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 05:00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에 관한 『전문가들의 증언 "서문"』


"전문가들의 증언"(http://forthetruth.or.kr/experts02.htm)은 1985년 5월 캘리포니아 상급 법원에서 위트니스 리(Lee)와 닐 더디 등과의 재판에서 전문가들이 선서 증언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대표하고 있는 여섯 명의 전문가들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의 가르침과 실행들을 조사하도록 요청 받았다. 전문가들은 또한 영적 사이비 연구소(SCP)가 출판한 "갓멘"이라는 책에 있는, (지방)교회들을 반대하여 인쇄된 비난과 비평들을 조사하도록 요청 받았다. 마지막으로, 이들 중 다섯 명은 캘리포니아 상급 법원에서 선서하여 그들의 결론을 제출할 것을 요청 받았다. 여섯 번째 전문가인 가우스태드 박사는 재판에서 증언하지 않았지만, 그의 연구는 논문으로 요약되었고, 이 책에 재 인쇄되었다. 이 책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관한 전문가들의 증언이다.

소송은 교리적인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갓멘"이라는 책이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관하여 거짓되고, 악의적이며, 손상을 주는 내용을 서술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명예 훼손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이비"라는 관념을 갖게 한 "영적 사이비 연구소"에 의해 사용된 많은 공격들은 교회들의 믿음과 실행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비난은 신학, 심리학, 사회학, 및 "실지" 사건들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리를 포함하여 이 책의 총체적인 왜곡 현상이 밝혀져야만 한다. "영적 사이비 연구소"가 (지방)교회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로 자처했기 때문에, 관련된 분야에 좀 더 자격을 갖춘 몇몇 사람들의 증언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각 분야에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을 구했으며, (지방)교회들을 연구하고 "갓멘"에 있는 공격들을 평가하도록 요청하였다. (지방)교회들과 (지방)교회들의 비방자들에 관한, 참으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의 결론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관한 전문가들의 증언에서 볼 수 있다.

왜 (지방)교회 사람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의 마찰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첫 번째 선택은 물론 법정이 아니다(고전 6). 성경의 권고에 의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취해야 하는 시도는 그리스도인의 교통을 통한 것이다(마 18). 불행하게도, 1970년대 초반부터 "영적 사이비 연구소"의 태도는 결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 더불어 진리와 화해를 추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들의 태도는 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영적인 사이비"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영적 사이비 연구소"는 교회들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적했음에도 무시했다.

 1976년에 "영적 사이비 연구소"에서 나온 원고는 결국 "갓멘"의 초판이 되었다. 결국 또 다른 책이 그 원고에서 나왔는데, 잭 스팍스(Jack Sparks)와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마인드벤더"로 발전시켰다. 잭 스팍스는 "영적 사이비 연구소"의 초기 인도자였는데, 그 당시 (지방)교회의 분리파에서 온 다른 이전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영적 사이비 연구소"와 관계를 끊으려 하고 있었다. 스팍스는 "영적 사이비 연구소"의 원고 사본을 적의를 품은 분리파 일원에게 제공했고, 그 원고가 "마인드벤더"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책은 1977년에 출판되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출처가 다른 것 같지만, 실상은 한 원고를 복제한 것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본래 원고에 있는 인쇄 실수를 다시 반복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그들의 주장과 결론이 그토록 유사하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출판하기 전에 교회 사람들이 두 책에 대해 강한 항의를 제기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출판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책은 (지방)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극도로 손상을 입혔다. 처음에 (지방)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진리에서 동떨어진 책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대중에게는 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비난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공격들은 매체에 "사실"로서 거듭 활자화되었다.  

일 년 안에 (지방)교회는 세인들의 "사이비" 명단에 올랐다. 일단 (지방)교회가 사교라 명명되면, 그 반응은 자동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의심과 두려움과 경멸과 회피로 반응했으며, 이러한 반응들을 일소하는 것은 이성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공청회를 가질 길도 없었다. 어떤 서점도 "사이비교"로 낙인찍힌 집단의 항변을 게재해 주기를 원치 않았다. (지방)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직장에서 가혹한 어려움을 당하고 견뎌야 했다. 어떤 이들은 직장을 잃기까지 했다. 더욱 심정적으로 쓰라린 것은 놀란 부모들과 친구들이 사랑하는 자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가족 관계에서의 문제였다. (지방)교회들이 밖으로 뻗어나감은 강력한 배척에 직면했었다.  

소송

1978년에 있었던 조지 타운의 집단 자살은 "사이비교"라는 말에 새로운 공포를 더해 주었다. 이 기회를 잡아서 "갓멘"과 "마인드벤더"를 발행한 자들은 그들의 책이 개정판으로 출간됨을 발표했다. 저자와 발행자들에 대한 (지방)교회들의 호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은 이 소송을 고려했다. (지방)교회들이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길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현대의 "가이사에게 호소"(행 25:9-11)하는 것과 같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 당시 유대 종교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행사한 것이었다. 소송의 목적은 대중에게 진실을 알려 끊임없는 핍박을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삼 년에 걸쳐 중대한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좌절당하고 막대한 타격을 받은 후, 1980년에 명예 훼손에 대한 소송이 자매 책인 "마인드벤더"와 "갓멘"에 대해 제기되었다. 

 이들 소송은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는 토론장이 되었다. 모든 문제들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추적이 이루어졌다. 관련된 사람들의 선서 증언이 조서로 기록되어있다. 이 백 건이 넘는 선서 증언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문서가 만들어지고, 분석되었다. 모든 명예 훼손의 내용은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상세하게 이루어졌다. 저자들과 발행인들은 선서 아래 그들이 비난한 것에 대한 사실을 확증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가졌다. 

 즉, 그들은 (지방)교회들을 위해 증언해 주는 전문가들을 탄핵할 모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후에 그들은 재판 중에 전문가들에게 반대 심문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재판을 위해 준비하면서 조서에 대해 삼 년 넘게 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긴 기간을 거치면서 그들의 책은 정당함을 입증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저자와 발행자들의 동기와 악의와 계획적인 왜곡이 폭로되었다. 여섯 명의 전문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조사할 권한을 가지고 교회와 중요한 출판물들을 조사했으며, "갓멘"을 저술하는 데 관련된 사람들의 선서 증언을 상당 분 읽었다. 여섯 명 중 일부는 저자들을 지지하도록 임명된 전문가들과 증인들의 증언에 출석했다. 어떤 전문가들은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과거 (지방)교회 교인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고찰했다. 여섯 사람은 적대적인 반대 심문에 대비하여 모든 쟁점들에 대처하고 그들의 결론을 제출할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여섯 명의 전문가들의 상세하고도 공정한 결론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진실한 믿음과 실행들을 고의로 왜곡한 "갓멘"을 압도적으로 정죄했다. 전문가들은 사이비교라는 비난이 저자들의 날조였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용된 내용들이 위트니스 리가 의미한 것과 반대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기 위해 거듭거듭 제시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례 연구"가 의심스러운 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확증되지 않은 보고 내용에 기초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책이 학문적인 분위기를 갖도록 도입된 사회과학의 함정을 발견했다. 그들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그들 나름의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취하여 "사이비"라는 비난에 걸맞도록 왜곡시켰던 것이다.  

삼 년에 걸친 드러냄과 증언이 있은 후에, "마인드벤더"의 발행자들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게 사과하였으며, 그 책을 출판물 중에서 회수했다. 그러한 철회가 그 전역의 주요 신문에 1983년 4월 10일자로 게재되었으며, 이 책 부록에도 실려 있다. "마인드벤더"의 저자들은 또한 처리 협약에 서명했는데, 철회는 그 중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법적으로 "마인드벤더"의 발행과 배포를 종결시켰다.  

1985년 4월에 "갓멘"에 대한 건(件)의 재판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기 다섯 시간 전에 "영적 사이비 연구소"는 파산 법원 보호하의 재산 개편 신청을 냈다. 그들은 광범위한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고, 조사 과정 중에 계속적으로 자금을 조성하였으면서도 재판에 나설 여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들은 혹시 있게 될지도 모를 큰 손해 배상과 과거 삼 년 동안에 선서 증언에서 그들이 한 일의 동기와 방법을 폭로라는 반대 심문이 있는 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갓멘"의 주요 저자인 닐 더디(Neil Duddy)는 자신을 "영적 사이비 연구소"와 분리시키고 덴마크로 이주했다. 그는 재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독일판의 스위스인 발행자 "수엔겔러 벌라그"도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은 원고만의 참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라니온 판사는 사실적인 문제와 전문가들의 의견에 관하여 증인들에게 질문하는 데 있어서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 피고가 출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사실들과 전문가들의 결론은 법정에 제시되었다. 

 재판에서 나온 삼십 이 페이지의 판결문은 "갓멘"의 총체적인 허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판사에 의해 상세하게 언급된 사실들은 전문가들 뿐 아니라 피고들의 선서 증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은 그 자체로서 자명하다. 법원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사건은 정식으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상대가 없는 재판으로 진행되었다... 상대가 없는 재판이었지만, 법정은 원고들이 역량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했음을 느꼈고, 또한 법정은 증언자들의 신분과 자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더 나아가서, 법정은 피고인들이 출두하는 것과 관계없이, 수정 헌법 1조 상의 권리(표현의 자유에 해당) 문제를 다루는 사건에서 요구되는 대로 진실을 확증하기 위해 증인들을 심문하고 반대 심문할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법정이 보기를 원하고 묻기를 원했던 것은 빠짐없이 제공되었다. 더 나아가서, 원고들을 위한 증거는 자격 있는 전문 증인들에 의한 독립된 증거로서 확증되었다. 따라서 법정은 미국에서 유포된 "THE GOD MAN"(증거물 1호)이라는 닐 티 더디의 저술과 수엔겔러 벌라그가 출판하여 유럽에서 유포한 책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에 대한 탐구"(증거물 3호), 그리고 닐 더디와 "영적 사이비 연구소가 인터바시티 출판사(Inter-Varsity Press)를 통해 미국과 영국에서 유포한 "갓멘(THE GOD MAN)"(증거물 5호)의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관한 탐구는 모든 주요 방면에서 거짓되고, 비방적이며, 특권 침해이므로, 명예 훼손임을 판결한다."(캘리포니아 민법 제 45조). 

판결문의 전문은 이 책 발행인이 보유하고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1억 1천 9백만 달러라는 손해 배상액은 손상 행위에 대한 재판장의 의견 및 책을 쓰는 데에 연관된 악의에 대한 그의 반응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재판에서 판정한 배상액은 결코 원고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영적 사이비 연구소"는 법원의 감독 하에 재편되었으며,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법원 결정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보상은 이 책에 기록된 증언에 있다. 
( 원본 - 영문 클릭 / 한글번역 클릭 )

 비록 "갓멘(THE GOD MAN)"과 "마인드벤더(THE MINDBENDER)"는 출판계에서 회수되었지만, 그들이 지어낸 악한 소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매번 새로운 사이비교 소동과 함께 케케묵은 정보가 되풀이됐다. 이 책의 증언은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그들의 비난에 대한 해독제이다. 

 여섯 명의 전문가들은 증언하고서 십 년이 지난 후에,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관한 이 책에 있는 그들의 결론이 확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이 책이 발행되기 전에 그들의 증언을 재검토했고, 최신의 논평을 할 기회를 가졌다. 멜튼 박사(Dr. Melton)는 1993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미국의 사이비들에 대한 백과 사전 편람(Encyclopedic Handbook of cults in America)을 이용하여 두 책으로 인해 (지방)교회가 잘못 분류된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로 삼으려고 애썼다. 불행하게도 몇몇 사람들은 그 책에 있는 (지방)교회들에 관한 단순한 언급은 그가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은 (지방)교회를 사교로 간주한다고 추정했다. 멜튼 박사는 그 같은 추정을 하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 사람에게 보낸 1995년 7월 3일자의 최근 편지에서 그의 현재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의 짧은 기간 동안에 (지방)교회와 개인적으로 반목하는 몇몇 사람들이 (지방)교회를 사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거의 십 년 간 여기서는 그러한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강하게 강조하는데, 내 책에 있는 그들에 대한 결론(서문에서 분명히 진술했듯이)은 이 책에서 논의된 다른 단체들과 그들의 유사성을 다만 논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미에서는 거의 십 년 동안 (지방)교회가 "사교"임을 암시하는 어떤 문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을 수년 동안 조사하고 나서, 나는 (지방)교회가 주로 교회론, 경건, 종말론의 문제에서 기타의 교회들과 다른 정통 그리스도인 교회라고 결론지었다. 즉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든 기독교 종파들이 일치되지 않으며 또한 불일치가 허용된다." 

마침내 대중은 진정으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의 증언을 숙고할 수 있으며,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에 관한 합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그 결말은 한 사람이나 한 단체를 단순히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검토하는 것을 기뻐한다. 

 얼마의 독자들이 이 땅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해 새로운 빛과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의 세부적인 사항에 동의하지 않은 편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지방)교회의 참된 신앙이 마침내 보다 분명해졌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여전히 만족하고 있다. 이 책을 여론의 거대한 법정에 맡긴다. 여러분이 읽을 때 진리 안에서만 발견되는 빛과 자유와 기쁨이 있기 바란다. 

 1995년 10월 26일 캘리포니아 아나하임 댄 토울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1. 05:00


사람을 새롭게 하고 나라를 축복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 


RECOVERED TO THE BIBLE
 


성경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경은 인류와 우주에 관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제시합니다. 

역대로 성경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하고 

축복받는 인생을 산 것은 이것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우리는 인류사를 통해 성경이 보급되고 영향력을 미칠 때 

사회가 축복을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매일 이러한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향유할 권리가 있습니다. 

2007년 8월 26일 성경의 참된 가치와 그 풍성을 새롭게 조명할 

'컨퍼런스 2007 성경으로 돌아가자'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 2007년 8월 26일 (주일) 오후 1시 30분 

장소 : 잠실실내체육관 

주최 : RSG위원회, 한국복음서원, 로고스코리아, 성경진리사역원

중앙일보 13253호 원본 :  지방교회_중앙일보13253호_20070822.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31. 05:00


'복음절기 행사' 시민들 관심 끌어


로고스코리아 등‘성경으로 돌아가자’컨퍼런스 갖고 시가행진도

로고스코리아, 한국복음서원, 성경진리사역원이 공동 주최한‘컨퍼런스 2007 복음절기 성경으로 돌아가자’가 지난 26일 주일 오후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1만6천여명의 성도들이 모인 가운데“우리의 일곱가지 선언”을 시작으로 성대히 개최돼 한국에서 회복교회의 세를 과시했다. ①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임을 선언한다. ②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서 호흡해 내신 것임을 선언한다. ③ 우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이해할 영(靈)을 받았음을 선언한다. ④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모든 일들의 해답임을 선언한다. ⑤ 우리는 사람이 매일 성경을 읽도록 부름 받았음을 선언한다. ⑥ 우리는 모든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온전하게 되도록 정해졌음을 선언한다. ⑦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축복할 것임을 선언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자의 주제에 대한 이 일곱가지 선언은,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진리요, 복음임으로 곧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뜻이고, 진리는 생명이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생명을 가져오게 하는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주최측의 이날 행사는 일곱가지 선언에 이어 앤드류 유의 설교와 ‘성경말씀의 역사’라는 영상물 상영으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신언자(예 언자)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인류에게 생명의 말씀을 선물로 주었으나, 교회는 때때로 이 말씀을 가리우고 잘못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종들을 통해 그 말씀을 밝히 드러내었으니, 그들이 바로 위클리프, 틴데일, 마일즈 커버데일, 마르틴 루터, 존 녹스와 칼빈 등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 왔고, 20세기 들어 위치만 니에 의해 많은 부분이 회복되었음이 강조되었다. 또 최근 출판된 한국어 신약 회복역성경에 대한 소개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대학생, 배우, 치과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이 차례로 나와 성경을 읽음으로써 받은 은혜의 체험을 간증했다. 그리고 이날 간증은 해외 교포 및 외국인들도 참여했는데, 미국, 중국, 대만, 러시아, 몽골, 일본 등에서 온 성도들이 직장이나 집에서 성경을 읽고 받은 하나님의 놀라운 체험의 역사를 간증해 감동을 주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가장 위대한 선물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모든 일들의 해답

이날 소개된 한국어신약 회복역성경은 첫째, 헬라어 원문을 정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번역하되 일관성을 유지하여 직역했으며 둘째,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의 문체를 사용하였고 셋째, 9천개 이상의 방대한 각주를 달아 분문 해석을 도왔으며 넷째, 1만3천개 이상의 관주가 붙어있고 다섯째, 성경 각권의 개요을 첨부해 그 책 전체에 대한 호감도를 갖게 했으며 여섯째, 각종 도표와 지도는 신약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편집되었다. 이날 복음절기 행사는 실내행사가 끝난후 1만5천여명의 참가자들이 실내 체육관에서부터 코엑스까지 2Km를 악대와 기수단을 앞세우고 각 대대로 나누어 행진했는데, 이들은 행진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이다. △성경은 영으로서 성경을 이해한다. △성경은 모든 일들의 해답이다. △성경은 매일의 필독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양육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온전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회를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라를 축복한다라는 피켓과 프랭카드를 들고 행진구호를 외쳐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최측의 이날 복음절기 행사의 복음행진은 그동안 정치적 시위만을 보아온 서울시민들에게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

교회연합신문 704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클릭)
지방교회_교회연합_704호_070909.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30. 05:00



‘성경으로 돌아가자’ 대형 복음집회 개최


로고스코리아 등 26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서

오는 26일 서울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컨퍼런스 2007, 성경으로 돌아가자”(Recovered to the Bible) 라는 주제하에 약 1만5천명(해외 성도500여명 포함)이 모여 대규모 복음전파 행사가 진행된다. 이 행사는 한국복음서원, 로고스코리아, 성경진리사역원(이하 ‘주최측’이라 표기함)이 주최하는 것이다. 주최측 관계자에 따르면, 실내 체육관 복음집회 후에 약 1만 여명이 가두행진을 할 예정이다. 행진코스는 실내 체육관에서부터 코엑스까지 약 2km이며, 한국전력 앞 광장에서 해산할 예정이다. 많은 경우에 가두행진은 불만이나 요구조건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주최측의 가두 행진은 아주 평화적이고 특별하다고 한다.

주최측에 따르면 가두행진을 하는 목적은 복음의 영을 회복 하는데 있다. 그들은 긴 행렬을 이루고 그 중간 중간에서 크고 작은 북을 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도덕을 사랑하자는 표어를 선포함으로 포괄적이고 합당한 복음전파의 길을 여는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복음 행진기간 동안 이번 행사의 주제인“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도 반복해서 선포할 예정이다. 이러한 주제아래서 다음의 일곱 가지 항목으로 세분화 된 선언문 내용을 보면 이번행사의 주된 의도가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1.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임을 선언한다. 2.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서 호흡해 내신 것임을 선언한다. 3.우리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이해할 영(靈)이 있음을 선언한다. 4.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일들의 해답임을 선언한다. 5. 우리는 사람이 매일 성경을 읽도록 부름 받았음을 선언한다. 6. 우리는 모든 사람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 받고 온전하게 되도록 정해졌음을 선언한다. 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축복할 것임을 선언한다.

사실‘성경으로 돌아가자’ 라는말은 이번에 처음 나온 구호는 아니다. 멀리는 종교개혁자들도‘오직성경’을 외치며‘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주최측이 말하는‘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들의 설명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오(無誤)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런 가운데 성경의 절대 권위에 대한 불신이 우리의 근본 신앙을 손상시키는 심각한 요소들 중 하나임을 지적하는 성경학자들이 있다. 따라서 성경을 참되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인정할 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정도까지 성경을 신뢰해야 한다.

둘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자는 제안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면 왜 이런 제안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되는 면이 있다. 미국교회의 경우 성별된 근본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성도들 중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5%미만이라는 통계가 있다. 한국교회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운동이 몸에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실천에 옮기고 또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려면 함께 운동할 친구를 만들라고 조언한다. 같은 원칙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은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그룹을 만들어서 읽자는 것이다.

셋째, 성경은 연구의 대상만이 아니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영적 양식이다. 성경에서는“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한다(마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의 대상으로만 대하기 때문에, 성경 지식은 많은데 실제 삶 속에서 말씀의 힘으로 사는 체험이 부족하다. 따라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섭취하고 소화하여 성경의 말씀에 따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사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섭취 소화하여 

말씀에 따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이 목표


 주최측은 대회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일년일독(一年一讀)하는 성경읽기표를 나눠주고, 포켓 성경(마태복음 요한복음)을 선물로 줄 모든 믿는 이들은 누구나 각지에서 적절한 숫자의 그룹을 형성하여 규칙적으로 함께 성경을 읽도록 도운다. 이러한 ‘성경공부 모임’ 의주된 초점은 그 모임의 구성원들과 그들의 믿지 않는 가족들, 친구와 친지들, 직장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다.

