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4:00
데살로니가전서 1장 2절
[우리는 여러분 모두를 두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여러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We thank God always concerning all of you, making mention of you in our prayers.)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또한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의 일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Remembering unceasingly 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love and endurance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before our God and Father;)
이 서신은 주후 54년경 바울이 그의 2차 전도 여행 중에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쓰여진 것입니다.(행18:1, 5)
(행18: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행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왔을 때에,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엄숙히 증언하였다.
바울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세 가지, 즉 믿음의 일(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을 알 수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일(역사)의 본성과 힘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의 본성과 힘이 믿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과 수고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일은 그다지 깊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고는 일보다 더 깊고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 이것이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사랑에 속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수고의 자극제요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일은 결국에는 더 깊고 더 힘든 것, 즉 수고가 됩니다.
이러한 수고를 위해서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지속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사랑의 수고에 대한 적절한 예입니다.
어머니들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이 단지 일이 아닌 수고라는 것을 압니다.
출산 후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극진히 사랑할 것입니다.
얼마동안은 즐겁게 일하며 어린아이를 돌볼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일은 그녀를 압박하고 지치게 하는 수고가 됩니다.
주님이 이 젊은 어머니의 마음 속에 어린 아기에 대한 모성애를 간직하게 한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러한 사랑없이는 수년간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은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인해 그녀는 어린아이를 돌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먼저 믿음의 일이 있고, 이러한 일이 사랑의 수고가 됨을 설명해 줍니다.
소망은 인내의 근원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어린아이를 돌보는 데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데서 오는 부담을 감당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가정 생활에서는 물론 교회 생활에서도 우리 모두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훈련받고 교육받아 먼저는 일해야 하고, 다음에는 수고하고, 결국에는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는 인내해야 합니다.
사도가 인내하는 한 그에게는 사도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인내가 장로 직분의 최고 수준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역에 있어서는 인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성공적으로 돌보려면 인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내는 즐거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돌본다는 것은 항상 상당한 고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장 3절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내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이나 장차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생깁니다.
소망은 인내의 근원입니다.

창세기1

오 주예수님!  사랑해요.

우리가 생명안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더 믿음의 그리스도를 깨닫는것을 굳게 붙잡을것이며,

교회에서 어떤 사소한 일들로 분열을 일으키지 않도록 관념을 버려야 할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에서 하나되고,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서도 하나되며,

또 충분히 성장한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하려는 것입니다.(엡 4:13)

그렇게 될때에야 비로서,믿음의 역사안에 지체들과의 사랑의수고와 다시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교회생활에 기쁨으로 함께 할수 있을것입니다.아멘

헵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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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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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한나의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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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3:50

