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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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골2:2), 삼위는 각 고유성을 가지고 구별되나 상호내재 하심으로 결코 분리되실 수 없으며, 신약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God)(요4:24) 이셨지만, 성육신 후로는 하나님은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주님의 '신성'의 면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전제하에, '맏아들'에 관련된 핵심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느 날 입으신 '육신'과 이 '인성'이 부활시점에서 어떤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몇 차례에 걸쳐 살펴 볼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의한 우리의 유기적인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롬5:10). 또한 앞으로의 글들은 '하나님 사람'(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시점'에서의 '인성방면'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도행전 13장 33절의 '오늘'은 성육신이 아닌 '부활시점'입니다. 

행13:33은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시편 2:7의 인용이며 같은 내용이 히1:5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제는 '오늘'(This day)이 '성육신' 시점인지 아니면 '부활'시점인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만일 위 날이 성육신의 때를 말한다면 새로울 것이 없지만, 부활의 날을 가리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 번의 출생이 있다는 말이 되며 나중의 출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갖는지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을 성육신의 때로 보시지만 전체문맥을 보면 이것은 무리한 해석입니다(박만수 외, 증거, 도서출판 안티오크, 1993, 170쪽). 오히려 '오늘'을 '부활 시점'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사도행전 13장 이후는 사도 바울 일행의 이방 땅의 사역을 다루는데, 사도 바울은 행13:13-43에서 성육신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33절의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he had raised up Jesusagain)는 말씀은 '오늘'이 '부활시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조지 레드


저명한 신약학자인 조지 레드도 그가 쓴 '부활론'에서 다음과 같이 위의 해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사건을 시편 2편의 성취로 보면서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바울의 이러한 선포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에 모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50쪽).
 


(2)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로 출생하셨습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또 하나의 출생'으로 말합니다. 즉 그분은 첫 출생인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사람의 아들(인자)이 되셨고 두 번째 출생인 부활 안에 나심으로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이런 말은 '우리 주님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매우 많이 강조하며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독생자(삼위의 제2격)의 방면과 많은 형제들을 가지신 하나님의 맏아들의 방면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생한'(only begotten)이란 말은 하나님이 유일한 한 아들만 가지셨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요1:18, 3:16). 신격의 두 번째이신 아들 하나님(신성)은 그분의 영원한 신분이며 사람은 누구도 이러한 신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방면에서만 본다면 하나님에게 둘째, 셋째, 또는 많은 아들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즉 독생자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이신 아들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관점에서 그리스도가 '맏아들'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롬8:29, 히1:6). 이것은 앞서 본 '독생자'의 방면이 아니라, '신성'과 부활시점에서 높이 올려진(uplifted)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롬1:4)를 가리키는 것-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지금 하늘에 있습니다(롬6:6, 엡2:5-6). 그러므로 주님은 히브리 서에서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입은 자들(많은 아들들)이 다 하나(아버지 하나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안 한다고 말씀하십니다(히2:11).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지방)교회 성도들이 서로 '형제 자매'라고 한다며 비판하는 어떤 분들과는 크게 다르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분의 부활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이 되었습니다(요12:24, 벧전1:3). 또한 우리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신격은 가지지 못하지만 주님의 몸으로서 맏아들이신 주님과 동일한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가지고 한 새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엡2:15). 

즉 맏아들이신 주님은 [경배 받는 '신격']과 '신성'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다른 면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형제들인 우리는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아니나- 이것은 독생자의 고유권한이심] '신성한 생명과 본성' 그리고 '변화되어 가고 있는 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요1:12, 벧전1:4,.롬12:2, 빌3:21). 존귀한 주님의 몸의 지체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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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요1:18)는 '신성'만 가지신 삼위의 제 2격 하나님이시라면, 많은 형제들이 있는 '맏아들'(the first-born, 롬8:29)은 '신성'과 '높이 올려진 (인정되신) 인성'(롬1:4)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한국교계에서는 이러한 깊은 성경 진리가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꼼꼼히 듣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부활 후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었다'면, 그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는 아니라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예수님은 성육신 하신 이후 부활, 승천, 재림 심지어 영원토록 '인자'(사람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주님이 부활 후에도 뼈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눅24:39), 승천 후에도 스데반에게 인자로서 보이셨으며(행7:56), 재림 시에도 인자로서 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26:64). 이뿐 아니라 주님은 영원토록 인자 즉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실 것입니다(요1:51).

주님이 입으신 인성은 비오면 걸치고 날이 개면 벗어버리는 레인코트가 아니라 그분의 존재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은 부활 후에는 더 이상 '사람의 아들(인자)은 아니라고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은 성육신 이후 영원토록 '하나님-사람'(God-Man)이십니다.

(2).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높이 올려졌다 또는 인정되었다'면 예수님의 고유한 인성이 파괴되어 제 3의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사실은 전 예장 통합측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이 이렇게 저희들을 오해하였습니다. 즉 지방교회측이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나실 때부터 승천 시까지 참하나님이시요 참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말한 '인성의 변화' 또는 '인성의 높이 올려지심'(uplifted)은 예수님의 '육의 몸'이 부활 후에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제 3의 어떤 물질로 변질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고 한 비판입니다(고전15:42-44).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

이 점은 쌍방의 공개 토론시 충분히 설명 또는 반박되었다고 믿습니다(누가이단인가, 118-121, 252쪽 참조). 롬1:4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길 원하시는 분은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다른 책자인 '로마서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결정'(WL, 한국복음서원, 1996년, 245쪽 분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첫 열매로서 입으신 영광의 몸의 형체를 낮은 몸을 가진 우리도 장차 똑같이 입을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은 우리 참된 믿는 이들이 가지는 영광스런 소망 중 하나인 것입니다(빌3:21, 고전15:49, 히2:10). 장로교 신약학자 조지 래드도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세상 끝 날의 성도들의 부활체와 동등한 서열에 있다. 예수님과 성도들은 한결같이 '영적인 몸', '영광의 몸'을 소유한다. 이 사실은 빌립보서 3장 21절에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진술되어 있다'(죠오지 래드, 부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55-156쪽).

사실 부활 전 후의 '예수님의 인성'에 어떤 비밀스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부활 이후 40일 동안 이 땅에 더 계셨던 주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20:19, 26, 눅24: 31, 막16:12). 장로교 신학자인 조지 래드는 이러한 비밀스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부활의 순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 답은 예수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이다'(위 책, 126쪽).

(3). 주님은 부활 이후에도 고유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되, 인성은 '비밀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성수를 위해 몸만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에겐 이런 교제가 골치 아프실 것입니다. 그냥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으면 되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느냐고 나무라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둑세계에도 다양한 급수가 있고, 영어를 배워도 초, 중, 고급반이 있듯이, 성경진리에 대한 인식 정도도 성도들의 생명의 분량에 따라 그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제를 통해 빛 비춤 받고 영적인 눈이 열릴 수 있는 분은 주님을 깊이 있게 추구하는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 한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인 58개 구절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는 말로 시작하여 부활 전후의 '인성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육의 몸과 신령한 몸',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고전15:42-49, 52).

사도 바울이 열거한 위 내용들이 우리가 부활시 체험할 것 일뿐 아니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가 본으로 먼저 체험하신 것임은 고린도 전서 15장 전체 문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고전15:23).

