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25. 11:30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F. 셋 모두 하나이심

여기에 참으로 문제가 있다.

당신은 이 셋 모두가 하나이심을 믿는가?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1. 아들이 아버지이시다

이사야서 96절을 보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아기가 누구인가?

그는 예수이다그 아기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이 아들이 누구인가그는 예수이다.

그는 누구의 아들인가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을 뿐 아니라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왜 그분은 기묘자라 불리는가그분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분은 기묘자이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라는 이름의 아기가 또한 전능한 하나님이라 불린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는가유대인들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 작은 예수가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믿었다면 그들은 즉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나의 하나님은 예수시다!

나의 하나님은 그 작은 아기이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난 그 작은 아기가 나의 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네 번째 이름 또는 칭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우리에게 주신 바 된 그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아들인가, 아버지인가?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나신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당신은 또한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한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이제 요한복음 148절과 9절의 말씀을 보자.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임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대표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왜곡한다.

만일 여러분이 왜곡하지 않고 이 말씀을 문맥을 따라 읽는다면, 이 구절의 아들이 아버지임을 깨달을 것이다.

빌립은 아들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아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었고, 너는 나를 보았다. 나를 보았으므로 너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우리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이사야서에서 아들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읽어보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여기 계신데 당신은 왜 그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까? 그분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고 말씀하셨다.

다음은 소위 이단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해 몇몇 사람들이 논의하던 모임에서 녹음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어쨌든 이사야서 96절에서,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평강의 왕이라 전능한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임이라고 했다.

여기서 예수가 아버지라 불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아버지이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 96절이 말하는 바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전통 때문에 이렇게 당연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라그들은 그들의 전통을 두려워하여 예수가 아버지이심을 당연하게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전통을 위하여 있는가여러분은 전통을 주의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양심과 생각에 따라 모두 이사야서 96절의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전통 때문에 당연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대화 가운데 이사야서 96절의 분명한 말씀에 따라 예수가 아버지임을 인정한다는 정직한 말이 있어서 기쁘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이 구절을 왜곡하여 말하기를 아들은 아버지라고 불릴 뿐 아버지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말인가?

당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사람은 아니라니!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여기의 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족속을 낳은 아버지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않고 영원한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버지라 불리는 그 아들이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그 아기도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분명히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를 인정하는 한 다른 하나도 알아야 합니다.“라고 했다.

냉철한 생각은 이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변호와 확증
워치만 니, 위트니스리, 한국복음서원
지방교회 생활하기
지방교회 - 삼일 하나님, 삼위일체, 아버지, 아들, 성령, 교회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24. 01:40

삼위일체의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전치사 'para'를 중심으로 알아보기-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보통은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three persons), 한 본질(one nature)'이라고 해 버리면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을 전공했거나 관련 논문들을 심도있게 연구한 적이 있는 분들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는 현재도 진행 중이며, 더 연구할 분야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음을 인정합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1-342쪽). 

통상적으로 성부는 성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본인은 여전히 하늘에 남아 계시고), 성부와 성자는 (본인들은 여전히 하늘에 남아 계시고) 보혜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비록 성경의 어떤 구절에 근거한 주장일지 모르나 공간적으로는 물론 심지어삼위가 본질적으로도 각각 분리된 상태로 계신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래의 성경근거들과 설명은, 위와 같은 '분리된' 세 위격들로 삼위일체를 인식하는 것이 성경본문이 계시하는 바와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1. 요한복음 6:46 :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여기서 아버지께로서 온 자가 아들이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은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이 땅으로 오셨다는 말인가? 물론 한면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는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런 해석을 가능케 해주는 대목이 바로 '하나님에게서'라는 말 뒤에 붙은 전치사 '파라'(para)입니다.  

존 넬슨 다아비는 위 구절을 ' not that any one has seen the Father, except he who is of God, he has seen the Father.' 라고 번역한 후 위 'of'에 대한 각주에서 "Para with genitive: 'from with." 라고 난하 주석을 달았습니다. 이것은 성자가 성육신하실 때 <성부로부터(from) 그리고 동시에 성부와 함께(with)>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점은 다만 일개 전치사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자가 나와 함께 계신다' '또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고 반복해서 말씀한 요8:16, 29, 16:32, 14:9-11, 20 같은 여러 말씀들을 통해서도 재차 확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보내신 분인 성부는 분리가 불가능한 그분의 속성상 보냄을 받은 성자와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방면의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아들과 아버지를 동시에 언급하는 아래 성경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 안에와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요일2:22-24)

2.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이 구절에서도 역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버지 뒤에 붙은 "께로서" 라는 원문상의 전치사인 '파라'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보통 다른 번역본들은 'from' 즉  '~ 로부터' 라고 번역했으나  다아비 역은 원문인 '파라'(para, 3844)의 의미 즉 'by the side of'를 내포하는 뜻을 좀더 충실히 살려서 'from with'로 적고 있습니다. 

즉 보혜사 성령은 사장님에 의해 해외로 출장 보내어진 직원처럼 아버지로부터 떨어져서 나온 분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 나오신 분입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관념으로는 이것을 마땅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사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파라'를 'from with'로 번역한 다아비의 요한복음 15:26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But when the Comforter is come,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forth[proceedeth] from with the Father, *he*shall bear." 

