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3. 05:00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1) - 시작하면서 - 지방교회 자료


개혁신학 측과의 대화 (1)

- 시작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이유

한국 교계는 개혁신학, 즉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주된 신앙 기반으로 삼는 분들이 거의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신학은 대부분의 신자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어왔고, 심지어 다른 배경의 신자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은 이러한 개혁신학과 중첩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칭의, 성도의 견인,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신앙의 최종 목표로 삼음 등은 일치 요소들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전천년주의 등의 종말론,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신 구약 교회론, 성령의 내주 등 몇 가지 쟁점에는 얼마간의 오해와 함께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지면을 통한 대화의 시도는 양측의 이러한 이견들이 한 몸 안의 지체들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 등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요17:21)라고 하신 주 예수님의 기도가 한국 땅에서도 성취될 길을 찾는 것입니다. 

참고로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성경적인 교회의 출현을 꿈꾸었던 과거 모라비안들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 모토로 삼았습니다.[1] 한국 땅에서도 이런 원칙을 붙들므로써  참된 하나의 간증이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 지방 입장과 성도의 견인 교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소위 ‘지방입장’(local ground)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인 교회는 해당 지역(local)안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을 그 구성원으로 하는 각각의 지방 교회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두 성경 교사의 의도와는 달리, ‘워치만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만’을 의미하거나 ‘다른 기독교 단체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말로 종종 오해되곤 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지방 교회 사람’은 왜 이런 불필요한 오해가 생겨나게 되었는지 겸손하게 그 배경을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또한 본인들이 따르는 가르침대로 ‘다른 모임의 구성원들’ 까지도 그 지방에 있는 동일한 교회의 성도로 여겨 적극적으로 차별없는 사랑을 실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칼빈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 는 것입니다.[2]  한편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은 이미 일반 교단에서 구원을 체험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단지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불신자(또는 이단) 처럼 취급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모순됩니다. 따라서 장로교 출신 성도들, 특히 정통과 이단을 재단하는 진리 변증가들은 소위 ‘지방 교회 사람들’을 향한 정죄를 버리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 지금보다 더 마음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각자의 현실을 돌아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

총신대 신대원 김지찬 교수님은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글[3]에서 한국교계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지금과 같은 교회 하락의 원인을 가져왔다고 역설 합니다.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중생한 이후 전적 타락만을 강조하고, 주어진 책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지나치게 “법정적 이신칭의만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는 의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은연 중 갖게” 했다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칼빈신학의 핵심요소 중 일부입니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교회가 게토화 되어” “자신들끼리만 거룩한 백성이라고 떠들고 있지만, 밖에서 보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빈민굴이나 다를 바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냉철한 자기 반성을 가하고 있습니다. 

각기 200만명이 넘은 성도들을 가진 합동, 통합은 그 규모에 걸맞게 장자 교단이라는 명칭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혁신학 진영은 최고의 신학을 보유한 것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위 김 교수께서 지적한 한국 교계의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적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개혁 신학이 ‘법정 선언적 칭의’방면에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소위 지방 교회측은 그 칭의 이후의 생명에 의한 구원(롬5:10), 즉 성화와 영화롭게 됨 방면에 주님 앞에서 본 이상과 체험이 있습니다.[4] 그러나 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어떤 진리 방면을 알고 있다는 지나친 우월감이 한국교계 내에서 불 필요한 반감을 사지는 않았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신앙 양심이 달린 문제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타협할 일도 또 타협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제시하는 태도와 자세는 겸손할수록 은혜로울 것입니다. 참고로 백영희 목사님측 총공회는 기본구원에 이어서 삼분설에 근거한  소위 ‘건설구원’을 말함으로써 지방 교회측과 매우 흡사하지만, 진리 제시의 태도에 있어서는  개혁 진영을 자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5]

앞으로 다룰 쟁점들  

이 글은 양 진영의 모든 이견을 다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다음 몇 가지 쟁점들에 대한 이견들을 선별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1) 언약신학, 세대주의 신학: 개혁신학이 언약신학을 견지한다면, 이와 대척점에 있는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입니다. 한국교계 이단 감별사들 중 어떤 분들은 세대주의를 신봉하는 자체를 이단 사유로 삼습니다. 일부는 또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형제회 배경이 있었다는 이유로 이 둘을 세대주의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세대주의 특징을 고수하는 말씀 보존학회(대표:이송오 목사)와 달리,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세대주의자는 아닙니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신구약 교회의 통일성, 차별성: 신구약의 교회를 동일 선상에서 보는 언약신학과 달리[6],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신약 교회를 주로 강조하고, 구약에는 그 모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성경에 ‘광야 교회’라는 표현이 있지만(행7:37), 주 예수님이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고 미래 시재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충만인 몸인 교회(엡1:23)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출현한 것으로 봅니다. 

