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4. 05:00

복음의 수호와 확증 - 지방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하여

복음의 수호와 확증

복음의 확증

지방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하여

 

서문

2004년말에 풀러 신학 대학 (미국, 캘리포니아, 패사디나 소재) 을 대표하는 세 명의 저명한 교수들인 리챠드 모우 (Richard Mouw) 총장, 하워드 로웬 (Howard Loewen) 신학 부장, 벨리 마티 커케년 (Veli-Matti Karkkainen) 조직신학 교수가 지방 교회들의 대표자들 그리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위한 출판사인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LSM) 의 대표자들과의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이 신학자들이 직접 조사와 연구를 수행할 의도가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했습니다. 그분들은 지방 교회들에 관하여 이미 이루어진 다소 철저하지 못한 연구들을 검토하였지만 그 연구들만을 근거로 자신들의 결론을 도출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풀러 측 교수진은 우리의 신앙과 실행들에 대한 방대한 문서를 요청하여 모두 제공받았습니다. 그러한 연구 결과, 그분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이 내린 결론은, 지방교회 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명서 전문은 이 책의 끝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지방 교회들의 대표자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편집부가 작성한 문서입니다. 이 글은 우리가 풀러 측 교수들과 초기에 나눴던 대화 가운데 있던 쟁점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 사안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공통 신앙에 대한 우리의 확증
  • 다음 항목들을 포함한 몇몇 진리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
    • 삼위 일체
    • 그리스도의 인격
    •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
    •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 참 하나의 터
  • 우리의 집회 방식과 봉사 방식.

이러한 평가는 풀러 신학 대학 교수진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출판물을 철저하게 검증하고 우리와 함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일관되게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저명한 그리스도인 이단 변증가들, 즉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인 이단 변증 사역 기관인 크리스챤 리서치 연구소 (Christian Research Institute/CRI) 소장인 행크 해네그래프 (Hank Hanegraaff) 씨와 ‘행동하는 답변 (Answers in Action/AIA)’ 이라는 이단 변증 사역의 대표인 그레첸 파산티노 (Gretchen Passantino) 여사도 보다 새롭고 철저한 연구를 토대로 우리에 대한 그들의 초기 평가를 수정했습니다. 그들의 성명서는 < 지방교회 들—진정한 믿는 이들이자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인터넷(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dialogues/index.html)과 DCP 출판사를 통해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출판함으로써, 풀러 신학 대학 교수들이 언급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관하여 어떤 단체들이 알고 있는 것과 그 두 사람의 저서에서 발견된 실지적인 가르침의 큰 차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잘못된 인상들을 더 철저하게 일소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소책자를 읽는 분들이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성경적이고 정통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책을 사용하시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 더 많은 교통의 문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 호 Abraham Ho  대니얼 토울 Dan Towle  롼 캥거스 Ron Kangas 

크리스 와일드 Chris Wilde  밴슨 필립스 Benson Phillips  앤드류 유 Andrew Yu

2009년 2월

풀러 신학 대학과의 대화에 이어 밝히는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가르침에 관한 성명서

지난 이 년 동안 (종종 ‘지방교회 The Local Church’ 라고도 불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이하 ‘지방 교회들’) 과 그 출판을 담당하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 (Living Stream Ministry 이하 LSM) 의 대표자들은 풀러 신학 대학의 학문 분야를 인도하시는 몇몇 교수님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바 있습니다. 이 참된 교통을 나누는 기간, 풀러에 계신 우리 형제님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고, 성경, 삼일 (또는 삼위 일체 Triune) 하나님, 그분의 구원, 교회, 교회생활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실행에 관한 우리의 견해 일부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형제님들이 베풀어 주셨던 환대에 깊이 감사드리며 아울러 우리의 견해를 관심 있게 경청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존경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와 그분들 사이에 어떤 점들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우리는 그분들이 항상 가장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방식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믿는 이를 받으신 방식 (롬 15:7) 으로 우리를 받았다는 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통에 대한 언급 중 일부 내용은 곧 출간될 풀러 포커스 (Fuller Focus)에 게재될 것입니다. [1] 

우리는 풀러 신학 대학이 우리에게 열려 있음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판은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우리가 믿는 것의 상당 부분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풀러 신학교의 형제님들이 전적으로 우리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대의 빛 안에서 모든 믿는 이들을 받는 (롬 14:10) 입장을 취해 주신 것에 따뜻한 목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실행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설명하는 성명서를 더 많은 분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우리를 받아들인 풀러 측의 합당한 그리스도인 행동에 대한 우려를 완화시킬 수 있기 바랍니다. 이 성명서는 우리가 지난 2년 동안 풀러의 형제님들에게 제시했던 것과 여러 면에서 거의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풀러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처럼, 우리가 같은 믿는 이들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점이 아닌 문제들에 대한 판단을 자제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를 함께 연결하시는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유지하게 될 것을 믿어 마지 않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지방 교회들 안에서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한 성명서로서 (풀러 측에서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해당 주제에 대한 풀러 측의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풀러 신학 대학이 그 어떤 부당한 비난도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아래의 내용이 결코 풀러 신학교와 지방 교회들 (및 LSM) 의 ‘공동 성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우리의 공통 신앙 