결론적으로,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되 동시에 성부와 함께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6:46). 마찬가지로 보혜사 성령께서도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나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함께 우리 안에 들어 오셨습니다(요15:26). 그러나 이 셋은 고유의 구별성을 상실하지는 않으십니다. 이것 모든 것이 다 성경이 계시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저 하늘에 따로 남아 계시고, 오직 삼위 중 세번째 위격인 성령님만 홀로 우리 안에 오셨다는 일부의 주장은 성경의 여러 구절들과 심각한 충돌을 일으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의 체험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참고자료: '(주석이 포함된) 존 넬슨 다아비 역 성경'
http://www.awmach.org/BDB/dochome.htm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23. 00:00

무엇이 한국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일까?-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위격문제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성경 기록에는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1:14 에서 보듯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왜소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의 처녀탄생(마1:18-21) 역시 과학이나 인간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일 누구든지 어떤 연유에서건 이러한 성경적인 사실을 부인하면 그는 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나 믿음으로 받아야 할 진리 중에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 하심(신비한 연합)>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거듭남)과 연속(생명의 성숙)에 관련되고, 특히 구원론과 관련된 <핵심 진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진리를 성경본문과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을 우리는 비 성경적임 또는 이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개혁 신학계에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는 두 신학자가 이 주제에 대해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과연 한국 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즉 현 성경신학 대학원 원장인 차영배 박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만 사람 안에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권성수 박사는 요14:23 을 인용하며 <사람 안에는 성령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도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안에 성령님만 계시는지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계시는지에 대해서 두 신학자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두 분 다 현재 장로교단 소속 유력한 신학교에서 장차 목회자가 될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비중 있는 신학자들이다. 

따라서 한국 개혁신학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들은 이 두 분 중 과연 누구의 주장이 자신들의 신학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입장 정리가 시급히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권성수 박사의 주장 -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님은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학 및 성경 해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총신대 목회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그의 저서 중 도서출판 횃불이 발간한 <로마서 강해(로마서 1-8장)> (1996년)

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그리고 10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것을 하나님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4: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를 말하는 것이고 성부와 성자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쓰는 문맥은 14: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희는 너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하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405쪽). "10-11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부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자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거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신비적인 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406쪽)
(인용 끝).
 

위 내용에서 권성수 교수는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 또는 '내가 아버지께' 등 삼위의 1격과 2격을 지칭하는 요14:23, 요14:16 본문을 인용함으로, 1격인 성부와 2격인 성자가 3격인 성령과 함께 사람 안에 거하심을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는 위 인용문 바로 직전에서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거하심은 <그냥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고 아주 사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필요할 때만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인 거듭난 성도들 안에 현재 살고 계신다.

2. 차영배 박사 주장 - <성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차영배 박사님은 고려신학교, 화란 Kampen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총신대학 학장을 거쳐 현재 성경신학 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월간 교회와 신앙(발행인: 최삼경) 2001년 10월 호에 실린 창간 8주년 기념 삼위일체특집에 기고한 차영배 박사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 되신 분이다" 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주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內住하시는 분은 주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주 예수는 우리 안에서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받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122쪽). "

2-7. 성부와 성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심:... 영(靈)은 우리 안에 내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모두 같은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은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임재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17~22)."(124쪽). "

<<성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124쪽)(인용끝).  

위 내용에서 차영배 박사는 출애굽기 19장을 근거로 성부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사람은 죽어버린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성부는 사람 안에 구조적으로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자도 우리 안에 오실 필요도 없고, 올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의 피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출애굽기 19장의 바로 그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말씀(11절), 고린도 후서 5:19의 '하나님(성부)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God was in Christ)라는 말씀, 골1:27의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 갈2:20의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들과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위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위의 1격과 2격을 3격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면이 있고, 사람의 생명되신 아들 하나님(요일5:12)을 <사람 밖에 묶어두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이제 국내의 두 분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 간의 이러한 두 가지 대조적인 주장들에 대해 한국개혁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 개혁신학계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처럼 성부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가 아니면 권성수 박사의 주장처럼 요14:23등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그분의 성전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믿는가?   

2. 만일 권성수 교수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삼위 중 1, 2격을 3격과 분리시키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신론 이단 사상이 아닌가?  

3.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1)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내주를 말씀하고 있는 골1:27, 롬8:10, 고후13:5, 갈2:20, 4:19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대로 성령이 내주한 것이 그리스도가 내주한 것이라면 성경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즉 제 3격인 성령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통상적인 이해처럼 제 2격 아들 하나님 만이 그리스도인가? 

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요일5:12에 근거하여 사람 안에 아들은 없고 성령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명 없는 자들>로 판단해도 좋은가? 아니면 성령이 곧 아들 하나님이라고 할 것인가? 

3)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고후 13:5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안 계시고 성령만 계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버리운 자들>(아도키모스, 96b- 시험에 합격치 못한, 거절된(사람들))로 간주해도 좋은가? 

4) 만일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사람 밖의 저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임으로 이를 근거로 성령뿐 아니라 성부 성자가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사람 밖의 성부, 성자>와 <사람 안의 성부 성자>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우리는 두 종류의 성부, 성자를 믿는가? 

5) 차영배 박사의 아버지의 영은 아들의 영과 성령과는 다른 영이라는 주장은 삼위가 각기 다른 세 영들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신약과 개혁신학계의 정설인가 아니면 이설인가? 

6) 삼위중 1격과 2격을 사람 밖에 두고 3격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다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요14:11의 삼위간의 상호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는 요1:12에서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며, 영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영접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한국 개혁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책임 있는 답변은 한국 교계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을 한 차원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아울러 한국 장로교단의 공식 삼위일체관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 3자들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믿는다.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19. 10:26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D. 셋 모두 영원하심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소문과 비난이 있다.