3) 신구약에서의 구원의 원칙: 그러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같이 오직 믿음으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점이 언약신학과는 일치하고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7]과는 현저하게 다른 점입니다. 한편 박만수 형제 (안티오크)는 세대주의는 물론 언약 신학도 비성경적인 교리체계라고 비판합니다.[8] 

4)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 :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문제는 언약 신학 진영 내에서도 견해가 나뉩니다.[9] 즉 대부분은 그것을 부인하되, 김홍전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 두 진영은 인터넷 안에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구약에서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없었고, 요7:39, 고전15:45, 요14:17 등을 토대로 성령의 영원한 내주는 신약만의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3] http://blog.naver.com/jim2008/110097052436 (김지찬 교수님, 한국교회의 문제점)
[4]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 많은 저술들은 주로 이 ‘유기적인 구원’(organic salvation)의 방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싸이트를 참조: http://godssalvation.chch.kr/aspects/regenerate.html
[6] 서철원 교수님은 자신의 <개혁파교회론> http://blog.daum.net/midumsungil/2 '1. 교회의 정의에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라고 하면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라고 하여 둘을 구분한다.
[7] http://www.youtube.com/watch?v=rKHBhXGV_ck 여기에서 이송오 목사님은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음을 주장한다.
[8] http://www.antioch.co.kr/Antioch/AH300/AH30110?BookletId=0603&BookletSubId=34 (박만수 형제님, 세대주의와 언약신학의 두 극단)
[9] 즉 개혁신학 진영의 대부분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부인하되, 김홍전 목사님, 최낙재 교수님, 이승구 교수님 등은 강하게 주장한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2. 05:00

양태론 (삼위양식론) 삼신론

양태론 (삼위양식론) 삼신론

성경은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시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분은 세 하나님들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실 수 있는가? 각 세대를 통하여 신학자, 성경 해석자, 설교자 등을 포함한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이 질문을 상당히 연구하고 토론했지만 2천년간의 연구조사와 토론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한 답을 얻지 못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통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가 한 하나님이고, 아들이 또 다른 하나님이고, 그 영이 여전히 또 다른 하나님으로서 이 세 분 하나님들이 함께 모여 한 단체적인 하나님을 구성한다고 믿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도인 바티칸(Vatican)에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거기에 있는 회랑(回廊)을 알 것이다.

양태론 (삼위양식론) 삼신론


이 회랑에는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지 않고 천장에서 바닥에 이르는 두 종류의 커다란 유화(油畵)가 있다. 한 그림에는 백발의 나이든 아버지가 잘 생긴 아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비둘기도 함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안에서 사람들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 칭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그들이 세 실체(實體)-아버지, 아들, 비둘기-를 경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그림은 그 셋에 한 숙녀가 더해진 것이다. 그들은 "성모"를 신격(神格) 속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실제를 놓쳤다. 우리의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삼일(三一)-아버지, 아들, 그 영-이시지만 여전히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왜 우리의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도 셋(one and three)이신가? 언젠가 어떤 사람들이 이 질문을 마틴 루터에게 하자 그는 "나는 모릅니다. 만약 내가 안다고 말한다면 내가 하나님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아니었으므로 알지 못했다. 그의 대답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삼일 하나님의 위격들(位格 : persons)은 매우 비밀스럽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적인 지성으로써 그분을 분석하고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성경의 분명한 말씀을 따라 이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6)고 진술한다. 더욱이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듭하여 "나[단수(單數)]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8, 45:5-6, 21-22)고 말씀하신다. 또한 시편 86편 10절은 "주만 하나님이시니이다"고 말한다. 성경은 결코 우리에게 세분의 하나님들이 계신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때 그분 자신을 가리켜 "우리"와 "우리의"라고 칭하신 것을 언급한다(창 1:26, 3:22, 11:6-7). 

 이사야 6장 8절에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가리켜 한편으로는 "내"라고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드러난 말씀에 따라 성경의 계시를 받는 것이다.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므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내"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유일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우리를"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들, 그 영이신 면이 있지만 그 셋은 나뉘어지지 않고 여전히 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분리된 세 위격(位格)들로 분리시켜서 설명하는 신학은 큰 이단이다. 

요한복음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그분 안에 계시고(14:10-11, 10:38, 17:21)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10:30)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또 그분은 우리에게 그 영이 아버지께로서 오신다고 말한다(요 15:26). 헬리어에서 요한복음 15장 26절의 [...께로서(from)]는 문자적으로는 [...로부터 함께(from with)]를 의미하는 전치사(前置詞)이다. 이것은 실제의 영이 아버지로부터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오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영이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이 그 영과 함께 오신다. 이것은 아버지, 아들, 그 영이 동시존재(同時存在)하시고 상호내재(相互內在)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아들이 오셨을 때 아버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 영이 오셨을 때 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삼위는 한 하나님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삼위양식설(三位樣式說)이라 불리는 그릇된 신학의 가르침이다. 삼위양식론자들은 아버지는 구약에 계셨지만 신약, 곧 아들이 오신 복음서에서는 아버지는 존재하기를 그치셨고, 그 다음 복음서 후에 그 영이 오셨을 때 아들은 더 이상 계시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단이다.  

말씀의 순수한 계시는 구약에 아버지가 계셨고, 아들과 그 영도 계셨다고 말한다. 즉, 그 세 분이 모두 계셨다고 말한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 아들이 오셨고, 아버지와 그 영도 오셨다. 세 분이 동시에 계셨다. 서신서에서 그 영이 오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도 그 영과 함께 오셨다. 그들은 서로를 대치하는 방식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동시존재(同時存在)의 방식으로 오셨다. 더욱이 그들은 다만 동시에 존재하신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호내재(相互內在)의 방식으로 동시에 존재하셨다. 이 한 분의 완전한 삼일 하나님과 그분이 성취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누림을 위하여, 우리의 영 안의 풍성한 공급이 되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되신다. 그러나 삼위양식설을 반대하고 근본주의적이기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에서 아들이 홀로 오셨고, 하늘에는 아버지가 그대로 계시고, 또한 서신서에서 그 영이 오셨을 때 역시 하늘에 아버지와 아들이 그대로 계신다고 믿는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인 삼신론(三神論)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상으로는 큰 이단이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의 탁월성, "그리스도의 풍성은 그 모든 성취를 이루신 삼일 하나님임, p.81-85", 한국복음서원]

양태론 (삼위양식론) 삼신론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1. 05:00

지방교회 탐구 - 1

총 4회 중 첫 글에서 '지방교회의 핵심신앙'을 간략하게 다룬다. 그 후 두 번에 걸쳐 현재 통합교단 등에서 논란이 된 진리 항목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마지막 글에서는 전반적인 요약과 아울러 향후 한국 교계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지방교회 측의 입장을 밝히려고 한다.

