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30. 05:00

한국 기독교계의 취약 분야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외견상 한국 기독교계의 취약 분야로 보이는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분야에 대한 주목할만한 책이 있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제목은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이며 여수룬 출판사가 1991년에 초판을 발행했군요. 저자는 미국 플러신학교 루이스 B.스미디즈 교수이며, 옮긴이는 총신대와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개혁신학원 강사로 있는 오광만님입니다.

저자는 기독론에 있어 '성례주의적 기독론'과 '계약적 기독론'이 있다고 소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점(이것이 곧 성경의 가르침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이 성경엔 수도 없이 나오는데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말할 때 '인격'(Person)을 과도하게 강조할 때의 위험성(삼신론 이단사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지방)교회측과 전 예장통합측 사이비이단 문제 상담소장인 최삼경 목사님과의 3년간의 지상토론 쟁점과 상당부분이 유사합니다. 저자나 옮긴이가 (지방)교회측과 무관한 분들이고 오히려 장로교 배경을 가진 분들이므로 객관적인 자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측의 진리는 위 책에서 소개된 바울의 가르침(곧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며, '성례주의적 기독론'과 유사합니다. 제가 '유사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지방)교회측이 그러한 신학을 공부한 후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기독론'을 그대로 말한 것인데 결과가 유사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일부 목회자나 신학자의 관점이 토대가 되어 "이단"과 "정통"을 결정짓는 현재의 한국교계의 풍토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빛과 성경의 권위만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대해 주장하려면, 반드시 성경의 근거와 기초를 가져야 합니다(벧 4:11상).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양심 안에서 인정되면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러한 실행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마7: 24-27).  위 책에 대한 "입맛을 돋우기 위해" 삼위일체의 "인격(Person)"이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권면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인격체(Person)"라는 단어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심리학적으로 형성된 인격체들에 대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만일 어떤 한 인간이 하나의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독자적인 고유권한을 지닌 인격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고방식(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령은 한 인격체로서 체험되고 알려지며 영광을 받으신다.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로서 알려지고 체험된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분리'된 인격체로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인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위 책 87쪽)".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것이 "정통"이고,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셋이 서로 안에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이단시(?)"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진리왜곡을 주님은 반드시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에서 세 하나님들을 믿는 것은 가장 심각한 이단사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8. 29. 05:00

진리의 변호와 확증(2)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요즈음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이단적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기 원한다.

이 메시지는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선언하려는 것일 뿐 아니라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도와 모든 이들이 삼일 하나님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믿는 것이 성경을 따른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관한 이 문제는 2세기로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커다란 논란과 격심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지난 십 팔구 세기 동안 이 논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것은 대적이 성도들 간의 화합을 파괴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끊임없는 논쟁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전통적인 용어와 말과 교훈들로부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와야 한다.

‘삼위일체’와 같은 이런 비밀에 관한 논쟁은 끝이 없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이러한 덫을 피하라.

이 메시지에서 나의 부담은 이 비밀에 관하여 순수한 말씀으로 여러분과 교통하는 것이다.

Ⅰ.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는 계시에 통제받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 언급되는 하나님(엘로힘 : Elohim)이라는 단어가 복수이기 때문에(창 1:1), 어떤이들은 그 단어를 ‘하나님들’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하나님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끔찍한 것이다.

시편 86편 10절은 ‘당신만 (홀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지, ‘당신들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 대명사는 이인칭 복수가 아니라 이인칭 단수이다.

이 구절의 엘로힘(Elohim)은 히브리어로 삼중수(三重數)이다.

만일 여러분이 뉴베리(Newberry) 성경의 표를 참조한다면, 여기서의 하나님은 삼중수라는 표시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86편 10절은 ‘당신만 (홀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다.

이 ‘홀로’라는 단어가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야 한다.

‘당신만 홀로 하나님(하나님들이 아닌)이십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서 자신을 ’우리‘라 지칭하시고 ’우리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가 아니면 한 분 이상이신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자신을 지칭하실 때 ’우리‘와 ’우리의‘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나의 대답은 그분은 ‘삼일 하나님’이시오 ‘삼위일체’는 비밀이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삼위일체’를 철저히 이해하고 충분히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수학이나 화학의 영역에서 사물은 사람의 지성에 의해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이런 것은 과학이지 비밀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총명한 생각을 사용하여 삼일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그분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누구도 삼위일체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비밀로 남아 있다.

왜냐고 묻지 말라.

나는 왜 그런지를 모른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것뿐이다.

다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취하라.

신.구약 모두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한다.

이사야서 45장 5절은, “나는 여호와라 ...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여기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은 삼중수(三重數)로 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우리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6절과 디모데전서 2장 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분명한 결론을 본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세 하나님으로 여기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

고린도전서 8장 4절은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한다.

한 하나님을 인하여 찬양한다!

이것이 기본적이고도 결론적인 원칙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고 믿는가?

이것은 단지 우리의 해석인가?

우리는 모두 ‘나는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변호와 확증
워치만 니, 한국복음서원, 위트니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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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 삼일 하나님, 삼위일체, 아버지, 아들, 성령,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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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8. 08:00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분별함 - (1)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이 글은 항간에 떠도는 '거듭난 사람 안에는 성령만 계시고 아버지와 아들 자신은 안 계신다' 또는 '예수님은 구겨지지 않는 한 사람 안에 계실 수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성경으로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8:10 본문과 이 구절을 해석하는 신뢰할 만한 신학자들의 글을 통해 다만 성령님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 하나님 전체>가 거듭난 우리 안에 계심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자신"도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0절 :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  

위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제한 사도 바울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평이하고 간단한 성경본문이 어떤 분들에게는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삼위 하나님 중 오직 성령님만 사람 안에 계실 수 있다'라는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이런 관념을 가진 분들은 위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이라는 로마서 8:10 본문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면' 또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면'이라고 해석하여 읽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안 계신다> 라는 자의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이런 특정교리가 가미된 채 성경을 읽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지적 사고과정이 성경본문 내용과 정 반대의 이해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상은 다음 이유로 비 성경적이며, 심지어 성령님이 계신 곳에 아버지, 아들은 없다며 삼위일체의 삼위를 각각 분리시킴으로 이단적입니다. 이런 분들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빌3:8)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과는 전혀 다른 곁 길로 가다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의 불에 다 태워질 나무와 풀과 짚만 만들어 낼 것입니다(고전3:12-15).  

1)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를 말하는 성경본문들과 상반됩니다.  

** 고후13:5 :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 골1:27-28 :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 골3:4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 요일5:12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 하심'에 대한 성경근거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위 구절만으로도 우리의 생명 되신 아들하나님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거치신 후 거듭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2) 로마서 전체문맥과 8장 10절 본문이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Christ...in you)라는 위 성경본문은 로마서 전체의 핵심내용입니다. 즉 로마서 3장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시도록 십자가 위에 계심을 말하고, 4장은 그분이 부활 안에 계심을, 6장은 우리가 그분 안에 계심을, 8장은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 그 영(The Spirit)으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롬8:10 에서 바울이 '그 영'(the Spirit)을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Christ)를 말한 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영이시며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실(fact)에 따르면 그분은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체험(experience)에 따르면 그분은 그 영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분을 체험함에 있어서는 그분은 그 영이시며,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부르고, 그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지만, 그분은 그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러면 당신들은 2격 아들하나님이 3격 성령님이라는 식의 위격 간의 혼동(양태론)을 주장을 하는 것이냐?' 하는 의혹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롬8:10의 '그 영이신 그리스도'는 바로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이십니다. 또한 이 <생명 주는 영>은 문맥을 볼 때 <부활하신 아들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부활 전에는 육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즉 이 분은 다만 2격만이 아니라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골2:9)임으로 그 안에 아버지와 성령님도 구별되나 분리됨 없이 상호내재 하시는 '온전한 하나님'(complete God)이십니다. 또한 이 생명 주는 영은 주님 부활시 그분의 인성을 벗어버렸다고 이단적으로 믿지 않는 한, 빌립보서 3:21이 말하는 '영화롭게 된 몸'을 포함한 영이십니다.

3) 신뢰할 만한 신학자들도 롬8:10 주석에서 그리스도 자신을 포함한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가 우리 안에 계심을 말합니다. 