지방 교회 - 내주하는 그리스도

  고린도후서13:5 - 여러분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지못합니까?    아멘.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심장이자 우리존재의 심장입니다... 빛을 비추심으로  질그릇인 우리안에 주님이 보배로  들어 오셨습니다. 우리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생명을 살 수 있고, 그로인해 부활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눈언저리를 바라보고 그 임재를  누림으로  천연적인 나를 벗고 주님과 하나로  사는 기쁨을 더 맛보게 하소서~!
  - 출처 : 한나의 자유 -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3:45
지방 교회 - 에베소서 3:16-17 
엡3:16-17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분의 영을 통하여, 능력으로 여러분을 강하게 하셔서 속사람에 이르게 하시고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뷰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게하시며 엡1장은 교회에 대하여 계시를 위한 바울의기도, 3장은 그리스도를 체험을 위한기도입니다. 1. 능력으로 강하게하셔서 속사람에 이르게 하시고 - 먼저는, 각각 타고난 사람의 기호, 애정, 즐거움, 욕구에서 거듭난영(속사람 )을
강하게 하셔서에 영에 이르게하십니다. 2.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 영이 강 하게되면 우리 마음, 곧 생각이 주를 앙망하고 의지하고, 감정이 주를 사랑하고,
주님의권익을 결정하게 됩니다. 점점 우리는 새기호, 새즐거움, 새갈망.... 새마음이 되어
주님이 우리 마음안으로 확장되셔 거처를 정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우리가 되시고 우리를 그분이 되게 하는 길! 어제는 아침부흥 시간외에 출근부터 퇴근까지 일상생활에서 일하면서 의식적으로
내생각을 주님과 연합하는 시간을 세어보았는데 10번정도 주님께 돌이킨것 같고,
한번 마음까지도 주님으로 적셔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점점 더 생활에서 주님이 마음에 거처를 얻으시는 경건의훈련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 출처 : 한나의 자유 -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3:40
주의회복 - 육체(아말렉)를 이기는 길  출17: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르비딤에 있는 이스라엘과 싸웠다." 믿는이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처음 대적을 만납니다. 이는 우리 안에는 주님 오실때 까지 죄와 세상과 사탄과 사망의 총체인 옛사람, 육체를 나타내는 아말렉과의  전쟁이 남아 있음을 말해줍니다. 육체는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만나(16장)와 반석의 생수(17장)를 마신 후 출17장에 나타타나지요. 믿는이는 아말렉인 육체로 인해 자주 패배당하고, 생명 성숙이 더디고, 하나님의 간증을 잃어버립니다. 출17장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때 18장의 왕국과 19장의 성막 건축이 있게되지요. 육체는 결코 바뀔수 없고 개선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통치와 보좌를 거스르는 손입니다(출17:16). 우리가 충분히 그리스도를 생명의떡(16장)과 생수(17장)로 마시지 못한다면 육체와 영의 이 싸움에서 옛사람, 육체에게 늘 패배 당하여 사로 잡히게 되지요.   아말렉, 육체를 이기는 길 *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여호수아가 이기고 손이 내려올때  아론과 훌이 동역하여 손을 받치고 여호수아는 싸운다 -  중보기도 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므로 아말렉을 이길 수 있습니다. -  겸손히 하나님의 보좌앞에 순복할때 아말렉을 이깁니다. 교만한 사람을 아무도 육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으로 가득찬 사람, 심지어 선함으로 가득찬 사람은 주님이 오셔도 들어갈 곳이 없습니다. 자신을 겸손히 비울때 모든게 (남편과 자녀들 지체들이) 사랑스럽습니다.  

-출처 : 한나의 자유 -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00

6년여 재연구 끝에 실수 인정… “믿는 이들의 정통단체” 평가

▲지방 교회에 대한 과거 비판에 대해 반성하는 내용을 담은 CRI의 저널 특집판.

‘지방 교회(local Church)’ 운동에 대해 가장 처음 비판을 제기해 이단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던 미국의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이하 CRI)가, 무려 6년여에 걸친 재연구 끝에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라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권위있는 기독교 연구단체인 CRI가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잘못됐었다고 전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방 교회 운동은 중국에서 가장 크고 역동적인 운동 중 하나이며,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에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인 워치만 니에 의해 시작되고 위트니스 리에 의해 계승·발전된 것으로, 목사인 복수의 장로들, 성직자와 평신도 구분의 폐지, 주님의 상을 중심으로 한 예배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양태론(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각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는 이론)을 가르친다는 의혹을 CRI가 1970년대 중반 지적한 이래 미국에서 이단정죄를 받아왔다. 한국에서도 예장 통합측이 제76차 총회(1991)에서 경북노회가 제출한 “지방 교회(회복 교회)의 정체에 대한 질의”에 대하여 동 교회의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에 대하여 연구한 후, “위트니스 리 사상은 워치만 니 사상과 함께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낳게 하는(김기동, 권신찬, 이명범 등) 모태가 되는 명백한 이단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이어 제77차 총회에 “추가 연구보고서”가 제출되어 채택됐다. 그러나 이 모든 논란의 시발점이 됐던 CRI가 자신들의 과거 연구 내용을 뒤집고 반성하면서 미국에서 지방 교회 논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CRI는 최근 자신들이 발행하는 ‘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특집판에서 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 전체를 할애해 지방 교회 이단논쟁에 있어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지방 교회들은 신약 기독교의 정통적인 교회”라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이 재연구에는 과거 지방 교회에 대해 “정도를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라고 지적했었던 연구원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들의 과오를 시인했다.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는 2003년 지방 교회측 대표들과 가진 만남에서 자신이 지방 교회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재평가를 결심하게 됐다. 그는 “그 만남에서 지방 교회들이 부인하는 것으로 알아왔던 바로 그 교리들을 그들이 인정하는 감동적인 말을 듣게 됐다”고 회고했다. 해네그래프는 “지방 교회 대표들은 영원히 구분되는 세 위격으로 계시되신 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 사람은 본체론적으로 결코 하나님의 신격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그들은 ‘단지 교회(only the church)’라고 말한 것을 ‘유일한 교회(the only church)’로 오해받아 반대받았던 사실을 하나하나 증언했다”고 했다. 