현재의 지방교회의 특징은 그 안에서 주된 인도 직분을 담당했던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신앙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으므로, 이 두 성경교사에 대하여 먼저 간략히 소개한다.

신앙고백 풀러신학교도 공식 지지

기독교 근본 교리 따라, 미국 ECPA 정회원으로 활동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1903년 중국 복주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7세에 역동적인 거듭남을 체험했고, 즉시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워치만 니는 성공회가 세운 '앵그리칸 트리니티 칼리지' 출신이며, 탁월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역사 전반을 망라한 약 3천 여 권의 기독서적을 독파하였다. 또한 그 당시 그의 고향에서 활동했던 M.E.바버 선교사를 통해 당대 유럽의 기독교 거장들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속 생명파와 형제회 노선이 그에게 상호 보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신학사상은 총 62권의 <워치만 니 전집>(한국복음서원)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는 중국 공산화 직후 투옥되어 20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1972년 5월 30일 순교하였다.

워치만 니의 동역자인 위트니스 리(Witness Lee)는 1905년 중국 산동 지방에서 삼 대 째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세에 거듭남을 체험 한 후 약 8년 동안 형제회 모임에 출석하였다. 그 후 그는 워치만 니가 발간하던 문서를 통해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워치만 니의 사역에 합류하였다. 워치만 니는 그를 약 20년 이상 직접 온전케 했고 둘은 끝까지 신실하게 동역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1949년부터 1961년까지는 대만에서, 1962년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인 1997년까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동안 일관되게 워치만 니로부터 보고 배운 큰 틀 안에서 사역하였다. 그의 메시지는 400여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성경 66권을 강해한 '라이프 스타디 전집'(Life-Study)과 (지방)교회의 조직신학에 해당되는 8권으로 된 '신약의 결론'(총 4600쪽)이 있다. 

위의 두 성경 교사는 일관되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과 만인제사장의 실행을 강조하였다. 즉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 뜻은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변화시키고, 영화롭게 하심으로 성취된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지방)교회의 신앙은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 새 예루살렘을 강조한다(엡1:4-5, 마16:18, 골1:27, 엡1:23, 계21:2, 9-10).  

이외에 위트니스 리가 주로 사역했던 미국 내 교계의 다음과 같은 평가도 (지방)교회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먼저 저명한 이단 변증가 이자 종교백과사전의 저자인 고오든 J. 맬튼 박사는 자신의 '미국종교백과사전' (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에서 (지방)교회를 플리머스 형제회와 함께 '독립 근본주의 계열'로 분류하고 있다(최신판, 967쪽). 이들은 근본주의 운동의 핵심인물인 존 넬슨 다아비의 모든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이 운동이 기독교의 다섯 가지 근본교리로 내세웠던 △성경무오성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을 우리도 믿고 고백하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미국 정통장로교회, 한국의 장로교 합동교단 내에서도 동일한 고백이 이뤄지고 있다.  

참고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자만을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는 한국의 '생명의 말씀사', '규장' 등이 국제회원으로 있는 '미국복음주의 출판사 협회'(ECPA) 의 투표권 있는 정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 외에도 한국 교계 내에 적지 않은 동문 목회자들을 배출한 풀러 신학교에서 (지방)교회에 대해 이단성이 없다는 공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선언문은 풀러 신학교 총장 Richard Mouw 박사, 신학부 학장 Howard Loewen 박사, 조직 신학 교수인 Veli-matti Karkkainen 박사 등이 2년에 걸쳐 (지방)교회 인도자들과 폭넓은 대화와 연구 끝에 나온 것이다).

풀러신학교 선언문


"우리는 리빙스트림미니스트리의 출판물로 대표된 가르침들을 고수하는 사역의 인도자들이나 지방 교회들 구성원들 가운데 이단에 속하거나 이단과 유사한 속성들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믿는 이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같은 지체들로 쉽고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일부 인용)


http://www.mokhoeja.co.kr/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0. 16:53


2012년 12월 21일 거대한 지진과 화산 폭발 등으로 지구가 멸망한다는 헐리우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중국에서 지구 종말론을 퍼뜨린 혐의로 사이비 종교 '전능신' 신도 500여명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칭하이성 한 곳에서만 5000점 넘는 불법 선전물이 압수됐습니다. 동방번개라고도 불리는 이 신도들은 기독교를 사칭하며 다단계 방식으로 전국에 종말론을 유포시켰습니다. 전능신을 믿어야만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0. 16:51

지방교회를 양태론으로 몰아가는 김홍기 목사의 '삼신론 이단 사상' 발췌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20. 05:00

지방교회들 개신교 전통에 의해 확립된 최고의 표준과 정확히 일치한다  -  왕애명 (王艾明, Aiming Wang)


왕애명(王艾明)박사 - 지방교회들 평가


* 왕애명(王艾明)박사는 현재 중국 난징에 있는 진링(金陵) 연합신학대학의 교수이다. 그는 스위스 바젤에 있는 바젤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스위스 뉴세텔에 있는 뉴세텔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중국 종교 협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진링신학저널의 편집장이자, 장쑤성(江蘇省)기독위원회 부회장이고, 중화기독협회 신학교육위원회 부회장이다.

