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9. 5. 05:00

창간특집 - (지방)교회를 전격 해부한다.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 존중 받을 가치 있다"

풀러 신학 대학 성명서 (2006. 1월 5일)

  풀러(Fuller) 신학 대학과 지방 교회들의 인도자들과 그 출판 기관인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LSM)는 최근에 지난 2 년 동안 해온 광범위한 대화를 마쳤습니다. 이 기간에 풀러 신학 대학은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에서 출판한 위트니스 리와 워치만 니의 저서들을 특히 강조하는 지방 교회들의 주요 가르침들과 실행들을 철저하게 검토하고 조사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취한 이유는, 종종 이들 교회들에 관해 던져지는 여러 가지 많은 질문들과 비난들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고, 또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빛 안에서 이 두 사람이나 지방 교회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 측에서 이 대화에 참여한 분들은 총장이며 기독교 철학 교수인 Richard Mouw 박사와 신학부  학장이며 신학 및  윤리학 교수인 Howard Loewen 박사와 조직 신학 교수인 Veli-matti Karkkainen 박사입니다. 지방 교회들을 대표하여 참여한 분들은 Minoru Chen, Abraham Ho, Dan Towle 씨입니다. LSM을 대표하여 참여한 분들은 Ron Kangas, Benson Phillips, Chris Wilde, Andrew Yu 씨입니다. 

풀러 신학 대학이 내린 결론은, 지방 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풀러 신 학대학이 당면했던 첫 과제 중 하나는, 그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전형적으로 제시했던 지방 교회들의 사역의 모습이 지방 교회들의 사역의 가르침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가를 판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관하여 어떤 단체들 안에 생성된 인식과 그 두 사람의 저서들에서 발견된 사실상의 가르침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은 엄청나게 잘못 대표되었으며, 그 결과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특히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로 분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오해되어 왔습니다. 성경과 교회사의 빛 안에서 공정하게 점검해 볼 때, 문제시 되었던 가르침들은 사실상 성경과 역사의 의미심장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시종일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들을 따르는

인도자들이나 (지방)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의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거친 과정을 이해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우리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이 고수하고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들 위에서 이들 교회들이 서 있는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음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신앙의 기본 교리들에 관한 동의가 분명하게 확립될 수 있다면, 비본질적인 가르침들에 관한 차후의 대화와 토론은 믿는 이들의 교통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출판물들을 읽어 보고 또 풀러 신학 대학 측과 그 교회들과 사역의 대표자들과 다섯 번에 걸쳐 직접 만나는 모임을 갖고 나서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 삼일성(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격과 일, 성경, 구원, 교회의 하나와 합일, 그리스도의 몸 등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과 간증에 관해서 우리는 그들이 논의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정통(正統)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비록 그들의 신앙 고백이 신조의 형태로 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신앙 고백은 주요 신조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 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기를 기탄없이 권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진지하고 열려 있고 투명하고 제약이 없는 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풀러 신학 대학 측에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접근했던 몇 가지 주제들은 삼일성(삼위일체), 신성과 인성의 연합, 신화(神化), 양태론(樣態論), ‘지방’ 교회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실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들의 모임 밖에 있는 외부 믿는 이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 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야들 하나하나에 대해 탐색할 자유를 제한 없이 부여받았습니다. 매 경우에 우리는 일부 사람들이 가진 공공연한 인식이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믿는이들의 믿음과 실행뿐만 아니라 출판된 사실상의 가르침들과도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이 성명서는 우리가 연관되었던 과정과 우리가 내린 전반적인 결론에 대한 전체적인 개관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제공하려는 의도로 마련된 것입니다. 이 간단한 성명서에 이어서 몇 개월 후에는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주제들과 기타 중요한 주제들을 더 상세하게 다루는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지방 교회들과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의 대표자들은 그들에 관한 관심사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들을 요약된 형태로 진술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풀러 신학 대학 측은 이미 상당한 연구와 대화를 거친 다음 그들을 이해하는 데 이르렀으므로  그들의 가르침들에 대한 논평을 제공할 것입니다.  

           작성일: 2006년 1월 5일
    
                                              

출처: http://www.forthetruth.or.kr/booklets16.htm (영어원문 포함)
참고 :http://local-church.tistory.com/109 (지방교회 풀러신학대학 성명서)
http://local-church.tistory.com/134 (지방교회 - 지방교회란 무엇인가?)
http://local-church.tistory.com/111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http://local-church.tistory.com/137 (
지방교회 탐구 - 1 신앙고백 풀러신학교도 공식 지지)

지방교회의 신앙고백

1. ·우리는 성경을 완전하고 유일한 신성한 계시로 믿으며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한 분이시며 또한 영원히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고 이 셋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분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심을 믿습니다. 그 분은 또한 그 분의 신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처녀의 태 안에 잉태되시고, 땅위에서 참된 인생을 사셨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죽으셨으며, 사흘 만에 몸을 입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영광 안에 계신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3. 우리는 그 분께서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속히 재림하시어 천년왕국과 영원 안에서 땅을 다스리실 것을 앙망합니다.

4. 우리는 삼위의 세 번째이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존재와 소유하신 모든 것이 아들에 의해 표현되시며 아들의 존재와 소유하신 모든 것이 성령으로 실재화 됩니다.

5. 우리는 더 나아가 인류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영광의 요구를 절대로 이룰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그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셨고 그 분과 화목하게 하셨으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성령으로 구속된 이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그 분의 구원을 완결하시고 그들로 그 분의 자녀들이 되게 하십니다.

6. 이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이 시대에서는 그 분의 몸 안에서 매일의 구원을, 오는 시대와 영원 안에서는 영원한 구원을 누릴 것입니다. 영원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에 대한 그 분의 구원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지방)교회 신앙 항목들에 대한 요약 

(1) 성경에 관하여 
 우리의 신앙의 첫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 (딤후 3:16 상)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아래 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쓰였다. 우리는 또한 성경이 완성된 신성한 계시를 담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방면들은 성경에 근거를 두며, 성경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한 것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것을 넘어선 사람의 생각을 다 거절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과, 그분의 완전한 구원과, 사람을 위한 그분의 계획 혹은 경륜에 관한 그분의 계시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참되고도 객관적인 선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정확성을 믿고, 그 무과실성을 견지한다. 

(2) 하나님에 관하여  
물론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저희의 신앙의 대상이다. 성경의 계시로부터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이시면서 삼일(triune)이심을 믿는다. 비록 이것이 우리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는 하나,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한 분(딤전 2:5)이시지만 동시에 셋(마 28:19)으로 구별되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분은 영원히 아버지, 아들, 영이시다.
신성한 삼일성의 셋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주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 38절에서 우리에게,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이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아버지가 계시는 곳에 아들 또한 계신다. 똑같은 상호내재가 또한 아들과 그 영 사이, 그 영과 아버지 사이에도 존재한다. 삼일성의 셋 가운데서 아버지는 그분의 이름이 내포하는 바와 같이 신성한 삼일성의 근원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이시며, 그 영은 아들의 모든 어떠하심과 아들이 소유하신 모든 것의 실제화이다.
사도 바울은 삼일성의 셋을 믿는 이들의 체험과 관련지어 분명히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신약에 의하면 세 분 모두 - 아버지, 아들, 그 영-가 믿는 이들 안에 계신다(엡 4:6, 요 14:23, 골 1:27, 요 14:17).
참고로 항간에 우리가 양태론을 믿는다는 헛소문이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양태론은 이단이다. 양태론 자들은 신격의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동시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고 그 셋은 다만 신성한 본질의 일시적인 나타남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서 신격 안의 영원한 구별과 세 위격의 동시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나 삼일성에 대한 우리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본성을 교리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 되신 삼일 하나님을 우리 안에 분배받는 데 있다.

(3)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주 안에서 가장 놀라운 분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호칭되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영원 과거에, 창세 전에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지금도 하나님이시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어느 날 그분은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온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이다.
그분은 그분의 신성을 버리지 않고 처녀의 태속에 잉태되어, 아기로 나셔서, 이 땅에서 인생을 사셨고, 대속하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시어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망에 매여 있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흘 후에 부활하셔서 생명주는 영(고전 15:45)이 되셨다. 그분의 신성의 능력이 사망을 삼키시고, 그분의 인성은 부활 하여 영화롭게 되셨다. 오늘 그분은 우리의 구속자이시자 우리의 생명이시다(골 3:4, 롬 8:10). 또한 그분은 승천하여 영광 안에 계시며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 여전히 사람이시다. 그러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의 구원의 주시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히 2:10, 12:2)이시다.
지금 그분은 하늘에 앉아 그분의 하늘에 속한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고 계신다(행 5:31, 히 8:1-2, 롬 8:34). 우리는 그분이 곧 다시오실 것, 즉 하나님의 왕국을 가져 오셔서 천년왕국에서 온 땅을 통치하실 것(계 1:7, 11:15, 20:6)을 기다린다. 

(4) 성령(The Spirit)에 관하여
 우리는 삼일성의 셋째이신 성령이 동등하게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아버지는 신성한 삼일성의 근원이시고, 그 영은 신성한 삼일성의 완결이시다.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과 아버지의 모든 어떠하심이 아들 안에 체현되었고, 아들의 모든 어떠하심이 그 영으로 실제화 되었다. 이러므로 그분은 실제의 영(요 15:26, 16:13, 요일 5:7)이라 불린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의 실제, 심지어 삼일 하나님의 실제가 성령이시다. 

