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10. 23. 00:00

무엇이 한국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일까?-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위격문제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성경 기록에는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요한 복음1:14 에서 보듯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왜소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 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의 처녀탄생(마1:18-21) 역시 과학이나 인간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만일 누구든지 어떤 연유에서건 이러한 성경적인 사실을 부인하면 그는 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나 믿음으로 받아야 할 진리 중에 <하나님의 사람 안의 내주 하심(신비한 연합)>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한 연합>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거듭남)과 연속(생명의 성숙)에 관련되고, 특히 구원론과 관련된 <핵심 진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이 진리를 성경본문과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을 우리는 비 성경적임 또는 이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 개혁 신학계에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는 두 신학자가 이 주제에 대해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어 과연 한국 개혁신학을 대변하는 입장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즉 현 성경신학 대학원 원장인 차영배 박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고 오직 성령 하나님만 사람 안에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권성수 박사는 요14:23 을 인용하며 <사람 안에는 성령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 하나님도 계신다>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안에 성령님만 계시는지 아니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계시는지에 대해서 두 신학자 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두 분 다 현재 장로교단 소속 유력한 신학교에서 장차 목회자가 될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비중 있는 신학자들이다. 

따라서 한국 개혁신학을 대표할 만한 신학자들은 이 두 분 중 과연 누구의 주장이 자신들의 신학을 대변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입장 정리가 시급히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권성수 박사의 주장 -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님은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학 및 성경 해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총신대 목회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그의 저서 중 도서출판 횃불이 발간한 <로마서 강해(로마서 1-8장)> (1996년)

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그리고 10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는 성령이 거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것을 하나님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4: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를 말하는 것이고 성부와 성자가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쓰는 문맥은 14:16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희는 너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놓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하신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적인 연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405쪽). "10-11절에는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부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자가 거한다고 할 수도 있고 성령이 거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신비적인 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406쪽)
(인용 끝).
 

위 내용에서 권성수 교수는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 또는 '내가 아버지께' 등 삼위의 1격과 2격을 지칭하는 요14:23, 요14:16 본문을 인용함으로, 1격인 성부와 2격인 성자가 3격인 성령과 함께 사람 안에 거하심을 선명하게 말하고 있다. 

참고로 권성수 박사는 위 인용문 바로 직전에서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거하심은 <그냥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고 아주 사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님 모두가 필요할 때만 왔다가 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인 거듭난 성도들 안에 현재 살고 계신다.

2. 차영배 박사 주장 - <성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예수 믿는 사람 안에 거하신다. 

참고로 차영배 박사님은 고려신학교, 화란 Kampen 신학대학원을 졸업 후 총신대학 학장을 거쳐 현재 성경신학 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아래 내용은 월간 교회와 신앙(발행인: 최삼경) 2001년 10월 호에 실린 창간 8주년 기념 삼위일체특집에 기고한 차영배 박사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시작)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성육신 되신 분이다" 라는 명제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주 예수는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고, 우리 안에 內住하시는 분은 주 예수께서 보내주신 성령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마음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의 내주는 곧 주 예수께서 내주 하시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성령의 내주로써 충분하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우리 속에 내주 하실 필요가 없다. 그는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따라서 주 예수는 우리 안에서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제한받으실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122쪽). "

2-7. 성부와 성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심:... 영(靈)은 우리 안에 내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모두 같은 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는 영이시지만,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영은 아니고, 오직 그에게서 나오시는 영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만약 성부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처럼 감히 생각할 수 있는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임재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17~22)."(124쪽). "

<<성자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몸과 영혼이 있는 분이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주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124쪽)(인용끝).  

위 내용에서 차영배 박사는 출애굽기 19장을 근거로 성부가 사람 안에 들어오면 사람은 죽어버린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즉 성부는 사람 안에 구조적으로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성자도 우리 안에 오실 필요도 없고, 올 수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의 피에 힘입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이 출애굽기 19장의 바로 그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말씀(11절), 고린도 후서 5:19의 '하나님(성부)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God was in Christ)라는 말씀, 골1:27의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 갈2:20의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들과 함께 놓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위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위의 1격과 2격을 3격과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면이 있고, 사람의 생명되신 아들 하나님(요일5:12)을 <사람 밖에 묶어두는>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보인다.

