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9. 6. 5. 00:05

지방교회 동영상 생명이만나 131회

하나님을 친구 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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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9. 4. 16. 00:10

찬양 413회

우린 하나님 만드신 걸작품 

(내마음의 노래 64장)




지방교회 - 찬송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26. 05:00


1976년 10월 11일

Mr. Robert Passantino
Research Associate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Walter R. Martin, Director
Box 500
San Juan Capistrano, CA 92675

친애하는 로버트씨께:

최근에 우리가 가졌던 토론과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제목의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귀하의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인 대답과 분석에 앞서 우리가 가졌던 세 시간에 걸친 대화에 대해 진술하고자합니다.

다음의 사항을 고려해 보면 우리가 대화를 가졌던 상황은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논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귀하가 전에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는 것과 귀하가 월터 마틴의 동료 연구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귀하 또한 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제가 어떤 입장에서 글을 쓰는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실 수 있도록 제 자신에 대하여 조금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장로교 계열의 대학과 드류 신학대학(School of Theology of Drew University)을 졸업했습니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 감리교단에서 사역을 했었고 1958년에 교리적인 이유로 감독교회의 신도(Episcopalina)가 되었고 그 교단에서 성직자 안수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감독교회 성직자 인명부를 찾아보면 제 이름이 교회법에 의거해 스포케인(Spokane) 관구에 거주하는 높은 직위의 목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지난 12년 동안 현역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데니스 베넷(Dennis Bennett) 신부님의 간증을 통해 저는 1962년에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움직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수 년 동안 소위 “오순절 부흥”(Pentecostal Revival)이라 불리는 곳에서 활동했습니다. 1968년 말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긍휼로 말미암아 제 눈이 열려 오늘날 이 땅에서의 주님의 최근의 움직임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온전히 주의 회복에 드려졌습니다.

이제 귀하의 소책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내가 볼 때 귀하의 소책자는 (1)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고 (2) 개인이나 단체를 평가하는 귀하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3) 이 소책자의 본론은 두 가지 요점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a) 교회에서 가르치는 삼일성의 교리와 (b) 위트니스 리가 가르치는 모순들이 그것입니다. (4) 그리고 귀하께서는 교회로부터 나오라고 했습니다.

귀하께서 편지로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달라고 요청하셨으므로 제 솔직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첫 답변은 욥기 35장 16절 하반절과 38장 2절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말의 주된 용도 중의 하나는 진리를 전달하고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진리와 빛은 지식에 근거합니다. 지식이 없이는 말만 많아지고 어두움의 그림자만 드리울 뿐입니다. 이것이 귀하의 소책자에 대해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그 소책자는 “말을 많이 하고” “이치를 어둡게 합니다.” 진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그 소책자는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괜한 비난이 아닙니다. 귀하의 소책자의 내용 중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 대중들에게 제시되었지만 명백히 거짓말이며 부정확하고 왜곡되었고 비방이며 거짓말인 부분에 대해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그 한 예로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위트니스 리와 힌두교를 비교하는 것은 진리와 거리가 멉니다. 귀하께서 실상을 파악할 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귀하께서 우리에 관한 진실을 철저히 아는 것은 귀하 자신과 독자들에 대한 귀하의 의무입니다. 또한 제가 귀하의 글에서 받은 인상을 쓰는 목적이 귀하를 정죄하기 위함도 아니고 우리를 변명하기 위함도 아님을 확실히 하고싶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귀하가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한 실상을 더 명확히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에서입니다.

표지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그림은 누구를 묘사합니까? 위트니스 리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누구입니까? 그 그림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까? 조롱이 당신이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입니까? 로버트씨, 귀하는 독자가 이 소책자를 열어보기도 전에 그 표지를 통하여 귀하의 태도를 들어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귀하의 책자를 받았을 때 표지를 보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문제를 조롱하는 형태로 제시해야만 하는 사람은 진실의 대변자로서의 자격에서 한참 미달된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제 이 소책자 자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책 전체에 걸쳐 모든 왜곡된 것들에 대해 반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거의 단어 하나 하나 마다 반론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구절을 제대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한다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를 인용하겠습니다. 먼저 귀하가 말하길:

지방교회는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위트니스 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중국에서 건너왔고 한때 크리스챤 신비주의자인 워치만 니의 제자였으며 동양에서 이미 몇몇 교회를 시작했었다. 대부분의 지방교회 신도들은 복음주의 교회들로부터 나왔다. 지금 이 집단의 신도 수는 미국 전역과 해외에 걸쳐 수 천명에 이른다. “본부”는 캘리포니아의 아나하임 교회(the Church of Anaheim)에 있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들을 방문하지 않을 때에 아나하임 교회에 참석하며 그곳에서 가르친다.

  1. 교회의 간증은 하나님에 의해 1922년 중국에서 워치만 니 형제님을 통하여 그의 고향인 푸차우(Foochow)에서 세워졌습니다.

  2. 위트니스 리는 20년이 넘도록 워치만 니의 동역자였습니다.