첫째 우리는 우리가 지닌, 우리 모두에게 전달된 공통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자 합니다 (유 3절).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 (영감) 으로 된 것을 믿습니다 (딤후 3:16). 우리는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도달했음을 믿습니다 (벧후 1:21). 우리는 두 성약인 신약과 구약으로 이루어진 성경이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큰 기쁨에 따라 그들을 영광 안으로 인도하는 데 있어서 완전하고 충분함을 분명히 믿습니다. 믿는 이들인 우리에게는 성경에 있는 것 이상의 추가된 가르침이나 계시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것을 위하여 우리를 장비시키고 온전케 하는 데 유익하고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딤후 3:17). 우리가 믿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성경의 근거를 가져야 하고 성경에 제한받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로 계시하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하나님이며, 성경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신 6:4, 고전 8:4).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사 45:5), 그분만이 하나님이십니다 (시 86:10). 이것은 고대의 유대인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모두가 즐거이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삼일 (triune) 이심,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습니다 (마 3:16-17, 28:19, 고후 13:13, 엡 2:18, 3:14-17, 계 1:4-5). 이것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 진리입니다. 우리는 신격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영원히 구별되시나 분리되지는 않으심을 확고하게 믿습니다. 신격의 세 위격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동시에’ 공존하시며 (사 9:6, 히 1:12, 7:3, 9:14),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벧전 1:2상, 히 1:8, 요 1:1, 행 5:3-4). 그러나 세 분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 (hypostases) 또는 세 인격 (persons) 으로 계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나타나신 세 단계가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구별은 되나 서로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더 나아가, 성부께서 신격 안에서 영원한 근원이시지만,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나중에 신격에 참여하시거나 양자로 받아들여지신 것이 아닙니다. 셋은 영원토록 동등하게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나이시면서 동시에 셋이실 수 있는가는 인류에게 참으로 비밀이지만, 이것을 다만 믿고 누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일이신 것 곧 셋이시자 하나이신 것은 우리의 인식과 신앙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후 13:13) 라고 격려한 것처럼 더욱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의 중심은 육체 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우리가 첫째로 시인하는 바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의 이 항목을 선언함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일이시며 이 삼일 하나님을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 진리로 인식한다는 점을 거듭 밝힙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이 구별을 유지하며, 각각의 본성이 혼잡이나 변동이나 분리 없이 고유의 구별된 특성을 유지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신 면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요 1:1, 14, 18). 그분은 참으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골 1:15),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자 본체의 형상으로서 (히 1:3),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시며 하나님과 동등되십니다 (빌 2:6, 요 5:18). 그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이 거하십니다 (골 2:9, 1:19). 한편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경이 담대하게 그분이 “육신이 되셨다” (요 1:14) 라고 선포할 만큼 그분의 인성은 참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죄만 없으실 뿐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히 4:15). 하나님은 그분의 완전한 지혜를 통해 아들을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셨으며 (롬 8: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서 하나님께 되돌리시는 우리의 구속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 일만에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를 우리의 죄들로부터 법리적으로 구원하실 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 유기적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하신다는 것 (롬 5:10 “더욱 그의 생명 안에서[2]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을 큰 기쁨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에 몸을 지니시고 아버지께 승천하셨으며, 아버지께서 그분을 자기 오른편으로 높이 올리시어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행 5:31, 10:36). 오늘날 그분은 승천하신 주로서 영광 안에 계시며, 여전히 사람이시자 영원토록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이 되시고, 인생을 사시고, 우리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참 사람으로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분이 결코 성부와 성령에게서 분리되실 수 없고 성부와 성령에게서 독립적으로 행하실 수 없는 바, 육체 되신 하나님이신 그분의 행하심이 전적으로 성부와 성령의 운행을 동반한다는 것을 똑같이 믿습니다. 본질에 있어서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마 1:20, 눅 1:35), 영원한 신격에 있어서는 물론 그분의 인간 존재에 있어서도 성부는 항상 그분과 함께 계십니다 (요 8:29, 16). 그분은 모든 일을 성부와 함께하시고 (요 5:19, 14:10), 성령에 의해 하십니다 (마 12:28, 18, 행 10:38, 히 9:14). 그분의 영원한 존재에 있어서처럼, 육체 되심에 있어서도 그분은 성부 안에 계시고 성부는 그분 안에 계십니다 (요 14:10-11, 20, 10:38, 17:21).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에게서 분리되시어 한 사람으로서 육체 되셨다는 견해는 성경 안에 있는 계시와 일치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단호하게 그러한 견해를 배척합니다. 비록 오늘 평범한 다수의 믿는 이들이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막연히 이러한 관념을 갖고 있을지 모르나, 그러한 견해는 장구한 교회사 속에서 발견되는 성도들의 증거는 아닙니다.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오늘 만유의 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이 신랑으로서 그분의 교회를 위해 다시 오실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요 3:29, 계 19:7). 우리는 그분이 왕 중 왕으로서 모든 민족들을 공개적으로 통치하실 그날을 고대합니다 (계 19:16). 모든 믿는 이들과 공유하는 우리의 복된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되고, 그분과 영원히 함께 거하며, 이로써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표현으로 소유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충만한 누림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계 21:1-22:5).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분깃이며,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엡 2:8). 모든 사람은 그 출생과 행위에 의해 죄인으로 조성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서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하나님께 회개하여 (행 2:38, 26:20) 죄들을 용서받고 구속받고 의롭게 되고 거듭나야 합니다 (행 10:43, 롬 3:24, 행 13:39, 요3:6).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요 1:12)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됩니다 (고전 12:27). 이러한 복음을 모든 인류에게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우리의 큰 특권입니다.