 이에 CRI는 지방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 작업을 시작했다. 이는 미국 뿐 아니라 중국, 대만, 한국, 영국에서도 이뤄졌다. 이 연구에는 수백권의 책과 논문과 교회 문서와 음성자료와 영상물에 대한 주의 깊은 평가가 포함됐고, 법정 자료들까지도 참고했다. 그리고 해네그래프 대표는 “우리가 한 근본적인 연구의 결과는 ‘우리가 틀렸었다!’라는 말로 압축된다”고 했다. 지방 교회에 대한 CRI의 최초 연구와 이번 재연구에 참여한 엘리옷 밀러(크리스천 리서치 저널 편집장)는 “우리가 전에 그들을 ‘정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 단체’라고 평가했던 것은 우리가 그들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며 “비록 우리가 여기 서방에서 익숙하게 된 것들과는 다르지만, 이들(지방 교회)은 확실히 믿는 이들의 정통 단체”라고 강조했다. 밀러 편집장은 물론 지방 교회에 비판받을 만한 요소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지방 교회들이 인간 본성에 관해 삼분설을 취하고 그리스도인의생활에 대해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보다는 더 신비스럽게 접근하는 것 ▲세대주의를 포함한 그들의 해석학적인 방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보다 예표론에 대해 더 사변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러 편집장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의 이러한 방면 중 정통 교리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덧붙였다. 지방 교회에 대한 CRI의 이번 재평가에 대해 미국 교계 일각에서는 강한 비판도 뒤따르고 있다. 이로 인해 CRI의 재정도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행크 해너그래프 대표는 “이러한 소란 가운데서 나는 직원들에게, 우리의 사역은 인기 경쟁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켰다”며 “우리의 사역은 강대상의 크기나 정치적인 결탁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한다.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또 “어떤 대가가 든다 할지라도, 중국과 전 세계에서 박해당한 교회가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틀렸었다’라는 말보다 더 하기 힘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왜냐하면 진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라는 격언을 실천하는 사역으로서, 기꺼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밝혔다.  

앞서 세계적 권위의 신학 명문 풀러신학교 역시 지방 교회에 대해 이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 하워드 로웬 신학부 학장, 베리마티 카케년 조직신학 교수가 참여한 위트니스 리 연구프로젝트(2년)에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지방 교회에 대한 이단 논쟁이 시작됐던 미국에서 잇따라 이같은 재평가가 이뤄짐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같은 흐름이 이어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내에 위트니(지방 교회)에 대한 연구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출처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6887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5. 1. 00:28

 

