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4. 05:00

개혁신학과의 대화(3)-교회의 연속성, 불연속성

 

개혁 교회의 교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벨직 신앙고백[1] 제 27조는 교회가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A.D. 1세기에 사셨던 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16:18)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차 출현할 교회를 말씀 하십니다. 누가 봐도 출발선부터 현저하게 다른 이 두 교회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신학 진영은 전자 즉 ‘세계의 시작부터 있어 온 교회론’을 선호하는 반면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후자 즉 주님께서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건축을 신앙 생활 의 주된 목표로 가르칩니다. 그 결과 양 쪽은 교회론을 놓고도 일부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2]이 글은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론에 대한 쌍방의 이해의 폭을 넓힐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1. 교회의 정의들 
 

케빈 글레스는 ‘
신약성경 교회론[3]에서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고 말합니다(15쪽). 이어서 그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은 점”을 그 불확실성의 주된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소 논문에서 여러 분파들마다 “자기들의 언어로”  “교회를 정의 하고 있다” 고 같은 맥락의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4]   이처럼 비록 ‘교회’라는 용어는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현실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일치된 교회론을 갖지 못하게 하는 1차적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5] 성경은 통상적으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벧전 2:9, 행7:38), 에클레시아(마16:18),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충만 (엡1:22-23), 하나님의 권속(엡2:19), 새 사람(엡2:15), 그리스도의 비밀 (엡3:4, 6, 5:32), 그리스도의 신부(엡5:23-32, 고후11:2, 계21:2), 군대(엡6장),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딤전3:15) 등으로 표현합니다.[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이 모든 교회 정의들이 심도있게 검토된 최소한 100권 이상의 교회론 관련 저술들을 남겼습니다.[7] 

2. 구약 교회의 연속성 
소위 ‘교회의 연속성’ 문제는 교회가 신약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전제한 개념 입니다[8].  개혁 신학이 신 구약을 통틀어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구별된 무리들(에클레시아)’[9]을 ‘교회’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도 그것이 신약 교회의 예표[10]라는 전제 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신 구약 교회가 연속성 또는 동일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신학자들처럼 구약 교회 구성원들 안에도 신약 교회 성도들과 똑같은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11]가 있었다는 전제아래, 신 구약 교회의 동일 본성 또는 연속성을 주장 한다면  그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관점은 개혁 신학 진영 자체 내에서도 이견이 있는 소수 의견 으로 보입니다[12]

  3. 구약  교회의 불연속성   
대부분의 개혁 신학 지지자들은 비록 벨직 신앙고백 이 정의하는 영원 전부터 있는 교회를 인정하더라도, 그것과 오순절 이후 출현한 신약 교회와의 사이에 상이한  불연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흔히 거론되는 상이점들, 즉 불연속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복 16 18절의 교회:
 주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그것도 미래시재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
I will  build my Church)(마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예표적으로 나타난 소위 구약 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정석 교수님도 이 구절의  “전후문맥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위에 건설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 
  2) 사람인 교회
 교회의 주요 방면들 중 하나인 ‘새사람’은, “규례들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 안에서 없에 버리신 후” (엡2:15)에 “창조되었습니다.”( 2936, 크티조).” 통상 구약 교회는 이방인들이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만을 지칭하나, 새 사람인 교회 안에는 헬라인, 유대인 구별이 없습니다(골3:11). 
  3) 그림자 교회와 실재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3장 강해에서,  “구약 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신약교회가 도래한 이후)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1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역시 고린도 전서 10장 본문을 해석하면서, 대표적인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이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신약의 믿는 이들의 예표로서 다룬다”고 말했습니다.[15]  
 4)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교회가 세워짐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교회론 강의록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16] 그러나  대표적인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결코 고백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17] 사울과 회심 후의 바울이 좋은 예입니다. 