본질적으로 영이신 삼위 하나님(요4:24)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신 후, 그 육신조차도 부활시 영화롭게되어 조지 래드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세계]로 높여진 분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맏아들'(롬8:29)이십니다. 이 분이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지금은 몸된 교회생활 안에서 많은 형제들인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고전15:45, 요일5:11-12, 갈4:19, 롬8:30). 오! 이 어떤 구원인지요(롬5:10, 히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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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의 요 7:39는 난해구절중 하나입니다 :

'이는 믿는 자의 받을 '그 영'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원문에는 없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But He said this concerning the Spirit, whom the ones believing into Him was about to receive ; for Holy Spirit was not yet, because that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위 영어본문은 핸드릭슨사에서 출판한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1987년판)의 본문이며, 영어 KJV는 원문에 없는 'given'을 넣었음으로 인용치 않았습니다.

위 구절에서 '믿는 이가 받을 그 영'이 아직 없는 이유가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셨기 때문'이라는 본문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보겠지만 '신성과 인성을 다 가지신 그 영'(The Spirit)이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 영화롭게 된 시점인 예수님의 부활 이후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그 영'의 존재시기와 그 영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시기는 '부활시점'입니다.

원래 아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영광 안에 계셨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고 오셨지만 이 영광은 입으신 육신 안에 가려져 있었습니다(요17:24, 1:18). 그러나 주님이 고난을 받고 부활하실 때 영광을 감싸고 있던 그분의 인성이 비로소 영광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눅24:26, 요12:16). 주님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와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함께 말씀하셨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요12:23-24).

이처럼 영광은 빛이신 하나님 자신의 나타나심인 것입니다(요일1:5, 계21:23).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신성한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신 결과'(WL, 한국복음서원, 1996, 118쪽 분량)라는 책자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삼위의 제 3격 성령님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이미 계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육신 하신 아들을 성령과 분리된 분으로 아시고 또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분리된 분으로 아십니다. 즉 성령을 먼저 등장하셨던 아버지와 아들은 저 하늘에 남겨둔 채 홀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각각 분리된 '세 하나님들'로 보는 잘못된 신관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이 결코 아닙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구별되시되 결코 분리됨 없이 언제나 서로 안에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간의 상호내재는 영원 전부터, 성육신, 죽음, 부활, 승천, 성령강림.... 아니 영원토록 분리된 적도 없고 분리시킬 자도 없습니다(요14:10, 20, 요일1:3, 2:22-24).

한 장로교 신학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 안에 제3위 성령님이 이미 내재하셨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성령론 평가

'성육신과 성령에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의) 육신 안에 성령께서 영원토록 거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육신 안에 충만히 거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이며... 여기서의 강조점은 날 때부터 성령으로 태어나셨음을 강조한다. 또 성령의 충만 정도가 아니라 성령자체를 소유한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성육신은 함께 생을 산다(이순태, 현대성령론 평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125쪽).

3.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과 인성 둘 다 소유하신 '그 영'은 부활 후에만 계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요7:39의 '그 영'은 고전 15:45의 '생명 주는 영' 또는 롬8:2의 '생명의 영'과 동의어로서 '맏아들' 즉 부활 후의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이런 말을 언뜻 들으면 삼위의 제2격과 제 3격이 동일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가 분리할 수 없으나 엄격히 구별되듯이, '그 영'(아버지, 아들, 성령 + 높여진 인성) 안에서도 삼위는 분리할 수는 없으나 엄연히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엔듀류머레이

요7:39와 같은 심오한 진리는 한국교계에서는 낯설지 모르지만 국외의 일부 장로교 학자들 중에는 이 부분의 진리를 보신 분들이 있습니다. 먼저 화란 개혁신학 배경을 가진 경건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앤드류 머레이는 그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자에서 요7:39의 '그 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인간을 죄와 저주에서 구원하심 뿐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안에 새로운 거룩한 인성(humanity)을 완성하심으로 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 인간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생명을 (성도들이) 전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부활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받으셨고, 그의 인성을 하나님의 영의 처소이자 분배처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은 신인의 영-참으로 하나님의 영이면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으로서 (성도들 안에) 임하실 수 있었다'(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42-42쪽).

따라서 요7:39의 '그 영'은 삼위의 제3격만이 아니며, '신성'(아버지, 아들, 성령님)과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생명 주는 영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놀라운 분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셔서 우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요3:6).또 다른 장로교 신학자인 루이스 B. 스미디즈도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은,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질 수 있'는 기독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여수룬, 1991, 26-27쪽).

PS: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고전15:45를 연구할 때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끝으로 The Spirit, The Holy Spirit, Spirit 등을 모두 삼위 제 3격만을 의미하는'성령'으로 번역하는 것은 혼돈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22:17은 제 3격 만을 의미하는 '[성령]과 신부'가 아니라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높여진 예수의 인성을 가지신 [그 영]과 신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도 the Holy Spirit이 아니라 The Spiri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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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6회에 걸쳐 '맏아들'(롬8:29)에 대해 교제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지극히 성경적이지만, 한국교계 내에서는 생소한 부분이 있으며, 더구나 앞으로 '기독론'과 '성령론'이 겹쳐지면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런 교제를 통해 주님이 우리의 시야를 넓혀 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다음은 풀러신학교의 루이스 스미디즈 교수가 쓰고 총신대학과 웨스터민스터에서 공부한 오광만 님이 번역한 'UNION WITH CHRIST'(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여수룬, 1991년판) 내용 중 '기독론들'과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해당되는 것들을 요약 한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점에서 본 기독론(위 책 제1장)

첫째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십자가와 부활은 당연히 불순종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적인 일을 성취했지만, 이것은 지엽적인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신성화된 인성이 예수님의 영화롭고도 완전한 인성을 공유하도록 다른 인간의 생명 안에 부어 지는 것'에 강조 점을 둡니다.

즉 기독론의 중점을 예수님 생애의 역사적인'행위들'에 두지 않고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된 '존재'에 두는 관점입니다(위 책, 22-29쪽).

둘째는 계약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성부와 성자간의 계약에 의해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사건)을 매우 강조합니다(위 책, 29-36쪽).

셋째는 상황적 기독론입니다. 이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되, 그 강조 점을 이러한 죽음이 악의 세력들을 처리함(골2:15)으로 인간이 살고 있는 역사적 상황(situation)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데 두고 있습니다(위 책, 36-50쪽).

대략적으로 동방정교회는 '성례주의적 기독론'을 취한다면, 한국 교계 대다수 성도들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장로교단의 사상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다음 글들은 그가 '계약적 기독론'을 취하되 '성례적 기독론'의 관점을 포함하며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인성 안으로 흘러들어 갔으며 그곳으로부터 우리의 인성 안으로 주입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밖에 남아 계신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이 받으신 모든 고난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사역들은 무익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Institutes II. xvii. 1)'(위 책, 29-30쪽).

2.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두 가지 관점(제 2장)

첫째는 '증발된(pneumatic?)그리스도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위 책 저자는 이 범주에서 빌헬름 부세트와 아돌프 다이스만의 관점을 소개했는데 핵심은 부활 전의 '예수'가 부활 후의 '주(영)'임으로, 그리스도 주와 영을 '동일'(고후3:17)하게 보는 관점입니다(위 책, 53-57쪽).

둘째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성령론'입니다. 칼빈은 그의 '에베소 주석'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셨지만,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고 말합니다. 즉 이 이론에 의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 즉 예수님의 '대리인' 일뿐입니다(위 책 57-61쪽).

그런데 위 책 저자인 루이스 스미디즈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사도 바울의 관점- 성경적 관점-을 자세히 고찰한 후, '성령(그 영)은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위 책 61-88쪽). 물론 저자는 이러한 총론에 해당되는 글에 이어서 그의 책의 후반부 전체인 약 180쪽을 할애하여 자신의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위 결론적인 몇 줄만 읽고 성급하게 '양태론자' 라고 공격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이런 혼란은 앞서의 지적처럼 '그 영'을 아버지와 아들은 제외된 '제3격 하나님만'으로 볼 때 생깁니다).