나는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사상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 성경에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고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고 선포하기 원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1. 아버지가 영원하시다

이사야서 96절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 축어역에서 이 문구는 영원의 아버지또는 영원한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2. 아들이 영원하시다

아들 또한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12절은 아들에 대하여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73절은 그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영원함을 의미한다.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상징은 직선이 아닌 원()이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3. 성령이 영원하시다

성령 또한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함을 선포한다.

E. 셋 모두 동시에 존재하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16절과 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한 것을 주목하라.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아들과 성령을 보내시는 아버지를 본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동시에 나타나 있다.

에베소서 314절부터 17절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는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 그리스도가 있다.

이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어떤 특정 기간 동안 존재하신 다음에 아들이 왔고 또 그 아들이 특정한 기간 후에는 존재하시지 않고 성령으로 대치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이 구절에서 성경은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은 성도들을 강건케하며, 아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도 분명하게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신다.

고린도후서 13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교제가 언급되었다.

셋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고린도전서 124절세서 6절은 성령의 은사와 주님의 직임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주님과 하나님을 본다.

다시금 성령과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역사하심을 본다.

성령은 은사를 주시며, 주님은 섬기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아버지께서 더 이상 존재하시지 않는다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하여 왔다거나, 또 얼마 후에 성령이 아들을 대신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셋 모두가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하심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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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19. 00:00

하나님 경륜 적용하기- 그림자와 실재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어릴 때 '그림자 놀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밤에 희미한 조명을 배경으로 벽을 향하여 각종 손 모양을 해 보이면 손 모양의 그림자가 개도 만들고 닭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주로 그림자를 쳐다보며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러나 게 중엔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손재주 좋은 형들의 손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며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달 밤에 그림자 밟기 라는 것도 했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그림자를 쫒아가서 밟는 놀이입니다. 이긴 사람은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그림자를 안 밟히려고 하고 술래(진 사람)는 그림자를 밟고 술래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쫒아다닙니다. 

위 두 가지는 다 실물이 움직이는대로 그림자가 따라 한다는 것이 공통된 현상입니다.  성경은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림자에 해당되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의 실재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다른 말로 허상입니다. 있는 것 같으나 막상 잡으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 높은 지위를 맛보았으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헛된 것을 대치할만한 실재 또는 참 실물을 발견하고 소유하지 않은 한 '헛된 바람을 잡는 것 같은' 그림자 밟기 놀이는 여러 세대를 이어서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임종시 인생의 헛됨을 토로하는 어른들을 보면서도 자신도 그런 같은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뭔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다른 일에는 그리도 똑똑한 그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그림자들을 좇는 허무한 인생을 살리가 없습니다(엡2:1-3, 4:17-18).  

신약 서신서에서 '그림자'(shadow)를 언급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골2:17, 히8:5, 10:1) 저는 그 중에서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다음 부분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which are the shadow of the things to come)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6-19). 

위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 아닌 종교적인 의식들'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눈에 보이는 의식들이 그림자다 이렇게 뭉뜽거려 말하지 않고, 먹고 마심, 절기, 월삭 등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또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회심한 주의 제자들이 구약의 율법이 요구하는 각종 의식과 관련하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그런 밖의 행위들은 안의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바울은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레위기 11장을 보면 먹을 수 있는 생물들 리스트가 주욱 열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참된 먹거리는 그 그림자들의 실재인 주님 자신입니다. 신약 도처에서 주님을 먹고 성령을 마시는 언급과 사상들이 발견됩니다. 

만일 누가 레위기 말씀을 지키려고 토끼나 사반 고기는 안 먹고, 새김질하는 소고기는 먹으면서 정작 요한 복음 6장과 고전12장이 말하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생수이신 성령을 먹고 마시는 것은 소홀히 한다면 그는 그림자를 주목하고 실재는 놓치는 종교인인 확률이 높습니다.  

 또는 레위기 23장이 말하는 각종 '절기'와 이에 더하여 소위 교회력에 있는 사순절이니 고난주간이니 하며 특정 날을 지키면서 그 실재인 주님을 맛봄으로 인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면 그 역시 그림자는 중요시하되 그 실재를 놓친 자입니다. 

'월삭'(new moon)(민28:11)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어둠가운데 있다가 빛이신 주님으로 돌이켜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이 오늘 날 월삭을 참되게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레23:3)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장로교 모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의 자녀였던 한 형제님은 주일성수하려고 그 다음 주 월요일이 중요한 시험이라도 주징 자정을 넘기지 전까지는 시험 공부를 할수 없었다고 간증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안식교단 이외에도 안식일 준수(주일성수?) 교리가 적지 않은 분들에게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일 준수는 그분이 쉬신 것처럼(창2:3) 우리도 육체의 열심과 노력을 그치고 영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주는 참된 영적 실재는 바로 완성과 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한 영됨을 누릴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육신 안에서는 '한 손 마른 자'를 고치기도 하고 배고프면 밀이삭을 잘라 먹어도 가합니다. 

