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싼 외제 차(茶)나 커피에 밀려 잊고 있었던 보리차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특히 계속되는 폭염에 보리차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는다.
* 보리차로 만병을 고친다.
보리차는 커피나 녹차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마시던 음료다. 우리 겨레의 강인한 체력과 명석한 두뇌는 보리차에서 나왔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음료와 차 가운데서 보리차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
* 보리차가 우리 민족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리차를 마시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즐겨 마시지는 않았다. 일본 사람들은 보리차를 무기차(麦茶)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따마이차 (大麥茶)라고 부른다. 이탈리아에서도 오래 전부터 오르조라고 하여 보리를 볶아서 가루 내어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는 습관이 있다.
* 보리차는 우리 겨레가 만든 가장 위대한 음료이다.
보리차는 인류가 마시는 모든 음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음료다. 보리차의 효능 지금까지 사람한테 알려진 거의 모든 약초와 건강식품의 약효를 능가한다. 약효가 가장 뛰어난 보리차를 만드는 자세한 방법은 여기에 적을 수 없지만 일반적인 보리차도 잘 활용하면 그에 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봄철 날씨가 건조할 때 보리차를 마시면 진액(津液)을 늘리고 폐를 윤택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보리차는 봄철 뿐만 아니라 여름철에 가장 좋은 음료이기도 하다. 보리차는 더위를 물리치고 소화를 잘 되게 하며 진액을 늘리는 작용이 있다. 날씨가 무더운 여름철뿐만 아니라 날씨가 춥고 건조한 가을이나 겨울철에도 보리차를 마시면 진액이 늘어나고 폐가 윤택해진다. 곧 보리차는 계절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체질에 맞으며 남녀노소 누구한테나 다 좋은 음료이다. 또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평소에 늘 보리차를 마시면 몸무게를 줄이는 데 매우 좋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건강장수비결은 보리차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Queen Elizabeth II)는 2017년에 92살인데 아주
건강하게 살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건강장수비결은 날마다 보리차를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여왕이 보리차를 만들어 마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깨끗이 씻어서 연한 갈색이 나게 볶은 보리 50g과 마른 무화과 60g을 남비에 넣고 알맞게 물을 붓고 아주 약한 불로 물이 절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끓인다. 그 다음에 레몬즙과 꿀, 생강을 약간 넣어 따뜻할 때 마시거나 차게 식혀서 마신다. 보리차는 냉장고에 넣지 말고 하루나 이틀 안에 모두 마시는 것이 좋다. 엘리자베스여왕은 날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직접 보리차를 만들어 마신다고 한다.
* 보리는 남녀의 불임증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보리를 불임증을 치료하는 약으로 썼다. 보리가 불임증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임신 뒤에 입덧을 없애는 데에도 쓴다. 보리는 항바이러스 작용이 있으며 항암성분도 함유되어 있다. 또 글루텐의 함량이 적으므로 밀가루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 한테도 좋다. 또 보리는 위장이 민감한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며 설사를 멎게 하고 음식물의 소화를 돕고 크기가 작은 방광결석과 신장결석을 몸 밖으로 배설시켜 주며 위궤양을 낫게 한다. 또 보리는 염증을 삭이고 열을 내리는 작용이 있으므로 열을 내리고 천식을 치료하며 젖을 잘 나오게 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아기한테 젖을 먹이는 수유기(授乳期)의 여성들한테도 매우 유익하다.
* 혈액을 맑게 하고 혈관의 내벽을 닦아 낸다.
보리차에는 인체에 필요한 17가지 이상의 미량 원소와 19가지 이상의 아미노산과 각종 비타민, 불포화지방산, 단백질, 식이섬유 등이 들어 있다.
* 보리차는 소화를 돕고 식욕부진을 치료한다.