“나는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0년동안 지속적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쓴 거의 모든 저작물들을 연구하고 또 읽었다. 이들이 쓴 중요한 저서들 중 몇 권은 여러번 주의 깊게 검토하였다. 나는 두 사람의 책들을 숙고했고 그 자료들을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바르트, 래칭거 같은 사람들이 정립한 주류 신학 사상과 체계적으로 비교하였다. 

나는 대략 2008년 초에 중화 토착인 교회 내지는 기독인 모임(일반적으로 지방 교회, 집회소, 작은 무리로 알려진)의 설립자이자 계승자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중국 기독교 역사에서 영적인 거인들이라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워치만 니에 의해 세워진 "지방교회들"은 중화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의 독특한 발전이었다. 만일 우리가 루터의 개혁주의 원칙을 요약하기 위해 칼빈이 사용했던 ‘세 가지 오직들‘에 기초해서 "지방교회들"을 살펴본다면, "지방교회들"은 개신교 전통에 의해 확립된 최고의 표준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지방 교회들이 역사적 신학에 관한 이러한 조망을 가진 덕분에, 그들은 역사의 현장에 등장한 이래로 그들이 누려왔던 영역과 영향력에서 건전한 발전을 이루었다. 위트니스 리는 중국 밖에서 "지방교회들"을 발전시킨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현재 "지방 교회들"은 세계 선교에 관한 한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져왔던 유일한 중국 토착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그리고 그들에 의해 세워지고 발전된 "지방교회들" 과 관련하여, 많은 오해들와 허위 비방들이 있어 왔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오해와 허위 비방의 기원과 근본 원인의 배후를 추적하다보면, 주류 기독교 교단들인 우리에게 사실을 분명히 하고 편견을 시정하는 일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만일 종교 업무를 관장하는 중국 정부 내의 감독 부서들이 종교적 신념의 자유에 대한 시민들의 권리를 헌법이 정의한 대로 참되게 지원하려 한다면, 그들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워치만 니의 명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들은 최소한 두 협의회(삼자 애국 운동과 중국 기독교 협회)의 통제 하에 있는 신학대학들이 워치만 니를 중국 기독교 역사 속에 있는 창립자들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워치만 니의 가르침들을 연구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또한 워치만 니가 쓴 방대한 책들은 중국 안에서 공개적으로 출판되고 또 연구되도록 허락되어야 한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 의해 세워지고 발전된 중국 기독교회 전통(일반적으로, 지방교회들, 기독모임, 집회소, 적은 무리로 알려진)은 중국 내의 복음 진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놀랍게 꽃 피우고 있고, 장차 하나의 영적인 운동의 추진력이 되리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역주) 세 가지 오직(three solas)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신앙’(sola fide)을 가리킴.


Aiming Wang (王艾明), Th.D., D.h.c.
is a professor at Jinling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anjing, China. He has a Doctor of Theology degree from the University of Basel in Basel, Switzerland, and a honorary doctorate from the University of Neuchâtel in Neuchâtel, Switzerland. Presently, he is one of the directors of the China Religious Society, chief editor of Jinling Theological Journal, deputy director of the Christian Council of Jiangsu Province, and deputy director of the Theological Education Committee of the China Christian Council.

During the ten-year period from 2002 to 2012, I continually studied and read through all of the writings of Watchman Nee and Witness Lee. I have gone over some of their more important writings several times. I have reflected on their writings and compared them systematically with the mainstream theological thoughts formulated by people such as St. Athanasius, St. Augustine, St. Thomas Aquinas, Luther, Calvin, Barth, and Ratzinger. 

 Beginning from about 2008, I came to the definite conclusion that Watchman Nee and Witness Lee—the founder and the inheritor, respectively, of the indigenous Chinese church, Christian Assembly (a.k.a. the local churches, Assembly Hall, Little Flock)—are spiritual giants in the history of Chinese Christianity. 

 From the standpoint of theology, the “local churches” founded by Watchman Nee are a unique development in Christianity in China. If we look at the local churches based on the three solas used by Calvin to summarize Luther’s principle of reformation, the local churches correspond exactly to the highest standard set forth by the Protestant church tradition. Hence, this perspective of historical theology accounts for the healthy growth in scope and impact that the local churches have enjoyed since they appeared on the scene. Witness Lee was the leading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local churches outside of China. At present the local churches can be described as the only indigenous Chinese church that has had an international impact as far as world mission is concerned. Surrounding Watchman Nee, Witness Lee, and the local churches founded and developed by them, there have been many misunderstandings and slanders. If we trace these back to their origin and root cause, we, the mainstream Christian denominations, bear an inescapable responsibility to clarify facts and to correct bias. 

 If the departments in the Chinese government overseeing religious affairs are to truly maintain our citizens’ right to freedom of religious belief as defined by the Constitution, they should restore the reputation of Watchman Nee as soon as possible. At least, they should allow the seminaries under the governance of the two councils [Three-Self Patriotic Movement and China Christian Council] to regard Watchman Nee as one of the fathers in Chinese Christian history and to study his teachings. His voluminous writings should be allowed to be published openly and studied in China. 

 It is my view that the Chinese Christian church tradition founded and developed by Watchman Nee and Witness Lee (a.k.a. the local churches, Christian Assembly, Assembly Hall, and Little Flock), as a wondrous flowering of the Christian faith in the landscape of the gospel in China, will become the driving force of a spiritual movement.