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그분의 각종 지혜를 알리시기 위하여 교회를 산출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엡 3:10, 2:15). 이 교회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며 (엡 1:22-23, 골 1:24), 역대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우주적인 면에서 하나이며 (엡 4:4), 마찬가지로 그 지방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지방 교회로서 하나여야 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참고 계 1:11). 많은 교파들의 존재로 증명되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교회 문제에 있어서 분명 커다란 불일치가 있습니다. 일부는 심지어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기본 조건인 교회의 필요성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비록 그것이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할 믿음의 하나 (엡 4:13) 에 관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필수적이며 중요한 항목이라는 것이 우리의 이해이자 믿음입니다.[3]


[1]  이 선언문은 그후 풀러 포커스 (Fuller Focus) 2007년 겨울 호 15권 No 1, 22쪽에 “풀러와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와의 대화”로 출판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풀러 측 웹사이트인
http://documents.fuller.edu/news/html/fuller_lsm.asp 에서 볼수 있습니다.

[2]  본고에서 인용된 성경 말씀은 대한성서공회에서 출판한 개역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단 개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의 의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부득이하게 헬라어 원문에 따른 적절한 표현으로 바꾸고 기울임 꼴로 처리하였습니다-역자 주

[3] 

교회생활의 특수성,일반성

이 단락에서 제시된 내용의 대부분은 위트니스 리 (Witness Lee) 가 쓴 <교회생활의 일반성, 특수성, 실행성>(The Speciality Generality, and Practicality of the Church Life, Anaheim, CA, LSM, 1983)의 7쪽부터 14쪽에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본고에서 언급한 모든 책은 위트니스 리와 캘리포니아 애나하임에 있는LSM이 출판한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3. 05:00

이교에 물든 기독교-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 으로 가득한 기독교

이교에 물든 기독교

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으로 가득한 기독교

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함께 쓴 '이교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 '팩트'(fact)입니다.  물론, '팩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맥박이었다. 주님의 그들의 생명이었고,호흡이었고, 대화의 핵심이었다. 신약성서적 교회는 모든 것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놓았고, 또 최우선으로 놓았다. 

  2. 신약성서적 교회는 예배의 고정된 순서가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신자가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를 나누고,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고, 서로 덕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두가 참여하는 열린 모임을 했다. 거기에 구경꾼은 없었다. 모두가 참여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 교회 모임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몸 안에서 상호 간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함을 통해 주님이 밖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 모임은 종교적 "예배 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스럽고, 자발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충만한 비공식적인 모임이었다. 그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또 교회에 속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역 또는 은사 받은 사람을 위한 무대로 쓰이지 않았다. 

  3. 신약성서적 교회는 친밀한 공동체로 살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집합적인 예배와 덕을 세우려고 모였지만, 교회가 단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모이려고 존재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신자들은 나누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정기적인 모임 밖에서 서로 돌봤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바로 그 느낌대로 진짜 그렇게 살았다. 

  4.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 의식, 성직자, 그리고 신성한 건물이 없다고 알려진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종교였다.

교회가 생긴 다음처음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집에서 모였다. 특별한 경우 에는, 기독교 사역자들이 때때로 더 큰 장소를 사용했다. - 솔로몬의 행각 같은 곳(요 10:23; 행 3:11)과 두란노 서원(행 19:9) - 그러나 그들에겐 신성한 건물의 개념이나 건물에 큰 돈을 들이는 개념이 없었다. 또 건물을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성한 건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5. 신약성서적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카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교회는 교회를 개척하고 돌보는순회 사도적 일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꾼들을 특별한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일부였고, 교회를 섬겼다. (거꾸로 교회가 그들을 섬긴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다른 은사와 기능을 소유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사람들 위에 권위를 행사할 독점적인 권리를 갖고 계셨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장로의 역할과 목자의 역할이 단 두 가지 은사였다. 장로들과 목자들은 특정한 은사를 가진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직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 모임에서의 사역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교회의 지체들을 자연스럽게 돌보고 또 교회 전체를 감독하는 일을 하는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었다. 

  6. 신약성서적 교회에서의 의사결정은 교회 전체의 어깨에 달렸었다. 

순회 교회 개척자들은 때때로 지침을 주고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교회 전체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 지역에서 결정을 내렸다. 함께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따르는 교회의 책임이었다. 

