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에클레시아 교회론에 대한 간략한 반박 (4) - 개혁교회 교회표지와 불일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9.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3)


2. 신약교회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할 에클레시아 개념들

신약에서 교회 (Church)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물론 70인 역 구약에서도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에클레시아가 우리가 현재 토론하는 대상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염두에 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속성상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외시킵니다. 

 1) 이방인 폭도들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H.J 님이 용례 중 하나로 소개해 주신 사도행전 19장 32, 39, 41이 말하는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개념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부의 권세 아래 있는 무리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구약의 유대인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서두 글에서 언급되었던 케빈 길레스 책 345-346쪽에 의하면 70인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약 100번 나타났는데(이 단어의 대부분은 카할이라는 히브리어), 그중 시편 28:5와 에스겔 32:22-23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유대인은 이러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으로(롬2:28-29) 소위 표면적 유대인인 구약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모임은 에클레시아 이되 신약교회 개념(이면적 유대인)인 마태복음 16:18이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개념에서는 제외됩니다.

 3)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이 제외됨

위 책은 유대인이되 열왕기상, 역대상, 역대하 등에서 약 33번 쓰인 에클레시아는 특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 역시 신약교회의 예표와 그림자의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마태복음 16: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는 아닙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회심 전후의 사울과 바울의 모습에서 관찰되듯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일 뿐입니다. 즉 예배하는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통해 참된 신약교회의 구성원이 된후 그는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이되 그 신분과 그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었노라고 실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3:6). 그가 고린도후서 11:28에서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고 할때의 그 교회는 그가 회심 전에 몸 담았던 예배공동체인 이스라엘 개념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을 혼동할 때 그 사람의 교회론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이해에서 멀리 빗나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교회는 시점으로 볼 때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교회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들만을 염두에 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단수의 교회로서 복수의 교회들이 되는 성경적인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할 때 염두에 둔 교회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H.J 님은 위 제외된 모든 개념들을 다 포함한 신구약 전체에 나타난 '에클레시아'의 용례들을 다 교회개념으로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범위에 있어서도 단지 <특정 목적을 위하여 따로 불러 나와서 만들어진 모임> 즉 민회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 집에서 모이든 예배당에서 모이든 도시에서 모이든 다양한 범위의 모임 그 모두가 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에 다루겠지만 교회의 다른 특징들을 무시한 채 에클레시아라는 원어적 의미만을 중시함으로 본의 아니게 분열의 뒷문을 이론적으로 열어주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1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교회들을 다 포함한 하나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라는 식의 성경본문 왜곡으로 빗나갈 여지가 다분합니다. 이 점은 별도의 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2)


저는 비록 부족함이 있긴 하지만 이런 교회론에 관련된 진지한 논의를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시고자 하는 일이 곧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는 것'(마16;18)이고, 주님의 종들인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자와 교사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 또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4:11-12). 그런데 저와 HJ 님의 최근의 논의에서 보이듯이 교회 또는 에클레시아에 관해서는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논점들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으로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을 깃점으로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교회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가 있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합의된 정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수 많은 경쟁적 선언들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교통 정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 우리의 토론의 대상은 어떤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가? 

케빈길레스는 그의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에서 현재 우리에게 교회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없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15쪽) 

  위 책을 번역한 홍성희 님도 역자 서문에서 위 케빈길레스의 말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론에 관한 책은...이미 나와 있는 것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각각의 교회, 교파, 교단에 따라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어서 교회에 대한 통일된 교리가 아직도 나와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토론대상이 되는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 HJ님과 제가 약간의 혼동을 빚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라도 우리가 토론하는 대상인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처음부터 밝힌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단수의 '우주교회'가 복수로 나타나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문제제기 한 것임으로 당연히 마태복음 16장 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바로 그 교회를 염두에 둔 교회개념을 토론의 전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16에서 목자(사)와 교사들 등의 주의 종들이 세워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HJ 님은 '에클레시아'라는 원어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개념과 범위를 내포한 교회개념을 토론의 대상으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에클레시아)개념 안에는 HJ 님이 소개한 것처럼 사도행전 19:32, 39, 41에서 보듯이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까지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개념 안에 과연 이런 폭도들의 모임이 끼여들 여지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편차가 쌍방에게 약간의 오해와 혼잡을 가져온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 우리가 토론하려는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특징들을 통해 에클레시아이되 그에 부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배재시킴으로 토론대상을 더 명확히 하는 시도를 해 보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4. 05:00

