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rarryking 2018. 11. 2. 00:14

지방교회 동영상 생명이만나 14회 - 

죄인의 책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 00:00

지방교회 찬송가 - How Sweet the Name of Jesus Sounds

1

How sweet the Name of Jesus sounds In a believer’s ear!

It soothes his sorrow, heals his wounds,And drives away his fear,

And drives away his fear, And drives away his fear,

It soothes his sorrow, heals his wounds, And drives away his fear.

2

It makes the wounded spirit whole, And calms the troubled breast;

’Tis manna to the hungry soul, And to the weary rest,

And to the weary rest, And to the weary rest,

’Tis manna to the hungry soul, And to the weary rest.

3

Dear Name! the Rock on which we build; Our shield and hiding-place;

Our never-failing treasury, filled With boundless stores of grace,

With boundless stores of grace, With boundless stores of grace,

Our never-failing treasury, filled With boundless stores of grace.

4

Jesus, our Savior, Shepherd, Friend, Our Prophet, Priest, and King;

Our Lord, our Life, our Way, our End, Accept the praise we bring,

Accept the praise we bring, Accept the praise we bring,

Our Lord, our Life, our Way, our End, Accept the praise we bring.

5

Weak is the effort of our heart, And cold our warmest thought;

But when we see Thee as Thou art, We’ll praise Thee as we ought,

We’ll praise Thee as we ought, We’ll praise Thee as we ought,

But when we see Thee as Thou art, We’ll praise Thee as we ought.

6

Till then we would Thy love proclaim With every fleeting breath;

And triumph in that blessed Name Which quells the pow’r of death,

Which quells the pow’r of death, Which quells the pow’r of death,

And triumph in that blessed Name Which quells the pow’r of death.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 00:00

지방교회 이만나 -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 -생명이만나 395번

요일1:1~2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자면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가 주목하였으며 우리 손으로 만졌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는 보았으며 이제 증언하며 여러분에게 전해 줍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 00:00

지방교회 칼럼 - 레위기 라이프스터디 요약 13 - 포이멘칼럼 203번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57번, “안식년과 희년(2)”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 속죄일에 나팔소리가 퍼져 나감

25장 9절 “너는 일곱째 달이 되면 그달 초 열흘날에 숫양 뿔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희년이 속죄에 근거하여 완전한 자유가 온 백성들에게 선포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 예표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에 의해 성취되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2. 00:00

고전 15:45 - 생명주는영 (a life-giving Spirit)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일반적인 구원론은 구속 곧 죄사함과 칭의를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요10: 10하). 이것은 죄사함과 칭의가 구원의 한 방면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구원의 완성이 아니며, 구속받은 사람들은 더 나아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영적으로 자라가는 면의 구원이 더 필요 함을 말해 줍니다 (롬5:10, 벧전2:2, 1:5 본문 참조).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생명주는 영(a life-giving Spirit)’으로 소개한 고전 15:45은 주목할 만한 성경 본문입니다. 서울교회 담임인 이종윤 목사께서도 설교에서 “고전 15:45에는 창조론, 인간론, …  구원론, 종말론이 들어 있어서 신구약 성경 중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 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http://www.seoulchurch.or.kr/2008/sub02_02.htm?read_no=3753&page=0&list=0&key= )  

그럼에도 이 ‘생명주는 영’은 대부분의 성도들 심지어 목회자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편입니다. 더구나 일각에서는 이 구절이 언급한 생명주는 영과 성령과의 관계를 놓고 양태론 시비를 벌이는 등 다소 혼돈스런 면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본문에서 언급된 생명주는 영이 누구이시며, 주 예수님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는 과연 무엇인지를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 고전 15:45 본문과 주석적 견해 소개 

위 성경본문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적 이해를 돕기 위해 원어를 직역한 본문과 그에 대한  몇분 성경 교사들의 관련 주석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고전 15:45 :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So also it has been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became a life-giving Spirit.)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핸드릭슨),1987, 932쪽) 

  1) M. 빈센트 :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은 죄 있는 족속의 머리라면, 그리스도는 구속 받은 족속의 머리이시다…생명주는 영은 단지 살아 있는 생명만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생명이시다 (…Not merelyliving, but imparting life). 요1:4, 3:36, 5:26, 40…11:25, 14:6과 비교해 보라 (M. 빈센트,Word Study, Vol. III., 1980, 284쪽). 

