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3. 05:00

사람 밖의 하나님만 강조한 신학의 한계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지금까지 대부분의 신학은 사람 밖의 하나님만을 강조하여 신약 서신서 이후 도처에 나오는 '사람 안의 하나님(그리스도)'에 낯 설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 내었습니다. "한국에 소개된" 칼빈 신학은 그 중 하나입니다. 저는 '한국에 소개된'이란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신학의 폐단은 예수님을 소개하되 사람 밖에 계신 예수님을 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셨고, 사시고, 죽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가셔서 다시 오실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다 성경기록이며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 밖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만을 듣고 배운 분들의 설교는 당연히 구약의 스토리 소개 또는 사복음서에서의 예수님에 치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서신서와 계시록은 상대적으로 설교 시 다뤄지는 비중이 현저히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다루더라도 교훈을 얻는 관점이지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사심"을 돕는 관점이 아닙니다. 한 번 이런 시각에서 주변의 설교들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밖의 하나님"이 "내 안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요1:12, 3:6, 고전6:17). 

그리고 이 '씨"가 우리 안에서 자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새겨지고(갈4:19),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그분의 영광의 몸처럼 변형시킴으로(빌3:21) 우리를 맏아들인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똑같이 만드시는 것(롬8:29, 요일3:2)이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서신서와 계시록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투명합니다. 성경공부해서 안 지식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야기 일뿐 아니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밭에 심겨져야 할 씨"를 심지는 않고 "저 지붕 끝에 대롱대롱 달아만 놓으니" 씨가 싹이 났다느니, 익어간다느니, 곧 추수를 할 것이라느니 등의 말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분이나 듣는 청중이나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 참되게 거듭난 분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자기들의 이야기"라는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들은 풍월로 아는 척을 할뿐입니다. 

주님이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사 '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그리스도)이 사람 안에 계신다는 성경말씀은 부지기 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이 열려있고 그러한 실제를 맛보고 있다면 많은 증거구절들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단 한 구절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몇 구절들을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롬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니라'(the spirit is life because of righteousness).

#골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갈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를 참되게 얻지 못한 채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실제로 얻었으나 그것을 믿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여 '못 얻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생명의 성숙"(엡4:15)은 자신 안에 가장 고상한 한 인격이 실재한다는 분명한 인식을 기초로 이뤄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세분들의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삼신론자들로 인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인격을 다 포함한 온전한 한 신격의 하나님 자신"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핵심진리가 한국교계에서 닫혀버렸습니다(요일2:22-25).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계에 고린도 교회처럼 성경지식과 말 잘함과 은사체험자는 많으나(고전1: 5-7) 생명이 성숙한 자는 희귀한 듯 합니다. 그 증거는 영적 어린아이들의 특징인 "분열"이 만연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3:1-4). 사실을 말하자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를 통해 주님이 계시하신 진리(생명 되신 그리스도, 생명의 충만인 교회, 교회의 최종완결인 새 예루살렘)는 상대적으로 매우 깊은 진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1) 생명 되신 그리스도 자신의 사람 안의 내주하심(마담 기욘) 
2) "주관적인" 십자가의 체험(고전15:45, 31, 빌3:10 제시펜 루이스) 
3) "주관적인 부활"의 체험(요11:25, 갈2;20, 빌3:11 오스틴 스팍스)의 진리의 해방과 실행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두 분의 사역이 통상적인 가르침들과 다른 면이 없지 않으나 그 이유는 "틀려서" 다른 것이 아니라 "진도"가 달라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말이 아니라 솔직한 고백입니다. 

참되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런 말들을 공개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자청해서 문제를 만들고 비난을 자처하겠습니까? 오 주님! 이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교제가 단 한 분의 마음중심을 움직여 좁은 생명길을 가고 바른 믿음의 길을 취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주님의 효능있는 피의 덮으심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8. 08:00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분별함 - (1)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이 글은 항간에 떠도는 '거듭난 사람 안에는 성령만 계시고 아버지와 아들 자신은 안 계신다' 또는 '예수님은 구겨지지 않는 한 사람 안에 계실 수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성경으로 바로 잡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로마서 8:10 본문과 이 구절을 해석하는 신뢰할 만한 신학자들의 글을 통해 다만 성령님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 하나님 전체>가 거듭난 우리 안에 계심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자신"도 계십니다. 