 우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강의하는 권성수 교수님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로마서 강해I - 권성수 교수

'(롬8:10 주석에서)...그리고 성령이 거하신다는 말은 바꾸면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요한 복음 14:23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가 우리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권성수, 로마서 강해I(롬1-8장),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8, 405쪽). 다음은 요한 크리소스톰(347-407)의 견해입니다. '(롬8:10 해석)...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로마서강해 - 요한 크리소스톰

곳에는 그리스도 또한 있다는 뜻도 됩니다. 삼위의 한 위가 있는 곳에 삼위 전체가 있게 됩니다. 삼위는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이 전체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가진 것이며 천사와 함께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속에 살게 됩니다.'(요한 크리소스톰, 로마서 강해, 송종섭(총신대 졸업) 번역, 지평서원, 1990, 272쪽). 

 위와 같은 성경본문들과 신학자들의 주장을 볼 때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안 계시다>는 항간의 주장은 명백히 비 성경적이며 매우 위험한 이단사상임이 밝혀졌습니다.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구별되나 분리됨 없이 상호내주 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무책임하게 말하는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안 계신다'는 거짓교리를 냉철하게 분별하고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8. 27. 05:00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서 언

이 책은 십 오 년 전에 위트니스 리가 쓴 두 소책자의 재판(再版)이다.

이 소책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일부 사람들이 비평한 것에 반응하여 출판되었었다.

첫번째 소책자인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1976년에 나왔다.

그것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성경적 입장을 서술한 것이다.

그의 서술에서 위트니스 리는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를 포함한 여러 훌륭한 저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두번째 소책자인 '어떠한 이단인가 -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 주는 영, 세 하나님'은 그 다음 해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취했던 이단적인 입장에 도전했고, 그들이 성경을 왜곡했음을 폭로하렸다.

'신흥 이단들'의 저자들은 이 소책자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여 뒤이어 나온 출판물들에도 같은 비난의 내용을 실었다.

그들 출판물 중 다수가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와 그밖에 다른 경로를 통해 지금까지 여전히 유통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위트니스 리가 쓴 이러한 분명한 글들을 재출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 연구소의 이름으로 쓰여진 저술이 저자의 명백한 말을 부인하려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소책자들은 비평하는 사람들의 비난에 대한 분명한 반박이 되며, 그 출판물들의 진리를 무분별하게 경시하는 것을 강력히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스스로 진리를 확인하려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번째 소책자에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 자체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삼일 하나님에 대한 균형 잡힌 성경적 정의를 제공했다.

그런 다음 그는 논쟁의 실지 요점, 즉 삼일 하나님의 셋 모두가 하나임을 인정했다.

윌터 마틴(Walter Marthin)이라는 비난자는 전통적인 이해로 막혀 이것을 '삼위일체 위격들의 혼동'이러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를 스스로 알 수 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유전(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가 똑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기 바란다.

  두번째 소책자에서 위트니스 리 형제는 전통적인 이해로 성경을 짜맞추려다가 야기된 문제점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삼위일체의 셋의 성경적인 하나를 부인하는 것은 여러 이단들을 산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위트니스 리는 이사야 9장 6절,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성경의 핵심 구절들을 상세하게 검증했다.

그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들을 왜곡했음을 폭로했고, 그들의 이단적인 결과들에 대해 고소했다.

그는 담대하게 도전장을 내면서, '그들이 이 고소에 대해 어떻게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기다려 보자'고 했다.

칼베이스너(Cal Beisner)라는 또 다른 비난자는 고린도후서 3장 17절 이후의 일곱 구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한다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의 '주'는 예수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 구절의 분명한 내용을 부인하려고 했다.

지금까지 비난자들 중에 위트니스 리의 이단 고소에 대해 그들 자신을 변명하기 위하여 설득력 잇는 반박을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소책자의 또 다른 강조점은, 하나님이 삼일이시지만, 그것은 단지 교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그분을 체험할 수 있기 위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 있다.

위트니스 리 형제는, '우리의 제한된 사고력에 따른 교리적인 문제로는 삼일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을 위하여 계시는데, 즉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도록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로 첫번째 소책자를 결론지었다.

이 진리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전통에 묶인 이해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주님께서 이 소책자를 모든 독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이 글을 사용하시기 바란다.


1994년 2월
캘리포니아 아나하임
Dan Tow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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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4. 05:00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마태복음 1장 1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요 1:14)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많은 분들에게 성육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크리스마스일 것입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구주가 나신 날, 공휴일 그리고 선물 주고받는 날... 그러나 이것이 전부이면 곤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 이면에는 더 깊고 비밀스런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을 점점 더 알아 갈수록 성육신을 통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계획을 더 깊이 감상하며 그분을 경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처녀 마리아와 성령님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십니다. 그분은 성령으로부터 '온전한 신성'을 처녀 마리아로부터 '완전한 인성'을 취하신 '온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complete God perfect Man)이십니다. 인류역사상 이런 존재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비밀스런 성육신을 통해, 

신학교리도표-웨인하우스

1. 자신이 입으신 육신 안에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모셔와 '신성과 인성의 기묘한 연합'을 이루셨습니다(웨인 하우스, 신학교리도표, 생명의 말씀사, 1995년, 59-62쪽 참조).  

2. '그분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의 장소인 속죄소(힐라스테리언) (롬 3:25 원문)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 사람'이시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단 사상이 나타났습니다. 

1) 예수님은 '진짜육신'이 아니라는 이단(인성부인, 가현설). 

2) 예수님은 사람의 영은 없고 몸과 혼만 사람과 같다는 이단(완전한 인성부인) 

3) 예수님은 사람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니라는 이단(신성부인, 여호와의 증인들) 

4) 아들 하나님(2격)만 육신을 입었음으로, 아버지는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안 계신다는 이단 (완전한 신성부인(삼신론) 특히 이러한 유형은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신 아들과 '분리'되어 하늘 저 멀리에만 계신다고 믿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입니다. 이러한 이단사상은 구원론, 내세론에 가서도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상 많은 희생을 치르고 세워진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위(아버지, 아들, 성령)의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하시고(coexisting), 서로 안에 계시며(coinherence),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으신다(distinguish not separated)는 것입니다. 

성경도 육신 입은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고 여러 차례 말씀(요 14:10-11, 20, 8:16,29)하심으로 이러한 신학을 뒷받침합니다. 즉 1/3하나님만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 즉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를 입으신 것입니다(골 2:9, 딤전 3:16, KJV). 성경은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안에 계시고, 아버지도 땅위의 아들 안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하늘 보좌에 계신다고 말합니다(요 1:18 동사시제를 주목, 요 14:10, 마 6:9). 우리는 심오한 진리인 삼위일체를 다룰 때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무리하게 체계화 할때 이단사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늘 상호 내재하시는 아버지와 성령님과도 서로 안에 계시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의 영(요 11:33), 사람의 혼(마 26:38), 사람의 몸(요 19:34)을 가지신 '완전한 사람' 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고, 성경이 계시하는 정통 기독론입니다. 그분은 택한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시려고 보좌로부터 이 땅까지 흘러오신 것입니다(요 10:10, 4:10, 14).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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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골2:2), 삼위는 각 고유성을 가지고 구별되나 상호내재 하심으로 결코 분리되실 수 없으며, 신약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God)(요4:24) 이셨지만, 성육신 후로는 하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신성'의 면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전제하에, '맏아들'에 관련된 핵심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느 날 입으신 '육신'과 이 '인성'이 부활시점에서 어떤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몇 차례에 걸쳐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의한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롬5:10). 또한 앞으로의 글들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시점'에서의 '인성방면'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도행전 13장 33절의 '오늘'은 성육신이 아닌 '부활시점'입니다. 

행13:33은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시편 2:7의 인용이며 같은 내용이 히1:5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제는 '오늘'(This day)이 '성육신' 시점인지 아니면 '부활'시점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만일 위 날이 성육신의 때를 말한다면 새로울 것이 없지만, 부활의 날을 가리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번의 출생이 있다는 말이 되며 나중의 출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을 성육신의 때로 보시지만 전체문맥을 보면 이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박만수 외, 증거, 도서출판 안티오크, 1993, 170쪽). 오히려 '오늘'을 '부활 시점'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사도행전 13장 이후는 사도 바울 일행의 이방 땅의 사역을 다루는데, 사도 바울은 행13:13-43에서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33절의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he had raised up Jesusagain)는 말씀은 '오늘'이 '부활시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조지 레드


저명한 신약학자인 조지 레드도 그가 쓴 '부활론'에서 다음과 같이 위의 해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사건을 시편 2편의 성취로 보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50쪽).
 


