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햅시바 2018. 7. 20. 12:20


말씀

1:1 태초에 말씀께서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2 그분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겼으니 생겨난것이 그분을 떠나서 생긴것은 하나도 없다.

누림

태초에, 즉 영원 과거부터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정의이고 설명이며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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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샬롬1 2018. 7. 20. 10:37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경륜도 없다

우리는 매일 주의 회복 안에서 교회 안에서 매우 바쁘고 매우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울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과 실재와 중심이 아닌 일들을 하고 있다

나는 주께 기도한다
[주여 당신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에게 참되고 진정한 부흥을 허락하여 주소서]

아주 높고 깊고 심오한 계시를 위해 주님은 한 본을 필요로 하신다

그분에게는 이러한 최고봉의 신성한 계시로 말미암아 그분의 의해 일으켜져서 이러한 계시에 따라 생활하는 단체적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럴 때에 그들이 그 본이 될 것이다

심지어 기도로 말씀 읽는 것조차도 우리는 강하고 합당한 본을 세우지 못했다

어디에 그리스도를 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하는 본이 있는가?

심지어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것은 별로 유력하지 못하다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확대하는 본이 있는가?

어디에 이러한 생활이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계시들이 인쇄된 책들을 갖고 있지만 그 본은 어디에 있는가?

내 부담은 나의 교통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주어 동일한 일을 위해 나와 함께 부담을 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방 교회들이 있지만 본은 없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관해서 본이 없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에 관해서도 본이 없다

주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부요하시지만 이에 대한 본이 없다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서 그렇게 부요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님을 부르는 참되고 살아 있는 실행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본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이름 부름을 통하여 주님의 의해 부요하게 될 것이다

바을은 심지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부름으로써만이 아니라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단체적으로 부름으로써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이것을 단체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교회에는 주님을 부르기 위해 종종 모이는 열 명 혹은 열 다섯 명의 성도들의 무리가 있어야 한다

주님을 부르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여러분이 입을 열어 영을 사용함으로 주님을 부를 때 즉시로 여러분은 그분의 비추심 아래 있게 된다

여러분은 빛 비춤 받게 되고 드러나게 된다

그 때에 여러분은 자신의 모든 결점과 단점과 실수들을 보게 된다

지방교회
하나님의 계시의
최고봉에 따른 생활을 삶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찬송가 566 - 사망이긴 부활의 생명은 - 지방교회들 찬송가

1.사망 이긴 부활의 생명은 피조되잖은 영원한 생명 파괴되잖은 승리의 생명, 그리스도가 나타내셨네.

2. 사망 이긴 부활의 생명은 사망 통해 더 확증되었네. 사망은 다만 기회를 주어 이 생명 풍성 나타나게 해.

3. 사망 이긴 부활의 생명은 사망과 매장 통해 번식해. 고난통하여 자라는 생명, 풍성한 열매 더욱 얻었네.

4. 사망 이긴 부활의 생명은 모든 방해와 장애 돌파해. 흑암과 음부 권세 이기고, 사망 삼키고 생명 해방해.

5. 사망 이긴 부활의 생명은 신성의 모든 충만 나타내. 하나님 의와 성결 산출해. 하나님 영광 형상 나타내.

6. 사망에도 그 능력 발하는 부활한 생명 얻기 원하네. 이 생명은 곧 사신 주예수, 체험 통하여 깨닫게 되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생명이만나 339 - 십자가 좌우편의 두 명의 강도 - 지방교회들 이만나


생명이만나 339 - 십자가 좌우편의 두 명의 강도 - 지방교회들 이만나

눅23:33-34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범죄자들도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군인들은 그분의 못을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를 뽑았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갓멘에세이 91 - 복음을 수호해야 할 이유 - 지방교회들 에세이

갓멘에세이 91 - 복음을 수호해야 할 이유 - 지방교회들 에세이

사도 바울은 ‘복음의 수호’라는 말을 썼습니다(빌 1:7). 

만일 복음의 내용이 단지 구속만이고 불신자에게만 필요하다면, 복음을 선포하면 족하고, <복음을 변명>하거나 <수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에클레시아 교회론에 대한 간략한 반박 (4) - 개혁교회 교회표지와 불일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