보리차는 기름기를 씻어 내거나 분해하는 작용이 있다. 고기나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나서 보리차를 한 잔 마시면 느끼한 느낌이 없어진다. 보리는 천연 양생(養生)의 효능이 있으며 혈당을 낮추고 혈액 속의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낮추어 심장병을 예방하고 치료한다. 폭염인 여름철 보리차를 마시면 더위를 이길 수 있고 갈증을 풀어준다. 보리차는 혹독하게 더운 여름철에 노인들에게 적합한 음료이며 소변을 잘 나가게 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 유실된 수분을 보충하는 작용과 입이 마르는 것을 풀어주는 작용, 몸속의 전해질(電解質)의 평형을 회복하는 작용이 있고 동시에 더위 먹는 것을 예방한다. 보리차에는 갖가지 미네랄을 비롯한 영양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고 열량이 거의 없어서 살이 찌지 않게 한다. 보리차에 들어있는 식이섬유는 살결을 곱게 하는 효과도 있다.
* 남녀노소와 체질을 가리지 않고 가장 좋은 음료이다
보리차의 냄새는 햇빛의 향기이며 오곡(五穀)의 향기이다. 보리차는 위장을 편안하게 하고 갈증을 멎게 하며 염증을 삭이고 독을 풀며 소화를 잘 되게 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얼굴을 아름답게 해 주는 것과 동시에 오장(五臟)을 튼튼하게 한다.
그래서 보리는 소화를 잘 되게 하는 작용이 특히 높으므로 소화 효모(消化酵母)라고도 부른다. 보리차는 체질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막론하고 몸에 유익하다.
특히 명절에 영양이 많은 음식을 먹고 나서나 과식을 하고 나소 음식물의 기름기를 없애고 자극을 줄이며 소화를 돕는다.
* 식사 뒤에 보리차를 한 잔 마시는 것은 매우 좋은 습관이다.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과 매운 음식을 좋아 하는 사람들이 식사 뒤에 따뜻한 보리차를 한 잔 마시면 기름기를 없애 줄 뿐만 아니라 위 점막을 보호하고 소화를 잘 되게 한다. 보리차를 따뜻하게 해서 마시면 위장이 따뜻해지고 위장이 튼튼해지고 소화기능이 좋아진다. 생선회 같은 일식요리를 먹고 나서 따뜻한 보리차를 한 잔 마시면 입속에 남아있는 생선 비린내를 없애 줄 뿐만 아니라 날음식과 차가운 음식으로 인하여 위가 상하지 않게 막아 준다.
* 보리는 여름철 음료로 가장 훌륭하다.
무더운 여름철에 보리차를 끓여 식혀 두고 여름철에 마시면 더위로 인해 기력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고 갈증을 막을 수 있다. 보리차는 위와 장의 연동운동을 잘 되게 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변비를 치료하는 데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보리차는 중금속을 비롯하여 갖가지 화학물질의 독을 푸는 해독작용, 항산화 작용, 혈액을 맑게 하고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작용, 염증을 삭이는 작용, 혈관을 튼튼하게 하는 작용, 소화를 촉진하는 작용, 면역력을 늘리는 작용,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용 등이 있다.
보리차는 뚜렷한 항균작용이 있어서 갖가지 병원균을 죽이거나 억제하여 감염을 막는다. 염증을 삭이며 감기를 예방하고 심장질환과 비만을 치료하고 예방한다.
보리차에 들어 있는 여러 종류의 항산화물질은 세포가 활성산소로 인해 손상되지 않게 보호한다. 세포가 기형이 되는 것을 막고 돌연변이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암은 기형세포의 집단이다. 그러므로 보리차는 암을 예방하는 데에도 가장 좋은 음료이다.
보리차를 만드는 방법
재료:하루 분량이 보리 50g
만드는 방법:보리를 솥뚜껑이나 프라이팬에 넣고 연한 갈색이 될 때까지 약한 불로 볶아서 물을 1리터에서 2리터를 붓고 30분가량 끓여서 수시로 물이나 음료 대신 마신다. 보리에는 늘보리와 찰보리가 있는데 늘보리가 더 낫다. 찰보리는 쓰지 않는다.
효능 : 보리는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하다.