(5) 인간에 관하여
인간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창1:26, 살전5: 23).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영이 죽고(엡2:1), 혼은 자아가 되고(마16:24), 몸은 육체가 되었음을 가리킨다(롬7: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값없이 의롭게 되고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때 사람은 원래의 창조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롬3:24, 5:10). 그것은 사람의 죽었던 영이 거듭나고(요3:6), 혼이 변화를 받으며(롬12;2, 벧전1:9),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형되어(3;21) 영원토록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분의 권위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6) 구원에 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 이 완전한 구원은 우리의 온 존재인 영과 혼과 몸을 포함한다.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과, 영광의 무거운 요구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셨고, 우리를 그분과 화목케 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구속된 자들을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분의 영 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이 모든 사실을 믿고 주님을 영접할 때 거듭나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을 소유한 믿는 이들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매일의 구원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사람의 영은 거듭났고 혼은 변화되고 있으며 몸은 변형될 것이다. 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믿음과, 기도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사람이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견고함 모두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7) 교회에 관하여
그리스도 안의 모든 참된 믿는 이들로 구성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엡1:22-23, 골1:24) 우주적으로 하나이고(엡4:14),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인 지방교회는 지방적으로 하나이다. 즉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가 있다(계1:11).
여기서 말하는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 즉 지방교회의 의미는 예루살렘 교회(행13:1), 안디옥 교회(행13:10), 고린도 교회(고전1:2) 처럼 특정 지방에 거주하는 참되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그 교회 구성원들로 하는 지역교회를 가리킨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는다. 비록 우리가 다른 기독교 교단들과 분리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주님께 신실함으로 우리는 주의 간증을 위하여 교회의 유일한 입장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치를 좁고 배타적이고 분열적인 영으로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받으셨듯이 모든 믿는 이들을 받는다. 

(8) 종말에 관하여
우리는 장차 이 세상 왕국에 종말이 오고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할 것을 믿는다(계11:15). 우리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얻으시며,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이기는 성도들이 천년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복에 참여할 것을 믿는다.

창간특집 - 지방교회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주목과 존중 존중 받을 가치 있다"
교성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지방교회_교성_070827창간3.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3. 05:00

4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골2:2), 삼위는 각 고유성을 가지고 구별되나 상호내재 하심으로 결코 분리되실 수 없으며, 신약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God)(요4:24) 이셨지만, 성육신 후로는 하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신성'의 면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전제하에, '맏아들'에 관련된 핵심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느 날 입으신 '육신'과 이 '인성'이 부활시점에서 어떤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몇 차례에 걸쳐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의한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롬5:10). 또한 앞으로의 글들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시점'에서의 '인성방면'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도행전 13장 33절의 '오늘'은 성육신이 아닌 '부활시점'입니다. 

행13:33은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시편 2:7의 인용이며 같은 내용이 히1:5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제는 '오늘'(This day)이 '성육신' 시점인지 아니면 '부활'시점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만일 위 날이 성육신의 때를 말한다면 새로울 것이 없지만, 부활의 날을 가리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번의 출생이 있다는 말이 되며 나중의 출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을 성육신의 때로 보시지만 전체문맥을 보면 이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박만수 외, 증거, 도서출판 안티오크, 1993, 170쪽). 오히려 '오늘'을 '부활 시점'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사도행전 13장 이후는 사도 바울 일행의 이방 땅의 사역을 다루는데, 사도 바울은 행13:13-43에서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33절의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he had raised up Jesusagain)는 말씀은 '오늘'이 '부활시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조지 레드


저명한 신약학자인 조지 레드도 그가 쓴 '부활론'에서 다음과 같이 위의 해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사건을 시편 2편의 성취로 보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50쪽).
 


(2)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또 하나의 출생'으로 말합니다. 즉 그분은 첫 출생인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셨고 두 번째 출생인 부활 안에 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 주님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매우 많이 강조하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독생자(삼위의 제2격)의 방면과 많은 형제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방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생한'(only begotten)이란 말은 하나님이 유일한 한 아들만 가지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요1:18, 3:16). 신격의 두 번째이신 아들 하나님(신성)은 그분의 영원한 신분이며 사람은 누구도 이러한 신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에게 둘째, 셋째, 또는 많은 아들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즉 독생자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맏아들'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롬8:29, 히1:6). 이것은 앞서 본 '독생자'의 방면이 아니라, '신성'과 부활시점에서 높이 올려진(uplifted)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롬1:4)를 가리키는 것-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하늘에 있습니다(롬6:6, 엡2:5-6). 그러므로 주님은 히브리 서에서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많은 아들들)이 다 하나(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히2:11).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서로 '형제 자매'라고 한다며 비판하는 어떤 분들과는 크게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습니다(요12:24, 벧전1:3). 또한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은 가지지 못하지만 주님의 몸으로서 맏아들이신 주님과 동일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한 새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엡2:15). 

즉 맏아들이신 주님은 [경배 받는 '신격']과 '신성'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인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아니나- 이것은 독생자의 고유권한이심] '신성한 생명과 본성' 그리고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요1:12, 벧전1:4,.롬12:2, 빌3:21). 존귀한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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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요1:18)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 하나님이시라면, 많은 형제들이 있는 '맏아들'(the first-born, 롬8:29)은 '신성'과 '높이 올려진 (인정되신) 인성'(롬1:4)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한국교계에서는 이러한 깊은 성경 진리가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꼼꼼히 듣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부활 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면, 그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는 아니라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이후 부활, 승천, 재림 심지어 영원토록 '인자'(사람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주님이 부활 후에도 뼈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눅24:39), 승천 후에도 스데반에게 인자로서 보이셨으며(행7:56), 재림 시에도 인자로서 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6:64). 이뿐 아니라 주님은 영원토록 인자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실 것입니다(요1:51).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비오면 걸치고 날이 개면 벗어버리는 레인코트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은 부활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은 아니라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성육신 이후 영원토록 '하나님-사람'(God-Man)이십니다.

(2).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높이 올려졌다 또는 인정되었다'면 예수님의 고유한 인성이 파괴되어 제 3의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사실은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이 이렇게 저희들을 오해하였습니다. 즉 지방교회측이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나실 때부터 승천 시까지 참하나님이시요 참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말한 '인성의 변화' 또는 '인성의 높이 올려지심'(uplifted)은 예수님의 '육의 몸'이 부활 후에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제 3의 어떤 물질로 변질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고 한 비판입니다(고전15:42-44).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

이 점은 쌍방의 공개 토론시 충분히 설명 또는 반박되었다고 믿습니다(누가이단인가, 118-121, 252쪽 참조). 롬1:4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길 원하시는 분은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른 책자인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WL, 한국복음서원, 1996년, 245쪽 분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첫 열매로서 입으신 영광의 몸의 형체를 낮은 몸을 가진 우리도 장차 똑같이 입을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우리 참된 믿는 이들이 가지는 영광스런 소망 중 하나인 것입니다(빌3:21, 고전15:49, 히2:10). 장로교 신약학자 조지 래드도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세상 끝 날의 성도들의 부활체와 동등한 서열에 있다. 예수님과 성도들은 한결같이 '영적인 몸', '영광의 몸'을 소유한다. 이 사실은 빌립보서 3장 21절에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진술되어 있다'(죠오지 래드, 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55-156쪽).

사실 부활 전 후의 '예수님의 인성'에 어떤 비밀스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부활 이후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셨던 주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20:19, 26, 눅24: 31, 막16:12). 장로교 신학자인 조지 래드는 이러한 비밀스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부활의 순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답은 예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위 책, 126쪽).

(3). 주님은 부활 이후에도 고유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되, 인성은 '비밀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성수를 위해 몸만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에겐 이런 교제가 골치 아프실 것입니다. 그냥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으면 되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느냐고 나무라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둑세계에도 다양한 급수가 있고, 영어를 배워도 초, 중, 고급반이 있듯이, 성경진리에 대한 인식 정도도 성도들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제를 통해 빛 비춤 받고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는 분은 주님을 깊이 있게 추구하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 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인 58개 구절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부활 전후의 '인성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15:42-49, 52).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위 내용들이 우리가 부활시 체험할 것 일뿐 아니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가 본으로 먼저 체험하신 것임은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고전15:23).

본질적으로 영이신 삼위 하나님(요4:24)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후, 그 육신조차도 부활시 영화롭게되어 조지 래드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세계]로 높여진 분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맏아들'(롬8:29)이십니다. 이 분이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지금은 몸된 교회생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인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고전15:45, 요일5:11-12, 갈4:19, 롬8:30). 오! 이 어떤 구원인지요(롬5:10, 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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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의 요 7:39는 난해구절중 하나입니다 :

'이는 믿는 자의 받을 '그 영'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원문에는 없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But He said this concerning the Spirit, whom the ones believing into Him was about to receive ; for Holy Spirit was not yet, because that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위 영어본문은 핸드릭슨사에서 출판한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1987년판)의 본문이며, 영어 KJV는 원문에 없는 'given'을 넣었음으로 인용치 않았습니다.

위 구절에서 '믿는 이가 받을 그 영'이 아직 없는 이유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라는 본문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보겠지만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신 그 영'(The Spirit)이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된 시점인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 영'의 존재시기와 그 영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시기는 '부활시점'입니다.

