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30. 05:00

한국 기독교계의 취약 분야 -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외견상 한국 기독교계의 취약 분야로 보이는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분야에 대한 주목할만한 책이 있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제목은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이며 여수룬 출판사가 1991년에 초판을 발행했군요. 저자는 미국 플러신학교 루이스 B.스미디즈 교수이며, 옮긴이는 총신대와 웨스터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개혁신학원 강사로 있는 오광만님입니다.

저자는 기독론에 있어 '성례주의적 기독론'과 '계약적 기독론'이 있다고 소개하며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사도 바울의 관점(이것이 곧 성경의 가르침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이 성경엔 수도 없이 나오는데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위일체를 말할 때 '인격'(Person)을 과도하게 강조할 때의 위험성(삼신론 이단사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지방)교회측과 전 예장통합측 사이비이단 문제 상담소장인 최삼경 목사님과의 3년간의 지상토론 쟁점과 상당부분이 유사합니다. 저자나 옮긴이가 (지방)교회측과 무관한 분들이고 오히려 장로교 배경을 가진 분들이므로 객관적인 자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측의 진리는 위 책에서 소개된 바울의 가르침(곧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며, '성례주의적 기독론'과 유사합니다. 제가 '유사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지방)교회측이 그러한 신학을 공부한 후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기독론'을 그대로 말한 것인데 결과가 유사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한국 일부 목회자나 신학자의 관점이 토대가 되어 "이단"과 "정통"을 결정짓는 현재의 한국교계의 풍토는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빛과 성경의 권위만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대해 주장하려면, 반드시 성경의 근거와 기초를 가져야 합니다(벧 4:11상).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양심 안에서 인정되면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러한 실행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마7: 24-27).  위 책에 대한 "입맛을 돋우기 위해" 삼위일체의 "인격(Person)"이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권면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인격체(Person)"라는 단어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심리학적으로 형성된 인격체들에 대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만일 어떤 한 인간이 하나의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독자적인 고유권한을 지닌 인격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고방식(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령은 한 인격체로서 체험되고 알려지며 영광을 받으신다.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로서 알려지고 체험된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분리'된 인격체로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인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위 책 87쪽)".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것이 "정통"이고,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심으로, 셋이 서로 안에 계시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이단시(?)"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진리왜곡을 주님은 반드시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잠재의식 속에서 세 하나님들을 믿는 것은 가장 심각한 이단사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7. 05:00

장로교단 소속 성도님들께

장로교단 소속 성도님들께

그 동안 한국교계를쭈욱 지켜보면서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후,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과 수고로 지금은 약 9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60-70%가 장로교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샤머니즘과 우상과 불신자들로 충만하던 '영적 불모지'였던 이 나라에 이 정도의 복음이 전해진 데는 분명히 장로교인들의 기여도가 큽니다. 주님께 신실했던 장로교인들에게 그 날에 돌아갈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교파 소속 성도들의 수고도 있었지요.  

하나 뿐인 목숨은 누구에게나 다 소중합니다. 그 소중한 목숨을 주님께 바쳐 순교한 주 기철, 손 양원 목사님 등등 수많은 장로교인들의 신앙심을 우리 모두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순교자들의 고귀한 희생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장로교파 안에는 신학을 정식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늘 말씀과 기도 안에서 믿는 자녀들을 키워 낸 수많은 어머니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쏟아지는 잠을 떨쳐버리고 새벽부터 일어나 주님의 면전에 나아가 기도하며 찬송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성도들이 계십니다. 교파의 구분을 떠나 이러한 신실한 성도들의 헌신이 한국교회들이 지금까지 간증을 지켜온 뿌리요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다수의 "숫자", 신실한 성도들의 신앙체험, 소위 한국교계를 대표한다는 분들 중에서의 영향력, 크고 작은 행사와 운동에 있어서 '장로교단'의 핵심적인 역할 때문에 "한국장로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단체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러한 배경 아래 "한국장로교단"이 "정통교회"를 자처하며 수많은 '사이비 이단'(?)을 만들어 내는 주체의 위치에 서 온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제 깊은 속엔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이 지극히 싫어하시는 '교만'의 자리(벧전5:5)에까지 나아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들이 다 고유의 특징과 한계가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특징입니다(롬12장, 고전12장). 그럼에도 "장로교인들의 신학과 교리와 실행이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단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교만입니다(실제로 장로교단이 이단이라고 하면 한국 교회 내에서 이단이 되는 것이 그 동안의 관례였고, 이단 정죄에 있어 '한기총'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임).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1.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까진 '장로교파'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역사는 1세기부터 지금까지 면면히 흘러 내려오고 있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이 천주교에 반기를 들고, 다른 노선을 '공식표명'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혹자는 '장로교의 교리'는 그 이전부터 성경에 있어왔다고 항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성경엔 '장로교단(파)'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몸인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한 장로교 소속 학자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이 글을 쓰신 분은 장신대학원 출신의 한국복음신학연구원 학장인 손병호 박사임). 

오늘의 한국 장로교 정치제도 이대로 좋은가?

 "장로교회가 아무리 성서적이고 역사적이고 신학적이고 민주적이어도 장로교회가 모든 교회의 근원이나 근본은 아닌 것이다. 모든 교회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장로교회는 하나의 교파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제로 하는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선재로 하는 교회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교갱협, 오늘의 한국장로교 정치제도 이대로 좋은가, 도서출판 엠마오, 1998, 112-113쪽) 


  2. '교인숫자'로만 따질 일이 아닙니다. 
교인 숫자에 있어서 "한국장로교단"의 상대적 우세는 한국 특유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전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국가인 미국의 경우 1억이 넘는 전체인구 중에서 재미 한인과 순수 미국인을 합친 전체 장로교인 숫자가 400만 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한편 침례교인들은 2천 5백만 명이 넘고, 루터 교인들도 800만 명이 넘습니다. 이런 통계를 볼 때, 장로교인들의 숫자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의 장로교단 자체의 분열 현상, 성도들의 거듭남의 확신 정도 등을 따져가기 시작하면 그 숫자는 얼마나 줄어들 것인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장로교단의 외형적인 숫자가 많기 때문에, '장로교단'이 당연히 세계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변하는 "정통교회'로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3. 장로교의 신학(캘빈 신학)이 성경의 모든 계시를 다 포함하 고 있지는 않습니다. 
장로교 신학 안에 하나님의 주권, 은혜, 언약, 속죄, 성도의 견인 등 많은 진리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령론', '그리스도를 주관적으로 체험함', '요한계시록 강해'(칼빈은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음)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다고 보입니다. 즉 '사람 밖에 계신 하나님'(객관적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을지는 모르나, 사도 바울이 강조한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주관적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한국 장로교인들"에겐 미 개척분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계 내에서 일어난 '이단시비'의 상당부분이 이러한 장로교신학의 한계 때문에 빚어지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장로교 신학의 한계 안에서 다른 교단의 신학을 바라볼 때 일치하지 않은 부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일치하지 않아서 이단이라면 피차에 다 이단이 되어 온 땅에 이단만 충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불완전한 '장로교 신학'은 이단판별의 절대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절대기준이라면 그 결정이 상황에 따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장로교측의 태도는 그렇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한 예로, 저간의 배경에 대해 많은 말이 있긴 하지만, 외견상 조 용기 목사의 신학을 처음에는 '사이비'로 정죄 했다가, 나중엔 오순절신학의 특수성으로 인정하여 '사이비성'을 풀어준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4. '한국장로교단'은 세계 장로교단과 크게 다를 만큼 빗나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순히 장로교단이 아닌 '한국장로교'라는 명칭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한국장로교단'엔 통상 장로교교리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가르침과 다른 교리와 실행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한국 고유의 배경(샤머니즘, 기복신앙, 유교적 권위주의...)이 섞인 부분도 있고, 장로교단을 인도하는 분들의 신학적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한국의 토착적인 요소에 독일계통의 신학, 화란 계통의 신학, 미국계통의 신학적 배경이 큰 편차를 보이며 한국 장로교단에 투영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총신대학원 정 일웅 교수가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구조변혁'이란 제목으로 쓴 글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갱신과 성령

"원래 장로교회는 지역을 전제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개 교회를 세우는 '지역중심의 교회제도'(Local Church Style)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교회는 이제 지역교회로서의 성격은 거의 사라진 형편에 처하여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회의 제도와 행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가치를 규명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다. '한국장로교회'는 더 이상 세계 장로교회와 그 동질성을 확인하기가 힘들 정도로 바뀌어졌다... 실제로 한국사회에 현존하는 "한국장로교회"는 수십에 이르는 군소 교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회가 분열된 관계에서 서로가 경쟁 아닌 경쟁의 상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교파중심의 교회구조는 현재 한국교회가 지닌 약점이 아닐 수 없다... 오늘에 와서 또 하나 우리 한국 교회 모두의 실제적인 고민은 하나님이 한 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성령도 하나이신 성경적 이해를 따를 때, 지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프로테스탄트의 후예들로서의 "한국장로교회"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한국교회문제연구소,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령, 1995, 한국로고스연구원, 69,71쪽). 