이제 국내의 두 분의 저명한 개혁 신학자들 간의 이러한 두 가지 대조적인 주장들에 대해 한국개혁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 개혁신학계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처럼 성부와 성자는 아니고 성령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가 아니면 권성수 박사의 주장처럼 요14:23등에 근거하여 성부, 성자, 성령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그분의 성전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믿는가?   

2. 만일 권성수 교수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삼위 중 1, 2격을 3격과 분리시키는 차영배 박사의 주장은 삼신론 이단 사상이 아닌가?  

3.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을 지지한다면, 

1)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내주를 말씀하고 있는 골1:27, 롬8:10, 고후13:5, 갈2:20, 4:19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만일 차영배 박사의 주장대로 성령이 내주한 것이 그리스도가 내주한 것이라면 성경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즉 제 3격인 성령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통상적인 이해처럼 제 2격 아들 하나님 만이 그리스도인가? 

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요일5:12에 근거하여 사람 안에 아들은 없고 성령만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생명 없는 자들>로 판단해도 좋은가? 아니면 성령이 곧 아들 하나님이라고 할 것인가? 

3)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고후 13:5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안 계시고 성령만 계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버리운 자들>(아도키모스, 96b- 시험에 합격치 못한, 거절된(사람들))로 간주해도 좋은가? 

4) 만일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사람 밖의 저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임으로 이를 근거로 성령뿐 아니라 성부 성자가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사람 밖의 성부, 성자>와 <사람 안의 성부 성자>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우리는 두 종류의 성부, 성자를 믿는가? 

5) 차영배 박사의 아버지의 영은 아들의 영과 성령과는 다른 영이라는 주장은 삼위가 각기 다른 세 영들이라는 말인데 이것이 신약과 개혁신학계의 정설인가 아니면 이설인가? 

6) 삼위중 1격과 2격을 사람 밖에 두고 3격만 사람 안에 계신다고 믿는다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요14:11의 삼위간의 상호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는 요1:12에서 그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며, 영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영접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한국 개혁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책임 있는 답변은 한국 교계의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을 한 차원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 아울러 한국 장로교단의 공식 삼위일체관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 3자들이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믿는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 05:00

삼위일체 토론은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

삼위일체는 복잡합니다. 그래서 똑 부러지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를 조금 자세히 열거하자면, 첫째, 하나님 자신이 숨어 계십니다(사45:15). 둘째, 그리스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골2:2). 셋째, 사도신경 등에서 보듯이 성령님 (the Holy Spirit)에 대한 교리나 신조 상의 언급은 극히 짧고, 그에 대한 신학자들 사이에서의 논의는 아직도 미 완성 단계라는 점을 들수 있습니다. 

 따라서 각종 교리집이나 이단 전문가들의 주장이나 이런 인터넷 상의 토론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앎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도 꼭 토론이 필요하다면, 최소한 성경본문을 토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자기 한계에 집착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계시를 주사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는 겸손한 마음 자세가 요구됩니다(엡1:17, 마11:27). 

 이제 아래에서 스가랴 4장 10절과 계시록 5장 6절을 근거로 두 종류의 잘못된 삼위일체관을 바로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경 본문들 

슥4:10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눈이라(the eyes of the Jehovah(AsV), the eyes of the LORD (KJV), the eyes of Jehovah(Darby)). 

 계5:6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2. 여호와의 증인들의 오류 

여호와의 증인들의 오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합니다. 대신에 성령님을 하나의 능력으로 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은 아들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 요8:24 (예수님이 출3:14의 여호와 즉 ‘That I Am’(에고 에이미)이심). 2) 계1:8과 22:13-16의 비교(알파와 오메가=전능하신 하나님=예수). 3) 슥 4:10(여호와의 일곱 눈)과 계5:6 (어린양의 일곱 눈)의 비교를 통하여 충분히 예수님이 여호와이심이 입증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도 열심히 여호와를 증거합니다. 그러나 거짓되게 증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 삼신론의 오류

삼신론은 간단히 말해서 삼위(아버지, 아들, 성령님)를 ‘분리’시키는 이단 사상입니다. 양태론은 이와 반대로 삼위의 ‘구별’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삼위를 구별함에서 더 지나쳐 분리 독립시켜 생각하는 사실상의 삼신론적인 삼위일체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종성, 삼위일체

그러나 칼빈이 존경하는 교부인 어거스틴은 그런 삼위 분리 사상과 달리 “(세) 위격이 상호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 269쪽) 또는 “하나님과 아들이 분할 할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분” 이라고 했습니다(위 책, 267쪽). 