  3. 귀하는 워치만 니를 “크리스찬 신비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웹스터 사전은 “신비주의”에 대해 “신비스러운(occult) 혹은 비밀스러운(esoteric) 종교; 비밀스럽고(mysterious) 불가사의한(enigmatic)”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워치만 니는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시대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즘 주요 서점치고 그의 책을 팔지 않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문자그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사역으로부터 도움을 얻고 방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명성을 훼손시키는 수식어를 그에게 사용했습니다.

  4. 저는 지방교회의 대부분의 지체들이 “복음주의적 교회들”에서 나왔는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저의 경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그들이 일단 지방교회에 있으면 복음주의적이라는 것입니다. 제 이해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나하임 교회(the church in Anaheim)와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의 사역이 함께 출판한 “간단한 소개(A Simple Presentation)”라는 책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1. 우리는 성경의 단어 하나 하나가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완전하고 신성한 계시인 것을 믿는다.

    2.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등하게 존재함을 믿는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속주와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성육신하셨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믿는다.

    4. 우리는 참 사람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삼십 삼 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사셨음을 믿는다.

    5.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

    6.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기 위해 생명 주는 영이 되셨음을 믿는다.

    7. 우리는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에 오르셨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만유의 주로 삼으셨음을 믿는다.

    8.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분의 택하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몸 안으로 침례 받게 하셨음을 믿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운행하시면서 죄인들을 회개케 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거듭나게 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들 안에 거하면서 생명을 자라게 하고 그분 자신의 충만한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을 믿는다.

    9.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체들을 맞이하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얻으시며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

    10. 우리는 이기는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복에 참예할 것을 믿는다.

  5. “본부”는 귀하의 용어입니다. 그것은 귀하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본부”나 그에 상응하는 어떠한 말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6. 귀하는 “아나하임의 교회(the Chruch of Anaheim)”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귀하에게는 작은 문제일지 모르나 우리는 결코 어떤 도시의 교회(the church of any city)라고 하지 않고 대신 아나하임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Anaheim)나 시애틀에 있는 교회(the churc in Seattle)라고 합니다. 이것은 귀하의 책자에서 아주 많이 발견되는 부정확성의 한 예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의(of)”라는 단어에는 14가지 의미가 있고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근원” 혹은 “유래”입니다. 이 의미에 따르면 교회가 아나하임“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거나 교회의 근원이나 유래가 아나하임이라는 것입니다. “~안에(in)”라는 단어는 특별히 “경계가 있는 장소의 안쪽에 있는 것을 의미하고....범위의 면에서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이것이 바로 헌팅턴비취(Huntington Beach)에 있는 교회나 아나하임에 있는 교회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교회의 근원과 유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교회의 위치와 경계, 범위는 도시에 따른 것입니다 (계 1:11).

귀하는 “교파건 이단이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집단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라고 했습니다.

  1. 멜로디랜드 신학교(Melodyland School of Theology)의 총장 윌리암스(J. Rodman Williams)는 오순절의 실제(The Penteostal Reality)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다음 인용은 100-101쪽에 있는 6장 “거룩한 삼일성”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제 논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신조(信條)와 교리의 진상을 살펴서 성경 말씀 자체로 되돌아가려고 해왔다...그러나 사실상 성경에는 삼일성의 교리가 없다. “삼일성”이라는 말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고 “삼일성 안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안에 삼일성”이라는 말도 찾아볼 수 없으며 구원받기 위해 이것을 믿을 필요성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교리를 위한 원 재료(raw materials)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많이 언급하고있는 한편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교리(삼위일체 신학을 함축)의 재료로서의 성경의 기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삼일성 혹은 삼일로 믿는 것이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종종 사람들을 사색하게 하고 추상적으로 이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붙잡아야할 교리나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살아야할 삶의 문제이다.

  2. “교파 혹은 이단”이란 단어들은 교회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교파는 분열이고 이단은 믿음이나 실행에 있어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한 것이 그 특징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분열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우리의 입장은 교회의 입장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입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교리”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개인이든 집단이든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1.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위한 기본적 자격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지만 사람이 거듭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하고(엡 5:17)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합니다”(골1:9). 더 나아가 로마서 12장 1-2절은 사람이 그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며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지” 않으면 그가 결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은 합당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사람의 생각은 합당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입장이 있고 생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합당한 환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엡5:17) 위치와 상태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단순히 합당한 교리, 심지어는 하나님에 관한 합당한 교리를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합니다.

  2. 위트니스 리의 ‘생명의 체험’이라는 제목의 책 159-165쪽을 인용하겠습니다.