  4. 결론  
 서철원 박사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는 말씀에 따라 “교회가 곧 그리스도 라고 말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18]  그런데 어떤 형태의 구약 교회도 주 예수님께서 ‘나’ 라고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신 구약 교회는 차별성이 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한,  ‘교회가 그리스도’ 라는 위 고백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인 면과 달리, 설교자(목사)의 지위, 예배 형식, 예배당 등 비 본질적인 면에서는 지방 교회 측의 실행이 개혁 신학 진영과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19]. 그러한 차이는 두 성경 교사가  본  성경적인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의 불가피한 산물일 수 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쌍방은 다음과 같은 칼빈의 권면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라든지, 그리스도가 신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는 것과 같은 신앙은 매우 필수적이지만...다른 교리들은 이견이 있어도 신앙의 하나 됨을 파괴하지 않는다 . ..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열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21]

[2] 이외에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교회론은 1) 목사 제도 부인, 2) 지방 입장과 관련된 배타적 교회관, 3) 계시록 17장의 ‘큰 바벨론’ 해석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왜곡된 정보 제공에 기인된 면이 크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1) 성경대로 ‘복수의 장로들’이 지역 교회를 인도함(행14:23, 딛1:5)(장로교 헌법에 따르면 목사도 장로 중 하나임), 2) 지방 교회(행8:1, 계1:11) 즉,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을 그 지역 내 교회의 일원으로 보는  포용적인 교회관을 가르침(그럼에도 이단 감별사들은 ‘지방 교회’를 ‘두 성경 교사들을 따르는 사람들만’으로 왜곡시킨 후, 자기들만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주장한다고 비판함). 3) 로마 천주교를 배도한 음녀요 바벨론으로 보는 것은 근본주의 성경 교사들은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 신학 자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3] 신약성경 교회론’(What on Earth Is the Church)은  30년 이상 교회론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한국어판은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1999년에 출간되었다.
[4]이정석 교수님의 교회관련 소논문( http://blog.daum.net/tznine/517485 ) (교파마다 다른 교회의 정의) 6-1. 교회론 1. 교회란 무엇인가.hwp
[5] 케빈 글레스는 같은 ‘에클레시아’에 대하여 개신교는 다만  ‘모임’을 의미함으로 (그 숫자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다 교회라고 하고, 또 어떤 개신교 학자들은 “구약에서넘어온하나님의백성의미하는전문용어”라고 하고,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그리스도의으로 정의”하는 각기 다른 해석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위의 책, 23쪽). 또한 고신대학교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교육자료 중 하나 (http://www.kirs.kr/ )는 “가시적 교회는 최종적인 구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에 적을 두거나 출석하는 모든 교인들을 다 포함한다”라고 하여 교회 개념 안에 ‘불신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케빈 글레스는 어거스틴에 기원을 둔 이 ‘가시적 교회, 불가시적 교회’구분이 “수 세기에 걸쳐 논쟁이 되고 있으나 결론을 못내리고 있는 말썽 많은 분야” 라며, “신약에서는 결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말한 적이 없다”라고 적고 있다(위의 책, 280쪽 참조).
[6] 폴 미니어(Paul S. Minear)는 신약성경 안의 교회 이미지라는 책에서 신약 안에는 96개의 교회의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567 ).
[7] 두 성경 교사의 ‘교회’관련 저술들은 이곳을 보라 ( http://www.ministrybooks.org/categories.cfm ). 특히 지방 입장(local ground)에 대한 가르침은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워치만 니가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주장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local-church.tistory.com/1374 ).
[8] 옥한흠 목사님은 사도행전 7장 38의 ‘광야교회’를 구약 교회로 보았다. “흔히들 교회는 신약 시대에만 있고 구약 시대에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임도 '교회'라고 표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왜 광야교회라고 했을까요?...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낸 생활 전체를 교회 생활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흔히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 시대의 교회나 구약 시대의 교회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옥한흠, 교회는 이긴다, 국제제자 훈련원, 2012, 273~274 쪽).
[9]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의 모임도 원문은 ‘에클레시아’(행 19:32, 39, 41)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에클레시아가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교회는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워치만 니는 자신이 쓴 영광스러운 교회에서 성경에는 교회와 관련하여 네 여인- 하와