(2)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또 하나의 출생'으로 말합니다. 즉 그분은 첫 출생인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셨고 두 번째 출생인 부활 안에 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 주님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매우 많이 강조하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독생자(삼위의 제2격)의 방면과 많은 형제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방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생한'(only begotten)이란 말은 하나님이 유일한 한 아들만 가지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요1:18, 3:16). 신격의 두 번째이신 아들 하나님(신성)은 그분의 영원한 신분이며 사람은 누구도 이러한 신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에게 둘째, 셋째, 또는 많은 아들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즉 독생자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맏아들'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롬8:29, 히1:6). 이것은 앞서 본 '독생자'의 방면이 아니라, '신성'과 부활시점에서 높이 올려진(uplifted)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롬1:4)를 가리키는 것-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하늘에 있습니다(롬6:6, 엡2:5-6). 그러므로 주님은 히브리 서에서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많은 아들들)이 다 하나(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히2:11).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서로 '형제 자매'라고 한다며 비판하는 어떤 분들과는 크게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습니다(요12:24, 벧전1:3). 또한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은 가지지 못하지만 주님의 몸으로서 맏아들이신 주님과 동일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한 새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엡2:15). 

즉 맏아들이신 주님은 [경배 받는 '신격']과 '신성'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인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아니나- 이것은 독생자의 고유권한이심] '신성한 생명과 본성' 그리고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요1:12, 벧전1:4,.롬12:2, 빌3:21). 존귀한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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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요1:18)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 하나님이시라면, 많은 형제들이 있는 '맏아들'(the first-born, 롬8:29)은 '신성'과 '높이 올려진 (인정되신) 인성'(롬1:4)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한국교계에서는 이러한 깊은 성경 진리가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꼼꼼히 듣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부활 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면, 그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는 아니라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이후 부활, 승천, 재림 심지어 영원토록 '인자'(사람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주님이 부활 후에도 뼈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눅24:39), 승천 후에도 스데반에게 인자로서 보이셨으며(행7:56), 재림 시에도 인자로서 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6:64). 이뿐 아니라 주님은 영원토록 인자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실 것입니다(요1:51).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비오면 걸치고 날이 개면 벗어버리는 레인코트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은 부활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은 아니라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성육신 이후 영원토록 '하나님-사람'(God-Man)이십니다.

(2).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높이 올려졌다 또는 인정되었다'면 예수님의 고유한 인성이 파괴되어 제 3의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사실은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이 이렇게 저희들을 오해하였습니다. 즉 지방교회측이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나실 때부터 승천 시까지 참하나님이시요 참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말한 '인성의 변화' 또는 '인성의 높이 올려지심'(uplifted)은 예수님의 '육의 몸'이 부활 후에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제 3의 어떤 물질로 변질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고 한 비판입니다(고전15:42-44).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

이 점은 쌍방의 공개 토론시 충분히 설명 또는 반박되었다고 믿습니다(누가이단인가, 118-121, 252쪽 참조). 롬1:4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길 원하시는 분은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른 책자인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WL, 한국복음서원, 1996년, 245쪽 분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첫 열매로서 입으신 영광의 몸의 형체를 낮은 몸을 가진 우리도 장차 똑같이 입을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우리 참된 믿는 이들이 가지는 영광스런 소망 중 하나인 것입니다(빌3:21, 고전15:49, 히2:10). 장로교 신약학자 조지 래드도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세상 끝 날의 성도들의 부활체와 동등한 서열에 있다. 예수님과 성도들은 한결같이 '영적인 몸', '영광의 몸'을 소유한다. 이 사실은 빌립보서 3장 21절에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진술되어 있다'(죠오지 래드, 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55-156쪽).

사실 부활 전 후의 '예수님의 인성'에 어떤 비밀스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부활 이후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셨던 주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20:19, 26, 눅24: 31, 막16:12). 장로교 신학자인 조지 래드는 이러한 비밀스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부활의 순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답은 예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위 책, 126쪽).

(3). 주님은 부활 이후에도 고유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되, 인성은 '비밀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성수를 위해 몸만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에겐 이런 교제가 골치 아프실 것입니다. 그냥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으면 되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느냐고 나무라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둑세계에도 다양한 급수가 있고, 영어를 배워도 초, 중, 고급반이 있듯이, 성경진리에 대한 인식 정도도 성도들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제를 통해 빛 비춤 받고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는 분은 주님을 깊이 있게 추구하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 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인 58개 구절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부활 전후의 '인성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15:42-49, 52).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위 내용들이 우리가 부활시 체험할 것 일뿐 아니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가 본으로 먼저 체험하신 것임은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고전15:23).

본질적으로 영이신 삼위 하나님(요4:24)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후, 그 육신조차도 부활시 영화롭게되어 조지 래드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세계]로 높여진 분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맏아들'(롬8:29)이십니다. 이 분이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지금은 몸된 교회생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인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고전15:45, 요일5:11-12, 갈4:19, 롬8:30). 오! 이 어떤 구원인지요(롬5:10, 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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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의 요 7:39는 난해구절중 하나입니다 :

'이는 믿는 자의 받을 '그 영'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원문에는 없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But He said this concerning the Spirit, whom the ones believing into Him was about to receive ; for Holy Spirit was not yet, because that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위 영어본문은 핸드릭슨사에서 출판한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1987년판)의 본문이며, 영어 KJV는 원문에 없는 'given'을 넣었음으로 인용치 않았습니다.

위 구절에서 '믿는 이가 받을 그 영'이 아직 없는 이유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라는 본문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보겠지만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신 그 영'(The Spirit)이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된 시점인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 영'의 존재시기와 그 영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시기는 '부활시점'입니다.

원래 아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 안에 계셨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셨지만 이 영광은 입으신 육신 안에 가려져 있었습니다(요17:24, 1:18). 그러나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실 때 영광을 감싸고 있던 그분의 인성이 비로소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눅24:26, 요12:16). 주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와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함께 말씀하셨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요12:23-24).

이처럼 영광은 빛이신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인 것입니다(요일1:5, 계21:23).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WL, 한국복음서원, 1996, 118쪽 분량)라는 책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삼위의 제 3격 성령님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이미 계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육신 하신 아들을 성령과 분리된 분으로 아시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분리된 분으로 아십니다. 즉 성령을 먼저 등장하셨던 아버지와 아들은 저 하늘에 남겨둔 채 홀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보는 잘못된 신관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구별되시되 결코 분리됨 없이 언제나 서로 안에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간의 상호내재는 영원 전부터,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 아니 영원토록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시킬 자도 없습니다(요14:10, 20, 요일1:3, 2:22-24).

한 장로교 신학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제3위 성령님이 이미 내재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성령론 평가

'성육신과 성령에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의) 육신 안에 성령께서 영원토록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육신 안에 충만히 거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이며... 여기서의 강조점은 날 때부터 성령으로 태어나셨음을 강조한다. 또 성령의 충만 정도가 아니라 성령자체를 소유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육신은 함께 생을 산다(이순태, 현대성령론 평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25쪽).

3.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과 인성 둘 다 소유하신 '그 영'은 부활 후에만 계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7:39의 '그 영'은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 또는 롬8:2의 '생명의 영'과 동의어로서 '맏아들' 즉 부활 후의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이런 말을 언뜻 들으면 삼위의 제2격과 제 3격이 동일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가 분리할 수 없으나 엄격히 구별되듯이, '그 영'(아버지, 아들, 성령 + 높여진 인성) 안에서도 삼위는 분리할 수는 없으나 엄연히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엔듀류머레이

요7:39와 같은 심오한 진리는 한국교계에서는 낯설지 모르지만 국외의 일부 장로교 학자들 중에는 이 부분의 진리를 보신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화란 개혁신학 배경을 가진 경건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자에서 요7:39의 '그 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인간을 죄와 저주에서 구원하심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 새로운 거룩한 인성(humanity)을 완성하심으로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생명을 (성도들이) 전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부활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성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성도들 안에) 임하실 수 있었다'(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42-42쪽).

따라서 요7:39의 '그 영'은 삼위의 제3격만이 아니며,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님)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생명 주는 영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놀라운 분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셔서 우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요3:6).또 다른 장로교 신학자인 루이스 B. 스미디즈도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은,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질 수 있'는 기독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여수룬, 1991, 26-27쪽).