  5. 장로교단 자체 내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단"시 된 교단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종교 게시판의 글들을 보면, 기장 측이 예장 측을 이단시했고, 기장 출신의 대표적인 목사님들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한 쪽이 '통합교단측'을 이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장로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윤리적, 도덕적인 약점들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6. 타 교단 소속 단체나 개인들이 책자들을 통해 '장로교신학'(캘빈 신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

장로교인들에게 '캘빈신학' 또는 이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신조', '기독교강요'는 성경 다음으로(일부 사람에게는 실제로 성경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로교의 신학적 뿌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습니다. 실제로 예장 합동 측이 '이단'으로 선언한 말씀보존학회는 적어도 두 권의 장로교 신학을 바판하는 책자를 내었습니다. 하나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이재명, 말보회, 1996년, 약 500쪽의 방대한 분량임)이고,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의 바른 이해-칼빈주의는 이단교리이다'입니다. 장로교단과 '말씀보존학회'(침례교단을 배경으로한)가 서로 이단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결교 계통의 비판 책자도 있습니다. 즉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한 심상용 목사가 쓴 "칼빈주의 예정론, 왜 철회되어야만 하는가?"(말씀의 샘터사, 765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칼빈주의 예정론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칼빈주의 예정론(이에 기초하여 세워 진 장로교)은 교회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있습니다. 물론 캘빈 신학을 비판하는 해외자료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성경의 진리이외의 '모든 신학'(장로교신학을 포함)은 다 상대적이며, "절대 기준"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장로교인들(특히 이단 판정을 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듣고 배워 익숙한 신학이 '절대기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 교회들 안에서 '장로교단'의 위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기준'이 될 수는 없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한국교계 내에서 볼 수 있는 분열과 정죄와 세상과의 타협과... 이런 것들은 사탄을 기쁘게 하고, 주님 그리고 교파를 초월하여 '신실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까? 국내 그리스도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장로교인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한국교회들(장로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원하심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도 버리셨던 공의의 하나님(마21"23,43)이 '장로교인들'도 제켜 놓을 수 있으시다 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은 '장로교단, 정통교단, 장자교단'에 속했으니 하나님의 심판대 앞(롬14:10)에서도 안전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잠에서 깨어나도록 도와 줘야 합니다(엡5:14). 

  둘째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명"이며 어떻게 하면 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을 수 있는지(빌3;8)를 알려달라고 주님께 간구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속도 중요하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생명'(Zoe)을 살고(빌1:21, 골3:4), 생명(요11:25, 요일5:11-12)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까? 생명공급이 없는 전도, 생명공급 없는 양육과 성경공부(요5:39-40), 생명공급 없는 설교, 생명공급 없는 각종 봉사와 활동이 '나무와 짚과 풀'로 태워질 수 있음(고전3;12)을 우리 모두는 경고 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이 시대에 성령이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도록 서로 격려하고 일깨워야 합니다. 어차피 어둠이 짙었고, 은밀한 죄와 현란한 세상과 고집 센 자아를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붙잡는 '크리스천들'이 있는 한, 모든 믿는 이들이 이 시대에 생명의 성숙에 이르지는 못할 것임을 주님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일곱 교회들 안에서 '이기는 자들'(계2:7, 11,17, 26, 3:5, 12, 21)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기는 자인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되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넷째로, 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더 낮추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참된 지체들을 향하여 마음을 더 열고, 더 넓혀야 합니다(고후 6:11-13). 하나님이 받으신 지체들은 다 받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롬14:4).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의 시작 때처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말씀)'을 범하지 말라(마15:3)는 주님의 경고가 '현재의 한국 장로교단' 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마음을 상한 분이 있으시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기를 바라며...


주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갈망과 탄식의 마음을 조금 만진, 그리스도의 몸의 한 작은 지체 드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6. 05:00

아래의 글은 장로교 합동측 교육국 주관으로 펴 낸 <기독교의 이단들>이란 책자에서 (지방)교회들을 거짓되게 소개하고 비판한 것을 항의하고 시정을 요청한 서신입니다. 독자들의 공정한 판단을 위해 이곳에 소개합니다. 독자들이 성경과 신앙 양심 가운데 공정하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발신인 : 000 외 1인 - 1998. 4. 30.(미국시간)
The Church in Fullerton 1330 N. Placentia Ave Fullerton, CA 92831
전화 : 714-996-8190, 팩스 : 714-996-8195 

수신인 : 심 창섭 교수님 외 3인 서울 강남구 대치3동 1007-3 총회회관 4층 교육국
 전화 : 서울 564-0783, 팩스 : 539-0203
 참조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교육부
 

제목 : '기독교의 이단들' 책자 중 (지방)교회를 언급한 부분에 대한 항의 및 시정요청  

저희들은 이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전세계 (지방)교회들을 대표합니다. 본 서신은 귀 측이 저술하여 시판하신 '기독교의 이단들'이라는 책자에서 저희가 믿는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내용들을 근거로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들을 '이단시하는 것'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단'이라는 용어가 단순한 교리해석상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위험한 사교집단'처럼 여겨지는 한국교계의 풍토를 감안할 때 저희 측은 귀하들의 인쇄된 문서를 통한 이단정죄에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이단들

같은 믿는 이들을 이단시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롬 14:10-13). 또한 이단정죄를 받는 측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영적,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가하는 행위임으로 지극히 신중하게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년 내에 한국 장로교단 내에서 너무도 경솔하고 무책임하게 남을 이단시하는 경향들이 관찰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에 장로교 통합측 소속 어느 목사는 '위트니스 리가 삼분설을 믿으니까 이단'이라는 참으로 상식 이하의 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목사의 엉터리 이단기준에 의하면 이분설을 지지하는 장로교인들만 정통이고 삼분설을 지지하는 전세계 침례교인들, 하나님의 성회 성도들도 다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된 내용들을 반복해서 문서로 유포하는 무책임하고 불법한 행위는 이방인들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참되게 믿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한 자기 말에 대해 책임을 추궁 당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출 20:16, 마 12:36-37). 

 저희들은 귀하들이 저술하신 위 책자를 심도 있게 분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위 책자에서 귀 측이 취했던 연구관점과 접근방법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을 진실 되게 파악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시각으로 본 사물이 실제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롯한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적이고 근본주의 적인 신앙유산에 따른 지극히 건전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지 귀 측의 단정처럼 이단 사교집단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귀하들이 <사실이 아닌 내용들>을 근거로 책자를 통해 저희들을 정죄하신 것을 공개적으로 바로잡는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우선, 저희들은 오해에 근거한 귀 측의 비판들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합니다. 

I. 귀하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근본주의의 뿌리인 존 넬슨 다비의 신앙유산을 이어 받은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한 채 그분들을 체계적인 신학수업도 못 받았고 소위 '정통신앙'에서 빗나간 사람들로 취급하신 것(위 책자, 163쪽)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관을 참되게 파악하려면 그 사람의 신앙배경과 그 사람이 쓴 책자들 전반에 나타나는 내용들을 파악한 후 유일한 기준인 성경말씀과 비교해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귀측은 문서를 통해 남을 공개적으로 이단시하는 심각한 일을 하시면서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배경을 전혀 고려치 않으셨고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시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자들은 읽어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판사가 재판기록을 보지도 않고 사형을 선고한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무책임한 일인 것입니다. 

 1. 귀하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판함에 있어서 두 분의 신앙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채 기본적인 신앙조차도 없는 사람들처럼 단정하신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교회역사를 볼 때,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신실한 믿는 이들이 계속 있어 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러한 분들과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신앙형태를 형성하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귀하들이 장로교인들로서 칼빈의 영향을 받으셨듯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근본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넬슨 다비의 신앙유산을 이어받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미국종교백과사전'을 쓴 고오든 맬튼 박사가 최근에 5판까지 수정 보완된 자신의 백과사전에서 일관되게 (지방)교회존 넬슨 다비의 형제회와 함께 정통기독교의 범주인 '근본주의'(Fundamentalists)계열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http://local-church.tistory.com/283)

대부분의 개신 교단들이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빗나간 천주교의 오류로부터 점진적인 개혁을 꾀하는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반면에, (지방)교회 성도들을 포함한 근본주의 노선은 천주교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성경자체에서 믿음생활의 본을 찾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청교도인들이나 웨슬리 파가 했던 것과는 달리 존 넬슨 다비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자들은 사도시대 교회(초대교회) 생활을 회복하기 위해 '성경에 집중함, 성경적인 생활양식, 성경적인 신학, 성경적인 교회론'의 채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흐름이 워치만 니를 비롯한 (지방)교회 성도들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이곳 미국에서 정통 근본신앙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신학교들 - 예를 들면, 달라스 신학교, 무디 성경학교, 바욜라 신학교 - 과 D. L. 무디, 피어슨, 무어 해드, 부룩스 등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사람들의 신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의 '다섯 가지 근본신앙'으로 지칭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신격(그분의 동정녀 탄생을 포함),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리적 속죄,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로부터의 실제적 부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을 굳게 믿음으로써 1920년대 현대주의 이단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정통신앙을 수호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비롯한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도 기본신앙을 구성하는 이러한 다섯 가지 항목들을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믿지 않으므로 이단이다'라는 식의 귀 측의 정죄는 너무나 진실과 동떨어진 터무니없는 비판인 것입니다. 

2. 워치만 니는 한국복음서원에서 전집형태로 발간한 62권에 해당하는 저서가 있고 위트니스 리는 약 20년에 걸쳐 완성한 신구약 전체 주석을 포함, 약 400권 분량의 저서가 있으나 귀하들은 이러한 책자들의 핵심을 충분히 파악치 못한 채 성급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신약의 결론

특히 한국복음서원이 1991년에 출판한 '신약의 결론' 8권 -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믿는 이들(1,2), 교회, 왕국, 새예루살렘 - 은 위트니스 리의 조직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관찰에 의하면 귀하들이 워치만 니를 비판하고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공개적으로 책자화하는 심각한 일을 하시면서도 그의 조직신학인 '신약의 결론' 책자들을 단 한 번도 참고하지 않으신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를 경륜적인 관점에서 쓴 몇 권의 책자(예를 들면, 하나님의 경륜, 그 영과 몸)를 그것도 처음부터 (지방)교회를 정죄할 의도로 왜곡되게 쓰여진 책(번역서)에서 거짓된 결론을 인용해서 비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귀하들도 언급(위 책자, 146쪽)하셨듯이, 위 내용들이 악의를 가지고 만들어진 거짓된 자료들임이 이 곳 일간신문에 수개월 동안 게재된 저희 측의 반박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된 바 있습니다. 저희는 이러한 모든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러한 거짓정죄가 반복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귀 측이 이러한 <사실도 아닌 내용>을 근거로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을 함부로 이단시하여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할 치외법권적인 권한을 가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귀 측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대한 충분한 연구도 없이 경솔하게 추론하여 정죄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신앙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첫째, '지방교회의 기독론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한 변화, 또는 그 과정으로만 설명한다'(위 책자 154쪽) '성자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곧 아버지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지방교회는 생각할 수 없다'(위 책자 155쪽).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속적인 죽음으로 보지 않고 계략적인 죽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결과로 죽으신 것이 아니고...(위 책자, 160쪽)  

-반박 : 귀하들의 경솔한 비판과 달리, 위트니스 리는 칼케돈 신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정통기독론을 누구보다도 확실히 믿습니다(월간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pp163-166, 98년 5월호 참조). 또한 위트니스 리는 자신이 쓴 '그리스도론' 611-612쪽에서 그리스도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마태복음 20장 28절을 근거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지방)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죄의 결과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귀 측의 말도 안 되는 정죄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저희들은 심창섭 교수님외 3인의 신앙양심을 향해 질문드립니다. 귀하들은 위와 같이 심히 거짓되고 엉뚱한 내용으로 (지방)교회 성도들을 이단시하는 책자를 제작 배포하는 심각한 일을 하시기 전에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를 장장 709쪽에 걸쳐 집대성한 위트니스 리의 조직신학 책자 '그리스도'(1991년, 한국복음서원)를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보셨습니까? 