  7. 신약성서적 교회는 조직적이지 않고 유기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직책을 주고, 프로그램을 짜고, 의식을 제정하고,상명하복식 계급이나 명령계통 구조를 조직해서 함께 묶은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였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랄 것이었고, 그 유전자(DNA)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사역과 기능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교회가 아름다운 여자, 곧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녀는 땅에서 나온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식민지였다. 

  8. 십일조는 신약성서적 교회의 관습이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재정을 교회 밖의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중의 가난한 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아울러 그들은 복음이 널리 퍼져서 다른 곳에도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도록 순회 교회 개척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죄책감이나 의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능력대로 드렸다. 목사/성직자의 사례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요, 사역자요, 몸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였다. 

  9.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을 때, 새로운 지위를 얻었음을 표하는 간증으로 즉시 그 사람들에게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주의 만찬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또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되었음을 재확인하는 지속적인 표현이었다. 주의 만찬은 교회가 기쁨과 잔치의 분위기로 함께 즐겼던 온전한 식사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식이나 특별한 제사가 결코 아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였다. 

  1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젊은 일꾼들을 훈련시키려고 성서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지 않았다. 

기독교 일꾼들은 교회생활의 토양에서나이 든 일꾼들에 의해 교육되고 훈련되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키우실 때 이 '현장에서'훈련하는 최초의 모델을 선보이셨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젊은 이방인 출신 일꾼들을 훈련할 때 그 모델을 복제했다. 

  11. 초기 그리스도들은 자신들을 여러 교파로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이해했고 그것을 모든 도시에서 눈에 띄게 표현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한 도시에 교회는 하나뿐이었다. (교회가 그 지역 전체에서 여러 다른 가정집에 흩어져서 모였겠지만) 만일 당신이 1세기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한 교회에 속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은 잘 지켜졌다. 그들을 나누는 것("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은 분파와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1:12을 참조)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 대장간, pp 311 - 314

출처:good news fellowship                          글쓴이:maple

이교에 물든 기독교
국내도서
저자 :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조지 바나(George Barna) / 이남하역
출판 : 대장간 2011.12.27
상세보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5. 05:00


지방교회 탐구 - 2


이제 2회에 걸쳐 현재 예장 통합 교단과 (지방)교회 사이에 현안이 되고 있는 항목들에 대해 다룬다. 
 그러나 이에 앞서 (지방)교회의 개략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귀히 여기는 소위 (지방) 교회 성도들은 전세계에 약 30여 만명(중국 본토 제외), 3000 여 교회들이 있다. 한국에는 1966년에 소개되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 여개의 교회들과 약 2만여 성도들이 있고 200여 명의 사역자들이 있다.  

이들은 성경에 근거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삶과 교회생활에 충실하고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 노정에서 통합교단을 포함한 여러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사랑의 권면과 건설적인 지적을 받을 때 겸손히 배우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만, 오해되고 있는 믿음과 실행에 대해서는 진실에 입각한 규명이 필요하다고 보며, 이를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증진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참고로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아래의 이들의 견해는 위트니스 리의 총 8권으로 된 '신약의 결론' 책자 내용들에 근거한다. 양측은 바로 이 현안들에 대해 약 3년 간 치열한 진리 토론을 벌인 바 있다. 이제 예장통합 교단측이 지적한 주제들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 각각에 대해 (지방)교회 측의 입장을 살펴본다.

전세계 30여만명, 3천교회 산재

삼위일체 하나님 동일하게 고백

- 신인합일주의를 가르친다 : 이들은 예장통합측이 (지방)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적인 연합을 가르친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시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박형룡 박사에 의하면 개혁파 신학에서도 이것은 '구원의 교리의 중심과 기초적 진리'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박형룡 전집-구원론, 98쪽). 

문제는 (지방)교회가 이러한 신비적 연합을 말하면서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구별을 무시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크게 다르다. 지방교회는 '포도나무와 가지'(요 15장), '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고전 6:17) 등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믿고 가르친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창조주가 될 수 없고, 그러므로 당연히 경배의 대상이 되거나 전지전능, 무소부재 할수 없다는 사실을 아울러 가르친다. 이 점은 예장통합측과 토론 시 거듭 강조한 바 있다. 

 또한 "자신(하나님)을 제품으로 생산" 등등의 위트니스 리 책 자에서 문맥과 분리되게 떼어 낸 표현들이 읽는 이에 따라 다소 불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알의 밀알이 많은 밀알을 내는 것'(요12:24), '많은 아들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됨'(롬8:29) 등 의 성경진리를 쉽게 이해시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표현 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말들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무시하는 가르침에 근거하지는 않다는 점은 전후 문맥이나 위트니스 리의 다른 책자와 함께 볼 때 분명하다. 

 - 삼위일체론에서 양태론을 가르친다 : 결론부터 말하면, 위트니스 리가 쓴 400 여권의 책자 중 혹시 한 두 군데 이러한 오해를 살만한 표현이 있었는지는 모르되, 원칙적으로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양태론은 이단 신론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런 오해가 나왔을 법한 다음 두 항목들에 대해 이렇게 해명한다. 

