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1. 15. 00:00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2장 : 어떠한 이단인가

-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주는 영, 세 하나님


삼일 하나님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그들의 전통만을 주의할 뿐 분명하고 정확한 성경 말씀을 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왜곡하며 절대적으로 성경의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싸움을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백하게 이단적인 관념, 즉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주는 영, 심지어 세 하나님의 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부지중에 또는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붙잡고 있는 관념은 사실상 이단적인데, 이는 그것이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주는 영, 그리고 어떤 경우는 세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본적인 계시

성경의 기본적인 계시에 의하면, 하나님의 경륜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으로 넣어서 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와 오늘날의 상황 가운데서는 이것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경배의 대상이신 삼일 하나님과 죄인들을 지옥에서 천당으로 구원하는 구주를 가진 기독교라는 종교뿐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도, 합당한 교회 생활의 실행도 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오십 년 동안 주님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과 합당한 교회 생활에 대한 주님의 회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 기간에 걸쳐 우리는 주님이 주신 주님의 회복에 대한 부담을 가져왔고, 종교의 공격을 받아왔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하여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이상을 받았기 때문에 공격을 당해왔다.

주님을 그리스도가 만유를 포함한 놀라운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 계신 만유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아버지요, 아들이요, 그 영이며 또한 합당한 사람이시다.

그분은 모든 신성한 속성들과 인간적인 미덕들의 실제이시다.

이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방면의 중심점은 생명주는 영이다.

우리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주는 영이심을 우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구속주이시지만, 이러한 것들은 단지 이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두 방면일 뿐이다.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성경은 심지어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골 3:11)는 말로 그분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극적인 것들의 실제이시다.

그분은 빛이요, 생명이요, 의요, 거룩이요, 구속이요, 구원이시며, 또한 모든 것이다.

체험에서, 그분은 우리 영 안에 거하시는 생명주는 영이시다.

이것을 선포함으로 인해 우리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 영이시고 또한 아버지’라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단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아버지시요 그 영이심을 믿지 않는다.


리의 변호와 확증
워치만 니, 한국복음서원
지방교회 생활하기
지방교회 - 변호, 확증, 말씀, 계시, 삼일성, 교회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1. 8. 00:00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 비밀

요한복음 11절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는 절을 보고서 우리는 말씀과 하나님이 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절은 말씀과 하나님이 하나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말씀은 하나인가, 둘인가?

둘 다이다.

이것은 비밀이다.

고린도후서 317절은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와 영은 하나다.

왜냐하면 주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구절에서 주의 영을 말한다.

이것은 주와 영이 둘임을 가리킨다.

주와 영은 하나인가, 둘인가?

이것은 비밀이다.

히브리서 18절과 9절에서 어떻게 아들이 하나님이라 불리고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으로 언급되는지를 주의해 보라.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네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어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이여,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비밀이다.

마지막으로 계시록 14절과 5, 56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 영(4:4)일곱 영으로 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또 하나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순수한 말씀을 단순하게 취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우리 삼일 하나님께 관하여 말씀하시는 바를 알고 그것을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순수한 말씀에 따라 진리를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삼위일체에 관한 논쟁과 토론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삼위일체를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제한된 지력에 따라 하나의 교리적 문제로는 완전히 이해되실 수 없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삼일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 즉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많은 시간을 들여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지금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우리 영 안에 내주하심을 지적하는 이유이다.

만일 이것이 체험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을 그다지 관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가 체험한 바를 사람들에게 분명히 해야 했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영적 성장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부활한 주님과 성령을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우리는 바울이 신학을 쓴 것이 아니라 체험을 적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체험이다. 우리가 얻는 힘과 빛과 인도는 성령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동일하게 온다. 우리가 이것을 체험하고 있는 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은 용어나 교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삼일 하나님은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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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26. 00:30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에 관한 『전문가들의 증언 "서문"』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전문가들의 증언


제1장   머 리 말 

「전문가들의 증언」은 1985년 5월 캘리포니아 상급 법원에서 리(Lee)와 더디 등과의 재판에서 전문가들이 선서 증언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대표하고 있는 여섯 명의 전문가들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과 실행들을 조사하도록 요청받았다. 전문가들은 또한 영적 사이비 연구소(SCP)가 출판한 「갓멘」이라는 책에 있는, 지방 교회들을 반대하여 인쇄된 비난과 비평들을 조사하도록 요청받았다. 

마지막으로, 이들 중 다섯 명은 캘리포니아 상급 법원에서 선서하에 그들의 결론을 제출할 것을 요청받았다. 여섯번째 전문가인 가우스태드 박사는 재판에서 증언하지 않았지만, 그의 연구는 논문으로 요약되었고, 이 책에 재인쇄되었다. 이 책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관한 전문가들의 증언이다.

소송은 교리적인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갓멘」이라는 책이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관하여 거짓되고, 악의적이며, 손상을 주는 내용을 서술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명예 훼손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이비」 라는 관념을 갖게 한 「영적 사이비 연구소」에 의해 사용된 많은 공격들은 교회들의 믿음과 실행에 관련되어 있다. 그들의 비난은 신학, 심리학, 사회학 및 「실지」 사건들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리를 포함하여 이 책의 총체적인 왜곡 현상이 밝혀져야만 한다. 「영적 사이비 연구소」가 지방 교회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로 자처했기 때문에, 관련된 분야에 좀더 자격을 갖춘 몇몇 사람들의 증언은 필수적 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각 분야에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을 구했으며, 지방 교회들을 연구하고 「갓멘」에 있는 공격들을 평가하도록 요청하였다. 

