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8:20
성경말씀  

(시119:147~148)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오늘의 만나

 
 어느 이른 아침 어떤 주님의 종이 예배당에 들어가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풍금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한 음이었고 다음에는 한 구절 그 다음에는 한 곡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는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둘러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조율사가 풍금을 조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이 큰 풍금에는 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화음을 맞추나요?" 조율사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먼저 가장 중간에 있는 'A'음을 정확하게 조율한 후에 다시 다른 음을 그것과 맞춥니다." 믿는이들은 반드시 일찍 일어나 먼저 하나님과 화음을 이루도록 조율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루 동안 만나게 될 사람들과 사물과 일에 있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먼저 음악회를 열고, 그 다음에 악기의 화음을 맞추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므로, 먼저 하나님과 화음을 맞춘 후에 사람들과 만나고 일을 해야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8:15
성경말씀  

(창41: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눅15:22)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노예들에게 ‘어서 그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계19:8)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되었는데, 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오늘의 만나 

 요셉이 두 번째로 받은 선물은 옷이었습니다. 우리 믿는이들에게는 두 가지 옷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구원을 위한 옷이고 다른 하나는 승리, 즉 보상을 위한 옷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구원만 받았기 때문에 한 가지 옷만 받았습니다. 그는 아직 승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우리를 의롭다하는 의의 옷을 받은 후에, 승리의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구원의 옷과 더불어 다른 옷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의로운 아버지와 함께 앉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덮어주고 이 자격을 얻게 하는 의의 옷이 필요했습니다. 이 옷은 우리의 의이신 객관적인 그리스도이며, 이것이 우리를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롭게 된 후,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낼 때 그분은 우리의 주관적인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가 입는 분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는 분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옷인 주관적인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옷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분입니다. 객관적인 옷과 주관적인 옷이 선물임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것이며, 아들은 그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8:10
성경말씀  

(창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오늘의 만나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아들들에 관한 그의 예언적인 축복의 기록입니다. 야곱의 처음 네 아들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였습니다. 구약의 기록에 따르면 이 네 아들은 악하였습니다. 첫째와 넷째인 르우벤과 유다는 정욕이 가득하였으며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로 가득하였습니다. 정욕과 분노는 악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야곱의 위의 네 아들을 구원하셨음을 인하여 찬양합니다. 더욱이 그들 중 두 사람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레위는 변화되어 제사장이 되었으며 유다는 변화되어 왕이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제사장과 왕이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은 야곱의 다섯째 아들 스블론을 통하여 이방세계로 내보내졌습니다. 복음이 스블론을 통해 내보내어진 후 안식 즉 유다를 통해 성취되고 스블론을 통해 전파된 복음 안에서의 안식으로 잇사갈이 등장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안식합니다. 잇사갈에 이어 단과 그로 인한 변절이 나타났습니다. 비록 단이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났지만, 갓이 등장하여 그 상황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에게서 변절을 보고 갓에게서 회복을 봅니다. 갓으로 인한 회복은 아셀로 상징된 부요한 그리스도의 넉넉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셀에 이어 납달리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있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무궁무진하고 우주적인 축복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가져 온 요셉에 의해 예표되었습니다. 베냐민은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를 가져온 분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8:05

 

성경말씀

(창49:13)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오늘의 만나

 스불론은 해변 즉 항구에 거했습니다. 항구는 상품을 수출하기 위한 곳이며 배들을 내보내기 위한 곳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불론은 갈릴리의 항구였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왕국복음 전파의 사역을 갈릴리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곳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만나셨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불론은 갈릴리 지역의 항구였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은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이었음을 계시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은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임하시면 여러분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스불론이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내 보내는 합당한 방법은 그 자신들의 힘든 수고로 여행하는 나귀들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합당한 방법은 하늘에 속한 바람을 통하여 능력을 받은 항해하는 배들을 통하여 복음을 수출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은 갈릴리의 복음 전파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행전 2장 2절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 때 이후 배들은 계속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55
성경말씀 

 (창14:18~19)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히5:6) 또 하나님께서 성경 다른 곳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오늘의 만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축복의 첫 사례는 아브라함에 대한 멜기세덱의 축복입니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아온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듯이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로 왔습니다. 더 나아가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왔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영원한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축복은 제사장으로 인해 수행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제사장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좁힙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는 것을 결코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사장에게 축복받기 전에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당신이 축복한 후 간격은 없어지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누림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을 때 그 축복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50
성경말씀  
(히7:7) 두말할 필요 없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축복을 받습니다. 
(마11:11)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요한보다 큽니다. 

 오늘의 만나 

 히브리서 7장 7절에서 우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축복하는 축복의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나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분량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분량에 따라 크거나 작은 것입니다. 요한이 그보다 앞서 일어났던 사람들보다 더 큰 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매우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크기는 했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침례 요한은 그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를 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요한보다, 그보다 앞서 간 모든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큰 자인지 작은 자인지는 우리의 그리스도의 분량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많이 소유할 때 여러분은 큰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많이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큰 자라면 우리는 그들을 축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언제나 큰 자가 작은 자를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큰 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그리스도의 분량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보다 크다면 그것은 나보다 많은 그리스도의 몫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작은 분량을 가진 사람들은 더 큰 분량을 가진 사람들의 축복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참예하고 누리는 그 그리스도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누릴 때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를 ! 갖습니다 . 이렇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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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포이멘 칼럼 - 항주 송성천고정 가무쇼를 보고나서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40
성경말씀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행:2:32~33上)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며, 우리 모두가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으로 높아지시고, 

 오늘의 만나  

라헬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름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름, 두 이름을 가졌습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고통을 받고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즉시 그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냐민으로 바꾸었습니다. 슬픔의 아들이자 오른손의 아들이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베노니이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냐민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두 방면을 가지고 계신 놀라운 분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만큼 슬픔 가운데서 고통 받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만큼 높이 올려진 적도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장 33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그분을 높였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1장 3절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헬은 이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역시 이런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 따르면 그 아들의 고통이 그녀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듯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3년 반 후에 부활과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냐민이 고통과 높여진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35
성경말씀 

 (빌1:21)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롬8:2) 왜냐하면 생명의 영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며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업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의 법으로써 자연발생적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만일 그것이 법이 아니라면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법인 이상 우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손에 물건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손을 놓으면 그 물건은 자동적으로 땅에 떨어집니다. 만유인력은 하나의 법이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일종의 현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우리가 노력해서 붙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임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 법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두셨고 기업으로서 그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이삭과 같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30
성경말씀 

 (롬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11:5)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을 받은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선택에 관계된 긍휼과 은혜를 이해하기는 약간 어렵습니다. 비록 영원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미리 아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가련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대적 사탄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이 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가련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탄아, 너는 이 상황이 내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인 줄 모르느냐! 이런 가련한 사람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나의 긍휼을 베풀 수 있겠느냐? 만일 모든 사람이 완전하여 너의 기준에 도달한다면, 내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탄아, 선택된 이 사람이 바로 나의 긍휼을 입을 사람이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해 들어오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은혜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고 그분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장 가련하고 비참한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우리가 회개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신성한 것-하나님의 은혜-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은혜 즉 그 영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인격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