 - (위트니스 리는) 한 인격, 한 영을 주장한다 : 당시 예장통합측의 토론자는 위트니스 리가 한 인격의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 양태론자라는 증거라고 했다(월간 교회와신앙, 2001, 11월호, 141쪽).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한 인격이 아닌 세 인격들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 증거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위트니스 리가) 세 인격이한 영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 이라고 한다."라고 한 통합교단 조사보고서 자체에 있다. 해당 보고서는 '이 세 인격이 하나로 발전되었다'라고 한다는 증거로 위트니스 리의 책자 '하나님의 경륜' 110쪽을 제시했으나 확인해 본 바 해당 지면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뭔가 큰 착각 내지는 오해가 있는 듯 하다. 

 - 세 영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을 가진) 한 영의 하나님'을 주장한다: 예장통합측은 '세 영들의 하나님'이 정통인데 위트니스 리가 세 인격을 가지신 '한 영의 하나님'을 말함으로 양태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성부의 영과 성자의 영과 성령은 <각기 다른 세 영들>이지 <한 영>(성부의 영=성자의 영= 성령)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통 교부 중 하나인 힐라리우스는 요한복음 14:23을 해설하면서 "아들과 아버지께서 함께 내주하시는 수단이 곧 보혜사 성령이시다...아들의 영이 따로 있고 아버지의 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함으로 예장통합측의 주장을 일축하고 오히려 위트니스 리와 같은 관점을 말하고 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168쪽). 이들은 황승룡 박사(개혁교회와 성령, 24쪽)를 비롯한 개혁교단 신학자들도 위 힐라리우스처럼 영을 이해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예장통합측 토론자의 주장과는 다를지 모르나 성경적으로든 교리적으로든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끝)

지방교회 탐구 원본 517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 클릭)
161111_517_목회자edit1.pdf

http://www.mokhoeja.co.kr/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3.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지방교회 자료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1)

- 시작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현실을 돌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godssalvation.chch.kr/aspects/regenerate.html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 05:00
[지방교회] 이스라엘 탐방(1) - 소개의 말

* [지방 교회](local Church) 이스라엘 탐방팀(한국35명, 미국9명)은 일반적인 성지순례자나 관광객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오는 60여 군데의 지명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자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하였다. 탐방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들은 출국하기 전에 2박 3일동안 방문지에 대하여 미리 철저하게 스타디하였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더 많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15박 16일동안(2012/10/13-28) 이스라엘을 탐방하기 위하여 10월 13일(토) 대한항공 KE957 편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출국하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서 전쟁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방교회] 이스라엘 탐방(2) -세겜 

(창 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창 33: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7:12-14)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수 24: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수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삿 9: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삿 21: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왕상 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메시지 3> 

아브라함은 세겜에 이르렀다.'세겜'은 원문에서 어깨라는 뜻이다. 어깨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힘있는 곳이다. 세겜 땅의 첫 번째 특징은 능력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적인 능력일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임을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주님의 생명을 얻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수 있다. 이는 그의 속이 이미 만족되었기 때문이다.속이 만족한 사람과 생명을 얻은 사람이 가장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세겜에'모레상수리나무'가있다.'모레'는 원문에서 '교사' 혹은 '가르침'이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지식의 방면이다.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세겜땅에 있다는것은 지식이 능력으로부터 온다는 뜻이요 지식은 능력의 결과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해서 참된 영적인 지식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얻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참된 영적지식이 없을 것이다.그런 지식은 사람에게 영적인 어떤 것을 줄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이 땅에서의 그분의 간증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그릇을 사용하신다면, 하나님은 그 그릇에게 어떤 교리를 들려주시는 것이아니라 먼저 그를 만족하게 하고 생명의 능력을 준 다음 참된 지식을 갖게 하신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너무나 큰 것이다. 하나는 교리이고 하나는 생명이다. 하나는 밖에서 들은 것이고 하나는 속에서 본 바이다. 하나는 잊어버릴가능성이 있지만 하나는 항상 속에서 기억한다. 모든 참된 지식은 생명의 능력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곧 우리의 능력이다.우리안에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남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내적인 능력이자 내적인 지식이다. 

<창세기 L/S 메시지 76> 

야곱은 라반의 손으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는 또한 에서와의 문제로부터 구출되었으며 숙곳에 이르렀고 거기서 자신을 위한 집과 가축을 위한 우릿간을 지었다. 나는 거기서 머문 야곱에게 평강이 없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세겜으로 올라왔으며 그의 열조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살기 위해 제단의 간증이 있는 합당한 장막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겜에서의 그의 생활은 하나님의 표준에 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땅에서의 그분의 집인 벧엘을 갖는 것이다. 