지방교회에 대한 비난은 오해에서 온 것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지방교회 운영 원칙

 

‘목사’대신 ‘장로’사역자가 교회 관리 운영

거듭난 성도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

한국교회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로 알려져 있는 로칼처치(local church)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로 워치만 니의 신학사상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는 한국교회 외에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측은 한국교회에 왜곡 전달된 자신들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1. 오해 받고 있는 내용들 

첫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 신관에 대해 양태론을 믿는다는데 대해;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 신관의 양태론을 이단사상으로 오히려 정죄한다고 밝혔다. 지방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相互內在) 하시며, 영원히 동시존재하신다는 칼케톤 신조를 굳게 믿는다.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삼위의 동시 존재를 믿는 양태론’은 성립될 수 없음을 잘 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사야 9장6절에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처럼 본문자체가 존재론적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에서의 삼위 간의 동일시는 ‘존재’가 아닌 경륜적인 ‘기능상’의 동일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함께 이같은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을 가르친 것을 일부 인사들이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한다는데 대해;
이 말은 위트니스 리가 다른 근본주의 교사들의 동일한 해석에 동승하여 요한계시록 17장5절의 ‘큰 바벨론, 음녀’를 로마 천주교로 본 것을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는 기성 교회 안의 거듭난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사제도를 부인한다는데 대해;
지방교회도 개교회의 인도자로서 복수의 ‘장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세속 직업을 가진 경우도 있고, 기성 교회처럼 전 시간으로 교회만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기성 교회의 목회자 역할을 감당한다. 다만 지방교회는 이들을 ‘목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장로’라고 부를 뿐이다. 칼빈도 두 종류의 장로론을 가르쳤고, 장로교 헌법에도 ‘목사’를 ‘장로’ 반열에 두고 있다. 또한 초대교회는 주후 4세기 경까지 목회자를 ‘장로’로 호칭했다. 

넷째, 지방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데 대해;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특정 단체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되게 거듭난 교인들의 공동체이고, 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믿는다. 

다섯째 지방교회만 교회라고 한다는 데 대해;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우주교회’(마16:18)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가 거주하는 지역을 범위로 하는 해당 ‘지방교회’(local church)의 일원이다(행8:1, 계1:11). 예를들어 지방교회가 ‘서울교회’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2. 지방교회가 지향하는 것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치되, 특히 성경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고 실행하기를 힘쓴다. 지방교회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요11:25, 골3:4)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엡1:23) 건축하는 것(엡4:16, 마16:18)이 성경의 중심 진리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 최종 완성된 모습이 어린양의 신부인 새예루살렘이라고 한다(고후11:2, 계21:2, 9-10).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백 권의 저술들은 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내용으로 쓰여졌다. 지방교회는 또한 최대한 성경대로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그래서 침례(행8:36-39)를 선호하고, 또 매주 예배시간에 성만찬을 실행하고 있다(행20:7). 

  3. 지방교회의 특징 

지방교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에 관한 객관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의 그분의 몸’(엡1:23)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그러한 객관적 진리를 토대로 삼되 더 전진해서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와 그분에 대한 체험을 강조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27-29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본을 따른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성직자 제도의 폐해를 보고 만인제사장을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론에 비해 실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방교회는 에베소서 4장12절의 권면을 따라 성도들을 온전케 하길 힘씀으로 만인제사장 제도를 실제로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롬15:16), 모든 성도들이 목양하며(요21:15),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도록 격려해 왔다(고전14:1, 4, 23-26, 31).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며(엡4:4) 주님은 분열을 책망하신다고 믿는다(고전1:10-13). 따라서 가급적이면 분열의 요인들은 피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등 몸의 하나를 이루는데 필요한 미덕들을 더 소유하기를 힘쓴다(엡4:2-3참조). 