 Aiming Ambrose Wang (王艾明), D.Th., D. h.c. 
金陵协和神学院教授,瑞士巴塞尔大学神学博士,瑞士纳沙泰尔大学荣誉博士。现 任金陵协和神学院副院长,中国宗教学会理事,《金陵神学志》主编、江苏省基督 教协会副会长、中国基督教协会神学教育委员会副主任。  

从2002年到2012年十年时间里,从未间断地研读了倪柝声和李常受的全部著作文本,其中重要的著作还研读了好几遍,同时联系起来圣亚塔那修(St.Athanasius)、圣奥古斯丁、圣托马斯、路德、加尔文、巴特和拉青格(Ratzinger)等形成的主导教义学传统,做系统地比较和反思。  

大约从2008年开始,我便得出一个明晰的结论,那就是倪柝声和李常受是中国基督教历史上的属灵伟人,是“中国土著教会”(李常受语)基督徒聚会处(又名“聚会所”、“小群”、“地方教会”或“召会”等)的创始人和承传者。  

从神学教义学来看,倪柝声所创建的“地方教会”在这个意义上是中国基督教的原创,或“土著”。用加尔文总结路德改教原则所用的三个唯靠来看,地方教会有恰恰符合新教教会传统的最高衡定标准,因此,从历史神学的层面来看,地方教会在一出现很快就在势头和规模上健康成长起来,其秘密就在于此。 

在海外,则是以李常受为代表人物。“地方教会”目前在世界宣教学版图上堪称是唯一的具有国际影响力的中国“土著教会”。  

围绕着倪柝声、李常受及其所创建和发展的“地方教会”的许多误解和诽谤,求根溯源来看,我们基督教主导宗派在澄清和纠偏方面,具有不可推卸的责任。 

就中国的政教关系而言,我们要澄清围绕着倪柝声、李常受和召会(又称,小群教会LittleFlock,或地方教会LocalChurch)的三种误读,从而要做出相应的切割。可以说,甚至在很大的范围和程度上,这三种误解正在演绎成谎言和诽谤,并最终危及这一特殊的基督徒群体的声誉和基本权利。第一种误读:倪柝声和李常受是小群教会的神、主和崇拜核心,因此,是基督教世界中的异端;第二种误读:小群教会内部最重要和最隐秘的部分就是呼喊派,因此,是法律层面和社会学层面的邪教;第三种误读:召会所使用的恢复版圣经不是基督教伟大传统中的圣经正典,而是倪柝声和李常受语录和被他们篡改过的圣经。 

无论是教会论神学,还是圣礼神学,召会都演化出一整套完全有别于西方基督教传统的理解方式。若中国政府主管宗教事务部门真正能够从维护宪法制定的公民信仰自由权利,那就应该尽早地为倪柝声恢复名誉,或者,至少应该允许全国两会及其属下的神学院校将倪柝声作为中国基督教史上的先贤予以研究,其数十卷之巨的著述应该同意在中国教会公开发行和研究。 

我的远象是,倪柝声和李常受所创建和发展起来的中国基督教召会传统(或曰地方教会、聚会处、聚会所、小群等),作为基督信仰的奇葩,将在中国福音版图上,成为一种属灵运动的推动力


원출처 : <https://an-open-letter.org/en/aiming-wang-%E7%8E%8B%E8%89%BE%E6%98%8E/>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6. 1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5) - 생명을 영접해요?


-보통은 처음에 기독교인이 된 것을 말할 때 '예수님을 믿었다' 거나 '교회 나가기 시작했다'라고 하는데, 지방 교회측 분들은 '생명을 영접했다' 라고 말하기도 하나요?  


생명을 영접했다는 말은 저희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보통은 '구원받았다' 또는 '거듭났다' 라는 말을 쓰지요. 어떤 경우는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믿음 생활의 시작임을 잘 알고 있지요. 

  - 왜 요 3장 16절에도 예수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영생'은 멸망의 반대말이고, 죽지 않고 천국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영생'(eternal life)을 죽지 않고 오래사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데 어떤 분은 그런 개념이라면 심지어 지옥간 사람도 거기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더군요. 물론 고통이지요. 예수 믿으면 물론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위 문맥에서 <영생>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영원한 생명이신 분, 즉 주 예수님 자신을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는 믿는 우리 안에 실제로 들어 오신다는 것인가요? 

 예.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은 (생명이신)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고 하고, 또한 34절은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둘 다 사실이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보혜사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목사님들이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무튼, 주 예수님이 직접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조금은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지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교리는 주로 장로교단 쪽 분들이 하시는 주장인데, 그 근거로 요일 3:24를 제시하더군요. 사실 이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조금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분들이 성경 본문을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아래 출처에 가셔서 정리된 글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http://blog.chch.kr/7777/32684.html )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 자체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고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골3:4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했고, 고후13:5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했고, 골1:27은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5:11-12도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를 생명이다 라고 소개한 곳도 있지요(요11:25, 14:6).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한 곳에 모아서 이야기를 해 주시니까 또 다른 느낌이 있군요. 그런데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면 어디로 오신다는 말씀인지요? 

 평범하면서도 예리한 질문이십니다. 사실 개혁신학을 하신 분들은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조금은 주저하는 편입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Finitum non sapax infinit)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문제는 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 이미 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유한한 참 사람으로서 무한한 참 하나님을 그 안에 '담으신' 분이라고 할수 있으니까요(요1:14). 그것은 그렇고, 대개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라고 하지요.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생명이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계십니다(요3:6, 고전6:17). 그후 우리의 마음으로까지 점차적으로 그분의 거처를 확대해 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엡3:17). 