"그리스도께서 육체에 고난을 받으셨으니, 여러분도 동일한 생각으로 자신을 무장(武裝)하십시오….. 불같이 혹독한 시련이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닥쳐올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처럼 기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만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벧전 4:1, 12-13)"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야 한다. (원문 직역: 고난받을 생각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한데,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모든 일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하다는 생각이 없으시다. 구약성경이 줄곧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목자로서 그분의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덜어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항상 분별이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행을 제창하는 그러한 철학 사상을 교회 안으로 들여와서는 안된다. 우리가 기독교가 아닌 어떤 것을 기독교 안으로 들여오면, 즉시 기독교는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시련과 채찍질에서 예외가 되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시련을 주시고 채찍질을 하신다. 그러나 이것이 고행을 제창하는 그런 철학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별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채찍질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채찍질하시지, 결코 매일 매순간 그렇게 하지는 않으신다. 만일 우리가 완고하여 글복치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시련을 계속 주시고 채찍질로 우리를 떠나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보통 때에 그분은 늘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결같이 택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신 것을 말하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기꺼이 고난받는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받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규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많은 고난은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보통 사람과 다른 길을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받을 마음가짐이다.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난받을 것을 잘 예비하는 것이며, 마음에 고난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이것은 고난받는 길을 기꺼이 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받지 않도록 안배하실지라도 그것은 주님의 일이다. 우리 편에서는 다만 언제나 고난받을 것을 예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안배가 바뀌어서, 시련이 우리 몸에 닥칠 때에도 우리는 이것을 응당 감당해야 하며 조금도 이상한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만일 당신이 조그만한 시련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이 당신에게 좋은 환경을 안배하실 때에는 당신이 받아들이겠지만,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당신은 즉시 믈러나거나 혹은 사역을 중단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은 먹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은 입을 것이 있어도 이렇게 하며 없어도 이렇게 한다. 당신이 건강할 때도 이렇게 하며 몸이 약할 때에도 이렇게 한다. 여기에서 당신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곧 병기(兵器)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병기의 위력은 대단하여 사탄이 이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당신은 사역을 할 수 없게 되고 즉시 멈추게 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고난을 잘 참고 견디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보배로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전혀 없게 된다. 그들은 때로 심지어 속에서 원망하며, 원망의 말을 한다. 그들은 그런 날들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봐 두려워 한다. 그들에게는 오직 이 고난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간구만이 있을 뿐 어떠한 찬미도 없다. 성령의 다스림 아래서 그들에게 닥친 것들은 그들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속에서 그런 말들이 빨리 지나기만을 갈망한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조금도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여 준다. 형제 자매여. 주님이 당신에게 평안한 날들을 허락하셨을 때, 만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없다면, 주님이 당신의 길을 순탄케 하실 때는 전진할 수 있겠지만, 길이 진흙투성이일 때에는 봉사를 그만두게 된다. 이런 것은 옳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고난받을 마음 가짐이 있다고 해서 곧 주님이 당신으로 고난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난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내면에 이미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으므로 당신은 좌절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신체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기타 모든 일에서 시련을 받는 형제 자매는 주의해야만 한다. 주님 앞에서 당신에게 계산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 고난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당신에게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당신이 큰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물론 당신이 만난 것은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즐거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있는가? 당신이 주님 앞에서 이러한 선택을 할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혹은, 당신은 속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연민하고 자신을 참소하지는 않았는가?


고난을 받으려는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은 사역에 있어서 어떤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외적인 요구가 그의 능력에 지나칠 때 그는 즉시 좌절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드릴 것을 요구하면 그는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귀중히 여기는 그러한 것에 관한 한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실패는 바로 자신의 생명을 아끼는데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 사역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우리의 책임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사람의 영혼이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간증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자신의 생명이 중요한가?" 오직 고난받을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 끝없이 고난받을 마음을 가진 사람, 비록 죽을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30. 00:13

 

신약성경에서 결혼생활을 말하면서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다루는 몇군데의 구절들에서 몇가지 공통된 원칙들을 발견했는데...남편들보다 아내들이 먼저 언급되고있다는 것과, 사용된 단어가 "순복" 또는 "복종"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아내들이 먼저 언급되었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보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쉽게 악한자의 유혹에 요동하고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종 또는 순복"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subject to"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자녀들과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는 엡6:1과, 종과 상전과의 관계를 다루는 엡6:5에서 언급된 "순종"(obey, be obedient to)이라는 단어와 분명한 구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순복"과 "순종"...이 두개의 비슷한 단어에 대한 합당한 인식이 성공적인 결혼생활 안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열쇠라고 느껴져서, 제가 가지고 있던 영영사전(Macmillan 2002년판으로써 비교적 인정받는 사전임)을 뒤져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각 단어들을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Subject : Under the authority and control of a government, country
*Submission : the action of accepting that someone has defeated you or has power over you
*Obey : to do what a law or person says you must do

