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희년의 장으로 잘 알려진 레위기 25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장은 희년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년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안식일은 잘 알고 있으나, 안식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Ⅰ. 안식년
레위기 25장 2절부터 7절까지와 18절부터 22절까지는 안식년에 대해 말한다. 이 안식은 하루만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일 년 동안 안식하는 것이었다. 안식년은 사람을 위한 안식이었을 뿐 아니라 땅을 위한 안식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안식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일하셨으나, 일하신 후에는 안식하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혼자 안식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안식하셨다. 일하신 후,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을 누리셨다. 그러므로 제 칠일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안식하였다. 희년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년을 준수하는 실행을 해야만 했다. 매 칠년은 안식년이어야 했으며 그 해는 사람도 땅도 안식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땅을 위한 안식의 해였다.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뜻하며, 안식년 또한 그리스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안식년은 완전한 우리의 안식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안식일로서뿐 아니라 우리 안식년으로, 즉 부분적인 우리의 안식으로서뿐 아니라 완전한 우리의 안식으로 누릴 필요가 있다. 안식년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한 우리의 안식이신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하는 법과 세 배의 소출을 누림
레위기 25장 2절-4절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매주의 하루인 사람을 위한 안식일과 매 칠년마다 있는 땅을 위한 안식년은 우리의 안식이신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4절과 5절은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라고 했다. 이것은 안식이 단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것이므로 사람의 모든 노력은 절대적으로 멈추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땅이 쉴 때, 일하는 이들, 땅을 경작하는 농부들 또한 안식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과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6절-7절은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고 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뜻한다.
제 칠 년의 땅의 소출은 공동의 소유가 되었다. 비록 그 땅이 여전히 소유주에게 속해 있다 할지라도, 땅에서 산출된 것은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속했으며, 심지어 육축들과 짐승들에게 속했다. 이것은 땅의 소출이 공동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공산주의, 즉 사람들에게서 강요하여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람의 공산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유하게 하는 공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땅의 소출에 대한 이러한 공동 누림에는 참된 자유가 있다.
20절-22절은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 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 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 년 쓰기에 족하게 할지라 너희가 제 팔 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 년 즉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충족한 은혜가 우리의 필요를 세 배나 능가함을 의미한다.
강요된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누리는 합당한 누림을 가져야 한다. 땅은 여전히 각 소유주에게 속하므로 땅의 소유는 공동이 아니다. 공동 소유는 제 칠년의 땅의 소출이다. 이 해에 땅에서 산출된 모든 것은 누림을 위한 공동 소유가 된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세 배의 음식을 산출하도록 땅을 축복하신다. 이러한 안식년을 지키는 실행은 우리를 희년으로 인도한다.
Ⅱ. 희년-오십 번째의 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 안으로 들어간 후, 그 땅은 그들 가운데 인수에 따라서 나누어졌다. 이 토지는 어느 것도 영원히 팔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희년에는, 팔렸던 모든 토지들이 원래의 소유주들에게로 되돌아왔다.
희년이 되기 전의 여러 해 동안에, 어떤 백성들은 그들의 토지를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이나 혹은 질병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토지를 전부 혹은 일부를 팔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희년의 때에 그 땅은 소유주에게로 되돌려졌다. 땅이 되돌려지는 이것은 백성들 간에 땅의 소유권을 균형잡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땅 주인도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로 신성한 규정, 신성한 규례가 자연 자원을 균형잡았기 때문이다. 이 규례는 오십 년마다 효능이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삼십 오 세기 전, 막스(Marx)가 공산주의를 창안하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말씀 안에서 땅을 균형잡기 위한 준비를 하셨음을 본다. 매번의 오십 번째 해에는 원래의 소유주들이 그 땅을 되돌려받기 위해 어떤 것을 하거나 어떤 기도를 하지 않아도 땅은 그들에게로 되돌아와서 다시 그들의 소유가 되었다.
예표에서, 희년은 가련한 죄인들인 우리의 상황을 묘사한다. 우리의 상황은, 우리가 살아나갈수록 우리에게 배당된 신성한 분깃을 점점 잃어가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잃어버렸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우리는 이 권리를 점점 더 잃어버린다. 결국 우리는 출생으로 받았던 모든 것을 팔아버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잃어버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합당한 구매자에게 판 것이 아니라 사탄과 죄에게 팔았다. 바울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下)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처럼 우리도 죄에게 팔린 노예들이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사탄에게 팔았었다. 우리는 사탄과 죄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죄에게 팔았을 때 우리는 사탄에게 우리 자신을 판 것이 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죄 아래 있는 사탄의 손에 빠졌다. 아담의 자손들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리를 팔았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을 죄와 사탄에게 팔았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찾아(구속할) 올 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소망이 없었다. 그런 어느날 희년이 왔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주 예수님은 은혜의 말씀들로 희년을 선포하셨다. 그분이 오셨을 때, 그분과 함께 희년이 왔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다.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신약의 희년을 선포한다.
희년은 오십 번째의 날이 아니라 오십 번째의 해이다. 여기서의 원칙은 안식년과 마찬가지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안식일을 갖지만, 레위기 25장에서는 안식년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오순절은 하루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의 해를 갖는다.
여덟 번의 안식년으로 이루어지고, 여덟 배의 안식이 되는 안식 위에 안식을 더한 희년을 완성하는 오십 년(8절 참조)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나님의 안식의 충만함이 지극히 풍성함을 의미한다.
이 오십 년 기간의 첫 번째 해와 마지막 해는 여덟 번째 해이며, 숫자 8은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것은 희년이 전적으로 부활에서 온 것이며, 부활로 온 것이며, 부활 안에서 온 것이며, 부활과 함께 온 것임을 가리킨다.
희년은 안식에 안식을 더한 문제, 즉 부활 위에 부활을 더한 것을 의미하는 여덟 배의 안식이다. 이 여덟 배의 안식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나님의 안식의 충만함이 지극히 풍성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한 안식이 아니라 만족을 주는 안식이다.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0번,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번제물로 소유하기 위해 그분의 체험 안에서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며 그분을 따르고 배우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릇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외적인 본과 모양으로 취하는 것은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완전히 외적으로 그분을 모방할 것을 가르친다. 15세기 토마스 아 캠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외적인 삶을 모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개신교의 신학도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모방하고, 그분께 배우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약의 어떤 구절들은 이것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서들 안에서 주 예수님은 종종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바울은 믿는 이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고했다(고전 11:1). 그러한 구절들은 외견상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소수의 성경 교사들이 믿고 있는 사상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이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그분을 외적인 본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갈 2:20).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따른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산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지 그리스도를 그의 본으로 취하여 그분을 외적으로 모방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살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가르침 받았다. 이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결심했어도, 그들은 결국 성질을 내고야 만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실패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실패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강한 의지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강한 의지로 성공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가르침의 실행일 뿐이다.
그런데 사복음서에서 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신서들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권하는 대신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한다. 위에 언급한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고백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도 그는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라고 간증했다.