 둘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가 아닌 일위일체를 믿기 때문이다' (위 책자, 156쪽) 

-반박 : 뒤에서 항목을 달리하여 반박할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의 조직신학 책자 '하나님'(총 510쪽)을 한 번이라도 읽었다면 위와 같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인식을 기초로 남을 공개적으로 정죄하는 것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아닙니다. 

셋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신학지식의 빈곤과... 체계적인 신학지식을 갖고 있지 못함이 그들의 주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워치만 니는 그의 간증에서 1926년에 '십자가의 의미'를 1927년에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을 1934년에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한다. 오늘날 신학교의 초급과정에서나 다루는 그야말로 기초적인 내용을 그는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과대평가 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위 책자 163-164쪽). 

-반박 : 한국교계 내에서 비록 (지방)교회 생활을 하진 않지만, 워치만 니 책자를 통해 은혜를 받은 분들이 일반 성도들은 물론 목회자들 중에도 많이 있다는 점은 귀하들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곳 미국에는 위트니스 리의 신구약 주석서(오디오 메시지)를 매일 또는 주 1회 방송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미 전역에 걸쳐 50개(스페인어, 중국어 133개는 별도)가 넘습니다. 귀하들은 체계적인 신학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 20년에 걸쳐 신구약 전체 주석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위 두 분의 저술들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경솔한 비난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워치만 니가 '십자가'나 '교회의 하나'나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실행이 없는 공허한 신학지식을 알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귀하들의 지적처럼 신학교 초급과정에서 위와 같은 진리를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신학생들이 '십자가'를 배웠으나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이 없고, '교회의 하나'를 배우고 나와서 오히려 끊임없이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분열을 방관한다면, 또는 그리스도 이외의 것에 마음이 분산된다면 그 배운 지식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러나 귀하들이 비난하는 워치만 니는 핍박과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본 진리의 빛대로 살았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 그처럼 문제가 많은 것은 신학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댓가를 지불하고 절대적으로 자기가 본 이상을 따라 사는 사람(행 26:19)이 부족해서가 아닙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공정합니다.  

II.'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성경 안에 묻혀있고 사람들에게 감취어져 있다. 그 진리는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새롭게 발견된다"는 워치만 니의 말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 했고 이것이 오늘날 지방교회의 이단적 주장의 요소가 되었다는 비판(위 책자, 148-149쪽)은 사실이 아닙니다. 

귀하들은 위 워치만 니 주장에 대해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나 있었다'는 것을 들어 반박하셨습니다. 이 말은 완전한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 자체를 말할 때는 맞지만 역사적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면죄부가 사람을 구원시킬 수 있다는 부끄러운 실행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속여왔으나 말틴 루터에 의해 '이신칭의'의 진리가 회복됨으로 구원관이 바로 잡아졌습니다. 하나님은 말틴 루터 이후로도 그분의 비밀한 말씀들을 주님을 사랑하는 무리들에게 계속 열어주고 계십니다(고전 2:9-10).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상실치 않는다는 진리(성도의 견인) 는 비록 알미니안주의자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주의 종이었던 캘빈을 통해 주님이 보여주신 귀한 진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의 모든 진리가 장로교인들에게만 열려졌다거나 장로교인들이 지지하는 진리는 항상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캘빈이 유일하게 주석서를 쓰지 못한 요한계시록은 여전 히 많은 장로교인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을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은 실제의 광물질인 금과 보석들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박형룡, 교의신학-내세론, 361쪽 1988).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계시록 21장 9-10절에 의하면 참으로 불경스럽고 이단적인 것이 됩니다.(해당 본문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곧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지 박형룡 박사의 해석처럼 새 예루살렘을 신부가 그 안에 거주하는 물질적인 성이라고 하지 않았다). 즉 성경은 일관되게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지 '광물질'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고후 11:2, 계 19:7-8, 22:17, 호 2:19-20). 물론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집의 건축재료로 언급된 금과 은과 보석이 실제 광물질이 아니듯이 새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요소인 금과 각종 보석들도 영적 해석이 필요한 표징이지 실제 광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신약성경에서 주님의 몸인 교회(엡 1:23)(에클레시아)가 건물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 예가 전혀 없는데도(이종성, 교회론,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95, 36-42쪽). 장로교인 중에는 심지어 예배당 건물도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교회에 간다' '나가시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라는 식의 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하들이 살아 계신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광물질(새 예루살렘)을 신부로 취한다고 믿고 있고 콘크리트(또는 나무)로 만들어진 예배당 건물도 주님의 몸(교회)의 일부라고 믿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이단사상이라고 비판받는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교회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진리는 주님의 긍휼로 오늘날 (지방)교회 성도들에게 성경 전체의 조망가운데 투명하게 열려졌습니다. 신약의 결론-교회론, 새예루살렘 책자에서 볼 수 있듯이 위트니스 리의 성경해석 방식은 원어의 의미와 문법과 역대의 신실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감안한 균형잡힌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가 성경해석에 관해 자신이 쓴 책자(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한국복음서원, 1991년)에서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59쪽)을 최우선 원칙으로 제시한 것은 위트니스 리가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한다는 귀하들의 정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III. 귀하들은 "워치만 니 사상이나 가르침만 가지고는 그 이단성을 규명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148쪽)라고 했고,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담긴 주요 교리들을 상세히 소개(149-151쪽)한 후,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지방교회의 교리가) 정통교회의 신조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시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이 (지방)교회에 이단성이 있다고 지적한 모든 내용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자들(하나님의 경륜, 그 영과 몸)에 대한 귀하들의 오해와 잘못된 시각에서 온 것이지 (지방)교회가 다르게 가르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희들은 (지방)교회의 신앙을 오해한 귀 측의 비판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자 합니다. 

  1.신론에 대한 반박 

 삼위일체의 교리는 비밀하여 사람의 제한된 머리로 체계화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진리를 다룰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겸손한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또한 역대로 신실한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의 빛들을 무시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귀 측이 제시하신 니케아 신조는 아리우스 이단에 대항하여 성자는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에 그 강조점이 있었습니다(이장식, 기독교신조사 1집, 11쪽). 동일 본질을 가지시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별되는 실질적인 위격을 가진다는 삼위일체관(실질적 삼위일체론)은 근본주의 노선 안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도 변개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와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도 이것을 확실히 믿습니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98년 5월호 참조).  

'한 하나님 세 위격'이라는 말은 사람(인성)과 연관되지 않을 때는 그리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고(요 1:14, 골 2:9, 딤전 3:16), 죽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마지막 아담(예수님)이 생명 주는 영이 되시는(고전 15:45, 골 9:39, 요 20:22) 경륜적인 방면을 언급하는 성경말씀들은 '하나님의 인성 안에서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말함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거룩한 하나님이 실제로 육신을 입으신 것(새로운 존재방식)을 부인한다면 즉시 이단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 힙폴리누스, 터툴리안 같은 초대교부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구별하여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불렀습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56-262쪽). 

 만일 누구든지 '내재적 삼위일체론'만을 고집한다면,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경륜적인 삼위일체론'만 고집한다면 '사벨리우스적인 양태론'이 되는 것을 교회 역사 가운데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역사가인 필립 샤프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Many passages of the Nicene fathers have unquestionably a tritheistic sound, but are neutralized by others which by themselves may bear a Sabellian construction ; so that their position must be regarded as midway between these two extremes"(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 III, p 674,”교회와 신앙, 96년 10월호, 165-166쪽). 

위와 같은 진리인식이 분명한 위트니스 리도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집대성한 교부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이종성, 262, 261쪽) 및 다른 정통교부들과 동일하게 이 두 방면-내재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모두를 취함으로 삼위일체론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위일체론은 매우 섬세하게 다뤄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은 위트니스 리의 균형 잡힌 삼위일체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저희 측이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믿는 것처럼 오해하심으로 다음과 같이 거짓되게 정죄하셨습니다(위 책자, 153쪽). 

