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6. 18:17

 

워치만니 형제님은 교회가 고린도전서 14장에 밝혀진 대로 집회하는 것에 대한 계시를 보았다. 이 계시에 따르면 온 교회가 모일 때, "각 사람이....가지고 있고"(26절) 라고 말한 대로, 각 성도가 함께 모일때 뭔가 함께 나눌 것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니 형제님은 이러한 종류의 집회를 '상호성 집회'라고 말했다. 이러한 집회는 한 사람이 말하고 나머지는 듣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1세기 무렵부터 전통적인 집회방식이 교회안에서 점차적으로 보편적인 집회가 되었고, 기독교 실행의 주요구조가 되었다. 만약 기독교에서 한사람이 말하고 나머지는 듣는 집회를 없애 버린다면 기독교의 구조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니 형제님은 이러한 집회가 성경적인 것이 아닌 열국의 풍습(왕하17:8)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6. 18:02

 

진정한 배움은 어떤 장소에 가서 은밀히 영적인 수양을 하여 당신 자신이 진보가 있다고 느낀 후에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자신이 어느 단계에 이르기까지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일을 한다면, 기다릴수록 더 아무것도 없게 된다. 우리는 다만 현재의 상황에서 배우고 얻는 것이지 무엇을 얻은 다음 나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참소하는 느낌을 상관하지 말고 필사적일수 있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서 뭔가가 계속 새어 나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기다릴 수 없다. 일단 기다리면 더욱더 느슨해지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히 다루어야 한다. 역대로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은 다 엄격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에서는 결코 경솔하고 주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위트니스 리 형제도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쉽게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필사적일 수 있으며 자기를 사랑치 않는 형제이다. 그는 자주 '사람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가 생각해 낸 것과 말한 것을 그대로 이행하는 사람이고, 이 길이 통하지 않으면 가서 다른 길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필사적이고 어떤 말을 해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이러한 형제들을 따라 필사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우기를 권한다. 기다리지 말라. 기다릴수록 공허함만 더할 뿐이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5. 10:23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놓거나 하나님으로 하여금 억지로 무엇을 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마7:11) 그러나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과 공의에 참여케 하시려고 그분의 성결과 공의로 우리를 다스리신다(히 12:7-8).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 않는 것은, 때로 그분이 우리를 과잉 사랑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때로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고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다만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려는 것이고,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뛰어나며, 그분이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위격을 알고 경배하게 하며, 그분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중언부언하며 떠든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다(마 6:7). 우리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5. 10:1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 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서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희게 된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如常)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다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을 믿으리라. 그들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下水)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너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출 4:2-9, 17)"

 

본문에 기록된 세 가지의 기본공과에는 오직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보았다면 자연히 다른 사람과 분별될 것이다.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했을 때, 당신이 본 것은 지팡이일 뿐이며 자신의 손이 정결하다고 보았을 뿐이고 애굽을 공급하는 것이 하수라고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일단 하나님의 계시를 얻었다면, 더 이상 이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수중에 있는 지팡이가 뱀이고, 당신의 손은 불결하고, 세상에 충만한 것이 사망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4장은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의 관점이 대비되는 한 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제는 당신이 당신이 지팡이를 뱀으로 보고, 손에서 난 것이 문둥병이며, 물이 피라는 것을 보았는가에 있다. 젊은 사람들은 야심이 있고 장미빛 꿈을 꾼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 꿈에서 깨어나게 하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이렇게 보게 하셨으며 또한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렇게 하게 하셔서 그들도 보게 하셨다.

 

본래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고자 했다. 모세가 볼 때 그것은 매우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 주어지자 그의 느낌은 달라졌다. 예를 들어, 지렁이 한 마리가 이 컵에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목이 말라 이 컵의 물을 마셨다고 하자. 다 마실 때 쯤에 이 지렁이를 발견했다면 내일 저녁 내가 여기서 다시 마시려고 이 잔을 보았을 때 내게 어떤 느낌이 있겠는가? 아마 날마다 지렁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모세처럼 날마다 지팡이를 잡고 있었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뱀으로 변한 과정을 거친 후에는 지팡이에 대한 모세의 느낌은 달라졌을 것이다.

