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고, 모 대기업에 갓 입사한 그 무렵, 그 당시 미혼 자매들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저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었습니다.
마침 지방으로 장가를 가는 한 형제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미혼 청년들이 전세 버스 한 대를 빌렸습니다.
주님의 주권 가운데 약간 관심이 있던 한 자매와 함께 앉게 되었고, 결혼식장 가는 차 안 인지라 자연스럽게 결혼 관련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몇 마디를 주고받지도 않은 어느 순간, ‘아, 이 자매는 나하고는 안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그 자매의 기질이 동생 셋에 시골 출신 부모를 가진 장남인 제 처지에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쉽게 말해, 이 자매와 결혼하면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취향의 자매를 선호하는 형제도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성경 읽기 진도를 따라 아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결혼생활에서 아내와 남편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님 앞에서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 여러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말씀에 불순종하는 남편들일지라도, 그들은 말씀이 아닌 아내의 품행을 통해서 얻어질 것입니다.
... 온유하고 정숙한 영의 썩지 않을 장식으로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단장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입니다(벧전3:1, 4).
예전에 한 동역자 형제님이 결혼식에서 이 대목으로 권면의 말을 하면서, 결혼 생활에 관한 총 일곱 구절 즉 벧전3:1-7 중 여섯 구절이 아내에게 한 말이고, 남편에게는 단 한 구절만 언급했음을 환기해 준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독교계 안에도 ‘여성 해방’ 내지는 ‘남녀평등’ 사상이 만연한 요즘,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의 풍조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위 말씀들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의 본성과 위치를 고려한 이러한 권면을 통하여 현실이 제 위치를 찾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위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아내는 더 약한, 여성의 그릇”이니 “지식에 따라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한다” (7절)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지식을 따라’는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혹은 “여성의 약한 면을 인식”하면서 아내와 함께 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내를 향하여 ‘나는 머리이고 남편이니, 무조건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태도는 성경적으로나 체험적으로나 통하지 않습니다.
둘째, 적지 않은 아내들의 논리는, 성경이 아내들에게 복종하라고 했지만, ‘남편이 먼저 사랑하면’, 혹은 ‘남편이 남편답게 행동하면’ 나도 남편에게 복종하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 1절의 ‘마찬가지로’라는 말씀과 충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집 하인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에게 모든 일에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뿐 아니라,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2:18)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즉 착하고 날 사랑하는 남편뿐 아니라 ‘못된 남편’에게도 복종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내들이 ‘못된 남편’에게도 복종할 때, 남편들은 “여러분의 순결한 품행을 눈으로 지켜보다가”(2절), “말씀이 아니라 아내들의 품행을 통해 얻어질 것”입니다(1절).
결혼 초기에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소위 기 싸움이 있을 수 있고, 남편이 아내에게 쥐여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세상 심지어 교회 생활 하는 가정에서도 관찰될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가정에는 영적인 축복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조정기를 거친 후에는 위 베드로의 권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는 결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아내 된 쪽에서 남편을 향하여 이러한 태도 변화를 갖지 못하면, 아래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은 공허한 교리이거나 걸리적거리는 규율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사도 베드로는 아내들이 “마음에 숨겨진 사람” 즉 “온유하고 정숙한 영”을 단장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속 존재를 ‘온유’하고 ‘정숙’하게 되도록 다듬으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말솜씨로 남편을 이겨 먹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아내, 심지어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말다툼을 서슴지 않는 아내의 경우는 위 ‘온유’ 혹은 ‘정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틀린 것으로 억지를 부리는 남편에게 함께 틀려 주거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순복의 영으로 지혜롭게 조언을 하는 아내가 위 말씀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고리타분한 훈계를 하고 있느냐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 생각은 충분히 거역적이며 세상의 하락에 영향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여인들도 이렇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했다”(5절), “선을 행하고 어떤 무서운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라의 딸”이라고 말씀합니다(6절).
돌이켜 보면,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최소한 두 번 그러한 호칭에 걸맞은 태도로 살았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갔을 때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아내인 사래에게 누이라고 거짓말하게 시킨 것입니다. 이때 사래는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감을 당해도 말없이 순종했지만, 여호와께서 급히 개입하셔서 파라오의 집에 역병을 내리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창12:10-20). 그 후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관계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도 사라는 복종했고,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 그가 남의 아내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창20:2-8). 요즘 말로 하자면, 이런 못된 남편 아브라함이 행한 것을 생각하면 사라는 이혼을 했어도 열 번은 더 해야 했지만, 그 둘이 이혼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한번은 제가 있는 교회에 두 분의 동역자 부부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만찬 집회 후에 처음 오신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중 한 자매님이 ‘아무개 형제 아내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한 형제님이 웃으면서, ’자매님 성함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 자매님은 거듭 ‘아무개 형제 아내입니다’라고 하더니, 웃으면서 ‘ 00자매입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저는 이때 80세가 다 되어가는 백인 자매님이 여전히 머리인 남편 아래의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나 우리 중에나 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미혼 자매님들을 포함한 아내 된 자매님들이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단장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가정들에게 큰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소망을 품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