우리가 결혼 생활에서 주의할 것은 다투려는 유혹이 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고 있을 때는 부부싸움을 하려는 유혹이 온다 해도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다투지 않을 것이다. 배우자와 다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대신, 우리는 신성한 생명을 살아야 한다.
새 신자들이 외적인 방식으로만 그리스도를 모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원숭이가 사람흉내를 내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의 생명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단지 그리스도를 사는 것만을 알 뿐이라고 간증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는 「오 주 예수님!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과 대화하기 시작하며, 그분과 교통하기 시작하며 그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분을 먹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살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격으로 취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다면, 마귀의 어떠한 유혹을 받는다 할지라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마귀와 모든 귀신들을 패배시킬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으로 사는 생활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는 생활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종교와 다르며 공자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것과도 다르다.
내가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학교에 다니는 나의 누님은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어느 날 누님은 나에게 어떤 성경 교사에 대해 알려 주었는데 그는 매우 인내가 있었고, 항상 손에 성경을 가지고 천천히 걸으며, 종종 멈추어 하늘을 보거나 성경을 보곤 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에 대해 들었을 때 그렇게 해 보려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흉내를 내는 「원숭이」와 같았다. 나는 빠른 사람으로서 느리고 인내하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결국에 나는 포기했다. 그러다가 나는 속 생명 무리들과 접촉했고, 그들의 어떤 가르침을 통하여 빛 비춤을 받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밖으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대신 우리는 그분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살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이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누릴 필요가 있다. 이것이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또 한 번 승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아멘
한 해의 시작에 있는 유월절과 한 해의 끝에 있는 장막절에서 우리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본다. 인생의 시작에서 우리는 기대로 가득하지만 또한 배고프기도 하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배부르지만 목마르게 된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일곱 중 절기 중 처음 절기이며 장막절은 마지막 절기이다(레 23:5, 34). 일 년의 처음 절기인 유월절은 사람의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며(출 12:2-3, 6) 사람의 생명은 그의 만족을 추구함과 그의 배고픔으로 끝남을 포함한다.
일 년의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은 어떤 노동이나 일이 다 끝나고, 안식과 누림의 명절이요 사람의 생명의 완성과 성공을 의미한다(출 23:16 참조).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그의 목마름으로 끝나고 결론지어질 것이다. 유월절의 광경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배고픔을 만족시키는 생명의 떡으로 제시하셨다. 장막절의 광경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다(요7:37). 그러면서 나를 믿는 사람은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을 약속하셨다(뇨7:38).
유월절은 일 년 중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는 연초에 행해졌다. 그들은 그들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일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만족하기 위해 뭔가를 수고하고 추구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반대로 장막절은 추수가 끝났을 때에 있다. 사람들은 곡물과 포도를 수확했다(신 16:13-14). 추수의 모든 것이 수확됐으며 사람들은 장막절에 함께 와서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심지어 그들의 종들과 함께 모든 것을 누렸다. 일은 끝났고 곡식은 거두어 졌으며 곡물과 포도주는 수확되었기 때문에 장막절 동안에는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안식하고 누렸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누림 안에서 기뻐할 시간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목말랐다! 이것은 그들이 성공을 해도 그들의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계시한다.
요한복음 6장에는 배고픔으로 끝나는 인생의 시작이 있으며, 요한복음 7장에는 목마름으로 끝나는 인생의 성공과 완성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는 사람들이 그들의 배고픔을 만족시키기 위한 어떤 것을 찾기 위해 수고하고 일하고 일생동안 분투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함을 설명한다. 후자의 경우에서 사람들은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지만 그것이 그들의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함을 설명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얻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두 경우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쉬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하고 있든 쉬고 있든 우리의 배고픔이나 목마름은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식이시며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수를 주실 것이다. 사실상 사람은 오직 둘 중 하나 안에서 존재한다. 한 부류는 그들이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구하고 일하고 분투하고 수고해야 한다. 다른 부류는 그들이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부유함을 기뻐하고 누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수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대학교 1학년이라면 우리는 공부에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이것은 유월절과 같다. 졸업한 후 학위를 받고 좋은 직업을 갖고 부자가 될 때, 일과 수고가 끝났기 때문에 이것은 장막절과 같다. 이제 우리는 쉬며 우리의 수고의 대가를 기뻐하고 누리는 위치에 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자이든, 빈곤하든 풍족하든 우리는 배고프거나 목마름을 깨달을 것이다. 청년으로서 우리는 아마 결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아내와 돕는 배필과 가족과 아이들에 대한 배고픔을 나타낸다. 우리가 가장 좋은 아내와 결혼하고 가장 좋은 아이들을 갖고 가장 좋은 것을 소유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70세나 80세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처음 결혼했을 때 우리는 배고프지만 결혼한 후인 지금 여전히 우리는 목마름을 느낀다.
그리스도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실 뿐 아니라 목마른 사람들에게 생수가 되신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졌을 때에도 속의 목마름이 여전히 지속됨을 깨닫는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생수를 갖고 계신다. 아무 것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먹이시는 생명의 떡이 필요하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생수의 샘이신 주 예수님이 필요하다. 아멘
오늘은 안식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레위기 23장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레23:3 “그러나 일곱째 날은 완전히 안식하는 안식일이며 거룩한 모임을 소집하는 날이다.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이날은 너희가 거주하는 모든 곳에서 여호와에게 안식일이다.”
레위기 23장은 명절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명절을 얘기하면서 먼저 안식일을 언급하는 것은 왜인가? 이것은 안식일이 명절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명절은 믿는 이들이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믿는 이들 서로 간에 단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명절인 안식일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백성 서로 간에 누리는 안식을 상징한다. 매 칠일마다 안식과 누림을 위한 하루가 있었다. 그날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안식일에 함께 모여야 했음을 가리킨다.
만일 모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려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 간에 단체적으로 안식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안식일의 원칙은 어떤 날을 안식일로 지키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안식일의 원칙은 주님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인식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의 의미가 단순히 일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세기 2장 2절은 “하나님이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완성하시고, 일곱째 날에는 그분께서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라고 말한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께는 안식일이 일곱째 날이지만 사람에게는 안식일이 첫째 날이다. 6일동안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이 생존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후인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에서부터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하나님께는 일곱째 날이었지만, 사람에게는 첫째 날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먼저 육일 동안 일하셨고, 그런 다음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그의 첫째 날에 안식했고, 그런 다음 일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을 보셨을 때 안식하고 신선하게 되실 수 있었다. 사람은 시원한 음료처럼 하나님의 갈증을 풀어 드리고 그분을 만족하시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끝내시고 인식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에게는 동반자인 사람이 있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 안식과 신선함을 주는 날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동반자인 사람에게는 바로 첫째 날이 안식과 신선함을 주는 날이었다. 사람의 첫째 날은 누림의 날이었다. 신성한 원칙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누림을 갖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일할 것을 요구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누림을 주신다. 하나님과 함께 그분 자신을 충만이 누린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누림을 갖고 하나님을 누리는 법을 모른다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모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바에 따르면 단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될 필요가 있다. 그럴러면 우리는 그분을 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법을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고 그분의 일 안에서 어떻게 그분과 하나가 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일에 대한 의무는 이미 하나님께서 감당하셨다. 하나님의 몫은 일하고 누리는 것이지만, 사람의 몫은 단순히 누리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후 그의 첫째 날인 안식일 안으로 들어가 안식하고 누렸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는 일하기 시작했고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는 일이 첫째이고 누림은 둘째이지만 사람에게는 누님이 첫째이고 일은 둘째이다. 이것은 은혜 원칙에 관한 이상이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나서 누리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누리고 나서 일한다. 이 원칙은 창조에서뿐 아니라 구속에서도 동일하다. 주님은 구석을 위해 모든 것을 성취하셨다. 구속을 성취하신 후 주님은 그 결과를 누리셨다. 주님은 먼저 일하시고 나중에 누리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누리고 나중에 일한다. 구속과 은혜에 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모든 것이 끝마쳐졌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께서 성취하신 것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얻는다.