오랫만에 휴가를 맞이하여 낮잠도 자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실컷 쉬어 보지만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좀이 쑤시고 지루해지며 도리어 안식이 깨지는 경우를 우린 경험합니다. 참된 안식은 안식일의 실재이신 주님 안에서만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골 2:17이 말하는 그림자와 실재를 바로 푸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글 제목이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임으로 실제적인 몇 가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1. 안식교가 주장하는 안식일 준수 

물론 구약 성경에 안식일 준수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규례들은 참으로 그림자일 뿐이며 신약의 성도들도 지켜야 할 실재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위 본문 위에서 보듯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때 우리들의 죄와 죄들을 처리하셨을 뿐 아니라 안식일 준수를 포함한 모든 의문에 쓴 증서들을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Blotting out the hand-writing of ordinances)(14절). 

만일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안식일 준수(내지는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불의하다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료하신 주님이 먼저 불의한 자로 정죄 되어야 마땅합니다(마12:9-14). 

그러나 주님 자신은 영원토록 의로우신 분 이십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며 불의가 없으십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인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면 안식일외의 다른 모든 율법들도 엄격하게 지켜야 마땅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3:10). 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고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임을 말합니다. 

2. 신약 교회가 소위 교회력을 지키는 일 

언제부터인가 개신교 안에도 교회력이니 사순절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교회력 개념 안에는 전통적인 의식인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오순절 등도 포함이 됩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교회력'이라는 검색어를 쳐 넣어서 나온 다음과 같은 자료는 오늘 날 '특정한 날을 지키는' 소위 골2:16 본문의 변종이 얼마나 신약 성도들 안에 만연되어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 다. (교회력 구글 검색)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것이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림자에 해당될 뿐입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실재를 놓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대적의 고차원적인 수법입니다. 즉 엉뚱한 것에 세월을 낭비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목치 못하게 하는 전략입니다(엡5:16 -21). 

위와 같이 성경이 '그림자'라고 판단한 것들을 붙들고 귀히 여기는 분들은 최소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딤전 1:4)에 대해서 선명한 이해가 크게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입니까? 

본문 문맥을 따라 설명하자면 골2:19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마디와 힘줄에 해당되는 지체들이 다른 성도들을 공급하고 연합케 하여 그들 각자 안에 하나님의 증가로 인한 생명의 성장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 안에서의 하나님의 증가(원문 참조)는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바로 이 몸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엡1:23). 

이러한 진리인식이 분명하다면 결코 그림자에 불과한 '대강절'이니 '사순절'이니 하는 절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생명의 성숙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라는 하나님의 갈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실재는 없는 그림자 밟기 놀이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 모두의 마음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기뻐하심이 무엇인지 참되게 보게 하시고 모든 그림자에서 돌이켜 실재이신 주님자신만을 주목케 하소서!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18. 00:49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B.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마태복음 2819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이 구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그 셋이 오직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알 것이다.

그 구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름들이 아닌)으로 침례를 주고라고 말한다.

하나의 이름을 가진 셋이 있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요, 삼위일체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책에서 앤드류 머리는 아버지 안에는 만유의 창시자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아들 안에서 계시되셨고, 표현되셨고, 가까워지셨으며, 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의 몸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를 위해 갖고 계신 것들을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과 아들이 이루신 것은 오직 성령의 계속적인 중재와 활발한 운행하심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적용될 수 있고 효능을 발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C. 셋 모두 하나님이심

1.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다

의심할 바 없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의 여러 곳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2절과 에베소서 117절을 보라.

2. 아들이 하나님이시다

아들 또한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18절에서는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들은 하나님이라 불리운다.

요한복음 11절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말씀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요 아들이시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면 아들 또한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로마서 95절은 그리스도...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 구절을 좋아한다.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3. 성령이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53절과 4절에서 우리는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본다.

3절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성령을 속였다고 말했는데, 그 다음 구절에서는 그가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고 말한다.

이 구절들은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는 몇 분의 하나님이 계시는가?

오직 한 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오직 한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다만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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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17. 00:00

삼위양식론(양태론), 삼신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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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지식을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삼일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알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분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실 수 있는가? 각 세대를 통하여 신학자, 성경 해석자, 설교자 등을 포함한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이 질문을 상당히 연구하고 토론했지만 2천년간의 연구조사와 토론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한 답을 얻지 못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통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가 한 하나님이고, 아들이 또 다른 하나님이고, 그 영이 여전히 또 다른 하나님으로서 이 세 분 하나님들이 함께 모여 한 단체적인 하나님을 구성한다고 믿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인 바티칸(Vatican)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거기에 있는 회랑(回廊)을 알 것이다. 이 회랑에는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지 않고 천장에서 바닥에 이르는 두 종류의 커다란 유화(油畵)가 있다. 한 그림에는 백발의 나이든 아버지가 잘 생긴 아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비둘기도 함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안에서 사람들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그들이 세 실체(實體)-아버지, 아들, 비둘기-를 경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그림은 그 셋에 한 숙녀가 더해진 것이다. 그들은 "성모"를 신격(神格) 속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실제를 놓쳤다. 우리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삼일(三一)-아버지, 아들, 그 영-이시지만 여전히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왜 우리의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도 셋(one and three)이신가? 언젠가 어떤 사람들이 이 질문을 마틴 루터에게 하자 그는 "나는 모릅니다. 만약 내가 안다고 말한다면 내가 하나님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아니었으므로 알지 못했다. 그의 대답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삼일 하나님의 위격들(位格 : persons)은 매우 비밀스럽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적인 지성으로써 그분을 분석하고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성경의 분명한 말씀을 따라 이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6)고 진술한다. 더욱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듭하여 "나[단수(單數)]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8, 45:5-6, 21-22)고 말씀하신다. 또한 시편 86편 10절은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고 말한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세분의 하나님들이 계신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때 그분 자신을 가리켜 "우리"와 "우리의"라고 칭하신 것을 언급한다(창 1:26, 3:22, 11:6-7). 