다시 쉽게 우리말로 얘기해보자면....
순복(Submission)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마음가짐과 태도의 문제이며, 순종(Obey)은 외적인 행위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들에게 자기남편에게 "순복"할 것을 요구하셨지, "순종" 하라고 한것이 아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않는 남편이 세상적인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할 때 아내된 자매들은 남편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순복의 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지않는 남편을 가진 한 자매가 있었는데, 남편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믿지않는 남편을 구원하기에 합당한가를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주의종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할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보, 당신이 좋아하시는 영화를 제가 함께 보는 것은 제 안에 계신 주님이 매우 불편해하십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영화관까지 모셔다 드린후 당신이 다보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이 자매는 남편을 순종하지는 않았지만 순복의 영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아마도 자매의 남편이 이형제님의 이러한 교통에 도움을 받아 머지않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디도서 2:5과 벧전 3:1에서 우리는 분명한 또하나의 원칙을 볼수 있는데, 자매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지 못한다면, 그 지방교회에서 합당하게 가르쳐진 하나님의 말씀들이 악한자들에게 훼방을 받게 되며, 믿지않은 남편을 결코 얻을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아내된 자매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지식과 언변으로는 남편을 얻을수 없으나, 그 아내의 행위, 즉 남편을 순복하는 태도, 경외하는 태도를 가진 생활방식(The manner of life)에 의하여 얻어질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얻을수 있다가 아니라 얻어질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가족을 얻는 것이 쉽지않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남편을 순복하는 것은 무거운 머리가 몸위에 붙어 있고 많은 것들을 지시하지만 몸은 자연스럽게 그 요구에 순종하며 머리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남편된 자들은 아내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요구하거나 이용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머리삼지 않는 남편을 머리삼고 순복한다는 것은 아내에게는 크나큰 고통이며 혹독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내 몸에 붙어있는 머리의 중량이 나에게 느껴진다면 하루라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이켜 볼때 상당기간동안 저도 이러한 잘못된 머리였음을 요즘들어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20년이 넘도록 팔순이 훨씬 넘으신 시아버지과 함께 살고 있는 제 아내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사역안에서 공급되는 건강한 말씀에 의하여 조금씩 제자신이 합당한 남편으로 조정되어가고 있음을 인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끝.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8. 22:25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공과는 절대로 방법이나 수완이나 기교나 꾀가 아니다. 총명한 사람,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치를 잘 따질 수 있는 사람 역시 교회를 섬길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슨 일에든지 방법이 있는 사람이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서진 사람이다. 주님을 섬기는 자의 모든 공과는 다 부서짐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그분의 양무리인 이스라엘 백성을 치리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먼저 그를 사십년간 광야에 두시어 그로 부서짐의 공과를 배우게 하셨다. 그러므로 민수기 12장에 와서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함께 그를 훼방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여전히 모세를 위해 그가 온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간증하셨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한무리의 하나님의 백성을 치리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다. 그가 배운 유일한 공과는 바로 부서짐이었다. 하나님은 그라는 사람을 부서뜨리셨다.

사십세였을 때 그는 당시 문명 발상지인 애굽에서 학문을 배운 실로 수완있고 재간있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수완도 재능도 그 애굽사람을 죽인 주먹도 소용없으며, 애굽사람을 때린 잔인한 방법도 소용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십년 동안 그를 광야에 두시고 그로 다만 하나의 공과 곧 부서짐의 공과를 배우게 하셨다. 어떤 지방에서든지, 어떤 지역집회에서든지 부서진 사람만이 교회를 섬길 수 있고 건축할 수 있다.


랜 세월이 지날 때, 시간은 하나의 시험이다. 당신의 지혜, 당신의 재간, 당신의 수완, 당신의 총명은 모두 시간의 시련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부서진 사람은 시간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가 치리하는 교회는 더욱 실제적인 분량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하는 사람의 공과가 바로 부서짐임을 기억하라. 이치를 따지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고 협상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교회 가운데서 이치를 잘 따지는 사람은 가장 치리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가장 교섭을 잘 하는 사람은 가장 교회를 건축할 수 없는 사람이다.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서진 사람이다.