원래 아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 안에 계셨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셨지만 이 영광은 입으신 육신 안에 가려져 있었습니다(요17:24, 1:18). 그러나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실 때 영광을 감싸고 있던 그분의 인성이 비로소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눅24:26, 요12:16). 주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와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함께 말씀하셨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요12:23-24).

이처럼 영광은 빛이신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인 것입니다(요일1:5, 계21:23).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WL, 한국복음서원, 1996, 118쪽 분량)라는 책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삼위의 제 3격 성령님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이미 계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육신 하신 아들을 성령과 분리된 분으로 아시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분리된 분으로 아십니다. 즉 성령을 먼저 등장하셨던 아버지와 아들은 저 하늘에 남겨둔 채 홀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보는 잘못된 신관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구별되시되 결코 분리됨 없이 언제나 서로 안에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간의 상호내재는 영원 전부터,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 아니 영원토록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시킬 자도 없습니다(요14:10, 20, 요일1:3, 2:22-24).

한 장로교 신학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제3위 성령님이 이미 내재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성령론 평가

'성육신과 성령에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의) 육신 안에 성령께서 영원토록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육신 안에 충만히 거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이며... 여기서의 강조점은 날 때부터 성령으로 태어나셨음을 강조한다. 또 성령의 충만 정도가 아니라 성령자체를 소유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육신은 함께 생을 산다(이순태, 현대성령론 평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25쪽).

3.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과 인성 둘 다 소유하신 '그 영'은 부활 후에만 계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7:39의 '그 영'은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 또는 롬8:2의 '생명의 영'과 동의어로서 '맏아들' 즉 부활 후의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이런 말을 언뜻 들으면 삼위의 제2격과 제 3격이 동일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가 분리할 수 없으나 엄격히 구별되듯이, '그 영'(아버지, 아들, 성령 + 높여진 인성) 안에서도 삼위는 분리할 수는 없으나 엄연히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엔듀류머레이

요7:39와 같은 심오한 진리는 한국교계에서는 낯설지 모르지만 국외의 일부 장로교 학자들 중에는 이 부분의 진리를 보신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화란 개혁신학 배경을 가진 경건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자에서 요7:39의 '그 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인간을 죄와 저주에서 구원하심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 새로운 거룩한 인성(humanity)을 완성하심으로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생명을 (성도들이) 전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부활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성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성도들 안에) 임하실 수 있었다'(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42-42쪽).

따라서 요7:39의 '그 영'은 삼위의 제3격만이 아니며,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님)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생명 주는 영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놀라운 분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셔서 우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요3:6).또 다른 장로교 신학자인 루이스 B. 스미디즈도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은,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질 수 있'는 기독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여수룬, 1991, 26-27쪽).

PS: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고전15:45를 연구할 때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끝으로 The Spirit, The Holy Spirit, Spirit 등을 모두 삼위 제 3격만을 의미하는'성령'으로 번역하는 것은 혼돈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22:17은 제 3격 만을 의미하는 '[성령]과 신부'가 아니라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높여진 예수의 인성을 가지신 [그 영]과 신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도 the Holy Spirit이 아니라 The Spiri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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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6회에 걸쳐 '맏아들'(롬8:29)에 대해 교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극히 성경적이지만, 한국교계 내에서는 생소한 부분이 있으며, 더구나 앞으로 '기독론'과 '성령론'이 겹쳐지면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다음은 풀러신학교의 루이스 스미디즈 교수가 쓰고 총신대학과 웨스터민스터에서 공부한 오광만 님이 번역한 'UNION WITH CHRIST'(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 1991년판) 내용 중 '기독론들'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해당되는 것들을 요약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점에서 본 기독론(위 책 제1장)

첫째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십자가와 부활은 당연히 불순종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적인 일을 성취했지만, 이것은 지엽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이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 지는 것'에 강조 점을 둡니다.

즉 기독론의 중점을 예수님 생애의 역사적인'행위들'에 두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된 '존재'에 두는 관점입니다(위 책, 22-29쪽).

둘째는 계약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성부와 성자간의 계약에 의해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사건)을 매우 강조합니다(위 책, 29-36쪽).

셋째는 상황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되, 그 강조 점을 이러한 죽음이 악의 세력들을 처리함(골2:15)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적 상황(situation)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데 두고 있습니다(위 책, 36-50쪽).

대략적으로 동방정교회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을 취한다면, 한국 교계 대다수 성도들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장로교단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다음 글들은 그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되 '성례적 기독론'의 관점을 포함하며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인성 안으로 주입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밖에 남아 계신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이 받으신 모든 고난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사역들은 무익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Institutes II. xvii. 1)'(위 책, 29-30쪽).

2.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두 가지 관점(제 2장)

첫째는 '증발된(pneumatic?)그리스도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위 책 저자는 이 범주에서 빌헬름 부세트와 아돌프 다이스만의 관점을 소개했는데 핵심은 부활 전의 '예수'가 부활 후의 '주(영)'임으로, 그리스도 주와 영을 '동일'(고후3:17)하게 보는 관점입니다(위 책, 53-57쪽).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칼빈은 그의 '에베소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셨지만,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고 말합니다. 즉 이 이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 즉 예수님의 '대리인' 일뿐입니다(위 책 57-61쪽).

그런데 위 책 저자인 루이스 스미디즈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사도 바울의 관점- 성경적 관점-을 자세히 고찰한 후, '성령(그 영)은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위 책 61-88쪽). 물론 저자는 이러한 총론에 해당되는 글에 이어서 그의 책의 후반부 전체인 약 180쪽을 할애하여 자신의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 결론적인 몇 줄만 읽고 성급하게 '양태론자' 라고 공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이런 혼란은 앞서의 지적처럼 '그 영'을 아버지와 아들은 제외된 '제3격 하나님만'으로 볼 때 생깁니다).

스미디즈 박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C.H. Dodd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분은 James Dunn의 '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 giving Spirit'(B. Lindars & S.S. Smalley편집, Christ and the Spirit in the New Testament(Cambridge, 1973)과 'Jesus and the Spirit(philadel phia, 1975)를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 내의 성령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하자면, 지상에서 그의 몸의 생활의 확장을 얻으신 셈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NewYork, 2nd ed., 1954), p62). (위 책, 86쪽).

지금까지 본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민감한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이 주도해 온 한국교계는 위 이론들 중에서 '계약적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대리로서의 성령론'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정통'이고 다른 것은 '이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강조하고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생명을 소홀히 하는 이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 같은 개혁신학자인 J.H. Bavinck가 지적한 '개혁교회의 영적 결핍'의 중요한 원인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성령론, 경향문화사, 1994, 61쪽).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서 '영적 성숙'(서신서)과 '익은 열매'(계시록)를 산출하시는 분은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부활생명'으로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생명 주는 영'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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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 책만 보게 하고, 다른 서적은 일체 못 보게 통제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희들의 신학계간지 '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의 글들을 쓰기 위해 인용한 '참고 목록들'을 훑어보시면 그 말이 거짓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히려 지방교회가 개혁신학을 포함한 기독교계의 여타 신학들의 실상을 깊숙이 알고 있더라고 소문 내시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똑똑한 머리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평범한 비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1) 하나이며 셋이신 하나님(창1:1, 마28:19, 사45:15, 요14:11). 2)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요1:14, 갈4:4). 3) '예수님'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고전15:45). 4) 승천 후 예수님이 하늘과 성도들 안에 동시에 계신 것(히7:25-26, 고후13:5, 롬8:10). 5) 예수님이 믿는 사람들과 결혼하시는 것(고후11:2, 계21:2, 9-10)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진리들을 참되게 아시려면 사도 바울 처럼 겸손히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나아가 이런 영적 실제들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엡1:16-18상, 3:14-15). 이러한 심정으로 이제 '경륜적인 방면의 하나님'과 '고전15:45'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에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너무 무시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변치 않고, 엄격하게 구별되며, 상호 내재하여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한 분이십니다(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하나님의 위격이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개혁신학의 뿌리인 아우구스티누스나 터툴리안의 가르침과도 다른 무지한 '이단 가르침'입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 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을 참조)).

이러한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케 하고 나타난 모양도 같게 할 경륜(계획)을 수행하셔야 만 했습니다(엡3:2-11, 요10:10하, 벧후1:4, 요일3:2). 이것을 계획(아버지), 성취(아들), 적용(그 영)하시는 일을 위해 삼위 하나님이 거치신 긴 과정들을 가리켜 학자들은 '경륜적인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이종성, 위 책, 257, 261쪽).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지방교회측이 '하나님이 육신 입어 하나님-사람'이 되셨고(요1:14), 이 '하나님-사람이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고전15:45)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전능성을 위배한 이단사상이라고 공격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안 되셨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안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적 사실조차 정면 부인하는 끔찍한 이단사상] 이면에는 예수님의 행적을 '사건중심'으로만 이해해 온 신학사조가 잠재의식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성육신이 한 번 해본 '사건'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의 경륜 방면에서 엄청 난 '존재의 변화'입니까? 이 비밀을 영 안에서 참되게 본다면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성육신의 엄청난 경이'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입니다.

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딤전3:16)!!

2.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십니다. 

고전 15:45 하반 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아담'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구별되나 '결코'(never) 분리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인성)을 입으신 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자신인데,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신령한 몸(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신 것뿐입니다(고전15:44, 빌3:21). 이러한 '되심'(became, was made)의 시점은 예수님의 부활시점입니다(눅24:26, 행3:13).