 이사야 6장 8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가리켜 한편으로는 "내"라고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드러난 말씀에 따라 성경의 계시를 받는 것이다.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므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내"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유일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를"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신 면이 있지만 그 셋은 나뉘어지지 않고 여전히 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분리된 세 위격(位格)들로 분리시켜서 설명하는 신학은 큰 이단이다.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분 안에 계시고(14:10-11, 10:38, 17:21)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10:3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그 영이 아버지께로서 오신다고 말한다(요 15:26). 헬리어에서 요한복음 15장 26절의 [...께로서(from)]는 문자적으로는 [...로부터 함께(from with)]를 의미하는 전치사(前置詞)이다. 이것은 실제의 영이 아버지로부터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영이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이 그 영과 함께 오신다. 이것은 아버지, 아들, 그 영이 동시존재(同時存在)하시고 상호내재(相互內在)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아들이 오셨을 때 아버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 영이 오셨을 때 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삼위는 한 하나님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삼위양식설(三位樣式說)이라 불리는 그릇된 신학의 가르침이다. 삼위양식론자들은 아버지는 구약에 계셨지만 신약, 곧 아들이 오신 복음서에서는 아버지는 존재하기를 그치셨고, 그 다음 복음서 후에 그 영이 오셨을 때 아들은 더 이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단이다.  

말씀의 순수한 계시는 구약에 아버지가 계셨고, 아들과 그 영도 계셨다고 말한다. 즉, 그 세 분이 모두 계셨다고 말한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 아들이 오셨고, 아버지와 그 영도 오셨다. 세 분이 동시에 계셨다. 서신서에서 그 영이 오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도 그 영과 함께 오셨다. 그들은 서로를 대치하는 방식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동시존재(同時存在)의 방식으로 오셨다. 더욱이 그들은 다만 동시에 존재하신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호내재(相互內在)의 방식으로 동시에 존재하셨다. 이 한 분의 완전한 삼일 하나님과 그분이 성취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의 영 안의 풍성한 공급이 되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되신다. 그러나 삼위양식설을 반대하고 근본주의적이기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에서 아들이 홀로 오셨고, 하늘에는 아버지가 그대로 계시고, 또한 서신서에서 그 영이 오셨을 때 역시 하늘에 아버지와 아들이 그대로 계신다고 믿는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인 삼신론(三神論)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상으로는 큰 이단이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의 탁월성, "그리스도의 풍성은 그 모든 성취를 이루신 삼일 하나님임, p.81-85", 한국복음서원]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15. 05:00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 하나님은 삼일(三一)이시다

 

이 유일한 하나님은 삼일이시다.

여러 해 동안 시도해 보았지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른다.

지난 오십 년 동안 나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분석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결국 나는 그것을 풀 길이 없음을 알았고, 오래 전에 포기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사람아, 너는 너무 작다. 너는 결코 삼위일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A. ‘우리

이사야서 68절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가 우리인가?

우리는 그분이 둘 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분이 우리둘 다이심을 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하시고 또한 우리의형상이라고 말씀하신다.

같은 원리가 창세기 322절과 117절에서도 사용된다.

신약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423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는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우리의)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는 우리우리의가 있다.

우리우리의는 틀림없는 복수이다.

아버지는 두 하나님인가, 한 하나님인가?

물론 그들은 하나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라고 말씀하시는가?

만일 당신이 그것은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한 하나님이 둘이 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요한복음 1711절에서 주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다시금 그분 자신과 아버지를 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라.

그들이 하나라면 왜 복수 대명사인가?

나는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나 이해로는 미치지 못할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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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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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가 양태론 비판에 반박한 내용 모음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아래 내용은 위트니스 리 책자 <신약의 결론-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한국복음서원 발행) 중에서 발췌한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위트니스 리나 (지방)교회측이 양태론을 믿는 것으로 잘못 오해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명히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삼일(triune)이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27p- 

▶ 『신약은 우리 하나님이 삼일(triune)이심을 계시한다. 지난 여러 세기동안 삼일성에 관해 세 가지 주요 학설―삼위 양식설, 삼신론, 성경에 따른 순수한 계시―이 등장했다.
삼위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모두 영원한 것은 아니고 또 동시에 모두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가르치며, 단지 한 하나님의 세 가지 잠정적 나타남일 뿐이라고 말한다.
삼신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을 세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삼위 양식론과는 전혀 무관해야만 한다. 삼일성에 관한 그러한 극단적인 견해는 이단이다. 마찬가지로 세 하나님이 계시다고 가르치는 것도 역시 큰 이단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5-36p- 

▶ 『삼위 양식론은 하나 안의 셋의 극단적인 면이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 안의 셋에 대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삼위 양식론은 극단에 치우쳐서 성경의 제한을 뛰어 넘고 있으며 셋 안의 하나인 면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무효화하고 있다. 삼위 양식론은 하나의 면에 관한 성경의 한도를 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극단위에 있는 이단이다. 삼신론은 반대편의 극단 즉 셋의 극단이다.
삼신론은 셋의 면에 관한 성경의 한도를 넘어서 셋의 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의 면을 소홀히한다. 또한 그것도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분명히 셋이기 때문에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삼위 양식론처럼 삼신론도 성경의 한도를 뛰어넘어서 하나의 이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은 둘 다 극단적인 것으로서 이단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6p-  