PS: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고전15:45를 연구할 때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끝으로 The Spirit, The Holy Spirit, Spirit 등을 모두 삼위 제 3격만을 의미하는'성령'으로 번역하는 것은 혼돈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22:17은 제 3격 만을 의미하는 '[성령]과 신부'가 아니라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높여진 예수의 인성을 가지신 [그 영]과 신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도 the Holy Spirit이 아니라 The Spiri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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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6회에 걸쳐 '맏아들'(롬8:29)에 대해 교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극히 성경적이지만, 한국교계 내에서는 생소한 부분이 있으며, 더구나 앞으로 '기독론'과 '성령론'이 겹쳐지면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다음은 풀러신학교의 루이스 스미디즈 교수가 쓰고 총신대학과 웨스터민스터에서 공부한 오광만 님이 번역한 'UNION WITH CHRIST'(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 1991년판) 내용 중 '기독론들'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해당되는 것들을 요약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점에서 본 기독론(위 책 제1장)

첫째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십자가와 부활은 당연히 불순종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적인 일을 성취했지만, 이것은 지엽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이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 지는 것'에 강조 점을 둡니다.

즉 기독론의 중점을 예수님 생애의 역사적인'행위들'에 두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된 '존재'에 두는 관점입니다(위 책, 22-29쪽).

둘째는 계약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성부와 성자간의 계약에 의해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사건)을 매우 강조합니다(위 책, 29-36쪽).

셋째는 상황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되, 그 강조 점을 이러한 죽음이 악의 세력들을 처리함(골2:15)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적 상황(situation)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데 두고 있습니다(위 책, 36-50쪽).

대략적으로 동방정교회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을 취한다면, 한국 교계 대다수 성도들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장로교단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다음 글들은 그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되 '성례적 기독론'의 관점을 포함하며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인성 안으로 주입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밖에 남아 계신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이 받으신 모든 고난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사역들은 무익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Institutes II. xvii. 1)'(위 책, 29-30쪽).

2.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두 가지 관점(제 2장)

첫째는 '증발된(pneumatic?)그리스도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위 책 저자는 이 범주에서 빌헬름 부세트와 아돌프 다이스만의 관점을 소개했는데 핵심은 부활 전의 '예수'가 부활 후의 '주(영)'임으로, 그리스도 주와 영을 '동일'(고후3:17)하게 보는 관점입니다(위 책, 53-57쪽).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칼빈은 그의 '에베소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셨지만,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고 말합니다. 즉 이 이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 즉 예수님의 '대리인' 일뿐입니다(위 책 57-61쪽).

그런데 위 책 저자인 루이스 스미디즈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사도 바울의 관점- 성경적 관점-을 자세히 고찰한 후, '성령(그 영)은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위 책 61-88쪽). 물론 저자는 이러한 총론에 해당되는 글에 이어서 그의 책의 후반부 전체인 약 180쪽을 할애하여 자신의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 결론적인 몇 줄만 읽고 성급하게 '양태론자' 라고 공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이런 혼란은 앞서의 지적처럼 '그 영'을 아버지와 아들은 제외된 '제3격 하나님만'으로 볼 때 생깁니다).

스미디즈 박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C.H. Dodd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분은 James Dunn의 '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 giving Spirit'(B. Lindars & S.S. Smalley편집, Christ and the Spirit in the New Testament(Cambridge, 1973)과 'Jesus and the Spirit(philadel phia, 1975)를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 내의 성령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하자면, 지상에서 그의 몸의 생활의 확장을 얻으신 셈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NewYork, 2nd ed., 1954), p62). (위 책, 86쪽).

지금까지 본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민감한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이 주도해 온 한국교계는 위 이론들 중에서 '계약적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대리로서의 성령론'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정통'이고 다른 것은 '이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강조하고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생명을 소홀히 하는 이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 같은 개혁신학자인 J.H. Bavinck가 지적한 '개혁교회의 영적 결핍'의 중요한 원인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성령론, 경향문화사, 1994, 61쪽).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서 '영적 성숙'(서신서)과 '익은 열매'(계시록)를 산출하시는 분은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부활생명'으로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생명 주는 영'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8

어떤 분들은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 책만 보게 하고, 다른 서적은 일체 못 보게 통제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희들의 신학계간지 '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의 글들을 쓰기 위해 인용한 '참고 목록들'을 훑어보시면 그 말이 거짓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히려 지방교회가 개혁신학을 포함한 기독교계의 여타 신학들의 실상을 깊숙이 알고 있더라고 소문 내시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똑똑한 머리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평범한 비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1) 하나이며 셋이신 하나님(창1:1, 마28:19, 사45:15, 요14:11). 2)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요1:14, 갈4:4). 3) '예수님'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고전15:45). 4) 승천 후 예수님이 하늘과 성도들 안에 동시에 계신 것(히7:25-26, 고후13:5, 롬8:10). 5) 예수님이 믿는 사람들과 결혼하시는 것(고후11:2, 계21:2, 9-10)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진리들을 참되게 아시려면 사도 바울 처럼 겸손히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나아가 이런 영적 실제들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엡1:16-18상, 3:14-15). 이러한 심정으로 이제 '경륜적인 방면의 하나님'과 '고전15:45'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에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너무 무시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변치 않고, 엄격하게 구별되며, 상호 내재하여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한 분이십니다(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하나님의 위격이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개혁신학의 뿌리인 아우구스티누스나 터툴리안의 가르침과도 다른 무지한 '이단 가르침'입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 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을 참조)).

이러한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케 하고 나타난 모양도 같게 할 경륜(계획)을 수행하셔야 만 했습니다(엡3:2-11, 요10:10하, 벧후1:4, 요일3:2). 이것을 계획(아버지), 성취(아들), 적용(그 영)하시는 일을 위해 삼위 하나님이 거치신 긴 과정들을 가리켜 학자들은 '경륜적인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이종성, 위 책, 257, 261쪽).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지방교회측이 '하나님이 육신 입어 하나님-사람'이 되셨고(요1:14), 이 '하나님-사람이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고전15:45)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전능성을 위배한 이단사상이라고 공격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안 되셨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안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적 사실조차 정면 부인하는 끔찍한 이단사상] 이면에는 예수님의 행적을 '사건중심'으로만 이해해 온 신학사조가 잠재의식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성육신이 한 번 해본 '사건'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의 경륜 방면에서 엄청 난 '존재의 변화'입니까? 이 비밀을 영 안에서 참되게 본다면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성육신의 엄청난 경이'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입니다.

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딤전3:16)!!

2.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십니다. 

고전 15:45 하반 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아담'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구별되나 '결코'(never) 분리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인성)을 입으신 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자신인데,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신령한 몸(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신 것뿐입니다(고전15:44, 빌3:21). 이러한 '되심'(became, was made)의 시점은 예수님의 부활시점입니다(눅24:26, 행3:13).

어떤 번역본은 원문(조오포이에오 #2227)를 '[살려주는]' 영이라고도 하나 다른 용례와 번역본들을 참고할 때 '[생명 주는] 영'이 더 무난합니다. 그러나 '살려주는'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요6:63, 5:21, 롬8:2, 11, 고후3:6).

즉 성육신 안에서 예수님은 구속(redemption)을 위해 육신이 되셨다면(요1:14, 29),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입(the imparting of life)을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 뿐 아니라(고전15:3),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10:10하, 5:40). 따라서 한국교회들이 설교나 복음전파 시 '죄사함' 만 강조하고 '생명' 방면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롬5:10 원문참조).

3. 개핀 교수님과 차영배 박사님의 토론이 말해주는 것

'성령론-구원론 부교재'(차영배, 도서출판: 경향문화사, 1994)에 소개된 고전15:45에 대한 위 두 분의 서면 토론내용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존경받는 개혁신학자이며, 차 박사님은 직접 국내신학교 교수로서, R. B. Gaffin 박사님은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자신에게 배우고 귀국하여 국내 신학교 교수가 된 제자들을 통해 한국 교계 내 신학이론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위 책에 소개 된 개핀 박사님의 고전15:45에 대한 입장은 '본문 내용이 삼위 상호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 경륜적, 기능적 관점이라는 전제아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선물은 높아지신 그리스도 자신, 곧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는 생명을 주는 (성)영이며,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일치한다'고 합니다(위 책, 49쪽). 이에 대해 차 박사님은 '고전15:45의 살려주는 영'은 뼈와 살이 없는 성령을 가리킨 말이 아님으로 성령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함은 위격을 혼동할 위험이 크고, 양태론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반박합니다(54쪽).

