 같은 저희 측의 요청에 대한 귀 측의 원칙적인 입장을 1998. 5. 30.(발송 일로부터 30일)까지 팩스로 보내 주시고 원본을 우편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귀 측이 이러한 제안을 무시하고 방치함으로써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귀 측에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양 측 모두를 중재하사 좋은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귀 교단 소속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첨부 :

1. '다락방 류광수 왜 이단이라 하는가'(박진규 목사 저)에 대한 항의 서한 사본 2부

2. 위트니스 리의 라디오 방송국 리스트 1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31. 05:00


찬송가 583 -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 - shulammite son - 지방교회들 찬송가


대가 없이 사랑케 하소서 보상 없이 섬기게 하소서

알아 주지 않더라도 주여 나로 고난 받게 하옵소서

나는 마시지 못 할 지라도 나로 포도주 붓게 하소서

나를 잃어 그들 위로하며 나를 쏟아 축복케 하소서


동정이나 도움 구치 않고 영광이나 부 구치 않아

비참하고 외롭더라도 버림 받고 멸시받아도

나그네 길의 슬픔 모두 참으며 면류관 위해 대가 지불하리라

주님 당신이 자기 땅에서 그러한 길 가셨-듯이

우릴 위하여 주가 기꺼이 모두 잃은 바 되셨듯이


후렴

오 앞길이 얼마 남았나 몰라도 되돌아 가지 않고 갑니다

부당한 고통 받아도 원망 안한 주의 본 배우게 하옵소서

주여 참담한 시련 당할 때 나의 눈물을 닦아 주소서

주가 내 위로 되심 누리며 나로 생명 샘 되게 하소서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8. 05:00

발신인: 지방 교회측 진리변증위원회(DCP Korea)                   2013. 12. 23.

서울 도봉구 창4동 은혜빌딩 101호

전화: 010-3515-3927

수신인: 월간 현대종교 탁지원 대표/ (중국) 현지사역자

서울시 중랑구 용마산로 122길 12 (망우동 354-43)

전화: 02-439-4391  

제목: 현대종교 12월호(2013년)의 거짓 루머 유포에 대한 항의 서한

안녕하십니까? 위 '지방 교회측 진리변증위원회'는 성경의 진리를 확증하고 빗나간 부분들을 변증함에 있어서 전세계 지방 교회들 내의 한국어권을 대표합니다. 이 항의 서한은 귀측의 2013년 12월호 '중국 이단 현황(3)-중국 자생 이단들의 모태 호함파' 기사와 관련됩니다.

귀측의 보도대로라면, 현재 중국에는 거의 남한 인구에 육박하는 약 4천만 명의 성도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워치만 니가 투옥되던 1950년대 초반에 수만 명에 불과하던 성도들이 중국 공산 정부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약 반 세기 만에 수천만 명으로 1000배 이상 증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그분의 도구로 쓰인 워치만 니라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요12:24).

그러나 귀측은 위 중국 내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는 전무하고, 단지 두 성경 교사가 자기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애써 폄하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귀 현대종교와 '현지사역자'께서 이처럼 중국 내의 기득권자의 논리를 추종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공산 정부를 돕고, 참된 성도들을 박해하며, 더 나아가 사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전반적으로 귀측 기사 내용은 그저 '떠다니는 말들'을 마치 '실체적 진실'인양 문자화하여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도 로마 정치와 결탁한 종교세력이 군병들을 회유하여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모략을 꾸민 것이 나옵니다(마28:13-14). 그 결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 갔다는 거짓 루머는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5절). 귀측이 소개하신 중국 내의 두 성경 교사들과 관련된 루머들의 본질은 대부분이 이와 같습니다.

귀측의 보도 태도도 매우 아쉽습니다. 우리는 귀측이 무엇이 두려워 흔한 영문 이니셜 조차 밝히지 못한 채 '현지사역자'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들을 기사화 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이미 명백한 증거와 함께 해명했던 것들마저도 재차 기사화하신 것은 귀측의 저의를 의심하게 합니다. 이러한 보도 태도는 공평하지 않은 것이며, 귀 현대종교의 명성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임을 환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돌이켜 볼 때, 귀 측은 1982년 창간호부터 최근 2013년 6월호 동방번개 특집 기사에 이르기까지 지방 교회들과 관련하여 숱한 왜곡된 정보들을 기사화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귀 잡지 편집장 이영호 목사께서 쓰신 2001년 9월호 기사는 귀측 거짓말의 백미에 해당 될 것입니다. 그분은 워치만 니의 동역자인 위광휘 형제가 중국 곤명 지역에서 사역한 것을 위트니스 리로 착각하고,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곤명 지역 거주 토착인들로부터 「위트니스 리가 '신인합일 사상'을 처음 배워 발전시켰다」라는 소위 '신인 합일설' 특집 기사를 쓰셨습니다. 이러한 보도가 귀측의 실수요 명백한 착각이었음이 밝혀진 후에도 귀측은 사과조차 없으셨고, 이런 거짓 기사는 논문 형태로 지금도 계속 유통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자신이 한 그 말로 장차 심판받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마12:36-37, 고후5:10).

이제 귀측이 '현지사역자' 명의로 보도하신 잘못된 기사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박하고 해명하겠습니다.

워치만 니 관련 : 1. 워치만 니가 교파 사람들을 끌어갔다는 지적에 대해

귀측은 "워치만 니 추종자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이 세운 교회들을 허물고 교인들을 끌어간다는 소문"에 따라 왕명도 선생께서 워치만 니를 만났으나 "그가 왕명도 선생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현대종교 12월호 126-127쪽).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근본원칙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모든 양들은 피 값 주고 사오신 주님 자신의 소유이고(행20:28), 또한 모든 교회들은 주님 자신의 교회입니다(마16:18). 따라서 결코 특정 사역자나 특정 교파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점이 분명했던 워치만 니는 죄인들을 구원받게 한 후, 다만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며, 교파가 아니라 각기 자신이 사는 그 도시를 범위(계1:11)로 몸의 머리되신 주님(골1:18)을 나타내는 성경적인 교회 생활을 하도록 권면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성경적인 권면을 따지러 온 사람에게 워치만 니는 잠잠했을 뿐이고, 상대방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워치만 니와 왕명도 선생이 두 번째 만남 시에 “매우 냉담하고 무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 두 분의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에 불과했습니다.

참고로 '중국어문선교회' 전 편집장 석은혜 선교사는 자신이 쓴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현황과 바람직한 선교 방향'이란 글에서, 한국교회가 한 중국선교의 첫번째 문제점으로 '교파주의와 교세확장 선교'를 지적했습니다.http://cafe.daum.net/chinabless/57o6/7

2. 워치만 니가 투옥된 이유가 재산을 지키려고 로비를 했기 떄문이라는 지적에 대해

귀측은 "워치만 니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삼자교회에 반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려 오히려 삼자교회 지도자에게 로비를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현대종교 12월호, 127쪽).