앞서서 언급한대로 이번 행사 후반부에는 복음 대행진이 예정되어있다. 여러 사람이 큰 거리에서 행진한 번 한다고 해서 과연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현재 한국의 복음화율은 25%를 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히려 교인수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선교학적으로 '사회 복음화 비율이 20%를 넘게 되면 불신자들과 관계를 형성한 다음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다. 오이코스 코리아 대표 이상만 목사는 “현재는 완전한 하나님처럼 사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전도의 효과가 없는 시대”라고 말한 다.

그렇다면 주최측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번 복음 행사를 기획했으며, 그들이 말하는 복음 전파는 과연 무엇인가. 주최측도 이런 행사를 통해 당장복음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이런 행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복음의 영을 분발시킴으로 복음 전파에 대한 담대함을 갖고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데 주된 목적이 있다.

통계상으로는 한국의 전체 인구 가운데 네 사람중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생활 가운데서 불신자들에게 본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목표는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사복음서의 각 권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마쳐진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는 것이었다(행1: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 전파가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자 교회의 가장 큰 위임이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특별히 주최측은 이번 행사의 주된 목표가 일부 성직자들이나 직분이 있는 사람들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들이 일어나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또한 온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25%의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75%의 이웃임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복음 전파를 강조하지만,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전파보다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끌어오는 ‘교회 바꾸기’ 또는 ‘수평이동’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목표는 건전하며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한편 이번 행사를 주최하는 한국복음서원은 미국 ECPA(복음주의기독교 출판연합회)의 정회원이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자만을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Stream Ministry(LSM)’의 출판물을 한글로 번역 소개하는 곳이다. 로고스코리아는 지난 20세기 교회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성경 진리 중에서 엄선된 소중한 진리들을 담은 책자를 무료로 배포하는 문서선교기관이며, 성경진리사역원은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에게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성격을 훈련하여 유용한 복음전파자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지방 교회들 '성경으로 돌아가자' , 교회연합신문 702호 다운로드 -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702호070819.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8. 05:00

발신인: 지방 교회측 진리변증위원회(DCP Korea)                   2013. 12. 23.

서울 도봉구 창4동 은혜빌딩 101호

전화: 010-3515-3927

수신인: 월간 현대종교 탁지원 대표/ (중국) 현지사역자

서울시 중랑구 용마산로 122길 12 (망우동 354-43)

전화: 02-439-4391  

제목: 현대종교 12월호(2013년)의 거짓 루머 유포에 대한 항의 서한

안녕하십니까? 위 '지방 교회측 진리변증위원회'는 성경의 진리를 확증하고 빗나간 부분들을 변증함에 있어서 전세계 지방 교회들 내의 한국어권을 대표합니다. 이 항의 서한은 귀측의 2013년 12월호 '중국 이단 현황(3)-중국 자생 이단들의 모태 호함파' 기사와 관련됩니다.

귀측의 보도대로라면, 현재 중국에는 거의 남한 인구에 육박하는 약 4천만 명의 성도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워치만 니가 투옥되던 1950년대 초반에 수만 명에 불과하던 성도들이 중국 공산 정부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약 반 세기 만에 수천만 명으로 1000배 이상 증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그분의 도구로 쓰인 워치만 니라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요12:24).

그러나 귀측은 위 중국 내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는 전무하고, 단지 두 성경 교사가 자기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애써 폄하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귀 현대종교와 '현지사역자'께서 이처럼 중국 내의 기득권자의 논리를 추종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공산 정부를 돕고, 참된 성도들을 박해하며, 더 나아가 사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려됩니다.

전반적으로 귀측 기사 내용은 그저 '떠다니는 말들'을 마치 '실체적 진실'인양 문자화하여 독자들을 오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도 로마 정치와 결탁한 종교세력이 군병들을 회유하여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모략을 꾸민 것이 나옵니다(마28:13-14). 그 결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해 갔다는 거짓 루머는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5절). 귀측이 소개하신 중국 내의 두 성경 교사들과 관련된 루머들의 본질은 대부분이 이와 같습니다.

귀측의 보도 태도도 매우 아쉽습니다. 우리는 귀측이 무엇이 두려워 흔한 영문 이니셜 조차 밝히지 못한 채 '현지사역자'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들을 기사화 하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이미 명백한 증거와 함께 해명했던 것들마저도 재차 기사화하신 것은 귀측의 저의를 의심하게 합니다. 이러한 보도 태도는 공평하지 않은 것이며, 귀 현대종교의 명성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임을 환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돌이켜 볼 때, 귀 측은 1982년 창간호부터 최근 2013년 6월호 동방번개 특집 기사에 이르기까지 지방 교회들과 관련하여 숱한 왜곡된 정보들을 기사화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귀 잡지 편집장 이영호 목사께서 쓰신 2001년 9월호 기사는 귀측 거짓말의 백미에 해당 될 것입니다. 그분은 워치만 니의 동역자인 위광휘 형제가 중국 곤명 지역에서 사역한 것을 위트니스 리로 착각하고,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곤명 지역 거주 토착인들로부터 「위트니스 리가 '신인합일 사상'을 처음 배워 발전시켰다」라는 소위 '신인 합일설' 특집 기사를 쓰셨습니다. 이러한 보도가 귀측의 실수요 명백한 착각이었음이 밝혀진 후에도 귀측은 사과조차 없으셨고, 이런 거짓 기사는 논문 형태로 지금도 계속 유통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자신이 한 그 말로 장차 심판받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마12:36-37, 고후5:10).

이제 귀측이 '현지사역자' 명의로 보도하신 잘못된 기사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반박하고 해명하겠습니다.

워치만 니 관련 : 1. 워치만 니가 교파 사람들을 끌어갔다는 지적에 대해

귀측은 "워치만 니 추종자들이 다른 교파 사람들이 세운 교회들을 허물고 교인들을 끌어간다는 소문"에 따라 왕명도 선생께서 워치만 니를 만났으나 "그가 왕명도 선생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현대종교 12월호 126-127쪽).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근본원칙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 모든 양들은 피 값 주고 사오신 주님 자신의 소유이고(행20:28), 또한 모든 교회들은 주님 자신의 교회입니다(마16:18). 따라서 결코 특정 사역자나 특정 교파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점이 분명했던 워치만 니는 죄인들을 구원받게 한 후, 다만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며, 교파가 아니라 각기 자신이 사는 그 도시를 범위(계1:11)로 몸의 머리되신 주님(골1:18)을 나타내는 성경적인 교회 생활을 하도록 권면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성경적인 권면을 따지러 온 사람에게 워치만 니는 잠잠했을 뿐이고, 상대방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무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워치만 니와 왕명도 선생이 두 번째 만남 시에 “매우 냉담하고 무례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고 하셨는데 그 당시 두 분의 나이는 고작 20대 중반에 불과했습니다.

참고로 '중국어문선교회' 전 편집장 석은혜 선교사는 자신이 쓴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현황과 바람직한 선교 방향'이란 글에서, 한국교회가 한 중국선교의 첫번째 문제점으로 '교파주의와 교세확장 선교'를 지적했습니다.http://cafe.daum.net/chinabless/57o6/7

2. 워치만 니가 투옥된 이유가 재산을 지키려고 로비를 했기 떄문이라는 지적에 대해

귀측은 "워치만 니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은 삼자교회에 반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재산을 지키려 오히려 삼자교회 지도자에게 로비를 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현대종교 12월호, 127쪽).

이 글을 쓰신 익명의 '현지사역자'께서는 "왕명도 선생이 남에게 들은 말"이 어떻게 또 왜 실체적 진실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지키려 한 정황으로 이해될 만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등 자신의 추측과 가정(假定)을 토대로 소위 '카더라 통신' 정도의 루머 전달 역할만 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귀하는 "워치만 니가 일찍부터 변절했을 가능성마저 엿볼 수 있다"는 식으로 워치만 니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 이 글을 쓰신 숨은 목적임을 은연 중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1) 그 당시 워치만 니는 토지개혁에서 사찰이나 예배당 등에 둔 예외 규정에 따라, 고령산에 위치한 훈련센타 건물에 대해 법의 절차를 밟아 청원한 것입니다. 2) 워치만 니는 교회의 공식 지원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3) 고문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왕명도 선생과 달리, 워치만 니는 온갖 회유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감옥 생활 20년 내내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가 생을 마감한 후 베개 밑에서 떨리는 손으로 쓴 종이 한장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워치만 니"

3. 워치만 니가 이성 사역자와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지적에 대해

"워치만 니의 윤리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왕명도 선생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여자 사역자 두 명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그의 주변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현대종교 12월호, 127쪽).

여기서도 왕명도 선생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모함은 이미 공산화 이전부터 그의 사역을 시기하던 사람들로부터 있어 왔습니다. 한번은 워치만 니의 병 수발을 위해 모친이 잠시 함께 기거하던 때에, 워치만 니가 어떤 여인과 동거하며 불륜을 저지른다는 헛소문이 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거짓말쟁이의 아비는 마귀 입니다(요8:44).

그럼에도 '현지사역자'께서는 "워치만 니가 징역형에 포함된 간음죄에 대해 스스로 시인했다고 한다"는 식으로 재차 '카더라 통신'을 남발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중국 공산당이 수 많은 외국 선교사들도 같은 죄명으로 강제 추방하던 때입니다. 누구든지 양심이 무뎌지면 결국 믿음이 파선합니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20년의 혹독한 감옥 생활 동안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가 양심에 가책될 일을 하지 않았음을 이것보다 더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있을까요?

한편 '현지사역자'께서는 워치만 니가 고문 때문에 거짓 자백한 것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그 당시...교회 지도자들은 고문을 당한다고 해서 거짓 자백을 한 예는없었다"고 단정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의 중국 사정에 무지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왕명도 선생이 바로 고문 때문에 신앙을 버렸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http://pann.nate.com/talk/119930097

참고로 중국 공산당이 집권 후, 지방 교회들, 특히 워치만 니가 사역했던 상해 교회를 와해시키려고 특정인을 회유 혹은 협박하여 거짓 증언 또는 글을 쓰게 한 사례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거짓 증언들을 이용하여 고난받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마24:49-51).

그외 다른 언급들도 유언비어 수준에 불과함으로 더 이상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고 봅니다.

4. 워치만 니 관련 자료들 소개

우리는 이 글을 쓰신 '현지사역자'님과 독자분들에게 워치만 니의 전기인 <금세기 신성한 계시의 선견자 워치만 니>(한국복음서원, 2007)라는 책을 권해 드립니다. 이 책은 워치만 니를 객관적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기 때문입니다(간략한 정보는 여기를 참조: http://www.watchmannee.kr/watchman-nee/index.html ).

-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잡지 중 하나인 Christianity Today 지는 워치만 니를 20세기 가장 영량력 있는 그리스도인 100인 중 한 명으로 추대한 바 있습니다. 또한 미국 하원의 스미스 의원께서는 이러한 워치만 니의 공로를 치하하는 문서를 미국 국회 의사록에 남겼습니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miscdocs/Watchman%20Nee-Congressional%20Record.pdf ).
https://youtu.be/lVhyXgEEw4g )

- 중국 난징 소재 진링(金陵) 연합신학대학의 교수인 왕애명(王艾明) 박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나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동안 지속적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쓴 거의 모든 저작물들을 연구하고 또 읽었다. …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중국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인 거인들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36 )

- '워치만 니의 이해: 영성, 지식, 형성>'(Understanding Watchman Nee: Spirituality, Knowledge, and Formation)이라는 책을 저술한 오동생(吳東生) 박사는 워치만 니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의 영성 신학은 보편적인 복음주의 신학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토착 중국 신학의 걸작이기도 하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54 )

이외에도 최근에 홍콩에서 전 세계 워치만 니 관련 신학자들이 모여서 워치만 니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곧 책자화 되어 나올 예정입니다.

 

소위 호함파 관련 :

1. '호함파 (또는 외침파)'와 지방 교회들

단적으로 말해서 반 정부적 반 사회적 범죄 집단이고 교리적으로 이단적인 단체라는 의미로 중국 내에서 호칭되는 소위 '호함파'는,순수한 의미의 '지방 교회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분명한 근거를 따라 순수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실행'(롬10:12-13, 행9:14) 을 하는 무리와 소위 '호함파'는 전혀 무관함을 전에 이미 여러 차례 귀측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데이빗 에드니, 중국 선교, IVP출판부

이 점은 중국 사정에 정통한 많은 전문가들도 인정합니다. 한 예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했고 추방된 후에도 중국을 일곱 차례나 방문했던 데이빗 에드니는, "반혁명 조직, 외침파의 지도세력 적극 타도"라는 문서에 등장한 '체포된 일곱 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체포된 일곱 명이 모두 위트니스 리의 추종자들과 연계된 것은 아니다. 이제 '외침파'(호함파)는 여러 형태의 가정교회 교인들을 포함하는 통칭이 되었다"(데이빗 에드니, 중국 선교, IVP출판부, 1992, 159쪽).

이외에도 영문 위키피디아 '호함파'(The Shouters) 자료가 제시한 출처들(China Prayer Letter 제 48호, China’s Christian Millions 81쪽, China: State Control of Religion 31쪽)에 따르면, 중국 내에서 '호함파' 라는 말은 "삼자교회 가입을 거절하는 모든 크리스천 그룹"(any Christian group which refused to join TSPM)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귀측은 '호함파 = 위트니스 리 추종자'라는 잘못된 개념을 토대로 기사를 쓰심으로 전체 기사들 중 적지 않은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2. 소위 '호함파'의 폭력성에 대해

귀측은 경찰차를 뒤짚은 사진과 함께 "간혹 호함파 신도들에 의해 일반 교회당지방 관공서와 파출소가 공격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귀측은 마치 이런 폭력이 지방 교회측 성도들에 의해 행해진 것처럼 독자들을 오도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 없는 모함이요 심각한 사실 왜곡입니다. 전문가들은 '호함파'가 '삼자교회 가입을 거부하는 모든 크리스천 그룹'을 가리킨다고 정의하고 있음을 환기시켜 드립니다. 전 세계에서 지방 교회측 성도들이 정부 권위에 대항하거나 교회당을 공격한 사례는 지금까지 전무합니다.

이슬람교나 다른 사이비 단체와 달리,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는 '폭력'을 정당화하도록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참고로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 13장 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라는 말씀에 대해, "가이사가 임명한 관리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통치자들로 인정하여 하나님의 대표 권위자로 여겼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3. 이상수 형제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르라고 했다는 거짓 증언에 대해

'현지 사역자'께서는 "중국에서 위트니스 리가 직접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칭하여 섬기기를 요구했다는 증언들도 많은 기록들 속에 나타난다. 중국 당국이 정리한 호함파 자료들에는 그런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호함파가 '상수주파(常受主派)'라고도 불린다)."라고 적고 계십니다(현대종교 12월호, 130쪽).

이 역시 심각한 사실 왜곡에 불과합니다. 귀측도 바르게 지적하신 것처럼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통해 산출된 교회들이 전 세계에 수천 개가 넘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이런 일로 시비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산 치하의 중국 본토에만 이런 터무니 없는 논란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귀측은 '순수한 지방 교회 성도들'과 '온갖 종류의 단체가 포함된 개념인 호함파'를 동일시함으로 이런 명예훼손적인 거짓말을 반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1) 1949년 중국을 떠난 이후 위트니스 리가 중국을 재방문한 사실이 없다는 법정선서 기록, 2) 상수주파를 향해 기상천외한 사람 숭배를 즉각 그치라는 육성녹음과 녹취록을 귀 현대종교 측에게 제시하고 강력히 항의한 바 있습니다.

귀측은 이 문제에 대해 타인의 증언말고 위트니스 리가 육성 혹은 자신이 쓴 글로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라'고 직접 요구한 증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떳떳하게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고 지금처럼 유언비어에 속한 자료만 있다면, 더 이상 이런 거짓말로 마귀에게 이용당하지 않으시기를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4. 위트니스 리의 신인합일 사상이라는 왜곡에 대해

현지사역자께서는 “위트니스 리의 신인합일(神人合一사상은 언제든지 그 지도자나 추종자들 중 누구라도 자칭 하나님이 될 길을 열어두고 있는 교리라는 사실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현대종교 12월호, 130쪽).

정통 교부들이나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혹은 신화(神化)의 가르침은 결코 중국 내의 자생 이단 교주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신들만 참 하나님 또는 참 주님이니 교주인 자신들을 경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이들 모두가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을 것을 가르칩니다. 즉 모든 참된 믿는 이들은 거듭나고, 거룩케 되고, 새롭게 되고, 변화받고, 형상을 본 받고, 영광에 이름으로 연합이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현지사역자'님은 중국 내 이단들인 '상수주파', '동방번개파', '피립왕파', '주신파'가 호함파 이론(신인합일 사상?)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며 통틀어 비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가르침을 자세히 검토해본다면, 순수 지방 교회들이 참으로 믿고 실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위 열거한 이단들은 귀측의 주장처럼 순수 지방 교회들의 '분파'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지방 교회측 집회에 한 두번 참석한 것을 빌미로 지방 교회측과 연관지어 비난하는 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즉 그렇게 주장하시는 것은 장로교단 소속 창동교회 장로 출신인 박태선이 만든 '천부교'(신앙촌), 더 나아가 "15세에 가족들을 따라 장로교 신자가 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알려진 문선명이 세운 '통일교'도 장로교 이론에 뿌리를 둔 장로교의 분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결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순수하게 따르는 지방 교회들은 '호함파'와 달리, 정부에 대항하거나, 반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르거나, 성경과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첨부서류 첫번째 자료를 참조). 항간에 떠도는 루머와 거짓 자료들은 지방 교회 성도들이 참되게 믿고 실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귀 현대종교측이 더 이상 어둠의 세력에 이용당하지 않기를 정중하게 당부드립니다.

아울러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차이나에이드 협의회'(China Aid Association)의 2013년 10월 8일자 보도 내용 중 일부를 우리의 결론글 중 일부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차이나 에이드'(ChianAid)는 중국 본토 전역에서 벌어진 '외치는 자들'에 대한 박해에 깊이 우려하고, 중국 정부가 "이단"이라는 말을 빌려 이러한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해 격분한다. 일곱 명의 '외치는 자들' 그리스도인들이 허난(河南)성 핑딩산(平?山)시에서 "이단" 범죄로 선고받은 것과 함께 이번 사건도 심각한 종교 탄압의 사례들이다. 지방 교회(the Local Church)가 과거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이 단체를 더 이상 이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 정부는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단"이라는 낙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첨부서류

1. 중국내 지방 교회 한 장로의 ‘상수주파’의 기원 등에 관한 증언(필독-이 자료를 읽으시면 순수 지방 교회 성도들과 반 정부적이고, 반 사회적이며 이단적인 여타 분파들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90

2. 위키피디아 '호함파' 자료(영문): '함파 자료(한글) 클릭'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D%95%A8%ED%8C%8C

3. 상수주파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육성증언 녹취록: http://local-church.tistory.com/107

4. 과거에 대종교측에게 보낸 상수주파 관련 항의 서한들:
http://www.forthetruth.or.kr/mboard.php?bcode=notice&mode=read&bidx=1287

http://forthetruth.or.kr/booklets14_13.htm

http://www.localchurch.kr/5057

5. 차이나 에이드 협의회 보도 내용 (전문): http://local-church.tistory.com/143

6. 왕애명 박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관련 공개 간증:
http://local-church.tistory.com/136

7. 워치만 니의 영성신학에 대한 오동생(吳東生) 박사의 평가 :
http://local-church.tistory.com/154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7. 05:00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의 기인과 변천,

또한 이단적인 본질

壹 작가의 배경  
貳 중국대륙에 있는 이른바「후한파」 
參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의 기인과 변천 
肆 이 상수(李常受) -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에 대한 반응  
伍 「중화대륙 행정 사역처-中華大陸行政執事站」의 이단적인 전단지  
陸 「차앙쏘주파이」와「중화대륙 행정 사역처」의 이단적인 잘못 
柒 결론 



 壹 작가의 배경

一 은혜를 받은 과정 

 나는 1931년 중국의 허난성 예쌘(河南省葉縣)에서 태어났다. 나의 증조모와 부모님 모두 주님을 믿으셨고,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집회에 참석하였다. 1946년 내가 15살 때에, 유월절 어린양에 관한 복음을 듣고 분명하게 구원을 받았다. 1951년에 주님을 사랑하는 자매와 함께 결혼을 하였고, 결혼 후에 온 가족이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했기에 형제자매님들을 자주 접대하였으며, 집에선 자주 집회가 있었다.  