동의보감을 비롯한 거의 옛 의학책에 보리를 성질이 차다고 하였는데, 보리는 성질이 따뜻한 곡식이다. 보리차는 염증을 삭이고 독을 풀며 열을 내리고 더위 먹음을 물리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갈증을 없애고 소화를 잘 되게 한다. 끝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2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 번째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 번제와 소제의 비교
번제의 주된 항목은 피이다(1:3, 11). 소제의 주된 항목은 기름과 유향이다(2:1). 기름은 섞고 기름 붓기 위한 것이며, 유향은 소제 위에 놓이기 위한 것이다.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런 실수도 범하지 않고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전적으로, 끝까지 절대적인 사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절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면에 있어서 죄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절대성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몇몇은 상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완전히 철저히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가 이 땅 위에 사셨을 때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사복음서에서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는 구속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속죄는 또한 우리와 하나님간의 상황, 곧 화목이 없는 상황을 화평케 하기 위한 것이다. 속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상황을 누그러뜨리며 어떤 문제들을 해결한다.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한 것만큼만 번제로서 그리스도를 드릴 수 있다. 속죄에는 피가 필요하다. 오직 동물들만이 번제가 되기에 적합한데, 이는 동물들만이 속죄를 위해 뿌려질 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물은 생축 중의 소나 염소나 양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여야 했다.
소제에서는 동물의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생명, 곧 밀과 밀알과 밀 이삭들이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식물의 생명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산출, 번식, 증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소제에서 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름과 유향을 본다. 기름은 소제에 부어져서 그것과 연합되며, 유향은 소제 위에 뿌려진다. 피와 기름과 유향에 관해서 우리는 번제와 소제와의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본다.
제물들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누림을 갖기 위한 하나님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며, 그분만이 그것을 드신다. 하나님의 「입」은 번제를 태우는 불이며, 그 불은 계속 밤낮으로 탄다. 번제를 드시는 신성한 드심은 아주 질서정연하다(레 1:7-8).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드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제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번제는 먹을 수 없지만 소제의 일부분은 먹을 수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봉사는 거룩하며 그들의 음식 또한 거룩하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 곧 우리의 거룩한 봉사에 걸맞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소제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이신 그리스도이다. 먼저 하나님이 그분의 분깃인 소제의 부분을 누리며, 그런 다음에 우리의 누림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누림은 공동의 누림(co-enjoyment), 곧 하나님의 누림과 함께한 누림이다.
유향과 고운 가루와 기름이 단 위에서 불살라짐(레2:9)
모든 유향과 고운 가루의 부분과 기름의 부분은 단 위에서 불살라진다(2:2).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의 상당한 부분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하여 음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상징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사람의 생활은 탁월하였으나, 이 탁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그분의 속성과 미덕들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전에 인류 가운데 그러한 수준은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고, 연합되고, 충만된 하나님-사람이시다. 더우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부활을 표현하셨는데, 심지어 바리새인들에게 화내시고(마 23:1-36),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요 2:12-17)조차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탁월함은 그분의 인간성과 그분의 신성함에 있었다. 즉 그것은 그 영 안에 있고 부활과 함께한 그분의 인성과 신성 안에 있었다. 이것이 사복음서가 그분의 탁월함 안에서 그분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다. 그분은 고우시고, 고르시며, 완전히 균형잡히신 분이며 어떤 것도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으셨다. 더우기 그분은 그 영으로 충만되신 분이며 부활로 적셔진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행하셨을 때 항상 그 영으로 충만되셨으며 부활로 적셔지셨다.
소제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위한 것임(레2:3,10)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 2:3). 이것은 하나님이 누리신 후에 우리도 우리의 음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은 만족케 되시기 위해 그분의 분깃을 받으셔야만 했다. 남은 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분깃이다. 레위기 2장의 예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한 그림이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기름 섞인 고운 가루, 곧 기름과 연합된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기름과 가루가 연합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영에 의해 예수님을 먹고자 한다면, 오늘날 그 영은 말씀 안에 합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접촉할 때, 말씀 안에 합해져 있는 그 영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 예수님의 사람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생활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대하여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며 그 영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양공급이신 예수님을 공급한다. 자연히 우리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음식이신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생활을 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린다. 이것이 소제이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국 트럼프와 북한 김정은의 회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이 회담을 최대한으로 선전하고 있다. 회담이 끝나고 북한은 ”70년간 첨예하게 대립해오던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끝장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확고한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양국 수뇌가 세기의 만남과 회담을 진행했다.“는 식으로 TV 방송을 반복해서 방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먼저 북한의 핵이 무서워서 김정은에게 회담을 요청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세계정세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이는 물질세계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구약시대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물질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였다. 다니엘은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무역 등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볼 수 있다. 만약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소위 그 방면에 전문가들은 한 마디씩 하겠지만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만 알고,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한다. 보이는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그 영역이 다르다.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우주가운데는 세 가지 의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지요, 둘째는 사탄의 의지요, 셋째는 사람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의지인 사탄의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탄의 의지를 알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첫 번째 창조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1잘 2절은 “그러나 땅이 황폐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을 품고 계셨다.”한다.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실 때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욥기 38장 7절은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그 때는 땅의 기초를 놓을 때를 말한다(욥38:4). 1장 2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한 것은 1절과 2절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을 보면 이 사건이 사탄의 반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장 루시퍼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보고 교만해져서 “뭇별들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말하면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이다(사14:13).