이 글을 쓰신 익명의 '현지사역자'께서는 "왕명도 선생이 남에게 들은 말"이 어떻게 또 왜 실체적 진실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지키려 한 정황으로 이해될 만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등 자신의 추측과 가정(假定)을 토대로 소위 '카더라 통신' 정도의 루머 전달 역할만 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귀하는 "워치만 니가 일찍부터 변절했을 가능성마저 엿볼 수 있다"는 식으로 워치만 니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 이 글을 쓰신 숨은 목적임을 은연 중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1) 그 당시 워치만 니는 토지개혁에서 사찰이나 예배당 등에 둔 예외 규정에 따라, 고령산에 위치한 훈련센타 건물에 대해 법의 절차를 밟아 청원한 것입니다. 2) 워치만 니는 교회의 공식 지원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3) 고문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왕명도 선생과 달리, 워치만 니는 온갖 회유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감옥 생활 20년 내내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가 생을 마감한 후 베개 밑에서 떨리는 손으로 쓴 종이 한장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워치만 니"

3. 워치만 니가 이성 사역자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지적에 대해

"워치만 니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왕명도 선생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여자 사역자 두 명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그의 주변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현대종교 12월호, 127쪽).

여기서도 왕명도 선생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모함은 이미 공산화 이전부터 그의 사역을 시기하던 사람들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한번은 워치만 니의 병 수발을 위해 모친이 잠시 함께 기거하던 때에, 워치만 니가 어떤 여인과 동거하며 불륜을 저지른다는 헛소문이 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거짓말쟁이의 아비는 마귀 입니다(요8:44).

그럼에도 '현지사역자'께서는 "워치만 니가 징역형에 포함된 간음죄에 대해 스스로 시인했다고 한다"는 식으로 재차 '카더라 통신'을 남발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중국 공산당이 수 많은 외국 선교사들도 같은 죄명으로 강제 추방하던 때입니다. 누구든지 양심이 무뎌지면 결국 믿음이 파선합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20년의 혹독한 감옥 생활 동안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가 양심에 가책될 일을 하지 않았음을 이것보다 더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있을까요?

한편 '현지사역자'께서는 워치만 니가 고문 때문에 거짓 자백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그 당시...교회 지도자들은 고문을 당한다고 해서 거짓 자백을 한 예는없었다"고 단정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의 중국 사정에 무지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왕명도 선생이 바로 고문 때문에 신앙을 버렸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http://pann.nate.com/talk/119930097

참고로 중국 공산당이 집권 후, 지방 교회들, 특히 워치만 니가 사역했던 상해 교회를 와해시키려고 특정인을 회유 혹은 협박하여 거짓 증언 또는 글을 쓰게 한 사례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거짓 증언들을 이용하여 고난받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마24:49-51).

그외 다른 언급들도 유언비어 수준에 불과함으로 더 이상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봅니다.

4. 워치만 니 관련 자료들 소개

우리는 이 글을 쓰신 '현지사역자'님과 독자분들에게 워치만 니의 전기인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한국복음서원, 2007)라는 책을 권해 드립니다. 이 책은 워치만 니를 객관적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입니다(간략한 정보는 여기를 참조: http://www.watchmannee.kr/watchman-nee/index.html ).

-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잡지 중 하나인 Christianity Today 지는 워치만 니를 20세기 가장 영량력 있는 그리스도인 100인 중 한 명으로 추대한 바 있습니다. 또한 미국 하원의 스미스 의원께서는 이러한 워치만 니의 공로를 치하하는 문서를 미국 국회 의사록에 남겼습니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miscdocs/Watchman%20Nee-Congressional%20Record.pdf ).
https://youtu.be/lVhyXgEEw4g )

- 중국 난징 소재 진링(金陵) 연합신학대학의 교수인 왕애명(王艾明) 박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나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동안 지속적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쓴 거의 모든 저작물들을 연구하고 또 읽었다. …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중국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인 거인들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36 )

- '워치만 니의 이해: 영성, 지식, 형성>'(Understanding Watchman Nee: Spirituality, Knowledge, and Formation)이라는 책을 저술한 오동생(吳東生) 박사는 워치만 니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영성 신학은 보편적인 복음주의 신학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토착 중국 신학의 걸작이기도 하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54 )

이외에도 최근에 홍콩에서 전 세계 워치만 니 관련 신학자들이 모여서 워치만 니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곧 책자화 되어 나올 예정입니다.

 

소위 호함파 관련 :

1. '호함파 (또는 외침파)'와 지방 교회들

단적으로 말해서 반 정부적 반 사회적 범죄 집단이고 교리적으로 이단적인 단체라는 의미로 중국 내에서 호칭되는 소위 '호함파'는,순수한 의미의 '지방 교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분명한 근거를 따라 순수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롬10:12-13, 행9:14) 을 하는 무리와 소위 '호함파'는 전혀 무관함을 전에 이미 여러 차례 귀측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데이빗 에드니, 중국 선교, IVP출판부

이 점은 중국 사정에 정통한 많은 전문가들도 인정합니다. 한 예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했고 추방된 후에도 중국을 일곱 차례나 방문했던 데이빗 에드니는, "반혁명 조직, 외침파의 지도세력 적극 타도"라는 문서에 등장한 '체포된 일곱 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체포된 일곱 명이 모두 위트니스 리의 추종자들과 연계된 것은 아니다. 이제 '외침파'(호함파)는 여러 형태의 가정교회 교인들을 포함하는 통칭이 되었다"(데이빗 에드니, 중국 선교, IVP출판부, 1992, 159쪽).

이외에도 영문 위키피디아 '호함파'(The Shouters) 자료가 제시한 출처들(China Prayer Letter 제 48호, China’s Christian Millions 81쪽, China: State Control of Religion 31쪽)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 '호함파' 라는 말은 "삼자교회 가입을 거절하는 모든 크리스천 그룹"(any Christian group which refused to join TSPM)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귀측은 '호함파 = 위트니스 리 추종자'라는 잘못된 개념을 토대로 기사를 쓰심으로 전체 기사들 중 적지 않은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2. 소위 '호함파'의 폭력성에 대해

귀측은 경찰차를 뒤짚은 사진과 함께 "간혹 호함파 신도들에 의해 일반 교회당지방 관공서와 파출소가 공격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귀측은 마치 이런 폭력이 지방 교회측 성도들에 의해 행해진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 없는 모함이요 심각한 사실 왜곡입니다. 전문가들은 '호함파'가 '삼자교회 가입을 거부하는 모든 크리스천 그룹'을 가리킨다고 정의하고 있음을 환기시켜 드립니다. 전 세계에서 지방 교회측 성도들이 정부 권위에 대항하거나 교회당을 공격한 사례는 지금까지 전무합니다.

이슬람교나 다른 사이비 단체와 달리,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는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참고로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 13장 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라는 말씀에 대해, "가이사가 임명한 관리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들로 인정하여 하나님의 대표 권위자로 여겼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3. 이상수 형제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르라고 했다는 거짓 증언에 대해

'현지 사역자'께서는 "중국에서 위트니스 리가 직접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여 섬기기를 요구했다는 증언들도 많은 기록들 속에 나타난다. 중국 당국이 정리한 호함파 자료들에는 그런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호함파가 '상수주파(常受主派)'라고도 불린다)."라고 적고 계십니다(현대종교 12월호, 130쪽).

이 역시 심각한 사실 왜곡에 불과합니다. 귀측도 바르게 지적하신 것처럼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통해 산출된 교회들이 전 세계에 수천 개가 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일로 시비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산 치하의 중국 본토에만 이런 터무니 없는 논란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귀측은 '순수한 지방 교회 성도들'과 '온갖 종류의 단체가 포함된 개념인 호함파'를 동일시함으로 이런 명예훼손적인 거짓말을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1) 1949년 중국을 떠난 이후 위트니스 리가 중국을 재방문한 사실이 없다는 법정선서 기록, 2) 상수주파를 향해 기상천외한 사람 숭배를 즉각 그치라는 육성녹음과 녹취록을 귀 현대종교 측에게 제시하고 강력히 항의한 바 있습니다.