二 인도함을 받음으로 도움을 얻음 

내가 주님을 추구하며 사랑하는 과정 가운데서, 우리 지방에 있는 지방교회의 책임 형제님들이신 로허잉(婁和贏), 허위꽤(和玉貴), 우총싼(吳崇三), 꿔턘은(郭天恩)형제님들께서 나에게 많은 영적인 도움을 주셨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분들을 통해서 나는「상해 복음서원」이 출판한 책자들인 《부흥보》,  《웟치만 니 메시지 기록》, 《열두 광주리》, 《교회의 정통》, 《무엇이 신약인가》, 《그리스도인의 50필수과정》등을 얻게 되었다. 이런 책자의 도움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께서 생명되심을 알았을뿐만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경건함과 거룩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됐다. 그렇기때문에 후일에 있었던 「인민 공동 사회화-人民公社化」 그리고 3년간의 자연 재해 기간에, 의복과 식량이 부족하고, 생활이 극도로 빈곤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기꺼이 죽을지언정 국가와 단체의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고, 가져오지도 않았으며, 일등 국민이 되었었다. 

 三 「문화혁명」기간에 핍박을 받고 구금을 당함  

1966년부터 시작된 십년의 「문화대혁명」은 천만의 중국 인민들에게 큰 재해를 안겨주었다.단순하게 주님을 믿은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도 피할 수가 없었다.「낡은 네가지를 파괴하고, 새로운 네가지를 세우자」 라는 흐름 가운데서, 우리의 성경, 찬송가, 영적인 서적등은 모두낡은 네가지로 보여, 몰수당하고 불태워졌다. 나도 「소, 귀신, 뱀, 하나님」이라 불리며, 비판을 당하고, 죄수가 쓰는 모자를 쓰고, 가두행진을 했다. 그럴 뿐만아니라 문화대혁명 말기에 이르러, 1975년 10월 4일에 나는 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의 「샤아췬파이-小群派」에 참석했다고 고발됐으며, 「현행 반 혁명죄」란 명목으로 5년을 선고 받았다. 형을 선고받은 후, 나는 시화쌘(西華縣)52농장에 보내져 노동 근무를 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 정부가 무고한 자와 잘못된 안건을 심사하던 중, 나는 무고죄로 표명되어 억울함을 깨끗이 씻게 됐고, 무죄가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四 「문화혁명」후에 부흥됨 

내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온 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따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였지만, 다만 성경과 영적인 서적이 부족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어떤 사람이 광쪼(廣州)에서 성경과 이 상수 형제님의 책인《경건을 훈련함》, 《영과 생명》, 《주님의 회복-먹음》, 《주님과 함께 삶》, 《마태복음 라이프스타디》 등을 가지고 왔다. 이런 영적인 서적들의 도움을 통해서, 나는 부흥되었고, 안에서 압박을 당하던 영이 해방됨을 받았다. 그럴뿐만 아니라 내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이런 책자의 도움을 통해서 높여지게 되었다. 더이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복과 평안이 있게 되고,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간다.”라고만 말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완전한 복음, 즉 은혜의 복음과 왕국의 복음을 전했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죄로 하여금 사함받게 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게 했으며, 더 나아가 의의 열매를 맺어, 거룩하고 의로우며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을 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이 전해짐으로 우리 전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음으로 구원받게 됐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 나이든 분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 지방에 있는 사회의 치안이 크게 전환됐고, 사회의 분위기도 크게 개선되었다. 원래 적지않은 불량한 청년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교회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과 사회에서 모범적인 시민이 되었다. 본래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불화, 부부간의 다투고 싸움함, 심지어는 부서져버린 가정이,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 회복됨을 얻어 행복한 가정으로 되었다. 이러한 예들이 우리 지방에서 셀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와같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을 인도해 구원시키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국면은, 정부가「사인방-四人幫」을 분쇄시킴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이끌어 온 장기적인 소란함을 정상으로 돌이키고, 개혁을 통해 개방하기 시작한 후에 생겨난 것이다. 이런 좋은 국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또한 마음속에서부터 정부의 정책과 법과 실시하는 것들을 옹호했다. 

 貳 중국대륙에 있는 이른바「후한파-呼喊派」 
 

 一 「후한파」 운동에 대한 타격 

안타깝게도 이처럼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국면은 얼마가지 못했는데, 나의 체험에 따르면 2년 반에 불과하다. 1983년 6월에 중앙 정부는 전국에 발표하기를, 반동 조직인 「후한파」에 엄중한 타격을 주고, 강력히 단속하라고 통보하였다. 정부가 발표한 통보에 근거하면,  “「후한파」는 종교란 깃발을 내걸고 불법적인 활동을 진행한 반동 조직으로, 그들은 미친듯이 외치며, 소란을 피우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며, 그들은 광란적이고,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롭게 하며, 그들은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치료하며, 사람의 생명을 잔해하고, 그들은 소문을 만들어 민중을 유혹하며, 부녀자들을 속여 간음을 행한다.” 라고 언급했다. 그리스도와 교회란 깃발을 내걸고 성경을 위반하고 그히스도인의 신앙을 위반하거나, 심지어는 국가의 법을 범하는 일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범죄자들로 인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엄중한 질책을 받았다. 정부가 법에 근거하여 범죄 활동에 대한 타격을 가하는 움직임을 우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완전히 지지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정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정부를 세우신 목적은, 바로 선한 일은 상을주고, 악한 일은 벌함으로(로마서13장), 우리로 하여금 매우 경건하고 정중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온한 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와 정부의 영도자들을 위해 자주 기도하고 간구한다. 

二 운동의 확대됨 

 그렇지만 이른바 「후한파」를 공격하려는 운동은, 시작할때부터 현저하게 확대 되어졌다. 중앙정부에서 통보가 나가자마자 각지의 공안국 기관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이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우리 현을 예로할 때, 한 번에 수백명을 붙잡아 가서, 어떤이들은 대대에 갇히고, 어떤이들은 인민공사에 갇히고, 어떤이들은 현의 당교위에 갇혔는데, 왜냐하면 현에 있는 구치소와 조사대에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둬둘 큰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三 「후한파」를 판정하는 표준?

중앙정부의 통보는 한 가지고, 각지의 구체적인 집행은 또 다른 일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후한파」를 판정하는 표준인가? 각지의 표준이 같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다음의 두 가지 표준을 따른다. 하나는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상수 씨의 저서를 읽는 것이다.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후한파」의 표준을 삼는 것은,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포함시켜 버리는데, 왜냐하면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할때,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한 것을 따르면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라고 했는데,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구원받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나 자신도 자주 기도하는데, 자주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 어떤때는 큰 소리로, 어떤때는 작은 소리로하는데, 공공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수 있기에 작은 소리로, 혼자 있을때는 나의 영이 해방받고 훈현하기 위해서 큰 소리로 부른다. 그렇지만 내 자신이 「후한파」라는 것을 시인한 적이 없다. 나는 정부가 통보한 것과 같은 범죄에 의한 위법행위가 없었으며, 나는 단지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고,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이 상수 형제님의 책자를 읽는 것을 「후한파」라 판정하는 표준으로 삼았다. 가정에서나 혹은 집회장소에서 이 상수 저서인 책을 찾으면, 이 사람들이 「후한파」라고 말했고, 이러면 잡혀가거나, 갖히거나 벌금을 내게 됐다. 이것은 참으로 불공평하고, 논리에 맞지 않으며, 우매하고 무지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듯이 이 상수 씨는 광대한 그리스도인들이 공인하는 기독교의 교사이며 성경학자이다. 그의 저서는 모두 성경을 기본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저서는 수십종의 문자로 번역되어, 약120여 국가와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문서가 가는 곳마다 모든 지역에서 적극적이고 정면적인 영향을 끼쳤다. 본래 생활과 일에 있어서 방향이 없던 많은 젊은이들이, 뛰어난 문학가, 엔지니어, 변호사, 교수와 의사등이 되었다. 심지어는 전에 행위가 좋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 가운데 있음으로 인해서, 모범 국민이 되었다. 많은 지방교회안에는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름다운 간증들이 있어, 그들의 생각이 새롭게 됨으로써 가장 높은 표준의 도덕을 살아낸 것들을 간증하였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생활, 어진 아버지와 효도하는 아들, 형제가 우애있게 서로 공경함, 많은 사람들을 도와 파괴된 결혼 생활을 새롭게 세워줌 등이 있다. 교회안의 믿는이들은 모두가 정상적인 인생관, 정당한 직업, 적극적이고 진취적임, 낙관적으로 진보해 감이 있다. 교회안에 있는 믿는이들은 기꺼이 남을 돕고, 규율을 잘 지키며, 이웃과 지역 주민들이 칭찬을 하는 자들이다. 세계 각처의 사회에 적극적이고 정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오는 성경을 따른 건강한 가르침인 것을, 다만 중국에서 읽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 현에서 잡아간 수백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다수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요, 나라를 사랑하고 정부를 옹호하는 좋은 국민들이다. 그들 대다수는 조사와 심문을 받은 후에, 모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다만 우리 교회의 「장로」 5명만이 현에 있는 구치소에서 일년여 동안 갇혀 있었다. 일년 후에야 정식으로 수감됐고, 신속하게 엄중한 형벌을 받았는데, 우리들의 형기는 적으면 8년이고, 많으면 15년 이었는데, 나는 12년의 유기형을 선고 받았고, 죄명은 「반혁명 선전 소란죄」였다. 우리의 판결문으로부터 알수 있는 것은, 공안국 기관에선 「후한파」와 관계된 통보에서 열거한 것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서 어떤 형사에 관계된 범죄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판결받은 죄명은, 이 상수 씨의 저서를 읽고 그리스도인의 집회중에 이 상수 씨의 《마태복음 라이프스타디》를 전파한 것이다. 이 상수 씨의 《마태복음 라이프스타디》는 전세계에서 각종 언어로 발행되어, 천만의 사람들이 읽고, 듣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정부를 반하는 내용을 한마디라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cf. 1, 참고 : 위키피디아 - 호함파 링크 클릭 
cf. 2, 최근 중국 국가 이단단체 연구소와 중국 민간 이단단체 연구소에서
호함파 안에 위트니스 리와 관련성 없음을(제외시킴) 공식 자료를 통해 표명함-하단 자료 다운

Kaiwind Xiejiao List_k.pdf


四 억울함중에서 여전히 복종함 

우리가 이와같은 억을함을 당했다 할찌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공의를 따라서 심판하시는 주님께 맡겼다. 우리는 정부를 원망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더더욱 정부를 반대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잠시 억울함을 당했지만, 나는 정부가 언젠가는 사실과 진상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내가 첫번째로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던 것과 같이 억울함을 씻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형을 받은후에 카이풩쓰 허난성 제일 (開封市河南省第一) 감옥에서 복역하게 됐다. 복역 기간중에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한 생명은, 나로 가장 높은 도덕 수준의 생활을 살아 내도록 여전히 유지시켜 주었고, 이 외에도 규칙을 잘 지키며, 감옥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12년 형기는, 감형을 받고 앞당겨져 석방되었다. 나는 1992년에 출옥했으며, 1993년에 미국에 와서 식구들을 방문했고, 오늘까지 거주하고 있다.  

五 정부가 어지러움을 바로잡기를 소망함

「후한파」에 타격을 가하려던 이 운동은, 정부의 본래 의도가 종교란 겉옷을 걸쳐 입은 범죄자들을 제거하려는 좋은 것이었겠지만, 이 운동이 진행됨과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선 도리어 너무나도 확대되었다. 이는 50년대의 반 우익 운동과도 같았다. 당시 극소수의 우익파 분자들이 정부를 반대하긴 하였지만, 수십만의 지식분자들을 우익파로 선을 그음으로, 그들에게 수십년간 고통을 안겨주었고, 나라 전체의 이익에도 손상을 입혔었다. 후에 정부는 소란된 것을 바로 세우며 잘못 그었던 우익파의 오명을 벗겨주었는데, 이것은 아주 합당한 것이었다. 이번의 「후한파」에 타격을 가하려던 운동은, 많은 무고하고 단순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핍박을 받고, 휩쓸림으로 인해, 개혁을 인한 개방이래로 정부와 믿는이들간의 양호한 인상은 심하게 손상받게 되었고, 또한 극소수의 정부와 믿는이들간의 관계를 손상시키려는 자들에게 기회를 갖게 하였다. 정부가 합당한 인상을 유지하고, 더욱이 많은 믿는이들을 단결시키기 위해서, 이 일의 소란함을 바로잡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六 타격 운동이 교회에 이끌어온 결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형을 선고받았던 이른바 교회중의 「장로」들인 우리들은, 사실상 주님을 믿은지 비교적 오래됐고 연장한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의 진리를 비교적 잘 장비했고, 교회안에서 목양하고 돌보는 책임을 진다. 이들 교회안의 「장로」들이 갇힌 후에, 각 지방교회의 형제자매들은 목자가 없는 양무리가 되었으며, 마치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에베소의 교회에 경고한 말인 “나는 압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올 것이며, 그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일어날 것입니다.” (행20:29~30)라는 것과 같다. 바울의 이 말은 완전히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교회들에게 성취되었다. 이 후에 각종 이단과 사교(cult)단체 및 괴이하고 기이한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參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의 기인과 변천 

당시에 거의 모든 노련하고, 영적인 체험이 있는 인도하는 형제들이 모두 갇혔었기 때문에, 교회중의 젊은 형제들은 비록 열심이 있었지만, 성경의 진리와 영적인 체험이 부족했다. 1987년에 사탄은 먼저 교만하고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일어나서 자칭 주님이요, 아버지이며, 두번째 강림한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무지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그들에게 절하고, 기도하게 했으며, 그런 후엔 경배하고 기도하는 목표를 이 상수 씨에게 돌이켜서 이 상수 씨를 주님과 아버지라 불렀다. 

一 「청요-程有」의 이단적인 말:「아버지」를 숭배함이 산출됨  

「청요-程有」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청요-程有」란 사람은 본래 기독교의 루터파에 속했던 자로써, 1980년에 주의회복이 루싼썐(魯山縣)에서 일으켜진 후에, 그는 지방교회로 옮기어 집회를 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계속하여 야심을 가진 사람으로, 머리가 되고 싶어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1983년에 이르러 교회가 「후한파」 타격하기의 운동으로 인해 핍박을 만남으로써, 인도하는 형제님들이 모두 감옥에 갇힌 후에, 그의 야심은 드러나게 되었다. 1987년초에 그는 꿈을 꾼후, 하나님으로부터 대계시를 얻었다고 선포하며 말하길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중화대지의 아버지」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말은 즉시 동역자 형제님들에 의해 단호하게 거절을 당했다. 그는 벽에 부딪힌 후에도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마침내 루싼(魯山)교회의 동역자를 떠나 스스로 안양(安陽)시에 가서 다른 지방의 책임자들을 모아 놓고 집회를 하였다. 집회중에 그는 먼저 자신이 루싼(魯山)교회에서 온 동역자로 앞선 형제님들을 이어서 왕국 복음을 전파한다고 선포한 후에, 그가 꿈에 받았다는 이른바「중화대지의 아버지」란 「대계시」를 말했다. 그는 그 집회를 「아버지를 아는 집회」라고 칭한다. 그때 집회중 예썐(葉縣)의 란챵스으(藍強石)는 적극적으로 청요(程有)를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고, 청요(程有)는 곧 바로 란챵스으(藍強石)를 「허난성(河南省)의 아버지」로 세웠다. 란챵스으(藍強石)는 또한 허난성(河南省)의 각 현과 시와 향의 모든 곳에 소위 말하는 「아버지」를 세웠다. 

 그 후에 그들의 방식은 바로 모든 믿는이들이 자기 샹(鄉)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해야 하며, 샹(鄉)의 아버지는 썐(縣)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고, 썐(縣)의 아버지는 성(省)의 아버지를 향하여 기도하며, 성(省)의 아버지는 다시 청요(程有)를 향하여 기도해야만, 청요(程有)가 하늘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너무 멀리 있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땅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기도해야만 가장 편리하다는 것이다. 

 나의 아내와 장모님은 모두가 경건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비록 붙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우리 집에선 자주 그리스도인들의 집회가 있었다. 예전에 란챵스으(藍強石)는 예썐(葉縣)교회의 일원으로,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집회를 했었다. 란챵스으(藍強石)가 안양(安陽)에서 예썐(葉縣)으로 돌아온 후에, 예썐(葉縣)에서 「아버지를 아는 집회」를 똑같이 소집했다. 그는 나의 아내를 찾아와 말하길 “당신의 집에서 집회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의 아내는 그가 이미 사악한 흐름을 받음으로, 이미 청요(程有)를 그의 아버지로 인정했음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우리집에서 집회하는 것을 금방 승낙했다. 이것이 우리 지방에서 처음으로 가진 「아버지를 아는(숭배하는) 집회」였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당시 집회중에 란챵스으(藍強石)가 데리고 온 한 무리는 실내에서 모이고, 우리 가족과 다른 사람들은 다만 밖에서 구경해야만 했다. 각지에서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대다수는 중도에 떠나갔고, 소수만이 남았다. 그 때의 집회에서 「허난성의 아버지」인 란챵스으(藍強石)는, 료샤요(劉小友)를「예썐(葉縣)」의 아버지로 세우고, 또한 완쫑천(萬忠臣)을「쬬썐샹(舊縣鄉)의 아버지」로 세웠다. 그 집회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챵스으(藍強石)를 에워싸고 찬양하며 노래를 불렀다. 

그 집회 후에 나의 아내와 장모님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사실을 참기가 어려워 죽을것만 같은 고통을 받았다. 아내는 말하길 “마치 파리를 먹어서 위속에서 참기 어려운 것과 같고, 또한 중병에 걸려 해를 당한 것과 같았다.”라고 했다. 어찌할 수가 없었기에 그녀들은 나의 두 딸들과 사위 두명이 함께 무릎을 꿇고,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께 기도한 후에야 서서히 안에서부터 안위함을 받았고, 누림을 얻게 되었다. 다음 날 그들은 마을 인근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통하고 기도를 한 후에야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은, 어제의 집회에 악한 영이 들어와 악한 흐름을 이끌어 들였다는 것이다. 나의 아내와 장모님은 무식했기에, 성경에 대해 아는 지식이 아주 적었으며, 평시의 집회에선 거의 다른이가 말하는 것을 듣곤 했다. 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별에 있어서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영과 생명의 느낌을 가지고 했다. 「아버지를 아는 집회」가 있기 전, 매번의 집회에서 집회 전과 후 모두 누림으로 가득했고, 영안에서 성령의 기름부음과 적셔짐이 있었으며, 생명의 공급으로 충만했었지만, 「아버지를 아는 집회」만은 맛이 완전히 달랐으며, 안에서는 마음을 찌르고, 고통으로 인해 죽을 것만 같았다. 기도를 통해서「아버지를 아는 집회」는 이단적인 것이며, 악한 영의 역사라는 것을 확증한 후에라야, 영안에서 안위함과 누림을 얻게 됐다. 이 때부터 우리 집은 란챵스으(藍強石) 무리들과 관계를 잘라 버렸고,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못하게 했다.  
 

원래 그들 한 무리 가운데는 교회안에서 낮익은 얼굴이 적지 않았고, 우리 집은 그들이 자주 오던 곳이었기에, 그들을 거절하는데는 큰 싸움을 체험해야만 했었다. 나의 아내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매번마다 그들이 우리 집에 오면, 그들을 쫓아 내었다. 몇번을 이렇게 하자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됐고, 그들의 저주를 이끌어 오게 됐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떠나면서 저주하기를 “이 집이 황폐함 만을 당신들에게 남겨 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사람에게 거짓말함과 저주함은 그들이 이곳에서 이단을 전파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 되었다. 