지방 교회들과 지방 교회들의 비방자들에 관한, 참으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의 결론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관한 전문가들의 증언」에서 볼 수 있다.

왜 지방 교회 사람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의 마찰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첫번째 선택은 물론 법정이 아니다(고전 6장). 성경의 권고에 의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취해야 하는 시도는 그리스도인의 교통을 통한 것이다(마 18:15). 불행하게도, 1970년대 초반부터 「영적 사이비 연구소」의 태도는 결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 더불어 진리와 화해를 추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들의 태도는 그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소위 「영적인 사이비」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영적 사이비 연구소」는 교회들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적했음에도 무시했다.

1976 년에 「영적 사이비 연구소」에서 나온 원고는 결국 「갓멘」의 초판이 되었다. 결국 또 다른 책이 그 원고에서 나왔는데, 잭 스팍스(Jack Sparks)와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마인드벤더」로 발전시켰다. 잭 스팍스는  「영적 사이비 연구소」의 초기 인도자였는데, 그 당시 지방 교회의 분리파에서 온 다른 이전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영적 사이비 연구소」와 관계를 끊으려 하고 있었다. 스팍스는 「영적 사이비 연구소」의 원고 사본을 적의를 품은 분리파 일원에게 제공했고, 그 원고가 「마인드벤더」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책은 1977년에 출판되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출처가 다른 것 같지만, 실상은 한 원고를 복제한 것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본래 원고에 있는 인쇄 실수를 다시 반복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그들의 주장과 결론이 그토록 유사하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출판하기 전에 교회 사람들이 두 책에 대해 강한 항의를 제기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출판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두 책은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극도로 손상을 입혔다. 처음에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진리에서 동떨어진 책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책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대중에게는 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비난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공격들은 매체에  「사실」로서 거듭 활자화되었다. 일 년 안에 지방 교회는 세인들의 「사이비」 명단에 올랐다. 일단 지방 교회가 

사교라 명명되면, 그 반응은 자동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의심과 두려움과 경멸과 회피로 반응했으며, 이러한 반응들을 일소하는 것은 이성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잘못을 시정할 수 있는 공청회를 가질 길도 없었다. 

어떤 서점도 「사이비교」로 낙인 찍힌 집단의 항변을 게재해 주기를 원치 않았다. 지방 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직장에서 가혹한 어려움을 당하고 견뎌야 했다. 어떤이들은 직장을 잃기까지 했다. 더욱 심정적으로 쓰라린 것은 놀란 부모들과 친구들이 사랑하는 자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하는 등의 가족 관계에서의 문제였다. 지방 교회들이 밖으로 뻗어나감은 강력한 배척에 직면 했었다.

1978 년에 있었던 조지 타운의 집단 자살은 「사이비교」라는 말에 새로운 공포를 더해 주었다. 이 기회를 잡아서 「갓멘」과 「마인드벤더」를 발행한 자들은 그들의 책이 개정판으로 출간됨을 발표했다. 저자와 발행자들에 대한 지방 교회들의 호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은 이 소송을 고려했다. 지방 교회들이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길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현대의 「가이사에게 호소」(행 25:9-10)하는 것과 같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고려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 당시 유대 종교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행사한 것이었다. 소송의 목적은 대중에게 진실을 알려 끊임없는 핍박을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삼 년에 걸쳐 중대한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가 좌절당하고 막대한 타격을 받은 후, 1980년에 명예 훼손에 대한 소송이 자매 책인 「마인드벤더」와 「갓멘」에 대해 제기되었다.

이들 소송은 책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사실 여부를 조사하는 토론장이 되었다. 모든 문제에 대해 상세한 조사와 추적이 이루어졌다. 관련된 사람들의 선서 증언이 조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백 건이 넘는 선서 증언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문서가 만들어지고, 분석되었다. 모든 명예 훼손의 내용은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조사가 상세하게 이루어졌다. 저자들과 발행인들은 선서 아래 그들이 비난한 것에 대한 사실을 확증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가졌다. 즉, 그들은 지방 교회들을 위해 증언해 주는 전문가들을 탄핵할 모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후에 그들은 재판 중에 전문가들에게 반대심문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재판을 위해 준비하면서 조서에 대해 삼 년 넘게 조사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긴 조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책은 정당함을 입증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저자와 발행자들의 동기와 악의와 계획적인 왜곡이 드러났다.

여섯 명의 전문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조사할 권한을 가지고 교회와 중요한 출판물들을 조사했으며, 「갓멘」을 저술하는 데 관련된 사람들의 선서 증언을 상당분 읽었다. 여섯 명 중 일부는 저자들을 지지하도록 임명된 전문가들과 증인들의 증언에 출석했다. 어떤 전문가들은 적대적이고 비판적인 과거 지방 교회 교인들의 증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고찰했다. 여섯 사람은 적대적인 반대 심문에 대비하여 모든 쟁점들에 대처하고 그들의 결론을 제출할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여섯 명의 전문가들의 상세하고도 공정한 결론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의 진실한 믿음과 실행들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갓멘」을 압도적으로 정죄했다. 전문가들은 사이비교라는 비난이 저자들의 날조였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인용된 내용들이 위트니스 리가 의미한 것과 반대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기 위해 거듭거듭 제시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사례 연구」가 의심스러운 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확증되지 않은 보고 내용에 기초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책이 학문적인 분위기를 갖도록 도입된 사회과학의 함정을 발견했다. 그들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을 그들 나름의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취하여 「사이비」라는 비난에 걸맞도록 왜곡시켰던 것이다.

