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9. 14:00
성경말씀 

(요일2:15)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5:4~5)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오늘의 만나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여 땅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을 빼앗기 위해 정욕과 쾌락과 추구가운데 사람의 타락된 본성을 통해 심지어 음식, 의복, 주택, 교통수단 등과 같은 생활필수품에서도 방종에 빠지게 함을 통해, 사람의 종교, 문화, 교육, 공업, 상업, 오락 등으로 사람들을 조직화하여 이 땅에 반(反) 하나님의 세상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사탄의 조직에 속한 그런 세상은 온통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한 자를 이기는 근거입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악한 자에게 우리를 패배시키고 점령하게 하는 근거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이끌어 삼일 하나님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믿음이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하나님에게서 태어나 신성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말미암아 사탄이 조직하고 빼앗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9:20

성경말씀

(막6: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보고하니,

오늘의 만나

스펄전(Spergeon)은 어느 날 전도를 마치고 한 친구와 함께 말을 타고 가다가 매우 기뻐하며 갑자기 말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도 말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갑작스런 행동을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희를 주셨으므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길옆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환희는 자주 없지만 즐거움이 있을 때마다 주님께 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즐거울 때 주를 기억하고 그 즐거움을 주님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너무 기뻐한다 하여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정감을 이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움도 주님께 보고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4. 17:40

합동측 정책실행위 통합측 최삼경 목사 이단 규정

♦ 삼신론과 월경잉태론 옹호에 대한 분명한 종식 필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총회장 이기창 목사)은 지난 12월 30일 총회 제2차 정책실행위원회를 열어 임원회에서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최삼경 목사의 이단규정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이단임을 결의해 한국교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합동측 임원회는 ‘최삼경 목사의 이단 규정 동의 요청의 건을 정책실행위에 안건으로 내놓아 이에 대해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며, 최근 새롭게 한국교회 내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보수교단총연합회의 가입과 총회장의 대표회장 수락에 대해서도 통과됐다.

이날 합동측 정책실행위에서는 문세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서기 등이 참여하는 ‘최삼경 이단처리위원회’의 연구보고서를 보고 했다. 동 위원회는 “최삼경은 개혁주의 신앙에 반하는 이단이고, 그를 옹호하는 잡지 ‘교회와신앙’를 비롯해 비호하는 모든 세력은 그 동조자”라고 발표했다. 최삼경 목사는 합동측 신학교인 총신대 출신으로서 합동측에 있다가 통합측으로 교단을 변경했으나, 이번 합동측의 결정에 대해서 미치는 파장을 커질 것으로 보여진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기총 길자연 대표회장은 “이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안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합동측 총회가 이를 결의해야 한다”면서, “더구나 이 같은 이단 사상을 갖고 있는 이를 통합측 교단이 지지하고 있으므로 이에 합동이 이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합동측 총회장 이기창 목사는 “이 자리에서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며, 삼신론과 마리아 월경잉태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합동측 총무 황규철 목사는 “삼신론과 월경잉태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논란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합동측 정책실행위에서는 이러한 사상은 볼 것도 없이 이단이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결국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한보총의 가입과 관련해서는 난세에 신학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WCC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신학적 전쟁, 삼신론·월경론을 옹호하고 인정하는 교단들과 같이 갈 수 없다는 등의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동 연합기관의 가입에 대해서도 안건을 통과 시켰다.

이날 합동측 총회장 이기창 목사는 “굳이 한보총 문제가 아니라도 개혁주의 교단들이 모여 언젠가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면서, “실행위원 여러분들은 보수신학에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라고, 한보총에 가입하기로 했으니 확실하게 잘 하도록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발췌 : http://www.kidokin.kr/bbs/board.php?bo_table=k01&wr_id=648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4. 17:25
* [지방 교회](local Church) 이스라엘 성지순례팀(한국35명, 미국9명)은 일반적인 성지순례자나 관광객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오는 60여 군데의 지명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자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하였다. 탐방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들은 출국하기 전에 2박 3일동안 방문지에 대하여 미리 철저하게 스타디하였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더 많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15박 16일동안(2012/10/13-28) 이스라엘을 성지순례하기 위하여 10월 13일(토) 대한항공 KE957 편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출국하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서 아무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방교회 이스라엘 성지순례(11) - 베들레헴