▶ 『성경은 이 두 극단의 어느 편에도 있지 않다. 성경은 그 중간에 서 있으며 삼일성의 진리에 대한 양면성을 증거하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은 균형잡혀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균형의 원칙에 부합되는 성경은 균형잡혀 있으며 그 중간에 있다. 성경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삼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하여 우리도 역시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삼위 양식론과 삼신론이라는 이단적인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7p- 

▶ 『여러 해에 걸쳐서 나는 삼일 하나님에 관해 많은 메시지들을 전해 왔다. 만일 그 메시지들 안에 있는 어떤 문장들을 그 문맥으로부터 끄집어 낸다면, 내가 삼위 양식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또 어떤 문장들을 그 문맥으로부터 끄집어 낸다면, 마치 내가 삼신론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나는 삼위양식론도 삼신론도 가르치지 않는다.
』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7p-

▶ 『삼위 양식론의 오류는 무엇인가?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모두 영원하지는 않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삼위 양식론은 아버지께서 아들의 오심으로 끝났고 아들은 그 영의 오심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신격 안의 세 분이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서 각기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를 믿는다. 즉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께서 본질적으로 모두 동시에 같은 상태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그러나 신성한 경륜에 있어서 그 세 분은 연속적인 세 단계 안에서 제각기 역사하시며 존재하신다. 
그러나 그분들의 경륜적인 역사와 나타나심에 있어서조차도 여전히 그 셋은 본질에 있어서 동시 존재하며 상호내재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아들 안에서 그 영에 의해 택하셨다(엡 1:4, 벧전 1:2下). 아들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그 영으로써 구속을 이루셨다(요 8:29, 히 9:14). 그 영께서는 우리 안에서 아들로서(요 14:26, 고후 3:17) 아버지와 함께(요 15:26) 역사하신다. 그분들의 역사와 나타나심은 경륜적인 것이지만, 그분들의 동시존재와 상호내재는 영원한 것이다. 셋 모두 본질적으로 영원하다. 이사야 9장 6절은 아버지께서 영원하시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은 아들이 영원하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한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그분들의 존재하심과 존재에 있어서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8p- 

▶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구별된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영에게서 아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셋 모두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아들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분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분 안에 있다고 하셨다(10:38, 14:10-11).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는데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또 주 예수님은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0:30).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비록 구분이 되긴 해도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더 전진된 증거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구분이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셋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9-40p- 

▶ 『우리가 아버지, 아들, 영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어떤 소문들과 비난들이 있다. 나는 그런 비평가들과 비난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영이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며 선포한다.  아버지가 영원하심 이사야 9장 6절에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용어가 있다. 이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인 번역은 「영원의 아버지(Father of eternity)」혹은 「영원한 아버지(eternal Father)」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아들이 영원하심 아들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은 아들에 관하여,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7장 3절은, 「그분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이란 시작이나 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직선보다는 원이 영원한 하나님의 상징인 이유이다. 그분은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다. 
영이 영원하심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한 영」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라 우리는 셋―아버지, 아들, 영―모두가 영원하시다고 선포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3p-

▶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시며 양식(modes)으로 있는 것이 아님 
『아버지, 아들, 영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17절까지를 보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우리는 이 두 구절에서 아버지께 그 영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시는 아들을 갖는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그 영은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도록 그분의 영으로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 영, 아들 그리스도를 갖는다. 모두는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한동안 존재했으며 그 다음 아들이 왔으며 그 다음 얼마 후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 영으로 대체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성경의 이 구절은 아버지가 그 기도를 들으며, 그 영은 성도들을 강화시키며, 아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 속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진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혹은 교제가 언급된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2장 4절부터 6절까지는 은사(gifts)의 영, 행정(administrations)의 주, 역사(operations)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영, 주님, 하나님을 본다. 다시 한 번 그 영, 아들,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역사하신다는 것을 본다. 그 영은 은사들을 주시며, 주님은 행정하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역사(운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가 일찍이 존재하심을 그치고 아들이 그분을 대체하려고 오셨으며, 그 후 그 영이 아들을 대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어떤 비평가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요 그 영이라고 가르칠 때, 그는 신격의 세 위격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부인하고 삼위 양식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비평가들이 나에게, 아들이 서 있고, 그 영이 내려오며,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곳인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적어도 그들이 믿는 것만큼은 믿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버지, 아들, 영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완전히 믿는다. 나는 마태복음 3장 16절과 17절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계된 모든 구절들도 믿는다. 예를 들면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이 구절들에서 아버지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며, 그 영은 「일곱 영」이며, 아들은 「충성된 증인으로 많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에서 아버지, 영, 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그분의 승천 후, 오순절 후에도 존재하신다.
여러 개의 다른 구절들도 같은 것을 계시한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 영의 교통하심을 본다. 더욱이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까지는, 「내가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비노라... 너희를... 그분의 영으로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가운데 거처를 정하게 하옵시고」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삼위 양식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다. 삼위 양식설은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며, 아들의 계시는 승천과 함께 끝났다고 가르친다. 아버지, 아들, 영의 영원성은 삼위 양식설에 의해 부인되었다. 삼위 양식설은 이단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5-306p-