 이런 삼위의 분리불가 원칙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삼신론적 표현들 중 하나는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 하실 때 성부 하나님은 (저 하늘에만 계시고) 아들 안에 안 계셨다>는 주장입니다. 문제는 애석하게도 한국 교계에서 정통과 이단을 상담하는 책임을 맡은 현 한기총 이단 상담소장 자신조차도 이런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지상 사역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고 말씀하심으로 그런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합니다. 

  4. 성경적 삼위일체론-구별되나 분리는 안 되는 세 위격께서 한 신격과 한 본성을 공유함 

 삼위 하나님(Trinity 또는 Triune God)에 대한 성경기록은 양면적입니다.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와 경륜적인 삼위일체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삼위의 존재 자체를, 후자는 그 기능의 방면을 가리킵니다.  

존재론적(내재적)삼위일체(Immanent Trinity)는 영원 전에 하나님만 계실 때 어떤 존재 형태로 계셨는지를 정의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한 신격(one Godhead)과 한 본성 (one Nature)을 공유한 세 위격들(three Persons)이 구별은 되시지만 분리되지는 않으신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경륜적(경세적)삼위일체(Economic Trinity)는 그러한 존재론적인 삼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사 하나님의 장성한 아들들로 만드시려는 계획을 세우시고(엡1:5), 그것을 성취 하시고, 또한 마침내 사람인 우리에게 그것을 적용 하시는 각 방면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두 방면을 함께 말함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도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까지도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깊게 안 만지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래 인용 본문들은 성경적인 삼위일체를 균형있게 이해하는데 작은 힌트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요14:11). 

  -경륜적 삼위일체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 :16) 

(만일 위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침례 받기 전에는 성령님은 예수님 안에 안 계셨다 라고 주장한다면 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포함한 삼위 각자는 이미 영원 전부터 존재론적으로 서로 안에 상호 내재하십니다(요14:11). 이러한 양면성이 사람의 머리 속에서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어느 한쪽의 성경본문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경륜적/ 존재론적 삼위일체 –“나를 보내신 이가(경륜적 방면) 나와 함께 하시도다 (존재론적 방면).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8:16). 

  5. 결론 

성경적인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하는 비결 중 하나는 성경이 삼위 중 어느 한 위격을 언급할 때, 그 위격만 분리하여 생각하지 말고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하시는 다른 두 위격들을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8장 6절의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좋은 예입니다. 

 즉 아들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시, 아버지는 저 하늘에 남아 계시고 아들 안에는 안 계셨다 고 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이 땅 위의 아들 안에 상호 내재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들께서 승천하신 후 성부와 성자는 하늘에 계심과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위 계시록 5장 6절은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동일한 로마서 8장에서,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심을, 34절에서는 그러한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심을 말함으로 이런 관점이 성경적임을 재차 확증해 줍니다. 

그러나 한국 교계의 주류에 해당되는 개혁신학은 아들 자신이 아닌, '아들을 대리한 성령님'만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주장함으로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을 담기에는 그 그릇이 작음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개혁신학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자신'(골1:26), 또는 우리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아들 하나님 자신'(요일 5:12, 골3:4)을 인정 할수 없는 '신학적 구조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성도들이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혼란스러워 하는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각주1) 위 '하나님의 일곱영'(계5:6) 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면 글이 더 복잡해짐으로, 주님이 허락하시면 또 다른 기회를 빌려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6.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2) –세대주의 이단 논쟁

 이 글은 먼저 세대주의 혹은 언약 신학을 지지하는 것이 정통 혹은 이단이 되는 문제는 아님을 말하고자 합니다. 또한 형제회와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세대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해명하겠습니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세대주의가 중요시하는 몇 가지 핵심 항목들에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이들이 생명과 생명의 체험,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자신들의 사역의 초점으로 삼는 점도 세대주의와 차별화 된 부분입니다.