매주 있는 안식일은 완전하고 엄숙한 안식이었다. 그것은 가볍거나 평범한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누림을 위한 거룩하고 신성하며 중요한 안식이었다. 이 완전한 안식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도 철저한 안식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구속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백성 서로 간에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는 것임을 의미한다. 안식일는 여호와에게 안식일이었다.(레23:3) 이 안식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한 안식이라는 것과 그분께 구속받은 백성도 안식에 참여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거룩한 모임, 곧 모든 명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서로와 함께 인식하고 있다.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엄격한가를 보자.
출애굽기 31장 13절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반드시 너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것을 알게 하려고 나와 너희 사이에 대대로 세운 표시이기 때문이다,” 14절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다. 누구든지 이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여햐 한다. 누구든지 이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자기 백성 가운데에서 끊어지게 된다.”
15절 “육일 동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완전히 안식하는 안식일이며, 여호와에게 거룩한 날이니,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햐 한다.
1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고,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절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우는 영원한 표지이다. 이는 여호와가 육일 동안 하늘들과 땅을 맏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해졌기 때문이다.”
민수기 15장 32절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있을 때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나무하는 사람을 본 사람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에게 데리고 왔다. 그들은 그를 가두어 두었다. 왜냐하면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36절 “그래서 온 회중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서 죽였다.”
이상을 볼 때 구약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엄격한 날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어기는 것이다. 십계명에서도 제 4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면 그렇게 엄격하게 다루셨던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 즉 안식 후 첫날에 모였다. 이것은 주일날이 신약에서 안식일이 된 것을 의미한다. 안식교를 비롯하여 지금도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고 있는 단체들이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 안식일을 지키고 있지 않지만, 그 원칙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한 날로 고정시키고, 마치 유대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안식일을 범한다 해도 죽이지는 않겠지만, 영적으로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멘
중국에서 유입된 사교(邪敎) 집단인 전능신교의 실체 해부 및 대응 전략을 위해 종교문제대책전략연구소(소장 심우영 목사)가 9월 11일 오후 2시 서울 롯데시티호텔 구로점에서 ‘동방번개(전능신교) 정체와 대응 전략 세미나’를 개최했다. 3부로 나눠 진행된 이번 세미나에선 심우영 소장의 인사말과 더불어 한국교회 주요 사이비 이단 집단과 동방번개의 유사성을 발표했다. 이어서 하지진 원장은 동방번개의 정체와 특징에 대해서 PPT를 사용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전능신교의 배경, 전능신교의 교리와 위해성과 대처법을 발표했다. 제 3부에서는 중국 가정교회 목사인 유서해 목사가 피해사례를 발표했다. 유목사는 직접 오지 않고 인편으로 동영상을 찍은 USB를 보내왔다.
전능신교는 지방교회와 연관성이 없다
15년간 전능신교를 연구해온 美 아시아 리서치 연구 센터 하지진 원장은 “전능신교의 전체 교세는 파악되지 않고 있지만, 하남성 이단대책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하남성에만 전능신교 신도 수가 80만명에 달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가정교회를 주로 공략했던 이들은 해외로 확산되어 한국과 동남아 쪽, 그리고 미국에도 파고들고 있는 실정”이라며 전능신교의 배경과 교리의 위해성, 대처법 등을 강론했다.
특히 하 원장은 그간 한국교회에서 발간된 전능신교 자료의 오류를 언급하며 “한국교회에서 발간한 자료들 중 전능신교의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이란 책자를 무작위로 인용해 일부 인물과 교회가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발표했지만 사실은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인용된 관계자들과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단적인 예로 하 원장은 중국책 ‘Understanding False Religion’ 55-56쪽을 인용한 ‘위트니스 리는 1978년 중국에 돌아와서 호함(呼喊)파를 세웠다’는 부분에 대해 “조사 결과 ‘Understanding False Religion’ 55-56쪽엔 이런 글이 없는데다 위트니스 리는 1949년 이후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밝혔다.
더불어 ‘조유산(전능신교 교주)은 지방 교회의 일원으로 위트니스 리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해 “전능신교의 가르침과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완전히 반대된다. 또 지방교회들(위트니스 리)은 적극적으로 전능신교를 반대하며, 조유산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2017년 9월 중국 반이단 협회 홈페이지에서는 위트니스 리(이상수)의 이름을 호함파 명단에서 삭제했고, 현재 호함파의 교주 명단은 비어 있다. 이 점에 있어 하 원장은 “중국 정부가 문화혁명 때 삼자교회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호함파라고 누명을 씌우고 우두머리가 위트니스 리라고 했다”며 “이러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선 장기간을 두고 정확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했었다.”고 말했다.
전능신교의 가르침과 실행, 사회에 주는 피해
1999년 10월 ‘파룬궁 사건’에 대응하여 중국 정부는 최초로 ‘이단 종교’에 대한 정의를 제정했다. 그리고 2017년 2월 1일에는 ‘사이비 종교, 조직’을 명확하게 규정했다.
“종교나 기공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혹은 다른 명의로 세워진 교주를 신격화하고, 미신과 사이비를 날조, 전파하는 등의 수단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혼란하게 하고 속이도록 핵심 구성원을 충돌질하여 발전함으로 구성원을 통제하고 사회를 위협하는 불법조직이다.”라고 했다.
위 내용과 함께 하 원장은 전능신교와 창시자 조유산(본명 조곤:赵坤)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전능신교’는 기독교를 도용하지만 성경을 멸시하며 성경 대신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이라는 책을 대체해 사용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전능신교’는 교주를 신격화 하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종말론을 이용해 공포심을 조성, 미신을 전파해 신도들을 속인다. 또 위협과 공포, 저주의 방식으로 추종자를 통제해 조직과 교주를 보호하고, 포교에 실패할 경우 가족관계를 단절할 것을 선포한다.