  4. 지방교회의 신앙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은 한국복음서원이 발행한 신약의 결론(총8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구속과 구원 등 핵심 신앙에 있어서 성경뿐 아니라, 성경에 따라 결의된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초대교부들의 정통 가르침과 교회 역사상 주께 쓰임 받았던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들을 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복음서원도 ‘2천년 교회사 순례’(214쪽)라는 책을 번역 발간한 바 있다. 따라서 주의 회복은 성경과 교부들과 역대의 주의 종들을 통해 계시된 건전한 가르침들을 이어 받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2 , 교회연합신문 562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652호_edit130130.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1.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4)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나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오시며,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을 수행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분명한 동일시를 발견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세 위격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이 믿는 이들 안에서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와 그 영이 부활 안에서 동일시되시는 것에 관해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아래의 발췌문은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령이시다. 성령 외에는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는 그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누구이신가?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 영은 누구이신가? 물론 성령이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님이시고, 그 영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을 그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The Spirit of Christ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는 <그리스도의 영> (The Spirit of Christ) 이라는 자신의 책 25장에서 “주 예수님은 높여지시어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주 영’이 되셨다.”라고 말했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 > ,영문판 14-15쪽 제자들 안으로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 내쉬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숨이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 즉 숨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의결론 - 성령

모든 과정을 완성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으며, 이 생명 주시는 영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분,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이신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들의 영적인 생명과 존재의 신성한 본질이 되셨다. <신약의 결론 성령>, 194-195쪽

위의 예문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오해한다면 이러한 글이야말로 그가 명백한 양태론자라는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일성에 대해 심도 있는 설명을 시도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우리가 받는 오해와 유사한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 (Irenaeus), 터툴리안 (Tertullian), 어거스틴 (Augustine)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근거 없이 그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기 위해 소위 ‘증거’로 출판한 책자들에서는 위트니스리의 그러한 균형잡힌 언급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그의 온전한 관점을 보여주는 두 예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3편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고후 3:17). 주님으로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다. 그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통치권과 머리의 권위와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고 계신다… 그분이 주님으로서 수행하시는 모든 것을 그분은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 95-96쪽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숨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물론 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인 내적이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번째 보혜사이신 그 영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숨이시다. 따라서 내적인 방면을 조망할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은 하나이시다. <요한복음 강해 속편 3권>, 273쪽

많은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에는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신약의 서신서들과 같이, 자신의 사역의 커다란 강조점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종종 생명 주시는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언급을 추가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위트니스 리 외에도 그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임스 던 (James D. G. Dunn) 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분은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분으로서 위트니스 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적인 존재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의 모형이다…요약하자면 45절 하반절은 이에 대한 증거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바울은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면서도 몸이 있는 그러한 존재의 형태로 새로운 인성의 본과 선구자이시라는 것을 [생명 주시는 영]에 대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기때문이다.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그들 모두가 체험한 생명 주시는 영은 다시 사신 예수, 마지막 아담이시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영적인 존재…또는 영적인 범위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바울에게 있어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며,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1, Christology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98], 164-165쪽)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관해 자주 인용한,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저명한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 (W. H. Griffith Thomas) 역시 이러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뛰어난 요약을 했습니다.

The Holy Spirit

이러한 진리의 양면 모두를 주의하며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영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위격의 특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그들의 임재는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것이다. (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1986; reprint of The Holy Spirit of God, 4th edition,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3] 144쪽)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이러한 인용문을 읽는다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웨트 (H. B. Swete) 도 동일한 사상을 아래와 같이 확증했습니다.

H. B. Swete

그 영은 그분의 일에 있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영이신 주 (the Lord the Spirit) 즉 그분의 영화롭게 된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London, New York: Macmillan, 1912] 306쪽)

 이 핵심적인 주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기 전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각주를 추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각주는 위트니스 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를 동일하게 인정한 저명한 주석가들인 마빈 빈센트 (Marvin Vincent), 헨리 알포드 (Henry Alford), 윌리스톤 워커 (Williston Walker) 의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에서 시작되는 이 부분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의 ‘주님’은 틀림없이 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고후 2:12, 14-15, 17, 3:3-4, 14, 16, 4:5). 이것은 성경에 있는 분명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강조한다. “3장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널리 퍼지게 하시고 활력 있게 하시는 그 영이시다. 우리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고 (고후 3:6) 새 언약의 사역에는 영광이 있다 (고후 3:8).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 요한복음 14장 16절, 18절과 비교해보라” (빈센트).