-세대주의 관련 이단 논쟁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1]는 한국의 개혁신학 쪽 분들에게 주로 종말론과 관련해서 이단성 시비가 있어 왔습니다.[2]  그런데 이것은 무천년설만이 유일한 정통 종말론이라는 전제에 기초한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무천년설은 같은 장로교 진영에서도 이견과 비판이 있는 터라, 그와 다르면 곧 이단이 되는 절대 진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3]. 한편 언약 신학 쪽에서는 종말론 외에, 세대주의 구원론[4]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한 예로 존 걸스트너 (John H. Gerstner)는 ‘거듭나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인데,  세대주의자들은 ‘믿어야 거듭난다’고 정 반대로 말하니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요20:31)고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라고 반박합니다 .[5] 이외에도 계시록의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문자주의 해석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다른 견해, 시대 구분 등이 세대주의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6].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대주의 안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어 이들을 어떤 고정틀로 다 싸잡아 비판하기 어렵게 되어 있고[7], 언약 신학 안에도 수정노선이 등장하는가 하면[8], 언약의 정의와 그 성경근거 제시에도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9] 따라서 균형잡힌 신학자들은 언약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정통과 이단의 차원이 아니라  보수 신학계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틀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세대주의 신학과 언약 신학의 관계 설정

이 연구를 위해 다양한 자료수집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약교회 김성주 목사님이 쓰신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과 장두만 박사님이 쓰신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라는 글이 가장 눈에 띄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로 인식하며 이를 신앙과 삶의 절대가치와 최고의 규범으로 삼아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며 두 교리체계이다. 그러므로 이 두 신학의 성경 해석적 관점의 차이는 정통과 이단의 관계로 규정해 비판하기보다는 정통신학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의 차이로 분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모름지기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관점을 집대성한 학문적 논리체계로서 인간의 주관적인 사상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지 않다. 그러므로 특정 신학을 절대화시키거나 신봉하기보다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부단히 연구 정진함으로 신학의 체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선의적인 작업이 부단히 요청된다고 하겠다.”[10]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언급해야 될 것은 세대주의와 언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 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11] 위 두 분은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신학체계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에 강하게 반대하고, 둘은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장 박사님은 위 논문 서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고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 이라고 함부로 정죄한다면서 “필자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양식 있는 학자라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라고 점잖게 충고합니다. 그는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해 왔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부 세대주의적 견해에 동조하는) 챨스 스윈돌(Charles Swindoll),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 (W.A. Criswell) 등이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지적합니다. 위 지적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부 같은 것을 말해도 즉각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이단시 하는 경향이 있는 개혁신학 전공자 분들과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한번 쯤 귀를 열고 경청해 볼 만 합니다.

 -세대주의와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워치만 니는 폐쇄파 형제회와 일정기간 교류가 있다가 성만찬 문제로 교제 단절을 당한 바 있습니다. 또한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 만나기 전 7년 반 동안 형제회 모임에 몸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경 해석 안에서 소위 ‘세대주의의 특징들’이 일부 발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세대주의 핵심 특징들에 있어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크게 달리합니다.

-이스라엘, 교회, 왕국

: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면서, 교회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연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하와로 예표된 교회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목표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신약 교회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의 실재가 바로 왕국이라고 가르침으로 소위 ‘왕국 연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12]

-대환란 전 휴거

: 알려진 대로 세대주의는 <대환란 전 휴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극소수 이기는 자들 외에, 대다수 거듭난 성도들은 <대환란 후 휴거>될 것을 가르칩니다.[13]

-7년 대환란

: 세대주의의 <7년 대환란 교리> 는 그 내용과 개념이 두 성경교사와 다릅니다[14].