생명의 체험

사실상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직업이나 결혼과 같은 사소한 일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다. 그들은 이 구절을 너무 일상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작아 보이게 하고 과소평가한다. 우리가 신중한 태도로 신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뜻을 연구한다면 이것이 위대하고 고원(高遠)한 문제를 지적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장 17절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평범한 구절 같아 보이지만 에베소서의 문맥은 이 구절의 심오함을 드러낸다. 에베소서는 성경에서 매우 특별한 책이다. 이 서신의 많은 단어와 원칙들이 하나님과 영원에 대해 말하고있다. 그러므로 거기서 언급된 하나님의 뜻은 단지 평범하고 하찮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욱이 에베소서 5장은 앞의 장들에 기초를 두고있다. 1장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말하고(9절) 3장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을 말하고있다(11절). 이 구절은 모두 매우 위대한 것들을 언급한다. 그 다음 5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앞에 언급된 위대한 일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삶의 사소한 문제들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언급된 다른 구절들인 골로새서 1장 9절, 로마서 12장 1-5절, 히브리서 10장 7절과 히브리서 13장 20-21절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습니다:

이 성경구절들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여 우리에게도달하는데 영원에서 현재로, 하늘에서 땅으로 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뜻은 대단히 위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과거의 관념과 얼마나 다른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의 관념을 바꿔주시기를 기도한다.

위트니스 리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정말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며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고 하나님의 뜻은 그분의 계획의 성취라는 세 가지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하는 기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주 안에서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분의 아들의 비밀스러운 신부가 될 단체적인 사람을 갈망하신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지방에서 무엇을 하시는 지도 알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만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계획 안에 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의 직업으로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업을 할 때나 가르칠 때나 무엇을 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한다. 우리의 온 삶과 활동은 모두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만질 수 있는 입장과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의 모든 일들에 대한 그분의 인도하심에 대하여 분명해질 것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의 갈망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여기에 제시된 것처럼 깊고 철저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귀하는 “거룩한 삼일성에 대하여 지방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는 교회사에서 일반적으로 삼위 양식론(양태론, monarchianistic modalism)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의 가르침의 결과 주후 3세기에 생겨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양태론”은 서머나에서 노에투스(Noetus)라는 사람에 의해 2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전개되었습니다. 3세기에 사벨리우스가 이를 취하여 가르쳤는데 그 이래로 그의 이름이 항상 따라다니게 된 것입니다.

  2. 교회가 가르친 교리는 “양태론”이 아닙니다. 양태론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세 연속되는 상태 즉 처음엔 아버지, 두 번째는 아들, 마지막으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양태론적 관념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양태론에 관한 우리의 태도는 위트니스 리와 그의 동역자들이 쓴 “성경의 빛 비춤으로 드러나고 반박된 거짓 비방”이라는 소책자에 매우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영원성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성경은 마태복음 3장 16, 17절에서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4장 16, 17절에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은 분명히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시에 존재함을 분명하게 계시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공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서도 분명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에베소서 3장 14-17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믿는 우리는 따라서 우리를 양태론과 연결시키는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거부합니다.

우리는 또한 귀하가 인용한 어거스틴(Augustine)의 글에 반영되어 있는 삼신론(trithesism)에 대해서도 기탄없이 거부합니다.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다. 성령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확실히 세 분이 있는 것이다.”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하면 아들은 아버지라 불리고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의하면 주는 영입니다. 멜로디랜드 신학교 총장은 그의 책 ‘성령의 시대’의 10-11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다...주는 또한 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세 분인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tri)-일(unus)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분이며 영원히 세분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위트니스 리의 책 ‘삼일 하나님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29쪽에 매우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일 하나님은 한 분 안의 세 분(three-in-one)인 방면과 세 분 안의 한 분(one-in-three)인 방면이 있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으로 그분은 “나”이시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으로 그분은 “우리”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 분의 방면으로부터 “말씀은 하나님”이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한 분 안에 계신 세분의 방면으로 “주는 영이시고”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주의 영”(고후3:17)이다. 한 분 안에 계신 세분의 방면으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고(요10:30, 14:7-11), 세 분 안에 계신 한 분의 방면으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고(요1:1, 2) 아들은 아버지와 영광을 나누고(요17:5)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이고(요17:24)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요17:11, 21, 22)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한다(요14:23).

귀하는 귀하가 “경륜적인” 삼일성이라 부르는 것을 “내재적인” 삼일성과 비교하면서 교회가 하나님이 내재적으로 삼일이심을 믿지 않는 것처럼 암시했습니다. 

하나님의경륜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한 분인 동시에 세 분이시며 항상 그러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일하나님이 우리에게 체험적이고 경륜적이 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교리적으로 삼일성을 믿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단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 17쪽에서 위트니스 리는 그것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체험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은 영 안에 있으며 영은 하나님의 전달로서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과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항상 전달하고 있다. [할렐루야]

귀하는 “만일 삼일성 교리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월터 마틴의 정의-가 옳다면 양태론자들에게 몇몇 문제점들이 발생할 것이다. 어느 집단이 가르치는 양태론이든 그 이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나 약점은 신격을 구성하는 분들의 “주객관계(subject-object relationship)”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방)교회 안의 우리는 양태론자가 아니므로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하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주객관계”와 같은 사람이 만들어낸 조잡한 범주를 적용하는지 의아합니다. 그런 관념을 어디에서 취하셨습니까? 그러한 관념을 어느 철학책이나 심리학책에서 발굴해 하나님의 말씀에다 강제로 적용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속박함으로써 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며 아무런 방해 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관념을 하나님의 말씀에 강요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간섭이 없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저는 듣기 원합니다.