 야곱과같이 오늘날 많은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세겜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분의 수준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갈망은 만족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어떤 불행한 일들이 자꾸 자꾸 그들에게 발생하여 그들의 마음으로하여금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고 제단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준비 시킨다. 나는 내가 야곱과같은 일을 해온 것을 간증할 수있다. 나는 단순하게 나의 맹세와 헌신을 잊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특히 어려움과 시련의 시간 동안에, 주님께 헌신했음을 믿는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의 맹세를 이행했는가? 아마 우리 중 아무도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볼 때 우리 모두가 야곱들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역사는 사실상 우리의 자서전이다. 주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맹세하더라도, 우리의 맹세를 이행하고 우리의 헌신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한명의 딸, 열 한명의 아들, 세겜, 하몰,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일들의 희생이 요구될지 모른다 주의 회복안에서 그분은 우리가 세겜을 통과하여 벧엘로 가기를 원하시고 단체적인 교회생활로 올라가기 위하여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을 통과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세겜에서 좋다할지라도 우리에게 만족할만한 평강과 안정이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겜을 떠나 이땅에서 그분의 집안에서 합당한 교회생활을 갖도록 벧엘로 올라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취하게 한다.  

A.아브라함(Abraham)

세겜(Shechem)은 아브라함이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땅에 대한 약속을 받으면서 구약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세겜땅모레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가나안땅을 그의 후손들에게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창12:6-7).  

B.야곱(Jacob) 

1.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경계로 인해 밧단아람 땅을 떠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 이때 '숙곳(Succoth)'과 '와디 파라(Wadi Parah)'를 통해 세겜에 도착하였다. 

 2. 야곱은 잠시 세겜 근처에 머무르면서 그 지방의 하위 방백인 하몰의 아들(세겜)로부터 은 일백 개로 땅을 사서 '엘-엘로-헤이스라엘(El-Elohe-Israel,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명하고 단을 쌓았다(창 33:18-20)

3. 야곱 일가가 세겜에 머무르는 동안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창 34:2), 야곱의 두 아들(시므온과 레위)은 하몰과 세겜을 포함한 모든 남자를 살육하고 그 성을 약탈하였다(창 34:25). 이후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은 세겜을 떠나 헤브론 땅의 마므레(Mamre)에 머물렀다. 

4. 야곱의 가족들이 이곳에 묻혔으며(행 7:14-16),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요셉의 뼈도 이곳에 묻혔다(수 24:32).  

C.여호수아(Joshua)

1. 여호수아는 모세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장소로 선택한 세겜으로 모든 이스라엘 지파를 소집하여 백성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세우고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다(수 8:30-35). 

 2.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 경계에 인접한 세겜은(수 17:7) 에브라임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지만, 고핫 자손에게 재분배되었고, 도피성이 세워졌다(수 20:7, 21:21)(사진2. 레위 지파의 도시와 도피성 참조). 

3. 여호수아는 죽기 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을 세겜으로 불러모아 그들과 더불어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는 언약을 세운 후 그 증거로 큰 돌을 세워 증거를 삼았다(수 24:24). 세겜에서의 의식은 시내 산에서 맺어진 언약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후 세겜은 일정 기간 동안 이스라엘 열두 지파 동맹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D.사사시대

기드온이 죽은 이후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으로 등극했다(삿9:1-6).아비멜렉은 세겜에서 3년간 통치하였으나 세겜백성들이 반기를 들자 이 성읍을 파괴해 버렸다(수9:45). 

E.분열왕국시대

40년 동안의 솔로몬의 치세가 끝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르호보암은 왕권 확인식을 하려고 세겜으로 향했다(왕상12:1,대하10:1). 그러나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처신으로 인해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북쪽지파들은르호보암으로부터 돌아섰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아 세겜을 북이스라엘왕국의 첫번째 수도로 정하였다(왕상12:2025).그러나 세겜은 낮은 분지라는 치명적인 약점때문에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없었고, 북이스라엘왕국은 수도를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디르사(타루자)로 옮겼다. 디르사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바아사왕(왕상15:21), 엘라왕(왕상16:8), 시므리왕(왕상16:11)을 거쳐 오므리왕 6년까지 수도였다. 오므리왕은 전쟁시 방어하기에 유리했던 사마리아 성으로 천도하였다(왕상16:23-24) 

F.이스라엘왕국의 멸망과 포로기

B.C.722년 앗수르왕 사르곤2세는 북이스라엘왕국을 점령하였고, 이스라엘민족들을 메소포타미아로 붙잡혀 가면서 앗수르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도록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히 이스라엘민족과 가나안족, 그리고 앗수르족의 혼혈이 생기게되었다. 이 혼혈들은 사마리아의 지명을 따라 사마리아인(Samaritan)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 세겜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었기때문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왕국의 잔류민들은 앗수르의 민족 혼합정책, 피하여 세겜으로 모여들었고, 그리심산(Mt.Gerizim)에 성소를 세우고북이스라엘사람만의 전통을 지켜왔다. 이후 남유다왕국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갔다. 

 G.포로 해방과 귀환

그러나 바사(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하고, 고레스왕에 의해 해방된이스라엘민족은 스룹바벨의 인도아래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을 도와주려 하였으나, 이스라엘민족으로부터 거절 당하자 성전재건을 방해했다(스4장). 이들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지만 혼합된 혈통과 종교 활동으로 끝내 정통 유대인들과는 분리되었다. 