二 변화됨의 과정 

 우리 집에서 거절을 당한 후,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 무리들은 다른 많은 지방으로 가서 이른바 「아버지를 아는 집회」를 열어, 각 지방에 있는 무지한 믿는이들을 미혹하였다. 이런 후에 그들의 집회중, 남녀가 서로 끌어앉고, 입을 맞추며, 발을 씻겨주고, 춤을 추면서 그들이 세운 「아버지」에게 경배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단으로 전락했을 뿐만아니라, 더더욱 수치심과 체통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 후에 그들 가운데서 음란한 일이 있었음을 듣게 되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성경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우상숭배는 음란과 하나로 연결되어지는데, 이 일이 「아버지」를 숭배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三 「아버지가 됨」에서 「왕이 됨」  

이 후에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 무리들은, 또 다시 자신을 인자라 칭하고, 두 번째 강림하신 예수님이요, 은밀히 강림하신 그리스도시며, 왕국의 문이기에,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왕국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그들이 바로 천국의 왕이기에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위가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집회 가운데서, 즉시로 어떤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무릎꿇고 경배하며, 그들을 주님과 왕이라 칭했다. 

그들이 이른바 「왕」이라 칭하는 자들이 그들의 집회에 오게 되면, 그들은 마태복음 21장 5절을 인용하여,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한 말씀을 그들에게 인용하여 말하길 “보아라, 너의 왕께서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온유하시어, 나귀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셨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왕」은 실재로 사람을 나귀로 삼아, 사람위에 올라 타고 왔다 갔다 하였다. 예썐(葉縣)의 어느 촌에서 있던 집회중, 그들은 작은 정원에 모여서, 대문을 잠가버리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였기에,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다만 안에서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후에 어떤 사람이 담 밖에 있던 나무 위에 올라가서야, 그들이 세운 「왕」이 사람위에 올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왕이 오셨다고 그를 환영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왕이 되려고 꿈 꾸던 이 사람들은, 후에는 마침내 왕이 되기 시작했다. 왕이 된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왕의 침대와 왕의 베개와 왕의 의자, 심지어는 왕비를 예비하게 했다. 게다가 밥을 먹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밥을 올리면서 “아버지 왕이여, 진지 드십시요.”라고 말하게 했다. 더군다나 「아버지, 왕」에게 밥을 올리는 자는 뜻밖에도 그의 육신의 부친이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우매하며, 웃기는 일인지! 「아버지가 되고, 왕이 된」이들은 이런 정도로 변해버렸고, 신앙상에 있어「사람을 숭배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상을 숭배함」으로 이단이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진짜 왕이 되고 싶어 했고, 정치적으로 반동분자가 되었다. 그럴 뿐만아니라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하였고, 윤리적으론 패망함으로써, 타락하여 사교(cult)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망령되이 행한 것들은, 금방 정부의 공안국 기관들의 주의를 이끌었다. 1987년 말에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등 아버지가 되고, 왕이 됐던 한 무리들은 모두가 붙잡혀 형을 선고 받은 후 감옥에 갇혔다.  

四 「아버지가 되고, 왕이 됨」에서「창쏘(常受) 주님」、「창쏘(常受) 왕」을 숭배하게 됨.  

이 사악한 이단의 운명은 그것이 전해지게 될 때, 거짓 그리스도가 나와 사람들을 미혹함으로, 각지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판정되기 때문에, 마땅히 짧아야 하고, 더군다나 자신들 스스로를 「아버지」와 「왕」으로 세운 자들이 붙잡혔고, 그들을 따르고 미혹을 받던 자들이 점차적으로 줄어들었기에, 이 사교(cult)가 마땅히 속히 사라져야 하며, 사람들이 신속하게 그들과 분리되어 그들이 잘못됐음을 단정했어야 했지만, 사실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1988년에 이르러서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이 머리와 얼굴을 바꾸어, 그들이 「아버지」와 「왕」으로 부르던 것을 이 상수(李常受)씨 에게로 옮기어, 예전에 청요(程有)등의 사람들을 주님과 아버지와 왕이라 부르던 것을, 지금은 이 상수(李常受) 씨를 주님과 왕과 아버지라 불렀다. 그리하여 소위 「창쏘(常受) 주님」、「창쏘(常受) 왕」이란 칭호가 생긴 것이다. 이후부터 그들의 집회 가운데서, 그들은 시편 150편의「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를 「창쏘(常受) 왕을 찬양할지어다.」로 모두 바꿨다. 그들의 기도에서도 창쏘(常受)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했고, 사람들에게 침례를 줄 때도 창쏘(常受)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침례를 주었다.  

이는 참으로 배후에 있는 사탄이 이단적인 사람들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가장 독하고 가장 궤계한 계모로써, 대적의 일석이조를 노린 파괴시킴을 위한 수법이다. 그들은 이 상수 형제님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높은 명성이 있음을 알고, 이 수단을 사용하여 한면으론 더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이단을 따르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상수 씨가 사람들에게 그를 숭배하게 했다고 느끼게 하여 이 상수 씨의 명성을 손상시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수단은 효험이 있어서, 1988년에 성경의 진리가 분명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지만 뿌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단을 따르게 됐다. 어떤이들은 우매하고 무지함으로 심지어는 “당신들이 이 상수 씨의 저서와 메시지를 읽으면서, 어떻게 그를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가? 당신들이 그를 주님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국내외에서 이 상수 씨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기회를 붙잡아 이 상수 씨를 공격하는 문장을 써서 말하길, “이 상수 씨는 개인숭배를 조장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 상수 씨를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대륙의 적지않은 맹종자들은 이 상수 씨의 개인 숭배에 대한 태도에 대해 참으로 몰랐을 것이다. 이런 문장들을 써서 기회를 붙잡아 이 상수 씨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만약 진지하게 이 상수 씨의 저서를 읽어보았다면, 이 상수 씨의 태도에 대해 분명하였을 것이다. 

肆 이 상수(李常受)-「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에 대한 반응  

1988년에 대만의 모 그리스도인이 허난성(河南省)의 어느 지방에 가서 친척을 방문하여, 그곳의 집회에 참석했는데, 바로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의 집회였기에 친히 그들의 이단적인 말을 듣게 됐고, 그들의 우매하고 무지한 방식을 친히 목도하게 되었다. 대만으로 돌아온 후 그는 문장을 써서 홍콩의 기독교 출간지에 기고했다. 그 출간지의 편집인은 이 상수(李常受)씨의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그는 출간지 하나를 이 상수씨에게 부쳐 주었다. 이 상수씨는 관련된 보도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하길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우매할수가 있는가? 혹시 어떤 사람이 소문을 만들어 공격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1989년에 허난성(河南省)의 한 형제가 추수감사절 기간에 미국에 와서 이 상수 형제님을 만나, 허난성(河南省)에 나타난 이단의 유래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해 드렸을 때에야, 중국 대륙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음을 이 형제님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형제는 더 나아가서 이 이단적이고 사악한 말의 나타남으로 인해 허난성(河南省)의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았는데, 특히 초신자들이 그러했음을 말씀드렸으며, 미혹을 받은 형제자매들과, 정통적인 교회생활이 중국대륙에서 유지되어 가게 하기 위하여, 이 상수 형제님께서 비디오를 통해서나, 혹은 방송을 통해서 친히 진리를 천명하시여, 사람을 경배함이 틀렸다는 정확한 메시지를 발표해 내실 것을 건의 하였다. 이렇게 할때 한 면으론 미혹을 받은 무지한 사람들을 되돌이킬 수 있으며, 또 한 면으론 사실을 분명히 밝혀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상수(李常受) 형제님은 이 사실을 아신 후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한 면으론 중국대륙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며, 한 면으론 해결할 방법을 찾으셨다. 1991년 여름 훈련을 마치신 후, 친히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하셨는데, 이 테이프의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전해들은 확실한 소식으로는 “여러분들이 그 곳에서 나를 신으로 삼아 경배하며, 나를 주라 칭하고 왕이라 칭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느낄때 이 말은 너무나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여러분들은 사람을 신으로 삼아 경배해선 절대로 안 됩니다. 

 성경 가운데 사도행전 14장 11~18절은 말하기를『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소리를 높여, 루가오니아 말로 “신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라고 하며, 바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이 말하는 데 앞장을 섰기 때문에 바울을 헤르메스라 불렀다. 그 도시 밖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황소들과 화환들을 가지고 성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사도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외쳤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서는 모든 민족이 자기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으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고 결실하는 계절을 주시는 선한 일을 주셔서,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셨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서, 자기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성경말씀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이끌어간 사도들일찌라도, 사람이 만일 그들을 신으로 삼아 숭배하려할 때, 사도들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금지시켰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와 유사한 일을 완전히 멈출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사람을 신으로 삼아 숭배하거나, 혹은 그를 주 또는 왕이라 칭하는 것은 우상숭배하는 것과 동일하며, 더욱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하나님께 득죄하게 됩니다. 나는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이 말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이 일을 완전히 멈추도록 하고, 다시는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여러분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행여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상황이 있다면, 신경을 좀 써서 전달해 줄 것은, 그들도 역시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앞에서 교정함이 있을때에야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은혜로 대하시고,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 곳에서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1991년 여름 이 상수 형제님의 녹음테이프 제작  

이 상수 형제님께서 사도행전 14장을 근거로한 메시지는 성경의 진리를 천명하셨고, 사람을 경배하며 사람을 주님이라 칭하는 방식은 우상을 숭배함과 다름이 없고, 하나님께 득죄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지적하셨으며, 또한 간곡하며 진지하신 말씀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즉시 멈출 것을 권면하셨고, 더 나아가 하나님앞에서 진지한 회개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비디오 테이프는 여러 통로를 거쳐, 허난성(河南省) 성도들의 손에 전달되었으며, 모두가 자세히 들은 후, 다른 지방의 미혹을 받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통을 가짐으로, 초신자들과 진리가 분명하지 못한 적지않은 성도들을 돌이키게 되었다. 
( http://local-church.tistory.com/107 )

그렇지만 이단적임과 악한 말을 한 자들에게 있어선, 이런 말이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이 상수 씨의 이름을 다만 사기를 치고, 무지한 사람들을 꼬여 그들의 이단을 따르게 하며, 그들의 구주이신 주 예수님을 부인하게하는데 사용함에 불과했다. 이 상수 씨의 공개적인 성명과 태도를 표명한 이후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욱 힘을 다해서 그들의 이단을 전파해 갔다. 그들이 한면으론 이 상수 씨의 이름을 사용해서 사기를 쳐서 따르는 자들을 우롱했고, 한면으론 이 상수 씨도 그들이 보았다는 「사람을 주라 칭함」에 대한 「빛」이 어떠한 것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므로 더 이상은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 날 이 사람들 가운데선 누가 말하고 누가 인도를 한다면 그가 바로 「주님」이기에,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그를 향해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된다. 

伍 「중화대륙 행정 사역처」의 이단적인 전단지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 이단은 안훼성(安徽省)에서 소위 말하는 「중화대륙 행정 사역처」로 변종하였다. 이 조직은 안훼성(安徽省)의 샤오썐(肖縣)의 왕 용민(王永民)을 으뜸으로 성립된 것이다. 본 조직은 1995년 4월에 전국 각지의 도시에서 많은 반정부적인 이단의 전단지를 배포했다. 본 전단지의 주제는 일부러 과격한 말을 하여 남을 놀라게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한다. 그 주제는 「중국의 13억 인민에게 고하는, 세상을 놀라게 할 폭발적인 뉴스의 책」이고, 출판자는 「우주의 중심 미국 로스엔젤레스 사역처, 중화 대륙 지방교회 사역처 지사 」이다.  

본 전단지의 내용은 저속적이고, 또한 성경을 완전히 위배하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배하는 이단적이고 사악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주님이시요, 그리스도이시요, 생명이시요, 길이시요, 세상의 빛이심을 믿는다. 본 이단의 전단지는 뜻밖에도 사람을 어린양, 주님, 그리스도, 생명, 길, 세상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개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비방함이기도 하다. 본 전단지는 반 정부적이고, 사회의 양호한 풍속과도 위배되며,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가르침과 배치되는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陸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와「중화대륙 행정 사역처」의 이단적인 잘못됨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완전히 성경에 근거한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시요, 매 글자마다 성령께서 묵시하신 것임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이 유일하고도 둘도 없는 신앙의 내용과 표준임을 높이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역사하심을 중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분은 이천년전에 동정녀를 통해서 태어 나셨고, 육체가 되심으로 참되시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 사람, 곧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이 되셨다. 그분은 십자가상에서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죽으심으로 법리적인 구속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죽으신지 3일만에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심을 받으셨다. 그분은 부활안에서 생명주시는 영이 되시어,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안으로 들어가시어, 유기적인 구원하심의 역사를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경배의 대상과 생명의 근원으로써 높인다. 

 우리가 한 단체와 한 가르침 혹은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배한 이단인지의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선,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정시에 사람의 의견과 혹은 종교의 전통에 근거해선 안 된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준칙이며, 유일하고 둘도 없는 표준이다. 

 一 「아버지를 인식함」、「아버지를 경배함」의 잘못됨 
 

성경의 계시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받은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역시 평등한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구속하심과 구원하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거듭남으로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집 안에서 한 식구가 되었기에 자연적으로 평등하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는이들의 아버지시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며, 모든 믿는이들은 다 형제들이요, 혹은 자매들이다.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8~10절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씀하시길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한 분이시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또 땅에 있는 그 누구를 여러분의 아버지라 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또한 지도자라 불리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셨다. 신약 성경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의 교회안에서 목양함과 돌봄의 책임을 지는 「장로」와 사무적인 책임을 지는 「집사」외에는 다른 어떤 종류의 직분도 없다. 

로마 천주교의 타락은 바로 정치와 종교를 결합시키고, 이교도의 실행을 교회안으로 이끌어 들임으로 종교적인 성직자란 계급 제도를 산출한 것이다. 천주교안에는 아래로부터 위에까지 소위 말하는 「평신도」, 「신부」, 「주교」, 「대주교」、「홍의주교」, 「교황」등의 다른 계급들이 있다. 「평신도」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없어서, 반드시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회복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바로 성경으로 돌아가며, 또한 성경에서 계시한 합당한 실행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많은 합당한 실행중의 한 가지 항목이 바로 믿는이들의 지위가 하나님의 집인 교회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으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안의 지체들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모두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고, 또한 모두가 자신의 분량을 따라 교회안에서 자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등과 같은 사람들의 잘못은, 바로 교회를 뒷걸음치게 하여 옛길로 가게 하고, 천주교에서 실행한 것을 다시 실행한 것이다. 그들의 참된 목적은 자신을 높임으로 다른이들을 통제하고, 모든 믿는이들이 하나님을 향해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탈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타락한 이 사람들을 「아버지」로 인식하게 하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따르고 숭배케 하려는 목적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二 「사람을 높임」, 「사람을 신격화함」, 「사람을 경배함」의 잘못  

다음으로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등과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망령됨으로 인하여, 먼저는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신격화하며, 그들이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시며, 왕국의 문이라 하고,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경배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사람들의 경배함을 받을때, 황당하게도 말하길 “당신은 나를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계모가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계략을 바꾸어 이 상수 씨를 높이고, 이 상수 씨를 신격화하고, 이 상수 씨를 주님과 그리스도라 칭하면서, 이 상수 씨를 향해서 찬양하고 경배하게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의 잘못된 그물에 걸려 들게 했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다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삼일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높임과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그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그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그분께서 우리를 거듭나도록 하셨기 때문에,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들의 지위가 얼마나 높든지, 은사가 얼마나 크든지, 능력이 얼마나 강하든지를 물론하고, 어떤 사람들도 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위를 대치할 수가 없고, 어떤 사람들의 경배도 받을 자격이 없다.  1 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유일하신 우리 하나님만을 단일하게 경배하기 위해, 로마 황제 가이사를 주님과 신이라 칭하는 것을 거절하고, 엄청나고도 잔혹한 핍박을 참아냈다. 그들 중에 어떤이는 사자굴속에 던져지고, 야수 경기장에 넣어짐으로 순교했다.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타락하여 우리와 똑같이 죄가 있는 사람을 경배하는 이런 정도로까지 무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앞에서 이 상수 씨의 메시지에서도 서술했듯이, 성경 가운데서 은혜가 가득한 사도들을 하나님으로 삼아 경배하는 것 조차도 절대적으로 안 된다. 사람을 하나님으로 삼아 경배하는 것과 그를 주님이라 칭하고, 그를 왕이라 칭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바 없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도행전 14장외에도, 사도행전 10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을 언급했다. 그 곳에서 사도 베드로가 이태리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의인이었고, 베드로가 들어가자마자 고넬료는 그를 영접하며, 그의 발앞에 엎드려 절하였다. 성경에서 기록하는 것은,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말하길 “일어나십시오.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고 하였다. 

 성경이 사람을 경배하는 것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천사를 경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허락하지 않는다. 성경의 계시록 19장에서 저자인 요한이 말하길 「그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기록하십시오. 어린양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그들이 복이 있습니다. ” 그는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입니다.” 내가 그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리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나는 그대와 함께 노예 된 자이고,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그대의 형제들과 함께 노예 된 자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십시오.” 」라고 했다. 계시록 22장 8절에서도 성경이 마치려하던 때에 요한은 말하길 「나 요한은 이것들을 듣고 보는 사람입니다. 내가 듣고 보았을 때에 이것들을 내게 보여 준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나도 그대와 동일한 노예이며, 그대의 형제 신언자들과 이 두루마리에 있는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동일한 노예입니다. 하나님께 경배하십시오.” 」라고 했다. 이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 주님의 사도들, 주님의 모든 믿는이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천사들이 다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모두 다 우리의 경배하는 대상이 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분명하게 볼수 있다.  

성경의 신성한 계시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며(요1:12~13), 또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벧후1:4). 우리가 만약 신성한 생명안에서 자라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가득할 때(엡4:13), 현시대에 그분의 신성한 생명으로 하여금 우리에게서 부터 살아나오게 하며, 이는 바로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마치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0~21절에서 선포한 것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서 삶은 그리스도이고,”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닮을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영광의 소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주님을 닮는 것이요, 생명과 본성,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우리의 주님과 똑같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분을 닮음에 있어서, 다만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만 이고, 신격(지위)에 있어서는 아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격 즉 그분의 만유를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높으신 지위에는 영원히 동참할 수 없다. 신격에 동참하고자 생각하고, 하나님과 동등하려고 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경배를 받으시는 지위를 탈취하려는 것은, 바로 사탄, 마귀의 배역한 노선으로써, 마지막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엄중하신 처벌을 받게 되는데, 천사도 피할 수 없었듯이, 어떤 사람도 역시 피할수가 없다. 

 三 「왕이 됨」의 잘못됨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등과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라 선포했을 뿐만아니라, 그들은 또한 「왕국의 왕」이라고 선포 했다. 더군다나 집에서 실재로 왕이 되어, 자기를 위해 왕의 침대와 왕의 보좌를 예비했다. 이것은 황당할 뿐만아니라 웃기는 것이요, 또한 인류의 정권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그들은 먼저 자신이 「왕국의 왕」이라 말한 후, 다음에는 이 상수 씨가 「왕국의 왕」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 근거해 보면,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왕국의 왕」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이며, 성경을 위배하는 것이고, 망령되이 자신을 높임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교회의 정통, 워치만니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따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계19:16)이심을 믿는다. 그분은 또한 땅의 왕들의 통치자(계1:5)이시다. 땅의 왕들과 정부의 관원들은 모두 그분께서 세우시고, 그분께서 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이분을 경배하여야 하고, 또한 그분께서 세우신 땅의 왕들과 정부의 관원들을 존중하며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왕이나 통치자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웟치만 니 형제님은 <<교회의 정통>>이란 책에서 상세하게 언급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통치자가 되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오직 하나의 목적만이 있는데, 곧 영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해가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마땅히 은혜여야 하며, 공의가 아니다… 통치자가 되면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공의의 원칙을 유지해야만 한다. 사람이 공의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유지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될수가 없다. …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치적인 권위를 시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무정부주의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태도에 대해서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정부를 믿고, 또한 정부를 돕는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기가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써, 사람을 돕고, 손실 당함을 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를 원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실 받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꺼이 손실을 받고자 함은, 그 사람 자신의 일이다. 우리는 초신자들에게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이 기간동안, 우리는 이 땅에서 기꺼이 자신이 손해를 보기를 원해야 함을 말해 줄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 시대의 정치를 만져선 안 되고, 더군다나 통치하는 권위가 되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국가 정권에 대한 태도가 힘을 다해서 순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의 길은 바로 권위가 있는 윗 사람들에게 마땅히 순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입장이다. 우리 자신은 통치를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통치하는 것을 좋아하며, 또한 통치하는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통치하는 자들은 그가 높은자이든, 혹은 낮은자이든지를 물론하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우리는 순복하는 것을 꼭 배워야 하며, 반대해선 안 된다.」  
 

성경은 믿는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될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예를 들어 로마서 5장 17절에서 말하길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을 하였다면,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사람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고 한다. 본 책에서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인 우리들은 죄사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누림으로, 신성한 생명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될 것이다. 