2012년 10월 17일(수)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집이 아니고 동굴이었다는데 놀랐다 동굴이 넓어서 짐승을 길렀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히브리어에서 '집'을 가리키는 '베이트'라는 단어와 '빵'을 가리키는 '레헴'이라는 단어가 합쳐서 빵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이다 동굴이 벌집처럼 많은 석회암 언덕의 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이러한 동굴이 400개 이상 있다고 한다 따라서 외양간은 건물 형태가 아니라 자연 동굴을 개조한 형태였다 그 이유로 예수님은 동굴에서 태어 나셨고 그 후 이 동굴 위에 예수탄생기념성당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은 건물 밑에 외양간이 있는 셈이다 이 기념성당은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에 의해 지어졌다 헬레나가 지은 성당이 세 개인데 1) 예루살렘의 예수님의 무덤 위에 2) 베들레헴의 예수님의 탄생지 위에 3) 올리브 산에 세워졌다.

BC 614년 페르시아 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하여 모든 성당을 파괴하였으나, 전승에 따르면 예수탄생기념성당만은 벽화에 그려진 동방 박사들의 옷이 페르시아 조상의 옷과 일치하여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민족 군사들이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문을 1.2m로 낮게 만들었다 그래서 겸손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만 한다
현대 베들레헴은 1967년 6일 전쟁 이후 웨스트뱅크(유대와 사마리아)에 속하여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아왔다 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후 1995년 12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이 되었다 주민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이슬람교가 80%이고 기독교(구교)가 20%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 예수탄생 기념 성당은 그리스정교회, 로마카톨릭교회, 아르메니아정교회가 각각 분담해서 관리하고 있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는 버스 안에 머물러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가로막는 분리장벽은 이스라엘의 점령정책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전체는 700km에 이르며 팔레스타인 지역을 완전히 둘러싸는 것이었다 분리장벽은 그린라인(1948년 휴전협정으로 만들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선)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땅 안 쪽에 세워지고 있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개인 소유 땅이 징발되고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것은 물론 인권침해와 경제적 침해가 심각하다.

☆ 목자의 들판교회 베들레헴 남동쪽 2km떨어진 곳에 베이트 사흘(동방박사의 집)에 위치한다 이곳은 보아스의 밭이 있었던 지역으로 모압여인 룻이 보아스를 만났던 곳이다 또한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던 곳이다(눅2;8-12) 베들레헴은 나오미의 고향이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땅으로 이주했다가 며느리 룻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룻1;19,22) 다윗의 고향이며 자란 곳이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은 곳이다(삼상16;1-13)
☆ 예언의 성취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미5;2, 마2;6)고 예언했고 그 예언은 성취되었다(마2;1)☆라헬의 무덤(창35;19) 라헬은 애통해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렘31;35)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일이 되면 라헬의 무덤을 찾아 슬피울며 기도한다 이 날은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 에 의해 불탄 날이며, 헤롯대왕의 성전이 로마군에게 파괴된 날이다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이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6:01

지방교회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풀러(Fuller) 신학 대학과 지방교회 들의 인도자들과 그 출판 기관인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LSM)는 최근에 지난 2 년 동안 해온 광범위한 대화를 마쳤습니다. 이 기간에 풀러 신학 대학은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에서 출판한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 니의 저서들을 특히 강조하는 지방 교회들의 주요 가르침들과 실행들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취한 이유는, 종종 이들 교회들에 관해 던져지는 여러 가지 많은 질문들과 비난들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고, 또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빛 안에서 이 두 사람이나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 측에서 이 대화에 참여한 분들은 총장이며 기독교 철학 교수인 Richard Mouw 박사와 신학부  학장이며 신학 및  윤리학 교수인 Howard Loewen 박사와 조직 신학 교수인 Veli-matti Karkkainen 박사입니다. 지방 교회들을 대표하여 참여한 분들은 Minoru Chen, Abraham Ho, Dan Towle 씨입니다. LSM을 대표하여 참여한 분들은 Ron Kangas, Benson Phillips, Chris Wilde, Andrew Yu 씨입니다.풀러 신학 대학이 내린 결론은, 지방교회 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풀러 신 학대학이 당면했던 첫 과제 중 하나는, 그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전형적으로 제시했던 지방 교회들의 사역의 모습이 지방교회 들의 사역의 가르침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가를 판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관하여 어떤 단체들 안에 생성된 인식과 그 두 사람의 저서들에서 발견된 사실상의 가르침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은 엄청나게 잘못 대표되었으며, 그 결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특히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로 분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오해되어 왔습니다.

