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 2장 22절은 [내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화평을 좇으라고 말한다] 고 말한다
이 항목은 주 예수 자신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음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랑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우리는 오직 이 몇 가지 수단 ㅡ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그 영인 말씀을 기도로 읽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과 그 영을 소멸치 않는 것과 신언을 멸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ㅡ에 의해서만 그것을 수행할 수 있다 하나님 ㅡ사람의 생활은 주님을 부르는 생활이고 그 영인 말씀을 기도로 읽는 생활이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이며 그 영을 소멸치 않고 불일듯하게 하는 생활이며 신언을 멸시하지 않고 존중하는 생활이다
Lord, Thou hast won, at length I yield; My heart by mighty grace compelled Surrenders all to Thee; Against Thy terrors long I strove, But who can stand against Thy love? Love conquers even me.
If Thou hadst bid Thy thunders roll,And light'nings flash, to blast my soul, I still had stubborn been; But mercy has my heart subdued, A bleeding Savior I have viewed,And now I hate my sin.
Now, Lord, I would be Thine alone,Come, take possession of Thine own, For Thou hast set me free; Released from Satan's hard command, See all my powers waiting stand, To be employed by Thee.
눅23:33-34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범죄자들도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군인들은 그분의 못을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를 뽑았다.
우리는 '회개한 강도가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이구동성으로 주 예수님을 비웃다가 왜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변해서 그리스도를 믿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누가복음 23장 34절의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긍휼, 이러한 자애, 이러한 온유와 충만한 은혜가 이 강도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의 선입관을 없애고 악한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못 박히신 분이 참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십자가는 그의 마음을 딱딱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비웃게 했지만, 주 예수의 십자가는 그로 회개하게 하고 구주를 믿게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좌우편의 두 명의 강도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나타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기의 죄를 지지 않았고, 멸망받은 강도는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영원히 멸망받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여호와여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아멘 시편 139:23-24, 1-3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2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 번째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 번제와 소제의 비교
번제의 주된 항목은 피이다(1:3, 11). 소제의 주된 항목은 기름과 유향이다(2:1). 기름은 섞고 기름 붓기 위한 것이며, 유향은 소제 위에 놓이기 위한 것이다.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런 실수도 범하지 않고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전적으로, 끝까지 절대적인 사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절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면에 있어서 죄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절대성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몇몇은 상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완전히 철저히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가 이 땅 위에 사셨을 때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사복음서에서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는 구속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속죄는 또한 우리와 하나님간의 상황, 곧 화목이 없는 상황을 화평케 하기 위한 것이다. 속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상황을 누그러뜨리며 어떤 문제들을 해결한다.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한 것만큼만 번제로서 그리스도를 드릴 수 있다. 속죄에는 피가 필요하다. 오직 동물들만이 번제가 되기에 적합한데, 이는 동물들만이 속죄를 위해 뿌려질 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물은 생축 중의 소나 염소나 양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여야 했다.
소제에서는 동물의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생명, 곧 밀과 밀알과 밀 이삭들이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식물의 생명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산출, 번식, 증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소제에서 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름과 유향을 본다. 기름은 소제에 부어져서 그것과 연합되며, 유향은 소제 위에 뿌려진다. 피와 기름과 유향에 관해서 우리는 번제와 소제와의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본다.
제물들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누림을 갖기 위한 하나님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며, 그분만이 그것을 드신다. 하나님의 「입」은 번제를 태우는 불이며, 그 불은 계속 밤낮으로 탄다. 번제를 드시는 신성한 드심은 아주 질서정연하다(레 1:7-8).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드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제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번제는 먹을 수 없지만 소제의 일부분은 먹을 수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봉사는 거룩하며 그들의 음식 또한 거룩하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 곧 우리의 거룩한 봉사에 걸맞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소제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이신 그리스도이다. 먼저 하나님이 그분의 분깃인 소제의 부분을 누리며, 그런 다음에 우리의 누림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누림은 공동의 누림(co-enjoyment), 곧 하나님의 누림과 함께한 누림이다.
유향과 고운 가루와 기름이 단 위에서 불살라짐(레2:9)
모든 유향과 고운 가루의 부분과 기름의 부분은 단 위에서 불살라진다(2:2).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의 상당한 부분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하여 음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상징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사람의 생활은 탁월하였으나, 이 탁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그분의 속성과 미덕들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전에 인류 가운데 그러한 수준은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고, 연합되고, 충만된 하나님-사람이시다. 더우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부활을 표현하셨는데, 심지어 바리새인들에게 화내시고(마 23:1-36),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요 2:12-17)조차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탁월함은 그분의 인간성과 그분의 신성함에 있었다. 즉 그것은 그 영 안에 있고 부활과 함께한 그분의 인성과 신성 안에 있었다. 이것이 사복음서가 그분의 탁월함 안에서 그분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다. 그분은 고우시고, 고르시며, 완전히 균형잡히신 분이며 어떤 것도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으셨다. 더우기 그분은 그 영으로 충만되신 분이며 부활로 적셔진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행하셨을 때 항상 그 영으로 충만되셨으며 부활로 적셔지셨다.
소제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위한 것임(레2:3,10)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 2:3). 이것은 하나님이 누리신 후에 우리도 우리의 음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은 만족케 되시기 위해 그분의 분깃을 받으셔야만 했다. 남은 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분깃이다. 레위기 2장의 예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한 그림이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기름 섞인 고운 가루, 곧 기름과 연합된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기름과 가루가 연합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영에 의해 예수님을 먹고자 한다면, 오늘날 그 영은 말씀 안에 합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접촉할 때, 말씀 안에 합해져 있는 그 영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 예수님의 사람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생활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대하여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며 그 영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양공급이신 예수님을 공급한다. 자연히 우리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음식이신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생활을 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린다. 이것이 소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