이 상수 형제님은 회복역 성경의 각주에서 로마서 후반부인 6~16장이 우리가 왕이 된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이 후반부에서 서술한 내용에 근거하여, 우리는 이 곳의 왕이 된다는 뜻이 우리 믿는이들이 먼저 신성한 생명의 내적인 다스림과 왕권아래 복종해야 함을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는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의 공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왕이 되어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함과 배역적인 본성을 정복하고,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육체와 사악함과 사욕과 성질등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훈련할 수 있다면, 오늘 날 이기는자가 될 수가 있으며, 내세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왕국의 실현됨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이 될 수가 있게 된다.  

四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잘못됨 

청요(程有)와 란챵스으(藍強石)등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을 기다리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 「내가 성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이다.」, 「내가 바로 두번째 오신 그리스도이다.」라는 등의 말을 선포했다. 성경의 계시를 따르면, 이러한 선포는 황당한 것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망령된 선포는 후에 출현한 소위 말하는 성육신 된 「여성 그리스도」의 선포와 동일한 것으로써, 모두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조심함으로 깨어있어야 속임당함을 면할 수가 있다. 

성경 마태복음 24장 4~6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아무에게도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3~26절에서 주 예수님은 다시 이어서 말씀하시길 “그때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십니다!’ 혹은 ‘저기 계십니다!’라고 하여도, 믿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신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들과 기이한 일들을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사람들까지도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미리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러분에게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계십니다.’ 라고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골방에 계십니다.’ 라고 하여도 믿지 마십시오.” 라고 하셨다. 

 성경에선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했고(마24:27, 26:64), 그분의 다시오심은 마치 도둑같은 은밀한 면이 있고(마24:33~44), 또한 구름을 타고 공개적으로 강림하시는 면이 있다(마24:27, 26:64). 24장의 구절들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 준다. 27절에서 그리스도의 공개적인 오심이 번개와 같이 동쪽에서 서쪽까지 번쩍이지만, 그것은 21~24절에서 분명하게 대환난을 언급했기 때문에 대환난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진 대환난이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번개와 같을 것인데, 이것은 공개적인 한면이지만, 그리스도의 공개적인 강림하심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의 은밀하신 다시오심이 있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도둑이 보배를 훔치는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믿는이들을 데려가실 것이다. 더군다나 마태복음 24장엔, 주님의 두번 경고하심이 4~5절과 23~26절에 있는데,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을 것이며, 선택된 사람들까지도 미혹할 것이라고, 주 예수님과 사도들 모두는 우리에게 조심함으로 예방할 것을 재삼 경고하셨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과 날짜와 시각에 대해선, 주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고,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며, 아들도 므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마24:36).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깨어있어 기도함으로 미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셨는데, 이는 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다시 오시기 전에,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전하는 이단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그리스도께서 저기 계시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믿어선 안 된다. 

왕요민(王有民)의 소위 「중화대륙 행정 사역처」가 퍼뜨린 이단적인 전단지에는 성경에 없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도 아닌 「노스트라담무스-Nostradamus 1999년 인류대재난」과, 세속적인 「돌고 돌아서 원점으로 되돌아가다.」라는 미신적인 말, 그리고 사람들을 공갈협박하는 「대환난은 인류의 삼분의 이를 제거해 버린다.」등의 말을 전파했는데, 모두가 성경에는 없고 꾸며 낸 이야기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공갈협박하는 행위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믿으며, 더군다나 깨어있고, 예비함으로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이런 기회를 통해서, 성경을 따라 우리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태도를 천명하는 바이다. 

1 사모하고 기다림으로 서로 격려함  

우리가 주님의 다시오심이 이처럼 보배로운 것을 안다면, 마땅히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딤후4:8).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님, 오십시오.”(계22:20) 라며 마친다. 신약의 기록에서 우리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마음속에서 그들이 계속해서 확증하는 바는,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이고, 그들은 또한 주님의 다시오심을 예비하는 생활을 살았다. 교회의 역사안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화수은 자매님께서 이러한 생활을 사셨다는 것이다. 1925년의 마지막 날, 니 형제님께서 그분을 찾아가 함께 기도하였는데, 그분이 기도하시기를 “주님, 당신께서 설마 1925년이 정말 지나가도록 하실 것입니까? 설마 당신께선 1926년을 기다리셔야만 다시 오실 겁니까? 그러나 이 마지막 날에, 저는 당신께서 오늘 오시기를 구합니다.” 라고 하셨다. 얼마 안 지나서 니 형제님이 길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또 그를 향해 말씀하시길 “참으로 신기합니다. 오늘에 이르렀는데도 그분께선 왜 아직도 안 오셨을까요?” 라고 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느슨하고 게을러도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주님께선 두려우신 분임을 믿어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주님은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재물을 쌓아 두려고 노력하며 혼으로 하여금 즐거워함으로 누리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선 그에게 말씀하시길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너의 혼을 도로 찾아갈 것이다.”(눅12:16~20) 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매번의 오늘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모두가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오늘이 있기만 하다면, 호흡이 여전히 존재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그분의 다시오심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고(빌3:20), 또한 항상 이 일을 가지고 서로 권면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절에서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분께서 나타나시는 것과 그분의 왕국을 두고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권면한 것이다. 그는 말하길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심판대 앞에서 그는 의의 면류관을 꼭 받을 것인데, 이 면류관은 또한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이다(딤후4:6~8). 그는 심판과 왕국을 가지고 디모데를 일깨웠으며, 또한 우리를 일깨워주어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생활을 살게 하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상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지 않으며,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충성되게 할 것이다.   
   

2 깨어있음으로써 예비함 

 주님께서 오실 때에, 도둑과 같은 은밀한 면이 있는데, 은밀하게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시어, 그들을 보배로 삼아 훔쳐 가서, 그분의 하늘의 임재안으로 데려갈 것이다(마24:42).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있음으로 예비됨이 필요하다(마25:13, 24:44). 만약 우리가 휴거되려면, 하늘에 속한 공기로 충만되야 하고, 그릇안에 기름을 담아야 한다. 우리가 만약 땅에 뿌리를 내리고 매일마다 생활의 염려와 땅에 속한 향락에 의해 점유된다면, 그 때가 되면 휴거될 수가 없다. 우리는 롯의 처를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녀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철저히 파멸시키시는 악한 세상을 사랑함을 인하여, 되돌아 보았기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되었고, 수치스러운 땅에 버려짐을 당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써, 우리가 만약 여전히 세상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선 우리가 대환난을 거치도록 남겨둘 것이요, 우리가 성숙되어져 들림받을 수 있을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3 승리하기를 기도함 

주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일깨우시기를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여러분의 마음이 억눌려, 그 날이 덫과 같이 갑자기 여러분에게 닥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장차 일어날 이 모든 일을 피할 수 있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간구하며 항상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셨다. (눅21:34~36, 계12:5~6, 14절 참고) 

성숙함은 하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분의 다시오심을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예비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또한 그분안에서 자라남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나타나실때에 성숙되어짐으로 들림받고,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이 필요하다 (계3:10).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다(참고 롬15:4). 우리가 만약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지킨다면, 우리는 반드시 고통을 받게 된다. 오늘 날 주님께선 여전히 그분의 인내하심을 가지고 거절당함과 핍박을 참으신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 동참할 뿐만아니라, 또한 그분의 인내하심에도 함께 동참한다(계1:9).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날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 대해서 바로 인내의 말씀이다. 우리가 그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키려면, 반드시 그분께서 받으셨던 거절당함과 핍박을 참아야 한다. 

 5 승리하고, 또한 주님의 일을 지킴 

우리는 또한 승리함과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킴이 필요하다(계2:26). 주님의 일이란 주님께서 이미 성취하시고 또는 현재 하시고 계신 일을 가리킨다. 이런 일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완전한 구속의 역사에 관한 모든 일을 포함한다.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것이다. 오늘 날 그분은 여전히 우리를 거룩케 하고, 변화시키고, 우리로 그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역사 하신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주님의 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빛비춤을 받고, 주님의 일에 대해 알게 됐지만, 세상의 매혹함을 인해 그들은 주님의 일을 지키기를 원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이루신 것을 부인하거나 잊어 버린다. 우리가 만약 이기는 자라면, 주님의 일을 경홀히 여기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주님의 구속을 지키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지금 그분은 우리안에서 우리를 거룩케 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스런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 일하고 계심을 말해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킨다면,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분은 우리에 대해서 샛별이 되실 것이다(계2:28).  

五 성경을 삐뚤어지고 황당하게 해석함의 잘못됨 

 이런 이단을 전파하는 특징중의 하나는, 바로 부분만을 가지고 전체의 뜻을 취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을 삐뚤어지고 황당하게 해석함으로, 성경을 부정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보도록 한다.  

1 왕요민(王有民)의 반동적이고 이단적인 전단지는「성경에서 말하길, 누가 66권인 성경의 비밀을 열수 있으면, 그가 바로 우주의 어린양이고, 전세계를 통일할 능력이 있게 된다. 」고 말한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삐뚤어지게 한 것이다. 

 성경 계시록 5장 1~9절은 말하길「또 내가 보니,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있었는데, 안팎으로 글이 적혀 있고 일곱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또 내가 보니, 힘 있는 한 천사가 큰 음성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누가 두루마리를 펴며 그 봉인을 뗄 자격이 있습니까?” 하늘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들여다볼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들여다볼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크게 울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들 중에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그 두루마리와 일곱 봉인을 뗄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좌와 네 생물 한가운데에, 그리고 장로들 한가운데에 갓 죽음을 당하신 것 같은 한 어린양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어린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셨는데, 이것은 온 땅에 보내어지신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그 어린양께서 나아오셔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습니다. 어린양께서 두루마리를 받아 드셨을 때,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는 각각 수금과 향들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들을 가지고 어린양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대접들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며 말하였습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그 봉인들을 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음을 당하셨고, 자신의 피로 각 지파와 언어와 백성과 민족에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으며,…」라고 한다.  

이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볼수 있는 것은, 온 우주 가운데서 오직 한 분만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펴거나 들여다보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분은 바로 유다지파의 사자시요, 다윗의 뿌리시며,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육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인성을 따라 말하면 이스라엘 지파에서 나셨으며, 신성을 따라 말하면 다윗의 뿌리이시다. 그분은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분이시다. 그분이 유대땅에서 다니실때, 침례자 요한은 그분을 가리키면서 말하길 “보십시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라고 했다(요1:29).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일찌기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제하셨으며, 그분은 또한 싸우시고 승리하신 사자로써 하나님을 배반한 사단을 패배시키셨다. 오직 그분만이 그 두루마리를 펴시고 일곱인을 떼실 자격이 있으시다. 그분은 이미 그 두루마리를 펴시고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인 일곱인을 떼셨다. 성경은 누가 66권의 성경속에 있는 비밀을 열면, 그가 바로 우주의 어린양이며, 전세계를 통일할 능력이 있다고 한번도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굴곡되고 만들어내진 귀신의 말이다.  

2  본 이단의 전단지에선 성경에서 분명하게 천명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제하시는 분이심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도리어 이 상수 씨가 어린양이요, 살아있는 그리스도요, 주님이시요, 생명이시요, 길이시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성경을 완전히 위배하는 거짓말일 뿐만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파괴하는 귀신의 말이다. 성경에 근거하면 오직 심일 하나님의 구체적인 화신이시자, 유일하게 죄가 없으시나 우리를 위해 죄를 제하신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즉 육체가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가 경배해야할 유일하신 대상이다. 오직 그분만이 「주님」이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분안으로 믿어야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안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다. 

柒 결론 

위에서 언급한대로 「차앙쏘주파이-常受主派」는 사단에 근거한 악한 영의 속임수요, 사람의 교만과 야심과 망령됨과 스스로 높이는 것을 도와줌을 통해서 산출되어진 일종의 성경을 버리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버린 이단이다. 이 단체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분명하지 못하고, 유약하며,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속이며 노략하고, 더군다나 그 이단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믿는이들을 공갈하고 저주하였다. 이 단체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전하는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교훈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믿는이들은 이러한 교훈을 말하는 사람과 어떠한 접촉도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전면적으로 봉쇄하고, 그 이단이 확산되는 것을 두절시켜야 한다.우리는 또한 미혹을 받은 유약한 믿는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들을 도와서 마귀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여, 성경의 진리를 완전히 앎으로써 그리스도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고, 교회안으로 돌아오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의 구원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이단이 중국땅에서 산출되고 확장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제거해내고, 장기적으로 안전하게 대처하는 방안은, 바로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환경을 만들어, 성경의 진리가 자유롭고 순조롭게 전파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믿는이들이 진리가 분명하지 않고, 신앙생활이 공개적이지 못함으로 무질서한 상태이면, 도리어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 사악한 이단의 말을 만들어 인심을 미혹시키게 하는 문을 열어버리게 하기에, 이런 상황을 볼때 매우 유감스러울 뿐이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6. 05:00


1976년 10월 11일

Mr. Robert Passantino
Research Associate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Walter R. Martin, Director
Box 500
San Juan Capistrano, CA 92675

친애하는 로버트씨께:

최근에 우리가 가졌던 토론과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제목의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귀하의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대답과 분석에 앞서 우리가 가졌던 세 시간에 걸친 대화에 대해 진술하고자합니다.

다음의 사항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대화를 가졌던 상황은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귀하가 전에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는 것과 귀하가 월터 마틴의 동료 연구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귀하 또한 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제가 어떤 입장에서 글을 쓰는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제 자신에 대하여 조금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장로교 계열의 대학과 드류 신학대학(School of Theology of Drew University)을 졸업했습니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 감리교단에서 사역을 했었고 1958년에 교리적인 이유로 감독교회의 신도(Episcopalina)가 되었고 그 교단에서 성직자 안수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감독교회 성직자 인명부를 찾아보면 제 이름이 교회법에 의거해 스포케인(Spokane) 관구에 거주하는 높은 직위의 목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난 12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t) 신부님의 간증을 통해 저는 1962년에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움직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수 년 동안 소위 “오순절 부흥”(Pentecostal Revival)이라 불리는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1968년 말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긍휼로 말미암아 제 눈이 열려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최근의 움직임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온전히 주의 회복에 드려졌습니다.

이제 귀하의 소책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내가 볼 때 귀하의 소책자는 (1)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고 (2) 개인이나 단체를 평가하는 귀하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3) 이 소책자의 본론은 두 가지 요점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a) 교회에서 가르치는 삼일성의 교리와 (b)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모순들이 그것입니다. (4) 그리고 귀하께서는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했습니다.

귀하께서 편지로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달라고 요청하셨으므로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첫 답변은 욥기 35장 16절 하반절과 38장 2절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말의 주된 용도 중의 하나는 진리를 전달하고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진리와 빛은 지식에 근거합니다. 지식이 없이는 말만 많아지고 어두움의 그림자만 드리울 뿐입니다. 이것이 귀하의 소책자에 대해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그 소책자는 “말을 많이 하고” “이치를 어둡게 합니다.” 진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그 소책자는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괜한 비난이 아닙니다. 귀하의 소책자의 내용 중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 대중들에게 제시되었지만 명백히 거짓말이며 부정확하고 왜곡되었고 비방이며 거짓말인 부분에 대해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그 한 예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위트니스 리와 힌두교를 비교하는 것은 진리와 거리가 멉니다. 귀하께서 실상을 파악할 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귀하께서 우리에 관한 진실을 철저히 아는 것은 귀하 자신과 독자들에 대한 귀하의 의무입니다. 또한 제가 귀하의 글에서 받은 인상을 쓰는 목적이 귀하를 정죄하기 위함도 아니고 우리를 변명하기 위함도 아님을 확실히 하고싶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귀하가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한 실상을 더 명확히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에서입니다.

표지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그림은 누구를 묘사합니까? 위트니스 리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그 그림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까? 조롱이 당신이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입니까? 로버트씨, 귀하는 독자가 이 소책자를 열어보기도 전에 그 표지를 통하여 귀하의 태도를 들어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귀하의 책자를 받았을 때 표지를 보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문제를 조롱하는 형태로 제시해야만 하는 사람은 진실의 대변자로서의 자격에서 한참 미달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소책자 자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책 전체에 걸쳐 모든 왜곡된 것들에 대해 반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거의 단어 하나 하나 마다 반론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구절을 제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한다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를 인용하겠습니다. 먼저 귀하가 말하길:

지방교회는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위트니스 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건너왔고 한때 크리스챤 신비주의자인 워치만 니의 제자였으며 동양에서 이미 몇몇 교회를 시작했었다. 대부분의 지방교회 신도들은 복음주의 교회들로부터 나왔다. 지금 이 집단의 신도 수는 미국 전역과 해외에 걸쳐 수 천명에 이른다. “본부”는 캘리포니아의 아나하임 교회(the Church of Anaheim)에 있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들을 방문하지 않을 때에 아나하임 교회에 참석하며 그곳에서 가르친다.

  1. 교회의 간증은 하나님에 의해 1922년 중국에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통하여 그의 고향인 푸차우(Foochow)에서 세워졌습니다.

  2. 위트니스 리는 20년이 넘도록 워치만 니의 동역자였습니다.

  3. 귀하는 워치만 니를 “크리스찬 신비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웹스터 사전은 “신비주의”에 대해 “신비스러운(occult) 혹은 비밀스러운(esoteric) 종교; 비밀스럽고(mysterious) 불가사의한(enigmatic)”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워치만 니는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대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주요 서점치고 그의 책을 팔지 않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문자그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사역으로부터 도움을 얻고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수식어를 그에게 사용했습니다.

  4. 저는 지방교회의 대부분의 지체들이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나왔는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저의 경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그들이 일단 지방교회에 있으면 복음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제 이해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나하임 교회(the church in Anaheim)와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이 함께 출판한 “간단한 소개(A Simple Presentation)”라는 책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1. 우리는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가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완전하고 신성한 계시인 것을 믿는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등하게 존재함을 믿는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속주와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성육신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믿는다.

    4. 우리는 참 사람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삼십 삼 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사셨음을 믿는다.

    5.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

    6.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기 위해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믿는다.

    7. 우리는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셨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만유의 주로 삼으셨음을 믿는다.

    8.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분의 택하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몸 안으로 침례 받게 하셨음을 믿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운행하시면서 죄인들을 회개케 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거듭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들 안에 거하면서 생명을 자라게 하고 그분 자신의 충만한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을 믿는다.

    9.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체들을 맞이하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얻으시며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10. 우리는 이기는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복에 참예할 것을 믿는다.

  5. “본부”는 귀하의 용어입니다. 그것은 귀하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본부”나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말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6. 귀하는 “아나하임의 교회(the Chruch of Anaheim)”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귀하에게는 작은 문제일지 모르나 우리는 결코 어떤 도시의 교회(the church of any city)라고 하지 않고 대신 아나하임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Anaheim)나 시애틀에 있는 교회(the churc in Seattle)라고 합니다. 이것은 귀하의 책자에서 아주 많이 발견되는 부정확성의 한 예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의(of)”라는 단어에는 14가지 의미가 있고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근원” 혹은 “유래”입니다. 이 의미에 따르면 교회가 아나하임“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거나 교회의 근원이나 유래가 아나하임이라는 것입니다. “~안에(in)”라는 단어는 특별히 “경계가 있는 장소의 안쪽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범위의 면에서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이것이 바로 헌팅턴비취(Huntington Beach)에 있는 교회나 아나하임에 있는 교회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교회의 근원과 유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교회의 위치와 경계, 범위는 도시에 따른 것입니다 (계 1:11).

귀하는 “교파건 이단이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집단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라고 했습니다.

  1. 멜로디랜드 신학교(Melodyland School of Theology)의 총장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오순절의 실제(The Penteostal Reality)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다음 인용은 100-101쪽에 있는 6장 “거룩한 삼일성”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제 논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신조(信條)와 교리의 진상을 살펴서 성경 말씀 자체로 되돌아가려고 해왔다...그러나 사실상 성경에는 삼일성의 교리가 없다. “삼일성”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안에 삼일성”이라는 말도 찾아볼 수 없으며 구원받기 위해 이것을 믿을 필요성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교리를 위한 원 재료(raw materials)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많이 언급하고있는 한편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교리(삼위일체 신학을 함축)의 재료로서의 성경의 기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삼일성 혹은 삼일로 믿는 것이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사람들을 사색하게 하고 추상적으로 이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붙잡아야할 교리나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살아야할 삶의 문제이다.