‘전능신교’의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하 원장에 따르면 현재 이들은 많은 돈을 들여 영상과 드라마를 제작해 포교 중이다. 유심 카드 하나가 중국 돈으로 30위안이며, 그 안에 각종 자료가 포함돼 있다.
하 원장은 “전능신교는 가족 구성원과 친구들을 대상으로 개인적이고 비밀하게 한 가정 한 가정에게 전파하고 있다”며 “전능신교를 거절하면 폭력을 사용해 구타하거나 납치하고, 저주를 퍼부어 위협한다. 또 여자 회원을 이용해 남자들을 덧에 빠뜨리는 사례도 많다. 일단 전능신교에 가입하면 보증서를 쓰게 해서 공포심을 조장하고, 떠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자녀를 버리고 격리시켜 가정을 파괴하고 헌금을 강요해 돈세탁을 해서 해외로 보낸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피해로 중국 내에는 피해자 대책 모임이 있고, 공안에는 피해자 신고처가 따로 있을 정도다. 여러 피해 중 가족 해체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2013년 3월 8일 대만기독교회들은 ‘전능신교’와 관련해 연합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이 조직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분별하여 잘못된 시스템에 빠지지 않고, 전능신교가 가져다주는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끝으로 하 원장은 “전능신교를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잘 아는 것”이라며 2002년 쫑푸 사람들 34명을 납치해 계획적으로 세뇌시키려 했지만 2명을 제외하고 영향 받지 않았던 사건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제 3부에서는 중국의 가정교회 유서해 목사의 영상자료를 보여주었다. 유목사는 전능신교에 대한 14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으로 만들었다.
2. 그리스도가 두 번 육신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3. 여그리스도가 재림했다고 가르쳤다.
4. 천국을 부인하고 영생을 부인했다.
5. 이미 왕국시대(국도시대)가 도래했다.
6. 여그리스도가 이미 와서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
7. 전능신교 안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많으면 이익도 크고 공도 크다.
8. 성경의 본뜻을 왜곡하고 성경 단편을 인용해 성경을 반대했다.
9. 주님 보혈의 영구적 효능과 성령을 부정했다.
10. 욕정주의로 일관하며 많은 죄를 범하는데도 성결하다고 했다.
11. 기성교회를 분열시키고 교란시키고 있다.
12. 육체적 정욕으로 사람을 조직 안으로 유혹하고 거절하면 협박했다.
13. 중국 전통문화를 이용해 대중을 끌여들여 전능신교를 믿게 한다.
14. 어린 자를 때려 상처를 내고 불구가 되게 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유서해 목사는 전능신교 회원들로부터 자신이 폭행당한 사실을 폭로했다. 상처를 보여 주면서 영상을 통해서 증언했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어려움을 당할까봐 영상자료만 보냈던 것 같다.
한편 심우영 소장은 ‘한국교회 주요 이단 사이비 집단과 동방번개의 유사성“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사교(邪敎)단체와 ‘동반번개 전능신교’의 유사성에 대해 발표했다.
심 소장은 먼저 한국 교회 안에 이단에 대한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 혹은 그 단체가 왜 이단이냐는 물으면 애매모호한 답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그만큼 이단 연구가 주먹구구식이란 것이다. 나와 다르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고, 교단 간의 다툼을 벌이는 등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며 “결국 성경적, 교리적, 현상적으로 어떠한가를 정확히 검토하고 조사하고 연구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이비와 이단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의했다. “종교학적으로 교주, 교리, 조직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갖추지 않아도 사이비”라면서 한국교회 주요 이단들의 교주, 조직 및 교세, 연혁과 변천을 살폈다. “동방번개 전능신교는 이단이라기보다 전형적인 사교(邪敎)집단으로 거기에다 폭력성이 더해졌고, 반사회적이고 패륜적인 악”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매주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접촉하는 실행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의 친척, 친구들, 이웃들, 동료들, 급우들 등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매주 두세 명의 개인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우고 시간표를 짤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접촉할 때 주님으로부터 합당한 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문 두드리기를 하는 것이 시간 낭비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수고해야 할 사람들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소비하는 시간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 혼자서 출발해야 하고, 그 다음에 우리와 함께 수고할 동반자를 얻어야 한다. 반 년 뒤에는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수고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산출할 수 있다. 반드시 우리가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매주 우리는 두세 시간을 들여서 개인들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사업처럼 수행해야 한다.(장로 직분과 하나님의 정하신 길 188-196쪽)
우리들의 가정에서 교회가 건축되면 그 가정들을 통해 복음을 확산할 수 있음
가정들을 잘 세우는 교회들은 대복음 집회를 가질 필요가 없다. 복음이 자연스럽게 확산될 것이다. 가정은 사람의 마음, 사람의 혼, 사람의 영까지도 관통하며 깊이 파고 들어간다. 대복음 집회의 주된 강조점은 심는데 있지 않고 거두는데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를 가정들 안에 건축하는 것이고, 그런 가정들을 통해 복음을 확산하는 것이다. (사역지, 3권 5호, 영문판 9쪽)
가정집회(家庭集會)의 여섯 가지 위임(委任)
새 신자가 매주 가정 집회에 올 수 있다면 매우 좋은 것이다.
첫째로, 가정 집회를 통하여 새 사람들에게 기초를 놓으라.
둘째로, 가정 집회에서는 오랫동안 집회 생활하지 않는 자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셋째로, 가정 집회가 튼튼해야 복음이 전파된다. 캠퍼스 사역도, 어린이 사역도 가정에서 해야 한다. 한 국가가 튼튼하기 위해서는 가정들이 튼튼해야 한다. 교회가 튼튼하기 위해서는 가정 집회가 건축되어야 한다.
넷째로, 가정 집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유지하고 지켜야 한다.
다섯째로, 가정 집회에서 그 풍성을 강화시켜야 한다.
여섯째로, 가정 집회가 풍성할 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올라가기 쉽지 않은 크고 높은 산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표-그리스도를 표현함-에 도달할 것이다. (가정 집회에 관하여, 22-24쪽)
가정집회(家庭集會)는 교회건축(敎會建築)의 시금석(試金石)이 됨
우리는 교회의 건축이 가정 집회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면 누가 가정 집회를 건축하는가? 동역자들과 장로들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다. 가정 집회는 교회 건축의 시금석(품질이나 진품을 판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교회는 이 기초 위에 건축된다.
가정 집회에서 다섯 가지 중요한 일
첫 번째 일은 오랫동안 집회에 나오지 않았던 이들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주소록에 의거하여 오랫동안 집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회복시켜야 한다.
두 번째 일은 모든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나이가 많든 적든 집을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2주마다 한 번씩은 가정을 열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는 격주로 가정에서 복음 집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가정 집회에서 사람들을 교육시켜 빛 비춰 주고, 복음 자료들을 제공해 줌으로 가정을 열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는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람들을 유지하는 책임은 장로들이나 동역자들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있지 않다. 사람들을 유지하는 책임은 가정에서 모이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있다.