영광스러운 교회

(창2장), 교회 (엡5장), 이상 안에 보여진 여인(계12장), 어린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계21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중에
하와는 에베소서 5장에 있는 한 여인교회의 예표 고 말한다.
[11] 구약 시대에도 신약 교회와 동일한 방식의 성령의 내주가 있었는지 여부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루고자 한다. 참고로 개혁 신학자인 에드먼트 클라우니는 자신의 저서 교회(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6)에서 “그리스도께 연합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 후, “구약의 성도들이 주님과 맺은 관계는 오순절 이전에도 성령의 임재를 필요로 하였다”라고 하며 삼손, 사울 등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예로 제시한다(61쪽). 그러나 이것을 구약 시대의 성령의 영속적인 내주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첫째, 그는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내다보았다” 라고 적고 있고(61쪽), “구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약속한 것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받지는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62쪽). 둘째, 그는 ‘성령의 임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성령의 내주’라는 말은 사용하지는 않았다. 셋째 그가 예로 들은 삼손과 사울에게 임했던 성령의 임재가 항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12] 혹자는 김홍전 박사 등이 이런 입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13] 위의 논문 참조
[14]구약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마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걷지 못하는 자처럼 어떤 면에서는 소극적인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잘 체험하지 못하는 교회요, 항상 수동적으로 끌려 가는 교회였습니다…구약교회는 그림자 교회로 이제 끝났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신 다음부터는 구약 교회에서 신약교회로, 수동적인 교회에서 능동적인 교회로, 앉아 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로, 입 다물고 있는 교회에서 소리치는 교회로, 성전 밖에 있는 교회에서 성전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교회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옥한흠, 위의 책, 125쪽).
[15] 신약성경 회복역 고전10:6 각주 2 참조( 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
[16] 서철원, 신학지남, 1996년 가을호(통권 248호) 221쪽의 ‘교회의 정의’ 부분을 보라. 그는 또한 ‘교회의 본질’이라는 소제목 아래서 “아브라함 카이퍼가…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했기에 선택 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성립의근본진리는그리스도와의연합이다.” 라고 말함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교회론을 완곡하게 비판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교회 존재 시점을 “세계의 시작부터” 로 보는 벨직 신앙고백 제 27조가  이러한 선택교리에 근거한 고백이라면, 창세 전의 선택 단계만으로 교회가 이미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동일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17]  사도행전 9장 22-23절은 사울이 회심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자, (구약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이 당황해 했고 사울을 죽이려고 모의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반된 관점을 가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믿는 이들을 같은 본질을 가진 동일한 교회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18] 총신 대학교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안 참조
[19] 설교자, 예배 방식, 예배당에 대한 워치만 니의 관점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

(사역의 제고)을 참조하라( http://www.ministrybooks.org/books.cfm?id=245CCC 영문 ).
[20]통상적으로 개혁 신학은 성경적인 교회의 표징으로 1) 말씀선포, 2) 성례전의 집행, 3) 권징을 든다. 그런데 소위 지방 교회들은 매 주일 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중심으로 한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과 성 만찬 시행을 동시에 하고 있고, 비교적 강력한 권징을 시행하는 편이다. 참고로 ‘지방 단위의 개 교회 개념’은 한 교회에서 징계를 받거나(받을 것 같으면) 그 교회 혹은 교단을 탈퇴하거나  다른 교회로 옮겨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하는 편법이 구조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한 몸의 지체 의식을 강조함으로 각 지체들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하기를 힘쓴다. 따라서 주일 예배에서의 말씀 선포도 고린도전서 14장의 권면을 따라 어느 특정 설교자가 할  설교 내용을 여러 지체들이 분량껏 나누어 하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조화되기를 목표로 시행한다(고전 14: 4, 26, 31).
[21] 이정석 교수님의 위 논문, 기독교 강요 IV. i. 12 참조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에클레시아 교회론에 대한 간략한 반박 (4) - 개혁교회 교회표지와 불일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9.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3)


2. 신약교회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할 에클레시아 개념들

신약에서 교회 (Church)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물론 70인 역 구약에서도 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에클레시아가 우리가 현재 토론하는 대상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가 염두에 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 속성상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외시킵니다. 