귀측은 이 문제에 대해 타인의 증언말고 위트니스 리가 육성 혹은 자신이 쓴 글로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직접 요구한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떳떳하게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고 지금처럼 유언비어에 속한 자료만 있다면, 더 이상 이런 거짓말로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으시기를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4. 위트니스 리의 신인합일 사상이라는 왜곡에 대해

현지사역자께서는 “위트니스 리의 신인합일(神人合一사상은 언제든지 그 지도자나 추종자들 중 누구라도 자칭 하나님이 될 길을 열어두고 있는 교리라는 사실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현대종교 12월호, 130쪽).

정통 교부들이나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혹은 신화(神化)의 가르침은 결코 중국 내의 자생 이단 교주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만 참 하나님 또는 참 주님이니 교주인 자신들을 경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이들 모두가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을 것을 가르칩니다. 즉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은 거듭나고, 거룩케 되고, 새롭게 되고, 변화받고, 형상을 본 받고, 영광에 이름으로 연합이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현지사역자'님은 중국 내 이단들인 '상수주파', '동방번개파', '피립왕파', '주신파'가 호함파 이론(신인합일 사상?)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며 통틀어 비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가르침을 자세히 검토해본다면, 순수 지방 교회들이 참으로 믿고 실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위 열거한 이단들은 귀측의 주장처럼 순수 지방 교회들의 '분파'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방 교회측 집회에 한 두번 참석한 것을 빌미로 지방 교회측과 연관지어 비난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즉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은 장로교단 소속 창동교회 장로 출신인 박태선이 만든 '천부교'(신앙촌), 더 나아가 "15세에 가족들을 따라 장로교 신자가 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알려진 문선명이 세운 '통일교'도 장로교 이론에 뿌리를 둔 장로교의 분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결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순수하게 따르는 지방 교회들은 '호함파'와 달리, 정부에 대항하거나,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거나, 성경과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첨부서류 첫번째 자료를 참조). 항간에 떠도는 루머와 거짓 자료들은 지방 교회 성도들이 참되게 믿고 실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귀 현대종교측이 더 이상 어둠의 세력에 이용당하지 않기를 정중하게 당부드립니다.

아울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차이나에이드 협의회'(China Aid Association)의 2013년 10월 8일자 보도 내용 중 일부를 우리의 결론글 중 일부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차이나 에이드'(ChianAid)는 중국 본토 전역에서 벌어진 '외치는 자들'에 대한 박해에 깊이 우려하고, 중국 정부가 "이단"이라는 말을 빌려 이러한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격분한다. 일곱 명의 '외치는 자들' 그리스도인들이 허난(河南)성 핑딩산(平?山)시에서 "이단" 범죄로 선고받은 것과 함께 이번 사건도 심각한 종교 탄압의 사례들이다. 지방 교회(the Local Church)가 과거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이 단체를 더 이상 이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단"이라는 낙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첨부서류

1. 중국내 지방 교회 한 장로의 ‘상수주파’의 기원 등에 관한 증언(필독-이 자료를 읽으시면 순수 지방 교회 성도들과 반 정부적이고, 반 사회적이며 이단적인 여타 분파들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90

2. 위키피디아 '호함파' 자료(영문): '함파 자료(한글) 클릭'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D%95%A8%ED%8C%8C

3. 상수주파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육성증언 녹취록: http://local-church.tistory.com/107

4. 과거에 대종교측에게 보낸 상수주파 관련 항의 서한들:
http://www.forthetruth.or.kr/mboard.php?bcode=notice&mode=read&bidx=1287

http://forthetruth.or.kr/booklets14_13.htm

http://www.localchurch.kr/5057

5. 차이나 에이드 협의회 보도 내용 (전문): http://local-church.tistory.com/143

6. 왕애명 박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관련 공개 간증:
http://local-church.tistory.com/136

7. 워치만 니의 영성신학에 대한 오동생(吳東生) 박사의 평가 :
http://local-church.tistory.com/154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3. 05:00

교회의 입장 문제 - 소개의 말

오늘날 주님에 대한 느낌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이 땅 위에서 걷고자 하시는 길은 교회의 길이고, 하고자 하시는 일은 교회의 일임을 알 것이다. 이 십여 년 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개인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내리막길을 걸으며, 일할수록 주님의 능력과 축복을 잃게 된다는 것을 계속 보여 주셨다. 그런 반면에 교회적인 봉사는 날이 갈수록 오르막길을 걸으며 일할수록 주님의 임재와 확증을 갖게 된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주님은 교회의 길을 가고 교회의 일을 하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개인적인 길을 가고 개인적인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잃게 된다. 모든 주님의 축복을 얻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임재이다. 주님의 가장 큰 임재는 바로 주님의 가장 큰 축복이다.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가지려면 주님이 정하신 길을 걸으며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면서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얻으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이 정하신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주님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어찌 주님을 만지며 주님의 임재를 가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 주님이 가시는 길은 교회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여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 섬기며 또한 형제 자매들을 교회적인 봉사 안으로 이끌기 바란다.

교회의 입장 문제

교회의 입장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주님은 교회의 일정한 입장을 확실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축복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빛도 교회 안에 있으며 특히 주 예수 자신의 생명도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평상 개인적인 생명을 중요시하지만 사실상 주님의 생명은 교회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영에 속한 것들을 교회 안에 두셨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인지의 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만일 하나님이 영에 속한 많은 것들을 우리 개인에게 주셨다면 문제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하나님은 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교회 안에 두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곳이 교회인지의 여부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만일 내가 왕래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극히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비유를 말하겠다. 여기에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자매가 있다 하자. 그녀가 어떤 것을 검사하기 위해서는 유리 조각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균을 검사하는 데는 유리 한 조각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과 대화하러 찾아온 어떤 형제나 자매에게 물 한 잔을 주려 한다면 당신이 매일 사용하는 그 유리 조각 하나는 소용이 없다. 유리 한 조각이 당신의 실험실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많은 용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에게 물 한 잔을 줄 때는 그 유리 조각이 조금도 쓸모가 없다. 그는 바퀴벌레나 새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그에게 물 한 잔은 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유리 한 조각으로는 필요를 채울 수 없다. 많은 문제들이 유리 한 조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여러 유리 조각이 합하여 만들어진 컵이어야 이 갈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평면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입체가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못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의 영적인 공과를 말살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누구나 영에 속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때로 그것들 중에는 최고의 영적인 공과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적인 것들을 교회 안에 두셨기 때문에 개인을 의지해 구할 때 얻지 못하게 된다. 이 말은 개인에게 축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개인을 빙자해 얻으려 할 때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그분의 풍성을 교회 안에 두셨다. 교회는 유리 컵처럼 하나의 입체적인 것이다. 유리 컵의 유리로만 생수를 마실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만이 많은 영에 속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많은 영에 속한 것들이 개인에게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상당히 분명하며 기묘하다. 그분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다음 『음부의 문이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이 약속이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많은 경우 개인이 음부를 저항하기란 얼마나 쉽지 않은지. 그러나 일단 교회가 나오면 사탄은 실패한다. 나는 이 여러 해 동안 개인에게 축복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개인에게 축복이 있었지만 그 축복은 제한되었다. 오직 교회 안의 축복만이 무한하며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의 길을 떠날 때 그의 축복이 제한되고 하나님의 임재도 제한 된 것을 볼 것이다(축복과 임재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제한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만지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나의 솔직한 말을 용서하라. 특히 최근 십 년 동안 나는 사람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지 주목하여 보아 왔다. 이상한 것은, 어떤 형제들은 주님을 안 지 이삼십 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교회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과거에 그가 얻은 것도 점차 미약해지게 되고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들도 거의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무리의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앎으로써 머리의 풍성이 그들의 풍성이 되었으며, 그들은 쉬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을 관심할 뿐 아니라 그가 왕래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교회인가의 여부를 관심해야 함을 젊은 형제 자매들이 주의하기 원한다. 이것을 기억하라. 한 사람일 때는 개인이나 두 사람은 교회일 수도 있고 두 개인에 불과할 뿐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오백 명이나 천 명이 합하면 교회라고 생각지 말라.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천 명이 교회가 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천 명도 천 명의 개인이고, 개인이 보다 많을 뿐 여전히 교회가 아닐 수 있다. 여기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사람이 교회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마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 명도 교회가 아니고 천 명의 개인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 명도 교회가 아니라 만 명의 개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교회는 특별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특별히 교회의 입장을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