스미디즈 박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C.H. Dodd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 더 관심이 있는 분은 James Dunn의 'I Corinthians 15:45-last Adam, life giving Spirit'(B. Lindars & S.S. Smalley편집, Christ and the Spirit in the New Testament(Cambridge, 1973)과 'Jesus and the Spirit(philadel phia, 1975)를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 내의 성령의 임재는 주님의 임재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하자면, 지상에서 그의 몸의 생활의 확장을 얻으신 셈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NewYork, 2nd ed., 1954), p62). (위 책, 86쪽).

지금까지 본 것처럼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민감한 요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이 주도해 온 한국교계는 위 이론들 중에서 '계약적 기독론'과 '그리스도의 대리로서의 성령론'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정통'이고 다른 것은 '이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강조하고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생명을 소홀히 하는 이론적 근거를 갖는 것이 같은 개혁신학자인 J.H. Bavinck가 지적한 '개혁교회의 영적 결핍'의 중요한 원인은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차영배, 성령론, 경향문화사, 1994, 61쪽).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서 '영적 성숙'(서신서)과 '익은 열매'(계시록)를 산출하시는 분은 '구속'을 이루셨을 뿐 아니라 '부활생명'으로 사람 안에 들어오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즉 '생명 주는 영'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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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은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 책만 보게 하고, 다른 서적은 일체 못 보게 통제한다는 루머를 퍼뜨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저희들의 신학계간지 '확증과 비평'(http://www.affcrit.com/)의 글들을 쓰기 위해 인용한 '참고 목록들'을 훑어보시면 그 말이 거짓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오히려 지방교회가 개혁신학을 포함한 기독교계의 여타 신학들의 실상을 깊숙이 알고 있더라고 소문 내시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똑똑한 머리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평범한 비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1) 하나이며 셋이신 하나님(창1:1, 마28:19, 사45:15, 요14:11). 2)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요1:14, 갈4:4). 3) '예수님'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고전15:45). 4) 승천 후 예수님이 하늘과 성도들 안에 동시에 계신 것(히7:25-26, 고후13:5, 롬8:10). 5) 예수님이 믿는 사람들과 결혼하시는 것(고후11:2, 계21:2, 9-10)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진리들을 참되게 아시려면 사도 바울 처럼 겸손히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나아가 이런 영적 실제들을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엡1:16-18상, 3:14-15). 이러한 심정으로 이제 '경륜적인 방면의 하나님'과 '고전15:45'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한국교계에서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이 너무 무시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변치 않고, 엄격하게 구별되며, 상호 내재하여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한 분이십니다(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하나님의 위격이 '분리'된다고 하는 것은 개혁신학의 뿌리인 아우구스티누스나 터툴리안의 가르침과도 다른 무지한 '이단 가르침'입니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 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을 참조)).

이러한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케 하고 나타난 모양도 같게 할 경륜(계획)을 수행하셔야 만 했습니다(엡3:2-11, 요10:10하, 벧후1:4, 요일3:2). 이것을 계획(아버지), 성취(아들), 적용(그 영)하시는 일을 위해 삼위 하나님이 거치신 긴 과정들을 가리켜 학자들은 '경륜적인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이종성, 위 책, 257, 261쪽).

그런데 어떤 분들은 지방교회측이 '하나님이 육신 입어 하나님-사람'이 되셨고(요1:14), 이 '하나님-사람이 부활 후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고전15:45)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전능성을 위배한 이단사상이라고 공격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안 되셨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는 영이 안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적 사실조차 정면 부인하는 끔찍한 이단사상] 이면에는 예수님의 행적을 '사건중심'으로만 이해해 온 신학사조가 잠재의식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성육신이 한 번 해본 '사건'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에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의 경륜 방면에서 엄청 난 '존재의 변화'입니까? 이 비밀을 영 안에서 참되게 본다면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성육신의 엄청난 경이'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입니다.

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딤전3:16)!!

2.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십니다. 

고전 15:45 하반 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지막 아담'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구별되나 '결코'(never) 분리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인성)을 입으신 분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생명 주는 영'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자신인데, 예수님의 인성이 부활시 '신령한 몸(영화롭게 된 몸)'으로 변형되신 것뿐입니다(고전15:44, 빌3:21). 이러한 '되심'(became, was made)의 시점은 예수님의 부활시점입니다(눅24:26, 행3:13).

어떤 번역본은 원문(조오포이에오 #2227)를 '[살려주는]' 영이라고도 하나 다른 용례와 번역본들을 참고할 때 '[생명 주는] 영'이 더 무난합니다. 그러나 '살려주는'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요6:63, 5:21, 롬8:2, 11, 고후3:6).

즉 성육신 안에서 예수님은 구속(redemption)을 위해 육신이 되셨다면(요1:14, 29), 부활 안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주입(the imparting of life)을 위해 '생명주는 영'이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 뿐 아니라(고전15:3),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요10:10하, 5:40). 따라서 한국교회들이 설교나 복음전파 시 '죄사함' 만 강조하고 '생명' 방면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롬5:10 원문참조).

3. 개핀 교수님과 차영배 박사님의 토론이 말해주는 것

'성령론-구원론 부교재'(차영배, 도서출판: 경향문화사, 1994)에 소개된 고전15:45에 대한 위 두 분의 서면 토론내용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두 분 다 존경받는 개혁신학자이며, 차 박사님은 직접 국내신학교 교수로서, R. B. Gaffin 박사님은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자신에게 배우고 귀국하여 국내 신학교 교수가 된 제자들을 통해 한국 교계 내 신학이론 형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위 책에 소개 된 개핀 박사님의 고전15:45에 대한 입장은 '본문 내용이 삼위 상호간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관계를 다룬 것이 아니라 경륜적, 기능적 관점이라는 전제아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선물은 높아지신 그리스도 자신, 곧 교회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 하시는 생명을 주는 (성)영이며,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일치한다'고 합니다(위 책, 49쪽). 이에 대해 차 박사님은 '고전15:45의 살려주는 영'은 뼈와 살이 없는 성령을 가리킨 말이 아님으로 성령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성령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함은 위격을 혼동할 위험이 크고, 양태론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반박합니다(54쪽).

이에 대해 개핀 교수님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은 '본체론적', 위격적 혼동 없이 '기능적'으로 단일이라는 것(functional oneness)이다'고 재차 반박했습니다(63-64쪽).

위 토론을 평가하자면,

첫째, '생명주는 영= 단순한 제3격만의 성령'은 물론 아닙니다. 고전15:45 본문 자체가 이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둘째, 개핀 박사님은 위 내용을 경륜적 관점에서 서술했다면, 차 박사님은 이것을 본질적 관점에서 '양태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차 교수님은 개핀 교수의 '본체론적 혼동 없이' 라는 단서를 고려했어야 했습니다. 성육신 안에서도 예수님 인성 안에서 위격 혼돈 없이 상호내재 했던 아들과 성령이 부활 후라고 해서 위격 혼동을 가져올 일이 없습니다.

셋째, 본문에서 '생명주는 영'이 단순한 3격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신격(아버지 아들, 성령)+ 높여진 인성'을 가지신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인식이 두 분에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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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조연배우'와 '세트'도 있지만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맏아들(롬8:29)'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이 입으신 인성을 다룬 핵심진리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이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시는가, 아니면 셋으로 분리되는가?, 또한 우리가 영접한 주님이 인성을 가지시는가, 벗어 버리셨는가 아니면 인성을 아예 입으신 적도 없는가? 하는 점들을 다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하나님이 상호내재 하심으로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 글에서 열거한 난해구절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와 터툴리안은 '분리된 세 하나님' 사상을 배척합니다.