네 번째 일은 가정 집회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풍성한 집회를 가지려면, 풍성한 말씀과 간증이 있어야 한다.
다섯번째 일은 가정집회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 위에서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살아있는 몸을 얻기 원하신다. (가정 집회에 관하여, 76-77쪽)
이집 저집에서 모이는 가정집회가 교회의 기초이다. 대집회는 일종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것과 강다. 사실상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가정집회이다. 큰 집회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만일 가정집회가 없다면 교회의 번식과 돌봄은 없을 것이다. 가정집회는 교회 번식의 생명선이다. 사도행전 2장은 성전에서 모이는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스케이트장에서 나가 이집 저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일단 어떤 사람이 가정집회에 들어가면 그는 보호되었다. 오늘날 웅장한 건물은 세상의 허영과 육체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집회장소의 기능은 교육과 섞임과 훈련이다. 대집회는 사람들을 경직되게 하고 수동적이 되게 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특별한 집회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초기 교회 사도들도 이런 습관 때문에 건물을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건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주후 70년에 통곡의 벽만 남겨놓고 다 무너졌다.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건물을 짓기 위해서 헌금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가기 위해서 가정집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새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생아임을 앎
우리는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다룸같이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유치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다룬다.
우리가 대학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대학 졸업생들이라는 것을 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로 생각해야 된다.
새로운 사람이 "성경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린 아기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하고, 태도나 어조도 합당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많은 질문을 할 때 이러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들은 매우 관심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16-217쪽)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새 신자들을 양육함
우리는 어린 아기를 돌보고 있다는 것과 아기를 위한 음식으로 갓난아이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을 먹일 때 너무 많이 먹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너무 많이 먹이면 그들은 소화불량에 걸려 입맛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향기가 좋은 것이나 달콤한 것으로 먹여야 한다. 주 음식의 맛이 달콤하다면 그들은 잘 먹을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가이다.
새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최선의 길은 찬송이다.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찬송하기를 좋아한다. 찬송하는 것은 정말 달콤하다.
우리는 짧고 간단하며 부르기 쉬운 찬송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는 찬송을 부르면 귀 기울여 듣고 나서 그것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세 번째 우리가 그 찬송을 부르면 그들이 함께 부를 것이다.
우리가 갓난아기를 도우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항상 기쁘게 해야 하고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 그 후에야 그들은 우리가 주는 것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47-248쪽)
새 신자와 '놀기'를 배움
아기를 양육하는 어머니는 어린 아이들을 먹일 뿐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으로 소중히 품는다. 그들과 노는 것이 그들을 소중히 품는 것이다. 아기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기쁨을 느끼고 나면 어머니는 그들을 먹인다. 우리는 반드시 새 신자들과 함께 '어떻게 노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과 함께 놀면서 우리의 손은 그들을 먹인다. 새 신자가 크리스마스라는 질문을 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크리스마스 주제에 점유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크리스마스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님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가져야 합니다. "라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크리스마스에 관한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라는 실제로 돌이키게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교통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어서 기뻐할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 신자들에게 자양분인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57-258 쪽)
가정 집회에 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을 만지고,
열게 하고, 소생시켜야 한다
새로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의 영을 만져야 한다. 우리는 생명 공과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어떤 중점이나 구절이 새로운 사람의 영을 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영이 만져진바 되면 우리는 좀 더 전진된 빛 비춤이나 계시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속에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영 안에 사시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영이 이제 한 영이 되기 위하여 연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 신자가 생각 안에서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영을 만지도록 이끌려 질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접촉한 체험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가 설명해준 후에 그는 즉시 이해할 것이다. 가정 집회에 갈 때에, 체험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을 만져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열려지게 하고 그들의 영을 소생시켜야 한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예비, 60-61쪽)
몸이 피곤한데 잠에 들지 못해 괴로운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이 적지 않다. 불면증은 구체적으로 ▲잠들기가 어렵거나 ▲중간에 잠이 깨거나 ▲새벽에 일찍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낮 동안 극심한 피곤함을 호소하는 등 수면 부족으로 인한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불면증 환자 수가 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40만3417명이었던 국내 불면증 환자 수는 2016년 54만1958명으로 4년 새 34.3% 늘었다. 건강보험 적용인구 대비 ‘불면증’ 진료인원수를 분석한 ‘인구 10만 명 당 진료인원수’를 살펴보면 100명 중 1명꼴인 1068명이 불면증을 앓고 있다(2016년).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정석 교수는 "불면증은 젊은 사람보다는 노인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최근 우리나라에서 인구의 고령화로 노인인구가 급증하게 되면서 불면증 진료 인원도 증가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멜라토닌 부족, 스트레스 등이 원인
나이 들수록 잠이 안 오는 이유는 수면유도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가 줄기 때문이다. 멜라토닌은 잠자기 2시간 전쯤부터 분비량이 늘기 시작해 자정을 지나 새벽에 이를 때까지 고농도를 유지하다 해가 뜨면 급격히 분비량이 줄어든다. 그런데 멜라토닌을 분비하는 뇌의 송과체가 나이가 들어 퇴화해 나이 들수록 잠에 들기 어려워진다. 51~65세의 멜라토닌 최고 분비량은 20~35세의 절반에 불과하고, 65세 이상은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 밖의 불면증 원인은 수면 일정이나 수면 환경의 변화, 급성 스트레스 등이다. 이 외에도 여러 내과적 문제나 정신과적 질환으로 인해 불면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햇볕 쐬며 걷고, 커피·술 주의해야
불면증 치료에는 수면제나 안정제가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내성과 금단증상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되도록 단기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불면증의 특성에 따라 항우울제 등의 다른 약물이 보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약물치료 외에도 수면위생을 철저히 지키고 탈조건화 치료를 받아 잠자리에 들어가기만 하면 긴장하게 되는 현상을 없애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불면증을 예방하려면 낮에 많이 움직여서 교감신경을 활성화시키는 게 좋다. 그래야 밤에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돼 푹 잘 수 있다. 특히 햇볕을 쬐며 야외활동을 하는 게 효과적이다. 햇볕을 쬐면 잘 때 멜라토닌이 잘 분비돼 숙면을 돕는다. 햇볕을 죄는 것은 '행복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량도 늘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잠자려고 누워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말고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것도 좋다. 커피, 술과 같이 수면을 방해할 수 있는 음식물을 피한다.(국민건강 보험공단제공)
<서울의대 정도언교수> (조선일보)
잠과 꿈은 왜 필요한가?
인생의 25%~30%는 잠이다. 80세까지 산다면 20~25년을 잠자리에서 보낸다.
그 세월만큼 인생을 허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피곤하고 지쳐버린 육체와 영혼에 새 기운, 새 희망을 불어넣는 게 잠이다.
천근만근의 무게로 심신을 짓눌렀던 어제도 잠을 자고 나면 과거가 되고, 또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1950년대 미국의 한 대학원생이 잠을 자는 어린아이의 눈이
어느 순간 마치 무엇을 보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했으며, 이것이 꿈과 관계되는 수면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렘(REM-Rapid Eye Movement)수면이라 명명했다.