H.신약시대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었던수가(Sychar)성이 구약시대의 세겜이다(요4:3-42). 

I. 위치 및 지형 Geography

이스라엘_현대 세겜(나불루스)의 전경

A.지명-고대의 세겜(텔발라타,TelBalata)은 현재'나블루스(Nablus)'라 불리는 곳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나블루스는 새로운 도시, 즉 헬라어 네아폴리스(Neapolis)에서 기인한 이름으로 AD72년에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했을 때 건설한 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은 세겜이 하몰의 아들 세겜(창33:18-19)으로부터 유래한 명칭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어깨'라는 뜻을 지닌 세겜이란 이름은 평지보다 조금 높은 곳인 에발산 기슭쪽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B.위치-세겜은 중앙산악지대, 구체적으로 에브라임산지(사마리아지역)에 위치하고있다.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67km 떨어진 지점에 있다.세겜은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하는데, 남북과 동서로 뻗은 주요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세겜은 물공급이 용이하고 동쪽으로 쭉 뻗은 비옥한 평야, 그리고 여러 곳으로 연결된 주요도로가 통과하는 등의 여러 요건들이 합쳐진 지리적 요충지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로 인식되어 왔다. 단과 브엘세바사이의 직선 거리는 대략 230km 정도인데 그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세겜이다. 

 C.기후-세겜은 연평균 강우량이 적당하고, 물이 많은 곳이어서 고대로부터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보리나 밀, 채소가 재배되었으며, 평지를 둘러싼 산비탈에는 포도,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가 경작되었고,목축에 좋은 풀밭도 많이 있었다(창37:12-13).헤브론에 살던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세겜 근처로 보내 양을 치게 했다는 것만 보아도 세겜이 목축에 좋은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창37:12-15).


이스라엘_성지순례_세겜의_위치

D.교통-세겜은 지정학적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통과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교통의 중심지였다. 남쪽으로는 산악지방으로 관통하는남북간도로(족장의길),곧 성경에 언급된 '큰길(삿21:19)'이 나 있어 실로, 벧엘,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었다. 세겜은 동쪽으로는 동부 고원지대(트랜스요르단)를 지나는 왕의대로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사마리아를 지나 도단에이르는 길과 이스라엘 해안지대(샤론평야)로 내려가서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연결하는 해안길(ViaMaris)에 닿는 길이 있다. 특히 서에서 동으로 연결된 길(지중해해안에서요단동편)은 세겜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왔으며 강력한도시를 이루었고, 이스라엘 모임의 장소로 성경에 자주 등장하였다. 

 E.역사-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세겜이 알렉산더시대(B.C.322년경)에사마리아인들의 중요한 도시였고, B.C.107년 하스모니안 왕가의 군주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요한 히르카누스(JohnHyrcanus)에 의해 파괴되었다. B.C.63년에 로마장군 폼페이우스는 사마리아를 주(州)로 독립시켜 세겜을 그 주도(州都)로 삼았다. 제1차 유대반란시기(A.D. 67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 정상에 군사적 보루를 쌓았다. A.D.72년경 티투스(Titus)장군은 세겜땅에 신설도시를 세워 네아폴리스라고 불렀다. A.D.16세기경 나블루스는 팔레스타인 4대도시(예루살렘,가자,제파트,나블루스)가운데 하나였다. 1948년부터 요르단에 속했던 나블루스는 1967년(제3차중동전쟁)부터는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Ⅱ. 유적지 및 관광지 Historic and Tourist Sites

이스라엘_성지순례_텔 발라타(고대 세겜) 전경

A.텔발라타(Tel Balata) 

1. 고대 세겜(텔 발라타) - 성경에 등장하는 세겜은 현재의 텔 발라타이다. 텔 발라타는 현대 도시인 나블루스(세겜)의 동쪽에 인접해 있으며, 남서쪽으로 그리심산을 북쪽으로 에발산을 올려다 보는 계곡인 와디 파라(Wadi Farah)에 솟아 있는 낮은 언덕이다. 아브라함이 동쪽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 세겜에 왔을 때, 이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것으로 생각되는 성문이 텔 발라타의 북쪽 부분과 동쪽 부분에 조금씩 남아 있다. 

2. 텔 발라타에서 발견된 신전- 고대의 세겜(텔발라타, 나블루스 인근)은 1913년과 1934년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발굴팀에 의해 최초로 발굴되었다. 요새화된 신전은 1926년 독일 학자 셀린(Ernst Sellin)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후 발굴팀은 그 당시의 최신의 방법을 활용하여 적어도 네 개의 정착층(가나안 시대, 이스라엘 시대, 유대/사마리아 시대, 헬라 시대)을 확인하였다. 또한 1956년과 1973년에 라이트(G. Ernest Wright)의 지휘 하에 미국 드루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의 공동작업으로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졌다. 그들은 단단한 기반 위에 진흙 벽돌과 목재로 지은 다층식 신전이 지어졌음을 추정하였다. 이 신전은 사사기 9장에 언급되는 신당인 것으로 추측된다. 입구 좌우로 두 개의 높은 탑이 설치되었으며, 신전 위층 복도는 탑의 통로와 연결되어 있었다(사진5. 세겜 신전 상상도 참조). 입구 전방으로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제단 앞으로는 석비가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명기 27장 2절에 나타난 석회가 발라진 큰 돌이 이 석비인 것으로 추측된다(사진6. 여호수아의 석비 참조). 아비멜렉은 세겜 땅을 차지한 이후 이 신전을 곡식 창고로 사용하였다 