성경본문(요14:10-11, 20)과 위 정통교부들은 국내 일부 이단연구가들이 주장하는 '분리된 하나님(들)' 이단사상을 배척합니다. 정통 삼위일체 이론의 최종주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로 계신다. 위격의 하나가 아니라 실체의 하나이다. [하나님과 아들이 분할 할 수도 없고, 분리할 수도 없는 분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게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의 세 위격을 삼중적(triplex)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각자가 유리(분리)되어 있는 실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위격은 상호내재 한다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이종성, 삼위일체론, 267, 269쪽).

'삼위는 구별되나,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터툴리안의 견해는 이미 소개 드린 바 있습니다(차영배, 삼위일체론, 208쪽).

삼위일체 신앙이 잘못되면 기독론, 성령론도 당연히 잘못되게 되어 있음으로 한국교계 내에서 영향력 있는 분들의 '분리된 세 하나님 이단사상'은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합니다.

2. 맏아들과 관련 된 난해 구절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

거듭 말씀드리지만, '맏아들'은 구별되나 분리할 수 없는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육신이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된 생명 주는 영이십니다(고전15:45). 이러한 분이 이 시간에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보좌 위에서 계시며, 동시에 생명으로서 이 땅위의 참된 거듭난 성도들로 된 그리스도의 몸 안에 계십니다. 이런 성경적 관점을 갖는다면 다음 구절들은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요1:51]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창28:11-22의 야곱의 꿈의 성취입니다. 맏아들인 인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을 건축하도록 하늘로 땅을 향해 열려있게 하고 땅을 하늘에 연결시키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실제로 주님은 머리로서 하늘의 모든 풍성을 교회에 전달하시고(엡1:22-23), 이 땅 위의 주님의 몸인 교회지체들을 아버지께 이끌고 계시는 사닥다리이십니다 (엡2:18, 요14:5).

[요7:39]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제3격 성령'이 아직 없다는 말이 아니며, 영화롭게 된 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의 실제이신 '생명 주는 영'이 부활 전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행9:4]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역사적으로 사울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결코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승천 후 맏아들은 생명으로 제자들 안에 들어와 하나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몸인 제자들을 핍박한 것은 곧 주님자신을 핍박한 것입니다(골3:4, 고전6:17).

'예수님 사랑해요'를 외치면서 주님의 지체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이것은 마치 주님 얼굴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발로 그분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작은 지체'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임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마25:40).

[롬1:4]는 '이 아들로 말하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시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고전15:44)으로 높여짐으로' 그분 안에 있던 신성이 영화롭게 된 인성을 통해 밖으로 충만히 표현되신 것을 말합니다. 고전15:45의 '생명주는 영'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롬8:10]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롬8:34]는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두 분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이신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생명'으로 믿는 이 안에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롬8:2).

[히2:11-12]는 거룩케 하는 자(맏아들)와 거룩케 함을 받는 자(많은 형제들)가 다 한 아버지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요12:24). 놀랍게도 예수님은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서로에게 거리낌 없이 '형제'라 부르지만(요20:17, 롬8:19, 벧후3:15),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또는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형제님' 하고 친근하게 부를 수 없다면 거기에 이미 계급적인 성직자 평신도 제도인 니골라당의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계2:6,15). '형제'는 직분이 없는 평신도를 가리키는 저급한(?) 호칭이 결코 아닙니다.

[계5:6]은 하늘에 계신 '어린양의 일곱 눈'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위 말씀은 분리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인성을 입고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생명 주는 영으로 이 땅에 오심을 말합니다. 삼위는 상호내재하나 구별된 상태로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에, 2격이 3격과 혼동을 일으킬 일이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영(Spirit)'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무조건 '아버지', '아들'은 아니고 제3격인 성령하나님만'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의 사고체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오! 우리 안에 지금 계신 이는 비밀하고 신령한 몸(인성)을 가진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 사람'이십니다. 이 분은 분리된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상호내재하시며 인성도 있으신 그 영 하나님(생명)으로 우리 안에 사십니다. 이 분이 경배의 대상이 되는 신격에서는 아니나 우릴 맏아들인 자기의 형상과 똑같이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롬8:28-30). 할렐루야!!

10

주님이 주신 부담(burden)을 글을 통해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할 지를 묻고 순종하다보니 이제 글을 마무리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핵심사항을 재 강조함으로 '맏아들'(롬8:29)에 대한 교제를 마칠까 합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작은 지체들의 교제가 한국교계 내에서 '맏아들'에 대한 성경적 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어떤 표현은 분별을 위함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분들을 정죄 하는 것으로 비춰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 상한 분이 계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1. '맏아들'(롬8:29)은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합니다.

1) 한 분 하나님이신(사45:5, 고전8:4)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은 그 위격이 엄연히 구별되시지만, 상호 내재하심으로 영원토록 결코 분리되지는 않으십니다.

2)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God)은 아들 안에서 육신을 입고 '하나님 사람'(God-man)이 되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은 1/3하나님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딤전3:16, 골2:9)이심으로, 아버지와(혹은) 성령은 육신을 입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 입니다(요14:10-11, 마1:18).

3) 예수님은 삼위가 상호 내재하는 '온전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죄만 없으시지 평범한 우리들과 똑같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요19:5, 행13: 38, 딤전2:5). 성육신과 부활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성 자체에는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습니다. 

4) 하나님 사람이신 예수님의 육신(인성)은 부활시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셨습니다(고전15:42-47). 이것은 인성을 벗어버리거나 인성이 제3의 물질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예수님의 인성이 신령한 몸을 입은 것을 말합니다(고전15:44).

5) '하나님'이 성육신 후 '하나님 사람'으로(요1:14), 또한 부활 후에는 이 분이 신령한 몸을 입은 하나님-사람이신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고전15:45). 만일 누가 하나님의 불변성만을 주장하며 이러한 성경적 사실을 부인한다면 심각한 이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6) 성경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요 생명이실 뿐 아니라 많은 형제들을 가진 맏아들이십니다(롬8:29). 이 분은 지금 하늘 보좌 위에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계시는 동시(롬8:34)에 이 땅에 믿는 이들 안에 생명으로 들어와 살고 계십니다(골3:4). 이러한 실체가 한 '새사람' 또는 '그리스도의 몸과 머리'입니다(엡2:15, 골1:18).

2. 거듭난 후의 신앙생활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로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엡1:4-5, 롬8:29).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를 복음으로 불러 영을 거듭나게 하시고(요3:6), 혼을 변화시키고 계시며(롬12:2, 고후3;18), 결국 우리의 몸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며(빌3;21, 롬8:23), 우리가 당하는 모든 환경은 이 목적을 위해 합력하고 있습니다(롬8:28).

속히 이러한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고(엡4:13-16) 새 예루살렘이 완성되기를(엡5:25-27, 계21:2, 9-10) 하나님이 고대하시고, 이기는 자들이 고대할 뿐 아니라, 썩어짐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피조물들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롬8:19,21).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소서! 세월을 아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시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엡5:16-17, 벧후1:3-4)! 이 땅의 모든 주의 종들은 마땅히 당신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이 한가지를 위하여 수고하게 하소서(갈4:19).   아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8. 3. 08:22

서언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지방교회(local church, 행 8:1, 13:1, 20:17, 고전 1:2, 계 1:11, 2:1, 8, 12, 3:1, 7, 14, 행 15:41, 고전 16:1, 갈 1:2, 고전 16:19, 고후 8:1)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실행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로서 이 소책자를 준비했다. 지방교회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방교회란 한 도시에 한 교회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며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나타남을 말한다. 최초의 지방적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이며, 예루살렘 안에는 사도, 장로, 집사, 오순절, 방언, 침례, 복음전파, 떡떼는 모임, 병고침 등도 있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한 교회로 모였다. 성경에서 교회는 한도시, 즉 한 지방에서 한 교회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실행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간증할 수 있는 이러한 기회를 인해 감사 드린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체험함, 거듭남, 변화, 생명 안에서의 성장, 교회, 왕국, 삼일 하나님, 하나님의 목적, 사람의 영을 포함하여, 다양하고도 중요한 성경 주제에 관하여 활용 가능한 많은 다른 출판물들이 있다. 우리는 진리를 알려는 진지한 갈망으로부터 나온 모든 문의를 환영한다.