[귀하는 말하길]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양태론자에 대해 몇몇 질문들이 생겨난다. 예수님이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는가?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목소리를 흉내냈는가? 예수의 침례 때는 예수가 성령의 나타나심을 흉내낸 것인가? 누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말했는가? 아버지가 “그를 들으라”고 했을 때 아들은 어디 있었는가? 아들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어디 있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렸던 위대한 기도인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는 거짓이란 말인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뜻에 양보했던 것은 환상인가? 다시 말하면 양태론자에게는 많은 성경구절들이 더 이상 그것이 말하는 바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안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정확히 말하는 그대로를 의미합니다. 제가 믿기로는 우리가 귀하보다도 더 성경을 믿습니다.

  1.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2.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땅에 있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3. 예수의 침례당시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의 모양으로 아들 위에 내려왔고(마 3:16)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4. 아버지가 “저를 들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들은 변형산에 계셨고 아버지는 구름으로부터 말씀하셨습니다(마 17:5).

  5.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습니다.

  6.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눅 23:34)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신성모독입니다. 그 말들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의미합니다. 그 기도는 그분의 살인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7.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는 환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들로서 그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양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 대해 잘못 전함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성경말씀 그대로를 믿습니다.

지금까지 귀하가 인용하신 구절들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귀하는 우리의 글들 중에서 귀하의 비난을 지지할 만한 어떠한 것도 인용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귀하의 소책자를 읽는 정직한 독자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귀하의 말을 받아들일 만큼 잘 속는 사람들이 아닐 것입니다. 귀하가 몇몇 문장들을 인용했을 때 귀하는 서로 다른 두 책에서 짧은 네 개의 인용문을 맥락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인용했습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가 특별히 삼일하나님을 주제로 하여 쓴 책은 무시한 채 문제의 한 면에만 치중하여 참고자료을 인용했습니다. 네 인용문들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물의 결코 마르지 않는 근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체현되셨다.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곳에서(딤전 6:16)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그분이 그분자신을 나타내려고 오셨을 때 그분은 아들이다. 우리는 주님이 아들이고 그분이 또한 아버지임을 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이 영이시라는 것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주 그리스도가 영이시라는 것에 분명해야한다.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표현으로서 그분은 아들이다. 전달로서 그분은 영이시다. 아버지는 근원이시고 아들은 표현이고 그 영은 전달, 교통이다. 이것이 삼일 하나님이다.

위의 모든 설명은 하나님의 한분 안의 세분으로서의 방면입니다. 왜 귀하는 우리가 하나님이 또한 세분 안의 한분이심을 믿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은 인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위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 6쪽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 8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한 면으로는 “내가”라고 하셨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우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내가” “우리”이며 “우리가” “나”임을 증명한다. “나” 와 “우리”는 동일하다. 그러면 하나님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복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나”라고 하실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단수라고 한다면 그분은 “우리”라고 하실 것이다. 이것은 비밀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더욱이 창세기 1장 26절과 3장 22절과 11장 7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자신을 “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성한 말씀 안에서 많은 경우 그분 자신을 “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진정 이해하기 힘든 비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신격의 세 인격-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의 한 부분을 독립적으로 인용하여 제시하며 귀하는 그가 말한 것과 힌두교를 동일시했습니다. 로버트씨, 이 시점에서 저는 귀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이 살아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귀하가 교회와 힌두교를 동일시하는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방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있어서 힌두교와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교회의 삼일성을 힌두교의 삼일성에 대조한다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신격이 세 개의 주요 방면 또는 양태인 창조적, 보존적, 파괴적 방면으로 축약된다. 창조적인 방면으로는 브라마(Brahma)로 나타나며 보존적일 방면으로는 비쉬누(Vishnu)로 나타나고 파뢰자로서는 쉬바(Shiva)로 나타난다. 이 세 신격이 힌두의 삼일성을 조성한다.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복음주의적이며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힌두교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사악한 중상 모략입니다. 제 생각에 이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귀하가 “모순”라고 말한 부분인 귀하의 소책자의 두 번째 주요 부분을 봅시다.

지방교회에 대한 두 번째 주제로서 우리 필진은 지방교회 운동의 창시자이자 우두머리인 이 선생의 가르침 안에 있는 모순들에 대한 자료가 필요함을 느꼈다. 

지방교회가 교회 소유의 출판사인 리빙스트림을 통해 출판했던 서적들을 조사하면서 우리는 이 선생의 많은 교리 중에서 어떤 것이 정확하게 이 선생을 대표하는지 찾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어떤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그와 반대되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론은 우리가 이 선생과 지방교회에 대해 공평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 그대로, 모순이 전부인 그대로를 정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경은 야고보서에서...“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자로다”라고 말한다(1:8).