 1) 이방인 폭도들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H.J 님이 용례 중 하나로 소개해 주신 사도행전 19장 32, 39, 41이 말하는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으로서의 에클레시아 개념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음부의 권세 아래 있는 무리들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구약의 유대인의 모임개념이 제외됨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서두 글에서 언급되었던 케빈 길레스 책 345-346쪽에 의하면 70인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약 100번 나타났는데(이 단어의 대부분은 카할이라는 히브리어), 그중 시편 28:5와 에스겔 32:22-23 두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 유대인은 이러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음으로(롬2:28-29) 소위 표면적 유대인인 구약에서 언급된 유대인의 모임은 에클레시아 이되 신약교회 개념(이면적 유대인)인 마태복음 16:18이 말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개념에서는 제외됩니다.

 3)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개념이 제외됨

위 책은 유대인이되 열왕기상, 역대상, 역대하 등에서 약 33번 쓰인 에클레시아는 특별히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개념 역시 신약교회의 예표와 그림자의 의미는 있을 수 있으나 마태복음 16: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그 교회는 아닙니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회심 전후의 사울과 바울의 모습에서 관찰되듯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일 뿐입니다. 즉 예배하는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일원이었던 다소의 사울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들을 잡아 죽이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통해 참된 신약교회의 구성원이 된후 그는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이되 그 신분과 그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했었노라고 실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빌3:6). 그가 고린도후서 11:28에서 날마다 자기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한다고 할때의 그 교회는 그가 회심 전에 몸 담았던 예배공동체인 이스라엘 개념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둘을 혼동할 때 그 사람의 교회론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이해에서 멀리 빗나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교회는 시점으로 볼 때 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교회이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참된 거듭남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구성원들만을 염두에 둔 교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단수의 교회로서 복수의 교회들이 되는 성경적인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 제기를 할 때 염두에 둔 교회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나 H.J 님은 위 제외된 모든 개념들을 다 포함한 신구약 전체에 나타난 '에클레시아'의 용례들을 다 교회개념으로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범위에 있어서도 단지 <특정 목적을 위하여 따로 불러 나와서 만들어진 모임> 즉 민회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함으로 집에서 모이든 예배당에서 모이든 도시에서 모이든 다양한 범위의 모임 그 모두가 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다 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음에 다루겠지만 교회의 다른 특징들을 무시한 채 에클레시아라는 원어적 의미만을 중시함으로 본의 아니게 분열의 뒷문을 이론적으로 열어주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8:1을 오해하여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교회들을 다 포함한 하나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라는 식의 성경본문 왜곡으로 빗나갈 여지가 다분합니다. 이 점은 별도의 글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2)


저는 비록 부족함이 있긴 하지만 이런 교회론에 관련된 진지한 논의를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시고자 하는 일이 곧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는 것'(마16;18)이고, 주님의 종들인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자와 교사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 또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4:11-12). 그런데 저와 HJ 님의 최근의 논의에서 보이듯이 교회 또는 에클레시아에 관해서는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논점들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으로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을 깃점으로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교회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가 있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합의된 정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수 많은 경쟁적 선언들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교통 정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 우리의 토론의 대상은 어떤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가? 