우리는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믿음에 대하여 절대적이며, 가장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바란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와 구주로 영접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그분 자신에 대한 살아 있는 지식에로 인도하기를 힘쓰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의 간증을 나타내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어떠한 교파로 통합하지 않고, 다만 피로 씻음받고,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각 지방에서 함께 하나로 모이고 있다. 우리는 모든 참된 믿는이들을 환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인 그들과의 교통을 추구한다. 이 땅 위의 주님의 간증이 확대되고, 그분의 신부가 그분의 곧 다시 오심을 위해 예비되도록 그 간증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 우리의 참되고도 간절한 갈망이다. 주님이 오늘날 이 땅 위의 그분 자신의 사역을 존귀케 하고 옹호하시기 바란다.

우리의 신앙

1.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여진, 완전하고 신성한 계시인 것을 믿는다(딤후 3:16, 벧후 1:20-21, 요 5:39, 계 22:18-19).

2.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삼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함께 동등하게 존재하는 분이심을 믿는다(딤전 1:17, 엡 4:6, 마 28:19, 고후 13:13, 사 9:6, 요 14:10, 11, 16, 17, 20, 히 9:14).

3.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속주와 구주가 되시기 위하여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으로 성육신되셨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을 믿는다(마 1:16, 18, 21, 23).

4. 우리는 참 사람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삼십 삼년 반 동안 이 땅에서 사셨음을 믿는다(4복음서).

5.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며(마 1:16, 마 3:16-17),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다(롬 3:23-25).

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부활하셨고, 부활하여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으로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심을 믿는다(벧전 3:18, 1:3, 고전 15:45).

7. 우리는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만유의 주로 삼으셨음을 믿는다(엡 4:8, 2:6, 행 1:1-12, 2:33, 36).

8.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그분의 택하신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몸 안으로 침례받게 하셨음을 믿으며(행 2:1-4, 고전 12:13),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하나님의 영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운행하시면서 죄인들을 회개케하고(요 16:7-13),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거듭나게 하며(요 3:3-6), 그리스도의 지체들 안에 거하면서 생명을 자라게 하고(빌 1:21, 엡 4:13-16), 그분의 충만한 표현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을 믿는다(엡 1:21).

9.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체들을 맞이하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을 얻으시며,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믿는다(살전 4:16, 17, 마 25:31, 32, 계 19장, 20장).

10. 우리는 이기는 성도들이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복에 참예할 것을 믿는다(계 20:4, 6, 계 21장, 22장).

우리의 입장

1. 우리는 어떠한 전통적인 해석이 아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성경을 믿는다(마 22:29, 벧전 2:6).

2. 우리는 살아 있는 반석이시요(마 16:18, 고전 10:4), 산돌이시며(마 21:42, 벧 2:4), 몸의 머리이시고(엡 1:21-23, 4:15, 5:23, 골 1:18, 2:10, 19), 교회의 생명과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믿는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하나 위에 선다(엡 4:4). 우리는 분파주의나 교파주의나 비교파주의나 초교파주의가 아니다(갈 5:20, 딛 3:10, 벧후 2:1, 고전 11:19, 롬 16:17).

4.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의 하나 됨의 입장 위에 선다(마 16:18, 계 1: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이들이 각 도시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임을 인정한다(고전 1:2, 12:23-26).

우리의 사명

1.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은혜의 복음(행 20:24)과 천국 복음(마 4:23, 9:35, 26:13)을 전파한다.

2. 믿는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수 있도록 생명을 공급한다(벧전 2:2, 엡 4:14).

3. 믿는이들이 각 지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단체로 나타낼 수 있도록 각 도시에 교회를 세운다(행 8:1, 13:1, 20:17, 고전 1:2, 계 1:11, 2:1, 8, 12, 3:1, 7, 14, 행 15:41, 고전 16:1, 갈 1:2, 고전 16:19, 고후 8:1).

4. 믿는이들이 공급을 받아 생명이 자라고 성숙(히 5:12-14, 엡 4:13-14, 골 2:28, 4:12, 마 5:48, 히 6:1-2, 빌 3:12-15)할 수 있도록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풍성한 말씀을 해방한다(벧전 2:2, 고전 3:6, 엡 4:15, 골 2:19).

5.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신부가 예비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엡 4:11-12, 16, 5:32, 요 3:29).

우리의 소망

1.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요 10:10)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이(엡 1:4, 벧전 1:20) 주 예수를 믿기를 소망한다.

2.우리는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다만 지식의 증가가 아닌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기를 소망한다(고전 3:6, 7, 엡 4:15, 16, 골 1:6, 10, 2:19, 벧전 2:2, 벧후 3:18).

3.우리는 모든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이상을 보고(행 9:4-5, 골 2:2, 엡 5:32, 1:17-23), 그들의 지방에 있는 실제적인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오기를 소망한다(롬 14:1-15:13, 마18:15-19).

4.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예비될 수 있도록 주님이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을 얻으시기를 소망한다 (계 2:7하, 11하, 26하, 3:5, 12, 21, 19:7).

5.우리는 우리가 자람으로 주님의 다시 오심이 앞당겨지고, 우리가 축복된 휴거와 그분의 오는 왕국에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계 11:15-19, 20:4, 6, 22:20).

회복에 관하여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회복을 위한다. 우리의 간증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미하는 '회복'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1.'회복하다(recover)'라는 말은 잃어버렸던 어떤 것을 다시 얻거나, 어떤 것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recover)'은 손상 또는 손실이 발생한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하거나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어떤것들을 회복하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 역사의 과정 중에서 그것들이 잃어버린 바 되었거나, 잘못 사용되었거나, 타락되었지만, 하나님이 그것들을 원래의 상태나 지위로 복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2.교회는 수세기의 교회 역사를 통하여 하락되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회복될 필요가 있다. 교회에 대한 우리 이상은 현재의 상황이나 전통적인 관습에 지배되지 않고, 하나님의 원래의 뜻과 말씀 안에 계시된 변함 없는 기준을 따른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신약의 계시를 단순한 역사적 과거 사실로 간주하지 않고, 현재 교회가 실천하여야 할 기준으로 간주한다.

3.하나님의 회복은 20세기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시작된 정확한 날짜를 정하긴 어렵지만, 편의상 종교 개혁이 일어난 때로 정한다. 회복은 종교 개혁 이후로 여러 단계를 거쳤는데, 진젠도르프(Zinzendorf)의 인도 아래 보헤미아에서 교회 생활의 부분적인 회복이 있었고,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를 통하여 성경의 귀한 진리들이 많이 밝혀졌으며, 그 후 속생명에 대한 참된 체험으로까지 전진했다. 지금 회복은 그리스도의 몸의 표현인 참된 지방 교회를 건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4.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회복 안에서 두 가지 일을 행하고 계신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을 체험하는것, 즉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과 만유로 누리는 것을 회복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 생활의 실제를 회복하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협력하는데, 왜냐하면 실제적인 교회 생활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린 결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측량할 수 없이 부요한 분이시며(엡 3:8), 우리의 누림을 위한 만유를 포함하신 분이라는 것을 간증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의 계시에 따른 교회 생활을 실행하도록 부담을 주셨음을 간증한다.