로버트씨, 많은 문제가 귀하가 강조점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의 한 면이 강조될 때 말하여진 것이 그 일의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면이 강조될 때는 그것이 주된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가 강조될 때는 우리가 찬미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찬미가 강조될 때는 우리가 기도를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건물의 앞면을 보여줄 때 귀하는 어떤 특정한 특징들을 지적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마치 귀하가 다른 세 면에도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건물의 뒷면을 설명할 때는 앞면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뒷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좋은 예가 성경에 있는 표면적 모순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향해 열려있던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의 강조점은 다릅니다. 문제의 다른 면이 강조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강조는 구원에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은 종교의 어두움 가운데서 그의 시각을 되찾게 된 소경에 관하여 말합니다. 눈먼 종교적인 자들은 눈을 뜨게된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그 고집 세고 눈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강조의 문제를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성경이나 위트니스 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출판사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출판은 일(사역)의 방면으로 행해집니다. “교회”와 “일”의(행 13:1-2) 성경적인 차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워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이란 책을 읽으면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해질 것입니다.

귀하는 우리가 실행하는 기도로 말씀 읽기가 성경과 모순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이 선생의 가르침은 종종 성경과 모순된다. 하나님에 대한 것 외에 다른 가르침들에서도 그렇다. 예를 들어 ‘주님과의 시간’이란 책 10-11쪽에서 이 선생은 “단지 말씀을 기도로 읽어라.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기도해라...성경의 어떤 장 어느 줄 어느 단어를 펴서 그 부분의 말씀으로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 방식과 리빙스트림에서 출판한 “기도로 말씀 읽기”를 따라서 “기도로 말씀 읽기”를 해보자. 누가복음 23장 21절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를 기도로 읽어보자. 이 구절을 기도로 읽는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예수님! 못박으소서! 할렐루야! 못박으로서. 오 주여! 감사합니다, 예수님!” 우리가 인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에 “아멘”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6장 7절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한다.

이 비판에 대하여 세 가지를 언급하겠습니다.

  1. 위트니스 리의 인용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어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기도로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어떤 장이나 줄이나 단어를 펴고 그 부분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2. 귀하는 누가복음 23장 21절 말씀을 기도로 읽는 예를 보여주셨습니다.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우리는 아주 간단하게 우리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호흡, 헬라어 참조)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이라”를 믿는다고 말하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호흡이라면 우리가 들이마쉬기 위함입니다. “네, 주님. 당신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3. 귀하는 이것이 의미 없는 반복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반복은 중언 부언이지만 어떤 것은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호흡하는 것은 심히 필요합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또 다른 모순으로 보이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해 이 선생은 (‘주님 만지는 간단한 길,’ 3-4쪽)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문이 닫혀있는 곳에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그분이 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 닫힌 방 안에 들어가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성경은 영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불멸의 영적 몸으로 들어갔다고 가르친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했다....하나님의 경륜 47쪽에서 이 선생은 반대로 말하고있다. “그분이 부활하신 날 밤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오셨다. 모든 문이 닫혀있었지만 그분은 육체로 들어오시고 제자들에게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단지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한 면으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이 생명 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b)”라는 구절을 알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것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24장 39절 역시 명백합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두 문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위트니스 리가 둘 모두 참되다고 했을 때 그는 단지 성경을 인용한 것입니다.

귀하는 위트니스 리가 성경과 말씀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모순을 찾습니다. 

성경과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는 지방교회의 교리에서 종종 모순된다. 이 선생은 ‘기도로 말씀 읽기’의 6-7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과 본성은 영이다...그 영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체이다...이 책(성경)의 본성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다”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별로 그리스도를 찾기’의 13쪽에서 이 선생은 이것과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조심하라, 성경은 성경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중의 방면이 있습니다: 문자이며 또한 영인 방면이 그것입니다. 의문(letters, 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고후3:6). 요한복음 6장 63절에 따르면 말씀은 영과 생명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40절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상고할 수는 있었지만 생명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으로 올 때 그는 또한 반드시 주님께로 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단지 성경의 죽은 글자만을 만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을 만질 때 주님을 또한 만진다면 말씀이 영과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를 전하는지 말씀의 생명을 전하는지는 전하는 이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할 수 있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사역은 말씀 안에서 주님을 접촉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이것은 지방교회 안의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2. 저는 귀하가 성경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 한 문장만을 인용했던 ‘살아있는 별로 그리스도를 찾기’에서 전체 단락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12-13쪽에서 위트니스 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문자를 단순하게 신뢰하지 말라. 그렇게 한다면 무엇인가를 놓칠 것이다. 말씀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단순하시지 않다. 구약에 선지자가 있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도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의미에서 “은밀”하다. 하나님은 그다지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이지 않으시며 대단한 선전과 함께 오시지도 않는다. 어린 아기 예수도 은밀하게 오셨다. 만약 당신이 성경적인 면에서 율법적이라면 당신에게 하나님은 “은밀”하시다. 당신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나는 성경을 안다. 성경은 이렇고 이러한 것을 말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지식에게 기만당하게 될 것이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이리저리 알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았다. 당신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 내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경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한다. 하지만 조심하라. 성경은 성경이고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글이지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언제 그분이 베들레헴에 계시고 언제 떠나시고 언제 돌아오시고 어디서 부활하시는 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이러한 방식으로 따라야 한다.