성경과 교회사의 빛 안에서 공정하게 점검해 볼 때, 문제시 되었던 가르침들은 사실상 성경과 역사의 의미심장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종일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우리가 거친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우리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이 고수하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들 위에서 이들 교회들이 서 있는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신앙의 기본 교리들에 관한 동의가 분명하게 확립될 수 있다면, 비본질적인 가르침들에 관한 차후의 대화와 토론은 믿는 이들의 교통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출판물들을 읽어 보고 또 풀러 신학 대학 측과 그 교회들과 사역의 대표자들과 다섯 번에 걸쳐 직접 만나는 모임을 갖고 나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삼일성(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 성경, 구원, 교회의 하나와 합일, 그리스도의 몸 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과 간증에 관해서 우리는 그들이 논의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정통(正統)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비록 그들의 신앙 고백이 신조의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신앙 고백은 주요 신조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교회 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기를 기탄없이 권하는 바입니다.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진지하고 열려 있고 투명하고 제약이 없는 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풀러 신학 대학 측에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접근했던 몇 가지 주제들은 삼일성(삼위일체), 신성과 인성의 연합, 신화(神化), 양태론(樣態論), ‘지방’ 교회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실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들의 모임 밖에 있는 외부 믿는 이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야들 하나하나에 대해 탐색할 자유를 제한 없이 부여받았습니다. 매 경우에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가진 공공연한 인식이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믿는이들의 믿음과 실행뿐만 아니라 출판된 사실상의 가르침들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우리가 연관되었던 과정과 우리가 내린 전반적인 결론에 대한 전체적인 개관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제공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성명서에 이어서 몇 개월 후에는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주제들과 기타 중요한 주제들을 더 상세하게 다루는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대표자들은 그들에 관한 관심사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들을 요약된 형태로 진술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 측은 이미 상당한 연구와 대화를 거친 다음 그들을 이해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그들의 가르침들에 대한 논평을 제공할 것입니다.

  풀러신학대학교 총장 리처드 모우(Richard Mouw)
풀러신학대학교 신학부 학장 하워드 로웬(Howard Loewen)

지방 교회들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 목회자신문 552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 클릭) 