-알레고리 해석

: 비판자들은 워치만 니 특히 위트니스 리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한다고 정죄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문자적 해석이 특징인 세대주의자일 수는 없어야 합니다.[15] 

-산상수훈 해석 등

: 어떤 세대주의자는 마태 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은 유대인들에 해당되어 신약 교회와 무관하며, 대환란 때 이방인들에게 전해 질 ‘천국 복음’(마24:14)을 지금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6]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마태 복음5-7장은 왕국 백성인 우리에게 헌법에 해당되고, 천국 복음은 대환란 전에 온 땅에 확산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시대의 구분

: 두 성경 교사는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처럼은 아니지만, 시대를 구분합니다.[17] 그러나 대표적인 언약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와 루이스 벌콥 역시 시대를 구분합니다[18] 따라서 시대를 구분한 자체가 곧 세대주의자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결론

 찰스 C. 라이리는 언약 신학이 체계화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로 극히 최근의 일이고, 초기 교회의 공인된 교리가 아님을 지적합니다.[19] 장두만 박사님은 언약 신학의 행위 언약, 은혜 언약의 석의적(釋義的, exegetic) 근거가 불충분하고, 언약 체결 시기와 언약 당사자에 관해 신학자마다 혼란이 있는 것은 성경 근거가 희박함을 말해준다 고 주장합니다.[20] 심지어 믿음이 없는 유아들을  세례주는 근거로 언약 신학이 고안되었다는 혹평도 있습니다.[21]  만일 이런 지적들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언약 신학과 다른 것은 이견일뿐 이단일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양 쪽 지지자들 모두가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 광풍처럼 몰아쳤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웠던 무기였던 <근본주의 5대 강령>[22]  을 다시 함께 고백함으써, W.C.C. 번영신학 등 신종 자유주의가 한국 교계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함께 영적 싸움을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23] 이런 영적 전쟁에서 자유주의가 적군이라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우군입니다.[24]