삼 년에 걸친 드러냄과 증언이 있은 후에, 「마인드벤더」의 발행자들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게 사과하였으며, 그 책을 출판물 중에서 회수했다. 그러한 철회가 그 전역의 주요 신문에 1983년 4월 10일자로 게재되었으며, 이 책 부록에도 실려 있다. 「마인드벤더」의 저자들은 또한 처리 협약에 서명했는데, 철회는 그 중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법적으로 「마인드벤더」의 발행과 배포를 종결시켰다.

1985 년 4월에 「갓멘」에 대한 건(件)의 재판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판이 시작되기 다섯 시간 전에 「영적 사이비 연구소」는 파산 법원 보호하의 재산 개편 신청을 냈다. 그들은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고, 조사 과정 중에 계속적으로 자금을 조성하였으면서도 재판에 나설 여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행동을 취함으로써 그들은 혹시 있게 될지도 모를 큰 손해 배상과 과거 삼 년 동안에 선서 증언에서 그들이 한 일의 동기와 방법을 폭로하는 반대 심문이 있는 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갓멘」의 주요 저자인 닐 더디(Neil Duddy)는 자신을 「영적 사이비 연구소」와 분리시키고 덴마크로 이주했다. 그는 재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독일판의 스위스인 발행자 「수엔겔러 벌라그」 또한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재판은 원고만의 참석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라니온 판사는 사실적인 문제와 전문가들의 의견에 관하여 증인들에게 질문하는 데 있어서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 피고가 출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관련된 사실들과 전문가들의 결론은 법정에 제시되었다.

재판에서 나온 삼십 이 페이지의 판결문은 「갓멘」의 총체적인 허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판사에 의해 상세하게 언급된 사실들은 전문가들뿐 아니라 피고들의 선서 증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 사실들은 그 자체로서 자명하다. 법원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사건은 정식으로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상대가 없는 재판으로 진행되었다 …. 상대가 없는 재판이었지만, 법정은 원고들이 역량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했음을 느꼈고, 또한 법정은 증언자들의 신분과 자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더 나아가서, 법정은 피고인들이 출두하는 것과 관계 없이, 수정 헌법 1조 상의 권리(표현의 자유에 해당) 문제를 다루는 사건에서 요구되는 대로 진실을 확증하기 위해 증인들을 심문하고 반대 심문할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법정이 보기를 원하고 묻기를 원했던 것은 빠짐없이 제공되었다. 더 나아가서, 원고들을 위한 증거는 자격 있는 전문 증인들에 의한 독립된 증거로서 확증되었다. 

따라서, 법정은 미국에서 유포된 「갓멘(THE GOD-MEN)」(증거물 1호)이라는 닐 티 더디의 저술과 수엔겔러 벌라그가 출판하여 유럽에서 유포한 책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에 대한 탐구」(증거물 3호), 그리고 닐 더디와 「영적 사이비 연구소」가 인터바시티 출판사(Inter-Versity Press)를 통해 미국과 영국에서 유포한 책「갓멘(THE GOD-MEN)」(증거물 5호)의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관한 탐구는 모든 주요 방면에서 거짓되고, 비방적이며, 특권 침해이므로, 명예 훼손임을 판결한다.』 (캘리포니아 민법 제45조).

판결문의 전문은 이 책 발행인이 보유하고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일억 천 구백만 달러라는 손해 배상액은 손상 행위에 대한 재판장의 의견 및 책을 쓰는 데에 연관된 악의에 대한 그의 반응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재판에서 판정한 배상액은 결코 원고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영적 사이비 연구소」는 법원의 감독하에 재편되었으며,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법원 결정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보상은 이 책에 기록된 증언에 있다. 

비록 「갓멘(The God-Men)」과 「마인드벤더(The Mind ben ders)」는 출판계에서 회수되었지만, 그들이 지어낸 악한 소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매번 새로운 사이비교 소동과 함께 캐캐묵은 정보가 되풀이됐다. 이 책의 증언은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그들의 비난에 대한 해독제이다.

여섯 명의 전문가들은 증언하고서 십 년이 지난 후에,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관한 이 책에 있는 그들의 결론이 확고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이 책이 발행되기 전에 그들의 증언을 재검토했고, 최신의 논평을 할 기회를 가졌다. 멜튼 박사(Dr. Melton)는 1993년에 발행된 그의 저서 「미국의 사이비들에 대한 백과 사전 편람(Encyclopedic Handbook of cults in America)」을 이용하여 두 책으로 인해 지방 교회가 잘못 분류된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로 삼으려고 애썼다. 