이에 대해 개핀 교수님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본체론적', 위격적 혼동 없이 '기능적'으로 단일이라는 것(functional oneness)이다'고 재차 반박했습니다(63-64쪽).

위 토론을 평가하자면,

첫째, '생명주는 영= 단순한 제3격만의 성령'은 물론 아닙니다. 고전15:45 본문 자체가 이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둘째, 개핀 박사님은 위 내용을 경륜적 관점에서 서술했다면, 차 박사님은 이것을 본질적 관점에서 '양태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차 교수님은 개핀 교수의 '본체론적 혼동 없이' 라는 단서를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성육신 안에서도 예수님 인성 안에서 위격 혼돈 없이 상호내재 했던 아들과 성령이 부활 후라고 해서 위격 혼동을 가져올 일이 없습니다.

셋째, 본문에서 '생명주는 영'이 단순한 3격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신격(아버지 아들, 성령)+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인식이 두 분에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9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조연배우'와 '세트'도 있지만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맏아들(롬8:29)'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입으신 인성을 다룬 핵심진리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가, 아니면 셋으로 분리되는가?, 또한 우리가 영접한 주님이 인성을 가지시는가, 벗어 버리셨는가 아니면 인성을 아예 입으신 적도 없는가? 하는 점들을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이 상호내재 하심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 글에서 열거한 난해구절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와 터툴리안은 '분리된 세 하나님' 사상을 배척합니다.

성경본문(요14:10-11, 20)과 위 정통교부들은 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주장하는 '분리된 하나님(들)' 이단사상을 배척합니다. 정통 삼위일체 이론의 최종주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로 계신다. 위격의 하나가 아니라 실체의 하나이다. [하나님과 아들이 분할 할 수도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게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의 세 위격을 삼중적(triplex)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각자가 유리(분리)되어 있는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격은 상호내재 한다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쪽).

'삼위는 구별되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터툴리안의 견해는 이미 소개 드린 바 있습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

삼위일체 신앙이 잘못되면 기독론, 성령론도 당연히 잘못되게 되어 있음으로 한국교계 내에서 영향력 있는 분들의 '분리된 세 하나님 이단사상'은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합니다.

2. 맏아들과 관련 된 난해 구절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맏아들'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육신이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된 생명 주는 영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분이 이 시간에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보좌 위에서 계시며, 동시에 생명으로서 이 땅위의 참된 거듭난 성도들로 된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계십니다. 이런 성경적 관점을 갖는다면 다음 구절들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1:51]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28:11-22의 야곱의 꿈의 성취입니다. 맏아들인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건축하도록 하늘로 땅을 향해 열려있게 하고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머리로서 하늘의 모든 풍성을 교회에 전달하시고(엡1:22-23), 이 땅 위의 주님의 몸인 교회지체들을 아버지께 이끌고 계시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엡2:18, 요14:5).

[요7:39]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제3격 성령'이 아직 없다는 말이 아니며, 영화롭게 된 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실제이신 '생명 주는 영'이 부활 전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행9:4]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역사적으로 사울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결코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승천 후 맏아들은 생명으로 제자들 안에 들어와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몸인 제자들을 핍박한 것은 곧 주님자신을 핍박한 것입니다(골3:4, 고전6:17).

'예수님 사랑해요'를 외치면서 주님의 지체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것은 마치 주님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발로 그분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작은 지체'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임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마25:40).

[롬1:4]는 '이 아들로 말하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시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고전15:44)으로 높여짐으로' 그분 안에 있던 신성이 영화롭게 된 인성을 통해 밖으로 충만히 표현되신 것을 말합니다.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롬8:10]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롬8:34]는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두 분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이신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생명'으로 믿는 이 안에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롬8:2).

[히2:11-12]는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받는 자(많은 형제들)가 다 한 아버지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요12:24). 놀랍게도 예수님은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형제'라 부르지만(요20:17, 롬8:19, 벧후3:15),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또는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형제님' 하고 친근하게 부를 수 없다면 거기에 이미 계급적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인 니골라당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계2:6,15). '형제'는 직분이 없는 평신도를 가리키는 저급한(?) 호칭이 결코 아닙니다.

[계5:6]은 하늘에 계신 '어린양의 일곱 눈'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분리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인성을 입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생명 주는 영으로 이 땅에 오심을 말합니다. 삼위는 상호내재하나 구별된 상태로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에, 2격이 3격과 혼동을 일으킬 일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영(Spirit)'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무조건 '아버지', '아들'은 아니고 제3격인 성령하나님만'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오! 우리 안에 지금 계신 이는 비밀하고 신령한 몸(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 사람'이십니다. 이 분은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상호내재하시며 인성도 있으신 그 영 하나님(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십니다. 이 분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에서는 아니나 우릴 맏아들인 자기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롬8:28-30). 할렐루야!!

10

주님이 주신 부담(burden)을 글을 통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지를 묻고 순종하다보니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핵심사항을 재 강조함으로 '맏아들'(롬8:29)에 대한 교제를 마칠까 합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작은 지체들의 교제가 한국교계 내에서 '맏아들'에 대한 성경적 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어떤 표현은 분별을 위함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분들을 정죄 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 상한 분이 계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1. '맏아들'(롬8:29)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합니다.

1) 한 분 하나님이신(사45:5, 고전8:4)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위격이 엄연히 구별되시지만, 상호 내재하심으로 영원토록 결코 분리되지는 않으십니다.

2)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God)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고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1/3하나님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딤전3:16, 골2:9)이심으로, 아버지와(혹은) 성령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 입니다(요14:10-11, 마1:18).

3) 예수님은 삼위가 상호 내재하는 '온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죄만 없으시지 평범한 우리들과 똑같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8, 딤전2:5). 성육신과 부활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성 자체에는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습니다. 

4) 하나님 사람이신 예수님의 육신(인성)은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고전15:42-47). 이것은 인성을 벗어버리거나 인성이 제3의 물질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고전15:44).

5) '하나님'이 성육신 후 '하나님 사람'으로(요1:14), 또한 부활 후에는 이 분이 신령한 몸을 입은 하나님-사람이신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만일 누가 하나님의 불변성만을 주장하며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부인한다면 심각한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6) 성경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요 생명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을 가진 맏아들이십니다(롬8:29). 이 분은 지금 하늘 보좌 위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시는 동시(롬8:34)에 이 땅에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골3:4). 이러한 실체가 한 '새사람' 또는 '그리스도의 몸과 머리'입니다(엡2:15, 골1:18).

2. 거듭난 후의 신앙생활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엡1:4-5, 롬8:29).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복음으로 불러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요3:6), 혼을 변화시키고 계시며(롬12:2, 고후3;18), 결국 우리의 몸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빌3;21, 롬8:23),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경은 이 목적을 위해 합력하고 있습니다(롬8:28).

속히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고(엡4:13-16) 새 예루살렘이 완성되기를(엡5:25-27, 계21:2, 9-10) 하나님이 고대하시고, 이기는 자들이 고대할 뿐 아니라, 썩어짐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피조물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롬8:19,21).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소서! 세월을 아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시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엡5:16-17, 벧후1:3-4)! 이 땅의 모든 주의 종들은 마땅히 당신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이 한가지를 위하여 수고하게 하소서(갈4:19).   아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2. 05:00

성경이 계시하는 성육신의 참된 의미를 아는 지금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사람 속에 제한 받으신 기묘한 기적' 앞에 놀라며 감사할 뿐입니다. 

(1) 성육신은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기묘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도 아브라함(창18:2, 13, 33), 마노아의 아내(삿13:3, 10, 22) 등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 때 사람으로 오셨던 하나님과 신약의 성육신은 어떻게 다릅니까? 

총신대학과 합동 신학원을 졸업한 어떤 장로교신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약시대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타나서 사람처럼 행동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육신을 가지고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즉 구약에서는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나타나셨을 뿐이지만, (신약의) 성육신을 통해서는 '실제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의 나타나심은 사람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나 인간의 구속을 위한 주님의 성육신 때는 육체를 입으셔야만 했다"(이남종, 모세 오경에 나타난 그리스도, 새순출판사, 1992, 80-81쪽). 