로마서 8장 10절 :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  

위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제한 사도 바울의 선포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평이하고 간단한 성경본문이 어떤 분들에게는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삼위 하나님 중 오직 성령님만 사람 안에 계실 수 있다'라는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이런 관념을 가진 분들은 위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이라는 로마서 8:10 본문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면' 또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면'이라고 해석하여 읽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아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안 계신다> 라는 자의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결국 이런 특정교리가 가미된 채 성경을 읽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지적 사고과정이 성경본문 내용과 정 반대의 이해를 가져오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상은 다음 이유로 비 성경적이며, 심지어 성령님이 계신 곳에 아버지, 아들은 없다며 삼위일체의 삼위를 각각 분리시킴으로 이단적입니다. 이런 분들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고'(빌3:8)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과는 전혀 다른 곁 길로 가다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의 불에 다 태워질 나무와 풀과 짚만 만들어 낼 것입니다(고전3:12-15).  

1)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를 말하는 성경본문들과 상반됩니다.  

** 고후13:5 :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 골1:27-28 :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 골3:4 :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 요일5:12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내주 하심'에 대한 성경근거는 이외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위 구절만으로도 우리의 생명 되신 아들하나님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거치신 후 거듭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2) 로마서 전체문맥과 8장 10절 본문이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Christ...in you)라는 위 성경본문은 로마서 전체의 핵심내용입니다. 즉 로마서 3장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 그분의 피를 흘리시도록 십자가 위에 계심을 말하고, 4장은 그분이 부활 안에 계심을, 6장은 우리가 그분 안에 계심을, 8장은 이제 그분이 우리 안에 그 영(The Spirit)으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롬8:10 에서 바울이 '그 영'(the Spirit)을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Christ)를 말한 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영이시며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실(fact)에 따르면 그분은 그리스도시며, 우리의 체험(experience)에 따르면 그분은 그 영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분을 체험함에 있어서는 그분은 그 영이시며, 우리가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부르고, 그분에 대해서 말할 때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지만, 그분은 그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러면 당신들은 2격 아들하나님이 3격 성령님이라는 식의 위격 간의 혼동(양태론)을 주장을 하는 것이냐?' 하는 의혹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접한 롬8:10의 '그 영이신 그리스도'는 바로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이십니다. 또한 이 <생명 주는 영>은 문맥을 볼 때 <부활하신 아들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부활 전에는 육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즉 이 분은 다만 2격만이 아니라 신격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분(골2:9)임으로 그 안에 아버지와 성령님도 구별되나 분리됨 없이 상호내재 하시는 '온전한 하나님'(complete God)이십니다. 또한 이 생명 주는 영은 주님 부활시 그분의 인성을 벗어버렸다고 이단적으로 믿지 않는 한, 빌립보서 3:21이 말하는 '영화롭게 된 몸'을 포함한 영이십니다.

3) 신뢰할 만한 신학자들도 롬8:10 주석에서 그리스도 자신을 포함한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가 우리 안에 계심을 말합니다. 

 우선 현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을 강의하는 권성수 교수님의 해석을 소개합니다. 

로마서 강해I - 권성수 교수

'(롬8:10 주석에서)...그리고 성령이 거하신다는 말은 바꾸면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이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요한 복음 14:23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를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가 우리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거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권성수, 로마서 강해I(롬1-8장),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8, 405쪽). 다음은 요한 크리소스톰(347-407)의 견해입니다. '(롬8:10 해석)...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로마서강해 - 요한 크리소스톰

곳에는 그리스도 또한 있다는 뜻도 됩니다. 삼위의 한 위가 있는 곳에 삼위 전체가 있게 됩니다. 삼위는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이 전체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가진 것이며 천사와 함께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속에 살게 됩니다.'(요한 크리소스톰, 로마서 강해, 송종섭(총신대 졸업) 번역, 지평서원, 1990, 272쪽). 

 위와 같은 성경본문들과 신학자들의 주장을 볼 때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안 계시다>는 항간의 주장은 명백히 비 성경적이며 매우 위험한 이단사상임이 밝혀졌습니다.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은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신 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구별되나 분리됨 없이 상호내주 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무책임하게 말하는 '그리스도 자신은 우리 안에 안 계신다'는 거짓교리를 냉철하게 분별하고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0.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1)


1. 저는 여러 체험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비밀들을 사도들에게는 열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만졌습니다(고전2:7-10). '맏아들이신 주님'을 아는 것은 이렇듯 신랑 되신 그분의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제한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신약의 결론 - 그리스도

