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5)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구별되는 두 본성


우리의 가르침 중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또 다른 항목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모함하는 이들은 우리가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주의하지 않은 채, 단지 이단적인 사상을 전달한다고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 단어를 우리가 사용한다 해서 문제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연합 안에서 훼손되지 않고 구별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우리의 이러한 믿음을 늘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그 중 하나를 발췌한 것입니다. 

그분 [그리스도]은 성령을 통해 그리고 동정녀를 통해 이 두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성령을 통해 그분은 신성한 본질을 받으셨고 사람인 처녀를 통해 그분은 사람의 본질을 받으셨다. 연합이란 두 요소가 결합되어 함께 연합되지만 그 두 요소가 그들의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 함께 결합되어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이 태어나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하나님-사람이 되셨으며, 두 본성과 두 생명, 곧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생명 그리고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생명을 소유하셨는데, 이 둘은 하나로 연합되었지만 조금의 혼동도 없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 삼의 본성이나 제 삼의 요소가 되는 어떤 것도 산출하지 않았다. <장로 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13쪽 

연합’이라는 용어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정의가 타당한 것인가를 검토하는 작업은 잠시 보류하고,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진리를 말할 때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기독교 교리사에 밝은 분들은 위 예문에 칼케돈 신학과 칼케돈 신조 (주후 451년) 자체가 극명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라고 말하면서 정통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두 본성이 연합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유티커스 주의 (Eutychianism) 를 가르친다고 정죄했지만, 그는 분명히 두 본성이 “함께 결합되어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유티커스 주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확증하기 위하여 칼케돈 신조의 표현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두 본성이 “조금도 혼동되지 않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 삼의 본성이나 제 삼의 요소를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이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락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합’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트니스 리는, 연합이란 두 요소가 그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고 결합되는 것, 즉 두 본성이 그 특징을 유지하며 결합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연합’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합이란 여러 요소와 본성의 혼잡을 가리키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합당하게 믿고 있는 것과 상반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연합의 의미가 그러할지 모르나 표준 영어 사전들은 연합의 의미를 결코 그렇게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웹스터  국제 대사전 제3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은 연합을 “어떤 것을 함께 두거나 결합시켜, 그 결합 안에서 구성 요소들이 서로 구별된 채로 남아 있는 것”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해리티지 영어사전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rth Edition) 의 인터넷 판 역시 연합을 “통상 각

각의 특성들을 유지한 채 결합하거나 섞는 것.” (http://www.bartleby.com/61/31/M03131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섞다 (mix)’ 라는 말을 찾아 그 유의어들을 살펴보면, 연합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아래와 같은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유의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연합은 개별적인 특성들을 상실하지 않는 결합을 가리킨다. “존경과 놀람이 함께했다 (mingled).”—월터 스코트 경 (Sir Walter Scott). “그의 동료들은 자유롭고 즐겁게 토박이들과 어울렸다 (mingled).”—워싱턴 어빙 (Washington Irving). (http://www.bartleby.com/61/25/M03525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

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전들이 이와같이 ‘심원한’ 정의를 제공하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이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연합’이라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사실상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논쟁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많은 이들 중에서 월터 스코드 경과 워싱턴 어빙은 지나치게 문학적이었다고 치부하여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실생활 속에서의 용례들을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은 루즈벨트의 연설문에서 인용한 글들을 읽으며 함께 어울렸다 (mingled). (Doug Struck, “Clinton Dedicates Memorial, Urges Americans to Emulate FDR,” Washington Post, 1997년 5월 3일자, http://www.washingtonpost.com/wp-srv/local/longterm/tours/fdr/history.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종종 남부의 파리라고 불리는 애쉬빌은 건축양식과 문화가 독특한 조화 (mingling) 를 이루어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 함께 국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Community Tour”, Coldwell Banker Kasey and Associates [Web site], http://www.coldwellbankerkasey.com/community_tour.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이러한 예에서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구별하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각 계층의 뚜렷이 구별되는 속성들이 이러한 자연스러운 어울림 (mingling)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남부의 파리인 애쉬빌이라는 도시에 있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분명히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는 구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말을 쓴 부동산 중개인은 어떻게 두 문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맛보고 감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전과 일반적인 용례는 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에 관련하여 우리가 채택한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해 우리를 줄기차게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두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부지런히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두 본성에 대한 역대의 논점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어떤 단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그들의 생각 속에서 적신호가 켜지게 됩니다. 그들이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그 단어가 두 본성을 구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반대편 극단으로 치우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이라는 단어가 위격의 혼잡과 변질을 의미한다며 우리를 반대하는 경고를 외치지만, 정작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나뉨도 없고 분리도 없으시다.” (칼케돈 신조) 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신호로 인식되는, 그리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를 왜 포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트니스 리 자신도 이 용어에 관련된 역대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연합’이라는 단어야말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최적의 용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레위기2장에 있는 소제가 신성하면서도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섞인’ (mingled)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성경적인 예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거듭해서 두 본성에 대한 합당한 이해가 무엇이며 합당하지 못한 이해는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2장에서 섞인 (mingled)’ 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성령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갖고 계신 갈망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5절은 소제를 준비할 때 기름이 고운 가루와 함께 섞여야 한다고 말한다. 기름은 성령이신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며 (눅4:18, 히1:9),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름이 고운 가루와 섞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성과 연합되신 것을 상징한다. 기름과 고운 가루는 두 가지 다른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함께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본성은 그러한 결합 안에서 여전히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체험함>, 영문판 32쪽