오늘 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이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교회를 이룰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분명히 보여 준다. 첫째는 성령의 권위이고, 둘째는 지방의 경계이다.

1. 성령의 권위

우리는 반드시 성령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이상수(李常受)형제나 장우지(張愚之)형제나 유성화(兪成華)형제가 아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성령이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 즉 권위와 능력과 생명인 성령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한 성령의 생명과 능력과 권위가 있을 따름이다.

오늘 이 자리에 연장한 형제들이 많다. 예를 들어, 두(杜) 형제가 『나는 이십 년간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내세우거나 어떤 일을 전개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하자. 그럴 때 여러분은 여기에 방해하는 어떤 것이 추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두(杜) 형제가 있을 뿐 성령이나 교회는 없게 된다.

여러분은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이 곧 교회가 부재하는 곳임을 기억하라. 교회는 주님의 성령이 그-교회-를 통해 아무 방해 없이 그분의 뜻을 표명할 수 있는 곳이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마리아가 그분께 드린 신체를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성령 안에서 주님은 오늘날의 교회를 사용하신다. 교회의 가장 높은 경지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교회라 불리울 수 있다.

오직 성령에게 권위가 있음

좀 더 추가하여 먼저 연장한 형제들에게 말하겠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여러분은 젊은 형제들에게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기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권위에 복종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구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인가? 내가 말하지만, 젊은 형제들이 자신을 빙자하여 한 말이 장애가 되듯이 장년 형제들이 자기를 빙자하여 한 말 또한 장애가 될 수 있다. 오직 성령의 권위만이 참 권위이다.

오늘날 왜 젊은 형제들이 연장한 형제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연장한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배운 공과가 많고 하나님의 권위를 많이 알며 그들에게서 성령이 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수도관이 쓰레기와 장애물이 없이 여러 해 동안 흘렀기 때문에 잘 통하는 것과 같다.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들을 순종하는 것은 연장자가 권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연장자들을 통해 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해 동안 주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의 몸에서 쉽게 흘러나가는 것이다.

내가 연장한 형제들에게 순종하기를 배우는 것은 그들 몸에 성령의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내 몸에 있는 성령의 권위를 쉽게 잃게 된다. 우리는 결코 연장한 형제들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연장한 형제들을 쉽게 통과하는 성령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교회 안에는 오직 성령의 권위가 있을 따름이다. 개인에게서 나온 것은 권위가 없다. 장로들이나 연장한 형제들이나 영적인 사람에게 권위가 없고 오직 성령에게만 권위가 있는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성령의 권위의 출구

요즘 나는 한 가지 일을 보았다. 어느 형제가 몇 년 전 그의 손에 무거운 물건을 들고 먼 길을 달렸었다. 후에 그는 손이 약간 결린다고 느꼈는데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그 손이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형제는 『온 몸이 내 것이지만 이 손만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지체는 남의 것같이 나와 다툽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종종 병을 앓은 사람이므로 언제든지 어떤 지체의 존재가 느껴질 때 그 지체가 병에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몸이 최상일 때는 몸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때이다. 언제든지 폐의 호흡이 느껴질 때 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심장의 뛰는 것을 느낄 때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십여 년 동안 치아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치아의 존재를 느낄 때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말하지만 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존재를 느끼는 정도의 하나일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인 것이다. 오늘 아마 당신은 당신의 손가락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손가락의 존재를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상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손을 다쳤다면 하루 종일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어떤 것을 느낄 때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몸이 그 지체를 사용하지 못할 때 몸에는 문제가 생긴다. 교회 안에서 성령이 완전한 권위를 얻으려면 아무 장애 없이 온 몸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한 지방에 방해물이 생길 때 몸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권위 아래 굴복할 때 성령이 어떤 사람을 사용해도 몸 안에 장애물이 없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 권위가 순조로울 그 때가 바로 몸이 건강할 때이다. 모든 사람이 성령에게 쓰임받을 수 있을 때, 그곳에서 성령은 권위를 가지며 모든 것이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성령의 완전한 권위가 바로 교회의 입장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오늘 어떤 단체에 성령의 권위를 순종하는 형제 자매가 있고 순종하지 않는 형제 자매들도 있다면, 당신은 거기에 교회의 입장이 없음을 볼 것이다. 교회의 입장은 바로 성령이다. 언제든지 성령에게 득죄할 때 교회의 입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오늘 모든 형제 자매들의 결정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아니다. 오늘 천 육백 명이 다 손을 들어 어떤 일을 통과시켰다고 해서 이 천 육백 명이 손 든 것이 곧 교회는 아니다. 이는 천 육백 명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권위가 집행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성령의 권위가 없다면 교회의 입장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권위를 순종해야만 교회의 입장이 있다.

몸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자유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몸이라 부른다. 몸은 다툼이 없고 어려움이 조금도 없고 어떻게 시키든 그대로 하는 것이 바로 몸이다. 당신과 다투는 것은 몸이라 칭하지 않는다. 한 지방 교회가 나타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성령을 순종할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런 순종이 나타날 때 교회가 나타나게 된다. 만일 어떤 형제가 자기를 좇아 말하고 결정하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권위를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그 지방에는 교회가 없는 것이다.

어떤 곳이든 간판을 걸어놓는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 형제 자매들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성령의 권위에 순종함으로 성령의 권위가 장애 없이 통과되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의 책임을 맡고 있는 형제들은, 앞으로 이삼십 년, 오륙십 년이 지난 후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희어진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권위를 전하는 자와 권위의 출구에 불과할 뿐 여러분 자신은 권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언제든지 여러분 자신이 권위가 될 때 모든 것은 다 끝나게 된다.

