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6. 18:35

성경말씀

(시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오늘의 만나

 주님은 마음에 자기가 알고 있는 뚜렷한 죄를 품고 미련을 두고 남겨 둔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이러한 방해가 있으므로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습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마음 속에서 어떤 죄에 대해 미련을 두고 스스로 알면서도 계속 보류해 둔다는 말입니다. 이는 행위와 겉모양에 악함이 있을 뿐 아니라 마음에 그것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 있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에게는 실패가 있었지만 그는 그 행함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66편 18절에서 말하는 사람은 마음에 그 죄를 품고 그것에 미련을 두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죄의 행위를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죄를 마음 속에서 버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죄가 한 가지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버리기 아까워하는 죄를 마음에 남겨 두지 말고 모든 죄를 죄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피 아래 두어야 합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3:35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 6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저기요. 제 친구 한명이 지방교회를 다닙니다. 한번은 그 친구와 함께 지방교회 나가는 분들과 식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기도를 한 사람만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하더라구요. 좀 생소했지만, 그것은 이해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안 붙이는 것은 왜 그래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 어떤 때는 붙이고, 어떤 때는 안 한다니요? 성경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되어 있지 않나요? 
아 예, 기계적으로 하지 않고 융통성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안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만 한 상황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영의 인도를 따라서 융통성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을 언급한 성경구절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전후문맥을 잘 보면 기도할 때 항상 그런 말을 끝에 붙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통교단에 속한 곳은 거의 다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마치지 않나요? 가능하면 이질적으로 보이기보다는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같은데요.
 맞습니다. 저희도 핵심진리에 반하거나 죄 짓는 실행만 아니라면 덕이 되는 쪽으로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성경 문맥의 의도와 다르게 실행할 경우, 적극 동조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더군요.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이는 것이 해당 성경 문맥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라>는 취지의 말씀은 요한복음14:13-14, 15:16, 16:23-24 에 있습니다. 이 본문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요, 우선 기도시 맨 끝에 그런 ‘후렴구’를 꼭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글에 검색을 해 보니 의견이 나뉘더군요. 어떤 분은 그렇게 안하면 기도에 효력이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주장 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꼭 기도할 때마다 그 ‘후렴구’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융통성을 두는 쪽도 있었습니다.

-정통교회 나가는 분들 중에 꼭 안 붙여도 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예, 두 가지 예를 소개드려 보겠습니다. 한 분은 고신대 대학원 교수로 계신 변종길 교수님입니다. 이 분이 <크리스챤 Q&A >라는 곳에서 답변하신 것 중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꼭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안 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성급하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칼빈의 기도에 보면 이런 문장이 없는 것이 많습니다.” http://www.christianqna.org/bbs/board.php?bo_table=z3_3&wr_id=829
다음은 이광호 목사님 답변 중 일부인용 입니다.
“…기도 마지막에 그런 후렴구로 마무리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후렴구를 붙이지 않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올바르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마음대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이거나 도용하는 것이 되며, 지나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연결이 됩니다. http://www.siloam-church.org/lecture/sesin/sesin195.htm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도 끝에 그런 후렴구를 붙이는 것만 듣고 자라와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줄 알았지 솔직히 이 문제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일단 정통 교회 신학자가 심지어 칼빈 기도문에도 그런 후렴구가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렇게 안 하면 이단 뭐 이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사실 성경에 쓰여진 기도문들에도 그런 후렴구가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선 주기도문도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마6장). 그리고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일심으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는 심지어 ‘아멘’도 없습니다(24-30절). 또한 사도 바울의 경우도 에베소서에서 두 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1장의 기도(17-19절)나 3장의 기도(14-21절)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없이 그냥 아멘으로 끝납니다.