  2. “교파 혹은 이단”이란 단어들은 교회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교파는 분열이고 이단은 믿음이나 실행에 있어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분열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우리의 입장은 교회의 입장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입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교리”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위한 기본적 자격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지만 사람이 거듭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하고(엡 5:17)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합니다”(골1:9). 더 나아가 로마서 12장 1-2절은 사람이 그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그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은 합당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사람의 생각은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입장이 있고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합당한 환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엡5:17) 위치와 상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단순히 합당한 교리, 심지어는 하나님에 관한 합당한 교리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2. 위트니스 리의 ‘생명의 체험’이라는 제목의 책 159-165쪽을 인용하겠습니다.

생명의 체험

사실상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직업이나 결혼과 같은 사소한 일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다. 그들은 이 구절을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작아 보이게 하고 과소평가한다. 우리가 신중한 태도로 신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뜻을 연구한다면 이것이 위대하고 고원(高遠)한 문제를 지적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장 17절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평범한 구절 같아 보이지만 에베소서의 문맥은 이 구절의 심오함을 드러낸다. 에베소서는 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책이다. 이 서신의 많은 단어와 원칙들이 하나님과 영원에 대해 말하고있다. 그러므로 거기서 언급된 하나님의 뜻은 단지 평범하고 하찮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에베소서 5장은 앞의 장들에 기초를 두고있다. 1장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말하고(9절) 3장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을 말하고있다(11절). 이 구절은 모두 매우 위대한 것들을 언급한다. 그 다음 5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앞에 언급된 위대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언급된 다른 구절들인 골로새서 1장 9절, 로마서 12장 1-5절, 히브리서 10장 7절과 히브리서 13장 20-21절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여 우리에게도달하는데 영원에서 현재로, 하늘에서 땅으로 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뜻은 대단히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과거의 관념과 얼마나 다른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의 관념을 바꿔주시기를 기도한다.

위트니스 리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정말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고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계획의 성취라는 세 가지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분의 아들의 비밀스러운 신부가 될 단체적인 사람을 갈망하신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지방에서 무엇을 하시는 지도 알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만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의 직업으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업을 할 때나 가르칠 때나 무엇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한다. 우리의 온 삶과 활동은 모두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만질 수 있는 입장과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의 모든 일들에 대한 그분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분명해질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갈망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여기에 제시된 것처럼 깊고 철저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귀하는 “거룩한 삼일성에 대하여 지방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교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삼위 양식론(양태론, monarchianistic modalism)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의 가르침의 결과 주후 3세기에 생겨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양태론”은 서머나에서 노에투스(Noetus)라는 사람에 의해 2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전개되었습니다. 3세기에 사벨리우스가 이를 취하여 가르쳤는데 그 이래로 그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 것입니다.

  2. 교회가 가르친 교리는 “양태론”이 아닙니다. 양태론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연속되는 상태 즉 처음엔 아버지, 두 번째는 아들, 마지막으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태론적 관념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양태론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이 쓴 “성경의 빛 비춤으로 드러나고 반박된 거짓 비방”이라는 소책자에 매우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성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성경은 마태복음 3장 16, 17절에서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4장 16, 17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시에 존재함을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공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도 분명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에베소서 3장 14-1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믿는 우리는 따라서 우리를 양태론과 연결시키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거부합니다.

우리는 또한 귀하가 인용한 어거스틴(Augustine)의 글에 반영되어 있는 삼신론(trithesism)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거부합니다.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세 분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의하면 주는 영입니다. 멜로디랜드 신학교 총장은 그의 책 ‘성령의 시대’의 10-11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다...주는 또한 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 분인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tri)-일(unus)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분이며 영원히 세분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위트니스 리의 책 ‘삼일 하나님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29쪽에 매우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일 하나님은 한 분 안의 세 분(three-in-one)인 방면과 세 분 안의 한 분(one-in-three)인 방면이 있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으로 그분은 “나”이시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으로 그분은 “우리”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의 방면으로부터 “말씀은 하나님”이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한 분 안에 계신 세분의 방면으로 “주는 영이시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주의 영”(고후3:17)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분의 방면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고(요10:30, 14:7-11),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고(요1:1, 2) 아들은 아버지와 영광을 나누고(요17:5)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이고(요17:24)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요17:11, 21, 22)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한다(요14:23).

귀하는 귀하가 “경륜적인” 삼일성이라 부르는 것을 “내재적인” 삼일성과 비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이 내재적으로 삼일이심을 믿지 않는 것처럼 암시했습니다. 

하나님의경륜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시며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일하나님이 우리에게 체험적이고 경륜적이 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교리적으로 삼일성을 믿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단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 17쪽에서 위트니스 리는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체험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영 안에 있으며 영은 하나님의 전달로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항상 전달하고 있다. [할렐루야]

귀하는 “만일 삼일성 교리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월터 마틴의 정의-가 옳다면 양태론자들에게 몇몇 문제점들이 발생할 것이다. 어느 집단이 가르치는 양태론이든 그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나 약점은 신격을 구성하는 분들의 “주객관계(subject-object relationship)”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방)교회 안의 우리는 양태론자가 아니므로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하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주객관계”와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조잡한 범주를 적용하는지 의아합니다. 그런 관념을 어디에서 취하셨습니까? 그러한 관념을 어느 철학책이나 심리학책에서 발굴해 하나님의 말씀에다 강제로 적용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속박함으로써 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며 아무런 방해 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관념을 하나님의 말씀에 강요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간섭이 없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저는 듣기 원합니다.

[귀하는 말하길]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양태론자에 대해 몇몇 질문들이 생겨난다. 예수님이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는가?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냈는가? 예수의 침례 때는 예수가 성령의 나타나심을 흉내낸 것인가? 누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말했는가? 아버지가 “그를 들으라”고 했을 때 아들은 어디 있었는가? 아들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어디 있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렸던 위대한 기도인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는 거짓이란 말인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뜻에 양보했던 것은 환상인가? 다시 말하면 양태론자에게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더 이상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안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히 말하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제가 믿기로는 우리가 귀하보다도 더 성경을 믿습니다.

  1.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2.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 있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3. 예수의 침례당시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의 모양으로 아들 위에 내려왔고(마 3:16)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4. 아버지가 “저를 들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들은 변형산에 계셨고 아버지는 구름으로부터 말씀하셨습니다(마 17:5).

  5.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습니다.

  6.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눅 23:34)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입니다. 그 말들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의미합니다. 그 기도는 그분의 살인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7.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는 환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들로서 그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 대해 잘못 전함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성경말씀 그대로를 믿습니다.

지금까지 귀하가 인용하신 구절들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귀하는 우리의 글들 중에서 귀하의 비난을 지지할 만한 어떠한 것도 인용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귀하의 소책자를 읽는 정직한 독자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귀하의 말을 받아들일 만큼 잘 속는 사람들이 아닐 것입니다. 귀하가 몇몇 문장들을 인용했을 때 귀하는 서로 다른 두 책에서 짧은 네 개의 인용문을 맥락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인용했습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가 특별히 삼일하나님을 주제로 하여 쓴 책은 무시한 채 문제의 한 면에만 치중하여 참고자료을 인용했습니다. 네 인용문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물의 결코 마르지 않는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셨다.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곳에서(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그분자신을 나타내려고 오셨을 때 그분은 아들이다. 우리는 주님이 아들이고 그분이 또한 아버지임을 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이 영이시라는 것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주 그리스도가 영이시라는 것에 분명해야한다.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표현으로서 그분은 아들이다. 전달로서 그분은 영이시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표현이고 그 영은 전달, 교통이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다.

위의 모든 설명은 하나님의 한분 안의 세분으로서의 방면입니다. 왜 귀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또한 세분 안의 한분이심을 믿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은 인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위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 6쪽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 8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한 면으로는 “내가”라고 하셨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우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내가” “우리”이며 “우리가” “나”임을 증명한다. “나” 와 “우리”는 동일하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복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나”라고 하실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단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우리”라고 하실 것이다. 이것은 비밀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더욱이 창세기 1장 26절과 3장 22절과 11장 7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말씀 안에서 많은 경우 그분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정 이해하기 힘든 비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신격의 세 인격-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의 한 부분을 독립적으로 인용하여 제시하며 귀하는 그가 말한 것과 힌두교를 동일시했습니다. 로버트씨, 이 시점에서 저는 귀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이 살아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귀하가 교회와 힌두교를 동일시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방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힌두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교회의 삼일성을 힌두교의 삼일성에 대조한다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신격이 세 개의 주요 방면 또는 양태인 창조적, 보존적, 파괴적 방면으로 축약된다. 창조적인 방면으로는 브라마(Brahma)로 나타나며 보존적일 방면으로는 비쉬누(Vishnu)로 나타나고 파뢰자로서는 쉬바(Shiva)로 나타난다. 이 세 신격이 힌두의 삼일성을 조성한다.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복음주의적이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힌두교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악한 중상 모략입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귀하가 “모순”라고 말한 부분인 귀하의 소책자의 두 번째 주요 부분을 봅시다.

지방교회에 대한 두 번째 주제로서 우리 필진은 지방교회 운동의 창시자이자 우두머리인 이 선생의 가르침 안에 있는 모순들에 대한 자료가 필요함을 느꼈다. 

지방교회가 교회 소유의 출판사인 리빙스트림을 통해 출판했던 서적들을 조사하면서 우리는 이 선생의 많은 교리 중에서 어떤 것이 정확하게 이 선생을 대표하는지 찾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어떤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와 반대되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이 선생과 지방교회에 대해 공평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 그대로, 모순이 전부인 그대로를 정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경은 야고보서에서...“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자로다”라고 말한다(1:8).

로버트씨, 많은 문제가 귀하가 강조점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의 한 면이 강조될 때 말하여진 것이 그 일의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면이 강조될 때는 그것이 주된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가 강조될 때는 우리가 찬미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찬미가 강조될 때는 우리가 기도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건물의 앞면을 보여줄 때 귀하는 어떤 특정한 특징들을 지적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마치 귀하가 다른 세 면에도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의 뒷면을 설명할 때는 앞면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뒷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좋은 예가 성경에 있는 표면적 모순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향해 열려있던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문제의 다른 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강조는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은 종교의 어두움 가운데서 그의 시각을 되찾게 된 소경에 관하여 말합니다. 눈먼 종교적인 자들은 눈을 뜨게된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 고집 세고 눈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강조의 문제를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성경이나 위트니스 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출판은 일(사역)의 방면으로 행해집니다. “교회”와 “일”의(행 13:1-2) 성경적인 차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워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이란 책을 읽으면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해질 것입니다.

귀하는 우리가 실행하는 기도로 말씀 읽기가 성경과 모순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이 선생의 가르침은 종종 성경과 모순된다. 하나님에 대한 것 외에 다른 가르침들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주님과의 시간’이란 책 10-11쪽에서 이 선생은 “단지 말씀을 기도로 읽어라.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기도해라...성경의 어떤 장 어느 줄 어느 단어를 펴서 그 부분의 말씀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 방식과 리빙스트림에서 출판한 “기도로 말씀 읽기”를 따라서 “기도로 말씀 읽기”를 해보자. 누가복음 23장 21절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를 기도로 읽어보자. 이 구절을 기도로 읽는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예수님! 못박으소서! 할렐루야! 못박으로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인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에 “아멘”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6장 7절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한다.

이 비판에 대하여 세 가지를 언급하겠습니다.

  1. 위트니스 리의 인용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어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기도로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어떤 장이나 줄이나 단어를 펴고 그 부분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귀하는 누가복음 23장 21절 말씀을 기도로 읽는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우리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호흡, 헬라어 참조)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이라”를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호흡이라면 우리가 들이마쉬기 위함입니다. “네, 주님.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3. 귀하는 이것이 의미 없는 반복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반복은 중언 부언이지만 어떤 것은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은 심히 필요합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또 다른 모순으로 보이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해 이 선생은 (‘주님 만지는 간단한 길,’ 3-4쪽)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문이 닫혀있는 곳에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분이 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 닫힌 방 안에 들어가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성경은 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불멸의 영적 몸으로 들어갔다고 가르친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했다....하나님의 경륜 47쪽에서 이 선생은 반대로 말하고있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밤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오셨다. 모든 문이 닫혀있었지만 그분은 육체로 들어오시고 제자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단지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b)”라는 구절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것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4장 39절 역시 명백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두 문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위트니스 리가 둘 모두 참되다고 했을 때 그는 단지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가 성경과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모순을 찾습니다. 

성경과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는 지방교회의 교리에서 종종 모순된다. 이 선생은 ‘기도로 말씀 읽기’의 6-7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본성은 영이다...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체이다...이 책(성경)의 본성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별로 그리스도를 찾기’의 13쪽에서 이 선생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하라, 성경은 성경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중의 방면이 있습니다: 문자이며 또한 영인 방면이 그것입니다. 의문(letters, 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고후3:6). 요한복음 6장 63절에 따르면 말씀은 영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40절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상고할 수는 있었지만 생명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으로 올 때 그는 또한 반드시 주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단지 성경의 죽은 글자만을 만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만질 때 주님을 또한 만진다면 말씀이 영과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를 전하는지 말씀의 생명을 전하는지는 전하는 이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할 수 있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사역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지방교회 안의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2. 저는 귀하가 성경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한 문장만을 인용했던 ‘살아있는 별로 그리스도를 찾기’에서 전체 단락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12-13쪽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를 단순하게 신뢰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무엇인가를 놓칠 것이다. 말씀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단순하시지 않다. 구약에 선지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도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의미에서 “은밀”하다. 하나님은 그다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으시며 대단한 선전과 함께 오시지도 않는다. 어린 아기 예수도 은밀하게 오셨다. 만약 당신이 성경적인 면에서 율법적이라면 당신에게 하나님은 “은밀”하시다. 당신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나는 성경을 안다. 성경은 이렇고 이러한 것을 말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지식에게 기만당하게 될 것이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이리저리 알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았다. 당신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한다. 하지만 조심하라. 성경은 성경이고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글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언제 그분이 베들레헴에 계시고 언제 떠나시고 언제 돌아오시고 어디서 부활하시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이러한 방식으로 따라야 한다.

로버트씨, 저는 이것이 귀하께 적절한 말이라고 느낍니다. 귀하는 모든 것을 말씀의 문자로 시험하는 노선에 주로 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가 보듯이 일세기의 바리새인들 역시 구약의 말씀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주님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을 알았지만 베들레헴으로 그리스도를 보러가지 않았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오셨을 때 그들은 말씀의 문자를 확인하고서는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2)고 했습니다. 원칙면에서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하여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들이 귀하의 성경적 기준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속지 마십시오. 만약 귀하가 싸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날 이 땅위에서 하고 계신 일이라면 이것은 귀하와 귀하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교리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귀하는 “모순”을 발견하셨습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귀하의 표현에 따르면 “교리에 대한 구체적이고 우주적인 진술”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면서 “교리는 오직 분열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이 문장은 잘려서 인용되었습니다. 귀하는 이 문장조차도 전체를 인용하지 않고 잘려진 문장만으로 문맥을 설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말이라면서 다른 문장의 일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교리로부터 확실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진리의 변호자는 결코 고의적으로 상대방을 잘못 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경륜’ 23-24쪽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위트니스 리의 말의 문맥을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는 주님의 자녀 가운데 분열만을 일으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신 영을 따라 행하며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욱더 다투게 된다. 오늘 우리가 성령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모두 “아멘! 할렐루야”라고 한다. 그러나 내일 영원 보증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즉시 나뉠 것이며 이것은 곧 목표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목표에 온통 집중하기보다 문제만 일으키는 것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 안에 계신 아들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다. 

어떤 사람은 침례에 대해 논쟁한다. 예를 들어 일부는 물을 머리 위에 뿌리는 약세를 주장한다. 이것 역시 교리의 문제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즉 그리스도만을 붙잡아야 하며 오직 한 분 그리스도자신에 의해서만 붙잡혀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법과 성령에 의해 붙잡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어느 정도 교리를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교리가 아니라 성령 안에 살아 계신 한 분이다.

마지막으로 귀하가 소위 “모순”이라고 제시한 것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최근의 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193쪽에서 이 선생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사진을 신문에 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타락하고 세속적인 기독교 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오 형제여! 가능하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신문에 광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 이 선생과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아나하임, 헌팅턴비취, 샌디애고에 있는 교회들은 직접적으로 이 권면에 모순되게 행했다. 1975년 12월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신문 종교란에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결국 이 선생의 권면은 하나님의 계시라고들 함에도 불구하고 부서지기 쉬운 과자와 같음이 분명하다.

  1. 로스엔젤레스 신문에 실린 이 기사의 목적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면을 샀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광고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종교광고를 할 때 주로 따라오는 사진이나 개인적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타락하고 세속적인 기독교 종교”의 어떠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솔직하게 선포한 것으로 귀하와 같이 우리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대중의 생각에 집어넣어진 잘못된 인상들을 정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율법적인 생각은 언제나 그 영에게 당황할 것입니다. 율법적인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다시 한 번 주 예수님으로부터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를 원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요 7:8, 10). 그분은 처음에는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가셨습니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분의 말씀은 “부서지기 쉬운 과자”와 같습니까?

로버트씨에게 묻겠습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까?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정의와 사람의 생각의 범주와 무익한 “철학”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골 2:8)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까? 이사야서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구실을 대어 빠져나가지 않고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구절은 또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일관된 틀에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귀하의 생각이 아닙니다(사 55:9). 바울이 “간사한 유혹(체계화된 오류, systematized error)"(엡 4:14)이라 불렀던 것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체계화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과실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귀하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사람의 예화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을 때조차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인용한 후 귀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가끔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오류절무(誤謬絶無)를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심지어는 현실도 무시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미 자세히 말씀드린바 있는 귀하의 소책자의 증거를 근거로 해서 저는 이 이야기의 교훈이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바로 귀하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한 귀하의 생각이 옳다고 너무나 확신하는 바람에 코앞에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태복음 7장 2절의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제가 3절부터 5절까지를 바꾸어 말해도 괜찮다면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왜 위트니스 리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귀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까? 귀하의 소책자는 허위와 거짓말이 가득한데 왜 위트니스 리에게 “당신의 눈 속에 있는 과실과 부정확함을 빼라”고 합니까? 귀하는 먼저 귀하의 생각에 있는 무분별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교회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지식에 따르면 저는 그를 그 영에 아주 많이 의존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버트씨,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 볼 때 당신은 그러한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귀하의 소책자 끝에서 귀하는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 안에 있다면 떠나십시오!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에 가입하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상대론(relativism)” 때문에 성경적인 실제를 떠나지 마십시오.” 여기서 성경적인(biblical)과 상대론의 철자도 “Bibical"과 ”realativism"으로 잘못 씌어져 있습니다. 성경적인(biblical)의 철자는 계속해서 틀리게 씌어져있고 몇몇 문장의 구조는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혼란스럽습니다. 한 예가 귀하의 소책자의 6쪽에 있는 문장입니다. “만약 지방교회가 잘못된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만 가르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교사는 아닐 것이다(If the Local Church were only teaching the wrong doctrine of God, it would still not be a teacher of God.).”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귀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모르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진리를 대표한다고 하는 사람은 공개적인 출판물에서 부정확하거나 엄밀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진리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관한 귀하의 관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고 귀하의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 리서치 인스티튜트(Christian Research Institute)가 수행한 작업의 질을 보여주는 표본입니까? 귀하는 귀하의 비판을 지지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귀하가 마치 증거인 양 제시한 글들은 문맥과 상관없이 잘려져서 저자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귀하의 목적은 진실을 제시하지 않음으로 위트니스 리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독자들에게 편견을 갖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진실로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조사를 했습니까? 귀하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많지 않습니다.

귀하는 모순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을 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후에 귀하 자신의 꾸며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위트니스 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동안 개인적으로 그를 알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처럼 풍성하며 도움이 되는 말을 거절한 “괴악한 사람들”(baser sort, 행 17:5)의 범주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행17:11) “신사적”인 사람의 범주에 속해야만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후자에 포함시킬 수 있음이 너무 기쁩니다.

로버트씨 저는 아주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러한 비방과 꾸며낸 이야기들은 귀하의 생각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만약 귀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열어 진리의 빛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면 귀하는 귀하가 했던 말들을 철회하고 위트니스 리와 교회들과 귀하가 잘못된 인상을 준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 따르면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만약 사람의 공력이 불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4-15)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귀하의 공력이 시험을 통과할지 의심이 듭니다. 귀하가 귀하의 소책자를 작성하는데 사용했던 자료는 확실히 금과 은과 보석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짚입니다(고전 3:12).