 귀측의 비판1 : "지방교회는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이라는 책에서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등하게 존재하는 분임을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책에서는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가 소유하고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하나님의 세 단계인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겉다르고 속다른 것이다"(위 책자, 151쪽) 

 -반박 : 귀하들이 비판을 위해 인용한 위 내용들은 오히려 위트니스 리가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 모두를 지지하는 균형 잡힌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즉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경륜'은 책제목이 말해주듯이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방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지방)교회의 가르침이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귀하들이 오해하는 '한 하나님의 세 단계'라는 표현도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분리할 수 없는 한 하나님(삼일 하나님)으로서 거치신 단계를 말하는 것이지, 양태론자들처럼 한 위격이신 아버지가 아들이 되시고(고유한 아버지는 없어짐), 아들이 성령이 되심(고유한 아버지, 아들은 없어짐)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판2 : "지방교회는 일신 삼위가 아니고 일신 삼역이라는 것이다'(위 책자, 152쪽), '하나님이 잠시 예수 그리스도로 변하여 나타났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따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고 이미 계신 하나님이... 모양만 달리하여 나타났다고 주장한다"(152-153쪽). '하나님 혼자서 자신의 경륜 을 이루실 목적으로 세 가지 역할을 하셨다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신관이 바로 이 양태론을 따르고 있다... (지방교회는) 한 위격의 하나님이 단지 삼역을 해낸다는 삼중적 의미로만 이해한다(153쪽)'. '그러나 지방교회는 삼위를 믿지 않는다..."(154쪽) 

 -반박 : 위 비판은 (지방)교회는 '삼위'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한 위격'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므로 귀하들이 비난의 근거로 삼은 동일한 책자인 '하나님의 경륜'에서 위트니스 리가 '삼위'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들을 발췌하여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귀 측의 주장이 근거 없는 거짓말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가 귀 측의 주장처럼 정말로 '한 위격'의 하나님만 믿는다면 '삼위'를 언급하는 부분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위트니스 리는 위 책자 도처에서 세 위격의 하나님(삼일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우리가 본 것은 우리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엡 4:6), 그리스도가 계시고(고후 13:5), 성령이 계신다(롬 8:11)는 사실이다. 삼일 하나님(삼위일체)의 세 인격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31쪽). "주님을 찬양하라. 이 놀라운 분, 삼일하나님이 오늘 우리 영 안에 계신다'(38쪽). "오늘날 삼일 하나님이... 죽음에 들어 가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에 앉으셨다. 그 놀라운 삼일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이 모든 실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 안에 있다"(43쪽). "우리는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이다. 부활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삼일 하나님 자신이 있고, 우리의 생명과 본성이신 그분이 있다(169쪽). "우리가 구원받을 때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셨다"(201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 안에 있는 삼일 하나님은 이제 우리 영 안에 계신다"(247쪽).  

위에서 보듯이 위트니스 리가 '한 위격의 하나님'을 믿는 양태론자라는 귀하들의 정죄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함께 믿는 위트니스 리의 정통적 삼위일체관을 바로 파악치 못하고 경솔하게 단언한 잘못된 정죄임이 밝혀졌습니다. 저희들은 결코 '한 위격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세 위격이 서로 안에 거하시는(상호내주)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은 귀하들의 글을 검토하면서, 귀하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고유하신 구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실제로는 분리된 세 분 하나님(삼신론)을 믿는 것은 아닌가-세 위격 간의 서로 안에 거하심(상호내주)을 부정함-하는 강한 의구심이 있습니다. 이 점은 추후 규명될 날이 올 것입니다.  

2. 기독론에 대한 반박 

귀 측의 (지방)교회의 신론에 대한 오해는 당연히 기독론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그분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위트니스 리의 말을 '성자가 따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뜻'(위 책자, 155쪽)이라고 엉뚱하게 해석하신 것입니다. 또한 귀하들은 위트니스 리가 쓴 '분리되어 있지 않다'라는 말을 잘못 해석한 나머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오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리스도를 지방교회는 생각할 수도 없다'라고 말함으로 (지방)교회 성도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믿음도 없는 사람들처럼 매도하셨습니다. 

-반박 : 위와 같은 오해는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구별되나(distincto)' '분리(separatio)'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전통적인 개념(이종성, 그리스도론, 1994년판, 294쪽)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위트니스 리의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귀하들이 '세 위격 간에 구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위 말은 하나님은 분리된 두 하나님 또는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분이시지만(고전 8:4,6), 그렇다고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고유성이 혼잡 되지도 않으신다('구별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물론 위트니스 리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고유하고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고 확실히 믿습니다(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지방)교회측 원고 참조). 

성경은 아들 하나님(성자)이 성육신 하셨음을 말하지만 이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과 분리된 성자가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이 상호내주하시는 아들이십니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보내는 쪽과 보냄을 받는 쪽이 분리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이고 비밀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즉 성경은 보내신 분이신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아들과 지상 사역시 서로 안에 계신다(상호내주)고 말합니다(요 8:16, 29, 14:8-11, 17:21,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162-163쪽). 

정통 신학자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상호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심을 증거 합니다. 즉 어거스틴은 상호내재를 "both( 아버지, 아들, 성령님)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로 정의했고, George Bull 주교는 "상호내주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재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로 정의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스트롱도 상호내주를 "거룩한 삼위일체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지방)교회측 원고 참조). 

이처럼 위트니스 리는 지극히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기독론을 가지고 있음(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교회와 신앙, 97년 7월호, 163-169쪽)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이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신 것은 사신 하나님 앞에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3. 인간관에 대한 반박 

 (지방)교회의 인간관에 대한 귀하들의 비판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위트니스 리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은 사람 안에 사탄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요, 위트니스 리가 로마서 6:6과 7:24를 해석하면서 죄와 사망을 사탄과 동일시 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차례로 반박하고자 합니다. 

 비판1 : 성경은 사람 안에 사탄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박 : 이러한 주제는 대단히 복잡한 신학적 논쟁점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서신 안에서 자세히 다루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추후에 있을 진리 토론시 충분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원칙적인 면만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선 위트니스 리는 사탄을 인격적 존재를 가진 타락한 천사장으로 보며 주관적으로는 타락시 사람 안에 죄(Sin,롬 5;12)로 들어와서 사람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역사하고 있고(롬 7장, 엡 2:2, 마 16:23, 베드로=사탄), 객관적으로는 공중에서 역사 하다가 결박당한 후 무저갱에 갇힐 존재(계 12:9-10, 20:1-3)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트니스 리의 '사탄이 사람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한 면으로는 사탄이 여전히 사람 밖에서 존재하며 역사 하지만 타락한 사람 안에서도 죄성을 통해 역사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사람들을 마귀의 자녀- 독사의 자식-라고 말합니다(요일 3:10, 8, 12, 요 8:44, 마 3:7, 23:33). 이러한 말씀들은 사탄이 사람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사탄(마귀)의 자녀 안에서도 유기적인 관계(자녀관계)를 통해 역사 하는 자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요한 복음 8장 44절에서 보듯이 사탄의 자녀들은 아비인 사탄에게서 전수받은 어떠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내주하는 죄(Sin)를 악(the evil)과 동일시했는데(롬7:0-21), 이 '악'은 또한 사탄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악한 자는 사탄 자신인 것입니다(요일 5:18-19, 2:13-14, 3:12, 마 6:13, 요 17:15 원문참조) 

 그러나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로교 신학자들은 타락한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은 강조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마귀의 자녀(요일 3:10)'가 되었는지 그리고 주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요 3:14, 12:31, 히 2:14)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장로교 신학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적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저희들이 귀하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마귀의 자녀가 되었으며 마귀의 자녀들은 그 아비인 마귀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것도 다만 비유일 뿐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비판2 : 위트니스 리가 사탄과 죄와 사망을 동일시했다는 비판에 대하여

-반박 : 우선 귀하들이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용했다는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The book of Romans uses two terms, "the body of sin(6:6) and "the body of death" (7:24). The body is called "the body of sin" because Sin is in the body. The body simply became the residence of Sin, which is the embodiment of Satan. What, then is "the body of death"? The source and power of death is Satan. Sin is the embodiment of Satan and death is the issue or effect of Satan"(Witness Lee, The Economy of God, P109)

위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는 '사탄의 체현'(the embodiment of Satan)이 죄'(단수인 Sin)라고 했고, '사탄에게서 나온 결과'(the issue or effect of Satan)가 '사망'이라고 했지 귀하들의 비판처럼 죄=사망=사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의 인격적 존재이지만 죄와 사망은 결코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죄와 사망과 사탄을 동일시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는 귀하들의 비판은 위트니스 리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비판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 말하는 사람 안에 들어온 '죄'가 다만 '불순종한 행위'만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죄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람 속에 들어와서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타락한 사람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인지는 추후 토론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교회와 신앙 97년 9월호, 162-164쪽 참조). 또한 사망이 사탄에게서 나온 결과라는 위트니스 리의 말은 성경이 말하는 바(히 2:14)임으로 별도의 입증이 필요없다고 봅니다.

4. 구원에 관한 반박

성경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과거시제)고도 말하고(엡 2:8), 더욱 구원을 이루라거나(빌 2:12), 더욱 구원을 얻을 것(미래시제)(롬 5:10)이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만도 간단한 작업이 아닙니다(박상걸, 성경적 구원론, 1995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들은 위트니스 리의 구원관에 대한 진지한 연구도 없이 함부로 (지방)교회의 구원관이 성경적인 구원관이 아니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저희는 '(지방)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사탄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믿지 않는다'라는 등 귀 측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단언에 대해 경악할 뿐입니다. 귀 측은 주님 앞에서 충분한 기도 후에 이러한 책자를 발간하셨습니까?

귀 측이 참되게 (지방)교회 성도들의 구원관을 알고자 하신다면 위트니스 리가 장장 천 페이지가 넘게(1084쪽) 믿는 이들의 구원에 관해 밝혀 놓은 책자들인 '신약의 결론-믿는 이들 I, II'(한국복음서원, 1991년)를 정독하여 보실 것을 권하겠습니다. 그러나 귀하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저희의 구원관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삼일 하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셔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요 1;14, 29, 19:30, 행 20:28). 부활하신 후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 15:45, 요 6:63, 10:10 원문). 그 후 그 영은 믿는 사람들 안에 영원한 생명(요 3:16, 요일 5:11-12)으로 들어오셔서 믿는 이들의 영을 거듭나게(구원)하시고(요 3:6), 점차적으로 혼을 구원하고 계시며(벧전 1:9 원문, 고후 3;18), 결국엔 몸을 구속하심(롬 8:23, 빌 3:21)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롬 5:10 원문참조, 히 2:10).