로버트씨, 저는 이것이 귀하께 적절한 말이라고 느낍니다. 귀하는 모든 것을 말씀의 문자로 시험하는 노선에 주로 있습니다. 말씀을 아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귀하가 보듯이 일세기의 바리새인들 역시 구약의 말씀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주님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을 알았지만 베들레헴으로 그리스도를 보러가지 않았습니다.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오셨을 때 그들은 말씀의 문자를 확인하고서는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2)고 했습니다. 원칙면에서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하여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들이 귀하의 성경적 기준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속지 마십시오. 만약 귀하가 싸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날 이 땅위에서 하고 계신 일이라면 이것은 귀하와 귀하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큰 손실을 가져올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교리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도 귀하는 “모순”을 발견하셨습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귀하의 표현에 따르면 “교리에 대한 구체적이고 우주적인 진술”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면서 “교리는 오직 분열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이 문장은 잘려서 인용되었습니다. 귀하는 이 문장조차도 전체를 인용하지 않고 잘려진 문장만으로 문맥을 설명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귀하는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말이라면서 다른 문장의 일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교리로부터 확실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진리의 변호자는 결코 고의적으로 상대방을 잘못 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경륜’ 23-24쪽에서 인용한 다음 글은 위트니스 리의 말의 문맥을 보여줍니다. 독자들은 모순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는 주님의 자녀 가운데 분열만을 일으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사신 영을 따라 행하며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하나가 될 것이다.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욱더 다투게 된다. 오늘 우리가 성령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모두 “아멘! 할렐루야”라고 한다. 그러나 내일 영원 보증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즉시 나뉠 것이며 이것은 곧 목표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목표에 온통 집중하기보다 문제만 일으키는 것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 안에 계신 아들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다. 

어떤 사람은 침례에 대해 논쟁한다. 예를 들어 일부는 물을 머리 위에 뿌리는 약세를 주장한다. 이것 역시 교리의 문제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즉 그리스도만을 붙잡아야 하며 오직 한 분 그리스도자신에 의해서만 붙잡혀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법과 성령에 의해 붙잡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어느 정도 교리를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은 교리가 아니라 성령 안에 살아 계신 한 분이다.

마지막으로 귀하가 소위 “모순”이라고 제시한 것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최근의 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193쪽에서 이 선생은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사진을 신문에 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타락하고 세속적인 기독교 종교에서 나온 것이다. 오 형제여! 가능하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의 이름을 신문에 광고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다. 이 선생과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아나하임, 헌팅턴비취, 샌디애고에 있는 교회들은 직접적으로 이 권면에 모순되게 행했다. 1975년 12월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신문 종교란에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결국 이 선생의 권면은 하나님의 계시라고들 함에도 불구하고 부서지기 쉬운 과자와 같음이 분명하다.

  1. 로스엔젤레스 신문에 실린 이 기사의 목적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면을 샀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없이 광고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종교광고를 할 때 주로 따라오는 사진이나 개인적인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타락하고 세속적인 기독교 종교”의 어떠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솔직하게 선포한 것으로 귀하와 같이 우리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대중의 생각에 집어넣어진 잘못된 인상들을 정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 율법적인 생각은 언제나 그 영에게 당황할 것입니다. 율법적인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다시 한 번 주 예수님으로부터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를 원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요 7:8, 10). 그분은 처음에는 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가셨습니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분의 말씀은 “부서지기 쉬운 과자”와 같습니까?

로버트씨에게 묻겠습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습니까? 소위 말하는 “전통적인” 정의와 사람의 생각의 범주와 무익한 “철학”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골 2:8)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 앞에 나아올 수 있습니까? 이사야서 9장 6절은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합니다. 구실을 대어 빠져나가지 않고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구절은 또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일관된 틀에 넣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귀하의 생각이 아닙니다(사 55:9). 바울이 “간사한 유혹(체계화된 오류, systematized error)"(엡 4:14)이라 불렀던 것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체계화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과실을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귀하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사람의 예화를 인용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을 때조차도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인용한 후 귀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가끔 어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오류절무(誤謬絶無)를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심지어는 현실도 무시한다는 것이다.” 제가 이미 자세히 말씀드린바 있는 귀하의 소책자의 증거를 근거로 해서 저는 이 이야기의 교훈이 위트니스 리가 아니라 바로 귀하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대한 귀하의 생각이 옳다고 너무나 확신하는 바람에 코앞에 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태복음 7장 2절의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제가 3절부터 5절까지를 바꾸어 말해도 괜찮다면 저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왜 위트니스 리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귀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까? 귀하의 소책자는 허위와 거짓말이 가득한데 왜 위트니스 리에게 “당신의 눈 속에 있는 과실과 부정확함을 빼라”고 합니까? 귀하는 먼저 귀하의 생각에 있는 무분별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교회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진실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지식에 따르면 저는 그를 그 영에 아주 많이 의존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버트씨, 귀하의 소책자를 분석해 볼 때 당신은 그러한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귀하의 소책자 끝에서 귀하는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 안에 있다면 떠나십시오! 만약 당신이 지방교회에 가입하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상대론(relativism)” 때문에 성경적인 실제를 떠나지 마십시오.” 여기서 성경적인(biblical)과 상대론의 철자도 “Bibical"과 ”realativism"으로 잘못 씌어져 있습니다. 성경적인(biblical)의 철자는 계속해서 틀리게 씌어져있고 몇몇 문장의 구조는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 혼란스럽습니다. 한 예가 귀하의 소책자의 6쪽에 있는 문장입니다. “만약 지방교회가 잘못된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만 가르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교사는 아닐 것이다(If the Local Church were only teaching the wrong doctrine of God, it would still not be a teacher of God.).”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귀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모르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진리를 대표한다고 하는 사람은 공개적인 출판물에서 부정확하거나 엄밀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귀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고 있으며 그러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진리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교회에 관한 귀하의 관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고 귀하의 글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 리서치 인스티튜트(Christian Research Institute)가 수행한 작업의 질을 보여주는 표본입니까? 귀하는 귀하의 비판을 지지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귀하가 마치 증거인 양 제시한 글들은 문맥과 상관없이 잘려져서 저자 자신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귀하의 목적은 진실을 제시하지 않음으로 위트니스 리의 평판을 나쁘게 하고 독자들에게 편견을 갖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버트씨, 귀하는 진실로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조사를 했습니까? 귀하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많지 않습니다.