불행하게도, 몇몇 사람들은 그 책에 있는 지방 교회들에 관한 단순한 언급은 그가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은 지방 교회를 사교로 간주한다고 추정했다. 멜튼 박사는 그같은 추정을 하는, 일본에 거주하는 한 사람에게 보낸 1995년 7월 3일자의 최근 편지에서 그의 현재 입장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의 짧은 기간 동안에 지방 교회와 개인적으로 반목하는 몇몇 사람들이 지방 교회를 사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거의 십 년 간 여기서는 그러한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강하게 강조하는데, 내 책에 있는 그들에 대한 결론(서문에서 분명하게 진술했듯이)은 이 책에서 논의된 다른 단체들과 그들의 유사성을 다만 논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미에서는 거의 십 년 동안 지방 교회가 「사교」임을 암시하는 어떤 문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을 수년 동안 조사하고 나서, 나는 지방 교회가 주로 교회론, 경건, 종말론의 문제에서 기타의 교회들과 다른 정통 그리스도인 교회라고 결론지었다. 즉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든 기독교 종파들이 일치되지 않으며 또한 불일치가 허용된다.』

마침내 대중은 진정으로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의 증언을 숙고할 수 있으며, 위트니스 리와 지방 교회들에 관한 합당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여기서 그 결말은 한 사람이나 한 단체를 단순히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 교회 사람들은 진리를 검토하는 것을 기뻐한다. 얼마의 독자들이 이 땅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에 관해 새로운 빛과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믿음의 세부적인 사항에 동의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지방 교회의 참된 신앙이 마침내 보다 분명해졌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여전히 만족하고 있다. 이 책을 여론의 거대한 법정에 맡긴다. 여러분이 읽을 때 진리 안에서만 발견되는 빛과 자유와 기쁨이 있기 바란다.

댄 토울(Dan Towle) 
캘리포니아 아나하임(Anaheim, California)
1995 년 10월 26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23. 00:00

무엇이 한국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일까?-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위격문제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성경 기록에는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1:14 에서 보듯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왜소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의 처녀탄생(마1:18-21) 역시 과학이나 인간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일 누구든지 어떤 연유에서건 이러한 성경적인 사실을 부인하면 그는 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나 믿음으로 받아야 할 진리 중에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 하심(신비한 연합)>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거듭남)과 연속(생명의 성숙)에 관련되고, 특히 구원론과 관련된 <핵심 진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진리를 성경본문과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을 우리는 비 성경적임 또는 이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개혁 신학계에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는 두 신학자가 이 주제에 대해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과연 한국 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즉 현 성경신학 대학원 원장인 차영배 박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만 사람 안에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권성수 박사는 요14:23 을 인용하며 <사람 안에는 성령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도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안에 성령님만 계시는지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계시는지에 대해서 두 신학자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두 분 다 현재 장로교단 소속 유력한 신학교에서 장차 목회자가 될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비중 있는 신학자들이다. 

따라서 한국 개혁신학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들은 이 두 분 중 과연 누구의 주장이 자신들의 신학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입장 정리가 시급히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권성수 박사의 주장 -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님은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학 및 성경 해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총신대 목회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그의 저서 중 도서출판 횃불이 발간한 <로마서 강해(로마서 1-8장)> (1996년)

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그리고 10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것을 하나님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4: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를 말하는 것이고 성부와 성자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쓰는 문맥은 14: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희는 너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하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405쪽). "10-11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부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자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거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신비적인 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406쪽)
(인용 끝).
 

위 내용에서 권성수 교수는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 또는 '내가 아버지께' 등 삼위의 1격과 2격을 지칭하는 요14:23, 요14:16 본문을 인용함으로, 1격인 성부와 2격인 성자가 3격인 성령과 함께 사람 안에 거하심을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는 위 인용문 바로 직전에서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거하심은 <그냥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고 아주 사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필요할 때만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인 거듭난 성도들 안에 현재 살고 계신다.

2. 차영배 박사 주장 - <성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차영배 박사님은 고려신학교, 화란 Kampen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총신대학 학장을 거쳐 현재 성경신학 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월간 교회와 신앙(발행인: 최삼경) 2001년 10월 호에 실린 창간 8주년 기념 삼위일체특집에 기고한 차영배 박사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 되신 분이다" 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주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內住하시는 분은 주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주 예수는 우리 안에서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받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122쪽). "

2-7. 성부와 성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심:... 영(靈)은 우리 안에 내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모두 같은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은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임재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17~22)."(124쪽). "

<<성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124쪽)(인용끝).  

위 내용에서 차영배 박사는 출애굽기 19장을 근거로 성부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사람은 죽어버린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성부는 사람 안에 구조적으로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자도 우리 안에 오실 필요도 없고, 올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의 피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출애굽기 19장의 바로 그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말씀(11절), 고린도 후서 5:19의 '하나님(성부)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God was in Christ)라는 말씀, 골1:27의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 갈2:20의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들과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위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위의 1격과 2격을 3격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면이 있고, 사람의 생명되신 아들 하나님(요일5:12)을 <사람 밖에 묶어두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이제 국내의 두 분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 간의 이러한 두 가지 대조적인 주장들에 대해 한국개혁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 개혁신학계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처럼 성부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가 아니면 권성수 박사의 주장처럼 요14:23등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그분의 성전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믿는가?   

2. 만일 권성수 교수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삼위 중 1, 2격을 3격과 분리시키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신론 이단 사상이 아닌가?  