- 그런데 기도할 때 아버지 하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기도라고 하는 목사님도 있더라구요.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런 논리라면 위에서 소개드린 성경본문들도 문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할 때, 누구를 생각하나요? 삼위의 1격만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레인 뵈트너라고요 개혁신학을 공부한 분들은 다 아는 정통 신학자는,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성부만 배타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성자, 성령이 포함된 <삼일 하나님>(Triune God) 전체를 가리킨다 고 말합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니까 이 분이 한 말의 영어원문을 직접 소개해 보겠습니다.
“When the word "Father" is used in our prayers, as for example in the Lord’s prayer, it does not refer exclusively to the first person of the Trinity, but to the three Persons as one God. The Triune God is our Father. ( 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107쪽)
사실은 이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왜냐하면 삼위 하나님은 셋으로 구별되시지만 결코 분리된 분이 아니니까요. 한국교계 내에는 무의식중에 세 하나님들을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 그냥 가볍게 물어본 것인데, 뭐 삼위일체도 나오고 좀 복잡하게 되돌아가는 것같아 좀 그렇긴한데…좀 정리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도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를 꼭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그 구절의 전후 문맥이 의미하는 내용이 기도에 담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뭐 이런 것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면 ‘내 이름 안에서’라는 문맥이 뭘 의미하나요?
 우선 요14:13절만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또 여러분이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위 말씀에서 ‘내 이름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한데, 이 말은 ‘주님의 인격(이름)과 연합된 상태’에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18:20의 ‘두세사람이 네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는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위 ‘이름 안에(안으로)’에 대한 회복역 성경 각주 취지는 집회에 올 때는 ‘우리를 점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문제들과 일들에서” (나와서) “그분의 풍성한 임재를 누리는 상태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쉽게 말해서 몸은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생각은 다른 것에 빠져있지 말고 거기서 나와서 모임 안에 임재하시는 주님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사실 위 요14:13만 봐도 나의 필요, 나의 선호와 갈망을 이것 저것 구한 후 끝에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째 “다 이뤄 지지도 않고”, 둘째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지도 않음”으로 위 본문에 따른 기도가 아닙니다. 대신에 주님의 뜻과 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이 원하는 것을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의 인격과 연합되어 마치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직접 기도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뜻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도 되고 아버지 하나님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기도를 하려면 쉽지는 않겠네요. 예수님과 하나되는 상태라든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에 맞춰 기도하라는 말씀이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희도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저희의 기도생활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늘 배우고 있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저도 많이 배웠네요. 나중에 위에서 소개해 주신 본문들을 좀 차분히 살펴볼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질문에 성심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사실 후렴구를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하는 진리 자체는 깊은 연합을 전제한 것이라 신약의 핵심진리에 해당될 수 있지요. 사실 요한복음 14-16장은 그런 연합사상을 담고 있어서 겉보기보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도 사실 이런 교제가 쉽지 않은데, 무익한 변론으로 빠지지 않고 좋은 대화로 마무리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4. 26. 05:00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캘리그라피 - 우슬초 / 찬송가 - Shulammite Son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5. 10:23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놓거나 하나님으로 하여금 억지로 무엇을 하시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신다.(마7:11) 그러나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과 공의에 참여케 하시려고 그분의 성결과 공의로 우리를 다스리신다(히 12:7-8).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 않는 것은, 때로 그분이 우리를 과잉 사랑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때로는 우리에게 잘못이 있고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닌 다만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시려는 것이고,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뛰어나며, 그분이 보좌에 앉으신 분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위격을 알고 경배하게 하며, 그분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중언부언하며 떠든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일이다(마 6:7). 우리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Watchman Nee)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4. 24. 18:51


자매집회 - 국제중국어집회 M5 한 새사람을 위해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허락하고,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도록 하며, 기도에 꾸준히 힘씀 - 지방교회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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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4. 20. 12:33

<미국에서 주님의 회복의 50년 역사>

1962년 미국에 주님의 회복시작. 주님의 일의 시작은 기도로부터 시작했다. 말씀사역 이전에 기도가 있었다. 이것이 역사이다.

62년5월 LA교회시작.
1962년 11월 학생들과 함께 기도함.
1962년 12월 3주간의 기도.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 특별집회 후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2.1일부터 3주간 가능한 모든 교회가 참가하여 기도했다. 우리의 필요가 아닌 하나님의 필요를 따라 하루에 1시간 모든 교회가 기도하길 권했다. 3주후 성도의 영이 높이 올라갔다.  그후, 매일기도했다, 가정열고 기도했다. 놀라운 간증이 있다. 기도항목에 따라 강하게 기도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그들은 찬송하며 길을 걸었고, 저녁에는 집에서 찬송이 울렸다. 우리에게 부흥을 주셨다. 어떤 곳은 인수가 500에서 700명으로 증가했다. 기도할 때 부흥이 있게 된다. 매일저녁 가정 집회를 가졌다. 기도의 영이 강한교회는 5시에 일어나 2시간을 기도했다. 오직 기도했을 때 성도의 영이 강화되었고, 교회를 강화시켰다. 장로의 기도가 강화될 때 신선해진다. 말씀 전함보다 기도하길 더 강조했다. 기도가 더 중요하다. 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가 있어야 한다. 인도하는 형제들은 자주모여서 더 기도함으로 성도들이 배우도록 해야 한다. 기도생활을 인도해야한다. 전투는 기도로 하는 것이다. 영적전쟁은 영에 의해 수행 되어야한다. 기도는 계속 되어야한다. 우리는 강화되고 더 높이 올라가야한다. 부흥은 곧 기도이다.

첫째, 기도에 힘써야 한다. 꾸준히 계속하는 것만이 효과적이다. 깨어서 기도로 지켜야 한다 멈추지 말아야한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기도를 배워야한다. 기도는 배워야하는 기술이다. 부담을 붙잡아 우수하게, 효과가 있도록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기도할지를 배워야 한다.

셌째, 분명한 항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분명한 요점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기도할지를 알아야 한다. 수많은 기도가 같을 때 몸의 느낌이 있다.

넷째, 기도의 생활로 기도의 사역이 되도록 전진해야 한다.

다섯째, 인도자가 본이 되어야 한다.

여섯째, 두세 명의 기도를 강화시켜야 한다. 전화, 장소, 시간의 제한 없이 쉽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활력그룹을 강화시킨다.

일곱째, 교회의 기도집회가 높이 올려 져야한다. 주님의 상 집회 다음으로 제일 중요한 기도 집회이다. 다음 10년을 위해 다니엘들이 되어 기도하자.

기도는 곧 부흥이다. 2018년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2012.장로모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