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 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2.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3.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4.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나 주님 만날 그날도 난 알 수 없도다 (후렴)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아침에 아래 베드로전서 1장 10-12절 말씀을 먹으면서, “은혜”라는 단어가 더 새롭게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습니다”(갈2:21).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5:4)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거나,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얻을 은혜에 대하여 예언한 신언자들이 이 구원에 관하여 부지런히 찾고 살펴보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을 미리 증언하신 것이 어느 때 어떠한 시기를 가리키는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신언자들은 자신들이 전파한 이러한 것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
천사들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보기를 갈망합니다.”
위 말씀에는 네 부류가 등장합니다. 즉 구약의 신언자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신약 사도들, 천사들, 그리고 은혜 혹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우리 신약의 믿는 이들입니다.
또한 구약의 신언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살펴본 것”, 신약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 천사들도 자세히 보기를 갈망했던 “이러한 것들”은 다 같은 내용입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거쳐 신약의 믿는 이인 우리에게 도달한 ”여러분이 얻을 은혜” 곧 “이 구원”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통과해야 했고, 천사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신언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는지를 묵상해 볼 때, 우리가 소위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매일 매일 족한 은혜를 누리고 있음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위 본문은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메시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에 관하여, 먼저 구약의 신언자들이 예언했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장차 고난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22편 1절, 6-8,절 12-18절, 이사야 53장 2-10절, 12절, 다니엘서 9장 26절, 스가랴 12장 10절, 13장 6-7절 등에서 묘사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16편8-10절, 22편 21-22절, 118편 22-24절, 110편 1, 4절, 118편 26절, 스가랴 14장4-5절, 시편24편 7-10절, 72편 8-11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신언자들은 위와 같은 내용을 자신들의 입으로 예언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또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신약의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을 뿐”입니다(벧전1:12).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된다는 것”(마16:21)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너무나 엉뚱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며 주님을 책망했고, 세베대의 아내는 곧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께 자신의 두 아들의 출세를 청탁했고, 다른 열 제자는 그런 두 형제에게 분개했습니다.
한편 우리에게 은혜로 오시기까지 거치셔야만 했던 이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문제는 부활 후에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잠시 더 머무시던 때에 아래와 같이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심으로 조금 더 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에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한 것, 곧 모세의 율법과 신언서와 시편에 나에 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생각을 열어 주시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일의 증인들입니다(눅24:44-48).
그 결과 신약의 초기 증인들이었던 사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실재를 체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능력이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즉 생명 주는 영 안에 녹아 있음을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또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신 주 예수님을 우리 존재 안으로 영접하는 것이요, 완전한 구원은 이 은혜가 우리의 영으로부터 혼으로 또 몸으로까지 적셔지고 확대되는 것임을 알기까지는 제게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오,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몸을 내밀고 목을 길게 빼고” “자세히 보기를 갈망”한 그 실재를 우리는 지금 직접 체험하고 누리고 있다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벧전1:5).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매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다만 이 은혜를 얻고 누리는 것뿐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 되신 그분을 버리는 것이요,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렘2:13)!
묵상이 이 대목에 이를 때 제 안에 다음과 같은 찬송가 가사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은혜에 대한 참된 정의는/ 아들 안에 주신 하나님 자신/ 은혜는 어떤 사물 아니요/ 내 분깃 되신 하나님 자신(376) 주님과 함께 죽고 사니/ 내가 할 일이 무엇이랴/ 허공을 치듯 분투 않고/ 새 생명 좇아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364).
오 주 예수님,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던 그 은혜”(딤후1:9)!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입장과성도의견인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 각자의현실을되돌아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5]
- 앞으로다룰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교회의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신구약에서의구원의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성령의내주: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롬9: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라고 하셨습니다.
(11:5) 그러므로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의 선택을 받은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선택에 관계된 긍휼과 은혜를 이해하기는 약간 어렵습니다. 비록 영원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미리 아셨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가련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대적 사탄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선택한 이 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가련합니까! 그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탄아, 너는 이 상황이 내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인 줄 모르느냐! 이런 가련한 사람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나의 긍휼을 베풀 수 있겠느냐? 만일 모든 사람이 완전하여 너의 기준에 도달한다면, 내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탄아, 선택된 이 사람이 바로 나의 긍휼을 입을 사람이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우리 존재 안으로 역사해 들어오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은혜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고 그분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장 가련하고 비참한 상황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고 우리가 회개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신성한 것-하나님의 은혜-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은혜 즉 그 영이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인격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고 은혜를 입어서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오늘의 만나
창세기 6장 8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은혜를 언급한 곳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이렇게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여, 나에게는 매분마다 당신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은혜로우신 분이며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은혜가 있음을 압니다. 주여, 은혜에는 나의 동역이 필요하다는 것도 압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은혜를 입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상황을 견딜 수 없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맞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라는 곳이 있습니다. 때맞추어 도움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여러분이 창세기 6장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여기에서의 은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많은 것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노아에게 오셔서 그와 함께 계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노아의 힘이며 능력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누렸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혼잡한 세대, 아무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는 세대 안에서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강하게 하셨으며 그와 함께 서 계셨으며 그를 부축하셨습니다. 노아가 입은 것은 은혜였고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