(골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설명할 때 '측량할 수 없는''(the unsearchable riches)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엡3:8). 그는 또 '그리스도와 교회'가 큰 비밀(a great mystery)이라고 말합니다(엡5:32). 신실한 성경 교사들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710쪽 분량)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400개 이상의 명칭을 신구약에서 찾아내어 각각에 대해 풍성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이 출판한 찬송가 집에는 단 한 장(388장)의 가사에서 주, 생명, 능력, 지혜, 공의, 성결, 구속, 평안, 기쁨, 소망, 안식, 빛과 길 등 그리스도에 대한 70 가지 이상의 방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에 있어 위대한 비밀임으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데 온 일생을 쏟아 부었습니다(엡3:18-19, 빌3:7-14).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안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구주 예수의 사랑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외에도 성경이 보여주는 비밀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방면들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고 사도들도 힘써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어떤 방면들을 말하면,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들의 '교리집 내용'에 없다며 받아들이려 하질 않습니다. 이런 태도들은 '작은 신발에 큰 발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려면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가 배운 교리,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을 성경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높이는 분들은 비밀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춘 분(벧전5:5),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분(고전2:9),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마음 눈이 밝아지길 간구 하는 분(엡1:17-18), 영 안에 있는 분(계1:0)이라야 풍성한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각 방면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비 된 분들에겐 이런 주제에 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큰 진보를 체험케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3)  교파와 주의회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교파에 계시다가 회복된 교회생활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전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밖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방면이 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쉽게 풀리고 "체험되는" 교회생활은 많은 지체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전에는 경험치 못했던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을 가져오는 주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the first-born)(롬8:29), 또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the last Adam became the life-giving Spirit)'(고전15:45) 라는 말씀에 대한 빛과 체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면, '보좌 앞의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이 땅 위의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한 머리요 몸이신 그리스도(행9:4, 엡1:22-23, 골1:18), 믿는 이 안과 보좌 위에 동시에 계시는 그리스도(롬8:10, 34),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인자(요1:51, 창28:12), 이 땅에 보내심 받았으나 여전히 하늘 아버지 품속에 계신 아들(요1:18),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 아들(요3:13절 KJV원문),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요7:39) 등의 난해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런 말씀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는 더 이상 난해구절들이 아니며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체험하는 친근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닮아 갈 원형이신 '맏아들'(롬8:29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빗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매 순간 주의 영을 바라봄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간(고후3:18)에 저 하늘 어디 천당 갈 꿈만 꾸며 헛된 일에 시간낭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라는 시험문제를 받아 놓고도 토끼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수험생은 시험종료 벨이 울리기 전에 빨리 바른 상황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진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 모두를 '맏아들' 또는 '생명 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8. 05:00


복음의 확증 (6) 창조주이시자 피조물이신 그리스도


위트니스 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만 창조물이실 뿐 참 하나님은 아니시라고 가르친다는 거짓 비방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비방은 위트니스 리가 첫 번째로 감내해야 했던 비방으로서, 그 시기는 그가 대만과 홍콩에서 사역을 수행하던 195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트니스 리는 골로새서 1장 15절의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는 표현을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신 것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했는데, 그 당시 그의 젊은 동역자 중 일부는

Arius

마치 그가 4세기의 아리우스 (Arius) 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며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비방은 주로 극동 지역에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현재의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았지만 서양의 독자들은 대부분 그가 의미했던 바를 제대로 이해해 왔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래에 소개해 드릴 몇 가지 예문만으로도 그의 실제 관점을 충분히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 분이라는 것은 그분이 모든 피조물 중 첫 번째 라는 뜻이다. 아리우스 (Arius) 이단 때문에 골로새서 1장 15절의 이 요점을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성경 교사들은 많지 않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신성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니며 오히려 영원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가르치면서 골로새서 1장 15절을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의 근거로 삼았다. 역사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그의 이단 때문에 정죄받고 쫒겨났으며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했다. 아리우스의 이러한 이단적인 가르침때문에 니케아 회의 때부터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성경 교사들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문자적인 번역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리우스 같은 이단이라는 정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58년부터 나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자 피조물인 사람이시므로 명백히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피조물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글들을 출간해왔다 <장로 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22-23쪽). 

이 요점에 관해서 우리는 교회사 가운데 아리안 주의 (the Arians) 라는 이단 종파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아리안 주의자들은 비록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영원 안에서는 하나님이 아니셨고 어떤 시기에 하나님이 되셨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4 세기의 아리우스 (Arius) 에게서 나온 이단 종파에 속한다. 

아리우스는 골로새서 1장 15절 하반절의 말씀, ‘그 (아버지의 사랑의 아들) 는…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시므로 하나님의 동일한 본질 (헬라어 ousia) 를 갖고 계시지 않으며, 비록 우주와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지만 (히1:2, 요1:3) 그분의 존재는 영원하지 않고 시작이 있는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시므로 아버지와 동등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심각한 이단이다. 

