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21. 7. 1. 00:10

 

 

posted by rarryking 2018. 10. 3. 20:26

지방교회(local Church)의 질문답변 9회
- 성도들은 상호적인 신언집회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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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1.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4)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나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오시며,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을 수행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분명한 동일시를 발견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세 위격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이 믿는 이들 안에서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와 그 영이 부활 안에서 동일시되시는 것에 관해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아래의 발췌문은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령이시다. 성령 외에는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는 그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누구이신가?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 영은 누구이신가? 물론 성령이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님이시고, 그 영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을 그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The Spirit of Christ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는 <그리스도의 영> (The Spirit of Christ) 이라는 자신의 책 25장에서 “주 예수님은 높여지시어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주 영’이 되셨다.”라고 말했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 > ,영문판 14-15쪽 제자들 안으로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 내쉬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숨이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 즉 숨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의결론 - 성령

모든 과정을 완성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으며, 이 생명 주시는 영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분,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이신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들의 영적인 생명과 존재의 신성한 본질이 되셨다. <신약의 결론 성령>, 194-195쪽

위의 예문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오해한다면 이러한 글이야말로 그가 명백한 양태론자라는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일성에 대해 심도 있는 설명을 시도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우리가 받는 오해와 유사한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 (Irenaeus), 터툴리안 (Tertullian), 어거스틴 (Augustine)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근거 없이 그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기 위해 소위 ‘증거’로 출판한 책자들에서는 위트니스리의 그러한 균형잡힌 언급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그의 온전한 관점을 보여주는 두 예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3편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고후 3:17). 주님으로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다. 그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통치권과 머리의 권위와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고 계신다… 그분이 주님으로서 수행하시는 모든 것을 그분은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 95-96쪽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숨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물론 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인 내적이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번째 보혜사이신 그 영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숨이시다. 따라서 내적인 방면을 조망할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은 하나이시다. <요한복음 강해 속편 3권>, 273쪽

많은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에는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신약의 서신서들과 같이, 자신의 사역의 커다란 강조점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종종 생명 주시는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언급을 추가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위트니스 리 외에도 그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임스 던 (James D. G. Dunn) 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분은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분으로서 위트니스 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적인 존재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의 모형이다…요약하자면 45절 하반절은 이에 대한 증거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바울은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면서도 몸이 있는 그러한 존재의 형태로 새로운 인성의 본과 선구자이시라는 것을 [생명 주시는 영]에 대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기때문이다.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그들 모두가 체험한 생명 주시는 영은 다시 사신 예수, 마지막 아담이시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영적인 존재…또는 영적인 범위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바울에게 있어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며,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1, Christology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98], 164-165쪽)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관해 자주 인용한,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저명한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 (W. H. Griffith Thomas) 역시 이러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뛰어난 요약을 했습니다.

The Holy Spirit

이러한 진리의 양면 모두를 주의하며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영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위격의 특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그들의 임재는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것이다. (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1986; reprint of The Holy Spirit of God, 4th edition,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3] 144쪽)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이러한 인용문을 읽는다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웨트 (H. B. Swete) 도 동일한 사상을 아래와 같이 확증했습니다.

H. B. Swete

그 영은 그분의 일에 있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영이신 주 (the Lord the Spirit) 즉 그분의 영화롭게 된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London, New York: Macmillan, 1912] 306쪽)

 이 핵심적인 주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기 전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각주를 추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각주는 위트니스 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를 동일하게 인정한 저명한 주석가들인 마빈 빈센트 (Marvin Vincent), 헨리 알포드 (Henry Alford), 윌리스톤 워커 (Williston Walker) 의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에서 시작되는 이 부분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의 ‘주님’은 틀림없이 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고후 2:12, 14-15, 17, 3:3-4, 14, 16, 4:5). 이것은 성경에 있는 분명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강조한다. “3장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널리 퍼지게 하시고 활력 있게 하시는 그 영이시다. 우리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고 (고후 3:6) 새 언약의 사역에는 영광이 있다 (고후 3:8).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 요한복음 14장 16절, 18절과 비교해보라” (빈센트).

“3장 16절의 주님은 3장 6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다. 의미상, 여기서 언급된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영’은 바로 성령과 동일하시다…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알포드). “변화시키시고 내주하시는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님은 그 영이시다’” (윌리스톤 워커). <신약성경 회복역>, 고린도후서 3장 17절 각주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9. 05:00

신성한 삼일성 (또는 삼위 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계시는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 (인격) 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a living soul)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그 영 (the Spirit)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여기에서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그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성경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하고,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으므로 이제 영이시라고 불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임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해석들이 그 모든 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의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monarchia) 곧 유일성(unity)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영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그 영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2 나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1] 10-11쪽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되는데, 그 구절은 아버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한다. 또한 아들도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해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도 그분을 두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욱이 그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한다. 따라서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하시다… 요약하면,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7-38, 42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 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성경이 어떻게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 (相互內在) 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절, 23절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이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은 아버지의 운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삼일성 안에는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 상호 왕래 (inter­communion) 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 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장로훈련3권-이상을 실행하는 길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는 아들께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 (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우리는 삼일성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 확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신성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알기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 바랍니다.


[1]  본 고에서 인용된 LSM자료들의 대부분은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