안구가 급속하게 움직인다는 뜻이다. 또 다른 대학원생은 잠이 마치 건축 구조물과 같이
단계와 구조가 있는 복합적이고 질서 있는 현상임을 발견하고, 잠을 깊이에 따라 1~4단계로 구분했다. 일반적으로 잠이 부족하면 피로, 집중력 저하, 짜증, 환각,
망상, 공격성 증가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또 수면 중엔 성장호르몬이 집중적으로 분비되므로, 어린이가 잠을 적게 자면 키가 덜 자란다. 잠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은 정보처리와 갈등해소 기능이다. 이것을 담당하는 게 꿈이다. 사람의 꿈은 과거의 기억을 정리, 분류, 삭제, 저장하는 일을 담당한다. 쓰레기와 같은 과거의 기록을 모두 안고 살아간다면 인생이 얼마나 고달파질까. 꿈을 통해 사람의 뇌는 필요하고 유용한 기억을 저장하고, 쓰레기 기억을 삭제하게 된다. 따라서 공부를 잘하려면 잠도 충분히 자야 한다. 졸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밤늦게까지 공부해 봤자 입력된 정보가 저장될 시간이 부족해져 학습능률이 올라가지 않는다. 꿈을 많이 꾸면 "잠을 설쳤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심지어 악몽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몇 시간 정도 잠을 자야 할까. 어떤 사람은 4시간만 자면 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7~8시간은 자야 된다고 한다. 모두 정답이 아니다. 적정 수면 시간은 체질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성격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은 수면시간이 짧고,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잠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람의 노력으로 줄일 수 있는 수면시간은 최대 30분 정도며, 그 이상 억지로 줄이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수험생이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폴레옹이 토막 잠을 여러 번 나누어서 잔 것으로 유명한데, 잠은 한번에 이어 자야 1~4단계와 렘수면이 적절히 조화되어 피로회복, 신진대사, 성장, 기억력 저장 등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신체질환 때문에 생긴 불면증이 아니라면 불면증 환자는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퇴직자에게 불면증이 잘 나타나는 것은 취침시간, 기상시간, 식사시간 등 생활리듬이 불규칙하고, 이 때문에 뇌 속의 생체시계가 교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 규칙적으로 생활하도록 노력하고, 전날 잠을 설쳤다고 낮잠을 오래 자는 것은 좋지 않다.
적당한 운동도 필요하다. 운동은 육체적 피로를 유발해 수면에 빠져드는 것을 도와준다.
미지근한 물로 목욕이나 샤워를 하면 인체를 편안한 휴식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부교감신경계의 세력이 우세해져 잠을 쉽게 청할 수 있다.
8천만 명 이상이 한 종류 이상의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에선 이 때문에 수면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1993년 국립수면장애연구소를 세워 수면장애를 연구하고 있다. 또 10년쯤 전부터 수면의학 전문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선 90년대 중반부터 수면의학 전공자를 양성하고 있지만 아직 전문의 제도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 국가차원의 수면의학 연구도 전무한 실정이다. 산업안전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국가가 수면의학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할 시점이다.
요즘은 계속적인 폭염 때문에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 오늘은 공포영화를 보면 서늘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를 상기함으로 서늘함을 느낄 수 있기 바란다.
무시무시한 채찍으로 채찍질 당함(막15:15, 요19:1,사53:5)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께 태형을 가했다. 로마의 태형은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형벌로 알려져 있다.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채찍은 많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쇠 구슬이 박혀 있었다. 채찍으로 몸을 때리면 구슬들 때문에 깊은 상처나 멍이 생겼고, 채찍질을 계속하면 상처 난 곳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또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채찍질을 하면 살이 심하게 찢겨져 나갔다. 특히 등이 심하게 찢겨져 나가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척추의 일부가 드러나기까지 했다. 채찍질은 어깨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아래에 있는 등과 엉덩이 그리고 정강이까지 계속된다. 정말 끔찍한 형벌이다.
로마의 태형을 연구한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겨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3세기의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태형에 대해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과 근골 그리고 창자의 일부가 노출됐다”고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태형만 당하고서도 죽었다. 죽지 않더라도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상태에 빠진다. 저혈량성 쇼크란 어떤 사람이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나서 고통을 겪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평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면서 올라가셨다. 그 때 예수님은 이미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다. 결국 예수님은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명령했다. 예수님께서는 끔찍한 채찍질을 당하셨기 때문에 손과 발에 못이 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요19:17-18)
구레네 시몬에게 나무 십자가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고 로마의 군인들은 재빨리 예수님의 겉옷을 벗기고 나무 십자가 위에 눕힌 다음 그분의 양 팔을 십자가에 맞게 펼치고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손목을 마치 생선을 도마 위에 올려놓듯 놓고 육중하고 무거운 망치로 사각진 쇠못을 박았다. 쇠못은 그 손목을 관통하여 나무에 깊이 박혔다. 그들은 그 쇠못의 머리가 손목을 끊고 지나가 버리지 않도록 약간의 여유를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재빨리 다른 손으로 옮겨 가서 그 쪽 손을 잡고 조금 전과 같이 못을 망치로 박았다. 약간 느슨하게 해 두는 것을 잊지 않고… 그리고 이 가로 목에 양 손이 박힌 예수님을 이미 형장에 세워 놓은 세로 목에 매달았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무릎이 너무 뻣뻣하지 않고 약간 굽은 정도의 여유를 두면서 왼발 위에 오른발을 포개 놓고 발톱이 아래로 향하도록 잡아 당겼다. 오목하게 된 두발의 포개진 발등 위로 사각지고 육중한 쇠못 하나를 망치로 사정없이 박았다. 이로서 십자가의 못 박은 작업은 끝났다. 몸이 늘어지면서 몸무게가 양 손목의 못 박힌 곳에 쏠릴 때 마다 격렬한 고통이 손끝과 팔을 타고 뇌를 작열 시켰다. 손목에 박힌 못이 팔을 관통하는 신경을 강하게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처형장에 도착해 눕혀진 후에 십자가의 가로 들보 위로 팔을 뻗친 상태에서 못 박혔다. 이 가로 들보는 패티볼룸(patibulum)이라 불렸고 십자가의 수직 기둥과는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직 기둥은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로마 군인들은 12cm-18cm 정도 되는, 끝이 가늘고 뾰족한 대못을 사용해서 손목에 박았다. 일반적으로 손바닥에 못을 박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손목에 못을 박아야 손이 단단하게 고정된다. 만약 손바닥에 못이 박히면 몸무게 때문에 손바닥이 찢겨나가서 십자가에서 떨어져 버린다. 당시의 언어는 손바닥과 손목을 구별하지 않았다. 손목도 손바닥에 속했다. 못이 손목에 박힐 때의 고통은 펜치로 척골(팔굽뼈) 신경을 잡고 비틀어서 뭉갤 때의 고통과 비슷하다. 사람이 그 고통을 이겨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다음에 가로 들보를 들어 올려서 수직 기둥에 부착시켰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발에 못이 박혔다. 또 다시 발에 있는 신경이 완전히 으깨졌고 손목에 못이 박혔을 때와 비슷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팔이 늘어난다. 아마 15cm 정도 늘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양어깨가 탈골된다. 이는 구약성경 시편 22편의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라는 예언의 성취이다.