지방교회_풀러_552호_070901_pdf.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30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몇몇 항목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우리의 공통 신앙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논쟁 없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판한 사역의 글 중 일부를 읽은 어떤 분들은 우리의 이해가 정도 (正道) 를 벗어났다고 느끼고, 더 나아가 어떤 분은 심지어 우리를 이단시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상당 부분이 분명 우리의 책자들을 제한적으로만 접한 것에 기인한다고 믿으며, 때로 우리의 글이 전체 문맥이 무시된 채 발췌되어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오늘날 일부 ‘이단 감별사들’의 가슴 아픈 행태이며, 그들의 이러한 권한 남용의 유일한 피해자는 우리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취한 입장 때문에 오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몇몇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에 대한 참된 논의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나 사상가들이나 믿는 이들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진심으로 믿는 것처럼 우리는 이들 항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진심으로 믿으며, 일부 진리 항목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해나 상대방의 이해 모두에 대해 존경과 관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논의가 필요한 이러한 진리 항목들을 우리의 기본 신앙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즉 그러한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교통 안으로 받거나 거절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풀러 신학 대학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 우리 스스로가 해 온 것처럼, 모두가 이런 문제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연결하시는 그 영의 하나를 손상시킴 없이 믿는 이들이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또는 동의할 수 있는) 항목들로 다루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이 그러한 항목에 대해 우리와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곧 우리가 이 진리 항목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믿는 것처럼 그들도 믿는 것이 우리의 간절하고도 커다란 소망이지만, 이것들은 논쟁의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부분 전체를, 모든 신성한 진리와 실재 안으로 우리 모두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와 실재의 영께 일임하고자 합니다 (요 16:13).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독특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일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우리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진리의 몇몇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워치만 니 (Watchman Nee) 와 위트니스 리 (Witness Lee) 의 저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기독교계에 매우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저서 중 일부는 교계 전반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성경 교사인 위트니스 리는 지방 교회들 외부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간혹 그를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게서 많은 영적 도움과 영적 양식이 되는 가르침과 경건한 본을 보아온 우리는 이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의 책자들을 조금이나마 인용하여 제시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오해를 떨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간략한 소개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1905년 중국 북부 지방에서 태어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19세 때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혀 즉시 그의 남은 일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그의 사역 초기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니를 만났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인도 아래 그와 동역했습니다. 1934년에 워치만 니는 그의 출판 일을 수행하던 상해복음서원의 책임을 위트니스 리에게 맡겼습니다. 1949년에 워치만 니와 그의 동역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이 (중국 본토 공산화로 인해—역자 주)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에게 대만복음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 그의 출판 일을 계속하도록 했는데, 현재 대만복음서원은 영어권의 LSM과 함께 중국 밖에서 워치만 니의 저서를 출판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만에서의 위트니스 리의 일에는 주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피난한 350여 명의 성도들이 전부였던 대만 교회들은 5 년 사이에 2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62년에 위트니스 리는 미국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를 느끼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에서 35년간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지속적으로 주중 집회와 주말 특별 집회에서 말씀을 공급하여 수천 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대부분은 800 권 이상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중 많은 책이 14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91세인 1997년 2월에 그의 마지막 공식 특별 집회를 가졌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의 실제적인 하나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관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돌봄 아래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기능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표는 편협한 분파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삼일성 (또는 삼위 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계시는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 (인격) 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a living soul)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그 영 (the Spirit)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여기에서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그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성경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하고,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으므로 이제 영이시라고 불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임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해석들이 그 모든 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의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monarchia) 곧 유일성(unity)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영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그 영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2 나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삼일성에 관한 진리>(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1] 10-11쪽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되는데, 그 구절은 아버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한다. 또한 아들도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해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도 그분을 두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욱이 그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한다. 따라서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하시다… 요약하면,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7-38, 42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 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성경이 어떻게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 (相互內在) 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절, 23절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이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은 아버지의 운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삼일성 안에는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 상호 왕래 (inter­communion) 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 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는 아들께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 (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우리는 삼일성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 확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신성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알기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 바랍니다.

 
[1]  본 고에서 인용된 LSM자료들의 대부분은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역자 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4:35
* [지방 교회](local Church) 이스라엘 탐방팀(한국35명, 미국9명)은 일반적인 성지순례자나 관광객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오는 60여 군데의 지명을 선택하여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고고학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자 오랫동안 자료를 준비하였다. 탐방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우리들은 출국하기 전에 2박 3일동안 방문지에 대하여 미리 철저하게 스타디하였다.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보다 성경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을 더 많이 방문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15박 16일동안(2012/10/13-28) 이스라엘을 탐방하기 위하여 10월 13일(토) 대한항공 KE957 편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출국하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동안 그곳에서 아무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지방교회] 이스라엘 성지순례 (3) 에발산과 그리심산 
2012년 10월 15일 