귀하는 교회에 대항하여 수천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따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귀하가 그 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귀하는 무엇으로 자신을 변호하시겠습니까? 저는 주님이 귀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너는 ‘연구원’이었으면서 어째서 진리를 찾고 제시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내 백성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진리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퍼트렸느냐?”

로버트씨 제가 개인적인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갓난아이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체험이 있는 64살의 사람입니다. 저는 상당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기독교 사역을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도 상당히 정통합니다. 저는 1968년에 주의 회복의 진리를 보았고 그것을 보았을 때 저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아래 있은 후로 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제 목사직의 장래를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서 그것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뿐만이 아닙니다. 수 백명, 아니 수 천명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님에 대한 누림을 발견했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직 목사이거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입니다.

집회와 교통, 교회의 사역뿐만 아니라 위트니스 리의 책들 또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역은 40년이 넘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는 그 시간동안 많은 책들을 출판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공급해 왔습니다. 귀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확실히 그의 책들에는 귀하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돕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귀하에게 요청하고 제안하는 것은 월터 마틴씨에게 이것을 질문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지 않습니까? 왜 오직 잘못된 것들만 지적할 뿐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지 않습니까? 만약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나 틀렸다면 당신은 왜 더 좋은 것을 내놓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가 어느 부분에서 틀렸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더 좋은 어떤 것을 산출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사역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지적할 능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가치로서 말로 된 것이나 출판된 것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보양하심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귀하에 대해 염려하는 바입니다. 귀하는 몇몇 책들을 읽은 것 같지만 풍성은 놓쳤습니다. 맛있게 먹고 즐길 닭을 받고서도 귀하는 뼈만 찾고 있습니다. 귀하가 정직하다면 비록 귀하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위트니스 리의 책이 부요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할 것입니다. 귀하의 앞에 풍성한 음식들을 차려놓고는 어째서 목에 걸릴만한 것만 찾아내시는지... 귀하가 염려스럽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요한 누림을 체험하지 못한 귀하와 오렌지 카운티의 많은 사람들을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에게 그들이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마23:13).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귀하가 저처럼 실제적인 교회생활 안에서 실제 안의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길 바랍니다. 저는 귀하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분들에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한 말을 해드리기 원합니다: “와서 보라”. 나다나엘에게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 상당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반응인 “와서” “보라”는 그의 의심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와서 봄으로 나다나엘의 의심은 믿음의 선포로 바뀌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6-49).

왜 와서 보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 보십시오! 우리는 주일 아침 10시에 주일 집회를 하며 주일 저녁 6시엔 만찬 집회를 갖습니다. 또한 화요일 7:30 기도집회와 금요일 7:30 사역집회와 토요일 7:00 중고등부 집회가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 포드 (Gene Ford) 드림

ⓒ 1976 Living Stream Ministry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5. 05:00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 80년대 꽤 인기있던 한 설교가는 하와를 ‘교회의 예표’라고 하여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은 일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우화적 해석이요 정당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장로교회도 성경이 아담을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하는데는 동의한다. 왜냐면 로마서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5:14)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담의 범죄로 인류가 타락한 것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대표성도 인정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2절)고 하시고, 로마서 5장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이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7, 18절)고 하셨다. 

 ◇ 하와를 교회의 예표라고 하는 근거는 에베소서 5장 22~32절의 남편과 아내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한데서 찾고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하시고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다. 여기에서 곧 그리스도의 아내로서의 교회는 아담의 배필로서의 하와의 위치와 같다는 것이다. 더우기 하와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오고, 교회는 흠없고 온전하사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피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오직 아무런 흠도 티도 없고, 죄 없으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만이 교회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교회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 안에 하와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교회가 있고, 하와의 생명의 근원이 아담의 몸인 것처럼 교회의 생명의 근거도 그리스도의 몸이다.  

◇ 그런데 장로교회는 하와가 타락의 상징인데 타락한 하와를 교회의 예표라고 하는 것은 교회도 타락한다는 뜻이냐며 대단히 단세포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와는 죄가 아직 세상에 오기 전에 아담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흠없는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시고” 안식하셨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인한 교회를 얻었기에 그 교회로 하여금 마귀의 일을 멸하고 세상을 정복하며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것이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인간들이 불완전한 교회로 만들고 있다.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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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3. 05:00

교회의 입장 문제 - 소개의 말

오늘날 주님에 대한 느낌이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이 땅 위에서 걷고자 하시는 길은 교회의 길이고, 하고자 하시는 일은 교회의 일임을 알 것이다. 이 십여 년 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개인적인 길을 걷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내리막길을 걸으며, 일할수록 주님의 능력과 축복을 잃게 된다는 것을 계속 보여 주셨다. 그런 반면에 교회적인 봉사는 날이 갈수록 오르막길을 걸으며 일할수록 주님의 임재와 확증을 갖게 된다.

오늘날 이 땅 위에서 주님은 교회의 길을 가고 교회의 일을 하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이 개인적인 길을 가고 개인적인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잃게 된다. 모든 주님의 축복을 얻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임재이다. 주님의 가장 큰 임재는 바로 주님의 가장 큰 축복이다.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의 임재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가지려면 주님이 정하신 길을 걸으며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면서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참으로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얻으려는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이 정하신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가 주님과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어찌 주님을 만지며 주님의 임재를 가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 주님이 가시는 길은 교회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여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 섬기며 또한 형제 자매들을 교회적인 봉사 안으로 이끌기 바란다.

교회의 입장 문제

교회의 입장이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주님은 교회의 일정한 입장을 확실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형제 자매들이, 하나님의 축복이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의 성령과 하나님의 빛도 교회 안에 있으며 특히 주 예수 자신의 생명도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평상 개인적인 생명을 중요시하지만 사실상 주님의 생명은 교회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영에 속한 것들을 교회 안에 두셨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인지의 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만일 하나님이 영에 속한 많은 것들을 우리 개인에게 주셨다면 문제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하나님은 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교회 안에 두셨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곳이 교회인지의 여부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만일 내가 왕래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극히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비유를 말하겠다. 여기에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자매가 있다 하자. 그녀가 어떤 것을 검사하기 위해서는 유리 조각 하나가 필요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균을 검사하는 데는 유리 한 조각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과 대화하러 찾아온 어떤 형제나 자매에게 물 한 잔을 주려 한다면 당신이 매일 사용하는 그 유리 조각 하나는 소용이 없다. 유리 한 조각이 당신의 실험실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많은 용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에게 물 한 잔을 줄 때는 그 유리 조각이 조금도 쓸모가 없다. 그는 바퀴벌레나 새가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그에게 물 한 잔은 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유리 한 조각으로는 필요를 채울 수 없다. 많은 문제들이 유리 한 조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여러 유리 조각이 합하여 만들어진 컵이어야 이 갈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평면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입체가 담을 수 있는 것보다 못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의 영적인 공과를 말살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누구나 영에 속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때로 그것들 중에는 최고의 영적인 공과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적인 것들을 교회 안에 두셨기 때문에 개인을 의지해 구할 때 얻지 못하게 된다. 이 말은 개인에게 축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개인을 빙자해 얻으려 할 때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그분의 풍성을 교회 안에 두셨다. 교회는 유리 컵처럼 하나의 입체적인 것이다. 유리 컵의 유리로만 생수를 마실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만이 많은 영에 속한 것들을 담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많은 영에 속한 것들이 개인에게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상당히 분명하며 기묘하다. 그분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다음 『음부의 문이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이 약속이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많은 경우 개인이 음부를 저항하기란 얼마나 쉽지 않은지. 그러나 일단 교회가 나오면 사탄은 실패한다. 나는 이 여러 해 동안 개인에게 축복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개인에게 축복이 있었지만 그 축복은 제한되었다. 오직 교회 안의 축복만이 무한하며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교회의 길을 떠날 때 그의 축복이 제한되고 하나님의 임재도 제한 된 것을 볼 것이다(축복과 임재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제한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만지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나의 솔직한 말을 용서하라. 특히 최근 십 년 동안 나는 사람들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지 주목하여 보아 왔다. 이상한 것은, 어떤 형제들은 주님을 안 지 이삼십 년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교회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과거에 그가 얻은 것도 점차 미약해지게 되고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들도 거의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무리의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앎으로써 머리의 풍성이 그들의 풍성이 되었으며, 그들은 쉬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을 관심할 뿐 아니라 그가 왕래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교회인가의 여부를 관심해야 함을 젊은 형제 자매들이 주의하기 원한다. 이것을 기억하라. 한 사람일 때는 개인이나 두 사람은 교회일 수도 있고 두 개인에 불과할 뿐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오백 명이나 천 명이 합하면 교회라고 생각지 말라.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천 명이 교회가 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나 천 명도 천 명의 개인이고, 개인이 보다 많을 뿐 여전히 교회가 아닐 수 있다. 여기에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사람이 교회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마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 명도 교회가 아니고 천 명의 개인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 명도 교회가 아니라 만 명의 개인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교회는 특별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특별히 교회의 입장을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

오늘 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이 두 가지가 다 갖추어져야 교회를 이룰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분명히 보여 준다. 첫째는 성령의 권위이고, 둘째는 지방의 경계이다.

1. 성령의 권위

우리는 반드시 성령이 없으면 교회도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이상수(李常受)형제나 장우지(張愚之)형제나 유성화(兪成華)형제가 아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성령이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해서 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한 가지 즉 권위와 능력과 생명인 성령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한 성령의 생명과 능력과 권위가 있을 따름이다.

오늘 이 자리에 연장한 형제들이 많다. 예를 들어, 두(杜) 형제가 『나는 이십 년간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주장을 내세우거나 어떤 일을 전개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하자. 그럴 때 여러분은 여기에 방해하는 어떤 것이 추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두(杜) 형제가 있을 뿐 성령이나 교회는 없게 된다.

여러분은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이 곧 교회가 부재하는 곳임을 기억하라. 교회는 주님의 성령이 그-교회-를 통해 아무 방해 없이 그분의 뜻을 표명할 수 있는 곳이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마리아가 그분께 드린 신체를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성령 안에서 주님은 오늘날의 교회를 사용하신다. 교회의 가장 높은 경지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이다. 바꾸어 말해서 성령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교회라 불리울 수 있다.

오직 성령에게 권위가 있음

좀 더 추가하여 먼저 연장한 형제들에게 말하겠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권위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다. 여러분은 젊은 형제들에게 권위에 복종하라고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기본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여러분이 권위에 복종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구의 권위에 복종하라는 것인가? 내가 말하지만, 젊은 형제들이 자신을 빙자하여 한 말이 장애가 되듯이 장년 형제들이 자기를 빙자하여 한 말 또한 장애가 될 수 있다. 오직 성령의 권위만이 참 권위이다.

오늘날 왜 젊은 형제들이 연장한 형제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연장한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배운 공과가 많고 하나님의 권위를 많이 알며 그들에게서 성령이 쉽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수도관이 쓰레기와 장애물이 없이 여러 해 동안 흘렀기 때문에 잘 통하는 것과 같다. 젊은 사람들이 연장자들을 순종하는 것은 연장자가 권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연장자들을 통해 말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해 동안 주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의 몸에서 쉽게 흘러나가는 것이다.

내가 연장한 형제들에게 순종하기를 배우는 것은 그들 몸에 성령의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내 몸에 있는 성령의 권위를 쉽게 잃게 된다. 우리는 결코 연장한 형제들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연장한 형제들을 쉽게 통과하는 성령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교회 안에는 오직 성령의 권위가 있을 따름이다. 개인에게서 나온 것은 권위가 없다. 장로들이나 연장한 형제들이나 영적인 사람에게 권위가 없고 오직 성령에게만 권위가 있는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성령의 권위의 출구

요즘 나는 한 가지 일을 보았다. 어느 형제가 몇 년 전 그의 손에 무거운 물건을 들고 먼 길을 달렸었다. 후에 그는 손이 약간 결린다고 느꼈는데 갈수록 심해져 이제는 그 손이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형제는 『온 몸이 내 것이지만 이 손만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지체는 남의 것같이 나와 다툽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종종 병을 앓은 사람이므로 언제든지 어떤 지체의 존재가 느껴질 때 그 지체가 병에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몸이 최상일 때는 몸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때이다. 언제든지 폐의 호흡이 느껴질 때 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심장의 뛰는 것을 느낄 때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십여 년 동안 치아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치아의 존재를 느낄 때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말하지만 몸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존재를 느끼는 정도의 하나일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인 것이다. 오늘 아마 당신은 당신의 손가락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당신의 손가락의 존재를 느끼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이상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손을 다쳤다면 하루 종일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어떤 것을 느낄 때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몸이 그 지체를 사용하지 못할 때 몸에는 문제가 생긴다. 교회 안에서 성령이 완전한 권위를 얻으려면 아무 장애 없이 온 몸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한 지방에 방해물이 생길 때 몸에 문제가 생긴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권위 아래 굴복할 때 성령이 어떤 사람을 사용해도 몸 안에 장애물이 없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된다. 권위가 순조로울 그 때가 바로 몸이 건강할 때이다. 모든 사람이 성령에게 쓰임받을 수 있을 때, 그곳에서 성령은 권위를 가지며 모든 것이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성령의 완전한 권위가 바로 교회의 입장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오늘 어떤 단체에 성령의 권위를 순종하는 형제 자매가 있고 순종하지 않는 형제 자매들도 있다면, 당신은 거기에 교회의 입장이 없음을 볼 것이다. 교회의 입장은 바로 성령이다. 언제든지 성령에게 득죄할 때 교회의 입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오늘 모든 형제 자매들의 결정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아니다. 오늘 천 육백 명이 다 손을 들어 어떤 일을 통과시켰다고 해서 이 천 육백 명이 손 든 것이 곧 교회는 아니다. 이는 천 육백 명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권위가 집행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성령의 권위가 없다면 교회의 입장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권위를 순종해야만 교회의 입장이 있다.

몸이란 무엇인가? 당신이 자유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몸이라 부른다. 몸은 다툼이 없고 어려움이 조금도 없고 어떻게 시키든 그대로 하는 것이 바로 몸이다. 당신과 다투는 것은 몸이라 칭하지 않는다. 한 지방 교회가 나타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성령을 순종할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런 순종이 나타날 때 교회가 나타나게 된다. 만일 어떤 형제가 자기를 좇아 말하고 결정하기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권위를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그 지방에는 교회가 없는 것이다.

어떤 곳이든 간판을 걸어놓는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 형제 자매들이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성령의 권위에 순종함으로 성령의 권위가 장애 없이 통과되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의 책임을 맡고 있는 형제들은, 앞으로 이삼십 년, 오륙십 년이 지난 후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희어진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권위를 전하는 자와 권위의 출구에 불과할 뿐 여러분 자신은 권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언제든지 여러분 자신이 권위가 될 때 모든 것은 다 끝나게 된다.

사역하는 형제 자매들은 성령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최소한 어떤 주장은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내가 말하지만 그 주장을 내세울 수 없다. 주님은 당신에게 권위를 주지 않았다. 여러분 자신은 권위의 출구가 될 수 있을 뿐 권위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당신이 백 세까지 살았고 백 년 동안이나 주님을 따랐다 하더라도 당신이 어떤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렇지 않다. 단지 우리의 영이 훈련과 배움을 가졌고, 우리의 영이 남보다 조금 더 예민하고, 빛이 조금 더 많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본적인 원칙을 조금 더 만졌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며, 성령의 권위가 남보다 더 쉽게 우리 몸에서 나타난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형제 자매들을 권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권위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다. 권위 또한 우리의 봉사 중 하나이다. 나는 각 집회소 책임 형제들이, 권위가 여러분의 사역과 관계되고 여러분의 많은 사역 중 하나임을 주의하기 바란다. 다스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급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다른 형제가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고 다른 형제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내가 이해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알려 주면서, 『형제님, 당신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권위로 형제를 다스릴 것이 아니라 권위를 사용하여 형제를 공급하며 섬겨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성령의 권위의 출구가 되어 형제들을 공급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통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위를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가 공급으로 흘러나가게 하기를 배워야 한다.

당신의 지위가 어떠하든, 당신이 감독이든 사도이든 집사이든, 당신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당신 개인의 권위가 나올 때 당신에게는 교회 입장이 없게 되고 전체 교회의 입장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체 교회의 입장은 성령의 권위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성령의 권위에 득죄할 때 문제가 생기며 교회의 입장은 없게 된다.

온 교회가 성령의 권위에 순종할 때, 그것은 마치 주님이 이 땅에서 마리아가 드린 몸을 사용하신 것처럼, 그분의 몸을 사용하여 말하고자 할 때 말하고 듣고자 할 때 들으며 걷고자 할 때 걷는 것이다. 마리아가 주님을 위해 준비한 몸은 가장 적합하다. 그 몸은 몸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주님 자신 같을 정도로 협력할 수 있었다. 그 화합과 하나를 위해서 조금도 어려움과 다툼이 없었다.

이것은 오늘 손을 쓰려 할 때 쓰지 못하고 눈을 사용하려 할 때 사용할 수 없고 말하려 할 때 혀가 돌아가지 않고 머리를 사용하려 할 때 머리가 생각지 않는 것과 다르다. 이는 교회가 있지만 없고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처럼 주님이 자연스럽게 사용하여 통과하실 수 있으며, 그 통과는 통과하지 않는 것처럼 합치되어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성령의 권위가 교회를 통과할 때의 그 자유로움과 합함은 그 권위가 통과하지 않는 것 같다. 성령의 권위가 완전히 통행될 수 있는 것이 곧 교회이다. 언제든지 저항과 저지가 있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언제든지 움직이지 못하고 개인이 나올 때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교회를 파괴하며 교회라 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오늘날의 문제로 돌아와 말하겠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위 교회라 일컫는 교파를 비판할 자유를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일은 우리 중 교파에서 나온 많은 연장한 형제들이 이런 역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많은 형제들은 세상과 죄에서 나왔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는 단체 속에 아직도 많은 사람의 뜻과 결정과 방법과 조직과 명칭과 사람의 전통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많이 말하기를 원치 않는다.

나를 용서하라. 우리가 부르심을 받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곧 교회 안에 있는 성령의 권위를 순종하고 세우며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님이 용서하시기 바란다. 왜냐하면 성령의 권위는 사람이 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형제들에게 얕은 비유로 말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내일 호랑이 한 마리를 내보낸다면 호랑이를 보호하기 위해 경호대를 붙여줄 필요가 있겠는가? 그럴 필요 없다. 호랑이는 경비가 없이도 스스로 보호할 줄 안다. 성령은 우리의 부축이 필요하지 않다. 성령의 권위는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열심을 내어 그것을 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권위가 계속 나타나도록 단지 헌신하고 무릎 꿇으면 된다. 지금은 기꺼이 헌신하겠느냐를 말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성령의 권위는 나타날 수 없다. 오늘날 문제는 우리의 헌신이 충만한가에 있다.

나는 우리가 성령의 권위를 위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헌신하기 바란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교회 안에서 당신이 머리가 되소서. 나로 하여금 방해하고 저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시며, 나에게 개인적인 것이 없게 하소서.』

여러분은 교회 안에 어떤 개인적인 것이 들어올 때,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든간에 교회 안에 다른 어떤 것이 추가되었으며 장애물이 생겼음을 알아야 한다. 내 몸에는 오직 내 자신의 지체만 담을 수 있다. 내 몸에 다른 사람의 것을 들어오게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제일 좋은 것일지라도 내 몸에 둘 수 없다. 내 몸에는 내게 속한 것들만 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것이 아주 귀하다 해도 내 몸에 둘 때 아마 독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기 것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오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이 매우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성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 그것을 가지고 들어올 때 입장은 없어진다. 교회 안에는 성령이 하나요 권위도 하나요 능력도 하나요 교통도 하나이며 이름도 하나이다. 무릇 성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교회 안에 둘 때 즉시 입장을 파괴하며 교회는 사라진다.

성령이 시작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님

오늘 내가 한 마디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상해에서 전도회나 신학교나 성경 학교나 사경회를 세우는 것은 그리 큰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성령에게 순종할 수 없고 사람의 권위가 나오고 개인의 것이 나올 때 교회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시작한 것이 성령이 아니라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나는 형제 자매들이 이 심각성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몇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다면, 공장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불가능하다. 당신이 믿는이든 믿지 않는 이든, 당신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든 없든, 당신은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성령에 의해 시작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어느 누구의 시작으로도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본래 사람에게는 성령의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권위가 없다면 교회가 없는 것이다. 당신이 어떠하든, 당신에게 성령의 시작하심이 없다면 교회를 세울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시작이 어떤가를 물어야 한다. 성령의 시작하심이 없이는 어떤 시작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아래 굴복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권위 아래 두어 자신의 자유함을 구하지 않고 완전히 그것에 제한받아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권위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다 통행되게 해야 한다.