예수님은 몸이 앞으로 쏠릴 때 오는 고통을 피하려고 그는 몸을 위로 곧게 세우려 했고, 그렇게 되면 그의 온몸의 무게가 못 박힌 발에 쏠리게 되었다 다섯 개의 발등 뼈 사이에 놓인 신경을 관통해 있는 못 때문에 인두로 지지는 듯한 강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고통은 이것만이 아니다. 또 다른 고통이 따른다. 팔이 지쳐서 쥐가 나는 현상이 생기게 되며 근육에 산소 공급의 부족으로 근육경직현상이 생기며 무지막지하고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파도치듯 엄습했다. 이 고통 때문에 그는 목을 위로 세울 수가 없었다.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나 내뿜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호흡무력증에 빠지게 되고 한 모금의 호흡이라도 하려고 사투를 해야 했다. 폐와 혈중에 탄산가스가 쌓여가고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다시 엄습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세워 숨을 내쉬어 한 모금의 산소를 마시고자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찢어지듯 뒤틀리는 통증과 몸을 위로 고쳐 세울 때마다 나무에 스치는 터진 등에서 오는 통증이 수 시간 계속 된다.
또 다른 고통이 따른다. 심장에 혈장이 서서히 축척 되어 심장을 압박함으로
가슴에 엄청난 통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체내의 수분상태는 낮아지고 위험 수위를 넘어 서고 있다. 압박 받는 심장은 박동을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다 하고 있다. 피의 혈청과 혈장이 분리되어 수분의 혈장은 심장 속에 축척 되어 심장에 압박을 가하고 피는 뻑뻑해져 혈관을 흐르기에 무리가 있는 상태가 되었다. 폐에도 물이 차기 시작하여 작은 양의 공기를 받아들이기에도 너무나 큰 힘을 써야 했다. 예수님의 육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난 상태에 와 있고 그는 죽음의 냄새가 그의 몸속에 스며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로써 구원의 사명은 완수 되었다. 그는 이제 고개를 떨어뜨리고 마지막 숨이 끊어지고 운명하셨다. <Davis 저 “예수님의 십자가 ”crucifixion of Jesus” 중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름(요19:34)
일단 희생자가 십자가에 수직으로 매달리게 되면 질식하면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질식하게 되는 이유는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횡경막이 가슴의 상태를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숨을 내쉬기 위해서는 십자가 위에서 발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근육이 잠시 동안 이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발에 박혀 있는 못이 발을 점점 깊이 찌른다. 결국에는 못이 발 근육에 붙어 있는 뼈를 고정시키게 된다. 간신히 숨을 내쉰 후에는 세웠던 발을 내리고서 잠시 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서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그러면 또 다시 숨을 내쉬기 위해 발을 세워야 하고 동시에 십자가의 거친 나무결에 피 묻은 등이 긁히게 된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 결국 발을 세울 수 없게 되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호흡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면 희생자는 소위 호흡 산독증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되며, 죽음이 임박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을 때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그리고 심장이 정지되면서 돌아가셨다.
로마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의 오른쪽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서 확인했다. 성경의 묘사로 볼 때 오른쪽 옆구리, 갈비뼈 사이였을 것이다. 창은 오른쪽 폐와 심장을 꿰뚫었다. 그래서 창을 뺄 때 물처럼 보이는 액체-심낭삼출과 늑막삼출-가 나왔다. 요한이 복음서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온 다음에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이 요한의 설명은 현대의 의사들이 예상하는 바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점 때문에 요한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의 다리를 군인들이 부러뜨렸다. 로마 군인들은 안식일과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빨리 죽이기 위해 단검을 이용해서 희생자의 다리뼈 아래뼈 부분을 부러뜨렸다. 그렇게 되면 희생자는 발을 들어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없다. 그래서 몇 분 안에 호흡 산독증 때문에 죽게 된다.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돌아가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창을 사용했다. 로마 군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전문가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고 실제로 사람을 잘 죽였다. 그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사람이 죽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죄수가 탈출하면 책임지고 있던 군인들은 대신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희생자를 끌어내릴 때 그가 죽었는지를 꼭 확인했다.
통증이 멎고 설사가 그치며 열이 내린다. 아이들이 열이 날 때에도 역시 보리차를 먹이면 열이 내린다. 열이 나는 것은 병원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몸에서 병원균과 면역계가 한바탕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차는 병원균을 죽이거나 억제하여 염증을 없애고 열을 내린다. 보리차는 입 안에 있는 해로운 박테리아를 죽이거나 번식을 억제한다. 입 안에 생기는 염증을 치료하고 감염을 막는다.
특히 저녁에 잠자기 전에 보리차를 마시면 입 안이 깨끗해지고 충치와 구내염, 잇몸 질환 등을 막을 수 있다. 학자들은 보리차는 입 안에 있는 연쇄상구균을 사멸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2006년 12월호 농업식품화학저널(the Journal of Agriculture and Food Chemistry)에 발표하였다.
보리차는 박테리아들이 치아에 달라붙지 못하게 하여 박테리아들이 치아 표면에
붙어 자라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발표하였다.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볶은 보리차만이 이와 같은 효능이 있다고 하였다.
♠2. 보리차는 혈액을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촉진한다.
보리차는 혈액을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촉진한다. 보리차는 핏속에 있는 지방질과
독소, 노폐물을 깨끗하게 씻어낸다. 고혈압, 심장병, 심근경색, 동맥경화, 고지혈증
같은 심장질환과 심혈관 계통의 질환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혈압을 낮추고 핏속에
있는 기름기를 없애며 혈관을 튼튼하게 하므로 뇌졸중과 치매를 예방한다.
보리차를 하루에 300ml씩 마시면 혈액이 맑아지고 혈액순환이 좋아진다.
심장혈관 계통이나 뇌혈관 계통에 질병이 있는 환자들은 평소에 보리차를 마시는
습관을 들이면 혈액 속의 기름기를 없애고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추어 준다.
여름철에 보리차를 마시는 것은 더위 먹은 것을 물리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녹두죽을 복용하는 것보다 더 낫다. 보리차의 해독 작용은 녹두에 못지않다.
보리차는 화기를 내리고 더위를 물리치는 것은 물론 혈압을 내리고 혈당을 낮춘다.