(신 11:29-3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신 27:12-13)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수 8: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삿 9:6-7)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신명기 L/S 메시지 9> 
신명기 11장 8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충고와 경고의 말을 기꺼이 지키면, 축복을 받을 것임을 본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킨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말을 기꺼이 지킨다면, 그들은 약속된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돌보시며 세초부터 세말까지 하나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에게 축복이 있느냐 저주가 있느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하느냐 취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한다면 우리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29절에서 모세는 계속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한다. 우리가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는 우리가 주님께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축복을 받고 그리심 산 위에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고 에발 산 위에 있을 것이다.  
29절에서 모세는 계속하여,『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여섯 지파 -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는 그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그리심 산에 설 것을 명했다(11-12절). 모세는 또한 다른 여섯 지파-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도록 명했다(13절). 그들이 어느 무리에 들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지파들은 선택 없이 하나님의 정하심을 받아들여야 했다. 레위인들은 백성들에게 큰 소리로 말함으로 응답했고, 15절부터 26절에 기록된 저주들을 발했다. 저주받은 자들로는 다음 사람들이 포함된다. 우상을 만드는 자(15절),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16절),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17절),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18절),……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26절) 등이다. 
 
Ⅰ. 에발산과 그리심산

에발산과 그리심산

A.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가나안 땅 중심부에 위치한 산이다. 에브라임 지역에 속한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은 세겜(수가, 나블루스)을 가운데 두고 에발산(해발 920m)은 북쪽에 위치해 있고, 그리심산(해발 854m)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B. 세겜에서 바라본 그리심 산은 햇빛이 잘 비치는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밝고 물이 풍성하고 숲이 울창하고 풍성한 산으로 축복의 상징이 되었지만, 북쪽에 위치한 에발산은 민둥산이면서 그늘진 산이기에 저주의 상징이 되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축복의 상징이었던 그리심은 그 의미대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C.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세겜을 감시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에발산과 인접해 있는 그리심 산과의 사이에 있는 공간은 음향의 반향 작용이 매우 뛰어난 천연 계단식 극장이 있다. 


 Ⅱ. 에발산 

사마리아 박물관 랍비

A. 에발산의 에발은 ‘민둥 산’을 의미한다. 
B. 에발산의 낮은 경사지에서는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같은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 가능하나, 더 높은 곳은 바위투성이의 불모지라서 경작이 불가능하다. 사마리아의 다른 산들처럼, 에발산 역시 표면은 백악질(석회질) 토양으로 덮여 있고, 그 아래는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C. 에발산은 현재 에벨 에슬라미예(Jebel Eslamiyeh)로 불린다. 

 Ⅲ. 그리심산 
A. 그리심산의 그리심은‘제거하다'‘자르다’‘베어버리다’라는 의미를 담은 ‘가라즈’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그리심산은 해발 919m의 석회암으로 구성된 무미건조한 산이다. 그리심산이 위치한 세겜 지역은 고대부터 남북과 동서를 잇는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리시심산 위의 성전터

B. 예로부터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에 제2성전을 재건할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재건을 도우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사마리아인들은 그들만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짓는다. 그러나 B.C. 107년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에 의해 세겜 지역이 파괴당할 때 성전 역시 허물어졌다. C. 그리심산은 현재 에벨 엣투르(Jebel et-Tor)라고 불린다. 가나안 땅 중심부에 위취한 산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남북과 동서를 잇는주요 도로가 교차하고 있으며 교통의 중심지였다 세겜(수가, 나블루스)을 가운데 두고 에발산(해발920m)은 북쪽에 그리심산(해발854)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에발은 민둥산을 의미하고 그리심은 제거하다를 의미한다. 모세는 신명기 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섯 지파로 나누어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회당

예로부터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 제 2성전을 재건할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재건에 동참하려 했지만 거절 당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지었다 그러나 BC 107년 요한 히루카누스에 의해 세겜지역이 파괴당할 때 성전 역시 허물어졌다 그리심산은 현재 에벪엣투르라고 불린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35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 6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저기요. 제 친구 한명이 지방교회를 다닙니다. 한번은 그 친구와 함께 지방교회 나가는 분들과 식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한 사람만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하더라구요. 좀 생소했지만, 그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안 붙이는 것은 왜 그래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안 한다니요? 성경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나요? 
아 예, 기계적으로 하지 않고 융통성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안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만 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영의 인도를 따라서 융통성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 성경구절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전후문맥을 잘 보면 기도할 때 항상 그런 말을 끝에 붙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통교단에 속한 곳은 거의 다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지 않나요? 가능하면 이질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같은데요.
 맞습니다. 저희도 핵심진리에 반하거나 죄 짓는 실행만 아니라면 덕이 되는 쪽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성경 문맥의 의도와 다르게 실행할 경우, 적극 동조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더군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이는 것이 해당 성경 문맥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는 취지의 말씀은 요한복음14:13-14, 15:16, 16:23-24 에 있습니다. 이 본문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요, 우선 기도시 맨 끝에 그런 ‘후렴구’를 꼭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글에 검색을 해 보니 의견이 나뉘더군요. 어떤 분은 그렇게 안하면 기도에 효력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 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꼭 기도할 때마다 그 ‘후렴구’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융통성을 두는 쪽도 있었습니다.