  -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면 나중에 공중 재림하신다는 말씀은 안 믿으시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장차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 아멘입니다. 현재 우리 안에 생명으로 계신 것과 나중에 재림하시는 것을 그리피스 토마스(W.H. Griffith Thomas)라는 저명한 신학자는 자신의 <성령론>에서 미래에 있을 재림 즉 '파루시아'와 구분하여 오늘날 주님의 내주하심을 '현재의 파루시아'로 표현했더군요 

  -'생명'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보니 앞으로 시간을 내어 제대로 한번 이 주제에 대해서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끝으로 지방 교회 측은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낳으신 것이 아니고 양자로 삼아 주신 것이다' 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런 오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간격을 너무 강조하고, 또 '양자의 영'(롬8:15)에서 보듯이 개역 성경이 번역시 '양자'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자로 번역된 '휘오데시아'(5206)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양자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직접 낳지 않고 법적으로 입양한 자녀를 양자라고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법적인 상속을 받을 만큼 장성한 자녀를 가리킵니다(엡1:5, 갈4:5 참조). '장성한' 이란 말을 잘 새겨야 합니다. 히2:11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함으로 거룩케 하시는 주 예수님과 거룩케 함을 받고 있는 그분의 많은 형제들(롬8:29)이 다 한 근원인 아버지에게서 난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오늘은 너무 많은 것들을 다룬 것같아서 이 주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네요.

  -긴 시간 제 질문에 대해 성의있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대화가 서로 간에 알게 모르게 쌓였던 오해를 해소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저도 이런 진지한 대화가 매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계속 교제를 이어 갔으면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5.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4)-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시라구요?

-지방 교회들 서적들을 보거나 거기 사람들을 만나 보면 '생명주는 영'이라는 말을 많이 하던데, 성경에 있는 말인가요? 


, 당연히 성경에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에 보면,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요? 개역성경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가만 있자, 고전 15장이라고 했지요? 45절이고..."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되어 있는데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은 영어로 'living soul' 이니까 '산 혼' 이 맞구요, '살려주는 영'도 'life- giving Spirit ' 이니까 '생명 주는 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회복 역 말고 권위 있는 영어 성경 중에 'life-giving Spirit'이라고 번역한 것이 있는지요?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그대로 직역한 핸드릭슨사의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Jay P. Green 번역)도 'a life-giving Spirit' 이라고 되어 있구요(932쪽), 참고로 NIV 도 'life-giving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주는 영'은 한 마디로 누구입니까? 성령님이신가요? 

 생명주는 영은 한 마디로 '부활 후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후 예수님을 성령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삼위는 본체적으로 영원토록 구별되심으로 부활했다고 해서 2격이 3격이 될 수는 없겠지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바울은 '부활 전 예수님'이 '부활 후 예수님'이 되셨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의하시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방면에서는 부활 전 이건 후이건 전혀 차이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부활 전 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주로 그분의 사람 방면에서 그렇습니다. 즉 그분의 인성은 부활 후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으로 변형되신 것입니다(고전 15:44, 빌3:21). 
 더 쉽게 말한다면, 부활 후 그분의 인성은 보이다가 갑자기 안 보이는 분(눅24:31), 문이 다 닫혀 있었는데도 불쑥 들어오실 수 있는 분(요20:26)이 되신 것입니다. 

  -그거야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요? 구태여 강조하여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한 분이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 즉 생명주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고전 6:17은 '주님과 연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영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한 주님은 바로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와 연합되신 <부활하신 예수님> 즉 '생명주는 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성령이 내 안에 사신다고 하지 않고)라고 말할 수 있었지요. 

  -성령님이 주 예수님을 '대리'해서 우리 안에 계시니까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배웠는데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 하늘에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 사람 안에는 성령만 계시게 하는 신학구조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저 하늘에서 중보 기도하실 뿐 아니라(롬8:34) 동시에 생명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심(롬8:10, 골3:4, 1:27, 갈2:20)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양면 모두를 믿는 것이 더 균형잡힌 믿음이겠지요. 

  -'그영'과 '생명주는 영'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우선 요7:39은 그 당시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 여기서의 '그영'은 '영원 전부터 계시는 성령님'과는 구별된 개념입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말하는 '그영'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신 시기인 부활을 깃점으로 그후에 존재하셨다는 점에서 고전 15장 45절의 '생명주는 영'과 동의어로 볼수 있습니다. 

  -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안 계신 것이라기 보다는 믿는 이들 안에 (저희에게)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닌가요? 

언뜻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의 '저희에게' (영어성경의 givin)는 원문에는 없고 후대에 임의로 써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이탤릭체로 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헬라어 원문 그대로 읽으면 'the Spirit was not yet, 이고 그 이유는 'because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입니다. 즉 그영 자체가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시기인 부활 전까지는 안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생명주는 영 즉 아들하나님과 그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아버지와 성령님 그리고 아들이 성육신 때 입으셨던 인성까지 영화되어 포함된 그영이 예수님 부활 이후에 비로소 계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고전 15:45 말고 그런 그영을 말하는 구절이 또 있나요? 한 곳만 말해 줄수 있나요? 