이러한 (지방)교회의 구원관은 귀하들의 거짓된 정죄(위 책자, 158-161쪽)와 달리 지극히 성경적인 구원관이라고 저희들은 확신합니다.

5. 교회관에 대한 반박

교회관에 대한 귀하들의 비판 요지는 지방교회가 배타적인 교회관을 가졌고,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교회관을 고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난1 (지방)교회가 배타적인 교회관을 가지고있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 : 저희들은 '배타적인 교회관'이 아니라 정상적인 모든 믿는 이들이 동일하게 인정하는 '성경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저희는 저희가 보고 믿는 진리를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신실하게 실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1) 교회관 : 성경은 교회(그리스도의 몸)가 주님이 갈망하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마 16:18, 엡 3:9-10). 그리고 목회자들을 포함한 모든 은사자들은 이러한 교회건축을 위해 부르심 받았습니다(엡 4:11-12). 그러므로 무엇을 교회로 볼 것인가는 신앙생활의 목표와 연관지어 볼 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그리스도)의 충만'(엡 1:23)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주님과 하나된 유기체(행 9:4, 요 15:5)만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성교회는 건물이나 사람이 만든 조직(또는 기관)도 교회라는 잘못된 인식(이종성, 교회론, 153쪽 참조)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들인 유기체만'이 교회라고 성경적으로 말하는 (지방)교회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생명도 없는 조직이나 건물이 주님의 몸을 구성한다는 발상은 신앙생활의 핵심을 빗나가게 할 뿐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2) 교회직분 : (지방)교회는 장로와 집사라는 성경상의 직분(딤전 3:1-13)을 인정합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이 다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진리도 믿고 실행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주일 날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소위 목회자만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성직자는 물론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함으로써 직접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고전 14:4 원문참조, 14:1, 31, 벧전 4:10-11, 엡 4:15). 특별히 고린도 전서 14장 4절의 원문에 따르면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하는 자가 교회(그리스도의 몸)를 건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31절은 '너희는 다...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갈망인 교회를 건축하도록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3) 주님의 몸의 분열 : 저희들은 주님의 몸은 하나이며 믿는 이들은 어떤 이유로든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엡 4:4, 고전 1:10-13, 3:3)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교회를 건축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성교회의 태도는 믿는 이들 간의 분열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처럼 보입니다(예를 들면, 통합 측의 최삼경 목사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교파의 분열도 있다고 하고, 고신 측의 전용복 목사님은 분열의 유익성을 말하기까지 함). 그러나 개신교 측의 한 양심적인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분열'을 '죄악'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개신 교회는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다. 종교개혁자들 자신이 분열 상태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각기 자신들의 교파교회를 세웠다. ... 1517년부터 개신 교회는 분열, 따라서 예수의 몸을 찢는 일에 대한 반성도 없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칼빈은 보이는 교회는 분열되어 있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고 하지만 그것은 성서적 교훈이 아니다"(이종성, 교회론, 152쪽).

비판2 : '한 지방에 한 교회'라는 교회관은 터무니없고 무의미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박 : 많은 분들이 위트니스 리가 말하는 '한 지방에 한 교회'를 ' 한 지방에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무리로 구성된 교회'로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배타적인 교회관을 가졌다는 비판도 이러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귀하들도 인용하셨듯이, (지방)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기성교회 교인들까지)을 그 지방에 있는 한 교회의 지체로 인정(위 책자, 161쪽)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장로교인, 침례교인, (지방)교회 교인의 구분이 따로 없고 거듭난 사람들은 다 '그 지방에 있는 교회(단수)의 구성원'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교회관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귀 측의 교회관은 무엇입니까?

또한 지방의 범위의 문제는 믿는 이들 사이의 분열과 관련해서 대단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한 지방, 한 교회' 원칙은 대부분의 서신서의 명칭(제목)과 각 서신서의 수신인의 범위(고후 8:1, 갈 1:2, 계 1:11, 롬 1:7, 빌 1:1, 골 1:2)를 볼 때 초대교회에서 일관되게 실행된 진리였습니다('도'(province)를 언급할 때는 '교회들'(복수)로, 한 도시(city)를 지칭할 때는 '단수의 교회(행 8:1)'로 구분함).

이처럼 우주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인데 공간과 시간의 제한이 있음으로 편의상의 주거지역인 지방을 기준으로 00교회라고 부를 때(행 8:1, 13:1, 14:23, 딛 1:5) 모든 분열은 즉각 폭로될 것입니다. 주거지역을 기준으로 교회를 구분하는 원칙이 분열을 방지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은 개신교 신학자의 글을 통해서도 확증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큰 문제중 하나를... 개교회주의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이에 대한 해결책은) 한 교회가 한 지역을 책임지는 형태이다. 이 제도가 정말로 정착되면 교회나 교단 사이의 대립이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같은 교단 소속 교인들을 주거지역의 교회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불필요하리 만치 갈갈이 찢어져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재결합과 연합이 우리의 최대과제라 생각한다"(정훈택, 총신대교수, 교회와 신앙 96년 12월호, 99-101쪽)

지금까지 본 것처럼 귀하들이 (지방)교회를 이단시한 내용들은 오해(양태론, 일신삼역)였거나 성경진리(사탄의 소재, 교회의 범위)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귀 측의 문서를 통한 이단정죄는 한 무리의 신실한 믿는이들에게 반영구적인 상처를 주었습니다.

저희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와 부활 생명의 능력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너무도 쉽게 남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현실에 대해 깊은 아픔을 느낍니다. 더구나 비교적 균형있는 관점을 가지고 계신 합동측 목회자(신학자)들이 위트니스 리의 신앙관을 오해함으로 전세계 (지방)교회 성도들을 문서로 이단시 한 것은 피차를 위해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서에 의한 상처는 반영구적인 것이며 반드시 문서로 치유되어야 합니다. 저희들은 <기독교의 이단들> 책자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모든 조치들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대화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다음 사항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1. <기독교의 이단들>에서의 (지방)교회에 대한 입장은 귀하들 개인의견인지 아니면 합동측 교단의 공식의견인지를 밝혀 주십시오.

2. 앞으로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지방)교회를 이단시하는 일체의 행위를 중단해 주십시오.

3. <기독교의 이단들>책자는 (지방)교회와 관련하여 <허위사실>을 담고 있음으로 서점재고를 즉각 회수하여 주시고, 재판 발행의 중단을 문서로 약속하여 주십시오.

4. <기독교의 이단들> 책자로 인해 (지방)교회가 입은 심각한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귀 교단 소속 신문을 포함한 2개 기독교 신문에 저희들의 본 항의서한 전문과 귀 측의 해명서를 게재하여 주십시오.

5. 만일 귀 측의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이 정당하다고 느끼신다면 우리는 제 3자가 진실을 판단 할 수 있도록 귀 측이 선정하는 기독교신문 또는 월간지를 통한 지상토론을 제안합니다.

위와 같은 저희 측의 요청에 대한 귀 측의 원칙적인 입장을 1998. 5. 30.(발송 일로부터 30일)까지 팩스로 보내 주시고 원본을 우편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는 귀 측이 이러한 제안을 무시하고 방치함으로써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귀 측에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양 측 모두를 중재하사 좋은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귀 교단 소속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첨부 :

1. '다락방 류광수 왜 이단이라 하는가'(박진규 목사 저)에 대한 항의 서한 사본 2부

2. 위트니스 리의 라디오 방송국 리스트 1부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30. 05:00

지방교회 탐구 - 3

“교회 직제는 달라도 고백은 같다”

  - (기독론) 예수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한다 : 위트니스 리는 약 701쪽 분량의 ‘그리스도론'(한국복음서원) 을 썼으나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양성을 부인한 적이 없다. 조사보고서상의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는 부분은 위트니스 리가 부활시 예수님의 육신이 육의 몸에서 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셨다고 한 것을 지적한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말은 성경 말씀 그대로일 뿐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으로 본다(고전15:44, 빌3:21). 지방교회측은 “뭔가 오해가 있는 듯 싶다”고 밝히고 있다. 

  - (인간론) 삼분설을 취하면서 사람의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함으로 전인적인 타락을 부정한다 : 우선 인간 구성을 이분설로 보든 삼분설로 보든 그 차이가 이단 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신학적 논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사보고서의 지적처럼 위트니스 리가 몸만 타락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으로 믿음으로 참으로 사람의 전인적인 타락을 부정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가 최대의 쟁점이다. 우리는 통합측과 토론시 우리가 온 영과 혼과 몸을 포함한 전인적인 타락을 믿는 근거들을 상세히 제시했다. 그러자 "물론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가 인간의 영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이 타락하여 죽었다고 주장한다"고 말함으로 연구 보고서상의 지적을 스스로 뒤집은 바 있다(월간 교회와 신앙, 97년 8월호 164쪽 참조). 

  - 교회론 관련 문제 제기들 : (지방)교회의 공식 교회론은 위트니스 리가 쓴

신약의 결론 - 교회

‘교회론(530쪽 분량)'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통합측 조사 보고서가 이 책 외의 자료 여기 저기에서 문맥의 흐름과 무관하게 떼어 낸 몇 가지 자극적인 표현들은 다소 오해 될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들을 인용 소개시 오류가 있거나, 핵심진리가 아닌 장로교단과 침례교단이 차이점을 가지되 서로 허용하는 정도의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 기성교회를 바벨론이라고 한다 : 계시록 17:5의 ‘큰 바벨론'을 ‘로마 천주교'로 보는 근본주의 성경교사들의 기존의 해석을 위트니스 리도 답습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해석이 이단시 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 물론 이런 해석에도 불구하고 지방교회측은 어떤 교단 소속이든 참되게 거듭난 성도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인정한다. 아울러 통합 교단을 포함한 타 교단 내에서 거듭난 성도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함은 물론이다. 