사탄의 의지
하나님은 반역한 천사장과 악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추방시켰고, 하늘들과 땅을 심판하셨다. 그 결과 땅은 황폐하고 공허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모든 천사들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었다. 첫 번째 창조의 주인공은 천사들이다. 천사들의 으뜸인 천사장은 교만 때문에 악한 의도를 품게 되었는데 그 악한 의도가 사탄의 의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에 더하여 추가로 사탄의 의지가 있게 된 것이다. 우주가운데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천사장의 반역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사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고 있다. 모든 영적 전쟁의 근원은 두 의지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사탄의 의지가 신성한 의지에 대항하여 일어나기 전에는 우주 안에 전쟁이 없었다. 우주 가운데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천사장의 배역에서 시작되었다. 그 배역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국가 사이에, 종족 사이에, 사회 계층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제 1차, 2차 세계 대전도 그 배후에 사탄의 반역에서 비롯되었다. 영적 세계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계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는다면 밖으로 시시각각 변화는 정세에 대하여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 배후에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오늘날의 다니엘이 되어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와의 전쟁은 교회와 사탄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 안에 혼란과 다툼과 냉담함이 있는 것은 그 원인이 타락한 사탄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탈취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가 충돌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세 번째 의지인 사람의 의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사탄을 처리해야 한다. 현시대는 바로 교회가 이 땅에서 주님의 승리를 실지적으로 실현하는 시기이다. 머리가 승리하셨기 때문에 몸 또한 승리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셨고, 부활생명으로 교회를 건축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승리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우주 안에 하나님의 왕국도 있고, 사탄의 왕국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언급한 영적 전쟁은 이 두 왕국간의 전쟁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에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함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교회의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싸우셨던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계시록 12장 10절,11절에 있는 것처럼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참소자에 대해서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로 마귀의 참소를 이겨야 한다. 그들은 또한 죽기까지 자기들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사탄의 입지는 우리 가운데 없어질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다. 사탄의 왕국은 사탄이 왕이고, 반역한 천사들이 부하들이고, 더러운 귀신들이 하인들이고, 사탄의 지시를 받는 타락한 사람들이 한 패거리들이다. 교회와 사탄과의 전쟁은 우리와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다. 우리는 사람 속에 있는 사탄은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사탄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는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사탄을 처리하지 않으시고, 피조물인 사람에 의하여 그를 처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적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소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고 하나님을 대표함으로 그분의 원수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하는 이중 목적을 완성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의도는 사람이
1)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정복하고
2) 사탄에게 강탈당한 땅을 회복하며
3)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마6:10,13). 따라서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악한 영들인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은 사탄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반역할 때 사탄을 따랐으며, 지금은 하늘들의 영역에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배역한 천사들이다. 오늘날 이 세상은 완전히 마귀의 어두운 통치아래 있고, 마귀는 악한 천사들을 통해 다스린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변하는 세상의 흐름보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예의 주시하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하나님 편에서 싸워야 한다. 아멘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1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1 “누구든지 여호와에게 소제물을 제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가루를 바치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야 한다.”
*번제와 소제의 차이점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을 강조하며 소제는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을 강조한다. 번제의 강조점은 그분의 삶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신 것에 있다. 번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義)이신 것을 강조한다. 소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을 강조한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그리스도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의(명사-righteousness)와 의로운(형용사-righteou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의 자체이며 또한 그분이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속죄제로서 죄가 되셨고, 다른 한편으로, 속건제로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다. 타락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단지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죄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번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소제 안에서 우리는 의로운 그리스도, 모든 방면에서 올바르신 분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하나님의 만족이 되실 수 있으며 그분을 만족케 하는 향기를 드릴 수 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향기가 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의가 아니다. 우리는 죄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번제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 우리가 의가 될 수 있는가? 우리 자신 안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분의 체험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그것은 가능해진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의가 없다. 우리에게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의를 가질 수 없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롬 10:3). 번제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의(義)이시며, 소제로서 그분은 가장 의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며, 의로우시다.