귀하는 모순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을 벌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후에 귀하 자신의 꾸며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위트니스 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동안 개인적으로 그를 알고 있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풍성한 사람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처럼 풍성하며 도움이 되는 말을 거절한 “괴악한 사람들”(baser sort, 행 17:5)의 범주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행17:11) “신사적”인 사람의 범주에 속해야만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후자에 포함시킬 수 있음이 너무 기쁩니다.

로버트씨 저는 아주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데 그러한 비방과 꾸며낸 이야기들은 귀하의 생각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만약 귀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열어 진리의 빛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면 귀하는 귀하가 했던 말들을 철회하고 위트니스 리와 교회들과 귀하가 잘못된 인상을 준 그리스도인 대중에게 사과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 따르면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 만약 사람의 공력이 불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4-15)라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귀하의 공력이 시험을 통과할지 의심이 듭니다. 귀하가 귀하의 소책자를 작성하는데 사용했던 자료는 확실히 금과 은과 보석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짚입니다(고전 3:12).

귀하는 교회에 대항하여 수천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따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귀하가 그 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귀하는 무엇으로 자신을 변호하시겠습니까? 저는 주님이 귀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고 믿습니다: “너는 ‘연구원’이었으면서 어째서 진리를 찾고 제시할 수 있도록 연구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내 백성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진리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퍼트렸느냐?”

로버트씨 제가 개인적인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갓난아이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체험이 있는 64살의 사람입니다. 저는 상당한 교육도 받았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기독교 사역을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에도 상당히 정통합니다. 저는 1968년에 주의 회복의 진리를 보았고 그것을 보았을 때 저는 이 길을 택했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 아래 있은 후로 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제 목사직의 장래를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서 그것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뿐만이 아닙니다. 수 백명, 아니 수 천명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주님에 대한 누림을 발견했으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전직 목사이거나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입니다.

집회와 교통, 교회의 사역뿐만 아니라 위트니스 리의 책들 또한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가득합니다. 그의 사역은 40년이 넘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는 그 시간동안 많은 책들을 출판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공급해 왔습니다. 귀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확실히 그의 책들에는 귀하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돕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귀하에게 요청하고 제안하는 것은 월터 마틴씨에게 이것을 질문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지 않습니까? 왜 오직 잘못된 것들만 지적할 뿐 하나님의 백성을 목양하지 않습니까? 만약 위트니스 리가 그렇게나 틀렸다면 당신은 왜 더 좋은 것을 내놓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가 어느 부분에서 틀렸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더 좋은 어떤 것을 산출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사역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를 지적할 능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은 먹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가치로서 말로 된 것이나 출판된 것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보양하심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귀하에 대해 염려하는 바입니다. 귀하는 몇몇 책들을 읽은 것 같지만 풍성은 놓쳤습니다. 맛있게 먹고 즐길 닭을 받고서도 귀하는 뼈만 찾고 있습니다. 귀하가 정직하다면 비록 귀하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을지라도 위트니스 리의 책이 부요함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할 것입니다. 귀하의 앞에 풍성한 음식들을 차려놓고는 어째서 목에 걸릴만한 것만 찾아내시는지... 귀하가 염려스럽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부요한 누림을 체험하지 못한 귀하와 오렌지 카운티의 많은 사람들을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에게 그들이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마23:13).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귀하가 저처럼 실제적인 교회생활 안에서 실제 안의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길 바랍니다. 저는 귀하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분들에게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한 말을 해드리기 원합니다: “와서 보라”. 나다나엘에게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온다는 것이 상당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반응인 “와서” “보라”는 그의 의심을 희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와서 봄으로 나다나엘의 의심은 믿음의 선포로 바뀌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6-49).