3.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1)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내주를 말씀하고 있는 골1:27, 롬8:10, 고후13:5, 갈2:20, 4:19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대로 성령이 내주한 것이 그리스도가 내주한 것이라면 성경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즉 제 3격인 성령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통상적인 이해처럼 제 2격 아들 하나님 만이 그리스도인가? 

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요일5:12에 근거하여 사람 안에 아들은 없고 성령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명 없는 자들>로 판단해도 좋은가? 아니면 성령이 곧 아들 하나님이라고 할 것인가? 

3)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고후 13:5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안 계시고 성령만 계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버리운 자들>(아도키모스, 96b- 시험에 합격치 못한, 거절된(사람들))로 간주해도 좋은가? 

4) 만일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사람 밖의 저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임으로 이를 근거로 성령뿐 아니라 성부 성자가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사람 밖의 성부, 성자>와 <사람 안의 성부 성자>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우리는 두 종류의 성부, 성자를 믿는가? 

5) 차영배 박사의 아버지의 영은 아들의 영과 성령과는 다른 영이라는 주장은 삼위가 각기 다른 세 영들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신약과 개혁신학계의 정설인가 아니면 이설인가? 

6) 삼위중 1격과 2격을 사람 밖에 두고 3격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다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요14:11의 삼위간의 상호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는 요1:12에서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며, 영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영접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한국 개혁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책임 있는 답변은 한국 교계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을 한 차원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아울러 한국 장로교단의 공식 삼위일체관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 3자들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믿는다.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19. 10:26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D. 셋 모두 영원하심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소문과 비난이 있다.

나는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런 사상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해, 성경에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고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고 선포하기 원한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1. 아버지가 영원하시다

이사야서 96절에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히브리어 축어역에서 이 문구는 영원의 아버지또는 영원한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2. 아들이 영원하시다

아들 또한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112절은 아들에 대하여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73절은 그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분이 영원함을 의미한다.

영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상징은 직선이 아닌 원()이다.

그분은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3. 성령이 영원하시다

성령 또한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함을 선포한다.

E. 셋 모두 동시에 존재하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16절과 17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한 것을 주목하라.

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아들과 성령을 보내시는 아버지를 본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동시에 나타나 있다.

에베소서 314절부터 17절에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는 아버지와 성령과 아들 그리스도가 있다.

이 모두가 동시에 존재한다.

성경은 아버지가 어떤 특정 기간 동안 존재하신 다음에 아들이 왔고 또 그 아들이 특정한 기간 후에는 존재하시지 않고 성령으로 대치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

이 구절에서 성경은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은 성도들을 강건케하며, 아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실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도 분명하게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신다.

고린도후서 1313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들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교제가 언급되었다.

셋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고린도전서 124절세서 6절은 성령의 은사와 주님의 직임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주님과 하나님을 본다.

다시금 성령과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역사하심을 본다.

성령은 은사를 주시며, 주님은 섬기시며, 하나님 아버지는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아버지께서 더 이상 존재하시지 않는다거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하여 왔다거나, 또 얼마 후에 성령이 아들을 대신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셋 모두가 영원하며 동시에 존재하심을 믿는다.

진리의 변호와 확증
워치만 니,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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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 삼일 하나님, 삼위일체, 아버지, 아들, 성령, 교회


posted by 스마일은혜 2018. 10. 15. 05:00


(지방교회) 진리의 변호와 확증


제1장 :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따른 삼일 하나님에 대한 계시


. 하나님은 삼일(三一)이시다

 

이 유일한 하나님은 삼일이시다.

여러 해 동안 시도해 보았지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른다.

지난 오십 년 동안 나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분석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결국 나는 그것을 풀 길이 없음을 알았고, 오래 전에 포기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작은 사람아, 너는 너무 작다. 너는 결코 삼위일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A. ‘우리

이사야서 68절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가 우리인가?

우리는 그분이 둘 다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분이 우리둘 다이심을 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창세기 12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하시고 또한 우리의형상이라고 말씀하신다.

같은 원리가 창세기 322절과 117절에서도 사용된다.

신약에서도 동일한 사상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423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나는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우리의)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는 우리우리의가 있다.

우리우리의는 틀림없는 복수이다.

아버지는 두 하나님인가, 한 하나님인가?

물론 그들은 하나이다.

그러면 주님은 왜 우리라고 말씀하시는가?

만일 당신이 그것은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한 하나님이 둘이 되실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요한복음 1711절에서 주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여기서 주님이 다시금 그분 자신과 아버지를 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라.

그들이 하나라면 왜 복수 대명사인가?

나는 모른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나 이해로는 미치지 못할 비밀이다.

진리의 변호와 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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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10. 05:00



하나님 경륜 적용하기- 씨뿌리는 자와 씨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어떤 책은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나와는 직접 관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당장 내가 맞 부닥뜨린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읽는 것도 있습니다.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읽되 남의 이야기처럼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시작 한 이후로는 그 말씀들이 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3장을 읽었습니다. 소위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것이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세 가지인데 씨뿌리는 자, 씨, 그리고 밭으로 예표된 우리의 마음입니다. 