  - 목사와 예배 제도를 부정한다 : 지방교회가 기존교회와 다른 차이는 계급적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수의 장로들이 특정 교회를 다스리고 목양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보아 이들도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예배 실행은 형식상으로는 다양성이 인정된다고 보며 그 안에 주님의 임재 등 참된 경배 요건이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요4:24). 

  - 기성교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 : 어떤 단체이든 거듭난 성도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교파에도 참되게 거듭난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믿는다. 이 부분 역시 전후 문맥과 함께 읽을 때 풀릴 수 있는 오해들 중 하나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다 :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우리를 구속하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지 못한다. 이들은 “이런 오해는 아마도 구원의 여러 방면 중 사도행전 2:40이 말하는 ‘(지옥이 아닌) 패역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는 구절을 설명하는 문맥을 잘못 이해한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고 성명한다. 

  - 주 예수 이름 부름이 유일한 성령 충만 방법이라고 한다 : 고린도전서 12:3하, 로마서10:12에 근거하여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성령 충만되는 많은 성경적인 방법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따라서 “이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는 없으며 그렇게 말하지도 않으며 역시 전달과정에서 다소 오해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의 중요한 핵심진리(유3절)에 대해서는 정통성 여부를 엄격하게 따지되 지엽적인 진리나 실행들의 차이는 그 다양성을 허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이 유지되는 중요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단 여부를 규정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이며 참된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임을 양심가운데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지방교회 탐구 원본 518호 다운로드 - 첨부파일 (하단 클릭)
목회자신문_지방교회탐구3.pdf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9. 05:00


재평가 된 지방교회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는 최근 “재평가 된 지방교회”(DCP Korea 출판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한국교회에서 지방교회가 오해와 편견으로 ‘이단 정죄’를 받게 된 배경과 지방교회가 어떻게 반론을 펴 왔는가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 지방교회(local Churches)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미국에서 발간된 두 권의 책이 번역 소개되면서 비롯됐다. 하나는 영적사이비연구소(SCP) 닐 더디가 발간한 ‘하나님-사람(The God-Men)이고, 다른 하나는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투트(CRI)가 발간한 ‘신흥이단들’(The New Cults)이다. 

1982년 현대종교에서 ‘신흥이단들’을 상당부분 원문과 다르게 번역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 워치만 니 계열의 지방교회는 이단인가?”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전도출판사가 ‘하나님-사람’을 “윗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그러나 “The God-Men”은 미국에서 지방교회를 왜곡하고 폄훼했다는 이유로 법적 소송에 의해 출판금지되었고, “The New Cults”를 낸 CRI는 “우리가 틀렸었다”며, 지방교회에 대해 재평가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이 두권의 책을 진실인양 믿고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했음에도, 이들 책이 왜곡되었음이 확인된 이후에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는 않는다고 이 책은 항변하고 있다. 

지방교회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한국에서는 한 번 이단으로 정죄되면, 영원한 이단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한 번 이단의 누명을 쓰게 되면 벗기가 아주 어렵다는 뜻이다. 일단 이단감별사들의 표적이 되어 교계신문에 오르면, 실제 이단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변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인격적인 살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며, 지방교회도 이런 식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에 ‘재평가 된 지방교회’를 출판하게 되었다고 출판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신국판 320쪽/값 12,000원/문의 010-3515-3927>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4. 17:40

합동측 정책실행위 통합측 최삼경 목사 이단 규정

♦ 삼신론과 월경잉태론 옹호에 대한 분명한 종식 필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총회장 이기창 목사)은 지난 12월 30일 총회 제2차 정책실행위원회를 열어 임원회에서 최근 한국교회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최삼경 목사의 이단규정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어 이단임을 결의해 한국교회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합동측 임원회는 ‘최삼경 목사의 이단 규정 동의 요청의 건을 정책실행위에 안건으로 내놓아 이에 대해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며, 최근 새롭게 한국교회 내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보수교단총연합회의 가입과 총회장의 대표회장 수락에 대해서도 통과됐다.

이날 합동측 정책실행위에서는 문세춘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서기 등이 참여하는 ‘최삼경 이단처리위원회’의 연구보고서를 보고 했다. 동 위원회는 “최삼경은 개혁주의 신앙에 반하는 이단이고, 그를 옹호하는 잡지 ‘교회와신앙’를 비롯해 비호하는 모든 세력은 그 동조자”라고 발표했다. 최삼경 목사는 합동측 신학교인 총신대 출신으로서 합동측에 있다가 통합측으로 교단을 변경했으나, 이번 합동측의 결정에 대해서 미치는 파장을 커질 것으로 보여진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기총 길자연 대표회장은 “이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사안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합동측 총회가 이를 결의해야 한다”면서, “더구나 이 같은 이단 사상을 갖고 있는 이를 통합측 교단이 지지하고 있으므로 이에 합동이 이를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합동측 총회장 이기창 목사는 “이 자리에서 논의할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며, 삼신론과 마리아 월경잉태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합동측 총무 황규철 목사는 “삼신론과 월경잉태론을 계속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논란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합동측 정책실행위에서는 이러한 사상은 볼 것도 없이 이단이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결국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한보총의 가입과 관련해서는 난세에 신학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WCC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신학적 전쟁, 삼신론·월경론을 옹호하고 인정하는 교단들과 같이 갈 수 없다는 등의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고, 동 연합기관의 가입에 대해서도 안건을 통과 시켰다.

이날 합동측 총회장 이기창 목사는 “굳이 한보총 문제가 아니라도 개혁주의 교단들이 모여 언젠가는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면서, “실행위원 여러분들은 보수신학에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라고, 한보총에 가입하기로 했으니 확실하게 잘 하도록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발췌 : http://www.kidokin.kr/bbs/board.php?bo_table=k01&wr_id=648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3. 15:40


상호내재를 혼동하는 변형된 삼신론이단


토론에서 이인규 님의 글쓰기 습관은 마치 스케치북에 데생 하듯 하는 것이라면, 저는 정밀화를 그리는 식입니다. 짧은 지면에 단어하나 차이로도 정통과 이단이 판가름나는 복잡 미묘한 삼위일체를 다루면서 가볍게 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양측의 글의 분위기와 다루는 범위에 차이가 있게 될 경우 독자들은 약간의 혼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제에 저는 토론에서 제기된 모든 항목들에 대해 성심껏 입장을 밝힐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중요한 쟁점은 자세히, 오해나 근거 없는 비방은 매우 간단하게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쓰다보면 꼭 그 바로 다음의 글에서 모든 것을 다 다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점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합니다. 

Ⅰ. 삼위일체 토론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

저는 최00 목사를 지지하는 어떤 분과 수 개월 동안 지금과 똑같은 주제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지방)교회측)와 ○○○님(소위 정통교회측)은 토론 과정 중에 『1) 하나님은 독립된 삼위(세 인격)이시다. 2) 각 위는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이인규님이 정통교회 삼위일체 개념으로 제시한 내용들을 양측이 똑같이 믿고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한 바 있습니다. 전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실상 이 정도는 상식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토론은 이 정도의 원론적인 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양측이 위와 같은 소위 「정통교회삼위일체」를 모두 인정했는데도 『삼위가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신 데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실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개념인 1) 상호내재의미에 대해 해석이 서로 달랐고 2)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관점이 한 쪽은 분명하고 다른 쪽은 없는데서 오는 성경본문을 대하는 시각 차가 뚜렷하게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이인규 님과의 토론 쟁점도 먼저 번 토론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고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님들은 위 두 가지 핵심 쟁점에 대해 누가 성경적인 말을 하고 누가 정통 신학자들과 일치하는 말을 하는지를 진리의 주님이신 그분 안에서 기도가운데 자세히 살펴보시면 이 신론 토론의 핵심을 파악하실 것입니다. 

 참고로 지난 토론에서는 상대방인 ○○○목사님이 「삼위가 한 분이심은 마치 남편과 아내가 각각 독립된 인격체들이지만 한 부부인 것과 같은 개념」이라는 소위 『부부론』을 주장했고, 저는 그것은 인격의 「구별」에서 지나친 「분리」의 개념이며 명백한 삼신론 이단사상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약 두 달간의 뜸을 들이다가 중간에 갑자기 일방적으로 포기함으로 토론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인규 님은 말로는 자신은 상호내재를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은 없다』-물론 이 때 인격 안에 인격이 있다는 주장은 인격의 혼동이나 무시가 아니라 인격 상호 간의 구별을 손상하지 않는 상호내재를 뜻함을 주의-며 『정통적인 상호내재 개념』을 사실상 부인함으로 결국 삼위를 분리시키는 변형된 삼신론 사상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남은 신론 토론기간 내내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강조하여 다루어질 것입니다. 즉 요 14:10-11에서 나타난 『상호내재 개념』을 누가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가가 이 토론의 핵심입니다. 

  Ⅱ. (지방)교회 삼위일체관 

지난 번 최00 목사와의 토론에서도 소개된 것으로 아는데... 위트니스 리는 1) 삼위일체를 성경 말씀이 계시하는 그대로 믿는다 2) 성경 본문끼리 상호 모순되는 듯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억지로 체계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3) 특히 신약성경에서 두드러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들」을 강조하여 말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보아도 이것은 가장 건강하고 균형 잡힌 삼위일체관입니다. 

즉 먼저 교리를 정립하고 그 틀 안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고, 성경 본문들을 중시하면서 그 말씀 안에서 교리적인 설명을 도출해 내는 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방)교회측이 교회역사상 다뤄진 다양한 삼위일체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도 아닙니다. (지방)교회측 자체 신학계간지(http://www.lsm.org/a&c/welcome.html)에서 삼위일체론만을 1년 동안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영어를 잘하신다면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인규님은 성경본문 자체가 신학과 충돌을 일으킬 만한 내용들(마28:19, 고후3:17, 사9:6, 요1:14, 고전15:45)을 다룬 위트니스 리 글을 자신의 교리적인 틀로 함부로 비판하다가 성경 본문 자체를 부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님의 오해는 경륜적인 방면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이인규님은 앞으로도 자신의 잘못된 삼신론 기준으로 볼 때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 위트니스 리의 가장 성경적인 언급들을 님이 보유한 위트니스 리의 책 몇권에서 계속 뽑아내어 인용할 것입니다. 그럴수록 사실상 삼위을 분리시키는 이인규님의 삼신론 이단사상은 더욱 또렷이 폭로될 것입니다. 