 

육체에 대한 느낌도 이와 같다. 우리는 죄가 세상 안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흉악한 일도 세상 안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그러나 이전에는 느낌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품 속에서 손을 꺼냈을 때 문둥병이 난 것을 보았다면 이후에는 나는 손을 만지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문둥병이 생각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겸손하고 연약하며 순복하는 것처럼 꾸미지만 조금도 그럴싸하지 못하다. 만일 사람이 계시를 얻지 못했다면 꾸며서 할 때는 겸손한 모양이지만 일단 잊어버리면 겸손하지 않고 매번 일을 할 때마다 경계심(警戒心)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 형제 자매들에게 권고의 말을 하거나 혹은 엄한 말을 할 때 반드시 느낌이 있을 것이고 당신의 품 속에서 손을 꺼낼 때 아마 문둥병을 꺼낼 것이다.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불러 사역하게 하시는 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물건을 드렸는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얻은 계시가 얼마나 되는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전에 한 형제가 나에게 "나는 아무리 연약해도 저 두 형제보다는 강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이 아마 일생 자신의 패괴함과 더러움을 보지 못했을까 염려된다.

 

섬기는 사람은 세상의 물에 대해서도 느낌이 있어야 한다. 목마름이 그치려면 우리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아마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수년 동안 기도하면서 세상에 속한 지위와 축복을 얻기를 원했을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 이후로 반드시 꿰뚫어 보기를 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한 계시를 얻어 세상으로부터 얻은 모든 만족이 실상은 "피"라는 것을 보기 바란다. 계시를 얻은 사람이 본 것은 "물이 실상은 피"라는 것이다. 설령 수건이나 양말을 사는 일에 있어서도 물이 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애굽에서 남아서 나일강의 물을 마시지 않아야 하며, 광야로 가서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셔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과거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아야 한다. 계시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것들은 참으로 뭔가 기묘하게도 사람이 볼 때는 지팡이요, 품 속의 손이요, 나일강의 물이지만 일단 당신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와 이상을 통해서 보면 그들의 참모습이 뱀이요, 육체요, 파라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그럴 때 당신은 도망 갈 것이고 두려워하며 떠나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의 참 모습을 알게 해주며, 가장 큰 죄가 바로 자아임을 알게 해주며, 또한 세상의 두려움을 알게 해준다.

 

세상에서 지팡이는 의지할 만한 것이며, 자아에서 나온 것이 좋은 것이고, 물은 마실만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상수형제(위트리스 리)과 함께 여러분에게 요청하건데,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계시를 구하여 반드시 세상과 자아와 환경의 모든 것의 참 모습을 보기 바란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4. 18:09

 

 

 

 

 

 

 

때는 거슬러 올라가서 38년 전 이야기입니다. 1980년 5월10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교회 집회소에서 나의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결혼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그날 서울 서초동 서울교회 집회소에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스런 형제 자매들과 함께 결혼집회를 마친 후, 그날 저녁 주님의 상 집회로 다시 모였습니다^^ 예정에 없던 형제자매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저희 부부는 형제자매들 앞에 나와서 기타를 치면서 평소 좋아하는 찬송을 한곡 불렀는데, 찬송을 마친 후 청중들의 반응은 가히 폭팔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랑스런 신부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고, 신랑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날 불렀던 찬송가 가사입니다.

 

"오 교회 내집 방랑 멈추는 집 형제들과 즐거운 집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된 집 할렐루야 이 집에 사네
교회는 내 집 우리 목마른 그치는 집
우린 온종일 높이 찬영하네 할렐루야 주와 교회를"

 

"주님의 보물 모두 가득한 집 주가 쉬고 즐기는 집
사탄은 결코 침범 못하는 집 주의 영광만 찬란한 집
교회는 내 집 주의 목마름 그치는 집
우린 온종일 높이 찬양하네 할렐루야 주와 교회를"

 

 

O, home in the church
Where we've ended our search
With the brothers rejoicing all day
Where Christ is our life,
And we're through with all strife,
Now we're home, hallelujah, to stay!

Home, home in the church
Yes, it's here that we've ended our search
And through all our days
We will shout to His praise,
"Hallelujah for Christ and the Church ! "

 

Here God is at rest
Of His treasures the best-
How His heart is rejoicing all day!
His home is our heart,
Here His glory He'll fully display.

God's home is the church
Yes, it's here that He ended His search
And through all our days
We'll shout to His praise,
"Hallelujah for Christ and the Church !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4. 08:20

 

인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인도할 자격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는 훈련을 하고 자기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는 사람에게 주님은 축복하신다.