사역하는 형제 자매들은 성령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최소한 어떤 주장은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내가 말하지만 그 주장을 내세울 수 없다. 주님은 당신에게 권위를 주지 않았다. 여러분 자신은 권위의 출구가 될 수 있을 뿐 권위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당신이 백 세까지 살았고 백 년 동안이나 주님을 따랐다 하더라도 당신이 어떤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렇지 않다. 단지 우리의 영이 훈련과 배움을 가졌고, 우리의 영이 남보다 조금 더 예민하고, 빛이 조금 더 많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본적인 원칙을 조금 더 만졌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며, 성령의 권위가 남보다 더 쉽게 우리 몸에서 나타난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권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권위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권위 또한 우리의 봉사 중 하나이다. 나는 각 집회소 책임 형제들이, 권위가 여러분의 사역과 관계되고 여러분의 많은 사역 중 하나임을 주의하기 바란다.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다른 형제가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고 다른 형제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내가 이해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알려 주면서, 『형제님, 당신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권위로 형제를 다스릴 것이 아니라 권위를 사용하여 형제를 공급하며 섬겨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성령의 권위의 출구가 되어 형제들을 공급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위를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가 공급으로 흘러나가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의 지위가 어떠하든, 당신이 감독이든 사도이든 집사이든, 당신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당신 개인의 권위가 나올 때 당신에게는 교회 입장이 없게 되고 전체 교회의 입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 교회의 입장은 성령의 권위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성령의 권위에 득죄할 때 문제가 생기며 교회의 입장은 없게 된다.

온 교회가 성령의 권위에 순종할 때, 그것은 마치 주님이 이 땅에서 마리아가 드린 몸을 사용하신 것처럼, 그분의 몸을 사용하여 말하고자 할 때 말하고 듣고자 할 때 들으며 걷고자 할 때 걷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 준비한 몸은 가장 적합하다. 그 몸은 몸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주님 자신 같을 정도로 협력할 수 있었다. 그 화합과 하나를 위해서 조금도 어려움과 다툼이 없었다.

이것은 오늘 손을 쓰려 할 때 쓰지 못하고 눈을 사용하려 할 때 사용할 수 없고 말하려 할 때 혀가 돌아가지 않고 머리를 사용하려 할 때 머리가 생각지 않는 것과 다르다. 이는 교회가 있지만 없고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처럼 주님이 자연스럽게 사용하여 통과하실 수 있으며, 그 통과는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합치되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성령의 권위가 교회를 통과할 때의 그 자유로움과 합함은 그 권위가 통과하지 않는 것 같다. 성령의 권위가 완전히 통행될 수 있는 것이 곧 교회이다. 언제든지 저항과 저지가 있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언제든지 움직이지 못하고 개인이 나올 때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교회를 파괴하며 교회라 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오늘날의 문제로 돌아와 말하겠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위 교회라 일컫는 교파를 비판할 자유를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일은 우리 중 교파에서 나온 많은 연장한 형제들이 이런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많은 형제들은 세상과 죄에서 나왔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단체 속에 아직도 많은 사람의 뜻과 결정과 방법과 조직과 명칭과 사람의 전통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많이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를 용서하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곧 교회 안에 있는 성령의 권위를 순종하고 세우며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님이 용서하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성령의 권위는 사람이 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형제들에게 얕은 비유로 말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내일 호랑이 한 마리를 내보낸다면 호랑이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대를 붙여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럴 필요 없다. 호랑이는 경비가 없이도 스스로 보호할 줄 안다. 성령은 우리의 부축이 필요하지 않다. 성령의 권위는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열심을 내어 그것을 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권위가 계속 나타나도록 단지 헌신하고 무릎 꿇으면 된다. 지금은 기꺼이 헌신하겠느냐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성령의 권위는 나타날 수 없다. 오늘날 문제는 우리의 헌신이 충만한가에 있다.

나는 우리가 성령의 권위를 위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헌신하기 바란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교회 안에서 당신이 머리가 되소서. 나로 하여금 방해하고 저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나에게 개인적인 것이 없게 하소서.』

여러분은 교회 안에 어떤 개인적인 것이 들어올 때,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간에 교회 안에 다른 어떤 것이 추가되었으며 장애물이 생겼음을 알아야 한다. 내 몸에는 오직 내 자신의 지체만 담을 수 있다. 내 몸에 다른 사람의 것을 들어오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제일 좋은 것일지라도 내 몸에 둘 수 없다. 내 몸에는 내게 속한 것들만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것이 아주 귀하다 해도 내 몸에 둘 때 아마 독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 것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오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이 매우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성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그것을 가지고 들어올 때 입장은 없어진다. 교회 안에는 성령이 하나요 권위도 하나요 능력도 하나요 교통도 하나이며 이름도 하나이다. 무릇 성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교회 안에 둘 때 즉시 입장을 파괴하며 교회는 사라진다.

성령이 시작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님

오늘 내가 한 마디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상해에서 전도회나 신학교나 성경 학교나 사경회를 세우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성령에게 순종할 수 없고 사람의 권위가 나오고 개인의 것이 나올 때 교회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시작한 것이 성령이 아니라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나는 형제 자매들이 이 심각성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몇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공장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불가능하다. 당신이 믿는이든 믿지 않는 이든, 당신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든 없든, 당신은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성령에 의해 시작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어느 누구의 시작으로도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본래 사람에게는 성령의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권위가 없다면 교회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어떠하든, 당신에게 성령의 시작하심이 없다면 교회를 세울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시작이 어떤가를 물어야 한다. 성령의 시작하심이 없이는 어떤 시작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아래 굴복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권위 아래 두어 자신의 자유함을 구하지 않고 완전히 그것에 제한받아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권위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다 통행되게 해야 한다.

2. 지방의 경계

교회는 또한 두번째 입장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 것이 없어도 교회의 입장이 없게 된다. 여러분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권위를 살아 나타내고 성령의 권위 아래 살고 있는데도 교회를 세우기에 충분치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충분치 않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첫째는 성령의 권위이고 둘째는 지방의 경계이다. 당신이 이것을 보지 못했다면 교회 입장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당신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이것은 금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또한 땅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절반은 하늘에 속하고 절반은 땅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부분은 성령의 권위를 말하고 땅에 속한 부분은 지방의 경계를 말한다. 이것은 성경 안에 매우 기묘한 일이다. 성경은 교회가 완전히 지방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예루살렘은 하나의 지방이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고린도도 하나의 지방이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서 안디옥은 하나의 도시이며, 「에베소 교회」에서 에베소는 하나의 항구였다. 성경 안에 모든 교회의 입장은 모두 존재하는바 지방 위에 세워진 것이고 지방을 경계로 삼는다.

여기서 특별한 한 가지를 여러분이 주의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상해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교회의 입장에 서 있으려면 오직 성령과 상해의 입장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성령의 입장 위에 서야 하겠지만 또한 상해의 입장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상해가 우리의 거하는 지방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지방을 다른 것으로 바꿀 때 여러분은 즉시 교회의 입장을 잃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겠다

교회와 교회들

사도행전에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교회를 말할 때 헬라어와 영어와 중국어에서 모두 복수로 되어 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인 것이다. 왜 복수인가? 그것은 당시 유대가 로마의 한 도(道)로 되었기 때문이다. 한 도에는 많은 지방이 있다. 그러므로 한 도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다. 성경에는 지방 교회가 있을 뿐 도(道) 교회가 없다. 갈라디아 같은 경우 하나의 도이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말한다.