  Ⅲ. 이인규 님의 변형된 삼신론의 실상  

제가 지난 글에서 이인규님을 『변형된 삼신론자』라고 단정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충분한 근거와 확신을 가지고 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확신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인규 님은 자신은 「삼위간의 상호내재를 굳게 믿고,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분리된 인격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항변했습니다. 막연한 자신의 머릿속에서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님의 글에서 나온 표현이나 구체적인 성경해석―예를 들어, 성육신 한 예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성부고난설로 연결시키시는 것―에 있어서는 님은 사실상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제가 지적한 님의 이단적인 주장을 다시 인용하고 비판해 보겠습니다. 

  A. 변형된 삼신론 주장 1  

 『즉 최목사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세 인격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비난을 한 것이고 ...』 ―이 말은 님이 말하는 『세 인격의 독립성은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의미의 독립성』입니다. 이것은 『고유의 인격의 구별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인격 간에 서로 상호내재 하시는 정통교회의 상호내재와 다른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B. 변형된 삼신론 주장 2  

 『<한 인격> 예수님 하나님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들어 있다면...결국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 속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이 되고…』 이러한 최00 목사의 주장에 대해 이인규님은 『한 인격에 다른 인격이 들어 있지 못하다는 뜻이 분명하다. 만일 한 인격 안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이 된다.... 서로 다른 세 인격이기에, 즉 인격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들 안에 아버지가 구별된 인격으로 상호내재 하심을 말하는 요한복음 14:11의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는 말씀과 다르고 다음과 같이 칼빈대학교 김석환 박사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인용한 정통 교부의 신앙과도 다른 이단사상입니다.   

『위격 간의 상호내재 : 닛사의 그레고리는 신격의 위격들이 시간 안에서, 장소 안에서, 직무 안에서(in pursuit), 또는 활동 안에서(in operation)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동일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아버지에 의해 역사되며, 아들에 의해 준비되고, 또 성령의 뜻에 의존한다. 거룩한 삼위일체께서 모든 활동들을 수행하시는데, 위격들의 수에 따른 분리된 행위에 의해서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성령에게 전달되는 선한 의지의 한 운동과 성향이 있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228쪽,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년, 원출처: Gregory of Nyssa, QNTD (5:334)). 

  님은 상호내재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라고 하시지만 위 인용에서 정통교부는 『장소 안에서도 분리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인규님은 지상 사역시의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위격의 구별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실제로 상호내재 하심을 부인하는 것이 님의 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그리고 은밀히 감추어진 채 진리를 변질시키는 무서운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세 위격이 함께 내재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 위격이 어떻게 상호관계를 가지느냐에 대하여…이 문제를 깊이 이해하면서 삼위간의 교제관계를 강조한 것은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였다…아우그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의 내적관계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세 위격(페르소나) 사이에 동등성이 있다 (2) 세 위격이 각기 완전할 뿐 아니라, 셋이 합하여 완전한 동등성을 이룬다. (3) 신성 안에는 일체의 분리가 없다. (4)그 셋은 함께 서로 내재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대한기독교출판사, 258-260쪽, Augustinus, De Trin.,VII.1, 2)』 『하나님(아버지)과 아들이 분할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쪽)』 

위 사실은 편견으로 인해 상대방의 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읽지 않으시는 님께서 읽어보셨는지 모르지만『누가 이단인가』책에서도 언급해져 있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분리되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내재 하심에 대해, ‘both are in each, and all in each, and each in all, and all in all.’라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George Bull 주교도 상호내재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를 의미하고, 그들이 하나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가 다른 둘 안에도 변함없이 있는 것(Defense of the Nicene Creed, Oxford, 1851)이라고 했다. 아우구스트스 스트롱도 「거룩한 삼위일체의 위격들은 분리할 수 있는 개체들이 아니다. 각각은 나머지 둘을 포함하며, 각각의 오심은 나머지 둘의 오심이다」라고 말했다(Systematic Theology(Phila delphia: The Judson Press, 1912) p 333).(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물론 이런 말들은 삼위의 영원한 구별을 전제하는 말들입니다. 

  위트니스 리 형제님도 다음에서 보듯이 위와 동일한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되셨을 때도,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항상 (존재적으로) 그분과 함께 계셨다(요16:32)(위트니스 리, 성경의 기본계시, 한국복음서원, 1986년, 26쪽)』 이인규님은 위의 신학자들의 이름을 모르실지 모르지만 정통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다 아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상호내재에 관한 이해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이인규님의 삼위일체론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난 명백한 변형된 삼신론입니다. 조금 더 보겠습니다. 

  C. 변형된 삼신론 주장 3 

『예를 들지요...한 학교의 10명이 같은 반 1학년 1반입니다....그들은 각자 독립된 인격입니다. 그들이 독립된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들이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학년1반에서 분리된 것과 뜻이 다릅니다. 』 위 님의 설명은 독립된 세 인격을 자꾸 분리된 방식으로 주장하심으로 「독립과 분리」의 개념을 정의해 달라는 지나가다님의 주문에 대한 님의 답변인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제 말은 위 님의 설명에서 삼위 하나님의 독립된 인격을 학교 학생들이라는 사람들의 인격적인 독립처럼 동일시하는 발상 그 자체가 이미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은 삼위 하나님간의 독립개념을 세 사람 간의 독립개념으로 보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점이 님이나 최00 목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위에 인용했던 칼빈대학교 김석환 박사님 박사학위 논문에서 인용된 정통 교부들의 가르침을 이곳에 소개해 보겠습니다. 님은 정통교부들의 주장은 존중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으로는 셋이나 실체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님의 실체를 아담과 하와와 셋에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역시 잘못된 것이다』(위 책 241쪽). 결론적으로 이인규님은 원론적으로는 상호내재를 믿고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실상에 있어서는 『인격 안에는 인격이 없는 즉 요14:11의 아들 안에 아버지는 없는 분리된 세 하나님들을 믿는 변형된 삼신론자입니다. 』 이 점은 이인규님이 빛 비춤이 있어서 잘못된 것을 시인하시고 회개하실 때까지 중점적으로 반복해서 지적될 것입니다. 왜 이러한 감추어진 삼신론 이단 사상이 악한지는 차츰 더 구체적으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Ⅳ. 이인규님의 여러 주장들에 대한 반론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지금부터 다룰 님의 이런 저런 주장들은 다음 항목들에 대한 님의 오해나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1) 님의 상호내재에 대한 비성경적인 이해. 2) (지방)교회측이 성육신 하신 주체와 부활하신 주체를 『아버지와 성령이 영원히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이 분이 입으신 육신은 죄는 없으시나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입고 계심을 일관되게 믿고 있는 것에 대한 무지. 3) 고전15:45의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입으신 육신이 부활시 육의 몸에서 신령한 몸(즉 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신 후 그 안에 포함된 영이시라』는 진리인식―이것을 개혁신학자 중엔 앤드류 머레이가 보았음, 그의 「그리스도의 영, 기독교 문서 선교회 출간」참조-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들입니다. 

 다음은 님의 인용이고 저의 반론과 문제제기입니다. 

  첫번째 인용 : 다시 묻겠습니다. 1) 지방교회 삼위일체가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까? 2)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가 틀리고, 지방교회의 삼위일체가 옳다는 것입니까? 

  답변과 반론 :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는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정통'교회의 삼위일체와 동일합니다. 저는 이점을 서두에 밝혔고, 정통교부들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밝혔습니다. 정통교회의 삼위일체가 맞고 님의 변형된 삼신론이 틀렸습니다. 님은 지금 각론은 완전히 빗나갔으면서 자신의 총론이 맞다고만 주장하고 계십니다. 함부로 정통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님은 정통교회란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신관이 마치 정통교회의 신론과 일치하는 것럼 보여 사람들을 호도하려고 하나 님의 신관은 신학자들의 글을 자신의 천연적인 관점으로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은 변형된 삼신론에 불과합니다. 

  두번째 인용 :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 혹은 여호와의 영"이라 불리는 하나님 자신이, 껍질인 육신을 입고 성자 예수님으로(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육신을 입고) 나타난다는 것이며, 부활 후에는 삼일하나님(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영이 되어 짐으로 총체적인 합으로 완성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양태론 과는 좀 다르기 때문에 저는 "변형된 양태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마는 결국 양태론 입니다'. 

  답변과 반론 : 님은 아버지와 성령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 상태로 아들 안에 상호내재 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은 것을 부인하십니까? 그렇다면 님의 성육신관은 참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님은 또한 우리가 마치 아버지가 성자 예수님으로서 육신을 입은 것처럼 가르치는 것으로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님의 틀에 함부로 꿰어 맞추지 마십시오. 

  세 번째 인용 : 3.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지방교회의 주장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초대교회 양태론 자는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 그 주장은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면 지방교회의 주장은 무엇일까요? 

  답변과 반론 :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위에서 성육신 하신 분을 소개 드린 대로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들 하나님이 주체가 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데 님은 엉뚱하게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성부고난설을 억지로 끌어다가 이단을 만들려고 애를 쓰시는군요. 차영배 박사 삼위일체론(총신대학 출판부) 74-76쪽 잘 읽어보시고 '성부고난설' 제대로 인용하세요. 

 님께서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전편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3)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각각 영원하시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 아버지가 영원하시고, 아들이 영원하시며, 영이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원한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믿으며 선포한다"( 신약의 결론-하나님, 303쪽). 

