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0.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1)


1. 저는 여러 체험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비밀들을 사도들에게는 열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만졌습니다(고전2:7-10). '맏아들이신 주님'을 아는 것은 이렇듯 신랑 되신 그분의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제한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신약의 결론 - 그리스도

(골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설명할 때 '측량할 수 없는''(the unsearchable riches)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엡3:8). 그는 또 '그리스도와 교회'가 큰 비밀(a great mystery)이라고 말합니다(엡5:32). 신실한 성경 교사들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710쪽 분량)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400개 이상의 명칭을 신구약에서 찾아내어 각각에 대해 풍성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이 출판한 찬송가 집에는 단 한 장(388장)의 가사에서 주, 생명, 능력, 지혜, 공의, 성결, 구속, 평안, 기쁨, 소망, 안식, 빛과 길 등 그리스도에 대한 70 가지 이상의 방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에 있어 위대한 비밀임으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데 온 일생을 쏟아 부었습니다(엡3:18-19, 빌3:7-14).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안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구주 예수의 사랑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외에도 성경이 보여주는 비밀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방면들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고 사도들도 힘써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어떤 방면들을 말하면,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들의 '교리집 내용'에 없다며 받아들이려 하질 않습니다. 이런 태도들은 '작은 신발에 큰 발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려면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가 배운 교리,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을 성경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높이는 분들은 비밀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춘 분(벧전5:5),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분(고전2:9),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마음 눈이 밝아지길 간구 하는 분(엡1:17-18), 영 안에 있는 분(계1:0)이라야 풍성한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각 방면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비 된 분들에겐 이런 주제에 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큰 진보를 체험케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3)  교파와 주의회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교파에 계시다가 회복된 교회생활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전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밖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방면이 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쉽게 풀리고 "체험되는" 교회생활은 많은 지체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전에는 경험치 못했던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을 가져오는 주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the first-born)(롬8:29), 또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the last Adam became the life-giving Spirit)'(고전15:45) 라는 말씀에 대한 빛과 체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면, '보좌 앞의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이 땅 위의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한 머리요 몸이신 그리스도(행9:4, 엡1:22-23, 골1:18), 믿는 이 안과 보좌 위에 동시에 계시는 그리스도(롬8:10, 34),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인자(요1:51, 창28:12), 이 땅에 보내심 받았으나 여전히 하늘 아버지 품속에 계신 아들(요1:18),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 아들(요3:13절 KJV원문),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요7:39) 등의 난해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런 말씀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는 더 이상 난해구절들이 아니며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체험하는 친근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닮아 갈 원형이신 '맏아들'(롬8:29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빗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매 순간 주의 영을 바라봄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간(고후3:18)에 저 하늘 어디 천당 갈 꿈만 꾸며 헛된 일에 시간낭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라는 시험문제를 받아 놓고도 토끼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수험생은 시험종료 벨이 울리기 전에 빨리 바른 상황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진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 모두를 '맏아들' 또는 '생명 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3.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지방교회 자료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1)

- 시작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현실을 돌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godssalvation.chch.kr/aspects/regenerate.html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