에베소는 하나의 항구이자 지방이기 때문에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단수이다. 성경 안에서 이 점은 매우 분명하다. 예를 들어, 빌라델비아는 하나의 도시이므로 오직 한 교회밖에 없다. 아시아 곧 지금의 소아시아는 큰 도(道)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라 하고 아시아 교회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 지방에 오직 한 교회뿐임

여러분은 세계 교회가 없다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틀렸다. 국교회가 없기 때문에 성공회(영국 교회)도 틀렸다. 도교회가 없으며 민족 교회도 없다. 성경에는 다만 가장 작은 행정 단위의 교회가 있고 오직 지방에만 교회가 있으며 도시에 교회가 있을 따름이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결코 다른 지방에 있는 교회와 합하여 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 한 남편에게 한 아내밖에 없듯이 한 도시에는 한 교회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안디옥은 안디옥 교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안디옥 교회라고 말했다. 만일 안디옥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한 지방에 많은 교회들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한 교회만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는 고린도 교회들이나 안디옥 교회들이 없다. 성경에서는 안디옥에 있는 교회, 빌립보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를 말한다. 다 단수로 되어 있다. 안디옥이나 빌립보나 빌라델비아에는 교회들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심은, 영적인 면에서는 성령의 권위이고 외관으로는 지방의 한계이다. 고린도 교회가 교회를 네 부류로 나누려 할 때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그것은 당 짓는 것이고 육에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린도인들이 바울교, 게바교, 아볼로교, 그리스도교 등 여러 작은 교회들로 나누려 할 때 성령은 육에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도시, 한 지방에는 오직 한 교회밖에 있을 수 없다. 교회가 하나 더 많아질 때 그것은 곧 당 짓는 것이요 하나님께 버림받는 종파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육에 속했다. 왜 그런가? 한 지방에는 두번째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오직 한 교회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가 있을 때 두번째 것은 당을 짓는 것이요 육에 속한 것이다. 한 지방에는 한 교회 이상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다고 말하지만 영적인 양식은 교회를 세우는 충분한 입장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게 하려고 교회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충분한 입장이 될 수 없다. 사람에게 성경을 알도록 가르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입장으로 충분치 않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부흥이 필요하다면서 부흥회(會)를 만든다. 최근 어느 지방에 흥분만을 위한 흥분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그러나 흥분도 교회를 세울 입장이 못 된다. 사람은 교회를 세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교회를 세울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에게는 다 교회를 세울 입장이 없다. 에베소는 교회를 세울 입장이 있으므로 바울은 에베소보다 못하다. 고린도는 교회를 세울 입장이 있다. 그러나 바울, 게바, 아볼로는 모두 고린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를 세울 입장이 없으며 자격이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다 지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없으면 합당치 않고 교회를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이 지방 경계를 입장으로 삼으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상해에는 오직 한 교회밖에 있을 수 없음

혹 상해에 교파의 위치나 종파의 위치나 다른 어떤 것 위에도 서 있지 않고 상해의 위치에 서 있는 교회가 있다 하자. 그럴 때 그 교회를 상해 교회라고 부른다. 가령 나와 우지(愚之) 형제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그로 남양로(南陽路)에서 모임을 갖게 하고 나는 북사천로(北四川路)에서 한 장소를 찾아 집회를 갖는다 하자. 그는 남으로, 나는 북으로 가므로 방향이 상반되는 것 같다. 내가 북사천로에서 말씀을 전하여 한 무리의 죄인들이 구원받았다 하자. 남양로의 집회장소에 이천 사백 명이 앉을 수 있다면 나는 북사천로에서 그것보다 크게 이천 육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집회소를 지을 수 있다. 나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배당을 세워 선교를 한다.

내가 말하지만, 내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말씀 전하고 온전케 할 수 있겠지만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상해를 입장 삼는 그 자격이 이미 사람에 의해 강탈되었기 때문이요 상해에는 오직 한 교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없는 지방에서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음

예를 들어, 오늘 귀주(貴州)의 필절(畢飾)이라는 지방에 아직 지방 입장에 서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없다 하자. 누가 귀주의 필절에 가서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생각은 가(可)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 지방에 오직 한 교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하나 더해졌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한 남자에게 한 아내밖에 없는 것과 같다. 당신이 아내를 취하지 않은 남자에게 시집갈 때 당신은 아내이다. 그런데 만일 어느 남자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합당하겠는가? 당신은 오직 아내가 없는 남자에게만 합당하다.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교회가 지방적인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는 교회가 지방적인 것임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서신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 또는 에베소 교회라고 말하고 계시록에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라고 말했다. 한 지방에 오직 한 교회밖에 없다. 교회는 지방을 떠나서 독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없는 지방에서만 교회를 세울 수 있음을 기억하라. 교회가 이미 세워진 지방에서 우리는 교회에 가입할 수 있을 뿐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일단 교회를 세울 때 그것은 당을 짓는 것이요 종파이며 하나님이 정죄하는 바이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겠다. 한 여자가 아내로 시집가는 것과 첩으로 시집가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내가 말하지만 위치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 똑같다. 입장이 다를 뿐 다른 것은 다 똑같다. 그녀가 대표하는 면에 있어서 다 똑같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입장이다.

분열이란 무엇인가

분열이란 무엇인가? 분열은 곧 입장이 없는 것이다. 입장이 없는 것은 분열이요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것이다. 내가 다시 귀주의 필절을 예로 드는 것을 용서하라. 당신이 필절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과 북사천로에 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북사천로에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을 구원시킬 수 없다거나 사람으로 영생을 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북사천로에서는 사람이 구원받은 다음에 다 잃어버린다는 말도 아니다. 복음의 진리는 어디서나 변함이 없다. 말씀도 매우 분명히 전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똑같은 것 같지만 당신은 북사천로에서 교회를 세울 수 없다. 당신이 북사천로에 가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분열이다. 그러나 당신이 귀주의 필절에 가서 전한 메시지가 북사천로에서 전한 것과 똑 같다 하더라도 두 군데 다른 지방에 있는 것이며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귀주의 필절에 있는 것은 교회일 수 있지만 북사천로에 있는 것은 분열이다. 똑같은 교리가 두 지방에 있지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이 귀주의 필절에서 세운 것은 주님의 상이요 주님의 잔치이며 만찬이다. 가령 당신이 필절에 있는 상(床)을 상해의 북사천로로 옮기고 사람도 모두 그곳으로 인도했다 하자. 그곳에서 당신은 과거에 하던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한다. 이러한 것들에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필절에 있을 때는 교회이고 북사천로에 있을 때는 분열이다. 당신이 아내 없는 남편에게 시집가면 아내이지만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면 아내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없는 지방에서 교회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있는 지방에서 당신은 교회에 가입할 수 있을 뿐 따로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원칙이다. 당신이 「지방」을 돌아보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끝난다. 당신이 기본적인 입장을 버릴 때 당신은 입장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를 깨닫기 바란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고, 둘째 하나님의 교회가 지방의 경계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교회의 입장은 성령의 인도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북사천로에 간 것은 성령을 좇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성령의 인도를 좇은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먼저 당신의 지방이 틀렸다고 논쟁하겠다. 당신은 성령의 첫번째 제한을 거스렸으므로 죄를 범한 것이며 당신은 설 곳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동시에 성령이 세운 지방의 범위를 주의해야 한다. 지방이 범위이다. 당신은 결코 임의로 움직일 수 없고 다만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성령이 세운 지방의 범위 위에서 자유함을 가질 수 없다.

