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8.31 05:00

갓멘에세이 96 - 서로 눈 마주치기 - 지방교회 에세이

1.

"방금 전만해도 큰 오빠가 폐암 말기라는 소식듣고 울다가 왔는데

여기 왔다 가면서 이렇게 기뻐서 가게 되네요. 참 신기하네요."

주일 오후 마다 라이프 스타디 추구모임이 있습니다. 만 2 년 여를

창세기를 끝내고 이제 계시록을 하기 시작한지가 4주째입니다.

인근 다른 지방에 있는 교회 자매님이시고 교파에서 오신지

얼마 안되시는데 주일 오후 이 성경공부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

지신다고 합니다. 

언젠가 한번 그야말로 소설을 써도 몇권 될 그 자매님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5 살 때인가 육 이오 사변이 나서 가족과 헤어져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그 당시 해병대 장교로 복무 중이던 큰

오빠가 휴가 나가는 장병들만 있으면 인적 사항을 적어주고 

본인도 틈만 나면 전국 고아원을 뒤져 마침내 가족이 상봉을

했답니다.  

그 큰오빠는 나이만 먹었지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막내 여동생을

지극정성으로 가갸거겨..부터 가르쳐서 일반 학교를 다니게 했고...

아버지처럼 오빠처럼 믿고 의지해 오던 그런 분입니다.

이 외에도 밖의 환경은 정말 숨이 막히는 그런 상황이지만 말씀을

공급하면 그토록 사모하며 달게 받아 먹으십니다. 

처음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시더니 어느 날부터 화색이 돌고

활짝 웃으실 때는 환갑도 넘은 연세지만 소녀처럼 해맑으십니다. 

2.

어제 다룬 주제는 계시록에 나타난 삼위일체(삼일 하나님)입니다.

신학교를 다녀도 어려울 주제를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가지신

열 댓 분의 지체들에게 어떻게 합당하게 전달할 수 있을지 참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28:19, 요14:10-11, 마3:16-17, 요8:16, 29, 사45:15, 54:5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남편이자

구속자이신 그분,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나 단수의 이름을

가지신 분, 상호내재, 구별은 되나 분리는 안되시는 분, 본질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이런 꼭 알아야 하는 신학개념들을

알기 쉽게 반복해서 설명을 드리고...

정해진 두 시간 중 15분 정도 남았을 때 오늘의 진도인 계시록 LS 

#4 를 다뤘습니다. 계시록에는 삼일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방면들이

성부에 해당되는 것 하나, 성령(그영) 에 3개 아들에 26개가 있습니다.

저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1:4)는 아버지를, 

일곱 영, 일곱 등불, 일곱 눈(계1:4, 4:5, :6) 은 성령을, 충성된 증인,

아멘이시요, 하나님의 말씀, 남편...등 26개의 표현은 아들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대강의 윤곽을 말씀드린 후 저는 '일곱 눈'이신 그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어짜피 짧은 시간에 그 많은 항목들을 다 다룰

수 없다면 전략적 선택과 집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3.

한국 사람들은 선생님이나 어른들 앞에서 말할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면 건방져 보이거나 반항하는 것으로 비쳐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곳 미국은 반대로 눈을 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뭔가 감추는 것이 있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사람과 사람이 그 마음 안에 거리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담박에 알아볼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눈을

바로 쳐다볼 수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보통 속에 문제가

있어도 악수도 할수 있고 안부 인사도 나눌 수는 있지만 눈과

눈을 마주 응시하는 것은 가능하면 회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살아도 얼마든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일곱 영은 일곱 눈이십니다. 이 분의

눈을 마지막으로 마주치신 때가 언제이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 그분과 눈을 마주침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심지어 기도

하거나 이렇게 성경공부 하는 시간도 그분의 눈을 바라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후3:18은 우리가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분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한다고 말합니다. 히12:2는 믿음의 주(창시자)

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눈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밖의 육신의 눈이 있을 뿐

아니라 안에 마음의 눈도 있습니다(엡1:18). 

이렇게 서로 나누다 보면 듣는 지체들 뿐 아니라 저도 공급이

넘칩니다. 이것이 주님의 눈을 바라본 사람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분의 대강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