  2) 존 칼빈: 

 “모세는 아담이 산 혼이 된 것을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과 연관시킨다. 생명 또는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다만 사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처럼 산 혼이 되신 것과  이외에 주의 영께서 그분 위에 부어지신 것, 그분의 능력에 의해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시고 또한 다른 이들도 일으키시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Moses relates that Adam was furnished with a living soul: Christ, on the other hand, is endowed with a life-giving Spirit. Now it is a much greater thing to be life, or the source of life, than simply to live. It must be observed, however, that Christ did also, like us, become a living soul; but, besides soul, the Spirit of the Lord was also poured out upon him, that by his power he might rise again from the dead, and raise up others…” ( 칼빈주석 Vol. XX(고린도서vol. 2), 베이커 북 하우스, 1981,  52쪽) 

 “이로부터 우리가 사람임으로 산 혼을 소유하지만, 우리는 중생의 은혜에 의해 우리 위에 부어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주는 영도 소유함을 본다. 요컨대, 바울의 취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얻은 지위는 첫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산혼은 이름 그대로의 아담에게와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생명이신 그영을 획득 (procured)하셨기 때문이다.” 

 “From this you see, that we have living souls, inasmuch as we are men, but we have the life-giving Spirit of Christ poured out upon us by the grace of regeneration. In short, Paul’s meaning is, that the condition that we obtain through Christ is greatly superior to the lot of thefirst man, because a living soul was conferred upon Adam in his own name, and in that of his posterity, but Christ has procured for us the Spirit, who is life.”(위 책, 53쪽). 

  3) R. C. H. 렌스키 

 “그리스도는 참으로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으로 불리우신다. 둘은 매우 유사하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두 아담들은 모두 선조들이지만, 한쪽은 오직 천연적인 혈통의 선조라면, 다른 쪽은 영적인 혈통의 선조이다. 한쪽은 창조될 때 단지 “산혼”이 되었을 뿐임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자연적인 몸”(a natural body)만 물려 받았지만, 다른 쪽은 우리를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로부터 “영적인 몸”(a spiritual body)을 받게 될 것이다.”(렌스키, 바울의 고린도 전후서 해석, 핸드릭슨 출판사, 1963, 720쪽,  * 독자의 편의를 위해 영문 원문을 번역한 것임). 

 “”생명주는 영”은 우리와 연관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다. 비록 그분이 영적인 몸과 영광의 몸이 되셨을지라도, 그러한 영적인 생명은 그분의 몸으로 부터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 안에 ‘거하는’(dwells) 영으로 부터 우리의 몸 안에 거하는 우리의 영으로 흐르고그 결과 우리를 영적으로 활기있게 하고, 우리에게 생명(조에)을 주신다.”(위 책 722쪽).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일시적인 죽음을 통과하여 축복된 영원 안으로 옮겨간 조에의 생명을 우리가 영접하는 때인 중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역사의 완성은 우리 몸의 부활과 영화롭게 됨인데,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과 다시 결합하여 22절이 말하는 신령한 몸이 되는 것이다.”(위 책,722쪽). 

  -고전15:45의 핵심 단어들 정의  

1) 마지막 아담 

 생명주는 영이 누구이신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마지막 아담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주는 영은 다름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 죽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 빈센트에 의하면,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1:14) 즉 주 예수님이십니다(행9:22, 요11:27). 

 이제 이 마지막 아담이신 주 예수님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분은 육신을 입으신 <제 2격 아들 하나님>이심이 분명하지만(갈4:4), 그러나 이것은 다른 두 위격과 ‘분리된’ ‘아들 하나님 만’(God the Son only)이심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 계시며…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all in each)”라는 어거스틴의 정통 삼위일체의 정의에 따르면 이 분은 <성부와 성령께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 즉 <온전한 하나님>(the complete God)이십니다 (요14:11, 8:16, 16:32).  

이러한 이해는 ‘삼위는 각기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으신 상태로 상호내재 하신다’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방면의 고전적인 원칙과도 부합됩니다 

요약하자면, 마지막 아담은 ‘육신을 입으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마지막 아담은 ‘육신을 입은 아들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십니다. 