지방은 종파의 성립을 억제함

형제 자매들이 이 기본적인 원칙을 굳게 붙잡는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당신은 많은 소위 교파, 교회, 단체와 조직에 대해 매우 투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입장 위에 세워지지 않은 모든 단체가 교회가 아님을 볼 것이다. 당신은 분명하다고 느끼는가, 이상 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권위를 말하다가 지방 경계를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기 때문에 매우 기묘하다고 느꼈다. 성경에서는 교회 입장이 성령의 권위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성령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지방 입장이 더해져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두 가지가 합해져야 교회를 이룰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 다시 본다면 갈수록 분명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이 이 년 동안 만일 교회들이 지방의 제한을 받았다면 혼란에 이르지 않고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했다면 천주교와 개신교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백여 교파, 그리고 전세계의 육백여 큰 단체와 오천 개의 작은 단체들이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 지방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지방은 변하지 않음

내가 행정면에서 한 마디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왕조는 변하여도 지방은 변하지 않는다. 당(黨)이 변하여도 지방은 변하지 않는다. 나라가 변하여도 지방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상해는 여전히 상해이고 장춘(長春)은 여전히 장춘이다. 청나라 때에도 상해를 상해라 하고 중화민국 때에도 상해라고 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상해라고 한다. 항쟁 (抗爭)시기에 국가 전체가 거의 중국의 모습을 잃었지만 지방은 변함이 없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지방만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지방의 한계이다. 우리에게 로마 그 지방에 있는 교회가 있을 뿐 로마제국 교회는 없다. 명칭은 같아도 사실상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이 로마시의 그 교회는 인정하지만 로마 제국의 그 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지방 입장을 지키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반드시 지방 입장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 여러 해 동안 이 입장 위에 서서 다른 이름들을 거절해 왔다. 어떤 단체이든 상해를 입장 삼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봉사는 상해 교회를 건축하기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밖의 사람들과 접할 때 당신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내용면에서 성령의 권위가 있고 외관상으로는 지방의 경계가 있다. 성령의 권위에 지방 입장이 추가되어야 교회인 것이다. 속에 성령의 권위가 없고 밖에 지방 입장이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 입장과 영적인 축복

교회의 입장이 분명할수록 영적인 축복이 더욱 풍성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몇 년 사이에, 특히 이 일 년 동안 교회 입장을 특별히 축복하셨음을 본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개인의 길이 무엇이고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권위가 모든 사람 위에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동역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당신은 주님의 축복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어떤 지방 교회의 인원의 증가는 몇 퍼센트가 아니라 두 배, 다섯 배, 열 배가 될 것이다.

대북은 본래 삼십여 명밖에 안 되었는데 지금 이미 천 명이 되었다. 우리가 몇 형제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매우 열심히 수고했다. 하나님은 계속 축복하고 계시고 사람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내가 홍콩에 있을 때 어느 형제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그 형제가 교회를 아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대북에 있는 교회는 음력 설날 복음 집회를 본래 이 상수 형제님이 책임지도록 준비했었는데 후에 이 형제님이 어떤 일로 내게로 오게 되어 그들은 매우 실망하여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상수 형제님은 그 때 『내가 볼 때 이 상수 한 사람이 많은 것은 단지 한 형제가 많은 것에 불과하고 이 상수 한 사람이 적은 것은 단지 한 형제가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만일 대북에 교회가 있다면 이 상수 한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은 한 형제가 더 있고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대북에 교회가 없다면 이 상수 한 사람이 가버리는 것은 대북의 절반이 가버리는 것이다. 그후 결국 대북에 있는 형제들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자신이 복음 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형제들도 복음을 전해서 천 사백 명으로 하여금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 이틀의 복음 대회에서 첫날 침례받은 인수가 이백 이십 팔 명이었다. 그러므로 대북은 한 형제가 있으나 없으나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제 그 형제의 편지로 돌아가 보겠다.

나는 그 형제가 한 말을 좋아한다. 『나는 우리 형제들이 동역을 배우고 주님을 잘 섬긴다면 삼천이 아니라 만 명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다 소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기능을 발휘할 때 오백이 오면 오백 을 소화하고 천 명이 오면 천 명을 소화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들이 있어야 함

어떤 사람은 주님께 오순절날 교회를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를 축복해 달라고 구한다. 내가 묻건대, 만일 주님이 실지로 축복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참으로 주님이 오순절 때같이 축복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주님이 당신에게 삼천 명, 오천 명을 주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몇 천 명이 와서 교회에 사람이 가득 찬다면 우리는 즉시 소화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가령 상해에서 한 번에 삼천 명이 더해졌다면 우리는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침례 주어야 할지 모르고, 집회소 별로 떡 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그들을 온전케 하고 어떻게 심방할지도 모를 것이다.

교회가 강할 때는 온 사람만큼 소화할 수 있으며 엉망으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천 오륙백 형제 자매들도 충분한 교통이 없는 채 거기에 천 명이 더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축복을 받는다면 우리는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기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셔서 삼천 명이 왔지만 이틀이 지난 뒤 이천 명이 떠내려갔다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 중 얼마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와도 모르고 가도 몰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회 같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큰 유기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실 때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한다. 모든 형제 자매들이 성령을 순종할 때 모든 형제 자매들은 봉사를 갖게 되며 축복이 있게 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성령이 역사하도록 여러분이 예비되지 않았다면 성령은 역사하시지 않는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장소를 준비해야 한다. 주님이 사람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할지언정 사람을 내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역사할 때 당신은 장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할 수 있도록 좀더 큰 집회소를 준비하여 분량을 넓힐 때 주님은 축복하시게 된다. 봉사자를 준비할 때 주님은 필히 축복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사람으로 봉사하도록 준비하지 않았다면 성령은 역사할 방법이 없다.(「열린 문」에서 발췌함)

지방 입장에 관한 이것은 매우 복잡하다. 지금 우리는 간략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온 우주 가운데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여러 개의 몸을 가질 리 없다. 그러므로 온 우주 안에 교회는 오직 하나로서 고금동서(古今東西)의 모든 구원받은 사람을 포함한다. 고금동서의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을 더할 때 곧 교회인 것이다. 그 안에는 바울도 있고 베드로도 있으며 귀용 여사와 뮬러도 있으며 구원받은 우리들도 포함된다.

교회는 고금(古今)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하나뿐이다. 마치 달이 하나밖에 없고 또 하나뿐인 것과 같다. 당신은 미국에 있는 달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을 수 없다. 달은 오직 하나뿐이요 우주 가운데 달은 유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도 똑같다.

우주 가운데 교회가 하나밖에 없지만 금세에 교회의 출현은 수천 개도 더 있다. 교회 자체는 우주적인 것이지만 금세에서 교회의 출현은 지방적인 것이다. 우주 가운데 교회 그 자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금세에서 교회의 이 땅 위의 출현은 수천 개나 된다. 예루살렘에 교회의 출현이 있고 안디옥에도 교회의 출현이 있다. 에베소, 고린도, 로마 등 각 지방에 각각 교회의 출현이 있다. 교회의 지방에서의 출현이 곧 지방에 있는 교회요, 소위 지방 교회이다.