사역하는 사람의 속에 있는 역량이 밖으로 나오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만일 억지로 과장 할 때는 흘러나오는 것이 적게되며 이러한 상태는 다 주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니다. 속이 풍성할 때는 억지로 하지않아도 무엇이든지 다 흘러나오게 된다. 오직 우리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어야 하며,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형제의 뜻을 듣고 그 안에 있는 성령의 음성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사역자들과 장로들은 형제 자매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들에게 말 할 기회를 주고 부드럽게 부서져서 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의 문제가 부서지지 않은 데 있다. 부서진다는 말은 들었지만 무엇이 부서지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부서지고 나면 어떤 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말씀에대해서도 함부로 단정짓지 않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가 잘 안다고 하지 않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잘 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게 된다. 함부로 권위를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지도 않게 된다. 또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모든 일에 신중하게 된다. 부서진 사람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더이상 자기를 분석하지 않는다.

집회에서나 교회생활 가운데서 너무 긴장하지 않기를 배우라. 교회의 일에서 "자기 혼자" 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일을 형제 자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결정하도록 하라. "자기 혼자" 한 일은 대부분 착오를 낳는다. 형제들에게 맡겨 주고 나눠 주는 것을 배우라.

하나님의 영은 교회 가운데서 억지로 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그는 기름부음의 공급을 해주시지 않으므로 성도들은 피로와 권태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영이 강할 때는 10분 내에 그것을 뚫고 청중을 제압할 수 있지만, 영이 약하면 "큰 소리"로 "위협하는 말"을 하고 "많은 시간" 전해도 그것으로 형제자매를 도울 수 없고 오히려 해를 입히게 된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말씀을 전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의 영이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 말씀의 내용은 평상시의 생각을 거절하고, 천한 말씨를 거절하고, 유치한 비유를 거절하며, 사람들의 유치함을 지나치게 들먹거리는 것을 버려야 한다.

사역하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배우는 것이 적고, 아는 것이 적고, 부서지는 것이 적으면 결정을 옳게 내릴 수 없고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너무 급하게 확신을 갖고 일하지 말고 두려우며 떨며 일을 해야 한다. 절대로 영적인 것을 쉽게 보지 말라. 마음 속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자기의 판단을 믿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이 다 옳은 것이 아니며, 자기가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 다 그른 것이 아니다. 겸손을 배우는 데는 적어도 몇 년이 걸린다.그러므로 지금은 그렇게 확신 있게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라.

자기의 판단이 정확한 데 이르기 전에 사람들에게 듣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주님이 우리의 몸에서 역사하여 생각이 처리되고, 자신이 부서질 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권위를 가질 수 있다. 권위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그 근거를 두는 것이므로, 주님의 뜻과 마음이 없을 때에는 권위도 없게 된다. 끝.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3. 22:36

고린도 후서 3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문자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영께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의문 문자는 기록된 구약이다. 그러나 구약은 비록 성경이지만 당신이 그것을 대할 때 영 안에 있지 않다면, 이 성경의 말씀은 의문 문자에 불과하다. 의문 문자의 의미는 전에 한번 성령이 역사한 적이 있는 것을 후에 다시 한번 사용하지만 성령은 만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문 문자이다.

어떠 사람은 일년 삼백육십 오 일 동안 로마서를 읽고서 객관적인 방면의 교리는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성령의 말씀하심과 감동이 하루도 없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로마서는 의문 문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 일찍 성경을 읽고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데 단지 관례대로 하는 것이라면 의문 안으로 떨어진 것이다. 비록 외적으로 영적인 껍질은 있지만 속의 영은 조금도 만지지 못하기 때문에 의문인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자신 안에서 먼저 영적인 느낌을 만져야 한다.

어떤 형제에게 말씀과 영이 있었다면 내가 그 형제의 말을 들을 때도 틀림없이 말씀과 영을 얻어야 한다. 오직 영적인 기관만이 영적인 것들을 실제화할 수 있다.그 형제가 읽은 객관적인 문자에다 영을 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주관적으로 나는 반드시 생각으로 그의 말을 깨달아야 할 뿐 아니라 영으로 이 형제가 말한 말씀 배후에 있는 영을 만져야 한다.