왜 와서 보지 않습니까? 교회에 와서 보십시오! 우리는 주일 아침 10시에 주일 집회를 하며 주일 저녁 6시엔 만찬 집회를 갖습니다. 또한 화요일 7:30 기도집회와 금요일 7:30 사역집회와 토요일 7:00 중고등부 집회가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 포드 (Gene Ford) 드림

ⓒ 1976 Living Stream Ministry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25. 05:00

갓멘에세이 83 - 체험한 것과 아닌 것 - 지방교회들 에세이

갓멘에세이 83 - 체험한 것과 아닌 것 - 지방교회들 에세이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5. 19:45
성경말씀  

(롬6: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사람으로 여기십시오. 

 오늘의 만나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아담에게서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내가 만일 수표 한 장을 끼워 둔 잡지를 태워 버렸다면, 그 수표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잡지와 함께 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잡지가 가는 곳에 그 수표도 갑니다. 이 둘의 움직임은 이미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분이 거치신 것을 우리도 거쳤으며, 그분이 체험하신 것을 그분 안에서 우리도 체험한 것입니다(롬6:5). 이것은 사람이 분투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歷史)입니다. 우리의 이 역사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 쓰인 것입니다. 당신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영광스러운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행한 것에 근거하거나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려는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분명해지고 우리가 돌이켜 이 사실을 믿을 때(롬6:11), 우리는 거룩한 생활의 비결을 찾은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5. 19:15
성경말씀 

 (출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오늘의 만나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말이 제한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담을 할수록, 더욱더 부활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한담을 할수록, 더욱더 우리의 체험 안에 영이 없습니다. 부활의 실재이신 그 영을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영으로 돌이켜서 기도하고, 찬미하고, 찬송하고, 하나님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8편의 제목은 이 시편이 다윗과 하나님의 대화 곧 그가 하나님과 이야기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의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십 분간 이야기한 후에 우리는 불타게 되고, 부활의 실재이신 그 영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4. 17:45
성경말씀  

(요15:4)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만나

 
 주 안에 거하는 것은 그분을 우리의 거처로, 처소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이 거함은 상호적인 것인데, 이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나는 내가 진실로 주 안에 있고, 그분이 실제로 내 안에 거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다고 강하게 간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아침에도 나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내 안에 거하십니다. 비록 이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체험 안에서 하나의 사실입니다. 만일 당신이 “주 예수님, 바로 지금 내가 당신 안에 거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즉시 그분께서 당신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깊은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집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학교에 있든지 주님은 어디에서나 “지금 나는 네 안에 거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출처 : 삶을 가꿔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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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9:00
성경말씀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오늘의 만나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과, 골로새서에서 철학과 완전히 떨어져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두 가지 문제인 종교와 철학은 사회에서 높게 평가되고 서로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그 둘은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방해물들입니다. 여러분은 종교와 철학과 문화에서 나와야 함을 아십니까? 이것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체험해야 할 실재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자신을 한국인으로 여긴다면, 여러분의 문화 안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새사람 안에는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 어떤 국적을 위한 여지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가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들은 매장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신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고 있는 사람들로서 종교와 율법과 전통과 규례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철학과 문화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출처 : 생명메시지3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8:15
성경말씀 

(눅7:47~50) 그러므로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이 여인의 많은 죄들이 용서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그대의 죄들이 용서받았습니다.“라고 하시자, 함께 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들도 용서해 주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십시오.“ 

 오늘의 만나

 
 누가복음 7장의 그 여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한 것은 그녀의 많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증거였고 시몬이 적게 사랑한 것은 그가 용서받은 것이 적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용서받은 여인은 구주를 향한 사랑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과 평안을 가져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녀를 구원한 믿음은 사랑 안에서 그녀를 구주께로 이끌었고 그녀를 평안히 갈 수 있게 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평안은 구주의 구원을 체험하고 누리기 위한 세 가지 중요한 미덕입니다. 믿음은 구주와 그분의 구원하는 능력과 미덕을 앎으로써 생깁니다. 사랑은 이 믿음에서 오며 또 평안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주를 따릅니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 구주를 따를 때 믿음과 사랑은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와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누리며 그 생명 안에서 자라도록 해 줍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3:10
성경말씀 

( 히13:13~14)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께서 받으신 비난을 짊어지고 진영 밖으로 그분께 나아갑시다. 이곳에는 우리에게 영원한 성이 없으니 우리는 장차 올 성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오늘의 만나

 
 ‘진영 밖으로’와 ‘휘장 안에’는 히브리서에서 매우 두드러진 두 가지 요점입니다.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서 보좌에 앉아 계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진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주님을 배척하고 쫓아낸 종교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 실지적인 지성소가 있는 우리의 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오늘날 실지적인 진영이 있는 종교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를 누리면서 영 안에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종교의 영문 밖으로 나아가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따라 갈 것입니다. 우리가 영 안에서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 우리는 종교의 진영 밖으로 나아가 배척당하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영 안에 머물면서 영광 가운데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접촉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종교의 진영 밖에 계신 비천한 예수께 나아가서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