 
[1] http://blog.daum.net/hopeyard/8157 (목창균 박사님, 세대주의 논쟁)
세대주의 논쟁_목창균_서울신대_교수.pdf (클릭 다운로드)
[2]한국교계 내에서는 ‘시한부 종말론’ 비판( ftp://203.230.114.4/DLIIMG/009/009/T0211401.PDF )또는 선교 단체인 인터콥의 종말론 비판(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02 )과 관련하여 세대주의가 자주 거론된다.
[3]그런데 무천년설만이 정통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 또한 만만치 않다. 1) 차영배 박사님은 그의 <성령론> (도서출판 엠마오, 1997)에서 “대부분의 교부들은 역사적 전천년설자들” 이었는데, “이젠.. 무천년설이 득세 하여 한국교계의 전천년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탄식하고 있다 (12쪽).  2) 미국의 Faith 신학교를 졸업한 이광복 목사님도 종말론 토론에서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의 알레고리 해석법에 기원하며”, “무천년설 에 의존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은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라고 비판한다 ( <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 (생명의 말씀사, 1996, 201, 203쪽). 3) 특히 덴버 신학교 정성욱 교수님은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56267 )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성경적인 종말론임을 역설한다.
 [4] <세대주의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이다.
 [6]  이단감별사인 이인규 님(감리교 권사)은 <세대주의 비판>이라는 인터넷 상의 글에서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으로 “1) 배타적 폐쇄적이며, 2) 오직 자신들 교리만 진리라고 주장하며, 3)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 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1)과  2)는 언약신학 쪽도 자유롭지 못하고, 3) 의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라는 주장이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이인규님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7]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36&wr_id=16 이 자료는 세대주의를 “고전적 세대주의, 수정 세대주의, 점진적 세대주의, 대중적 계시주의” 로 분류한다. 이외에도 찰스 C.라이리는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전도출판사) 에서 블링거로 대표되는 ‘극단적 세대주의’를 말하며, 이를 다시 ‘극단적인 유형’과 ‘온건한 유형’으로 분류한다(218쪽).
 [8] 포이쓰레스는 <세대주의 이해>(총신대 출판부, 1992)에서 언약 신학의 수정노선과 관련하여, “성경신학”의 등장, 안토니 후크마 종말론의 “지상적”인 영원상태, 그리고 Willem Van Gemeren의 로마서 11장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 등을 지적한다( 54-55쪽을 보라).
 [9]  각주 11이 소개한 논문은 언약 신학자들이 제시한 성경 근거들이 왜 무리한 인용인지를 밝히고 있다.
 [10] http://blog.daum.net/7gnak/15718380  (김성주,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특강 자료 중 일부이다)
 [11] http://blog.daum.net/hosanna7000/15577285  (장두만,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이 논문은 <목회와 신학> 1995년 2월호에도 게재되었다.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_장두만박사.pdf (클릭 다운로드)
 [12] 위트니스 리는 <신약의 결론-왕국>(한국복음서원, 1992)에서, “어떤 성경교사들은 왕국이 연기 되었다고 잘못 가르쳤다…로마서 14장에 따르면, 왕국은 오늘날의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의실재가왕국이다.” 라고 말한다(21-22쪽).
 [13] 위트니스 리는 계14:4의 ‘첫열매’ 관련 각주에서, 대부분의 믿는이들의 대환란 끝 휴거를 주장한다.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해당 구절 각주 2를 보라.  계14장4절 각주2.pdf
 [14] 위트니스 리는 계11:2 ‘마흔 두 달’에 대한 각주에서, 다니엘 9장 27절의 “후반부 삼년 반이 대환란의 기간일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7년 대환란>이라는 용어 자체를 부인한다.
 [15]  이인규 권사는 위트니스 리의 ‘알레고리 성경 해석’이 문제라고 자주 주장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읽되, 필요시  상징적인 의미를 따져 보는 것을 원칙삼으라 고 가르친다( 한국복음서원이 발간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을 참조).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일 뿐, 세대주의자와 무관하다. 성경에는 ‘문자주의’(사7:14)와 ‘알레고리’(갈4:24)가 혼재한다.
[16]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43&wr_id=25 이송오 목사님은 이 자료에서, “무천년 주의자들은….유대인의 왕국 복음을 이 시대의 구원 계획으로 붙들고 있다” 라고 주장한다.
 [17]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5:14 주석에서,  ‘아담부터 모세까지’(롬5:14),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요1:17), ‘그리스도 초림부터 만물의 회복까지’(행3:20-21), ‘그리스도 재림부터 천년왕국 끝까지’ (계11:15, 20:4, 6)로 시대를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경 자체의 구분일 뿐 세대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워치만 니에게서도 시대 구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II, 한국 복음서원, 2002, 88쪽 참조).
 [18] 찰스 핫지도 ‘different Dispensations’이라는 소제목 아래 ‘아담에서 아브라함’, ‘아브라함에서 모세’, ‘모세에서 그리스도’, ‘그리스도에서 마지막’으로 시대들을 구분한다 (Systematic Theology II,  pp. 373-377). 핫지와 벌콥의 시대구분은 찰스 라이리의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 (전도출판사) 48-49, 54쪽도 보라.
 [19] 언약 신학의 상세한 역사는  위 라이리 박사 책  200-205쪽을 참조하라. 혹자는 어거스틴의 "구약은 숨겨진 신약이다. 신약은 드러난 구약이다." 라는 말을 빌려 언약 신학 기원을 초대 교회까지 소급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대주의 쪽도 역시 어거스틴의“시대를 구분하여라. 그러면 성경은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세대주의 기본원칙 중 하나로 인용한다(위 각주 16의 제공자료 참조).
 [20]  [11] 참조
 [21] 박만수 형제님은 “칼빈은 유아들이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섭리에 의해 그들이 이미 은혜 계약 안에 있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세례를 줄 수 있다 고 주장했고, 그것이 소위 언약 신학의 출발점이었다”라고 주장한다( http://blog.naver.com/hjxch/80036289026 ).
 [22] 근본주의 5대 강령은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적인 죽음, 육신입은 부활, 기적의 인정(또는 재림 신앙)’이다.
 [23] http://blog.koreadaily.com/korea3927/695125 김명도 박사님은 이 글에서 “개혁주의와  신근본주의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믿음을 지키려는 교단들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24] 중국 난징소재 ‘진링(金陵)연합신학대학’의 왕애명 박사는 최근에 10년(2002- 2012년) 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및 지방 교회들을 연구한 결과, 이들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개신교 표준 고백과 정확히 일치한다.” 고 공개 증언한 바 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136 ). 이것은 미국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 와 풀러 신학교 측이 장기간 연구한 결과와 일치된 결론이다. (지방교회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3.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지방교회 자료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1)

- 시작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현실을 돌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godssalvation.chch.kr/aspects/regenerate.html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