어떤 형제가 말씀을 전할 때, 나는 먼저 그의 성경 해석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 또 비유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주의하지 않고 다만 나의 영을 사용하여 그의 영을 만진다. 영이 흘러 나왔는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한편의 말씀이 사람을 공급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말하는 사람의 영이 흘러 나오는가의 여부에 있으며, 사람의 영을 만졌는가의 여부에 있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크고 조리가 있으며 생각이 좋다고 하더라도 영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문자에 불과할 뿐이다.

교회 중의 일은 반드시 영이 그 안에 있어야 하며, 단지 일만 잘하고 절차만 옳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홍콩교회가 대북의 봉사하는 방법을 전부 모방하여 그대로 한다 하더라도 영이 없으면 의문일 따름이다. 내가 교회 안에서 수년 간 염려한 것은 주로 죄의 문제가 아니라(물론 죄를 가벼이 보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의문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많은 영적인 일이 외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안으로는 영적인 실제가 결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테복음 7장에서 주님은 심판대 앞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주 열심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고 이적을 행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열심으로 일하고 심지어 권위를 사용하여 귀신을 쫓으며 이적을 행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아니라 바로 과연 그 일들이 육체에서 난 것인가 아니면 영에서 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오직 영적인 지각을 알고 만진 사람이 한 것만이 영에서 난 것이며 주님께 열납될 수 있다.

(Watchman Ne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0. 12:33

<미국에서 주님의 회복의 50년 역사>

1962년 미국에 주님의 회복시작. 주님의 일의 시작은 기도로부터 시작했다. 말씀사역 이전에 기도가 있었다. 이것이 역사이다.

62년5월 LA교회시작.
1962년 11월 학생들과 함께 기도함.
1962년 12월 3주간의 기도.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 특별집회 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2.1일부터 3주간 가능한 모든 교회가 참가하여 기도했다. 우리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하루에 1시간 모든 교회가 기도하길 권했다. 3주후 성도의 영이 높이 올라갔다.  그후, 매일기도했다, 가정열고 기도했다. 놀라운 간증이 있다. 기도항목에 따라 강하게 기도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그들은 찬송하며 길을 걸었고, 저녁에는 집에서 찬송이 울렸다. 우리에게 부흥을 주셨다. 어떤 곳은 인수가 500에서 700명으로 증가했다. 기도할 때 부흥이 있게 된다. 매일저녁 가정 집회를 가졌다. 기도의 영이 강한교회는 5시에 일어나 2시간을 기도했다. 오직 기도했을 때 성도의 영이 강화되었고, 교회를 강화시켰다. 장로의 기도가 강화될 때 신선해진다. 말씀 전함보다 기도하길 더 강조했다. 기도가 더 중요하다. 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가 있어야 한다. 인도하는 형제들은 자주모여서 더 기도함으로 성도들이 배우도록 해야 한다. 기도생활을 인도해야한다. 전투는 기도로 하는 것이다. 영적전쟁은 영에 의해 수행 되어야한다. 기도는 계속 되어야한다. 우리는 강화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한다. 부흥은 곧 기도이다.

첫째, 기도에 힘써야 한다. 꾸준히 계속하는 것만이 효과적이다. 깨어서 기도로 지켜야 한다 멈추지 말아야한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기도를 배워야한다. 기도는 배워야하는 기술이다. 부담을 붙잡아 우수하게, 효과가 있도록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기도할지를 배워야 한다.

셌째, 분명한 항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분명한 요점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기도할지를 알아야 한다. 수많은 기도가 같을 때 몸의 느낌이 있다.

넷째, 기도의 생활로 기도의 사역이 되도록 전진해야 한다.

다섯째, 인도자가 본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두세 명의 기도를 강화시켜야 한다. 전화, 장소, 시간의 제한 없이 쉽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활력그룹을 강화시킨다.

일곱째, 교회의 기도집회가 높이 올려 져야한다. 주님의 상 집회 다음으로 제일 중요한 기도 집회이다. 다음 10년을 위해 다니엘들이 되어 기도하자.

기도는 곧 부흥이다. 2018년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2012.장로모임 중에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0. 12:01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뀌어진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바뀌어진 생명에 대한 관념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것은 바꿔어진 것이 아니라 추가된 것이다. 바뀌어진 생명의 관념에 따르면 우리의 생명은 형편없고 그리스도의 생명은 훨씬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념은 그릇된 것이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가 멸절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안에 하나님이 없던 우리가 거듭남 안에서 이제 그를 우리 안에 더하여 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