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D.L. 무디가 젊었을 때 그는 누군가가
“한 사람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점유하시도록 한다면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즉시 반응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해 그분의 길을 그처럼 멀리까지 전진시킬 수 있으셨던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 교통을 받아 주님께 “주 예수님, 제가 아직 젊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어떤 것에도 고정되거나 정착되거나 점유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새로운 움직임을 위해 당신께 전적으로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최근 움직이심을 위해 제게 오셔서 저를 점유하시고 취하시며 소유하소서.” 라고 말하기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시대를 전환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로 알려져 있는 로칼처치(local church)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로 워치만 니의 신학사상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는 한국교회 외에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측은 한국교회에 왜곡 전달된 자신들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1. 오해 받고 있는 내용들
첫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 신관에 대해 양태론을 믿는다는데 대해;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 신관의 양태론을 이단사상으로 오히려 정죄한다고 밝혔다. 지방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相互內在) 하시며, 영원히 동시존재하신다는 칼케톤 신조를 굳게 믿는다.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삼위의 동시 존재를 믿는 양태론’은 성립될 수 없음을 잘 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사야 9장6절에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처럼 본문자체가 존재론적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에서의 삼위 간의 동일시는 ‘존재’가 아닌 경륜적인 ‘기능상’의 동일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함께 이같은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을 가르친 것을 일부 인사들이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한다는데 대해; 이 말은 위트니스 리가 다른 근본주의 교사들의 동일한 해석에 동승하여 요한계시록 17장5절의 ‘큰 바벨론, 음녀’를 로마 천주교로 본 것을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는 기성 교회 안의 거듭난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사제도를 부인한다는데 대해; 지방교회도 개교회의 인도자로서 복수의 ‘장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세속 직업을 가진 경우도 있고, 기성 교회처럼 전 시간으로 교회만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기성 교회의 목회자 역할을 감당한다. 다만 지방교회는 이들을 ‘목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장로’라고 부를 뿐이다. 칼빈도 두 종류의 장로론을 가르쳤고, 장로교 헌법에도 ‘목사’를 ‘장로’ 반열에 두고 있다. 또한 초대교회는 주후 4세기 경까지 목회자를 ‘장로’로 호칭했다.
넷째, 지방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데 대해;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특정 단체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되게 거듭난 교인들의 공동체이고, 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믿는다.
다섯째 지방교회만 교회라고 한다는 데 대해;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우주교회’(마16:18)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가 거주하는 지역을 범위로 하는 해당 ‘지방교회’(local church)의 일원이다(행8:1, 계1:11). 예를들어 지방교회가 ‘서울교회’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2. 지방교회가 지향하는 것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치되, 특히 성경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고 실행하기를 힘쓴다. 지방교회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요11:25, 골3:4)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엡1:23) 건축하는 것(엡4:16, 마16:18)이 성경의 중심 진리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 최종 완성된 모습이 어린양의 신부인 새예루살렘이라고 한다(고후11:2, 계21:2, 9-10).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백 권의 저술들은 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내용으로 쓰여졌다.
지방교회는 또한 최대한 성경대로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그래서 침례(행8:36-39)를 선호하고, 또 매주 예배시간에 성만찬을 실행하고 있다(행20:7).
3. 지방교회의 특징
지방교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에 관한 객관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의 그분의 몸’(엡1:23)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그러한 객관적 진리를 토대로 삼되 더 전진해서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와 그분에 대한 체험을 강조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27-29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본을 따른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성직자 제도의 폐해를 보고 만인제사장을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론에 비해 실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방교회는 에베소서 4장12절의 권면을 따라 성도들을 온전케 하길 힘씀으로 만인제사장 제도를 실제로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롬15:16), 모든 성도들이 목양하며(요21:15),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도록 격려해 왔다(고전14:1, 4, 23-26, 31).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며(엡4:4) 주님은 분열을 책망하신다고 믿는다(고전1:10-13). 따라서 가급적이면 분열의 요인들은 피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등 몸의 하나를 이루는데 필요한 미덕들을 더 소유하기를 힘쓴다(엡4:2-3참조).
4. 지방교회의 신앙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은 한국복음서원이 발행한 신약의 결론(총8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구속과 구원 등 핵심 신앙에 있어서 성경뿐 아니라, 성경에 따라 결의된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초대교부들의 정통 가르침과 교회 역사상 주께 쓰임 받았던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들을 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복음서원도 ‘2천년 교회사 순례’(214쪽)라는 책을 번역 발간한 바 있다.
따라서 주의 회복은 성경과 교부들과 역대의 주의 종들을 통해 계시된 건전한 가르침들을 이어 받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책망받은 한 가지인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님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그냥 사랑도 아니고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오 주님, 저의 우둔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당신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그 마음을 만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계 2:4).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련 성경 구절과 참고 자료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후서 : 물론 성경에 에베소후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신약 사도들로부터 두 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쓴 에베소서이고(엡 1:1),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계시록 2장 1-7절입니다(계 2: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일곱 서신중 첫 번째 서신은 ‘에베소후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J. N. 다비(Darby)는 “신약 안에 있는 ‘후서’는 모두 교회의 황폐함을 말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두 6장으로 된 에베소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졌으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어 가고 있었고, 사랑 안에서 행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그들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 …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면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주님께 강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통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모든 일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훗날 가장 근본적인 이 항목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부와 신랑에게 사랑의 무게감 :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은 한 가지’만 책망받고 그 외의 여러 가지에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으니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가 또한 주님의 사랑스러운 신부임을 생각한다면, 둘 사이의 사랑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하고, 사랑의 느낌이 있어야 하며, 그분에 대한 신혼 때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헌신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주여 저는 제가 처음 당신을 사랑한 것같이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과 저는 신혼 때와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말한 신혼 때의 사랑이다.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여 그들과 주님 사이에 그 신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당신은 그분께 “주여,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는 당신이 기뻐하는 바를 알기 원합니다. 당신의 명령이 아닌 곧 당신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주님의 종은 주님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만약 아가서에서 나오는 술람미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된 구절에 대한 추가적인 묵상 : 주님 앞에서 이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부분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11절은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을 잡는 섬김을 말하고, 15-16절은 나 곧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데, 후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은 위에서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 에스겔 44장에서의 두 종류의 섬김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노예가 밭에서 돌아와서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너는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시중을 들어라”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신약에서의 사례와 유사합니다. 복음전파와 목양은 귀한 것이지만,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또 그런 섬김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어야 합니다.
3)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행 13:1-2). 이 말씀 역시 주님을 위하여(for)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섬김(to)을 말씀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러한 친밀한 섬김의 결과임을 알게 합니다.
요약하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한 어떤 것이 이보다 우선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자백하고,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생명나무로 먹음으로써, 그와 연합되는 “처음 행위(첫째가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어떤 영적인 봉사가 주님 자신보다 더 우리 존재를 사로잡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가 참된 위기요 즉시 회개해야 할 순간임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불의한 일로 주님께 책망받은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상태 때문에 책망받은 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오 주님, 당신을 위한 어떤 봉사가 주님 자신을 대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더 깊이 연합하는 일이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