여호수아의 비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수24:27)_지방교회

 여호수아는 죽기 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민족을 세겜으로 불러모아 그들과 더불어 '우리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는 언약을 세운 후 그 증거로 큰 돌을 세워 증거를 삼았다(수 24:27). 세겜에서의 의식은 시내 산에서 맺어진 언약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_성지순례 여호수아의 증거 돌 앞
이스라엘_성지순례
여호수아의 증거 돌 앞에서 찰칵!(2012.10.15)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7:40
성경말씀  

(창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행:2:32~33上)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으며, 우리 모두가 이 일의 증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으로 높아지시고, 

 오늘의 만나  

라헬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름과 어머니로부터 받은 이름, 두 이름을 가졌습니다. 베노니는 슬픔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라헬은 고통을 받고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즉시 그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베냐민으로 바꾸었습니다. 슬픔의 아들이자 오른손의 아들이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베노니이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베냐민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두 방면을 가지고 계신 놀라운 분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만큼 슬픔 가운데서 고통 받지 않았으며,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만큼 높이 올려진 적도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장 33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그분을 높였다고 말하며, 히브리서 1장 3절은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슬픔의 아들, 고통의 아들이었습니다. 라헬은 이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역시 이런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에 따르면 그 아들의 고통이 그녀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듯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33년 반 후에 부활과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손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냐민이 고통과 높여진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35
성경말씀  

(고전1: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이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하게 함과 구속이 되셨습니다.  

오늘의 만나 

당신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것은 여전히 더러움과 사악함과 거룩하지 않음과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그리스도 안의 모든 것은 당신 안에 통하게 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끊어질 때 모든 더러움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청결한 파이프를 연결하면 깨끗한 물을 얻게 되고, 더러운 파이프를 연결하면 더러운 물을 얻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적어도 오늘이 이전보다 좋으며 어찌하든지 이전보다는 낫다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이후 당신의 옛 아담이 점점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이러한 일은 없으며 영원히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원하십니다. 당신은 아담 안에서 여전히 더러운 사람입니다. 당신을 이전과 다르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이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5. 18:55
성경말씀 

 (사12:4)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오늘의 만나

 
 이사야 12장 4절은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 이름을 부르라!”(원문참조)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과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함께 하나로 놓여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찬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 주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찬송하는 것이며, 호흡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적 호흡을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육신적으로 호흡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짧은 시간 내에 죽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부르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고, 호흡하는 것은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을 안으로 들이마시게 되고, 적셔지며, 신선해집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이만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방교회] 근면함  (0) 2018.05.15
[지방교회] 참된 보호  (0) 2018.05.15
[지방교회] 방 친구  (0) 2018.05.15
[지방교회]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0) 2018.05.15
[지방교회] 세 부류의 사람  (0) 2018.05.15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4. 16:10
성경말씀  

(살전5:17~18)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 대하여 가지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중국에서의 내지 선교회의 사역은 한동안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지 선교회의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씨가 어느 해 영국에 갔을 때서야 그 원인이 공개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영국의 어느 지방에서 말씀을 다 전한 후에 한 청년이 그의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중국 내지회의 상태와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 한 동료가 있는데 그는 중국에서 선교를 합니다. 그가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중국인의 이름을 저에게 보내주면 저는 끊임없이 그들을 위해 일일히 기도합니다."  테일러씨는 비로소 영국에 기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기도했을 뿐 아니라 특별히 거명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들은  중보기도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직접 그 환경에 처해 있지 않았지만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당신의 친지, 친구, 동료, 급우들 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당신은 매일 그들을 위해 일일히 거명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출처:온전케 하는 예화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4. 15:20
성경말씀  

(마4: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의 만나

어느 형제가 한 지방에 가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한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보통입니다. 저는 교회를 위하여 어떤 것도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도 어떤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 형제는 대답하였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시간이 있으면 조금 읽습니다." 그때 그녀 옆에 한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습니다. "당신이 이 어린아이를 기르는데, 오늘은 다섯 번 먹이고, 내일은 세 번 먹이고, 다음에는 연속 삼일 간 먹이지 않다가, 다시 하루에 다섯 번을 먹여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굶어 죽지 않겠습니까?"  형제가 그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지금 당신 안에 있는 분을 이같이 대하고 있음을 왜 모르고 있습니까?"
출처:온전케 하는 예화들(1)


'이만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 성의 기도회를 이끌어옴  (0) 2018.05.14
촛불 위에 철뚜껑을 ...  (0) 2018.05.14
두 가지 읽는 방법  (0) 2018.05.14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0) 2018.05.14
[지방교회]항상 성경으로부터 안위를 얻음  (0)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