어떤 번역본은 원문(조오포이에오 #2227)를 '[살려주는]' 영이라고도 하나 다른 용례와 번역본들을 참고할 때 '[생명 주는] 영'이 더 무난합니다. 그러나 '살려주는'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요6:63, 5:21, 롬8:2, 11, 고후3:6).

즉 성육신 안에서 예수님은 구속(redemption)을 위해 육신이 되셨다면(요1:14, 29),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입(the imparting of life)을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 뿐 아니라(고전15:3),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10:10하, 5:40). 따라서 한국교회들이 설교나 복음전파 시 '죄사함' 만 강조하고 '생명' 방면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롬5:10 원문참조).

3. 개핀 교수님과 차영배 박사님의 토론이 말해주는 것

'성령론-구원론 부교재'(차영배, 도서출판: 경향문화사, 1994)에 소개된 고전15:45에 대한 위 두 분의 서면 토론내용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존경받는 개혁신학자이며, 차 박사님은 직접 국내신학교 교수로서, R. B. Gaffin 박사님은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자신에게 배우고 귀국하여 국내 신학교 교수가 된 제자들을 통해 한국 교계 내 신학이론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위 책에 소개 된 개핀 박사님의 고전15:45에 대한 입장은 '본문 내용이 삼위 상호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 경륜적, 기능적 관점이라는 전제아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선물은 높아지신 그리스도 자신, 곧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는 생명을 주는 (성)영이며,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일치한다'고 합니다(위 책, 49쪽). 이에 대해 차 박사님은 '고전15:45의 살려주는 영'은 뼈와 살이 없는 성령을 가리킨 말이 아님으로 성령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함은 위격을 혼동할 위험이 크고, 양태론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반박합니다(54쪽).

이에 대해 개핀 교수님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본체론적', 위격적 혼동 없이 '기능적'으로 단일이라는 것(functional oneness)이다'고 재차 반박했습니다(63-64쪽).

위 토론을 평가하자면,

첫째, '생명주는 영= 단순한 제3격만의 성령'은 물론 아닙니다. 고전15:45 본문 자체가 이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둘째, 개핀 박사님은 위 내용을 경륜적 관점에서 서술했다면, 차 박사님은 이것을 본질적 관점에서 '양태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차 교수님은 개핀 교수의 '본체론적 혼동 없이' 라는 단서를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성육신 안에서도 예수님 인성 안에서 위격 혼돈 없이 상호내재 했던 아들과 성령이 부활 후라고 해서 위격 혼동을 가져올 일이 없습니다.

셋째, 본문에서 '생명주는 영'이 단순한 3격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신격(아버지 아들, 성령)+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인식이 두 분에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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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조연배우'와 '세트'도 있지만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맏아들(롬8:29)'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입으신 인성을 다룬 핵심진리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가, 아니면 셋으로 분리되는가?, 또한 우리가 영접한 주님이 인성을 가지시는가, 벗어 버리셨는가 아니면 인성을 아예 입으신 적도 없는가? 하는 점들을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이 상호내재 하심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 글에서 열거한 난해구절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와 터툴리안은 '분리된 세 하나님' 사상을 배척합니다.

성경본문(요14:10-11, 20)과 위 정통교부들은 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주장하는 '분리된 하나님(들)' 이단사상을 배척합니다. 정통 삼위일체 이론의 최종주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로 계신다. 위격의 하나가 아니라 실체의 하나이다. [하나님과 아들이 분할 할 수도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게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의 세 위격을 삼중적(triplex)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각자가 유리(분리)되어 있는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격은 상호내재 한다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쪽).

'삼위는 구별되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터툴리안의 견해는 이미 소개 드린 바 있습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

삼위일체 신앙이 잘못되면 기독론, 성령론도 당연히 잘못되게 되어 있음으로 한국교계 내에서 영향력 있는 분들의 '분리된 세 하나님 이단사상'은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합니다.

2. 맏아들과 관련 된 난해 구절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맏아들'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육신이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된 생명 주는 영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분이 이 시간에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보좌 위에서 계시며, 동시에 생명으로서 이 땅위의 참된 거듭난 성도들로 된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계십니다. 이런 성경적 관점을 갖는다면 다음 구절들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1:51]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28:11-22의 야곱의 꿈의 성취입니다. 맏아들인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건축하도록 하늘로 땅을 향해 열려있게 하고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머리로서 하늘의 모든 풍성을 교회에 전달하시고(엡1:22-23), 이 땅 위의 주님의 몸인 교회지체들을 아버지께 이끌고 계시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엡2:18, 요14:5).

[요7:39]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제3격 성령'이 아직 없다는 말이 아니며, 영화롭게 된 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실제이신 '생명 주는 영'이 부활 전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행9:4]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역사적으로 사울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결코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승천 후 맏아들은 생명으로 제자들 안에 들어와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몸인 제자들을 핍박한 것은 곧 주님자신을 핍박한 것입니다(골3:4, 고전6:17).

'예수님 사랑해요'를 외치면서 주님의 지체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것은 마치 주님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발로 그분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작은 지체'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임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마25:40).

[롬1:4]는 '이 아들로 말하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시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고전15:44)으로 높여짐으로' 그분 안에 있던 신성이 영화롭게 된 인성을 통해 밖으로 충만히 표현되신 것을 말합니다.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롬8:10]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롬8:34]는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두 분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이신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생명'으로 믿는 이 안에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롬8:2).

[히2:11-12]는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받는 자(많은 형제들)가 다 한 아버지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요12:24). 놀랍게도 예수님은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형제'라 부르지만(요20:17, 롬8:19, 벧후3:15),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또는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형제님' 하고 친근하게 부를 수 없다면 거기에 이미 계급적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인 니골라당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계2:6,15). '형제'는 직분이 없는 평신도를 가리키는 저급한(?) 호칭이 결코 아닙니다.

[계5:6]은 하늘에 계신 '어린양의 일곱 눈'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분리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인성을 입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생명 주는 영으로 이 땅에 오심을 말합니다. 삼위는 상호내재하나 구별된 상태로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에, 2격이 3격과 혼동을 일으킬 일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영(Spirit)'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무조건 '아버지', '아들'은 아니고 제3격인 성령하나님만'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오! 우리 안에 지금 계신 이는 비밀하고 신령한 몸(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 사람'이십니다. 이 분은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상호내재하시며 인성도 있으신 그 영 하나님(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십니다. 이 분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에서는 아니나 우릴 맏아들인 자기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롬8:28-30).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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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주신 부담(burden)을 글을 통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지를 묻고 순종하다보니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핵심사항을 재 강조함으로 '맏아들'(롬8:29)에 대한 교제를 마칠까 합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작은 지체들의 교제가 한국교계 내에서 '맏아들'에 대한 성경적 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어떤 표현은 분별을 위함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분들을 정죄 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 상한 분이 계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1. '맏아들'(롬8:29)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합니다.

1) 한 분 하나님이신(사45:5, 고전8:4)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위격이 엄연히 구별되시지만, 상호 내재하심으로 영원토록 결코 분리되지는 않으십니다.

2)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God)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고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1/3하나님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딤전3:16, 골2:9)이심으로, 아버지와(혹은) 성령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 입니다(요14:10-11, 마1:18).

3) 예수님은 삼위가 상호 내재하는 '온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죄만 없으시지 평범한 우리들과 똑같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8, 딤전2:5). 성육신과 부활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성 자체에는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습니다. 

4) 하나님 사람이신 예수님의 육신(인성)은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고전15:42-47). 이것은 인성을 벗어버리거나 인성이 제3의 물질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고전15:44).

5) '하나님'이 성육신 후 '하나님 사람'으로(요1:14), 또한 부활 후에는 이 분이 신령한 몸을 입은 하나님-사람이신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만일 누가 하나님의 불변성만을 주장하며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부인한다면 심각한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6) 성경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요 생명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을 가진 맏아들이십니다(롬8:29). 이 분은 지금 하늘 보좌 위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시는 동시(롬8:34)에 이 땅에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골3:4). 이러한 실체가 한 '새사람' 또는 '그리스도의 몸과 머리'입니다(엡2:15, 골1:18).

2. 거듭난 후의 신앙생활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엡1:4-5, 롬8:29).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복음으로 불러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요3:6), 혼을 변화시키고 계시며(롬12:2, 고후3;18), 결국 우리의 몸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빌3;21, 롬8:23),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경은 이 목적을 위해 합력하고 있습니다(롬8:28).

속히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고(엡4:13-16) 새 예루살렘이 완성되기를(엡5:25-27, 계21:2, 9-10) 하나님이 고대하시고, 이기는 자들이 고대할 뿐 아니라, 썩어짐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피조물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롬8:19,21).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소서! 세월을 아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시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엡5:16-17, 벧후1:3-4)! 이 땅의 모든 주의 종들은 마땅히 당신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이 한가지를 위하여 수고하게 하소서(갈4:19).   아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2. 05:00

성경이 계시하는 성육신의 참된 의미를 아는 지금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사람 속에 제한 받으신 기묘한 기적' 앞에 놀라며 감사할 뿐입니다. 

(1) 성육신은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기묘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기 이전에도 아브라함(창18:2, 13, 33), 마노아의 아내(삿13:3, 10, 22) 등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 때 사람으로 오셨던 하나님과 신약의 성육신은 어떻게 다릅니까? 