2. 지방의 경계

교회는 또한 두번째 입장이 있어야 한다. 두번째 것이 없어도 교회의 입장이 없게 된다. 여러분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권위를 살아 나타내고 성령의 권위 아래 살고 있는데도 교회를 세우기에 충분치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충분치 않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첫째는 성령의 권위이고 둘째는 지방의 경계이다. 당신이 이것을 보지 못했다면 교회 입장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당신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가? 이것은 금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또한 땅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절반은 하늘에 속하고 절반은 땅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부분은 성령의 권위를 말하고 땅에 속한 부분은 지방의 경계를 말한다. 이것은 성경 안에 매우 기묘한 일이다. 성경은 교회가 완전히 지방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예루살렘은 하나의 지방이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고린도도 하나의 지방이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서 안디옥은 하나의 도시이며, 「에베소 교회」에서 에베소는 하나의 항구였다. 성경 안에 모든 교회의 입장은 모두 존재하는바 지방 위에 세워진 것이고 지방을 경계로 삼는다.

여기서 특별한 한 가지를 여러분이 주의하기 바란다. 예를 들어, 상해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교회의 입장에 서 있으려면 오직 성령과 상해의 입장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성령의 입장 위에 서야 하겠지만 또한 상해의 입장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상해가 우리의 거하는 지방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지방을 다른 것으로 바꿀 때 여러분은 즉시 교회의 입장을 잃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겠다

교회와 교회들

사도행전에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교회를 말할 때 헬라어와 영어와 중국어에서 모두 복수로 되어 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인 것이다. 왜 복수인가? 그것은 당시 유대가 로마의 한 도(道)로 되었기 때문이다. 한 도에는 많은 지방이 있다. 그러므로 한 도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다. 성경에는 지방 교회가 있을 뿐 도(道) 교회가 없다. 갈라디아 같은 경우 하나의 도이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들이라고 말한다.

에베소는 하나의 항구이자 지방이기 때문에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단수이다. 성경 안에서 이 점은 매우 분명하다. 예를 들어, 빌라델비아는 하나의 도시이므로 오직 한 교회밖에 없다. 아시아 곧 지금의 소아시아는 큰 도(道)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라 하고 아시아 교회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 지방에 오직 한 교회뿐임

여러분은 세계 교회가 없다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틀렸다. 국교회가 없기 때문에 성공회(영국 교회)도 틀렸다. 도교회가 없으며 민족 교회도 없다. 성경에는 다만 가장 작은 행정 단위의 교회가 있고 오직 지방에만 교회가 있으며 도시에 교회가 있을 따름이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는 결코 다른 지방에 있는 교회와 합하여 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 한 남편에게 한 아내밖에 없듯이 한 도시에는 한 교회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안디옥은 안디옥 교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안디옥 교회라고 말했다. 만일 안디옥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은 한 지방에 많은 교회들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한 교회만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는 고린도 교회들이나 안디옥 교회들이 없다. 성경에서는 안디옥에 있는 교회, 빌립보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를 말한다. 다 단수로 되어 있다. 안디옥이나 빌립보나 빌라델비아에는 교회들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심은, 영적인 면에서는 성령의 권위이고 외관으로는 지방의 한계이다. 고린도 교회가 교회를 네 부류로 나누려 할 때 바울은 즉시 그들에게 그것은 당 짓는 것이고 육에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린도인들이 바울교, 게바교, 아볼로교, 그리스도교 등 여러 작은 교회들로 나누려 할 때 성령은 육에 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도시, 한 지방에는 오직 한 교회밖에 있을 수 없다. 교회가 하나 더 많아질 때 그것은 곧 당 짓는 것이요 하나님께 버림받는 종파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육에 속했다. 왜 그런가? 한 지방에는 두번째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오직 한 교회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가 있을 때 두번째 것은 당을 짓는 것이요 육에 속한 것이다. 한 지방에는 한 교회 이상 있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다고 말하지만 영적인 양식은 교회를 세우는 충분한 입장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게 하려고 교회를 세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충분한 입장이 될 수 없다. 사람에게 성경을 알도록 가르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입장으로 충분치 않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부흥이 필요하다면서 부흥회(會)를 만든다. 최근 어느 지방에 흥분만을 위한 흥분회라는 단체가 세워졌다. 그러나 흥분도 교회를 세울 입장이 못 된다. 사람은 교회를 세울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 교회를 세울 입장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에게는 다 교회를 세울 입장이 없다. 에베소는 교회를 세울 입장이 있으므로 바울은 에베소보다 못하다. 고린도는 교회를 세울 입장이 있다. 그러나 바울, 게바, 아볼로는 모두 고린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를 세울 입장이 없으며 자격이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교회는 다 지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이 없으면 합당치 않고 교회를 세울 수 없다. 하나님이 지방 경계를 입장으로 삼으신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상해에는 오직 한 교회밖에 있을 수 없음

혹 상해에 교파의 위치나 종파의 위치나 다른 어떤 것 위에도 서 있지 않고 상해의 위치에 서 있는 교회가 있다 하자. 그럴 때 그 교회를 상해 교회라고 부른다. 가령 나와 우지(愚之) 형제 사이에 다툼이 생겨서 그로 남양로(南陽路)에서 모임을 갖게 하고 나는 북사천로(北四川路)에서 한 장소를 찾아 집회를 갖는다 하자. 그는 남으로, 나는 북으로 가므로 방향이 상반되는 것 같다. 내가 북사천로에서 말씀을 전하여 한 무리의 죄인들이 구원받았다 하자. 남양로의 집회장소에 이천 사백 명이 앉을 수 있다면 나는 북사천로에서 그것보다 크게 이천 육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집회소를 지을 수 있다. 나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배당을 세워 선교를 한다.

내가 말하지만, 내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말씀 전하고 온전케 할 수 있겠지만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상해를 입장 삼는 그 자격이 이미 사람에 의해 강탈되었기 때문이요 상해에는 오직 한 교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없는 지방에서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음

예를 들어, 오늘 귀주(貴州)의 필절(畢飾)이라는 지방에 아직 지방 입장에 서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없다 하자. 누가 귀주의 필절에 가서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생각은 가(可)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 지방에 오직 한 교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교회가 하나 더해졌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한 남자에게 한 아내밖에 없는 것과 같다. 당신이 아내를 취하지 않은 남자에게 시집갈 때 당신은 아내이다. 그런데 만일 어느 남자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합당하겠는가? 당신은 오직 아내가 없는 남자에게만 합당하다.

성경 전체는 우리에게 교회가 지방적인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는 교회가 지방적인 것임을 반드시 보아야 한다. 서신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 또는 에베소 교회라고 말하고 계시록에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라고 말했다. 한 지방에 오직 한 교회밖에 없다. 교회는 지방을 떠나서 독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없는 지방에서만 교회를 세울 수 있음을 기억하라. 교회가 이미 세워진 지방에서 우리는 교회에 가입할 수 있을 뿐 교회를 세울 수는 없다. 일단 교회를 세울 때 그것은 당을 짓는 것이요 종파이며 하나님이 정죄하는 바이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겠다. 한 여자가 아내로 시집가는 것과 첩으로 시집가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내가 말하지만 위치가 다를 뿐 다른 것은 다 똑같다. 입장이 다를 뿐 다른 것은 다 똑같다. 그녀가 대표하는 면에 있어서 다 똑같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입장이다.

분열이란 무엇인가

분열이란 무엇인가? 분열은 곧 입장이 없는 것이다. 입장이 없는 것은 분열이요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것이다. 내가 다시 귀주의 필절을 예로 드는 것을 용서하라. 당신이 필절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과 북사천로에 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북사천로에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을 구원시킬 수 없다거나 사람으로 영생을 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북사천로에서는 사람이 구원받은 다음에 다 잃어버린다는 말도 아니다. 복음의 진리는 어디서나 변함이 없다. 말씀도 매우 분명히 전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똑같은 것 같지만 당신은 북사천로에서 교회를 세울 수 없다. 당신이 북사천로에 가서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분열이다. 그러나 당신이 귀주의 필절에 가서 전한 메시지가 북사천로에서 전한 것과 똑 같다 하더라도 두 군데 다른 지방에 있는 것이며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귀주의 필절에 있는 것은 교회일 수 있지만 북사천로에 있는 것은 분열이다. 똑같은 교리가 두 지방에 있지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이 귀주의 필절에서 세운 것은 주님의 상이요 주님의 잔치이며 만찬이다. 가령 당신이 필절에 있는 상(床)을 상해의 북사천로로 옮기고 사람도 모두 그곳으로 인도했다 하자. 그곳에서 당신은 과거에 하던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한다. 이러한 것들에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필절에 있을 때는 교회이고 북사천로에 있을 때는 분열이다. 당신이 아내 없는 남편에게 시집가면 아내이지만 이미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면 아내가 아니다.

우리는 교회가 없는 지방에서 교회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있는 지방에서 당신은 교회에 가입할 수 있을 뿐 따로 교회를 세울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 원칙이다. 당신이 「지방」을 돌아보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끝난다. 당신이 기본적인 입장을 버릴 때 당신은 입장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두 가지를 깨닫기 바란다. 첫째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고, 둘째 하나님의 교회가 지방의 경계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교회의 입장은 성령의 인도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북사천로에 간 것은 성령을 좇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성령의 인도를 좇은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먼저 당신의 지방이 틀렸다고 논쟁하겠다. 당신은 성령의 첫번째 제한을 거스렸으므로 죄를 범한 것이며 당신은 설 곳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동시에 성령이 세운 지방의 범위를 주의해야 한다. 지방이 범위이다. 당신은 결코 임의로 움직일 수 없고 다만 순종해야 한다. 사람은 성령이 세운 지방의 범위 위에서 자유함을 가질 수 없다.

지방은 종파의 성립을 억제함

형제 자매들이 이 기본적인 원칙을 굳게 붙잡는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볼 수 있게 된다. 당신은 많은 소위 교파, 교회, 단체와 조직에 대해 매우 투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입장 위에 세워지지 않은 모든 단체가 교회가 아님을 볼 것이다. 당신은 분명하다고 느끼는가, 이상 하다고 느끼는가?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권위를 말하다가 지방 경계를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 같기 때문에 매우 기묘하다고 느꼈다. 성경에서는 교회 입장이 성령의 권위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성령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지방 입장이 더해져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두 가지가 합해져야 교회를 이룰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 다시 본다면 갈수록 분명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이 이 년 동안 만일 교회들이 지방의 제한을 받았다면 혼란에 이르지 않고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 복종했다면 천주교와 개신교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백여 교파, 그리고 전세계의 육백여 큰 단체와 오천 개의 작은 단체들이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다 지방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지방은 변하지 않음

내가 행정면에서 한 마디 하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왕조는 변하여도 지방은 변하지 않는다. 당(黨)이 변하여도 지방은 변하지 않는다. 나라가 변하여도 지방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상해는 여전히 상해이고 장춘(長春)은 여전히 장춘이다. 청나라 때에도 상해를 상해라 하고 중화민국 때에도 상해라고 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역시 상해라고 한다. 항쟁 (抗爭)시기에 국가 전체가 거의 중국의 모습을 잃었지만 지방은 변함이 없다.

모든 것이 변하지만 지방만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지방의 한계이다. 우리에게 로마 그 지방에 있는 교회가 있을 뿐 로마제국 교회는 없다. 명칭은 같아도 사실상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이 로마시의 그 교회는 인정하지만 로마 제국의 그 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지방 입장을 지키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반드시 지방 입장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 여러 해 동안 이 입장 위에 서서 다른 이름들을 거절해 왔다. 어떤 단체이든 상해를 입장 삼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봉사는 상해 교회를 건축하기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밖의 사람들과 접할 때 당신에게 이에 대해 물어보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한다. 교회는 내용면에서 성령의 권위가 있고 외관상으로는 지방의 경계가 있다. 성령의 권위에 지방 입장이 추가되어야 교회인 것이다. 속에 성령의 권위가 없고 밖에 지방 입장이 없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 입장과 영적인 축복

교회의 입장이 분명할수록 영적인 축복이 더욱 풍성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몇 년 사이에, 특히 이 일 년 동안 교회 입장을 특별히 축복하셨음을 본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개인의 길이 무엇이고 교회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성령의 권위가 모든 사람 위에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동역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당신은 주님의 축복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어떤 지방 교회의 인원의 증가는 몇 퍼센트가 아니라 두 배, 다섯 배, 열 배가 될 것이다.

대북은 본래 삼십여 명밖에 안 되었는데 지금 이미 천 명이 되었다. 우리가 몇 형제들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매우 열심히 수고했다. 하나님은 계속 축복하고 계시고 사람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내가 홍콩에 있을 때 어느 형제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그 형제가 교회를 아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대북에 있는 교회는 음력 설날 복음 집회를 본래 이 상수 형제님이 책임지도록 준비했었는데 후에 이 형제님이 어떤 일로 내게로 오게 되어 그들은 매우 실망하여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상수 형제님은 그 때 『내가 볼 때 이 상수 한 사람이 많은 것은 단지 한 형제가 많은 것에 불과하고 이 상수 한 사람이 적은 것은 단지 한 형제가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만일 대북에 교회가 있다면 이 상수 한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은 한 형제가 더 있고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대북에 교회가 없다면 이 상수 한 사람이 가버리는 것은 대북의 절반이 가버리는 것이다. 그후 결국 대북에 있는 형제들은 스스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자신이 복음 전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형제들도 복음을 전해서 천 사백 명으로 하여금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 이틀의 복음 대회에서 첫날 침례받은 인수가 이백 이십 팔 명이었다. 그러므로 대북은 한 형제가 있으나 없으나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제 그 형제의 편지로 돌아가 보겠다.

나는 그 형제가 한 말을 좋아한다. 『나는 우리 형제들이 동역을 배우고 주님을 잘 섬긴다면 삼천이 아니라 만 명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다 소화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기능을 발휘할 때 오백이 오면 오백 을 소화하고 천 명이 오면 천 명을 소화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들이 있어야 함

어떤 사람은 주님께 오순절날 교회를 축복하신 것처럼 우리를 축복해 달라고 구한다. 내가 묻건대, 만일 주님이 실지로 축복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참으로 주님이 오순절 때같이 축복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주님이 당신에게 삼천 명, 오천 명을 주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몇 천 명이 와서 교회에 사람이 가득 찬다면 우리는 즉시 소화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가령 상해에서 한 번에 삼천 명이 더해졌다면 우리는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침례 주어야 할지 모르고, 집회소 별로 떡 떼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그들을 온전케 하고 어떻게 심방할지도 모를 것이다.

교회가 강할 때는 온 사람만큼 소화할 수 있으며 엉망으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 중 천 오륙백 형제 자매들도 충분한 교통이 없는 채 거기에 천 명이 더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축복을 받는다면 우리는 감당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조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기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셔서 삼천 명이 왔지만 이틀이 지난 뒤 이천 명이 떠내려갔다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람 중 얼마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와도 모르고 가도 몰라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회 같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큰 유기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크게 축복하실 때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한다. 모든 형제 자매들이 성령을 순종할 때 모든 형제 자매들은 봉사를 갖게 되며 축복이 있게 된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지만 성령이 역사하도록 여러분이 예비되지 않았다면 성령은 역사하시지 않는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시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장소를 준비해야 한다. 주님이 사람들을 교회에 들어오게 할지언정 사람을 내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역사할 때 당신은 장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할 수 있도록 좀더 큰 집회소를 준비하여 분량을 넓힐 때 주님은 축복하시게 된다. 봉사자를 준비할 때 주님은 필히 축복하신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사람으로 봉사하도록 준비하지 않았다면 성령은 역사할 방법이 없다.(「열린 문」에서 발췌함)

지방 입장에 관한 이것은 매우 복잡하다. 지금 우리는 간략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온 우주 가운데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여러 개의 몸을 가질 리 없다. 그러므로 온 우주 안에 교회는 오직 하나로서 고금동서(古今東西)의 모든 구원받은 사람을 포함한다. 고금동서의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을 더할 때 곧 교회인 것이다. 그 안에는 바울도 있고 베드로도 있으며 귀용 여사와 뮬러도 있으며 구원받은 우리들도 포함된다.

교회는 고금(古今)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하나뿐이다. 마치 달이 하나밖에 없고 또 하나뿐인 것과 같다. 당신은 미국에 있는 달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을 수 없다. 달은 오직 하나뿐이요 우주 가운데 달은 유일한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도 똑같다.

우주 가운데 교회가 하나밖에 없지만 금세에 교회의 출현은 수천 개도 더 있다. 교회 자체는 우주적인 것이지만 금세에서 교회의 출현은 지방적인 것이다. 우주 가운데 교회 그 자체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금세에서 교회의 이 땅 위의 출현은 수천 개나 된다. 예루살렘에 교회의 출현이 있고 안디옥에도 교회의 출현이 있다. 에베소, 고린도, 로마 등 각 지방에 각각 교회의 출현이 있다. 교회의 지방에서의 출현이 곧 지방에 있는 교회요, 소위 지방 교회이다.

모든 지방 교회는 우주 교회가 그 지방에서 출현한 것이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는 곧 우주 교회가 안디옥 지방에 출현한 것이다. 대북 교회는 곧 우주 교회가 대북 이 지방에 출현한 것이다. 한 지방에서의 우주 교회의 출현은 곧 그 지방에 있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 자체는 우주적인 것이나 교회의 출현은 지방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각지에서 교회의 출현이 지방적인 것이므로 각지에서의 교회 입장 또한 지방적인 것이다. 지방 입장 외의 어떤 입장도 교회의 입장이 아니다. 어떤 모임이 지방적인 것이 아니고 지방을 입장 삼는 것이 아니라면 그 모임은 교회 입장 위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교회 입장을 잃어버리고 교회 입장 외에 다른 입장에 있는 것이다. 지방 입장 외에 다른 어떤 입장도 모두 교회 입장을 잃은 종파이다.

고린도 지방에는 오직 고린도라는 지방을 입장 삼는 모임만 있어야 한다. 그 모임은 곧 고린도에 있는 지방 교회이다. 만일 고린도의 믿는이들 중에 다른 입장에 선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열이요 종파인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자신이 바울에게 속했다거나 아볼로에게 속했다거나 게바에게 속했다는 사람들이 분열이고 종파일 뿐 아니라 그들 중에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자들도 분열이요 종파이다. 무릇 지방을 입장 삼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좋든지 간에 모두 하나의 종파이다.

무릇 한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을 포함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표방하든지 다 종파인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믿는이들은 다만 고린도 그 지방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다른 것을 또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종파이다. 그들이 어떠하든지 그들은 교회의 입장을 잃은 것이다.

교회의 입장은 지방적인 것이다. 만일 교회 안에 문제가 없다면 어떤 지방에서든지 교회의 출현은 오직 한 지방 입장을 가져야 한다. 교회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 지방에 많은 입장이 있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그리스도인 집회처(集會處)」를 하나의 입장이라고 생각지 말라. 또한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집회처」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인 집회처」는 하나의 입장이 아니며 우리의 명칭도 아니다. 「그리스도인 집회처」(현재 대북에서는 「교회 집회소」라고 개정했음)는 우리가 모이는 장소를 가리키고 정부에 등록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명칭이 아니다. 나는 이 명칭을 길가에 던져 버리기 바란다.

우리는 명칭이 없다. 또한 우리는 영원히 명칭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 종파에 속하거나 어떤 회(會)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교회가 황폐한 오늘날 하나님의 긍휼과 빛 비춤을 받은 한 무리의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 지방에서 교회가 잃은 입장으로 돌아와 함께 모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주님을 섬길 따름이다. 이 입장이 사람들에 의해 훼파되었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이 입장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는 마치 구약에서 포로 된 데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의 기초가 이미 훼파되었어도 당시 성전의 기초로 돌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 또한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 이외의 곳에 머물기 원했지만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의 원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오늘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우리도 이렇게 행하기를 원한다. 아직도 많은 형제 자매들이 교회 입장 밖에 있고 우리가 대북에 있는 모든 형제 자매들을 대표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기서 여전히 교회의 입장 곧 사도 시대 당시 교회의 원래 입장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 지방 입장 위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집회를 가지며 섬기기 원한다.(「화어 직사(話語職事)」에서 발췌함)


워치만 니 [교회의 길, "제 1장 교회의 입장 문제", 한국복음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