일본에서 보리차가 혈액을 맑게 하여 혈액순환을 촉진한다는 논문을 2002년 4월호
에 발표하였다. 보리차는 혈액을 맑게 하여 혈액의 점도를 낮춘다. 혈액의 점도가 높을수록 혈액순환이 나빠지고 갖가지 질병이 생긴다. 일본 카고메 컴퍼니(Kagome Company) 연구팀은 보리차에 들어 있는 알킬피라진이라는 성분이 혈액순환을 촉진한다고 발표하였다.
♠3. 보리차는 최고의 항산화제이다. 사람을 늙지 않고 병들지 않게 한다.
사람이 늙고 병이 드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활성산소이다. 활성산소는 세포의 단백질, 지질, DNA나 RNA 등을 파괴하여 손상을 입히지만 반대로 몸에 세균이 침입했을 때 이를 방어하기도 하는 등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여러 종류의 활성산소 중에서 세포를 죽이는 능력이 가장 강하고 독성이 세며 없애기 어려운 것이 하이드록실라디칼과 퍼옥시나이트라이트이다. 그런데 보리차에 들어 있는 10여 가지 물질이 하이드록실라디칼과 퍼옥시나이트라이트의 생성을 억제한다. 보리차를 열심히 마시기만 해도 고혈압, 고지혈증, 동맥경화, 협심증, 심장병, 뇌졸중, 치매, 알츠하이머, 파킨슨병, 간염, 간경화, 아토피 피부병, 관절염 등을 에방하고 고칠 수 있다. 산소와 질소 원자로 구성된 작은 분자인 일산화질소(NO)는 물에 잘 녹지 않는 무색의 기체이다. 얼마 전까지 일산화질소는 자동차의 배기가스에서 나오는 질소산화물의 원인이고 인체 내에서도 세포를 파괴하는 독소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산화질소는 인체 내 세포에서 신경전달 물질을 배달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혈액 응고 및 혈압조절에 중요한 혈관의 이완과 확장에 깊이 관여 하고 있는 것을 밝혀졌다. 그리고 암 세포를 죽이는 면역작용에도 관여하고 혈류의 흐름에도 직접 작용하고 있다. 일산화질소는 그 분자 크기가 매우 작아서 세포 내에서 어느 방향으로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세포벽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일산화질소가 몸에서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지면 활성질소가 되어 활성산소와 마찬가지로 세포를 죽이고 염증과 암, 치매 같은 질병을 일으킨다.
일산화질소가 활성산소를 만나면 퍼옥시나이트라이트가 되는데 이것은 글루타티온 효소, 후라 보노이드, 비타민 E, 단백질 등을 파괴한다.
♠4. 보리차는 몸무게를 줄이는데 아주 좋다.
보리차 한 잔(300ml)에는 2칼로리의 열량이 들어 있다. 거의 모든 음료 중에서 열량이 가장 낮다. 아무리 많이 마셔도 살이 찔 염려가 없다. 그러나 현재 스타벅스(Starbucks)에서 판매하고 있는 500ml짜리 펌프킨 스파이스 라떼(pumpkin spice latte)의 열량은 380칼로리이다. 보리차에는 당분이 거의 없다. 보리차에는 당분이 거의 없고 설탕을 넣지 않아도 구수한 맛이 있다. 설탕은 비만증, 당뇨병, 아토피 피부염, 고혈압, 고지혈증, 심장질환, 암, 갖가지 염증, 신진대사증후군 등의 주범이다. 보리차를 꾸준히 마시면 이런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보리차는 몸속에 있는 지방을 분해한다. 보리차는 혈관의 내벽을 닦아내는 비누와 같다. 몸속에 있는 중성지방질과 독소, 기름때를 말끔하게 씻어낸다.
♠5. 보리차는 살결을 곱게 한다.
늘 보리차를 마시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은 살결이 곱고 매끄럽다. 보리차를욕조에 넣고 목욕을 하면 피부 자양하는 작용과 미백 작용이 겸하여 나타난다. 보리차는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살결을 보호하는 데에도 좋다. 햇볕이 뜨거운 여름철에 자외선은 매우 강열하므로 피부에 색소가 침착되어 기미나 주근깨가 생기기 쉬운데 보리차를 마시면 자외선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
♠6. 보리차는 비위를 튼튼하게 하고 소화를 촉진한다.
보리차에는 소화 효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소화를 촉진한다. 식사 뒤에 보리차를 마시면 소화와 흡수가 잘 되는 것으로 과학자들이 증명하였다. 보리차는 비위를 튼튼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나쁜 음식습관과 생활습관으로 인한 소화 불량에 보리차는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소화를 잘 되게 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과식으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고 배가 부어오르는 증상을 낫게 한다. 보리를 약간 까맣게 볶아서 가루 내어 먹어도 좋다. 특히 비위의 기능이 허약한 어린이와 노인들이 보리차를 늘 마시면 비위의 기능이 튼튼해져서 갖가지 위장병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요즈음 소화기관의 질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소화기관의 질병은 폭음(暴飮)이나 폭식(暴食) 등 나쁜 음식습관으로 인해 생긴다. 갖가지 소화기 계통의 질병 가운데서 위궤양이나 십이지장궤양 같은 궤양이 가장 많이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리는 위를 화평하게 하고 자극이 없어서 통증을 없애므로 소화기 계통의 궤양과 위장에 병이 있는 사람이 보리차를 마시면 증상이 완화되면서 차츰 낫는다.
♠7. 보리차는 장을 튼튼하게 하고 뇌기능을 좋게 한다.
보리는 모든 곡식 중에서 섬유소의 임금이다. 보리는 거의 모든 곡식 가운데서 섬유소가 가장 많다. 200g을 기준으로 할 때 보리에 14g, 귀리에는 4g, 쌀에는 2g, 바나나에는 4g의 섬유소가 들어 있다. 대장에 서식하고 있는 인체에 유익한 대장 박테리아들은 보리에 들어 있는 불용해성 섬유소를 발효시켜 부티르산(butyric acid)을 형성하는데 뷰티르산은 대장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대장암을 예방한다. 부티르산은 단쇄지방산(短鎖脂肪酸)으로 채소와 나물 등에 들어 있는 식물 섬유와 유익한 장내 세균이 만들어내는 몸에 이로운 지방산이다.
대장에서 미생물들이 보리를 발효하여 흡수하는 과정에서 만든 지방산은 간의 해독작용을 돕고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 또 보리차는 혈당을 낮추고 인슐린 민감성을 늘려 주므로 당뇨병 환자들한테도 매우 유익하다. 보리는 섬유소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곡식이다. 볶은 보리를 입에 넣고 과자처럼 씹어 먹으면 맛도 좋을 뿐 아니라 천연 섬유소를 많이 섭취할 수 있다. 볶은 보리에 들어 있는 섬유소는 혈액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대장에서 유익한 박테리아들의 먹이가 되며 고혈압, 고지혈증, 심장병 등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보리에 많이 들어 있는 섬유소는 장 기능을 튼튼하게 하고 장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장과 뇌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장이 깨끗하면 머리가 맑고 뇌 활동이 많아져서 머리가 좋아진다. 천재가 되고 싶거든 어려서부터 보리차를 마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