-정통교회 나가는 분들 중에 꼭 안 붙여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예, 두 가지 예를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한 분은 고신대 대학원 교수로 계신 변종길 교수님입니다. 이 분이 <크리스챤 Q&A >라는 곳에서 답변하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칼빈의 기도에 보면 이런 문장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http://www.christianqna.org/bbs/board.php?bo_table=z3_3&wr_id=829
다음은 이광호 목사님 답변 중 일부인용 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그런 후렴구로 마무리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후렴구를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거나 도용하는 것이 되며,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http://www.siloam-church.org/lecture/sesin/sesin195.htm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도 끝에 그런 후렴구를 붙이는 것만 듣고 자라와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줄 알았지 솔직히 이 문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정통 교회 신학자가 심지어 칼빈 기도문에도 그런 후렴구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렇게 안 하면 이단 뭐 이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사실 성경에 쓰여진 기도문들에도 그런 후렴구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주기도문도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마6장). 그리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심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는 심지어 ‘아멘’도 없습니다(24-30절). 또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에베소서에서 두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장의 기도(17-19절)나 3장의 기도(14-21절)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없이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

- 그런데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라고 하는 목사님도 있더라구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라면 위에서 소개드린 성경본문들도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할 때, 누구를 생각하나요? 삼위의 1격만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레인 뵈트너라고요 개혁신학을 공부한 분들은 다 아는 정통 신학자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성부만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성자, 성령이 포함된 <삼일 하나님>(Triune God) 전체를 가리킨다 고 말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니까 이 분이 한 말의 영어원문을 직접 소개해 보겠습니다.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07쪽)
사실은 이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셋으로 구별되시지만 결코 분리된 분이 아니니까요. 한국교계 내에는 무의식중에 세 하나님들을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뭐 삼위일체도 나오고 좀 복잡하게 되돌아가는 것같아 좀 그렇긴한데…좀 정리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를 꼭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이 의미하는 내용이 기도에 담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뭐 이런 것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면 ‘내 이름 안에서’라는 문맥이 뭘 의미하나요?
 우선 요14:13절만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또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내 이름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한데, 이 말은 ‘주님의 인격(이름)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18:20의 ‘두세사람이 네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위 ‘이름 안에(안으로)’에 대한 회복역 성경 각주 취지는 집회에 올 때는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문제들과 일들에서” (나와서) “그분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상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해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생각은 다른 것에 빠져있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모임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위 요14:13만 봐도 나의 필요, 나의 선호와 갈망을 이것 저것 구한 후 끝에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째 “다 이뤄 지지도 않고”, 둘째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지도 않음”으로 위 본문에 따른 기도가 아닙니다. 대신에 주님의 뜻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의 인격과 연합되어 마치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직접 기도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도 되고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기도를 하려면 쉽지는 않겠네요. 예수님과 하나되는 상태라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맞춰 기도하라는 말씀이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저희의 기도생활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늘 배우고 있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네요. 나중에 위에서 소개해 주신 본문들을 좀 차분히 살펴볼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사실 후렴구를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진리 자체는 깊은 연합을 전제한 것이라 신약의 핵심진리에 해당될 수 있지요. 사실 요한복음 14-16장은 그런 연합사상을 담고 있어서 겉보기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도 사실 이런 교제가 쉽지 않은데, 무익한 변론으로 빠지지 않고 좋은 대화로 마무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