구원에 관하여

1.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위한 충분하고도 완전한 구원을 예비하셨다. 이러한 완전한 구원은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다 포함한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하여, 사람의 영은 거듭났고, 혼은 변화되고 있으며, 몸은 장차 변형될 것이다.

2.구원받기 위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참되게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성경이 '같은 믿음'(딛 1:4)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믿어야 함을 포함한다. 우리는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감동(호흡하심)으로 된 완전하고도 신선한 계시하는 것과, 성부, 성자, 성령이신 유일하신 삼일 하나님이 계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시기 위하여 성육신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과,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부활하신 것과 하나님 우편으로 들어올려져 만유의 주가 되신 것과, 그분 자신을 위하여 다시 오셔서 이 땅 위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을 믿어야 한다.

3.영원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로마서, 갈라디아서).

4.사람은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접촉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신자를 구원시키는 데 있어서 우리는 기도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강조한다. 로마서 10장 9절부터 10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5.일단 사람이 구원받았으면,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안전을 둘 다 가질 수 있다. 일단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하여

1.거듭남(요 3:3-6, 벧전 1:3)

그리스도인 생활은 거듭남으로 시작된다. 거듭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우리 영 안에서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요 3:6), 우리 영 안에 분배된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요 3:16, 5:24, 벧후 1:4)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생명은 우리 영을 살아 있게 한다.

2. 분별(롬 12:2, 고전 1:2, 2:13, 12:10)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 타락하고 악한 세상으로부터 합당하게 분별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분별은 형식적이고 사람이 만든 규율에 따른 것이 아니고, 우리안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분의 생명과 본성에 따른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와 성령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분별된다. 합당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러한 분별된 위치를 지켜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경건한 생활을 한다.

3. 헌신(고전 6:19-20, 롬 14:8, 고후 5:14-15, 롬 12:1, 6:13-14, 19, 레 1:9, 민 28:2-3)

그리스도인 생활은 헌신의 생활이다. 주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주님께 전적으로 드려지는 것이며, 그분을 위해서 어떤 것을 하거나 어떤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라서 우리에게, 또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 그분께 유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속하기를 기뻐하기 때문에 그분께 헌신한다. 우리는 또한 그분이 우리를 그분의 보혈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그분께 속했음을 인정한다.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산다.

4. 주님을 사랑함(요 15:9, 10, 21:15-17, 계 2:4, 딤후 4:8, 롬 8:28, 마 22:37)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어떤 것 보다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사랑스러운 분이심과, 그분이 우리 마음을 얻으셨음과, 우리 자신의 사랑이 아닌,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분을 사랑함을 간증한다.

5. 하나님의 말씀(딤후 3:16)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방 교회 안에 있는 모든이들은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도록, 심지어 1년에 1회씩은 성경을 통독하도록 격려받는다. 우리는 말씀을 읽으며 연구하고 영적 음식인 말씀을 기도로 취한다. 성령이 그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가르침과 영감과 인도는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로 점검받아야 한다. 성경이 대단히 많은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계시하지만, 우리에게 성경은 주로 교리의 책이라기보다 생명의 책이다. 우리는 다만 지식을 얻으려고 말씀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후 3:6), 충분한 기도를 통해 성경을 읽음으로써 살아 있는 말씀이신 주 예수 자신을 접촉하기 위하여 말씀 앞에 나온다(요 5:39, 6:63, 고후 3:6).

6. 기도(엡 6:18, 빌 1:4, 살전 1:2, 5:17, 딤전 2:1)

그리스도인 생활은 또한 기도의 생활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달콤하고 친밀한 개인적인 교통을 누린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그분께 복종하는 것과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과 협력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표명한다. 지방 교회 안에 있는 모든이들은 날마다 개인 기도의 시간을 갖도록 격려받고 있다.

7. 그리스도를 체험함

우리는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그리스도인 생활이 사실상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자신임을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을 크게 강조한다. 신약의 서신서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시되시고(갈 1:12, 16), 우리 안에 사시며(빌 1:21), 우리 안에 형상을 이루고 계시며(요 8:29), 우리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고(엡 3:17) 계시며, 우리 안에서 확대되시며(빌 1:20), 우리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골 3:11). 밖의 본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아내고(갈 2:20),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롬 8:11) 우리의 내적 전존재를 점유하시도록 함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살며(엡 3:19),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를 통하여 그분 자신이 표현되시기를 추구한다(엡 3:10, 빌 1:20-21).

8.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갈 2:20)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좁은 길을 따라 주님을 좇는 데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참되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분에 의해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를 날마다 체험할 필요가 있다(마 16:24).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추한 사람의 타락한 육신의 어떠함을 보았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한다. 더구나 우리는 자아와 천연적인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반대한다는 것을 보았다(롬 7:17, 20, 23, 마 16:23, 요 12:25).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분의 부활 생명의 풍성함 안에서(빌 1:19, 3:10, 요 11:25) 그분에 의해 살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환영한다(고후 4:12).

9. 양육(벧전 2:2, 딤전 4:6,살전 2:7)

만일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영적인 음식과 영적인 음료로 매일 양육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신령한 음식과 음료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을(요 6:48, 55) 강조한다. 그 영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 공급이신 그분을 누린다. 그분 자신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 6:57)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세상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늘로서 내려오신 산 떡이시고, 생명의 떡이시며, 하나님의 떡이시다.(요 6:33, 35, 51) 날마다 우리는 그분에 의해 양육받는다.

10. 생명의 성장(히 5:12-14, 엡 4:13-14, 골 2:28, 4:12, 마 5:48, 히 6:1-2, 빌 3:12-15, 벧전 2:2, 고전 3:6, 엡 4:15, 골 2:19)

지방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영적인 어린아이 상태로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생명도 성숙하기 위해서는 정상적으로 발육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추구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생명의 성장을 추구한다. 우리는 주님을 표현하고, 그분의 권위를 가지고 그분을 대표하며, 그분의 대적을 패배시키기 위해 영적인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

11. 인간 생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또한 극단적이지 않고 모든 면에서 균형 잡힌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한다. 우리는 우리 영과 혼과 몸의 전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보존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모든 관계 속에서 예수의 인성을 표현하기를 추구하고, 가정, 학교, 이웃,직장 등, 인간 생활의 모든 행함속에서 그분의 귀한 간증을 짊어지기 원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생활은 날마다의 인간 생활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더 진실된 사람이 되고, 예수의 높여지고 변화된 인성을 더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12. 그 영(롬 8장,갈 5장)

그리스도인 생활은 그 영을 따라 사는 생활이다. 그 영 안에서 행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존재가 그 영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영에 두고(롬 8:11), 몸의 행실을 죽음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롬 8:6, 13). 영을 따라 살 때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요구가 우리 안에서 저절로 이뤄진다.

오직 영 안에 살고 영을 따라 행함으로써만 성경에 계시된 신성한 것들이 우리에게 실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그 영을 알아야 하고, 그 영 안에 살아야 하며, 그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갈 5:24).

13. 변화(롬 12:2, 고후 3:17-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의 거듭남과 몸의 변형을 알고 있지만, 핵심적인 문제인 혼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영의 내적인 역사로 인해 우리 혼이 성질상 변화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변화될 때 내적인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요소로 충만할 때 우리 혼은 순수케 되고 거룩케 된다. 그럴 때 우리 혼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사시는 주님을 표현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혼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이러한 혼의 변화는 주님이 오실 때 그분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준비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분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임재 안에 거하고자 하는 사람은 위치상으로 거룩해질 뿐 아니라 성질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소극적으로는 십자가의 역사와 적극적으로는 생명의 영의 역사가 필요하다.