* 고운 가루
소제는 고운 가루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고운 가루가 소제의 주요 요소이다. 이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곱지만 우리의 인성은 거칠고 조잡하다.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는 유일하게 온유한 분이시다. 그분만이 고운 가루이시다. 그분의 인성은 모든 방면에서 곱고, 온전하며, 균형 잡혀 있고, 올바르시다.
소제의 고운 가루는 많은 과정들을 통과한 밀로부터 산출된다. 이러한 과정들은 그분을 「슬픔의 사람」(사 53:3)으로 만들었다. 그분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는 슬픔 위에 슬픔을 맛보셨다.
고운 가루는 고움, 공평함, 부드러움, 온유에 있어서 완전하며 조금도 과하지 않고 균형 잡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생과 매일의 행함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시다. 그분의 인성과 우리의 천연적이고 타락한 인성과는 비교할 수 없다.
* 기름
소제의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눅 4:18, 히 1:9). 그리스도는 사람이시며, 사람으로서 그분은 뛰어난 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분에게는 또한 하나님의 영인 신성한 요소도 있다. 신성한 요소는 하나님의 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이기도 하다. 소제로서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충만하시다. 우리는 그분에게 「기름이 발라졌다(oiled)」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기름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셨다는 뜻이다.
* 유향
유향은 달콤한 냄새가 나며 사람들에게 아주 즐거운 느낌을 갖게 해준다. 예표에 있어서, 소제 안에 든 유향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상징한다. 유향은 고운 가루 위에 부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분의 고난으로부터 표현되어 나온 부활의 향기를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마 11:20-30, 눅 10:21 참조). 그분의 인생의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비록 그분이 매우 많은 고난을 당하셨을지라도, 그분의 부활을 통하여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게 하셨다.
소제에는 세 가지 요소들-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연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이 주로 이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었음을 볼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계속적으로 이 세 가지 요소들 안에서 사시며 행하셨다.
그분의 전 생애는 사실상 십자가 아래 사신 것이다. 그분은 항상 죽임 당하셨으며, 가죽이 벗겨지셨으며, 각이 뜨이셨다. 여섯 시간 동안 지속된 그분의 십자가는 그분이 죽임당하시고, 가죽이 벗겨지시고, 각 뜨이신 것의 총체였다. 주 예수님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 사셨기 때문에, 그분은 항상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으로부터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최상의 인성을 지니신 사람이셨다. 이 인성에 기름이 더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의 신성과 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분의 인생에서 그분은 고난들이 아닌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부활은 우주 안에 있는 유향, 향기로운 향기, 달콤한 맛이다. 어떤 것도 이러한 부활의 향기처럼 달콤하지 않으며 향기롭지 않다. 이것이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인생이다.
주님께서 붙잡히시던 밤에(요18:4,7) 그분은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다(8절). 「이 사람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말한다. 그분은 가룟 유다의 배신과 병정들에게 체포를 당하시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제자들을 돌보셨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의 어머니를 돌보셨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 19:26-27上).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고난 받음에서 흘러나오는 부활을 본다.
주 예수님은 고난의 삶이지만, 그분의 부활의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사셨다. 모든 장소, 매 시간마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 안에서의 삶과 그분의 부활을 표현하는 삶을 사셨다. 이것이 소제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갈망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이며, 그분만이 그것을 먹도록 되어 있다. 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태워진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받아진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번제에서 태우는 불을 하나님의 「입(mouth)」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번제는 하나님의 음식인 반면, 소제는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음식으로서 작은 부분을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 합당한 경배
합당한 경배는 번제와 소제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우리 만족을 나누기 위해 소제를 드리는 것, 이것이 실제의 경배이다. 합당한 경배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로 우리가 만족되며 이러한 만족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실제의 경배 안에서 번제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올라가며 소제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러한 경배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며, 우리는 우리가 누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