  2) 생명주는 영 

생명주는 영은 바로 위에서 정의되신 마지막 아담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분입니다. 즉 마지막 아담이 부활 전 예수님이시라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위 어거스틴의 정통 삼위일체에 의거하여 좀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부활 후 예수님이신 생명 주는 영은 < 성부, 성령께서 존재론적으로 함께 하시는 부활한 몸을 입으신 성자>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3) ‘되었나니’ 

 성경은 ‘마지막 아담이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후 문맥을 볼 때 그 렇게 되신 시점은 부활 때임을 알수 있습니다. 위 인용문에서 칼빈은 마지막 아담 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그영 곧 생명주는 영을 ‘procured’(획득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부활전 예수님(마지막 아담)이 부활 후 예수님(생명주는 영)이 되시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그런 부활 전후의 차이를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문을 닫고 있는 공간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심”(요20:19), “눈에 보였다가 (갑자기) 안 보이는 존재가 되심(눅24:31)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되었나니”의 실상은 바로 앞 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하나님이신 방면은 전혀 변화가 없으시나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는 부활 전의 “육의 몸”이 부활 후의 “신령한 몸”이 되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15:44).  

지금까지 생명주는 영을 검토해 온 내용들이 맞다면, 우리는 생명주는 영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을 재차 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가 정의한 생명 주는 영은 ‘부활한 예수님의 인성이 포함된 신성한 영’ 또는 ‘신성, 인성의 영’이십니다 (2)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지만 신성 안에 인성이 포함된 이러한 생명주는 영은 주 예수님이 영광 받으신 싯점인 부활(눅24:26, 고전15:43) 전에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요7:39). (3) 고전 15:45의 생명주는 영은 다만 아들만 또는 다만 성령만도 아니시고, 부활한 몸(인성)을 가지신 아들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성부와 성령도 함께 포함되신 온전한 하나님, 즉 삼위 전체이십니다. 

  -바울 서신에서의 성령과 생명주는 영의 동일시 문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다’라는 정의가 정통 삼위일체에서 구별된 삼위를 유지하는 원칙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니” (And the Lord is the Spirit)(고후3:17)에서 보듯이 성경본문 자체가 그런 원칙과 충돌하는 곳이 몇군데서 발견됩니다 (사9:6, 고전15:45, 고후3:17). 개핀 교수님, 박형용 박사님, 제임스 D.G. 던(Dunn)박사님 등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은 이러한 부분들을 경륜적인 삼위일체의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의 위격 간의 동일시’로 설명합니다.  물론 이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론의 특징인 위격간의 구별을 손상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집니다. 

(만일 이런 관점을 양태론이라고 한다면 ‘주는 영이시다’(고후3:17) 등의 성경기록 자체가 양태론 이라는 말이 되고 말아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제임스 던 박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와 그영- 한 영적인 존재 또는 영적인 차원 또는 영역이 아니라 그영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영 사이에 구별이 없다”(Paul identifies the exalted Jesus with the Spirit-not with a spiritual being or a spiritual dimension or sphere, but with the Spirit, the Holy Spirit…in the believer’s experienc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Christ and Spirit)(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giving Sprit,  The Christ and  the Spirit: Christology Vol.1, p139). 

 우리는 동일한 견해를 다음 자료들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다” (스미디즈,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201쪽), “고전 15:45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느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개핀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 하고 있다.이것은 …경륜적, 기능적, 종말적 동일시이다” (차영배,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49쪽). ‘주는 영이시다’(박형용, ‘신학지남’ 1978년 봄호(3월호, 통권 180권) 28-39쪽). 

  결론적으로,   

죄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이후 삶속에서 영적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음으로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이 되는데 있어서 ‘생명주는 영’(고전15:45)을 바로 이해하고 체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부활한 인성이 포함된 신성한 영’은 많은 성도님들에게 가려져 있었거나 잘못 이해 되어 왔습니다. 

앞에서 검토한 바에 따르면, 생명주는 영은 <부활한 인성이 포함된 아들 하나님> 또는 <영적인 몸을 입으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께서도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 전체>이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분의 인성을 벗어 버리셨다고 이단적으로 믿지 않은 한, 생명주는 영을 위와 같이 ‘인성-신성의 영’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소 생소하나 철저하게 성경적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이러한 생명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인식과 체험 안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 

  - 추가로 다뤄야 할 두 가지 남은 문제들:    

1) 칼빈과 렌스키는 위 인용문에서 우리가  중생할 때 생명주는 영을 소유했음을 강력하게 암시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생명주는 영’과 ‘보혜사 성령’이 각기 다른 두 영들이라면 우리는 두 영들을 어떤 식으로 각각 체험하는가 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또한 두 영을 같다고 보더라도 추가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 만일 우리가 생명주는 영을 영접한 것이라면 인성 신성 모두를 포함하신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의 주장처럼 인성은 제외된 예수님의 신성만 내주 하시는 것인지도 더 연구와 검토가 필요한 과제들입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비중 있는 주제들이나 반드시 빛가운데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껴져서 주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최선을 다해 정리해 나가고자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1. 08:42