하나님의계시와 이상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임을 믿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믿음은 아리우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순수한 계시에 따른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분의 인성에 따라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한다. 그분의 신성에 따르면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 창조자이시지만 육체가 되셔서 몸을 입으셨으므로 또한 인성을 소유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인 면에 있어서 인성을 갖고 계시고 피조물이시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8-39쪽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창조주이시나, 사람으로서 피조물이시다. 만일 그분이 피조

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물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피와 살과 뼈를 가지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지 않았는가? 피와 살과 뼈가 있는 몸을 입지 않으셨는가? 정녕 그러하셨다…우리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 전에도 하나님이셨고, 항상 하나님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육체 되심을 통하여 사람이 되셨다. 만일 그분이 사람이 되시지 않았다면 붙잡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으셨을 것이고,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라는 진리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자!<(골로새서 라이프 스타디>, 81 쪽

단지 위트니스 리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라는 구절을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했다 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좌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아리우스도 이 구절이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그는 위트니스 리와는 달리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는 자신의 잘못된 관념을 ‘입증하기’ 위해 그러한 해석을 사용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수없이 많이 가르쳤고, 골로새서 1장 15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 결코 이 진리를 훼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왔습니다. 더 나아가, 위트니스 리가 이 주제에 대한 대다수 현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르지는 않지만, 최소한 어떤 면에서는,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닙니다. 
삼일성과 기독론에 대한 정통 관점을 수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아타나시우스 (Arianos 2.62-64), 닛사의 그레고리 (Eunom. 2.8, 3.3; Perf),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Thes. 25; Trin. Dial. 4; 6) 과 같은 성경 교사들도 이 구절이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의 일부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인식했습니다. 
이들 중 첫 번째 사람인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에 반대하여 논쟁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께서 창조물의 일부라는 사상을 접지 않았습니다. 그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어떤 면에서는 창조물의 일부라고 보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그의 주요 주장을 훼손시키지는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위트니스 리 역시 이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인간 존재라는 신분이시므로 창조된 영역의 일부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1:26

지방교회 영상 - 하늘에 속한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4.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3) - 성령보다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한다면서요?

- 지방교회 측이 믿는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누구십니까? 


 지방교회측 성도들이 믿는 그리스도라 음...한 마디로 말자면,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사람' 즉 하나님-사람 (God-man)이십니다. 

  -그쪽에서 나온 책에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근거가 있나요? 꼭 이런 식으로 복잡한 표현들을 써야 하는지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The All Inclusive Christ)라는 말은 사실은 책 제목입니다. 신명기 8장의 단 몇 구절 내용을 가지고 책 한 권을 쓴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그리스도로 보고, 그 땅의 젖과 꿀을 포함한 다양한 소산물들은 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본 것입니다. 신약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라고 한 골로새서 3장 11절, 그리고...골로새서2장 16-17절의 '먹는 것, 마시는 것, ....안식일 등은 다 그림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도 근거 구절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그리스도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체이시다' 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귀측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론이 있나요? (지방)교회 측은 체계적인 신학이 없다고 많이들 알고 있던데... 

저희도 '그리스도'(위트니스 리, 한국 복음서원)라는 단행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언급한 거의 모든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아 내어 그 본문의 의미들을 해설한 것이지요. 약 700 여 쪽 되는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목차를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역사'(work)를 두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라 함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주시다 뭐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구주'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이 그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골2:2).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도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계4:5). '교회의 머리'(골1:18), '처음과 마지막'(계2:8)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친히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계22:13), 또는(나는...이다' (I Am, ego imi)라고 소개한 적도 있으십니다(요8:24). 이런 모든 명칭들의 성경근거와 의미를 '그리스도'라는 위 책이 설명하고 있지요. 

  -아, 그래요. (지방)교회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것을 믿으시나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이런 구속의 역사는 물론 예수님의 성육신, 인생을 사심, 죽음, 부활, 승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 혼을 변화시킴, 몸을 변형되게 하심 등도 그분의 일하심의 내용이요 결과라고 믿습니다. 

  -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좀 물어보겠습니다. 보통 기성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많이 이야기 하고 성령 충만 받는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방교회 책으로 보거나 그쪽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성령보다는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하는 것 같던데요. 

 매우 관찰력이 뛰어나신 것같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같은 (지방)교회 주축 성경교사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 사역의 성취를 강조하다보니 그런 면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되심,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거처를 정하심, 그리스도의 충만인 교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우리의 낮은 몸도 변형됨.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됨 등의 신약의 핵심진리는 다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성령님의 역사를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개역성경이 '성령'이라고 번역한 구절들의 상당부분이 꼭 제 3격 성령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거나 또는 영이신 하나님 자신 또는 심지어 사람의 영(또는 연합된 영)을 가리키는 곳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주는 영'과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인가요? 이 점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것같던데요. 