총신대학과 합동 신학원을 졸업한 어떤 장로교신학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약시대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사자'로서 나타나서 사람처럼 행동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육신을 가지고 나타나신 것은 아니다. 즉 구약에서는 '육체를 가진 사람처럼' 나타나셨을 뿐이지만, (신약의) 성육신을 통해서는 '실제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의 나타나심은 사람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나 인간의 구속을 위한 주님의 성육신 때는 육체를 입으셔야만 했다"(이남종, 모세 오경에 나타난 그리스도, 새순출판사, 1992, 80-81쪽). 


(2) 성육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사람의 육신(인성)을 입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 14에 의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은 어느 날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창 3:15에서 예언되고 갈 4:4에서 성취된 사실로서, '하나님'(God)이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어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 할 것은 하나님이 입으신 이 육신은 죄만 없으시되 평범한 사람들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짜 육신이 아니라 '환영'(phantasm)을 입은 것이라거나 사람이긴 하지만 '사람의 영' 부분은 '로고스'로 비밀스럽게 대치되었다고 이단적으로 말했습니다(요1:14, 요일4: 2-3, 회복역 각주 참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된 채로 있다고 하거나, 정반대로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융합되어 제3의 물질이 되었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진지의 변호와 확증 - 위트니스 리

그러나 그리스도는 위의 이단적인 가르침들과는 달리 완전한 참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9, 딤전2:5). 또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더하여 사람의 생명과 본성을 가지시되, 두 본성은 혼돈 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제3의 본성을 산출하지도 않습니다. 즉 성육신 하신 우리 주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사람'(complete God, perfect Man)이시고, 두 본성을 가진 한 인격이시고, 분리됨이나 혼잡 됨이 없는 비밀들 중에 비밀(골2:2)이시고,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WL, 진리의 변호와 확증, 한국복음서원, 1996, 91-97쪽). 

(3) '삼위(일체)하나님 전체'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도 많은 분들이 삼위 중 아버지는 아니고 아들 하나님(1/3)만 사람이 되셨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보내고 저 하늘 어디엔 신비하게 남아 계신다고 알고 계십니다. 물론 지금은 승천하신 아들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두고 계신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어쨌든 그분들 신학으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사람 가까이 또는 사람 안에 오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요일2:23, 4:15, 요14:10,-11, 20, 23). 이렇게되면 그분들이 영접한 영생도 아버지하나님은 빠진 불완전한 하나님의 생명이 되고 맙니다. 더구나 그분들은 성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살전1:1, 요일2:24). 

그런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칼로 '무우 토막 자르듯' 잘라내고 분리시킨 잘못된 삼위일체관의 심각한 후유증일 뿐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성육신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골2:9, 딤전3:16). 이점은 성육신 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거처인 장막의 실제라고 말한 성경말씀들에서도 증명됩니다(요1;14원문, 2:19 -21, 이 남종 위책, 134-135쪽 참조). 따라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물질적인 성막에 나아갔지만 신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포함한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려면 움직이는 성막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심지어 예수님이 성막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바로 그 장소인 '속죄소'라고 말합니다. 즉 구약의 출25:17의 속죄소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kapporeth인데 70인 역은 이것을 '힐라스테리언'으로 번역했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롬3:25의 화해장소(개역성경은 화목 제물로 오역함) 역시 출25:17의 속죄소와 똑같은 '힐라스테리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람이신 주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성막의 실제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인 '속죄소'의 실제임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주님이 지금은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지 1/3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전체가 아들 안에서 사람이 되신 것임(골2:9, 딤전3:16)을 아는 것은 '맏아들'을 바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1.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2)

2. 대부분의 장로교인 분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교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정작 이러한 "예정"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도록" 예정하고, 예수님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 되도록(predestinate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that he might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예정되었다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9절의 핵심내용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사실 위 롬8:29 본문자체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해당 본문을 여러 번 차분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들의 형상'은 무엇이며, '많은 형제들'은 누구의 형제들이라는 말인지, '맏아들'은 또 무엇인지, '독생자'와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장래 운명과도 직결됨으로 소홀히 지나칠 일이 아닙니다. 사실 '맏아들'은 '주님의 부활'과 관련이 깊은 단어이지만, 이것을 바로 이해하려면 먼저 '삼위(일체)와의 관계'와 '성육신의 단계'를 성경적으로 이해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먼저 '삼위일체관'에 대해 교제해 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 내엔 잘못된 삼위일체관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 치고 '한 하나님에게 세 인격이 있으시다'로 요약되는 소위 정통 삼위일체관을 부인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위 (지방)교회 성도들도 물론 이 점을 굳게 믿습니다. 그런데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서 '세 인격'이 '구별'만 되는가 아니면 '분리'되기도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면 '삼위일체'에 대한 그 사람의 참된 이해가 무엇인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됩니다. 보수 정통을 자부하는 장로교 고신 교단의 신대원을 졸업한 손무덕 목사님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

그의 책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중외출판사, 1998년) 서문에서 한국교계의 삼위일체교리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삼위일체 교리는 가르치는 사람도 찜찜하고 배우는 사람도 개운치 않은 실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속시원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속 시원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런데 이단 정죄 위험성을 무릅쓰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을 세워보겠다며 쓰신 저자의 책 내용조차도 '비 성경적' 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성 삼위 하나님은 각각 계신 곳이 다르다'(위 책 22쪽). '성부와 성자는 몸과 생명을 따로 가지고 계신다'(27쪽), '육체를 따로 가지신 성부 하나님'(30쪽), '성 삼위 하나님을 다 합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37쪽), '한 분 하나님이란 예수님이 제외된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함'(35쪽) 등 삼신론 또는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은 아니고 '아버지만 하나님'이라는 끔직한 이론을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위 정통교리를 수호한다는 이단연구가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누가이단인가?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이며 현재 한기총 이단 전문위원인 최삼경 목사님은 (지방)교회측과의 토론에서 '분리된 세 영들', (아버지는 저 멀리 하늘보좌에 계시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신다'는 등 각각 떨어져 계신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계속 주장했습니다(누가 이단인가, 도서출판: 생명나무, 1999, 115-116쪽). '분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분들은 이 외에도 월간 교회와 이단 발행인과 기독교이단문제연구소장인 이 대복 목사님(월간 교회와 이단, 98년 11월호, 57-59, 62쪽 참조), 예장합동 측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포함되십니다(총회교육국 편, 기독교의 이단들, 1997년, 155쪽 참조)'.  

(2) 성경은 동시존재 하시며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삼위 하나님을 말합니다
천연적인 사람의 생각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을 땅으로 보냈으면 두 분이 분리되었으니 땅에 오신 아들 안에는 아버지는 안 계셔야 하고, 또 아들은 높은 저 하늘에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오셨으니 하늘에는 안 계셔야 말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상 구별은 되시나 결코 분리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땅에 오신 아들 안에 계시며, 아들도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에 여전히 계십니다. 이 점은 우리 안의 성령도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와 아들은 하늘 보좌에 계시되 동시에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 안에도 여전히 계십니다. 즉 요한 복음 1:18은 이 땅에 오신 아들이 땅에 계신 그 순간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속에 계심을 말합니다(동사시제가 현재임). 요 3:14도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even 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 영어 KJV참조). 또한 요8:16, 29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 보내심 받은 아들과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요14: 10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서로 안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분리된다는 말입니까? 설사 분리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둘 또는 세 하나님들이 되어 버리니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는 성경 내용과는 다른 이단사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고전8:4, 6, 롬3:30, 딤전2:5, 신4:35, 39, 사45:5). 

(3) 바른 삼위일체관은 삼위가 구별은 되나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믿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론

한 교계신문은 최삼경 목사님과 (지방)교회간의 진리토론을 지켜 본 뒤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걸핏하면 삼위일체론이 틀렸다며 남을 '이단'으로 공격하던 한 인사가 그 자신이 삼위일체론에 있어 이단성이 있음이 제기되어.... 과연 삼위일체의 세 위격이 각기 분리되고 구별되는 '셋'이 정통인지 아니면 셋은 구별되지만 서로 안에 거하시면서 분리되지 않는 것이 정통인지 그 논쟁은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교회연합신문, 1999. 4. 11일자). 그런데 성경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상호내주함으로 분리가 안됨)을 믿으라'(요14:11)고 명령함으로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문제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나 삼위가 구별되실 뿐 아니라 심지어 분리되기도 하신다고 믿으면 뒤에 보게 될 '성육신' 단계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며 이로 인해 '맏아들'에 대한 이해도 혼돈에 빠지게 됩니다. 끝으로 장로교 신학자들 중에는 '삼위는... '디스팅크티오(구별)'이지만, '디비수스'(나누어짐)되거나 '세파라투스(분리)되지 않는다'고 성경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분들도 있음으로 마치 한국 장로교단 전체의 삼위일체관이 틀렸다는 뜻으로 이 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총신대출판부, 1986, 208쪽).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0. 05:00


한국교계에 닫힌 핵심진리 - 『맏아들』- (1)


1. 저는 여러 체험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모든 비밀들을 사도들에게는 열어 보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만졌습니다(고전2:7-10). '맏아들이신 주님'을 아는 것은 이렇듯 신랑 되신 그분의 일기장에 쓰인 비밀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제한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신약의 결론 - 그리스도