1. 씨 뿌리는 자  

마13:3은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대목은 비유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참 내용은 무엇입니까?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씨뿌리는 자'로 비유된 누군가가 뭔가 모르지만 '씨'로 지칭된 뭔가를 뿌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의 '씨뿌리는 자'는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말씀은 말씀으로 푸는 것이 제일 정확한데, 37절에 의하면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주 예수님-라고 정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주님자신이 씨뿌리는 자는 '인자'(the Son of Man)라고 밝히셨으니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저는 여기서 더 전진된 묵상이 있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 지상 사역시의 과거 사실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승천 하신 이후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직접 복음의 씨를 뿌리고 다니신다는 뉴스는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사례를 끄집어 내자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고 하심으로 사울을 바울되도록 회심시킨 이야기 정도가 생각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지금은 씨를 뿌리지 않으시는가? 

여기까지 묵상할 때 그렇지 않다고 느낍니다. 주님은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사람들 안에서 씨를 뿌리고 계신다는 빛이 왔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누림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씨뿌리는 자'가 아니며 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거나 철학과 윤리를 설파하는 사람들도 복음 전도자로 간주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오직 거듭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자신'만이 씨뿌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둘째는 복음을 증거하는 자는 자신의 복음 전파 경험이나 말 재주를 너무 신뢰하지 말고 자신 안의 '씨뿌리는 자'로 하여금 씨를 뿌리시도록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앙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은 아니로되 주님과 하나된 자였고 자기가 아닌 주님을 사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심었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씨뿌리는 자'와 하나로 연합됨으로 '나는 심었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고전3:6). 

마가는 그의 복음서 4장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싹 (the blade)그 다음엔 이삭(the ear) 그 다음엔 충실한 곡식(the full corn) 그 다음엔 추수가 있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점점 자라시고 형태를 이뤄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날 어느 특별한 장소로 옮겨가는 문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성경을 수 차례 심지어 수십 차례 읽었다면서도 이처럼 분명한 핵심을 놓치는 것일까요. 수건이 그 마음에 있는 채 성경을 읽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의 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천사들이 '영원한 복음'(계14:6)을 전하기 전까지는 씨는 씨뿌리는 자와 연합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뿌려질 것입니다. 즉 특별한 선교사나 전도사님들 목사님들 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성도들에 의해 뿌려질 것입니다(벧전2:9). 

이 일이 현재 택사스 주의 한 도시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이런 일이 미국 온 땅 심지어 전 세계에 까지 파급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2. 씨  

씨뿌리는 자가 뿌리는 씨는 배추 씨나 오이 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물질 축복의 씨나 건강 축복의 씨도 아닙니다. 이 씨는 성경 본문에 의하면 '천국의 말씀'(the word of kingdom) 입니다(19절). 38절은 이 씨가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8:12는 '천국의 아들들'(the children of kingdom)이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씨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거나 지옥에 안 간다는 씨와도 많이 다릅니다. 또한 천국의 씨는 마음 밭에서 자라는 것을 함께 말해야 하고,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의 정체들이 함께 말해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죽기만 하면 천국은 100 퍼센트 간다고 말하는 씨는 여기서 말하는 천국의 말씀인 씨와는 완전히 다른 씨-다른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마7:21은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엄중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에 이 말씀의 조건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교계에도 씨뿌리는 자와 어느 정도 연합된 사람들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입에서 선포되는 씨가 '그 씨'인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씨가 다르면 다른 싹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뿌리는 그 씨가 마태복음 13:3에서 인자가 뿌리시던 그 씨와 같은 종류의 씨인지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의 아니게 원수에게 쓰임받아 가라지를 뿌리는 짓을 할 수 있습니다(25절). 여기서 원수 사탄도 자기가 직접 뿌린 경우 보다는 그의 일군들을 동원하여 그리한 것입니다(고후11:15). 

3. 떨어지는 곳(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씨가 진짜인지 유사품인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곳에 떨어지는 가도 열매 맺음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줍니다. 
이 천국의 말씀
 이 떨어지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사람의 존재 안이고 더 정확히는 마음(heart)입니다(19절). 

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떨기이고 또 어떤 이의 마음은 좋은 땅인지는 성경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마13:19-23). 

오늘 날 마음을 처리하는 문제와 생명의 성숙을 복음과 함께 전파하는 단체가 어디있습니까? 길가, 돌밭, 가시떨기 마음을 처리하지 않고 주님 앞에 갈 때에 작은 상은 커녕 벌을 받고 심지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 쫒겨 슬피울며 이를 갈 가능성도 함께 말해주는 단체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속량하여 죄를 사하시고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생명의 성숙을 통한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음까지를 포함한다(갈4:4-5, 엡1:5, 롬8:29)는 하나님의 경륜에 눈 멀때 결코 완전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완전한 복음은 불 완전한 구원을 가져올 뿐입니다. 

장로교파 분들이 전하는 복음, 소위 구원파가 전하는 복음도 나름대로 복음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3장 2-11까지에서 전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부족이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말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복음은 상당 부분이 그냥 지나치거나 그냥 문자로만 언급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이 복음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취었던 진짜 완전한 복음입니다. 로마서 전체는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는 책이나 그 책 내용이 구속의 죄사함이나 거듭남만이 아니라 개인의 영화롭게 됨(롬8:23)과 그리스도의 몸 안의 생활(롬12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천국복음(this 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 온 세상에게 전파되어야 끝이 올 것입니다(마24:14). 