지방교회 이만나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생명이만나 394번

행1:8 그러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임하시면 여러분이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위에’와 ‘여러분 안에’는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안으로 불어넣어져 본질적으로 그들에게 생명의 영이 되셨습니다. 


posted by rarryking 2018. 11. 1. 00:12

지방교회 동영상 생명이만나 13회 - 

그리스도의 인내에 참여함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1. 00:00

지방교회 찬송가 539장 -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릇으로

1.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릇으로 지었네 사랑하는 마음 짓고 받는 영을 지었네

2. 마음으로 사랑하고 영으로 주 영접해 이렇게 해 하나님을 생명으로 취하네

3. 우리 마음 부패케 해 영을 죽게 한 사탄 주를 접촉 못하게 해 자아 의지하게 해

4. 주님 그의 구원 안에 내 맘과 영 새롭게 해 사랑하고 영접하는 본능 회복시켰네

5. 새롭게 된 마음으로 하나님 을 사랑해 새롭게 된 영으로써 경배하며 영접해

6. 주님 향해 우리 마음 성실하고 단순해 우리 영은 가난하여 추구하며 온순해

7. 주여 내 맘 주 사랑해 신선하게 하소서 내 영 또한 활발하게 주 접하게 하소서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1. 00:00

지방교회 에세이 - 성경교사의 도움을 받는 유익, 갓멘에세이 105번

1.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사막길을 여행 중 빌립의 방문을 받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 53:7-8 을 읽던 중이었는데, 빌립이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행8:30-31)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 집회에 가서 다른 이의 공급에 의존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1. 1. 00:00

이단감별사의 눈에는 칼빈도 이단인가?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감리교 권사 이00라는 분이 삼위일체에 관해 쓴 글이 눈에 띄곤 합니다. 모 단체가 삼위일체를 '존재론적 삼위일체' 와 '경륜적인 삼위일체' 로 나누어 설명한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이00 권사께서는 정확치 않은 자신의 지식으로 비판했고, 심지어 경륜적 삼위일체 자체를 이단시 하는 터무니 없는 글을 인터넷에 유포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기준이라면 아래에서 보듯이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존 칼빈도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경륜적삼위일체를 중심으로 그의 삼위일체론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함께 경륜적 삼위일체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신학계에서는 충분히 허용되는 것이며 그 자체가 이단이 될수 없습니다. 

이단이 교회의 간증을 위협하는 것 못지 않게 이처럼 이단감별사들의 검증 안된 글(주장) 또한 또 다른 혼잡이요 병폐입니다. 그런 글들이 지금 이 순간도 인터넷 상에서 신학을 잘 모르는 평신도들을 미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총신대 신대원 문병호 님 논문 중에서 발췌) 

 "칼빈에게 있어서 내재적 삼위일체적(immanent-trinitarian) 이해는 경륜적 삼위일체적(economic-trinitarian) 이해를 지향하고 있다.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시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래하셨다”는 초대 교회에 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적 교리는 다음과 같은 경륜적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른다: “아버지는 사역의 시작이고 모든 일의 기원이자 근원이며, 아들은 모든 일의 지혜와 경륜과 작정된 바대로의 뜻이며, 성령은 그 사역의 능력이자 효력이다” (Inst. 1.13.18, CO 2.105). 

니케아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구원 사역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론을 다룬다.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손(manus)을 통하여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그 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또한 오직 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cf. Inst. 3.2.1). 우리를 향하신(pro nobis)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in nobis) 역사한다." 

출처: http://www.theologia.co.kr/cgi-bin/spboard/board.cgi?id=a2&action=download&gul=27 (총신대 신대원, 문병호님 논문-다운로드) 

참고로 이00님은 아래 글에서 "이미 경륜적 삼위일체는 4세기 이후에 양태론적이란 이유로 신학적 중심에서 밀려나 잊혀진 주장이 되고 말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 세기 보다도 한참이나 지난 16세기에 칼빈은 여전히 경륜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이00 님은 어떻게 설명하실지 궁금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경륜적 삼위일체를 자신의 삼위일체의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칼빈도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