▶ 아버지, 아들, 영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 
『어떤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태복음 3장 16절부터 17절을 볼 때, 거기에 아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말씀하셨으며, 그 영은 아들위에 임했다. 셋이 모두 동시에 행동했다. 분명히 이러한데, 당신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답은, 우리가 우리를 비판하는 자들보다 더 많이 믿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순수한 말씀에 따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모든 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07p-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내재함이 모두 있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동시에 존재함은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서로 안에 거함은 정의하거나 이해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 용어가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안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성경은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가 그와 함께 왔음을 분명하게 계시한다. 이와같이 그 영이 왔을 때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왔다. 더욱이 아들이 왔을 때 아버지는 외적인 방법으로 아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내적이고 주관적으로 아들 안에 왔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 사이에 관계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특별한 헬라어 전치사, 즉 「-부터 함께(from with)」로 번역될 수 있는 전치사를 사용한다(6:46, 16:27). 
아들은 단지 아버지로부터 왔을 분 아니라 심지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또한 아버지와 함께 왔다. 
이것은 아들이 왔을 때 또한 아버지가 왔음을 가리킨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오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말씀하실 수 있었으며, 또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느니라」(요 14:10)고 증거하실 수 있었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10p- 

▶ 1.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그의 책 「그리스도의 영」2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예수께서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높여지셨을 때 그분은 주 그 영이 되셨다. 제자들은 주 영이신 그분을 모르는 채 오랫동안 예수를 알았었다. 주 영이신 그분에 대해서 전파하지 않고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인 주 예수에 대한 매우 열렬한 복음전파가 사역 안에 있을 수 있다. 
믿는이들 가운데서의 사역이 행함과 그 영의 안에서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 그 영으로 알며 인식함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믿는이들을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심으로 교회 안에서 생활하도록 하는 데 있다.」  
2. 헨리 알포드(신약 헬라어의 의미에 대한 권위자)
는 「영어 독자들을 위한 신약」 제2권 265페이지에서,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그 영이라고 말해진 것처럼(고후 3:17), 주님은 성령과 동일하다. 여기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다.」고 말한다.  
3. 빈센트(Marvin R. Vincent)
는 그의 「신약의 말씀 연구」제 3 권 308페이지에서,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보급시키고 활력화시키는 그 영이다.」라고 말한다.  
4. 제이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
는 그의 「영적인 성숙」에서 이렇게 말한다.(무디출판사, 144p). 「윌리암 바클레이의 주석 :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동일시한 것 같다. 우리는 바울이 신학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체험을 기술했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가 하나라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체험이다. 우리가 받는 능력과 빛과 인도는 성령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가 그것을 체험하는 한, 그에 대해 얼마나 강조하든 문제가 안된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편, 3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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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격 안에서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그분의 표현이시다. 아버지의 표현으로서 아들은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창시자, 기원자, 계획하신 분, 고안자이시며, 아들은 아버지께서 창시하시고, 기원하시고, 계획하시며, 고안하셨던 것을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표현이신 아들은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9p- 

▶ 『신약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함께하신다고 말할 뿐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가 상호 내재하심을 계시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시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존재하시며 아들은 아버지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33p- 

▶ 『삼일 하나님은 영원 과거에 그분의 신성한 계획 가운데서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 성육신되시고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영원한 구속을 이루기 위해(엡 1:7-9)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함을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은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 되도록 창세 전에, 즉 영원 과거(벧전 1:19-20)에 정해지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192p- 

▶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히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193p- 

▶ 『특별히 베드로 전서 2장 24절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나무 곧 십자가 위의 우리의 대속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00p- 

▶ 『구약에는 하나님의 맏아들로 태어나시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있다. 시편 2편 7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사무엘 하 7장 14절은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라고 예언한다. 히브리서 1장 5절은 이 구절들을 모두 인용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10p- 

▶ 『시편 22편 22절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실 뿐 아니라 회중에서 아버지를 찬송하실 것임을 예언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222p- 

▶ 『그분은 아들이실지라도 여전히 아버지를 표현했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530p- 

▶ 『그분의 인간 생활에서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들을 관심하셨다. 누가복음 2장 41절부터 51절까지는 열 두 살 때에 그분이 하나님의 유익을 관심하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531p- 

▶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자신의 뜻을 행치 않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그분은 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주 예수님이 그분의 땅에서의 사역에서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셨음을 분명히 가리킨다.』
-신약의 결론, 그리스도편, 5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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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구절에 있는 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는 삼중수이다. 만일 당신이 뉴베리 성경에 있는 표시를 참고한다면 여기의 「하나님」이 삼중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26p-

▶ 『이사야 6장 8절을 읽어보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한면으로는 나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한면으로는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나」가 「우리」이고 「우리」가 「나」라는 것을 가리킨다. 나와 우리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만일 당신이 복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나」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단수라고 말한다면 그분은 「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27p- 

▶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형식화된 사도신경은 사벨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위 양식론과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삼신론에 대한 반발이었다. 사벨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단지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남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위 양식론에는 성경적인 어떤 근거가 있으나, 이단적인 극단으로까지 너무 멀리 나아갔다. 
삼위 양식론자들은 하나의 면을 보았으나, 셋의 면에는 실수를 범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끝난 뒤에는 오직 성령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신격의 셋 가운데 있는 동존재와 상호 내재의 영원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것을 부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29-30p- 

▶ 『그러나 우리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또한 마태복음 3장 16-17절과 고린도 후서 13장 13절과 계시록 1장 4-5절과 에베소서 3장 14-17절과 같은 구절들도 믿는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31p- 