"우리는 또한 셋(아버지, 아들, 성령)모두 영원하심을 믿는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아버지가 영원하시다고 말하고, 히브리서 1장 12절과 7장 3절에서는 아들이 영원함을 지적하며,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는 영원한 성령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시다"(같은 책, 307쪽). (지방)교회측은 세 위격의 영원성과 동시 존재하심을 믿는다고 성경과 위트니스 리의 저서를 근거로 여러 번 변증했었다(96년 10월호 p.164, 97년 7월호 p.160). 

세 위격 모두의 영원성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양태론자가 될 수 있는가!  

  (4) 위트니스 리는 양태론자들과는 달리 세 위격 간의 '구별된 고유성'을 믿는다.   

만일 위트니스 리가 '아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고 선택하셨다거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다는 등 세 위격의 고유성을 혼돈하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최 목사는 어느 책 몇 쪽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밝혔어야 했다.  그러나 최 목사는 그렇게 못했다. 왜냐하면 위트니스 리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가장 성경적인 말을 하고 있다. 

"신성한 삼일성의 분배를 위하여 아버지는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 뿐 아니라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엡 1:4)...그 다음 그분은 우리를 예정하셨고, 우리에 대한 운명을 정하셨다(5절)"(같은책, 352쪽). "아버지의 선택과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아들의 구속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아들은 그분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을 성취하셨다(엡 1:7-9)"(같은 책 354-355쪽). 

"그 영의 분배하심은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여 그분의 영광의 찬미에 이르도록 하시는 그분의 인치심이다(엡1 :13-14). 성령의 인치심은 살아있는 것이며..."(같은 책, 357쪽). 위 인용들을 통해 독자들은 위트니스 리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고유한 특성을 결코 혼돈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참된 믿는 이들에겐 상식에 속한 진리가 아닌가! 최 목사가 비판하기 전에 우리측이 변증의 근거로 삼는 위트니스 리의 책, '하나님'(한국복음서원, 1991년)을 한 번만 차분히 읽어 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최 목사는 97년 11월호 글에서 마치 위트니스 리가 세 위격의 구별을 무시하기나 한 것처럼 장황한 말을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연구가 부실했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킬 뿐이다. -교회와 신앙 98년 5월호-』

간단히 설명 드리자면, 

위트니스 리는 세 위격인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의 동시존재, 상호내재, 영원한 구별과 분리되지 않으심을 믿는데 반해, 사벨리루우스는 세 위격의 동시존재를 믿지 않고 승계적인 셋을 가르치는 것이 다릅니다. 둘은 전혀 별개임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외에도 여러 언급이 있으나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와 같이 설명해 드렸으니 이제 더 이상 저희에 대해서 『삼위가 구별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부고난설처럼 보인다.』등의 양태론으로 몰고 가려하는 말씀은 삼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네 번째 인용 : 즉 세 글을 정리하자면... 1)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신성한 부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 분의 온 존재"가 달리셨다. 2) 신성만 살고 인간의 부분은 죽었다. 그 인간의 한 부분만이 사람, 다윗의 씨다 3) 예수는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정되었다. 

  답변과 반론 : 님은 그리스도의 신성부분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주장입니까? 그렇다면 님은 그리스도의 양성 중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하나님 사람이신 그분의 온존재가 달리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까? 그렇다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능을 부인하는 이단입니다. 3)은 로마서 1:4의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는 성경본문을 설명한 것뿐입니다. 님은 성경본문을 보고도 양자설 이단이라고 정죄 합니까? 

  다섯 번째 인용 :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아니즘 이며, 예수가... 양자설... 예수의 신성이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은 성부수난설이라고 하는 일종의 양태론이고 다른 것이란 오직 "단일 하나님"인가 "복합적인 하나님"인가 하는 것뿐입니다. 즉 예수는 인간의 부분과 함께 하나님 자신(신성)도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인간의 부분은 죽고 신성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치시는 분이 곧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답변과 반론 : 위 말씀에서 님이 사용하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미」하지요?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님의 상호내재 개념의 이단적인 이해―인격 안에 인격이 안 계신다―의 치명적인 독소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성령이 구별되긴 하지만 엄연히 아들 안에 상호 내재하시는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나(여기에서 그러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다고 하는 주장아니냐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미 위의 글과 1편의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이인규님은 『아버지 하나님은 분리되고 제외된 1/3 하나님 또는 성령을 포함시킨다면 2/3하나님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셨다고 이단적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님의 이단 사상은 추후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인지를 다루게 될 경우 집중적으로 폭로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인용 : 성육신 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 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 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 되시는 삼일하나님 54쪽) 즉 예수는 "사람의 껍질 + 성부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야기이며, 

  답변과 반론 : 님은 통상 하나님이라고 할 때 성부하나님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위 문맥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을 포함한 온전하신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는 님의 착각과 오해처럼 「사람의 껍질 + 성부 하나님 자신」 이 아니시고 「(영과 혼과 몸을 가지신) 사람 + '아버지와 성령님이 영원토록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으면서 상호내재 하시는 아들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니 님의 상상을 따라 함부로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곱 번째 인용 : 4. 중보자이신 한분,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하나님이 아니신 다른 인격의 한 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곧 예수와 동일한 인격이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는 구별된 인격이 언급되지 못합니다. 

  답변과 반론 : 누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고 합니까? (지방)교회 성도들도 딤전 2:5에 대해 님처럼 이해합니다. 님의 좁은 틀안에서 함부로 적용하지 마십시오. 

  여덟 번째 인용 : 5. 상호내재와 인격적인 거함 본인은 하나님 안에 예수께서 계시며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굳게 믿습니다. 즉 1학년 1반의 학생들은 인격체가 다르지만(독립된 인격), 모두 1학년 1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분리"란 용어는 1학년1반이 아닌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용어설명을 하면 위험한 삼신론이 되는지요? 지방교회는 독립된 세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면 삼신론자라고 합니까? 

  답변과 반론 : 님은 지금 두 가지 말을 하고 계십니다. 님은 「본인은 하나님 안에 예수께서 계시며 예수 안에 하나님이 거하심을 굳게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는 아버지 하나님은 그 안에 안 계신다고 하며 만일 그렇게 주장하면 성부고난설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지방)교회측은 아버지가 성육신 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님의 상반된 두 가지 주장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토대로 하여 본인이 알고 있는 이단들은 다 끌어다가 억지로 (지방)교회측과 연결 지으려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아홉 번째 인용 : 6. 상호내재라는 용어, 상호내재란 "존재론적 양식에 관한 표현"이며 "독립된 세 인격"이란 "상호 관계적인 표현"입니다 즉 상호관계적인 면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습니다..... 그 인격은 서로 구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남을 비판하려면 먼저 신학적인 상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존재적 양식이라 는 면에서 보면 삼위는 서로 내재합니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님은 상호 관계적인 점에서 "독립된 세 인격"입니다.

 답변과 반론 : 님의 이 부분은 새로운 주장이시군요. 「상호내재란 존재론적 양식에 관한 표현이며 독립된 세 인격이란 상호관계적 표현이다. 상호관계적인 면에서는 인격 안에 인격이 없다」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그런 주장의 근거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많은 주장이지만 비판하기 전에 님에게 충분한 설명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열 번째 인용 : 7.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 지방교회는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 한 이름을 주장합니다.... 단 일반적인 양태론과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의 복합적인 삼위의 구성요소가 세 형태의 양태적인 과정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답변과 반론 :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영원토록 구별되심을 상실치 않으시면서 상호 내재하신 온전하신 하나님이 1) 성육신 하셨고 2) 인생을 사시고, 3) 죽으시고, 4) 부활 승천하시고 5)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 (지방)교회측의 주장입니다. 만일 님이 이것을 부인한다면 성경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니 주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 (지방)교회측이 위와 같은 온전하신 하나님이 이 땅 위에 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늘 보좌 위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성경구절들, 예수님의 침례시의 자연들이 묘사하는 성경구절들을 가감 없이 믿는다는 점입니다. 』 이점이 결정적으로 양태론자들과 다른 점이며 양태론이나 변형된 양태론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님은 지금 성경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을 억지로 양태론 공식에 꿰어 맞추려하니 관계도 없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열 한 번째 인용 : 아래 다음 글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동일 인격으로 설명하는 지방교회의 책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시는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가 곧 예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요한복 음14:16-17에 대해서는 모든 정통 신학책과 주석, 사전들에는 보혜사이신 예수님과 다른 보 혜사이신 성령님과 인격적인 구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답변과 반론 : 님은 여기서도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정통 신학책들이 예수님과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구별하고 있다고 하나 지난 게시판에 올려졌던 루이스 스미디즈가 쓰고 정통신학자인 오광만 교수가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한 「바울의 연합사상」(여수룬)은 고후3:17 등 사도 바울의 관련부분에 대한 언급들에 대해 「예수 =성령」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처럼 성경 본문자체에서 위격 구별을 무시하는 듯한 표현들이 있는 것이 삼위를 각각 독립된 세 사람들처럼만 알고 있는 님과 같은 삼신론자들에게 가장 곤란한 대목이며 여기서 심각한 성경사실의 왜곡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 두 번째 인용 : 김성일님이 인용한 신학적 증거: 님은 김명용교수의 글을 단어 하나로서 단편적으로만 인용하고 있습니다.… 

답변과 반론 : 김명용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는 지난 번 질문을 재차 드립니다. 님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가 정통교회 삼위일체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 교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말은 성부 하나님을 지칭할 때는 맞지만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둘은 다른 주장이며 님이 맞으면 김 명용 교수는 이단이고 김명용 교수가 맞으면 님은 틀린 것입니다. 지난 번 저의 질문에 대해 확실하게 답변해 주시지요. 

마지막으로 

님의 질문들은 이 단락 서두에 언급한 그러한 오해와 무지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님께서 열린 마음으로 아무런 편견없이 글을 대하신다면 위의 설명가운데 답이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 기회로 기약하겠습니다. 저의 바램은 이인규님이 무엇가를 임의로 판단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님의 변형된 삼신론 이단사상을 재고해 보시고 정확한 삼위일체관을 갖게되심으로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 가운데 주님께서 역사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