“3장 16절의 주님은 3장 6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다. 의미상, 여기서 언급된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영’은 바로 성령과 동일하시다…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알포드). “변화시키시고 내주하시는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님은 그 영이시다’” (윌리스톤 워커). <신약성경 회복역>, 고린도후서 3장 17절 각주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5. 05:00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인 전통따라"

지방교회, 바른이해와 교제희망

우리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존경하는 목회자신문 독자 분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귀한 지면을 할애해 주신 목회자 신문사측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이글은 예장통합 교단과의 오해로 인한 간격을 좁히는 차원에서 통합교단 제 77차 총회가 지방교회에 대해 결의하신 내용에 대한 해명에 초점을 맞추었다. 

구체적인 진리항목들을 다루기에 앞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 신앙의 특색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지방)교회는 (플리머스 형제회의) <근본주의 신앙>과 <생명의 체험을 강조하는 흐름>의 교집합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방교회 성도들은 근본주의 5대 교리인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신을 입은 부활, 육체적 재림(또는 기적의 인정)을 굳게 믿는다. 또한 이러한 신앙의 토대 위에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으로 체험함(골1:27)을 추구한다. 

따라서 일부 성경해석상 이견이나 용어표현상 이질적인 면이 다소 있을 수 있으나, 핵심진리(유다서, 3절)에 관한 한 역사적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지면의 제한상 77차 총회 결의를 통해 통합교단이 지적한 각 항목들에 대해서 핵심 요점만 간략하게 해명을 드리고자 한다. 

  1. 신론에 대하여 

1) 신인합일주의를 가르친다는 지적 - 우리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15:5),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함이니라'(롬8:29)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요일3:2)라는 말씀을 믿는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와 똑같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인 우리는 어떤 경우든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통합측 지적처럼 일부 설명에 본의 아니게 '표현상' 오해의 여지가 없지 않다. 

2) 양태론을 가르친다는 지적 -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 세 인격, 한영>이 지방교회 삼위일체이다. 이에 대해 통합측 토론자는 <세 인격, 세영들>을 기준삼아 양태론 이라고 함으로 양측에 이견이 생겼다. '세 인격이 하나로 발전된 것'이란 표현은 출처로 제시된 책 110쪽에 발견되지 않는다. 소위 '수박비유'는 세 위격이 동시존재하심을 전제로 한 설명임으로 양태론이 아니다. 그러나 읽기에 따라 오해의 여지는 있다. 

  2. 기독론에 대하여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한다는 지적- 예수님은 참 하나님, 참 사람이시다. 그러나 그 육신은 부활을 기점으로 <썩을 몸>에서 <썩지 않을 몸>-영광의 몸(빌3:21)-으로 바뀌셨다고 성경은 말한다(고전15:42, 44). 그러나 이것을 인성의 변질로 보는 신학자는 없다. 위트니스 리는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3. 인간론에 대하여 

1) 삼분설을 가르친다는 지적- 지방교회측이 삼분설을 지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삼분설, 이분설은 상대적 관점일뿐 이단성 여부를 가릴 진리항목은 아니라고 본다.

2)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며 전인적 타락을 부인한다는 지적 - 이 점은 통합교단 토론자가 토론과정에서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고백함으로 잘 해결되었다(교회와신앙, 97년 8월호 164쪽 참조). 지방교회측은 전인적 타락을 굳게 믿는다. 

  4. 교회론에 대하여 

1) 기독교를 바벨론 음녀라고 한다는 지적 - 위트니스 리는 계시록 주석 과정에서 '큰 바벨론'(계17:5)을 '로마천주교'로 이해했다. 이것은 근본주의 성경교사들 대다수의 관점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강해는 난해한 문제임으로 얼마든지 다른 해석적 관점이 가능하다. 위트니스 리가 이런 주석을 통해 다른 기독교인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혹시 오해가 있었다면 재차 양해를 구한다. 

2) 기성교회의 목사와 예배를 부정한다는 지적 - 루터도 주장한 바 있는 <계급적인 의미의 성직자-평신도 제도>를 반대한다는 말이 본의 아니게 와전된 것 같다. 하나님의 양무리에게는 당연히 목자들이 필요하다. 지방교회측도 성도를 목양하는 풀타임 사역자들이 있다. 또한 성경적인 예배를 부인하지 않는다. 