(2) 성육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사람의 육신(인성)을 입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14에 의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은 어느 날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창 3:15에서 예언되고 갈 4:4에서 성취된 사실로서, '하나님'(God)이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어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 할 것은 하나님이 입으신 이 육신은 죄만 없으시되 평범한 사람들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짜 육신이 아니라 '환영'(phantasm)을 입은 것이라거나 사람이긴 하지만 '사람의 영' 부분은 '로고스'로 비밀스럽게 대치되었다고 이단적으로 말했습니다(요1:14, 요일4: 2-3, 회복역 각주 참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된 채로 있다고 하거나, 정반대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융합되어 제3의 물질이 되었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진지의 변호와 확증 - 위트니스 리

그러나 그리스도는 위의 이단적인 가르침들과는 달리 완전한 참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9, 딤전2:5). 또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더하여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되, 두 본성은 혼돈 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제3의 본성을 산출하지도 않습니다. 즉 성육신 하신 우리 주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complete God, perfect Man)이시고,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고, 분리됨이나 혼잡 됨이 없는 비밀들 중에 비밀(골2:2)이시고,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WL, 진리의 변호와 확증, 한국복음서원, 1996, 91-97쪽). 

(3) '삼위(일체)하나님 전체'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많은 분들이 삼위 중 아버지는 아니고 아들 하나님(1/3)만 사람이 되셨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보내고 저 하늘 어디엔 신비하게 남아 계신다고 알고 계십니다. 물론 지금은 승천하신 아들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두고 계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어쨌든 그분들 신학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사람 가까이 또는 사람 안에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요일2:23, 4:15, 요14:10,-11, 20, 23). 이렇게되면 그분들이 영접한 영생도 아버지하나님은 빠진 불완전한 하나님의 생명이 되고 맙니다. 더구나 그분들은 성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살전1:1, 요일2:24). 

그런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칼로 '무우 토막 자르듯' 잘라내고 분리시킨 잘못된 삼위일체관의 심각한 후유증일 뿐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성육신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골2:9, 딤전3:16). 이점은 성육신 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거처인 장막의 실제라고 말한 성경말씀들에서도 증명됩니다(요1;14원문, 2:19 -21, 이 남종 위책, 134-135쪽 참조). 따라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물질적인 성막에 나아갔지만 신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려면 움직이는 성막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예수님이 성막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바로 그 장소인 '속죄소'라고 말합니다. 즉 구약의 출25:17의 속죄소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kapporeth인데 70인 역은 이것을 '힐라스테리언'으로 번역했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롬3:25의 화해장소(개역성경은 화목 제물로 오역함) 역시 출25:17의 속죄소와 똑같은 '힐라스테리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람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성막의 실제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인 '속죄소'의 실제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주님이 지금은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지 1/3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전체가 아들 안에서 사람이 되신 것임(골2:9, 딤전3:16)을 아는 것은 '맏아들'을 바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1.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2)

2. 대부분의 장로교인 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교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정작 이러한 "예정"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도록" 예정하고, 예수님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 되도록(predestinate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예정되었다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9절의 핵심내용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 롬8:29 본문자체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당 본문을 여러 번 차분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들의 형상'은 무엇이며, '많은 형제들'은 누구의 형제들이라는 말인지, '맏아들'은 또 무엇인지, '독생자'와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장래 운명과도 직결됨으로 소홀히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사실 '맏아들'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이 깊은 단어이지만, 이것을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삼위(일체)와의 관계'와 '성육신의 단계'를 성경적으로 이해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먼저 '삼위일체관'에 대해 교제해 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 내엔 잘못된 삼위일체관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 치고 '한 하나님에게 세 인격이 있으시다'로 요약되는 소위 정통 삼위일체관을 부인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위 (지방)교회 성도들도 물론 이 점을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세 인격'이 '구별'만 되는가 아니면 '분리'되기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삼위일체'에 대한 그 사람의 참된 이해가 무엇인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됩니다. 보수 정통을 자부하는 장로교 고신 교단의 신대원을 졸업한 손무덕 목사님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

그의 책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중외출판사, 1998년) 서문에서 한국교계의 삼위일체교리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삼위일체 교리는 가르치는 사람도 찜찜하고 배우는 사람도 개운치 않은 실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속시원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속 시원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이단 정죄 위험성을 무릅쓰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을 세워보겠다며 쓰신 저자의 책 내용조차도 '비 성경적' 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성 삼위 하나님은 각각 계신 곳이 다르다'(위 책 22쪽). '성부와 성자는 몸과 생명을 따로 가지고 계신다'(27쪽), '육체를 따로 가지신 성부 하나님'(30쪽), '성 삼위 하나님을 다 합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37쪽), '한 분 하나님이란 예수님이 제외된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함'(35쪽) 등 삼신론 또는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은 아니고 '아버지만 하나님'이라는 끔직한 이론을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위 정통교리를 수호한다는 이단연구가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누가이단인가?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이며 현재 한기총 이단 전문위원인 최삼경 목사님은 (지방)교회측과의 토론에서 '분리된 세 영들', (아버지는 저 멀리 하늘보좌에 계시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신다'는 등 각각 떨어져 계신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계속 주장했습니다(누가 이단인가, 도서출판: 생명나무, 1999, 115-116쪽). '분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 외에도 월간 교회와 이단 발행인과 기독교이단문제연구소장인 이 대복 목사님(월간 교회와 이단, 98년 11월호, 57-59, 62쪽 참조), 예장합동 측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포함되십니다(총회교육국 편, 기독교의 이단들, 1997년, 155쪽 참조)'.  

(2) 성경은 동시존재 하시며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을 땅으로 보냈으면 두 분이 분리되었으니 땅에 오신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셔야 하고, 또 아들은 높은 저 하늘에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오셨으니 하늘에는 안 계셔야 말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상 구별은 되시나 결코 분리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땅에 오신 아들 안에 계시며, 아들도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에 여전히 계십니다. 이 점은 우리 안의 성령도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 보좌에 계시되 동시에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 안에도 여전히 계십니다. 즉 요한 복음 1:18은 이 땅에 오신 아들이 땅에 계신 그 순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속에 계심을 말합니다(동사시제가 현재임). 요 3:14도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even 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 영어 KJV참조). 또한 요8:16, 29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보내심 받은 아들과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14: 10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서로 안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분리된다는 말입니까? 설사 분리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둘 또는 세 하나님들이 되어 버리니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성경 내용과는 다른 이단사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고전8:4, 6, 롬3:30, 딤전2:5, 신4:35, 39, 사45:5). 

(3) 바른 삼위일체관은 삼위가 구별은 되나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

한 교계신문은 최삼경 목사님과 (지방)교회간의 진리토론을 지켜 본 뒤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걸핏하면 삼위일체론이 틀렸다며 남을 '이단'으로 공격하던 한 인사가 그 자신이 삼위일체론에 있어 이단성이 있음이 제기되어.... 과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각기 분리되고 구별되는 '셋'이 정통인지 아니면 셋은 구별되지만 서로 안에 거하시면서 분리되지 않는 것이 정통인지 그 논쟁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교회연합신문, 1999. 4. 11일자). 그런데 성경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상호내주함으로 분리가 안됨)을 믿으라'(요14:11)고 명령함으로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문제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삼위가 구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분리되기도 하신다고 믿으면 뒤에 보게 될 '성육신' 단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맏아들'에 대한 이해도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끝으로 장로교 신학자들 중에는 '삼위는... '디스팅크티오(구별)'이지만, '디비수스'(나누어짐)되거나 '세파라투스(분리)되지 않는다'고 성경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분들도 있음으로 마치 한국 장로교단 전체의 삼위일체관이 틀렸다는 뜻으로 이 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총신대출판부, 1986, 208쪽).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0.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1)


1. 저는 여러 체험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비밀들을 사도들에게는 열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만졌습니다(고전2:7-10). '맏아들이신 주님'을 아는 것은 이렇듯 신랑 되신 그분의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제한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신약의 결론 - 그리스도