(그럼에도 한국 신학계의 교통정리자를 자임하는 어떤 단체는 바로 위 24:14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됨으로 이방인들에게 적용하면 큰일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 분들에겐 성경 66권이 다 그들의 성경이 아닙니다.참으로 지금은 바른 진리 분별이 절실히 필요한 혼잡의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7. 05:00

하나님의 경륜 적용하기 - 율법과 그리스도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하나님의 경륜 적용하기 - 율법과 그리스도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우리가 알듯이 바울이 딤전1:4에서 말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자신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에 분배하심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단체적인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본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그의 온 힘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골1:28).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보지 못했던 시절의 그는 가는 곳마다 옳은 것으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인생을 살았었습니다(딤전1:13, 빌3:6).
 
 

생명되신 그리스도 자신을 살고 공급함으로 사람의 참된 필요를 채우는 길을 걷는 사람과 성경이 하라 하지 말라고 한 율법적인 요구에 묶여 결국 사람들의 참된 필요를 외면하고 오히려 정죄하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열매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사울의 대비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2장을 읽었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사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안식일 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도 잘못이 없다며 그들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셨습니다. 물론 '그들의 참된 필요인 배고픔'도 돌아보는 마음이 있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이에 더하여 비록 안식일이긴 하지만 손이 오그라들어서 불편한 사람의 참된 필요도 관심하셨고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제단에 차려 놓았던 진설병을 먹었으나 죄가 되지 않았던 사실(삼상21:6),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은 점(민28:9-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안식일 제물을 드리기 위해 일해야 했음),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점(호6:6) 등의 진리적 당위성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는 사실만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을 두둔할 뿐아니라 한 수 더떠서 자신이 직접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을 깨뜨리신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안식일을 범한(그들의 눈에) 주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counsel)를 열었습니다 (마12:14). 

이러한 사건은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에스겔 20:12, 신명기 5:15 등의 구절들을 예수님을 정죄할 근거말씀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 자신은 성경을 잘 지키는 정통이지만, 성경내용의 바로 그 주인공이신 주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이단이요 비성경적인 분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단편적인 성경지식은 있으되 그러한 안식일의 주인(마12:8)이신 주 예수님 자신을 보는 영적인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을 보는 눈이 먼 것이 소위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한 부분만을 붙잡고 '배고파 밀 이삭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때 그들은 배고파 밀 이삭 잘라 먹는 사람들을 위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주고자 하시는 그들의 주인 그들의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시고 품으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짓밟고 정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주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데서 더 전진하여 주님 자신까지도 극렬하게 반대하며 저지하고 심지어 죽이려 듭니다(마12:14).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데 이러한 그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밖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공격받고 그영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없이 다만 사랑하시고(요3:16) 그들에게 주님자신인 생명을 주시고 또 주심으로(요10:10) 그들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인 주님자신으로 충만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가시고(엡1:23) 마침내 거룩하고 흠없는 신부로 단장해 가시는(고후11:2, 계19:7, 21:2, 9-10) 현재의 주 예수님의 일 하심에 다만 아멘하고 동역하기를 갈망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6. 05:00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분별함 - (2)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의 양면성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롬8:34는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롬8:10은 동시에 또 다른 방면에서 주 예수님이 거듭 난 사람 안에 (생명으로) 계심을 증거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 안에 살고계십니다(골1:18, 엡1:23). 그러나 로마서 8:10은 위 양 방면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되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지만)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거듭난 우리의 영>은 살았고, 심지어 생명(조에) (spirit is life) 이라고까지 롬8:10 후반부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는 사실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한 고전6:17에서 더 선명하게 확증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 불신자였을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습니다(엡 2 :1).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생명으로 영접할 때 그분은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 영이신 주님이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심지어 우리 영과 연합하여 한 영(one spirit)이 되셨다고 고전6:17은 말합니다. 이제 이분은 여기서 더 전진하여 우리의 영 뿐 아니라 마음(heart)에도 거처를 얻기 원하시며(엡3:17), 우리의 죽을 몸, 사망의 몸에게도 생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롬7:24, 8:11). 이것이 구속의 피로 인한 죄사함 이후에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생명에 의한 유기적인 구원의 과정입니다(롬5:10, 빌2:12). 이러한 지속적인 생명의 역사 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되고 마침내 영광 안으로 이끌려 질 것입니다(히2:10). 이것이 로마서 8장 전체에 흐르는 사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쟁점이 되는 것은 롬8:10이 말하는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 할 때의 영이 과연 사람의 영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원래 신약원문 상의 영을 가리키는 '(푸)뉴마'는 대 소문자 구별이 없음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는 전후 문맥을 따라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캘빈을 포함한 소수의 신학자들은 이 영을 성령으로 보지만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롬8:10이 언급하는 이 영을 사람의 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장로교단 내에서 존경받는 주경 신학자인 이상근 박사의 아래 자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약 주해 로마서, 이상근, 성등사

'여기 영(롬8:10)을 성령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나(Calvin, Dickinson), 신자의 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Meyer, Bengel, S&H, Vincent 등). 전구(몸)와 댓귀적 성격으로 보아 후설이 타당하다(고전2:11). 영이란 인격의 본질이며 영성의 최고의 부분으로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좌소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이다'(이상근, 신약 주해 로마서, 성등사, 205쪽). 