어떤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가 두 본성을 묘사하는 적절한 용어를 찾기 위하여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지만,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고유 권한이며, 그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 해서 그를 (또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용어가 레위기 2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서 보아 온 것처럼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는 데 확신이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가장 완벽한 표현이자 두 본성이 갖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비밀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 귀한 진리에 대한 더 탁월한 이해와 표현을 제공하는 이 단어를 쉬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진리와 함께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현대 신학계에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위트니스 리만이 유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저명한 신학자인 윌리암 밀리간 (William Milligan)도 정확히 동일한 맥락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신성한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신 이후의 둘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이 영 안에 거처를 만들 때, 즉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오실 때, 그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보석을 금테에 물릴 때에는 금은 금으로, 보석은 보석으

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이와 같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기체가 서로 안으로 확산되어 전체적으로 섞이는 것처럼 연합되며, 그 결과 두 기체는 함께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매 입자 속에서 발견된다…그분 (그 영)은 그들의 존재에 스며드시며, 그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신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The Ascension and Heavenly Priesthood of our Lord, [London; New York: Macmillan, 1984], 183-184쪽)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3. 05:00

복음의 확증 (2) 몇 가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항목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2)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몇몇 항목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논쟁없이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판한 사역의 글들 중 일부를 읽은 몇몇 분들은 우리의 이해가 정도(正道)를 벗어났다고 느끼고, 심지어 어떤 분은 더 나아가 우리를 이단시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책자들을 제한적으로만 접한 것에 기인한다고 믿으며, 때로 우리의 글들이 전체 문맥이 무시된 채 발췌되어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오늘날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가슴 아픈 행태이며, 우리만이 그들의 이러한 권한 남용의 유일한 피해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취한 입장 때문에 오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에 대한 참된 논의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 사상가들, 믿는 이들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참되게 믿는 것처럼 우리는 이들 항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참된 것으로 믿으며, 일부 진리 항목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해나 상대방의 이해 모두에 대해 존경과 관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는 논의가 필요한 이러한 진리 항목들을 우리의 기본 신앙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즉 그러한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으로 받거나 거절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풀러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 우리 스스로가 해 온 것처럼, 모두가 이런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연결하시는 그 영의 하나를 손상시킴 없이 믿는 이들이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또는 동의할 수 있는) 항목들로 다루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이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 우리와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곧 우리가 이 진리항목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믿는 것처럼 그들도 믿는 것이 우리의 간절하고도 커다란 소망이지만, 이것들은 논쟁의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부분 전체를, 모든 신성한 진리와 실재 안으로 우리 모두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와 실재의 영께 일임하고자 합니다(요 16:13).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독특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만 동시에 일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우리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몇몇 진리의 항목들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정상적인그리스도인의생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워치만 니(Watchman Nee)와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저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기독교계에 매우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저서들 중 일부는 교계 전반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m Life)」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성경교사인 위트니스 리는 지방 교회들 외부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간혹 그에 대해 의심하는 눈초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영적 도움과 영적 양식이 되는 가르침과 경건한 본을 보아 온 터라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의 책자들을 조금이나마 인용하여 제시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오해들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간략한 소개를 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위트니스리

위트니스 리는 1905년 중국 북부지방에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9세 때 그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혔고 즉시 그의 남은 일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 드리기로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의 사역 초기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니를 만났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인도 아래서 그와 함께 동역했습니다. 1934년에 워치만 니는 그의 출판의 일을 수행하던 상해복음서원의 책임을 위트니스 리에게 맡겼습니다. 1949년,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이 (중국본토 공산화로 인해-역자 주)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워치만 니와 그의 동역자들은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워치만니-위트니스리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에게 대만복음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 그의 출판의 일을 계속하도록 했는데, 현재 대만복음서원은 영어권의 LSM과 함께 워치만 니의 저서를 출판하는 곳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의 위트니스 리의 일은 주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피난한 350여 명의 성도들이 전부였던 대만에 있는 교회들은 5년 사이에 2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62년에 위트니스 리는 미국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를 느끼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에서 35년간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지속적으로 주중 집회와 주말 특별 집회에서 말씀을 공급하여 수천 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위트니스리

그가 전한 메시지들의 대부분은 800편 이상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책들 중 많은 수가 14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91세인 1997년 2월에 그의 마지막 공식 특별 집회를 가졌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의 실제적인 하나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관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돌봄 아래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기능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표는 좁은 분파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