(골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설명할 때 '측량할 수 없는''(the unsearchable riches)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합니다(엡3:8). 그는 또 '그리스도와 교회'가 큰 비밀(a great mystery)이라고 말합니다(엡5:32). 신실한 성경 교사들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710쪽 분량)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400개 이상의 명칭을 신구약에서 찾아내어 각각에 대해 풍성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또한 한국복음서원이 출판한 찬송가 집에는 단 한 장(388장)의 가사에서 주, 생명, 능력, 지혜, 공의, 성결, 구속, 평안, 기쁨, 소망, 안식, 빛과 길 등 그리스도에 대한 70 가지 이상의 방면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 넓이, 길이, 높이, 깊이에 있어 위대한 비밀임으로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는데 온 일생을 쏟아 부었습니다(엡3:18-19, 빌3:7-14). 그 결과 사도 바울은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안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구주 예수의 사랑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데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로 이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말은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외에도 성경이 보여주는 비밀하신 그리스도의 풍성한 방면들을 추구하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매우 무책임한 말입니다. 또 어떤 분은 분명히 성경본문에 있고 사도들도 힘써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어떤 방면들을 말하면, 자기가 들어보지 못했거나 자신들의 '교리집 내용'에 없다며 받아들이려 하질 않습니다. 이런 태도들은 '작은 신발에 큰 발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참되게 그리스도를 알려면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가 배운 교리, 자신이 지지하는 신학을 성경말씀보다 더 중요시하고 높이는 분들은 비밀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겸손히 자신을 낮춘 분(벧전5:5), 참되게 주님을 사랑하는 분(고전2:9),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며 마음 눈이 밝아지길 간구 하는 분(엡1:17-18), 영 안에 있는 분(계1:0)이라야 풍성한 비밀이신 그리스도의 각 방면을 계시와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비 된 분들에겐 이런 주제에 대한 교제가 신앙생활의 큰 진보를 체험케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3)  교파와 주의회복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이 다릅니다.  
교파에 계시다가 회복된 교회생활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전자는 객관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밖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체험적인 그리스도 즉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방면이 다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이 쉽게 풀리고 "체험되는" 교회생활은 많은 지체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며, 전에는 경험치 못했던 주관적인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점을 가져오는 주된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the first-born)(롬8:29), 또는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되었나니(the last Adam became the life-giving Spirit)'(고전15:45) 라는 말씀에 대한 빛과 체험이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면, '보좌 앞의 어린양의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계5:6), 이 땅 위의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한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한 머리요 몸이신 그리스도(행9:4, 엡1:22-23, 골1:18), 믿는 이 안과 보좌 위에 동시에 계시는 그리스도(롬8:10, 34),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인자(요1:51, 창28:12), 이 땅에 보내심 받았으나 여전히 하늘 아버지 품속에 계신 아들(요1:18), 이 땅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도 계신 아들(요3:13절 KJV원문),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더라(요7:39) 등의 난해 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런 말씀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는 더 이상 난해구절들이 아니며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 체험하는 친근한 말씀들입니다. 우리가 매일 닮아 갈 원형이신 '맏아들'(롬8:29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잘못되었다면 신앙생활 전체가 빗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매 순간 주의 영을 바라봄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할 시간(고후3:18)에 저 하늘 어디 천당 갈 꿈만 꾸며 헛된 일에 시간낭비하고 있다면 반드시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호랑이를 그리라는 시험문제를 받아 놓고도 토끼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수험생은 시험종료 벨이 울리기 전에 빨리 바른 상황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런 진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 모두를 '맏아들' 또는 '생명 주는 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0. 05:00


에클레시아 교회론에 대한 간략한 반박 (4) - 개혁교회 교회표지와 불일치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1:26

지방교회 영상 - 하늘에 속한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4. 05:00

지방교회에 대한 비난은 오해에서 온 것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지방교회 운영 원칙

 

‘목사’대신 ‘장로’사역자가 교회 관리 운영

거듭난 성도 누구나 다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

한국교회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로 알려져 있는 로칼처치(local church)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로 워치만 니의 신학사상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는 한국교회 외에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측은 한국교회에 왜곡 전달된 자신들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1. 오해 받고 있는 내용들 

첫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 신관에 대해 양태론을 믿는다는데 대해;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 신관의 양태론을 이단사상으로 오히려 정죄한다고 밝혔다. 지방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相互內在) 하시며, 영원히 동시존재하신다는 칼케톤 신조를 굳게 믿는다.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삼위의 동시 존재를 믿는 양태론’은 성립될 수 없음을 잘 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사야 9장6절에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처럼 본문자체가 존재론적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에서의 삼위 간의 동일시는 ‘존재’가 아닌 경륜적인 ‘기능상’의 동일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함께 이같은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을 가르친 것을 일부 인사들이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한다는데 대해;
이 말은 위트니스 리가 다른 근본주의 교사들의 동일한 해석에 동승하여 요한계시록 17장5절의 ‘큰 바벨론, 음녀’를 로마 천주교로 본 것을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는 기성 교회 안의 거듭난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사제도를 부인한다는데 대해;
지방교회도 개교회의 인도자로서 복수의 ‘장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세속 직업을 가진 경우도 있고, 기성 교회처럼 전 시간으로 교회만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기성 교회의 목회자 역할을 감당한다. 다만 지방교회는 이들을 ‘목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장로’라고 부를 뿐이다. 칼빈도 두 종류의 장로론을 가르쳤고, 장로교 헌법에도 ‘목사’를 ‘장로’ 반열에 두고 있다. 또한 초대교회는 주후 4세기 경까지 목회자를 ‘장로’로 호칭했다. 

넷째, 지방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데 대해;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특정 단체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되게 거듭난 교인들의 공동체이고, 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믿는다. 

다섯째 지방교회만 교회라고 한다는 데 대해;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우주교회’(마16:18)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가 거주하는 지역을 범위로 하는 해당 ‘지방교회’(local church)의 일원이다(행8:1, 계1:11). 예를들어 지방교회가 ‘서울교회’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2. 지방교회가 지향하는 것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치되, 특히 성경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고 실행하기를 힘쓴다. 지방교회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요11:25, 골3:4)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엡1:23) 건축하는 것(엡4:16, 마16:18)이 성경의 중심 진리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 최종 완성된 모습이 어린양의 신부인 새예루살렘이라고 한다(고후11:2, 계21:2, 9-10).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백 권의 저술들은 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내용으로 쓰여졌다. 지방교회는 또한 최대한 성경대로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그래서 침례(행8:36-39)를 선호하고, 또 매주 예배시간에 성만찬을 실행하고 있다(행20:7). 

  3. 지방교회의 특징 

지방교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에 관한 객관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의 그분의 몸’(엡1:23)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그러한 객관적 진리를 토대로 삼되 더 전진해서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와 그분에 대한 체험을 강조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27-29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본을 따른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성직자 제도의 폐해를 보고 만인제사장을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론에 비해 실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방교회는 에베소서 4장12절의 권면을 따라 성도들을 온전케 하길 힘씀으로 만인제사장 제도를 실제로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롬15:16), 모든 성도들이 목양하며(요21:15),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도록 격려해 왔다(고전14:1, 4, 23-26, 31).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며(엡4:4) 주님은 분열을 책망하신다고 믿는다(고전1:10-13). 따라서 가급적이면 분열의 요인들은 피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등 몸의 하나를 이루는데 필요한 미덕들을 더 소유하기를 힘쓴다(엡4:2-3참조). 

  4. 지방교회의 신앙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은 한국복음서원이 발행한 신약의 결론(총8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구속과 구원 등 핵심 신앙에 있어서 성경뿐 아니라, 성경에 따라 결의된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초대교부들의 정통 가르침과 교회 역사상 주께 쓰임 받았던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들을 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복음서원도 ‘2천년 교회사 순례’(214쪽)라는 책을 번역 발간한 바 있다. 따라서 주의 회복은 성경과 교부들과 역대의 주의 종들을 통해 계시된 건전한 가르침들을 이어 받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

지방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2 , 교회연합신문 562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클릭)
교회연합신문652호_edit130130.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0.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3편 교리를 성경보다 중시하는 삼신론자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곳 토론 장도 우리 모두는 옛사람의 행위를 떠나 다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분께 받은 부담과 빛을 믿음으로 말해내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이 토론의 글들을 통해 우리의 공통 대적인 사탄과 그로부터 나온 비 진리들은 폭로, 분별, 공개적으로 거절되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바로 알기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에 대한 투명한 이해가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본질적인 토론 내용과 무관한 오해들로 인해 이 토론이 방해받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본 토론은, 이인규님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성경본문 가르침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심과 동시에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안에도 구별됨을 상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심을 믿는 지방교회 입장과, 독립된 인격으로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것은 믿지만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계시지 않으며 만일 그렇게 주장하면 양태론이다 라는 최삼경 목사, 이00 감리교 권사와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어느 것이 이단적인 주장인지를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인규 님이 위트니스 리 책에서 잘못된 내용이라며 퍼다 올리고 임의로 판단한 이런 저런 내용들도 이 근본적인 한가지 차이점에 대해 어느 쪽이 성경적인 가르침을 주장하는지를 분별하면 저절로 해결될 것들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이나 토론 당사자들은 본 토론의 쟁점을 흩트릴 수 있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일들로 인해 혼잡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다만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말하기만을 간절히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또 한가지는 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위 두 가지 대립되는 관점들에 대해 이미 행해졌던 각종 토론 내용들을 제가 쓰는 글에 계속 참고할 것이며 또 때로는 그 자료들을 제 본인의 주장으로 가져다가 사용할 것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혀둡니다. 물론 그 자료들 안에는 월간 교회와 신앙의 지난 게시판, 지방교회 관찰 방에 올려진 내용들도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박00님은 제 오랜 동역자임을 밝힙니다. 이 점에서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론적인 토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와 이인규님은 서로 판단기준이 다릅니다. 한 쪽이 제대로 된 30센티 자를 가지고 30센티 간격마다 표시해 놓은 것을 '잘못된 눈금을 가진 30센티'자를 가진 다른 사람이 재어 보더니 표시된 눈금들이 틀린다며 목소리 높여 외치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이인규님이 위트니스 리 책에서 가져온 본문들을 일일이 반박하는 일도 독자들을 위하여 필요하겠지만 사실은 "누구 자(기준)가 과연 표준인지"를 따져보는 일이 이 신론 토론의 근본핵심이며 시급한 과제입니다. 저는 앞으로 남은 토론에서 쌍방이 이 일에 집중하기를 참으로 원합니다. 