3)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는 지적-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영원한 멸망이 아닌 <이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고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은 기록이 성경에 있다(행2:40-41). 이처럼 <세상으로부터의 분별> 내지는 믿음의 외적인 간증으로서의 침례를 말한 것이 다소 오해가 된 것 같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침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4) 주님이름 부름이 유일한 성령충만 방법이라고 한다는 지적- 사실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부요함을 체험한다고 성경은 말한다(롬10:12). 그러나 지방교회 성도 누구도 이것을 유일한 성령충만 방법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풀러신학교측 총장과 신학대학장이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2년간 허심탄회한 대화와 검증 끝에, "이단이 아니고 역사적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로 지방교회를 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통합교단과도 더 많은 교제를 통해 동일한 이해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한다.          

(끝)

  지방교회 탐구 기사 527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지방교회_목회자_527호_070210.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30. 05:00

지방교회 탐구 - 3

“교회 직제는 달라도 고백은 같다”

  - (기독론) 예수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한다 : 위트니스 리는 약 701쪽 분량의 ‘그리스도론'(한국복음서원) 을 썼으나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양성을 부인한 적이 없다. 조사보고서상의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는 부분은 위트니스 리가 부활시 예수님의 육신이 육의 몸에서 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셨다고 한 것을 지적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말은 성경 말씀 그대로일 뿐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으로 본다(고전15:44, 빌3:21). 지방교회측은 “뭔가 오해가 있는 듯 싶다”고 밝히고 있다. 

  - (인간론) 삼분설을 취하면서 사람의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함으로 전인적인 타락을 부정한다 : 우선 인간 구성을 이분설로 보든 삼분설로 보든 그 차이가 이단 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학적 논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사보고서의 지적처럼 위트니스 리가 몸만 타락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으로 믿음으로 참으로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부정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가 최대의 쟁점이다. 우리는 통합측과 토론시 우리가 온 영과 혼과 몸을 포함한 전인적인 타락을 믿는 근거들을 상세히 제시했다. 그러자 "물론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가 인간의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이 타락하여 죽었다고 주장한다"고 말함으로 연구 보고서상의 지적을 스스로 뒤집은 바 있다(월간 교회와 신앙, 97년 8월호 164쪽 참조). 

  - 교회론 관련 문제 제기들 : (지방)교회의 공식 교회론은 위트니스 리가 쓴

신약의 결론 - 교회

‘교회론(530쪽 분량)'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통합측 조사 보고서가 이 책 외의 자료 여기 저기에서 문맥의 흐름과 무관하게 떼어 낸 몇 가지 자극적인 표현들은 다소 오해 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들을 인용 소개시 오류가 있거나, 핵심진리가 아닌 장로교단과 침례교단이 차이점을 가지되 서로 허용하는 정도의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 기성교회를 바벨론이라고 한다 : 계시록 17:5의 ‘큰 바벨론'을 ‘로마 천주교'로 보는 근본주의 성경교사들의 기존의 해석을 위트니스 리도 답습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해석이 이단시 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물론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측은 어떤 교단 소속이든 참되게 거듭난 성도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인정한다. 아울러 통합 교단을 포함한 타 교단 내에서 거듭난 성도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함은 물론이다. 

  - 목사와 예배 제도를 부정한다 : 지방교회가 기존교회와 다른 차이는 계급적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수의 장로들이 특정 교회를 다스리고 목양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보아 이들도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예배 실행은 형식상으로는 다양성이 인정된다고 보며 그 안에 주님의 임재 등 참된 경배 요건이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요4:24). 

  - 기성교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 : 어떤 단체이든 거듭난 성도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교파에도 참되게 거듭난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믿는다. 이 부분 역시 전후 문맥과 함께 읽을 때 풀릴 수 있는 오해들 중 하나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우리를 구속하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 이들은 “이런 오해는 아마도 구원의 여러 방면 중 사도행전 2:40이 말하는 ‘(지옥이 아닌)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는 구절을 설명하는 문맥을 잘못 이해한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고 성명한다. 