(골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설명할 때 '측량할 수 없는''(the unsearchable riches)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엡3:8). 그는 또 '그리스도와 교회'가 큰 비밀(a great mystery)이라고 말합니다(엡5:32). 신실한 성경 교사들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710쪽 분량)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400개 이상의 명칭을 신구약에서 찾아내어 각각에 대해 풍성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이 출판한 찬송가 집에는 단 한 장(388장)의 가사에서 주, 생명, 능력, 지혜, 공의, 성결, 구속, 평안, 기쁨, 소망, 안식, 빛과 길 등 그리스도에 대한 70 가지 이상의 방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에 있어 위대한 비밀임으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데 온 일생을 쏟아 부었습니다(엡3:18-19, 빌3:7-14).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안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구주 예수의 사랑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외에도 성경이 보여주는 비밀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방면들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고 사도들도 힘써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어떤 방면들을 말하면,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들의 '교리집 내용'에 없다며 받아들이려 하질 않습니다. 이런 태도들은 '작은 신발에 큰 발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려면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가 배운 교리,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을 성경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높이는 분들은 비밀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춘 분(벧전5:5),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분(고전2:9),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마음 눈이 밝아지길 간구 하는 분(엡1:17-18), 영 안에 있는 분(계1:0)이라야 풍성한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각 방면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비 된 분들에겐 이런 주제에 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큰 진보를 체험케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3)  교파와 주의회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교파에 계시다가 회복된 교회생활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전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밖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방면이 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쉽게 풀리고 "체험되는" 교회생활은 많은 지체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전에는 경험치 못했던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을 가져오는 주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the first-born)(롬8:29), 또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the last Adam became the life-giving Spirit)'(고전15:45) 라는 말씀에 대한 빛과 체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면, '보좌 앞의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이 땅 위의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한 머리요 몸이신 그리스도(행9:4, 엡1:22-23, 골1:18), 믿는 이 안과 보좌 위에 동시에 계시는 그리스도(롬8:10, 34),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인자(요1:51, 창28:12), 이 땅에 보내심 받았으나 여전히 하늘 아버지 품속에 계신 아들(요1:18),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 아들(요3:13절 KJV원문),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요7:39) 등의 난해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런 말씀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는 더 이상 난해구절들이 아니며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체험하는 친근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닮아 갈 원형이신 '맏아들'(롬8:29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빗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매 순간 주의 영을 바라봄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간(고후3:18)에 저 하늘 어디 천당 갈 꿈만 꾸며 헛된 일에 시간낭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라는 시험문제를 받아 놓고도 토끼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수험생은 시험종료 벨이 울리기 전에 빨리 바른 상황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진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 모두를 '맏아들' 또는 '생명 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18. 05:00

창간특집 - (지방)교회를 전격 해부한다.


"핵심적인 교리들, 정통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 확증"


 지구촌 3천여 교회 30만명 성도


한국 1백여 교회 1만5천명 성도

 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일반적으로 (지방)교회는 워치만 니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동역자인 위트니스 리로 이어졌다는 것이 객관적인 평가이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1903년 중국 복주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7세에 역동적인 거듭남을 체험했고, 즉시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헌신했다. 워치만 니는 성공회가 세운 '앵그리칸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이며, 탁월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역사 전반을 망라한 약 3천 여 권의 기독서적을 독파하였다. 또한 그 당시 그의 고향에서 활동했던 전직 성공회 소속 M.E.바버 선교사를 통해 당대 유럽의 기독교 거장들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속생명파와 형제회 노선이 그에게 상호 보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총 62권의 <워치만 니 전집>(한국복음서원)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는 중국 공산화 직후 1952년에 투옥되어 20년간의 옥중 생활 끝에 1972년 5월 30일 순교하였다. 위트니스 리(Witness Lee)는 1905년 중국 산동 지방에서 삼대 째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치푸에 있는 남침례회 중국 초등학교를 다녔고, 미국 장로회가 경영하는 영어선교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5년(19세) 4월에 왕패진(汪佩眞) 자매의 복음 전파로 구원받았다. 거듭남을 체험한 후 약 8년 동안 형제회 모임에 출석하였다. 그 후 그는 워치만 니가 발간하던 문서를 통해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워치만 니의 사역에 합류하였다. 워치만 니는 그를 약 20년 이상 직접 온전케 했고 둘은 끝까지 신실하게 동역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1949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만에서, 1962년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인 1997년까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동안 일관되게 워치만 니로부터 보고 배운 큰 틀 안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400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성경 66권을 강해한 '라이프 스타디 전집(Life-Study)'과 (지방)교회의 조직 신학에 해당되는 8권으로 된 '신약의 결론'(총 8권, 4600쪽)이 있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회복역 영어성경(1985년)은 영어권 성도들에게 성경을 사랑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1988년 대만에서 발간된 중국어 회복역 성경은 중국어권 성도들에게 진리로 조성되고 생명안에서 자라도록 이끌고 있다. 한국어 회복역 신약성경은 2007년 7월 말에 번역되어 발간되었다. 

 나. 교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귀하게 여기는 소위 (지방) 교회 성도들은 전 세계에 약 30여 만명(중국 본토 제외), 3000여 교회들이 있다. 한국은 1966년에 처음 시작되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여개의 교회들과 1만 5천명의 성도들이 실제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며(명단 상 약 2만 5천명) 전국에 200여 명의 사역자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고 한다. 

 다. (지방)교회에 대한 미국 기독교계의 평가  
전 세계 (지방)교회 성도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신앙검증은 곧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평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미국이든 한국이든 차이가 없다. 항간에는 이들을 중국의 유교와 불교에 연관 짓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지방)교회가 중국의 토착화된 기독교라는 일각의 평가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두 사람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영국의 플리머스 형제회와 속 생명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은 존 넬슨 다아비의 모든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선포 된 근본주의자들의 신앙고백인 성경 무오성,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육체적 재림을 확고하게 믿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저명한 이단 변증가이자 종교백과사전의 저자인 고오든 J. 맬튼 박사는 자신의 '미국 종교백과 사전'(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에서 (지방)교회를 참된 그리스도인들인 '플리머스 브레드린(Plymouth Brethren)' 과 같은 <독립 근본주의 계열>(Independent Fundamentalist Family)로 분류하고 있다(최신판, 523-525쪽).
관련 자료 - http://local-church.tistory.com/283

이단변증기관 CRI와 AIA, "이단(cult)이라는 말이 교리적. 사회학적 개념이든 (지방)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서 제출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자만을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는 한국의 '생명의 말씀사', '규장' 등이 국제 회원으로 있는 '미국 복음주의 출판사 협회'(ECPA)에서 투표권 있는 정회원 자격으로 활동 중이다. ECPA 측은 회원사가 출판하는 책자들이 복음주의적인 내용을 담았음을 보장할 수 있도록 신규회원 가입시 엄격한 사전 신앙검증을 받게 하고 기존 회원들의 무기명 투표를 거쳐 확정한다. 한국복음서원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ECPA의 회원사가 된 LSM 발행 책자를 다만 한국어로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동일한 평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유명한 이단변증기관인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 대표인 행크 해나그라프와 AIA(Answers In Action) 대표인 그레첸 패산티노는 작년 8월에 재판과 관련해서 텍사스 대법원에 제출한 공식문서에서, "이단(cult)이라는 말이 교리적으로든 사회학적 개념으로든 지방교회에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단변증전문가의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것은 이들 두 이단변증 기관이 과거 미국에서 앞장서서 (지방)교회를 양태론자로 공격해 왔었지만, 주님의 주권적인 안배로 쌍방이 수차례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눈 후 나온 것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그 중에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 3 년 동안 CRI와 AIA는 지방 교회들이 출판한 모든 책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었고, 지방 교회들에서 인도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수백 시간에 걸쳐 대화를 가짐과 동시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일반 성도들과 만나서 대화를 가졌습니다. 아울러 CRI와 AIA는 수백 시간에 걸친 신학적 분석과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다수의 신학 대학원에 요청하여 저명한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마친 후 파산티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운동이 소유한 믿음의 내용들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운동에 대해 제기한 과거의 비평들이, 비록 여타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내놓은 것들에 비해 부드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운동의 본질이 갖고 있는 정통성을 오해하고 잘못 제시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AIA와 CRI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들, LSM의 핵심적인 교리들이 전적으로 정통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을 확증하는 바입니다.
(참고자료 - http://local-church.tistory.com/128http://local-church.tistory.com/102)