 이인규님은 1)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의 지극히 균형 있고 성경적인 말을 가져와서는 지방교회측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양자론을 주장하며, 네스토리안니즘을 주장한다고 그럴듯하게 말할 줄 아는 분이십니다. 더구나 이 분은 순진한 독자들이 정말 그렇게 믿도록 자신 스스로 내린 결론을 기정사실화하고 반복하여 말하는 순발력도 보여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상상이고 오해요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또한 제가 역사상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사람으로 알려진 아우그스티누스의 '상호내재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면 왜 보편적인 신학자가 아니고 특수한 사람의 이론을 내 세우느냐고 하시고, 한국교계에서 정통신학자의 범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박사학위 논문 포함)을 인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책은 없느냐고 핀잔을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인규님이 말하는 소위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가 매우 의심스러운 대목입니다. 님의 정통교회 기준대로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고 세 분이라고 해야 한다'는 소위 정통교회 교단 소속인 장신대 김명용 교수는 이단입니다. 이00 님은 '니케아 신조= 정통교회 삼위일체론'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바로 그 점이 자신의 어려움인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이인규님의 삼위일체관은 니케아 신조의 장점인 '삼위의 독립된 구별'을 취하되 '독립된 삼위가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 될 수 있나'를 밝히지는 못한 니케아 신조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인규님의 삼위일체관은 '삼위의 독립된 위격'을 지나치게 붙잡음으로 '상호내재' 개념이 비 성경적이며 이단적인 사상이 된 경우입니다. 위 두 가지를 다 취해야 정통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간혹 위트니스 리 책에 언뜻 보면 삼위의 독립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이 보이는 것은 성경본문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이 성경 그대로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삼위의 독립을 인정치 않는 양태론 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결국 요14:10-11을 말씀한 예수님 자신도 양태론 자로 정죄한 최삼경 목사처럼 똑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학과 교리를 성경본문보다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들인 것입니다. 

 3) 게다가 니케아 신조와 관련해서 '인격이라는 단어는 성경용어가 아니고 신학자들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가지고도 지방교회는 니케아 신조 자체를 부인한다느니 지방교회측이 이중성이 있느니 없느니 라는 인신 공격적인 말까지 함부로 하고 계십니다. 니케아 신조는 이단들에 대항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 실체'이심을 명문화하고 '또 우리는 성령을 믿사옵나이다' 라는 문구를 삽입하여 '한 아버지, 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존재를 선포한 의의가 있습니다. 물론 지방교회측도 이것을 믿습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인규님은 '지방교회측을 교회역사에 무식한 양태론자들' 이라는 자신의 거짓되고 부당한 착각의 틀에 밀어 넣기 위해 계속 무리를 하고 계시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단지 인격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또한 더 나아가 니케아 신조 내용이 맞고 우리도 인정하지만 그 한 신조가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모든 방면을 전부 포함하지 못하며 니케아 신조는 진지한 삼위일체 논쟁의 초석을 놓은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뿐이고 사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립된 삼위가 분리되지 않으신 한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 상호내재 개념(페리코레시스)은 니케아 신조 이후에 캅바도키아 교부들에 의해 비로소 정립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식적인 대화조차 공감할 수 없는 토론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저는 다음 세 가지 항목들에 있어서 저와 이00 님 의 입장을 독자들의 입회 하에 집중 검증해 보기를 제안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항목들에 대한 양쪽의 입장을 들어보면 누가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말하며 누가 자신의 교리에 빠져서 결국 성경과 정통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단사상을 가진 자인가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신론 토론은 조기에 종결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삼위일체 진리에 있어서 다른 부분들은 쌍방이 서로 일치하나 다음 세 가지에 있어서 이견이 있습니다. 

  1. 경륜적인 방면에 있어서 삼위의 상호내재에 대한 관점의 차이  

반복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성경본문 가르침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심과 동시에 지상사역시의 예수님(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안에도 구별됨을 상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신다고 토론 초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00님은 존재에 있어서는 상호내재를 인정하지만 '상호관계적인 표현으로 볼 때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금방 간파했지만 독자들은 이인규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쌍방의 입장을 들어보고 비교해 보면 누가 성경대로 말하고 누가 이단사상을 고집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관찰방의 질문을 제 것으로 옮겨와서 이인규님께 재차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인규 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신 분은", 

1) '성부하나님만'이시다(성부고난설 이단사상) 

2)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은 채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이시다. 이 때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심과 동시에 하늘보좌에도 계신다(저와 지방교회측의 주장). 

3) 아버지는 하늘에만 계시고 아들 안에는 안 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은 제외된 '아들 하나님만' 이시다(이인규님 주장)

라는 1) 2) 3) 중 님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만일 님의 주장이 위 셋과 다른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지금 자신의 잘못된 잣대를 가지고 성경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성부고난설'을 믿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고,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등 삼신론적인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위 2)항이 지방교회측 주장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신격의 삼일성이 분리된 세 위격들로 나뉘어 질 수 있다는 관념을 붙잡지 말라. 이것은 누룩이다. ...그 셋(아버지, 아들, 성령)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 한다. 한 분이 이곳(지상)에 있을 때 셋 모두가 이곳(지상)에 있다. 한 분이 하늘에 계실 때 모두가 하늘에 계신다. 그 셋은 항상 하나이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288쪽).

님은 오직은혜님이 이 문제에 대해 관찰 방에서 질문 하자 '지방교회측의 아버지가 예수 안에 계시는 것은 맞지만,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시다는 주장은 다릅니다.'라고 슬쩍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지방교회측이 '아버지가 오직 예수 안에만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까? 또한 님의 이단사상인 '인격 안에 인격은 없다'는 말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이 두가지 점들을 위 질문에 대한 님의 답변에서 상세하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볼 때 님의 이러한 이단적인 관점은 성육신, 인생, 부활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오신 분이 누구신가 에 대하여 님이 가지고 계신 총체적인 혼동의 한 단면 즉 빙산의 일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정통 신학자들과 성경말씀 자체가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이인규 님의 주장이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폭로시켜 주고 있습니다.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삼위의 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후대에 '페리코레시스'라는 이름으로 설명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즉 각 위격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가 다 들어 있다. 각 위격 상호간에 또 위격과 실체간에 '공동내재성' 또는 상호상통성이 있다.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수많은 이단들을 모두 다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는 이 이론의 성경적인 근거는 요한 복음 14:10의 말씀이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박사학위 논문), 29쪽). 

요한 복음 1:18은 이 땅 위에 내려오신 독생하신 아들이 동시에 여전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속에 계시다(현재시제)고 하고, 요3:13 (영어 킹제임스 본문)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사실임과 동시에 여전히 하늘에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님의 '상호관계적인 표현으로 볼 때 독립된 세 인격으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주장은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치명적인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이러한 이단 사상의 극심한 피해는 추후 구원론 토론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될 것입니다. 

  2. 성경본문 자체가 소위 정통 삼위일체교리와 충돌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저는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며 신구약 66권이 다 무오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외견상 불합리하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자기 생각을 따라 함부로 불신하거나 무리하게 체계화 하려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을 포함한 지방교회 모든 성도들의 성경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교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성경본문 자체가 '아버지=아들', '아들=성령'이라고 말함으로 외견상 삼위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성경본문 자체를 불신하거나 함부로 왜곡시켜 해석합니다.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전제하에 이제 이인규님께 질문 드립니다.  

1) 이사야 9:6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들은 누구이며 '영존 하시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2) 고전15:45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살려주는 영)이 되셨나니' 에서 마지막 아담은 누구(몇 격)이며, 생명 주는 영은 누구(몇 격)입니까? 그리고 '되었나니'는 무엇이 언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3) 고후3:17의 '주는 영이시니'에서 앞의 '주'는 누구이며 뒤의 '영이시니'는 누구입니까?  

4) 계5:6 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어린양이 섰는데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누구이며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일곱 영은 누구입니까? 