모든 지방 교회는 우주 교회가 그 지방에서 출현한 것이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곧 우주 교회가 안디옥 지방에 출현한 것이다. 대북 교회는 곧 우주 교회가 대북 이 지방에 출현한 것이다. 한 지방에서의 우주 교회의 출현은 곧 그 지방에 있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는 우주적인 것이나 교회의 출현은 지방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각지에서 교회의 출현이 지방적인 것이므로 각지에서의 교회 입장 또한 지방적인 것이다. 지방 입장 외의 어떤 입장도 교회의 입장이 아니다. 어떤 모임이 지방적인 것이 아니고 지방을 입장 삼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모임은 교회 입장 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 입장을 잃어버리고 교회 입장 외에 다른 입장에 있는 것이다. 지방 입장 외에 다른 어떤 입장도 모두 교회 입장을 잃은 종파이다.

고린도 지방에는 오직 고린도라는 지방을 입장 삼는 모임만 있어야 한다. 그 모임은 곧 고린도에 있는 지방 교회이다. 만일 고린도의 믿는이들 중에 다른 입장에 선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열이요 종파인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자신이 바울에게 속했다거나 아볼로에게 속했다거나 게바에게 속했다는 사람들이 분열이고 종파일 뿐 아니라 그들 중에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자들도 분열이요 종파이다. 무릇 지방을 입장 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좋든지 간에 모두 하나의 종파이다.

무릇 한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을 포함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표방하든지 다 종파인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믿는이들은 다만 고린도 그 지방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다른 것을 또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파이다. 그들이 어떠하든지 그들은 교회의 입장을 잃은 것이다.

교회의 입장은 지방적인 것이다. 만일 교회 안에 문제가 없다면 어떤 지방에서든지 교회의 출현은 오직 한 지방 입장을 가져야 한다. 교회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 지방에 많은 입장이 있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그리스도인 집회처(集會處)」를 하나의 입장이라고 생각지 말라. 또한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집회처」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인 집회처」는 하나의 입장이 아니며 우리의 명칭도 아니다. 「그리스도인 집회처」(현재 대북에서는 「교회 집회소」라고 개정했음)는 우리가 모이는 장소를 가리키고 정부에 등록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명칭이 아니다. 나는 이 명칭을 길가에 던져 버리기 바란다.

우리는 명칭이 없다. 또한 우리는 영원히 명칭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 종파에 속하거나 어떤 회(會)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교회가 황폐한 오늘날 하나님의 긍휼과 빛 비춤을 받은 한 무리의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 지방에서 교회가 잃은 입장으로 돌아와 함께 모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주님을 섬길 따름이다. 이 입장이 사람들에 의해 훼파되었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이 입장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는 마치 구약에서 포로 된 데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의 기초가 이미 훼파되었어도 당시 성전의 기초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 또한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 머물기 원했지만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의 원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오늘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우리도 이렇게 행하기를 원한다. 아직도 많은 형제 자매들이 교회 입장 밖에 있고 우리가 대북에 있는 모든 형제 자매들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기서 여전히 교회의 입장 곧 사도 시대 당시 교회의 원래 입장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 지방 입장 위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집회를 가지며 섬기기 원한다.(「화어 직사(話語職事)」에서 발췌함)


워치만 니 [교회의 길, "제 1장 교회의 입장 문제", 한국복음서원]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1. 05:00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형제 

‘지방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말은 비판자들이 만든 말


워치만 니는 신앙적 교만을 가장 경계

풀러신학교 공개적으로 지방교회 인정

<지방교회 신앙과 생활>이라는 신앙고백서에서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태도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들이 지방교회에 대하여 생소하게 느끼고 심지어 어느 정도 교제의 벽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문제가 있는가? 우선 외부적 요인으로는 ‘자기네만 교회라고 한다’ ‘지방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라고 한다는 식의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유포시킨, 사실과 다른 말들이 걸림돌이 되었을 수 있다. 이 점은 기성교회들이 사실에 근거한 바른 인식을 가짐으로 풀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지방교회 내부적인 요인들도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익숙지 않은 진리항목과 실행들 그리고 그들의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교회측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 진리와 실행상의 차이점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 노선, 즉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소위 형제회’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특징들 중 일부를 공유한 것이 있다. 그 외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했던 진리항목들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것들은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계 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강조이다. 
워치만 니는 자신의 영적 유모와도 같은 마가렛 바버 선교사를 통해 앤드류 머레이, 제시펜 루이스, 이반 로버츠, 오스틴 스팍스 등을 통해 이어져 온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에 대한 진리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위트니스 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노선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위 신비주의로 분류되는 마담 기용, 페네롱 신부, 윌리암 로우 등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한국교계는 이런 방면 전체를 ‘신비주의’로 보고 이것을 경계하는 시각이 강하다. 따라서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이 방면의 서적을 읽거나 공개적으로 동조하기에는 주저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성경을 벗어난 그릇된 영성이나 잘못된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 하늘 보좌와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골 1:27),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은 사실’(롬 6:6),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갈 2:20),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마 16:24) 등의 말씀을 어떻게 삶 속에서 체험하고 실제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과제이다. 

 둘째, 교회생활 관련 진리와 실행이다. 
교회 역사를 볼 때,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형제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이러한 형제회의 유산이 지방교회를 대표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교계에서는 다아비의 신학이 세대주의를 기초로 하고 평신도-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엡 4:12)는 주님의 위임과 루터가 주장했던 ‘만인 제사장 제도’를 어떻게 실행하고 또 완성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더 깊은 관심과 추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셋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한 진리 항목들이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의 몸’ ‘새 예루살렘’ ‘신화’(神化, deification)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진리 항목들은 하나님의 주권, 선택, 예정 등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딤전1:4, 엡 1:9, 3:2)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거듭 강조되었고 ‘그리스도의 몸’ 역시 그러하다(마 16:18, 엡 1:23). ‘새 예루살렘’(계 3:12)은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을 가리키며 요한계시록의 결론이자 핵심주제이다. 신화 진리 또한 정통 초대 교부인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에서 강조한 진리로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러한 사상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로 현재도 가르쳐지고 있다. 따라서 지방교회와 기성교회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서로 배우는 자세로 교제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2. 지방교회 성도들의 기성교회를 향한 태도 
지방교회는 본의야 어떻든 기성교회를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그것이 상호 교류에 장애가 된 면이 없지 않다. 어찌되었건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할 대목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벧전 5:5). 사실 워치만 니도 다음과 같이 신앙적 교만을 경고하고 있다. “주님께서 정하신 교회의 노정은 빌라델피아이다. 빌라델피아의 노정을 가는 사람의 가장 큰 시험은 바로 교만이다. 즉 “우리가 당신들보다 낫다! 우리의 진리가 당신들의 진리보다 분명하고,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교만이 없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토해내신다. 우리는 결코 교만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워치만 니, 50 필수과정(V), 한

워치만 니, 50 필수과정(V)

국복음서원, 2002년, 135쪽). 미국 교계는 지방교회를 일체 이단시하지 않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만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가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의회’(ECPA) 의 투표권 있는 정회원 중 하나로서 교계 지도자들과 이미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고,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을 수년 째 발간해 옴으로 교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지방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 풀러신학교측은 지방교회측이 성경적인 정통 그리스도인들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미국교회의 선례는 한국교회에서도 참고가 될 만하다. 따라서 지방교회측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성교회측에 다가감으로 교제의 폭을 넓히고, 기성교회측은 대국적 관점에서 “나와 다소 다르나 주 안에 참된 형제들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롬 15:7).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3 , 교회연합신문 657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657호060723_편집.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에클레시아 교회론에 대한 간략한 반박 (4) - 개혁교회 교회표지와 불일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