그 외에도 한국 교계 내에 500여명 이상의 동문 목회자들을 배출한 풀러 신학교에서 '(지방)교회에 대해 이단성이 없다'는 내용을 포함한 다음과 같은 공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 역시 풀러 신학교 총장 Richard Mouw 박사, 신학부 학장 Howard Loewen 박사, 조직 신학 교수인 Veli-matti Karkkainen 박사 등이 2년에 걸쳐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폭넓은 대화를 나눈 끝에 나온 것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우리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 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들에 근거할 때 우리는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계, 언론계, 이단 변증단체 모두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이 핵심 진리에 있어서 결코 이단이 아니며 참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고 평가한다'고 결론적으로 말씀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해명 자료 제시와 쌍방의 추가적인 대화를 통해 한국 교계의 주류교단 중 하나인 예장통합측에서도 동일한 이해에 이르게 되시기를 희망한다.                 (후략)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참고 사이트:
워치만 니 (1903-1972. 5. 30) :
http://www.watchmannee.kr
위트니스 리 (1905-1997. 6. 9) :
http://www.witnesslee.com

미국 이단 변증 단체 AIA(Answers In Action)의 지방 교회들과 LSM(Living Stream Ministry)에 대한 입장

기독교 변증론 분야의 전문가이자 미국의 저명한 이단변증단체AIA(Answers In Action)의 공동창립자 및 책임자인 그레첸 파산티노(Gretchen Passantino)는, 같은 분야의 동료이자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의 대표인 행크 해너그래프(Hank Hanegraff), 그리고 CRJ(Christian Research Journal)의 편집장인 앨리어트 밀러(Elliot Miller)와 공동으로3년에 걸쳐 진행된 신중한 조사, 대화, 검토 및 신학적 분석의 결과, 워치만 니(Watchman Nee)와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가르침과 LSM(Living Steam Ministry)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들은 정통 기독교 신학을 수용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기독교 운동의 한 부분이며, 신학적으로 이단성의 문제가 있다거나, ‘이단’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결론은 ‘이단’이라는 용어에 관해 작고한 월터 마틴 박사(Dr. Walter Martin)가 신흥 이단들(The New Cults)이라는 책에서 정의한 의미, 그리고 작고한 로버트 파산티노(Robert Passantino)와 그의 부인 그레첸 파산티노가 자신들의 공저인 당신의 문을 두드리는 이단들에 대한 답변들(Answers to the Cultist at Your Door)이라는 책에서 정의한 것처럼 순수하게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하더라도 동일함을 밝힙니다.

 이번 재평가 작업은 로버트 파산티노와 그레첸 파산티노 부부, 그리고 월터 마틴 박사가 최초 평가를 실시한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으며, 최초 관찰과 비교할 때 놀랄 만큼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최초에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는 이러한 운동이 비기독교적 이단은 아니지만 여전히 워치만 니의 저작, 특별히 위트니스 리의 저작들은 모순적인 면을 갖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운동의 신학적 배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이해는 출판물을 조사하여 얻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가 1981년 이후에 이러한 운동에 관하여 직접 글을 쓴 적은 없지만, 수년 동안 CRI는 이러한 운동에 관하여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가 최초에 제기했던 핵심적인 비판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여러 편의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습니다.

약 3년 전, 이러한 운동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LSM은 대화 제의와 함께 그들의 가르침과 신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요청해 왔고, (남편이 2003년 작고한 후로 AIA를 인도한) 그레첸 파산티노, (월터 마틴 박사가 1989년 작고한 이후로 CRI를 인도한) 행크 해너그래프, 그리고 (초창기부터 CRJ의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앨리어트 밀러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초기에 여러 단체들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내놓은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파산티노 부부와 앨리어트 밀러, 행크 해너그레프는 단지 해당 단체들이 출판한 서적들을 검토하는 것으로 평가 작업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관찰과 교제를 통해서 과연 상대방의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작업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점점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최근CRI와 AIA 는 모두, 논쟁의 소지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들에 대한 공식적인 비평서를 출판하기에 앞서 그들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의무화하는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파산티노는 “이러한 직접적인 상호 교제의 원칙은 우리가 전향적으로 사탄주의나 신흥 이교주의에 대한 검토 작업에 착수하면서, 그리고 외부에 있는 기독교 변증론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전세계 하나님의 교회(the Worldwide Church of God)나 기타 운동들 및 쟁점들에 대해 파헤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펴낸 책자에 항상 의문의 여지가 있어 왔고, 변증론 전문가들 사이에서 상이한 평가를 받은 이 운동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3 년 동안 CRI와 AIA는 지방 교회들이 출판한 모든 책들을 아무런 제한 없이 열람할 수 있었고, 지방 교회들에서 인도하는 이들과 직접 만나 수백 시간에 걸쳐 대화를 가짐과 동시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일반 성도들과 만나서 대화를 가졌습니다. 아울러 CRI와 AIA는 수백 시간에 걸친 신학적 분석과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다수의 신학 대학원에 요청하여 저명한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마친 후 파산티노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운동이 소유한 믿음의 내용들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운동에 대해 제기한 과거의 비평들이, 비록 여타 기독교 변증론자들이 내놓은 것들에 비해 부드러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운동의 본질이 갖고 있는 정통성을 오해하고 잘못 제시한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파산티노 부부는 두 권의 소책자를 통해, 그리고 월터 마틴 박사는 신흥 이단들이라는 책을 통해 비록 이 운동이 비기독교적 이단은 아니지만,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여전히 모순적인 면이 있으며, 최악의 경우는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연구자들은 이 운동에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기 시작했고, 이 운동이 심리적 병폐나 사회적 병폐 심지어 일탈적인 범죄 행위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경고하였으며 또한 신학적으로 이단이라는 혐의도 추가되었습니다.

가깝게는 1999년에 존 앵커버그(John Ankerberg)와 존 웰던(John Weldon)이라는 두 저자가 이단과 신흥종교 백과사전(Encyclopedia of Cults and New Religions)에서 이 운동을 위험하고 파괴적이며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단체들에 포함시켰으며, 신학적으로도 이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해당 운동이 중국 본토에서 시작되었고, 이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많은 믿는 이들이 여전히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관계로, 무신론을 제창하는 중국 공산정부는 이 운동과 관련된 중국 내 그리스도인들을 형사 고발하고 유죄 판결을 내리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러한 부정적인 보고서들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앵커버그와 웰던의 책에 담긴 언어도단(言語道斷)적인 비난들은 십수 년 전 닐 더디(Neil T. Duddy)의 갓맨(The God-men)과 같은 책자에서 제기된 것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중국 본토에서의 교회 활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당국의 제한과 고발 및 유죄판결에 직면해야 하는 이 운동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극도로 위험이 된다는 것을 이 운동은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협에 대항하는 시도의 일환으로, 지방 교회의 핵심적인 교사들은 - 비록 이 운동은 정식 계급 제도상의 인도직분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특정 구성원들이 그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 기독교 변증론 분야를 선도하는 다양한 인사들에게 대화 및 재평가를 요청하였습니다. AIA와 CRI는 이 기회를 수용하여, 공동으로 재평가 작업을 추진하였습니다.

근년에 지방 교회들과 LSM은 미국 기독교계에서 진일보적으로 폭 넓은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우선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가 AIA 와 CRI 가 수행한 것과 유사한 대화 및 검토 작업을 실시하여 “지방 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은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대표하고 있습니다.”(풀러 성명서, Fuller Statement)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아울러 LSM은 미국복음주의출판협의회(Evangelical Christian Publishers Association, ECPA)에 정회원으로 등록되었으며, 해당 단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투표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AIA와 CRI 가 지방 교회 인도자들 및 LSM과 가진 대화에서, 양측은 모두 파산티노 부부와 월터 마틴 박사가 과거에 내린 대단히 비판적인 평가가 여러 요인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고의적인 왜곡이나 악한 의도는 없었다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부적절한 비판들을 가져온 더 큰 이유는 상호간의 직접적인 대화 부족과 미국 내 기독교와 중국 내 기독교 사이의 문화적, 언어적, 교회론상의 차이, 그리고 양측 모두의 종교 분석적 검토 기술이 상대적으로 미숙했던 점이라는 데 공통된 결론을 얻었습니다.

... AIA와 CRI는 2007년 후반에 지방 교회의 가르침들에 관한 연구 결과를CRJ 에 실을 예정입니다. 한편, LSM이 발표한 장문의 교리 해설서인 ‘풀러 신학교 측과 대화 시 제출되었던 (지방) 교회 신앙 변증서’는 지방 교회들의 핵심적인 교리가 갖고 있는 정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교리 중 부차적인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여타 그리스도인 단체들에게는 크게 문제시되었던 부분에 관해서도 이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forthetruth.or.kr


지방교회-"핵심적인 교리들,정통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 확증"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지방교회_교성_070827창간2.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