예. 안 그래도 이 주제는 별도로 다루려고 생각합니다만 우선 생명주는 영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에 근거한 말이고요. 그 의미는 '마지막 아담'은 부활 전 예수님을,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부활 전 예수님, 부활 후 예수님이라구요? 예수님은 부활 전이든 후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아닌가요?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던가요? 

예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사람이시다 라고 서두에 말했던 것 생각나세요? 그분이 하나님이신 방면에서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이신 방면에서는 부활 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부활 후에는 문을 닫고 있어도 들어 가실 수 있고, 사람의 눈에 보이셨다가 갑자기 안 보이실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차이가 바로 마지막 아담과 생명주는 영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잠시 후 다시 뵙지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1. 11:29

 

성경말씀

(창49:8~9)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계5:5上) 그러자 장로들 중에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오늘의 만나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그림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자는 산에 거합니다. 먹이를 구할 때, 사자는 산에서 내려옵니다. 사자가 자신의 먹이를 붙잡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때는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이를 취한 후에, 사자는 먹이를 가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라는 말씀은 사자가 그 먹이를 삼키려고 산 위로 올라갔음을 뜻합니다. 먹이를 먹은 후 사자는 더 이상 웅크리지 않습니다. 대신 사자는 드러누워 휴식합니다. 여러분의 체험 가운데 사자 새끼이신 그리스도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또한 누워 휴식하고 있는 만족하는 사자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십니까? 수년 전 내가 젊었을 때 여러 무리의 반대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원수들이 벌써 나의 그리스도에게 먹이가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나의 성질과 문제들과 약함들 그리고 나의 모든 반대자들이 그리스도의 먹이였습니다. 이제 하늘에서 그분은 더이상 싸우지 않으시고 휴식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누워서 안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도 또한 그분을 안식하는 사자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휴식하시고 나 또한 안식합니다.

출처 : 창세기 라이프스터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7. 16:10

성경말씀  

(엡4:21~24)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들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실재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옛사람 곧 그 속이는 것의 욕정에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 버린 것이며, 또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어 새사람 곧 하나님을 따라 그 실재의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침례 받았을 때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침례를 받았을 때 매장되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의 ‘생각의 영’은 믿는이들의 거듭난 영으로서, 그것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연합된 영은 우리 안으로 확산되어 우리의 생각의 영이 됩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하여 새롭게 되는 것은 그러한 영 안에서입니다. ‘새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그분의 몸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이 아니라 단체적입니다. 이 단체적인 새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는 만유이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즉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고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옛사람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나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은 없었던 반면, 새사람은 내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 지방교회들, 생명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5:10
성경말씀  

(창1:26上)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고후4:7上)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에게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만들어졌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최고의 생각과 최고의 의지와 최고의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그렇게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손과 장갑의 예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의 손에는 하나의 엄지손가락과 네 개의 손가락이 있으며, 장갑에도 하나의 엄지손가락과 네 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장갑의 엄지손가락도 엄지손가락이지만 진짜 손가락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생각을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장갑의 빈 엄지손가락과 비슷합니다. 그리스도의 생각은 사람의 진짜 엄지손가락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 역시 빈 엄지손가락과 같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지혜는 실재의 엄지손가락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실재의 엄지손가락이 장갑의 엄지손가락 안으로 들어갈 것이며, 이때 두 엄지손가락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는 모양 즉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실재 즉 내용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6. 14:20
성경말씀 

 (마5: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여러분을 비난하고 박해하고 거짓말로 여러분을 반대하여 온갖 악한 말을 할 때에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은 사람의 천연적인 성실과 고상함을 볼 때 그것들을 감상하고 존경하며 신임을 표합니다. 그러나 일단 세상은 우리 안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즉 우리가 참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면 즉시 그것에 대해 적의(敵意)를 갖습니다. 세상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열매를 보여 주면 세상은 칭찬을 할 것이지만, 세상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보여 주면 세상은 극히 반대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세상이 마음대로 발전하도록 놓아둔다면, 그것은 결코 한 명의 그리스도인도 산출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성실, 그리스도인의 예절,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산출하기를 갈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의 문명은 세상으로부터 감상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용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명, 곧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세상은 이 생명을 만나면 틀림없이 이 생명을 반대할 것이며 그것을 사지(死地)에 놓으려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