위 질문들 각각에 대해 이인규님의 해석관점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 성경본문 내용들은 그 자체가 '삼위의 독립된 인격'이라는 교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의 눈엔 양태론 이단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본문 그대로 믿고 말함으로 이인규님 같은 교리지상주의자들에게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든지 아니면 그러한 비난을 피하도록 성경본문을 왜곡되게 해석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이인규님의 두 번째 부딪치는 부분입니다. 소위 님의 요14장에서의 '부활하신 예수님=보혜사 성령'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여기에 해당 되는 문제들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인규 님처럼 소위 정통교리에 따른다면 이단이 되기 싫어서 성경 본문을 엉뚱하게 왜곡시켜 해석해 버리면 그 구절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을 가져오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날 많은 참된 믿는 이들이 자기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과연 누구 신지-성령인지, 예수님인지, 둘 다인지, 아버지는 아닌지....-에 대해 혼란이 있는 것은 이처럼 성경본문을 성경대로 해석하기를 꺼려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위 말씀들을 문맥대로 깊이 연구한 정통 신학자들이 예를 들어 고후3:17의 본문대로 '예수 그리스도=성령'이라고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아래 내용들은 풀러신학교 교수인 루이스 스미디즈가 쓰고 현재 월간 교회와 신앙에 고정 글을 쓰고 있는 현 장신신학원 교수인 오광만 님이 번역하여 국내 기독교계에 소개하신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여수룬, 1991년)의 내용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바울)의 말은 극적이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고린도후서3:17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성령은 삼위일체의 삼위이시다. 바울이 주라고 부르고 있는 예수님은 이제 성령이라고 표현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64-65쪽).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성령은 지상에서 그의 구속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2.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체험되는 그리스도이시다.
  3. 성령은 지금 여기 존재하시는, 그러나 장차 완전히 실현될 새로운 창조를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그의 세상적인 기능들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4. 성령은 새로운 창조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을 위한 객관적인, 그러나 역동적인 규범이시다.
  5. 따라서, 새 언약 안에서의 삶에 관한 한, 성령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다(위 책87-88쪽)'.

저자는 계속해서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교리적인 강설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성령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움직임'-이것이 바로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경륜적인 방면의 삼위일체라는 것임-필자 주-배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아래 글은 장로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 동근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홈페이지인 http://new-jerusalem.org/mean.htm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는 성령이다'의 고찰 : 어거스틴은 '영(성령)을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는 위배이다. 신학이 삼위일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한다면 신학적 삼위일체에 전혀 훼손하지 않는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또는 '예수는 영이시고(고후3:17) 예수의 영은 성령이다'라고 해도 삼위일체를 훼손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는 성령이다'와 '예수님의 영은 성령이다'(또는 '주의 영은 성령이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해석상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똑같은 말이다. 성부의 영은 성자의 영이며 성령이다 라는 성서적 표현만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극복하고 함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미 이 안에 성부는 성령이시며 예수는 성령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하늘나라인 의와 희락과 평강으로 함께 한 작용으로 역사 되고 있다.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면서까지 교리를 세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성령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첫째, 성경의 위배이며 두 번째, 어거스틴의 20여 년 간의 노작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파괴 행위인 것이다.  

신학을 향한 충고:'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이러한 지극히 성경적인 해석은 이외에도 앤드류 머레이, 존 넬슨 다아비, 헨리 알포드, MR 빈센트, 제이 오스왈드 샌더스 같은 신실한 정통 신학자들도 주장하는 것입니다(신약의 결론-하나님 331-332쪽). 성경을 섣불리 알고 자신의 교리만을 중시하는 일부 사람들이 함부로 '양태론'이라고 경솔한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성경대로 믿는 것이 곧 삼위의 구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결론 - 하나님

 '어떤 비평가들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요(사9:6), 그 영(고후3:17)이라고 가르칠 때, 그는 신격의 세 위격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부인하고 삼위양식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한다. 비평가들이 ...마 3:16-17을 믿는지를 물어 본다면, 나는 마 3:16-17을 믿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관계된 모든 구절들(계1:4-5, 고후13:13, 엡3:14-17)을 다 믿는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아버지, 그 영, 그리스도는 모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양태론자라는 비난은 거짓된 것이며 나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부인한다.'(윗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305-306쪽). 

3.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완결된 영)에 대한 이해 부족 

이인규 님은 지난 글에서 '첫 번째 영은 생명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친 하나님 자신이다. 이 영은 최종 완성된 삼일 하나님이다'라는 위트니스 리 형제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호내재한다고 하여 양태론이 아니라는 주장은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 중 하나로 님이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인규님이 분리된 셋을 주장하는 증거입니다.  

이인규 님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한 고전15:45에서 '생명주는 영'이 아래 넷 중 무엇이라고 해석하십니까? 생명주는 영은,  

1) 예수님의 사람의 영을 가리킨다. 

2) 1격과 2격은 제외된 3격 성령하나님(보혜사 성령)이시다. 

3) 1격과 2격도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 내재하시는 3격 성령님 이시되 예수님이 성육신 때 입은 인성은 절대로 포함되지 않았다. 

4) 생명주는 영은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됨을 상실치 않고 상호 내재하시는 아들하나님(또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다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 + 예수님의 영화롭게 된 인성(육신) 즉 신성과 인성을 포함한 복합적인 영이시다. 

물론 4)이 저와 지방교회 측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성경적이고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진리입니다. 앤드류 머레이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님도 위 본문 말씀에 대해 저처럼 빛비춤을 위트니스 리 책자를 보는 눈의 비늘이 한 꺼풀 벗겨지는 체험을 하시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요한 복음 7:39에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님은 2)번 또는 3)번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저와 이인규님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차이가 위트니스 리의 가장 균형 잡히고 성경적인 삼위일체관련 언급들이 님의 눈엔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핵심원인인 것입니다. 이제 이 구절에 대한 님의 해석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주실 차례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기준들에 대한 쌍방의 이견들이 풀리면 이인규님이 지난 글에서 이것저것 문제점이라고 갖다가 제시한 내용들은 다 풀려나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4. 그 외에 몇 가지 추가적인 문제들  

 1) 소위 10가지 질문들에 대하여 

위의 님의 질문들은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와 인격적으로 구별된 삼위가 각기 다른 삼위라는 전제가 정당해야 답변의 가치가 있는 질문들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상호내재 하시는 아버지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각기 다른 분이라는 님의 삼신론 이단사상이 맞다고 볼 때 성립되는 질문입니다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계신 아버지와 저 하늘 보좌에 계신 아버지가 다른 분이라고 보는 님의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셨고(요8:16, 29), 부활 승천 후 하늘 보좌 우편에 게신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지금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십니다(롬8:10, 34). 그리고 이 분은 각기 다른 두 분이 아니고 동일한 한 분이십니다. 이 점이 해결되면 모든 의문이 해결되실 것입니다. 

 2) 분리와 독립의 차이 

 이인규님은 분리와 독립을 왜 상호내재와 연관 짓느냐고 항의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 인격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이 곡 상호내재의 부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님은 지금 계속해서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되심을 잃지 않은 상태로 상호 내재하신다는 지방교회측 주장을 양태론 이라고 정죄하고 계시고, 삼위의 관계 안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고 고집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님이 삼위의 구별에서 지나쳐 분리를 주장하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님이 이단적인 신관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할 사항이지 누가 사과할 문제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3)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에 대하여 

님은 엉뚱하게 로마서 1:4의 아들 하나님이 부활 후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말을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님의 억지 정죄와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님은 이런 말을 하실 때 잘 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고 한다'는 님의 말과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창조된 것들 가운데 첫 번째,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 이심을 계시한다'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듣는 사람들에게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심과 동시에 피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성을 분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통상 '예수님이 하나님 사람이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을 님처럼 예수님의 양성을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이다 라고 꼬아서 들을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요. 골1:15-18에 대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 우리도 님 이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추후 더 상세히 말할 필요가 있다면 그 때 하기로 하겠습니다. 

진리의변호와확증

님의 이런 엉뚱한 정죄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지방교회의 다양한 이단성'이기는커녕 이미 그 모든 항목들에 대한 반박자료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케케묵은 거짓 정죄들일 뿐입니다. 그 한가지 증거만 제시한다면 님의 피조물 운운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대한 반박의 글은 지금부터 20년 전에 이미 쓰여졌고 '진리변호와 확증'(한국복음서원) 122-128쪽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님은 자기 생각만이 항상 옳은 것으로 착각하는 일을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신학교리는 성경본문의 이해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소위 정통교리라고 알려진 것이라고 해도 성경본문을 왜곡시키거나 부인케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본문을 기준으로 그 교리를 수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성경은 다 우리의 체험과 누림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진리에 교리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다만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기를 주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교리나 혹은 성경을 남을 부당하게 정죄 하는 도구로 가볍게 사용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를 보존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9. 05:00

신성한 삼일성 (또는 삼위 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계시는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 (인격) 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a living soul)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그 영 (the Spirit)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여기에서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그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성경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하고,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으므로 이제 영이시라고 불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임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해석들이 그 모든 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의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monarchia) 곧 유일성(unity)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영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그 영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2 나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1] 10-11쪽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되는데, 그 구절은 아버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한다. 또한 아들도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해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도 그분을 두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욱이 그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한다. 따라서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하시다… 요약하면,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7-38, 42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 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성경이 어떻게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 (相互內在) 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절, 23절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이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은 아버지의 운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삼일성 안에는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 상호 왕래 (inter­communion) 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 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장로훈련3권-이상을 실행하는 길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는 아들께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 (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우리는 삼일성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 확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신성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알기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 바랍니다.


[1]  본 고에서 인용된 LSM자료들의 대부분은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