그가 이치를 따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서졌기에 따지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에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서졌기 때문에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민수기를 읽을 때 우리는 백이십세가 다 된 모세를 본다. 그는 사십 년간 애굽 왕궁에서 생활했고, 사십 년간 광야에서 목양을 통해 단련되었으며, 또 삼십팔 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매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나 그와 다툴 때마다 그는 끝내 수완이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매번 문제가 발생 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이치를 따지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방법도, 논쟁도, 꾀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굴복시키고 하나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시게 했다. 그는 실지로 부서진 사람이었다. 형제들이여, 여기에 지혜있고 학문있고 재간있으나 부서진 한 사람을 보라. 교회는 이러한 사람의 손 안에서라야 참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사람의 손 안에서만이 참되게 건축될 수 있다.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더욱 부서질수록 교회는 더욱 건축될 것이다.


(위트니스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6. 18:25

 


우리 가운데 장로든 사역자든 기독교의 풍조를 깨끗이 벗어나기 바란다. 기독교의 풍조는 바로 설교하는 사람을 대단히 의지하는 것이다. 오늘은 장박사를 청해서 말하게 하고, 내일은 왕 목사를 청해서 말하게 하고  또 며칠 지나서는 무슨무슨 전도자를 청해서 말하게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도데체 무슨 효과가 있는지 묻겠다.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한 지역 집회 혹은 한 지방교회가 오늘은 이 동역자를 청해 설교하게 하고, 내일은 저 동역자를 청해 설교하게 하는 것을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용없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당신은 모든 동역자를 초청해서 그곳에서 말하게 했겠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이고 이전의 자신 그대로이다. 몇 명의 구원받은 사람이 더해진 데 불과하고, 몇 명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당신은 영원히 교회의 건축과 교회의 동역을 보지 못할 것이다. 건축과 동역을 갖기 위해서는 책임형제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교회를 치리하고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결코 설교자를 초청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 기운데서 사역하는 방법이 아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반드시 교회 가운데 두고 일에 몰두하며 수고해야 한다.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당신이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아볼로 등 이러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전하게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직 유용한 한 가지는 여러분 자신이 엎드려져서 교회는 하나님의 밭이고, 사람은 거기서 농부가 되어 온통 얼굴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밭을 경작할 필요가 있음을 보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이 돌보도록 주어진 하나님의 집임을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주부와 같이유리창을 닦고 바닥을 청소하고, 옷을 궤매고 의복을 손질하며, 뜨거운 밥을 하고 찬 밥을 먹으면서 그곳에서 수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천 번, 만 번 설교를 들어도 소용없다.
 
형제들이여, 한 천사가 여러분의 장소에 와서 한 주 동안 특별집회를 열면 여러분이 있는 곳의 교회가 부흥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이런 소망을 품지말라. 빨리 굴복하고 차분히 일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접촉하여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누리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그들을 도우라. 만일 그들에게 물질적인 필요가 있고 당신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헌신이라거나 공급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한 형제가 밥을 먹지 않았는데 당신에게 밥 한 그릇이 있으면, 당신이 반 그릇을 먹고 그에게 만 그릇을 주면 된다. 이는 헌신이라기 보다 당신과 그가 주님을 섬기기 위해 생명 안에서 서로 나누는 것이다.
 
버울은 그가 자신과 동행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두 손으로 일했다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지체된 형제자매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 당신이 이런 정도까지 짊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축복하시는지 축복하지 않으시는지 시험해 보라! 교회의 건축은 서서히 되어지는 것이며 힘을 들일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요행을 바랄 수 없고 다른 사람을 기대할 수도 없다. 오직 당신이 손수 집 안에서 수고하고 힘들여 일해야만 당신의 집은 모양을 갖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는 장로들의 돌봄에 맡겨졌다. 장로들은 주부로서 다만 수고하고 힘들여 일해야 한다. 교회의 건축은 장로들의 수고에 달려 있다. 단지 부흥회를 여는 것은 역사하지 않는다. 당신은 반드시 여기에서 심혈을 기울여 일해야 한다.
 
나는 각지 교회의 장로들이 이 원칙을 붙잡고 각지에서 힘을 다 쏟기 원한다. 설교를 잘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지방은 갈수록 엉망이 된다. 특별집회는 적게 열수록 좋다. 시간을 아껴서 한 명 한 명 접촉하고, 한 명 한 명에게 시간을 들여 그들이 배우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Witness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