케빈길레스는 그의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에서 현재 우리에게 교회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없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15쪽) 

  위 책을 번역한 홍성희 님도 역자 서문에서 위 케빈길레스의 말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론에 관한 책은...이미 나와 있는 것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각각의 교회, 교파, 교단에 따라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어서 교회에 대한 통일된 교리가 아직도 나와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토론대상이 되는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 HJ님과 제가 약간의 혼동을 빚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라도 우리가 토론하는 대상인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처음부터 밝힌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단수의 '우주교회'가 복수로 나타나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문제제기 한 것임으로 당연히 마태복음 16장 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바로 그 교회를 염두에 둔 교회개념을 토론의 전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16에서 목자(사)와 교사들 등의 주의 종들이 세워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HJ 님은 '에클레시아'라는 원어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개념과 범위를 내포한 교회개념을 토론의 대상으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에클레시아)개념 안에는 HJ 님이 소개한 것처럼 사도행전 19:32, 39, 41에서 보듯이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까지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개념 안에 과연 이런 폭도들의 모임이 끼여들 여지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편차가 쌍방에게 약간의 오해와 혼잡을 가져온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 우리가 토론하려는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특징들을 통해 에클레시아이되 그에 부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배재시킴으로 토론대상을 더 명확히 하는 시도를 해 보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3.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지방교회 자료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1)

- 시작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현실을 돌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godssalvation.chch.kr/aspects/regenerate.html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6:01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아래 글은 HJ님의 '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를 기초로한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가능하다는 주장' 중 일부입니다. 즉 정관사 the 가 붙은 교회는 그 도시에 있는 유일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안에 여러 개의 교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일부 특정교회를 말한다는 논리요 주장입니다. 

이것은 문법적이고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해석이요 주장일 수 있으나 실제 성경 용례나 역사적인 사실에 이런 논리를 대입해 본다면 사실이 매우 왜곡되고 진리가 혼잡될 수 있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이제 왜 그런지를 좀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아래 꼬리글로 쓴 것을 별도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1.HJ 님 주장 

 (HJ님) 예를 들자면, <서울지역의 시장에 있는 사과>라고 할 때에, 한 편으로는 "사과"라는 말에 "정관사"를 넣어서 <the apple in the market of Seoul>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을 "서울지역의 시장에는 사과가 하나 뿐이다고 해석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식의 극치입니다. 사과라는 일반적인 명사를 고유명사처럼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도 그렇게 "일반적인 명사"입니다. 기독교에만 특별하게 사용되던 용어가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세속적으로도 사용되고 있었던 용어입니다. 그래서 "서울지역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Seoul)이라는 표현을 두고, 서울지역에는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식한 해석입니다. 

기본적인 문법과 용어의 개념을 해석하는 원리의 그 기초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폴님의 글을 보면, 이 두가지 면에 있어서 저와 일치가 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해석 이전에, 문법이고 상식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려면,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그 언어의 문법과 상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글문법을 모르고 한글성경을 해석할 수 없고, 헬라어문법을 모르고 헬라어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2. 저의 반박 

HJ님의 위 주장에 의하면 사도행전 8:1의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the church at Jerusalem)에 큰 핍박이 나서..'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지역에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은데 그중 정관사 the 로 특정된 어느 한 교회에 핍박이 났다는 말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맥은 ...<사도 외에는 다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예루살렘 지역 내에 있는 다른 교회들 안의 성도들은 고스란히 다 있고 그중 일부인 위에서 지칭된 그 교회에서만 사도외에 다 흩어졌다고 보아야 할까요? 

이런 해석은 그야말로 논리의 함정에 빠져 사실과 역사를 왜곡시키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핍박하는 쪽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에 수 많은 교회들 중 특정교회만 핍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어느 교회에 소속되었는가 하는 것 보다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사울이 잡아다가 가두고 죽이고 했기 때문입니다(행9:14, 21). 

HJ 님의 논리와 주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지역 안에 여러 교회들(복수)이 있어야 할 것이나 그런 가설을 뒷받침하는 어떤 성경근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도시에 여러 교회들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가설을 '에클레시아'라는 어원에 기초하여 입증해 가시려는 HJ 님의 시도는 숱한 분열이 팽배한 현실을 정당화해 줄지는 몰라도 성경적인 교회론으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인 실행에 있어서 수 많은 문제점들을 양산해 낼 여지가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