  - 주 예수 이름 부름이 유일한 성령 충만 방법이라고 한다 : 고린도전서 12:3하, 로마서10:12에 근거하여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 충만되는 많은 성경적인 방법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따라서 “이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는 없으며 그렇게 말하지도 않으며 역시 전달과정에서 다소 오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중요한 핵심진리(유3절)에 대해서는 정통성 여부를 엄격하게 따지되 지엽적인 진리나 실행들의 차이는 그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이 유지되는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단 여부를 규정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임을 양심가운데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지방교회 탐구 원본 518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 클릭)
목회자신문_지방교회탐구3.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15

지방교회 탐구 - 4

예장통합 교단 신앙고백 적극 동의 

폐쇄적인 과거벗고 연합운동 지향 

미국 CRI "삼위일체 문제없어" 


*지방교회 성도들이 성경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역원 전경

1. 삼분설과 신비주의
일각에서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인간 삼분설'을 주장하고 가르침에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있으며, 성경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이분설을 지지하는 쪽에서 본다면 삼분설(살전 5:23, 히 4:12)에 다소 이질감이 느껴질 수 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이 주제는 이단성을 가릴 만한 핵심 진리는 아니다. 칼빈 신학교에서 오래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안토니 후크마의 경우 장로교인이지만 '삼분설 뿐 아니라 이분설도 거절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개혁주의 인간론, 347쪽). 따라서 이 문제는 좀 더 깊은 포용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해당 진리 자체가 다소 신비스러운, 십자가를 짊(마16:24), 그리스도를 삶(갈 2:20), 그리스도의 몸(엡 4:12) 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형제회 배경을 가졌고 성경본문 주석서를 펴내기도 했는바 신비적인 체험만을 추구하는 소위 신비주의자들은 아니다. 또한 "성경을 영해한다"라고 보일만 한 곳이 혹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터무니없고 부적절 할 때만 그것들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위트니스 리,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60-61쪽)라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성경 해석에 임함으로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2. 양태론 시비
최근 10 여 년 동안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믿으니 이단이다"라는 말이 있어 왔다. 그러나 과거에 (지방)교회 측과 통합교단 토론자가 가졌던 토론 과정 등을 진지하게 지켜 본 이들은 기존의 태도를 바꾸어 판단에 신중을 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믿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일까? 우선 통합교단 헌법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다(신 6:4, 고전 8:4,6)" 라고 고백하나 통합측 토론자는 "세 영들" 또는 "세 사람들"식의 "세 분 하나님"을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세 인격, 한분'으로 믿는 (지방)교회 측과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트니스 리가 이사야 9장 6절,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고린도 후서3장 17절을 본문 그대로 가르침으로 인해 오해가 생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구원의 경륜 과정에서 삼위일체의 두 위격 사이의 '기능적인 동일시' 일뿐 결코 '본체론적 위격의 혼동'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R. B. 개핀 교수와 합동신학대학원 박형용 박사도 장로교인이지만 이점을 잘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차영배, 성령론(구원론부교재), 59-60쪽, 신학지남, 1978년 봄호, 28-39쪽). 수년 동안 (지방)교회를 양태론 자로 오해했던 미국의 저명한 이단변증단체인 CRI 대표 행크해나그라프와 Answers In Action 대표 그레첸 패산티노가 이들과 진지한 대화 후 최근에 태도를 바꾸었다. 즉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삼위일체가 진리상 아무 문제없다." 라고 미국교계 앞에 공개선언을 한 바 있다. 

3. 교회론 관련 논란
지방교회는 "교회가 시대와 지역과 종족과 인간의 계급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명시한 통합교단 헌법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교회론 핵심 내용에 대해서는 쌍방 간에 전혀 이견이 없다. 소위 "지방 입장을 말함으로 다른 단체들은 교회도 아니고 그 안에는 구원도 없다. 라고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든 교회의 일원이며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목사 제도를 부인한다는 소문이 기성 교회 목회자들을 언짢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 내에도 전국에 200여명의 인도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신학을 한 경우와 세속 직업 없이 전 시간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 지방의 모든 성도는 다 한 장소에 모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말도 오해인 것으로 강조한다. '서울 교회'만 해도 현재 23 개 장소에서 모이고 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12절까지의 바울의 권면에 따라 '성도들 온전케 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에 대해 많은 영적 자료들을 남겼다. 그들이 주께 받은 이러한 빛과 체험들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는 개혁신학과 상호 보완 된다면 한국 교계에 큰 유익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지방)교회 측은 그동안 교단과의 관계에서 다소 폐쇄적이었던 과거의 자세를 반성하고 건강한 복음안에서 에큐메니칼 정신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끝

지방교회 탐구 원본 519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2006_12_02_519_edit.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