이외에도 롬8:10의 영을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수 의견임을 인정하는 자료로는 죤 머리의 로마서 주석(권혁봉 역, 생명의 말씀사) 33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문맥을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위 롬8:10이 언급하는 영은 사람의 영이며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의하면 여기에 언급된 영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 하는 조건하에서만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생명이심에는 어떤 특별한 조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앞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에서의 몸이 사람의 몸을 가리킴으로 뒤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에서 영도 당연히 사람의 영을 가리켜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으니 우리 안에 성령만 계신다는 사상은 매우 위험한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삼위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빛 가운데 거하심으로 사람 안에 오면 타 죽고 성령님은 사람 안에 오실 수 있다는 주장은 성령님이 아버지와 다른 본성 또는 열등한 본성을 가진 하나님이라야 말이 되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둘째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는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성령만 우리 안에 계시고 아들 하나님 자신은 '구겨지지 않는 한' 사람 안에 계실 수 없다는 말(기독신문 게시판 안0식 목사님 주장)도 삼위를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말들은 참된 신자가 소유하는 아들 안에 있는 생명(요일5:12)이 본인에게는 아직 없음으로 자신이 가라지라는 부끄러운 고백이 될 뿐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기독론과 구원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입니다.  

PS: 누구든지 성경해석에 오해가 있어서 잠시 성경적인 가르침과 다른 주장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또 틀린 것은 고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 성경적이고 이단적임이 선명하게 밝혀졌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오히려 성경적인 가르침을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런 비 진리와 비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유다서 1:3은 우리에게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라'고 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분별함 - (1)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http://local-church.tistory.com/22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3. 05:00

사람 밖의 하나님만 강조한 신학의 한계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은 사람 밖의 하나님만을 강조하여 신약 서신서 이후 도처에 나오는 '사람 안의 하나님(그리스도)'에 낯 설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 내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칼빈 신학은 그 중 하나입니다. 저는 '한국에 소개된'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신학의 폐단은 예수님을 소개하되 사람 밖에 계신 예수님을 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셨고, 사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가셔서 다시 오실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다 성경기록이며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 밖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만을 듣고 배운 분들의 설교는 당연히 구약의 스토리 소개 또는 사복음서에서의 예수님에 치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서신서와 계시록은 상대적으로 설교 시 다뤄지는 비중이 현저히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다루더라도 교훈을 얻는 관점이지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사심"을 돕는 관점이 아닙니다. 한 번 이런 시각에서 주변의 설교들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밖의 하나님"이 "내 안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요1:12, 3:6, 고전6:17). 

그리고 이 '씨"가 우리 안에서 자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새겨지고(갈4:19),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그분의 영광의 몸처럼 변형시킴으로(빌3:21) 우리를 맏아들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이 만드시는 것(롬8:29, 요일3:2)이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서신서와 계시록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투명합니다. 성경공부해서 안 지식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야기 일뿐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밭에 심겨져야 할 씨"를 심지는 않고 "저 지붕 끝에 대롱대롱 달아만 놓으니" 씨가 싹이 났다느니, 익어간다느니, 곧 추수를 할 것이라느니 등의 말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분이나 듣는 청중이나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 참되게 거듭난 분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자기들의 이야기"라는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들은 풍월로 아는 척을 할뿐입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사 '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그리스도)이 사람 안에 계신다는 성경말씀은 부지기 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이 열려있고 그러한 실제를 맛보고 있다면 많은 증거구절들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단 한 구절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몇 구절들을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롬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니라'(the spirit is life because of righteousness).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갈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를 참되게 얻지 못한 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실제로 얻었으나 그것을 믿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여 '못 얻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생명의 성숙"(엡4:15)은 자신 안에 가장 고상한 한 인격이 실재한다는 분명한 인식을 기초로 이뤄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세분들의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삼신론자들로 인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인격을 다 포함한 온전한 한 신격의 하나님 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핵심진리가 한국교계에서 닫혀버렸습니다(요일2:22-25).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계에 고린도 교회처럼 성경지식과 말 잘함과 은사체험자는 많으나(고전1: 5-7) 생명이 성숙한 자는 희귀한 듯 합니다. 그 증거는 영적 어린아이들의 특징인 "분열"이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3:1-4). 사실을 말하자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를 통해 주님이 계시하신 진리(생명 되신 그리스도, 생명의 충만인 교회, 교회의 최종완결인 새 예루살렘)는 상대적으로 매우 깊은 진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1) 생명 되신 그리스도 자신의 사람 안의 내주하심(마담 기욘) 
2)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고전15:45, 31, 빌3:10 제시펜 루이스) 
3) "주관적인 부활"의 체험(요11:25, 갈2;20, 빌3:11 오스틴 스팍스)의 진리의 해방과 실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두 분의 사역이 통상적인 가르침들과 다른 면이 없지 않으나 그 이유는 "틀려서" 다른 것이 아니라 "진도"가 달라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말이 아니라 솔직한 고백입니다. 

참되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말들을 공개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청해서 문제를 만들고 비난을 자처하겠습니까? 오 주님! 이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교제가 단 한 분의 마음중심을 움직여 좁은 생명길을 가고 바른 믿음의 길을 취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주님의 효능있는 피의 덮으심이 얼마나 필요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