14. 변형(빌 3:21, 롬 8:30)

끝으로 생명 안에서의 그리스도인 체험의 절정에서 우리 몸은 변형되어 주님의 영광의 몸처럼 될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몸의 구속, 아들의 명분을 이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생활은 거듭남으로 시작해서 변화를 거쳐 몸의 변형으로 완성된다.

교회 생활에 관하여

1. 단체 생활

본성상 그리스도인 생활은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부터 살아 내는 것으로서 단체 생활이다. 신약에 있는 많은 표현들이 이것을 확증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양무리 안에 있는 양들이며(요 10), 하나님의 건축의 산 돌들이며(벧전 2:5-9), 포도나무의 가지들이며(요 15),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롬 12, 고전 12)이다. 비록 우리가 개인으로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더 이상 개인주의로 살아서는 안 된다. 즉 자신의 흥미, 자신의 활동, 자신의 목표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인식하며,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며, 교회의 건축을 관심하는 단체적인 생활을 하기를 갈망하신다(엡 4:11-12). 그러므로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 뿐 아니라 정상적인 교회 생활의 회복을 체험하고 있다.

2.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몸이고, 그분은 그 몸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탈취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모독하는 어떤 제도나 조직이나 인도 직분도 용납할 수 없다. 우리 가운데에는 영구적이고, 공식적이며, 조직적인 인도 직분이 없다. 더 나아가 계급이 없다. 오히려 몸의 모든 지체들은 머리와 직접 교통을 하며, 생활과 행동에 관한 모든 지시를 그분으로부터 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몸의 지체들 사이의 어떤 중개자나 중간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엡 1:20-23).

3. 교통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존중하긴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교통을 누린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더이상 개인적인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도리어 우리는 몸의 지체들 사이의 교통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순환되는 생명의 흐름을 우리가 얼마나 누리는지! 우리는 이 흐름, 이 교통이 축복된 실제임을 간증한다(고후 13:13, 요일 1:1-10).

4. 하나 됨

교회 생활에서 또 하나의 필수적인 중점은 하나를 지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주님은 그분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그분을 믿는 이들도 하나 되도록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를 힘써 지켜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로, '하나'의 입장 위에 세워진 지방 교회들로 표현된다. 우리는 '하나'를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분열을 거부하고 미워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분열된 상태는 주님의 간증에 어떠한 부끄러움이며 비난거리인지!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유일한 하나를 위해 서 있다. 이 하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하나'의 입장 위에 믿는이로서 모이며, 같은 믿음을 따라 모든 믿는이들을 받으며, 아버지와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기를 추구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로 온전케 된다.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기도가 땅에서 응답받을 것이며, 우리가 하나로 온전케 될 때 세상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고 알게 될 것임을 믿는다(요 17:11, 21-23, 엡 4:1-6, 고전 10:16-17, 12:13, 12:24-27, 롬 12:4-5).

5. 서로 돌아봄

교회 생활을 실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의 믿는이들을 실제적으로 돌본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며(갈 6:2, 롬 14:19), 손님들을 접대하고(롬 12:13, 히 13:2, 벧전 4:9), 교통을 위해 가정을 열며(행 2:2, 2:46, 16:3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애정어린 봉사를 통해 형제 자매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기꺼이 채운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시원케 하며, 서로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하며, 서로를 건축한다(히 10:24). 우리의 교회 생활은 집회 장소에서의 모임에만 제한되지 않고 항상 계속된다.

6. 양심(행 23:1, 24:16, 롬 2:15, 9:1-2, 고전 8:7, 10, 12, 고후 1:12, 4:2, 5:11, 딤전 1:5, 19, 3:9, 4:2, 딤후 1:3, 히 9:9, 9:14, 10:22, 13:18, 벧전 3:16, 21)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존중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이 그들의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은 빛 안에서 주님을 따를 자유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대한 어떤 외적 통제 형식이나 조종이 없으며, 우리의 양심을 무시하는 권위자도 없다. 어떤 강압이나 지배도 없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견지에서 자신의 양심을 철저히 처리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거리낌 없는 양심을 유지하도록 격려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과 다른 사람의 양심을 주의한다.

7. 집회

교회 생활은 모이는 생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일주일에 서너 번 집회를 갖는다. 우리에게 집회는 노동이 아니라 누림이다. 교회 집회에서 우리는 공급 받고 가르침 받으며, 강건케 되고, 격려 받으며, 빛 비춤 받으며, 영감을 얻고, 장비되며, 주님께 위임을 받는다. 합당한 교회 생활에는 개인적인 그리스도인 생활과 단체적인 집회 생활이 균형 잡혀 있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시간이 집회를 대치할 수 없고 집회가 개인적인 시간을 대치할 수 없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주님과 만나기를 즐거워 하며 또한 더욱 단체적으로 그분과의 만남을 누린다. 우리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교회 집회에서 그분의 이름 안으로 모일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고전 14장).

8. 모든 지체들의 기능

교회 생활 안에서 몸의 모든 지체들은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비록 우리 모두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모두에게 기능이 있으며, 각 지체의 기능이 존중된다. 성직자-평신도 제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사탄의 전략이기 때문에(계 2:6, 15), 우리는 이것을 거절한다. 지방 교회 안에는 성직자도 없고 평신도도 없다. 우리는 다만 몸의 지체들이며, 자신의 분량을 따라 기능을 발휘할 권리가 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는 목사도 없고(조직적인 목사와 그 제도는 없음, 그러나 목자는 은사로 있음), 청소부도 없다. 모든 성도들이 집회에서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청소 봉사에도 참여할 수 있다(고전 12장, 14장).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1.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4)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


우리의 사역의 중요한 초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이며, 우리는 그러한 체험의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이나 고린도후서 3장 17절과 같은 구절들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오시며, 생명 주시는 영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위한 모든 활동을 수행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신약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분명한 동일시를 발견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 안에서의 세 위격의 구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이 믿는 이들 안에서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운행하심에 따른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와 그 영이 부활 안에서 동일시되시는 것에 관해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아래의 발췌문은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마지막 아담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님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성령이시다. 성령 외에는 생명을 주는 또 다른 영이 없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이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주는 그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는 누구이신가?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 영은 누구이신가? 물론 성령이시다. 여기에서 주는 예수님이시고, 그 영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구절에서 “주는 영이시니”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을 그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The Spirit of Christ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는 <그리스도의 영> (The Spirit of Christ) 이라는 자신의 책 25장에서 “주 예수님은 높여지시어 그 영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주 영’이 되셨다.”라고 말했다. <삼일성에 관한 진리 > ,영문판 14-15쪽 제자들 안으로 자신을 거룩한 숨으로 내쉬신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시다. 생명 주시는 영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숨이시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 영이신 그리스도, 즉 숨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기 위해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의결론 - 성령

모든 과정을 완성하신 후에 그리스도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으며, 이 생명 주시는 영은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분, 곧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그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영이신 자신을 제자들 안으로 불어 넣으셨다…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는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시어 그들의 영적인 생명과 존재의 신성한 본질이 되셨다. <신약의 결론 성령>, 194-195쪽