▶ 『성령은 존재성이 영원하실 뿐 아니라 거룩한 삼일성의 다른 두 위격과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이 두 구절에 구하는 아들과 보내시는 아버지와 오시는 성령이 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3장 14절부터 17절에서 바울은 아버지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시고 그리스도께
서 우리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도록 기도하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본다. 셋 모두는 동시에 존재하신다. 성경은 아버지가 계시다가 아들이 오시고 얼마 후에 아들은 더 이상 계시지 않고 성령으로 대치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 한 구절도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고린도 후서 13장 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있다. 동시에 셋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 양식론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가 아들로 대치되었고 아들이 성령으로 대치되었다고 하는 이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셋-아버지, 아들, 성령-이 모두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이상과 같은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성령이 단지 어떤 능력이나 도구만이 아닌, 경륜적으로는 거룩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번째 위격으로,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이시며, 시간적으로는 다른 두 위격과 같이 영원하시며 동시에 존재하는 분이심을 볼 수 있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71p- 

▶ 『계시록 1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뿐 아니라 심지어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도, 오순절 후에도 함께 계신다. 다른 많은 구절들이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영원토록,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시에 존재하신다.
-신약의 결론, 성령편, 73p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11. 05:00


동방번개 정체와 대응 전략세미나 개최

美 하지진 원장 "전능신교와 지방교회는 연관성이 없다" 밝혀


종교문제대책전략연구소(소장 심우영목사)가 ‘동방번개(전능신교) 정체와 대응전략 세미나’를 9월 11일 롯데시티호텔(구로점)에서 개최했다.

이날 동방번개에 대해 지속적으로 연구를 해온 美 아시아 리서치 연구센터 하지진 원장은 “전 세계적으로 동방번개에 대한 피해가 늘고 있다”고 전제한 후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동방번개에 대한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중국 가정교회를 넘어 이미 한국교회와 미국교회 등에 파고들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하 원장은 또 “타 사교 집단에 비해 동방번개에 대한 연구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실정이다”면서 “피해 사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고 덧붙였다.

하 원장은 특히 “한국교회에서 발간된 자료들을 보면 대부분 중국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 전부다”면서 “구체적인 연구도 없이 자료 대부분이 인용 정도의 수준으로 이로 인해 잘못된 오류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하 원장은 “동방번개가 사용하고 있는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이란 책자는 전능신교가 필요로 한 내용들을 무작위로 인용해 마치 관련성이 있는 것처럼 내포하고 있으나 실상은 무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면서 “이로 인해 인용된 관계자들과 교회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실정이다”고 덧붙였다.

하 원장은 “전능신교를 거절하면 폭력을 사용하여 구타하거나 납치하고 저주를 퍼부어 위협한다”면서 “동방번개에 가입하면 우선 보증서를 쓰게 하여 공포심을 조성하고 떠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가정과 자녀들을 버리게하여 파괴하고 헌금을 강요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동방번개에 대해 대만기독교회들은 성명서를 통해 “스스로 ‘전능신 교회’라는 단체의 그 언행이 성경의 근본적이며, 정통적이고 완전한 가르침과 다름으로 이 조직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국민들이 분별하여 그 잘 못된 시스템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그 조직이 가져다 주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표 한 바 있다.

하 원장은 끝으로 “성경을 분별할 줄 알면 이단 사이비 및 사교 집단들을 대처할 수 있다”면서 “동방번개 지속적인 교세 확장에 대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심우영 소장은 ‘한국교회 이단 사이비 집단과 동방번개와의 비교 대책 전력’에 대해 발표했다.

심우영 소장은 “우선적으로 동방번개에 대해 연구가들이 세세하게 직접 연구해 발표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사교집단의 특징은 전투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는 것이 특징이고 방해가 되는 것은 폭력 등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심 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연구가들은 다른 사람이 연구한 자료를 공유하거나 외국의 자료를 번역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다반사다”면서 “이들은 우선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은 것에 중점을 두고 시작을 해 다른 사람의 자료를 짜깁기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발표하거나 책을 출판한다”고 덧붙였다.

심 소장은 “한국에서는 안마 침술 등으로 유혹하고 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들과 주부들이 빠져들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가정교회 목회자는 “납치와 폭력은 동방번개에서는 흔한 일이다”면서 “문제는 한번 빠져들면 나오기가 정말 힘들기 때문에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에는 피해자 대책 모임이 있고, 공안에는 피해자 신고처가 따로 있을 정도다. 가족 해체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번에 강사로 등단한 미국 하지진 원장은 동방번개에 대해 15년간 중국 현장을 방문해 그간 연구 조사해 왔다.

지난해 9월에는 중국 정주에서 2년간 현지에서 연구한 동방번개에 관한 논문을 홍콩대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바 있다.

하 원장은 끝으로 지방교회와의 동방번개와의 연관성에 대한 기자들의 질의에“중국에는 호함파라는 이단이 있다. 모든 이단은 교주가 있어야 한다. 중국 정부가 문화혁명 때 삼자교회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호함파라고 누명을 씌우고 우두머리가 위트니스 리라고 했다. 여러 사람들이 위트리스 리를 호함파로 같이 본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2017년이 돼서야 이 같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호함파 교주는 위트니스 리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뺐다.”고 설명 했다.

한편 연구소는 정기적으로 이단 사이비 사교 집단에 대한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열 방침이며, 관련 책자들을 발간해 한국교회에 알릴 방침이다.

발췌 : 통합기독공보
http://lawnchurch.com/sub_read.html?uid=6716&section=&sect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