계시록 22장 17절입니다. 개역성경은 '성령과 신부'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the Spirit and the bride'입니다. 
우선 여기서 언급된 영은 'the Holy Spirit' 즉 성령이 아니라 the Sprit 즉'그영'입니다. 전후 문맥을 보더라도 그렇고 신부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아도 여기서의 '그영'은 신랑이신 어린양 즉 부활하신 주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영은 다만 주 예수님 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님이 존재론적으로 상호내주 하시는 아들 하나님 그러니까 삼일 하나님 전체이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는 어느 한 위격을 말할 때는 다른 두 위격이 늘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세 위격은 구별되나 분리되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지방)교회 측에서는 주님을 성령님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할 때는 우리도 똑같이 성경을 따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후 3:17은 '주는 영이시니' 라고 말합니다. 명망있는 신학자인 헨리 알포드는 앞의 '주'는 그리스도를, 뒤의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the Lord,' as here spoken of, 'Christ', 'is the Spirit' is identical with the Holy Sprit: not personally nor essentially)(Alford's Greek Testament, 648쪽)

그런데 이것은 본체론적으로 주님이 성령이라는 말이 아니지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본 기능에 있어서 주님은 성령과 동일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국내에서는 양태론으로 오해를 했지만, 합동 신학원의 박형용 박사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개핀 교수는 경륜적인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 위 본문은 주님= 성령을 말한다고 제대로 가르칩니다(차영배,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49쪽). 


  -대화를 할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 그렇지요.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바로 아는 비결은 어떤 신학체계 안에 본문 말씀을 담으려 하지 말고, 그냥 성경 말씀 그대로를 다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전15:45, 요7:39, 고전6:17, 골1:27, 3:4, 요일 5:11-12, 고후3:17 그리고 골 2:9, 요14:10-11, 롬8:34, 10 같은 말씀들이 그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위 본문들을 차분히 묵상하면서 주님께 빛 비춰 주시기를 간구하면 주님이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깊은 진리는 머리로 알기 이전에 주님이 우리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튼 질문들에 대해서 성의있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더 교제하기로 하지요.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4.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3) - 성령보다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한다면서요?

- 지방교회 측이 믿는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누구십니까? 


 지방교회측 성도들이 믿는 그리스도라 음...한 마디로 말자면,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사람' 즉 하나님-사람 (God-man)이십니다. 

  -그쪽에서 나온 책에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근거가 있나요? 꼭 이런 식으로 복잡한 표현들을 써야 하는지요?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The All Inclusive Christ)라는 말은 사실은 책 제목입니다. 신명기 8장의 단 몇 구절 내용을 가지고 책 한 권을 쓴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그리스도로 보고, 그 땅의 젖과 꿀을 포함한 다양한 소산물들은 다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본 것입니다. 신약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라고 한 골로새서 3장 11절, 그리고...골로새서2장 16-17절의 '먹는 것, 마시는 것, ....안식일 등은 다 그림자이며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도 근거 구절로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그리스도는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실체이시다' 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귀측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신학이론이 있나요? (지방)교회 측은 체계적인 신학이 없다고 많이들 알고 있던데... 

저희도 '그리스도'(위트니스 리, 한국 복음서원)라는 단행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언급한 거의 모든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아 내어 그 본문의 의미들을 해설한 것이지요. 약 700 여 쪽 되는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목차를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역사'(work)를 두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라 함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주시다 뭐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구주'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뿐 아니라 다양한 방면이 그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분은 '하나님의 비밀'이십니다(골2:2).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도 그리스도를 가리키지요(계4:5). '교회의 머리'(골1:18), '처음과 마지막'(계2:8)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친히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계22:13), 또는(나는...이다' (I Am, ego imi)라고 소개한 적도 있으십니다(요8:24). 이런 모든 명칭들의 성경근거와 의미를 '그리스도'라는 위 책이 설명하고 있지요. 

  -아, 그래요. (지방)교회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것을 믿으시나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이런 구속의 역사는 물론 예수님의 성육신, 인생을 사심, 죽음, 부활, 승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들어오셔서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하심, 혼을 변화시킴, 몸을 변형되게 하심 등도 그분의 일하심의 내용이요 결과라고 믿습니다. 

  - 평소에 궁금하던 것을 좀 물어보겠습니다. 보통 기성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를 많이 이야기 하고 성령 충만 받는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 많은데, 지방교회 책으로 보거나 그쪽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성령보다는 그리스도를 많이 강조하는 것 같던데요. 

 매우 관찰력이 뛰어나신 것같습니다. 사실은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같은 (지방)교회 주축 성경교사들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약 사역의 성취를 강조하다보니 그런 면이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구속,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되심,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 안에 거처를 정하심, 그리스도의 충만인 교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우리의 낮은 몸도 변형됨.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됨 등의 신약의 핵심진리는 다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물론 그렇다고 성령님의 역사를 배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개역성경이 '성령'이라고 번역한 구절들의 상당부분이 꼭 제 3격 성령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거나 또는 영이신 하나님 자신 또는 심지어 사람의 영(또는 연합된 영)을 가리키는 곳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주는 영'과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인가요? 이 점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것같던데요. 

예. 안 그래도 이 주제는 별도로 다루려고 생각합니다만 우선 생명주는 영이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에 근거한 말이고요. 그 의미는 '마지막 아담'은 부활 전 예수님을, '생명주는 영'은 부활 후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부활 전 예수님, 부활 후 예수님이라구요? 예수님은 부활 전이든 후든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 아닌가요?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분이라고 성경이 말하지 않던가요? 