위의 예문은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으로서, 만일 이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는 영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전부라고 오해한다면 이러한 글이야말로 그가 명백한 양태론자라는 ‘증거’로 채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일성에 대해 심도 있는 설명을 시도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우리가 받는 오해와 유사한 오해를 받을 것입니다. 신학의 역사에 정통한 독자들이라면 이레니우스 (Irenaeus), 터툴리안 (Tertullian), 어거스틴 (Augustine) 그리고 정통성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다른 교사들의 글도 정도에서 빗나간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나, 그들의 글의 다른 부분에는 그들의 정통성을 확증해 주는 균형잡힌 언급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 역시 이와 같은 균형잡힌 언급들을 하였으나, 근거 없이 그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우기 위해 소위 ‘증거’로 출판한 책자들에서는 위트니스리의 그러한 균형잡힌 언급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에 대한 그의 온전한 관점을 보여주는 두 예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강해 3편

바로 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주이시며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이시다.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고후 3:17). 주님으로서 그분은 하늘에 계신다. 그 영으로서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그분은 그분의 통치권과 머리의 권위와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고 계신다… 그분이 주님으로서 수행하시는 모든 것을 그분은 그 영으로서 우리에게 적용하신다.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사역 >, 95-96쪽 또 다른 보혜사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과 그리스도의 숨이신 그 영에 관한 말씀을 읽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지 않습니까?” 물론 나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이 둘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또 다른 방면인 내적이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두 번째 보혜사이신 그 영은 첫 번째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의 숨이시다. 따라서 내적인 방면을 조망할 때 그리스도와 그 영은 하나이시다. <요한복음 강해 속편 3권>, 273쪽

많은 분석을 하지 않더라도 위트니스 리가 그리스도와 그 영이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신학적인 체계화 작업에는 역행하는 것 같지만, 신약의 서신서들과 같이, 자신의 사역의 커다란 강조점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종종 생명 주시는 영과 동일시되신다고 이해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 중에서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다른 이들의 언급을 추가해서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 주제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위트니스 리 외에도 그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제임스 던 (James D. G. Dunn) 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분은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분으로서 위트니스 리가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성경 구절들 중 일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혼적인 존재의 모형이라면, 그리스도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의 모형이다…요약하자면 45절 하반절은 이에 대한 증거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바울은 높이 올려지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이면서도 몸이 있는 그러한 존재의 형태로 새로운 인성의 본과 선구자이시라는 것을 [생명 주시는 영]에 대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기때문이다.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그들 모두가 체험한 생명 주시는 영은 다시 사신 예수, 마지막 아담이시다… 바울은 높여지신 예수를 영적인 존재…또는 영적인 범위나 영역이 아니라 그 영, 곧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바울에게 있어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성령론이며, 믿는 이들의 체험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The Christ and the Spirit, vol. 1, Christology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98], 164-165쪽)

위트니스 리가 삼일성에 관해 자주 인용한, 지금부터 한 세대 전의 저명한 신학자인 그리피스 토마스 (W. H. Griffith Thomas) 역시 이러한 신성한 진리의 양면성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뛰어난 요약을 했습니다.

The Holy Spirit

이러한 진리의 양면 모두를 주의하며 보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영은 차이가 있으면서도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아마도 그들의 위격의 특성은 결코 동일하지 않지만, 그들의 임재는 항상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일 것이다. (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 Kregel, 1986; reprint of The Holy Spirit of God, 4th edition, Grand Rapids, MI: W. B. Eerdmans, 1913] 144쪽)

위트니스 리의 사역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아울러 이러한 인용문을 읽는다면 그리스도와 그 영의 동일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체험의 영역 안에 있는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웨트 (H. B. Swete) 도 동일한 사상을 아래와 같이 확증했습니다.

H. B. Swete

그 영은 그분의 일에 있어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하신 것으로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하심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영이신 주 (the Lord the Spirit) 즉 그분의 영화롭게 된 생명의 능력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
The Holy Spirit in the New Testament, [London, New York: Macmillan, 1912] 306쪽)

 이 핵심적인 주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짓기 전에,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각주를 추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각주는 위트니스 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생명 주시는 영의 동일시를 동일하게 인정한 저명한 주석가들인 마빈 빈센트 (Marvin Vincent), 헨리 알포드 (Henry Alford), 윌리스톤 워커 (Williston Walker) 의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절에서 시작되는 이 부분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의 ‘주님’은 틀림없이 주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고후 2:12, 14-15, 17, 3:3-4, 14, 16, 4:5). 이것은 성경에 있는 분명한 말씀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그 영이시라는 것을 강조한다. “3장 16절의 주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널리 퍼지게 하시고 활력 있게 하시는 그 영이시다. 우리는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고 (고후 3:6) 새 언약의 사역에는 영광이 있다 (고후 3:8). 로마서 8장 9절부터 11절, 요한복음 14장 16절, 18절과 비교해보라” (빈센트).

“3장 16절의 주님은 3장 6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이시다. 의미상, 여기서 언급된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그 영’은 바로 성령과 동일하시다…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알포드). “변화시키시고 내주하시는 영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주님은 그 영이시다’” (윌리스톤 워커). <신약성경 회복역>, 고린도후서 3장 17절 각주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3:55
성경말씀 

 (고후3:17)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이신 그 영께서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골1:27下) ...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인데,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오늘의 만나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주님은 그 영이십니다.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은 영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은 하늘에 계시는 주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영이시며 영 안에 계십니다. 영이 있는 곳에 그분도 계십니다. 그분은 영 안에서 사람과 접촉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전기를 비유로 드는데, 우리의 생활 속에서 전기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한 면으로 공중에 있고 한 면으로 방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접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아직 믿지 않은 많은 친구들은 자주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주님이 어디 계시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느냐?”라고 묻곤 합니다. 체험이 있는 우리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주님은 영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영 안에 계셔서 우리와 아주 가까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영을 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마음과 영을 그분을 향해 엽니다. 그리고 깊은 곳인 영 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느낍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간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린 우리의 마음과 영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우리의 속은 평안과 합당함과 빛과 안식과 강함과 만족이 있습니다. 참되게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그들이 비록 하늘에 계신 주님을 믿었지만, 그들이 믿을 때 그 주님이 그들 안으로 들어오신 것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만이 아니라 믿은 후에도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하늘의 주님께서 그들의 깊은 곳을 만지시는 것을 느끼게 되며, 그들 안에는 평안하고 안전한 느낌이 있게 됩니다.
출처 :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숙하는 길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9. 18:25
성경말씀  

(롬8:16~17) 그 영께서 직접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자녀들이라면 또한 상속자들, 곧 하나님의 상속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만일 참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만나

 
 ‘그 영께서 직접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 그 영께서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보증해 줍니다. 또한 우리를 제한하고 속박하여 이 생명에 따라 생활하고 행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부합되게 합니다. 그 영은 하나님과 우리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관계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언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후사들이라고 증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의 이 증언은 영적으로 출생할 때 즉 거듭날 때부터 시작됩니다.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상속자들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로서 태어난 후에는 성장하여 아들들이 되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영광을 받고 합법적인 상속자가 될 수 있도록 고난을 통과해야 합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9:10
성경말씀  

(요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사람 안에 거합니다. (63)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오늘의 만나

 
 “나도 그 사람 안에 거합니다”는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도록 부활하셔야 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되신 주 예수님은 부활 후에 또한 부활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분명히 언급된 것과 같이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에게 생명과 생명 공급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로 영접할 때 생명 주시는 영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영원한 생명을 분배하십니다. 우리는 주 예수를 영접하지만 우리가 얻는 분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영’은 살아있고 실재하지만 매우 비밀스럽고 만질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구체적입니다. 먼저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분께서 ‘영’이 되실 것임을 언급하셨습니다. 그 후에 주님은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생명의 영의 체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제 주님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이시며 이 영은 그분의 말씀 안에 체현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생명이신 성령을 얻습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