예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사람이시다 라고 서두에 말했던 것 생각나세요? 그분이 하나님이신 방면에서는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이신 방면에서는 부활 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부활 후에는 문을 닫고 있어도 들어 가실 수 있고, 사람의 눈에 보이셨다가 갑자기 안 보이실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차이가 바로 마지막 아담과 생명주는 영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부분은 다른 곳에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잠시 후 다시 뵙지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3.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2)- 왜 하필 삼일 하나님이라고 하나요?

-지방교회 측 성도들과 달리 일반적으로는 삼위일체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왜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라는 말을 잘 안 쓰고 '삼일 하나님' 또는 '삼일성'이라고 하는지요?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보통 영어권에서도 '삼위일체'(Trinity)와 '삼일하나님'(Triune God)이라는 말을 함께 쓰고 있어요. 즉 '삼일 하나님'이란 말을 (지방)교회들만 쓰는 표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혹시 미심쩍으시면 구글 검색 같은 곳에 'Triune God'을 한번 쳐넣어 보시면 바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제가 검색을 한 결과를 보여 드릴께요. 보세요. 우리 외에도 루터교단도 그런 표현을 쓰고 있고 그외에도 다양한 사람과 단체들이 그렇게 혼용해서 쓰고 있답니다.
http://www.google.co.kr/search?complete=1&hl=ko&q=triune+God&lr=&aq=f 

  -만일 삼위일체와 삼일 하나님 둘다 사용할 수 있다면, 왜 거기는 '삼일 하나님'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지요? 제게는 (지방)교회분들이 삼위일체라는 말보다는 삼일 하나님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잘 보셨습니다. 사실 둘 다 사용해도 큰 무리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삼일( 라틴어로 셋-하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성경의 계시에 더 접근된 표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권위있는 신학자로 평가되는 이종성 박사는 삼위일체론(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답니다.
"한국교회와 일본교회는 Trinity를 삼위일체로 부른다. 그렇게 번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수 없으나 매우 모호하고 부적당한 번역이다. 왜냐하면 '위'의 개념이나 '체'의 개념이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학적 연구가 요청된다."(300쪽)

- 거기는 삼위일체를 '세 인격, 한 본질' (three persons, one nature)
로 요약해 온 정통 삼위일체의 정의에 동의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상 이단들과의 싸움을 통해 정립된 정통 삼위일체 교리들을 다 동일하게 믿고 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계 내에서 (지방)교회측의 삼위일체론이 자꾸 문제가 되는지요? 

 자꾸 문제가 된다기 보다는 어떤 한 목사님이 (지방)교회 삼위일체론에 대해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연구를 해서 발표하신 것이 인터넷 같은데서 반복해서 인용 소개되다 보니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큰 문제 없고요(풀러측 조직신학 교수님들이 3년간 연구한 결론), 오히려 삼위일체론에 대해 좀 더 깊이와 균형을 갖춘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지방)교회측이.... 

  - 죄송하지만 그런 말이 제겐 조금 도전적으로 들리는데요, 어떤 점이 (지방)교회측이 깊이 있고 균형있게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다는 말인지요? 근거를 제시하실 수 있나요? 

그럼요. 근거없이 말하면 거짓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삼위일체론은 신학 대학원을 나온 분들도 설명이 쉽지 않은 주제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고 핵심만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 삼위일체론 (또는 삼일 하나님)을 깊이 있고 균형있게 이해하려면 다음 요점들을 다 포함해야 합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인격들, 한 동일 본질을 가지신다. 2) 삼위는 각각 하나님이시고, 영원하시고, 동시에 존재하신다. 3) 삼위는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시지는 않는다. 4) 삼위는 상호내재하신다(이것을 전문 신학용어로는 '페리코레시스' 라고도 함) 5) 삼위일체는 본질적인 삼위일체 방면과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

-그 쪽에서는 기성교회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삼신론' 또는 '삼신론적인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고 들었는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요? 

 아, 예. 그것은 앞서 말한 그 목사님이 '지상사역시의 예수님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안 계신다' '하나님은 하나의 영이 아니라 세 영들이다.' 라는 주장하시는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잘못 말하면 꼬투리 잡히기 쉬워서 단정적인 표현은 가급적이면 조심하고 성경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부분만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주장은 성경 본문에 의해 반박 될 여지가 많은 주장이예요. 예를 들면,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니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요14:11) 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위 주장은 이런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을 '세 영들'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장로교 신학자분들도 다수 공감하시는 것같습니다. 한 마디로 삼신론은 '세 하나님들을 믿는다'는 의심을 받게 하는 주장들입니다. 마치 <사람이라는 동일본질을 가진 갑, 을, 병처럼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식>이지요. 이것도 <세 인격, 한 본질>이라는 조건은 충족시키거든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삼위가 구별은 되나 분리는 안 된다>는 조건을 어긴 이해입니다. 한국 교계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권위자로 인정하는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사람이 한 인류에 속하면서 세 개인으로 나눌 수 있는 것과 같은 식으로 셋으로 나눌 수 없다"(위책, 269쪽).


-글쎄요. 저는 신학을 안해서 어떤 신학자가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오늘 귀한 교제 감사합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서로 복잡해 지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예. 그러지요. 사실 저도 이렇게 말은 해도 삼위일체 (삼일 하나님)는 늘 어려운 주제입니다. 특히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언급한 대목들 (마28:19, 고후13:13)은 대부분 우리의 체험과 관련이 깊은데 그런 분을 온전히 체험하여 아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설명드리는 과정에서 특정인이나 특정 대상을 비난하는 것처럼 혹시 비쳐졌기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저 사실에 근거한 설명을 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언급하게 된 것 뿐입니다. 다시 한번 이점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