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이디오피아 내시가 사막길을 여행 중 빌립의 방문을 받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 53:7-8 을 읽던 중이었는데, 빌립이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라고 물으니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행8:30-31)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 집회에 가서 다른 이의 공급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경우도 그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냥 나는 성경을 매일 읽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때도 많습니다. 성경의 ‘형성사‘를 쓴 박창환님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같이 가르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5쪽).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성경 지식만으로써는 신자의 생활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되, 때로는 "우리를 지도해 주는" 좀 더 노련한 성경교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가까이 없다면 그런 분들이 쓴 책을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2. 어제 오늘 제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를 좀 해 보겠습니다.
필요가 있어서 어제 아침에 몇분 지체들과 함께 시편 45편을 읽었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구절 읽었는데, 예전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왕비가 우리고 두 개의 옷이 갖는 의미가 깊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그런지 그 대목은 눈에 쏙 들어오는데 다른 부분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PDA 에 있는 영어회복역 각주 도움을 받으며 한번 더 읽자 시편 45편의 골격이 딱 잡히는 희한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즉 시편 45편 1-8은 왕(king)에 대하여 9-15는 왕비(Queen)에 대하여, 16-17은 왕의 아들들(Sons)에 대한 언급을 한다는 간략한 문단 나누기 조언이 그런 도움을 준 것입니다.
더구나 왕은 신약 사복음서에서 계시된 왕이신 그리스도를, 왕비는 서신서의 교회를, 왕들은 계시록의 이기는자의 예표라는 설명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시편기자는 1-8절에서 왕을 네 개의 중요 단어로 노래했는데 그것들은 (왕의) 아름다움(2절), 승리(3-5절), 왕국(6-7절), 미덕들(8절)입니다.
3. 위와 같은 기본 이해를 가지고 지체들과 다시 시편 45편을 읽고 1절을 PSRP 했는데 너무나 풍성했습니다.
특히 좀더 공을 들여 읽고 기도하고 외운 구절은 참으로 감칠맛이 났습니다.
"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흐르니, 내가 왕에 관해 노래를 지어 바치겠네.."
오 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 흐르니.. 주여 오늘도 저의 마음이 좋은 것으로 넘쳐 흐르게 하소서!.
주여 저로 왕에 대하여 더 알게 하소서! 당신을 노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읽고 또 기도하면서 시편은 생명의 책 기도의 책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거기다가 또 시편 45편 관련 교회찬송은 또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에도 1절 만을 되풀이해서 읽고 그것으로 기도했습니다.
"왕후는 오빌의 금을 꾸미고 우편에서/내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들있네/
영광스러운 교회가 왕후요 배필이되/모든 성도여 이 모두 우리의 영화로다(782).
이처럼 그동안 주님이 역사적 교회 안에 믿음의 선진들에게 열어 보여주신 모든 풍성들을 마음을 열고 겸손히 받고, 그것에 더하여 매일 성경말씀을 직접 수고함으로 경작할 때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은 부요하며 견고한 믿음 위에 설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 안에는 누구도 독불 장군은 없습니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읽기도 이와 유사합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냥 표면적인 내용이 다가오고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때 이 단계에서는 말씀 자체가 전달하는 것 외에 자신의 관념과 선입관이 덧 칠해져 들어와 본문이 전달하는 내용을 순수하게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을 여러번 천천히 읽다 보면 그 본문의 내용이 말하는 요점이 눈에 들어오고 그것이 의미가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그치지 말고 조금 더 전진된 방식으로 성경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라는 시45:2 말씀 중에서 전반부인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만을 깊이 먹었던 저의 체험을 간략하게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저는 우선 "사람이 낳은 아들가운데 왕은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는 새 번역 성경 본문을 통해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아름다움'을 예표한다는 인식이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낳은 아들 중 한 사람'을 노래한 것임으로 개역 본문보다 그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하! 우리 <주님은 사람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구나...그런데 '아름답다' 라는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선 영어성경이 쓴 단어를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미국 표준역, 킹 제임스 역, 다아비 역, 회복 역이 모두 'beautiful'이 아닌 'fair '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보다 가장 아름답다는 그분의 아름다움은 과연 무엇을 가리킬까 하고 묵상하고 간구하는 가운데 '회복역 관주'를 통해 아가서 5:10-16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도구가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어 더 풍성하게 말씀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케 합니다.
3. 저는 아가서 5장을 펴고 사람인 그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같고, 머리털은 ...눈은...뺨은...입술은...손은...다리는...형상은...입은...
한 단어 한 말씀이 다 주옥같고 풍성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 사랑은 '눈부시게 희고'라는 단어 하나만 제대로 추구하고 누려도 너무나 풍성합니다. '희고 붉다'는 말은 그분이 순수하시고 생명과 능력이 충만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천만인 중에 뛰어난 분이신데..
요 12:32에 의하면 주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요12:32에 가면 또 이 구절을 깊이 누릴 수 있는 풍성한 각주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가서 5장에서 그분의 아름다움에 관한 각 방면을 그것도 신구약을 넘나 들며 깊이 추구하고 누리려면 하루라도 부족할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저는 <왕이신 그분의 아름다움> 즉 'fair' 라는 한 단어를 파고 들어 누리는 법을 말씀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4. 저는 예전에 에베소서를 읽다가 사도 바울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이라는 말을 쓴 것을 보고...글쎄 그리스도가 풍성하신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측량할 수 없는' 이라는 말 씩이나... 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왜냐하면
제가 그 당시 아는 그리스도는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은 저의 성경을 읽고 추구하는 방법과 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충대충, 자기 취향따라, 임의로 단정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하고..마치 칡뿌리를 입에 넣고 씹긴 씹는데...쓴맛이 날 때쯤 다 먹었다고 퉤~ 하고 뱉어 버리고 또 다른 부분을 찢어 입어 넣고 씹고..버리고 했을 뿐 참된 칡맛을 느낄 때
까지 씹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칡뿌리 맛에 대한 저의 기억은 그저 '쓴 맛' 뿐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진리를 추구할 때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듯 하지 말라는 권면의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아침에 아래 베드로전서 1장 10-12절 말씀을 먹으면서, “은혜”라는 단어가 더 새롭게 제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지 않습니다”(갈2:21).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5:4)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조금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거나, 거기에서 떨어지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얻을 은혜에 대하여 예언한 신언자들이 이 구원에 관하여 부지런히 찾고 살펴보았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의 영광을 미리 증언하신 것이 어느 때 어떠한 시기를 가리키는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신언자들은 자신들이 전파한 이러한 것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이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
천사들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자세히 보기를 갈망합니다.”
위 말씀에는 네 부류가 등장합니다. 즉 구약의 신언자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신약 사도들, 천사들, 그리고 은혜 혹은 구원이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우리 신약의 믿는 이들입니다.
또한 구약의 신언자들이 “부지런히 찾고 살펴본 것”, 신약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 천사들도 자세히 보기를 갈망했던 “이러한 것들”은 다 같은 내용입니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거쳐 신약의 믿는 이인 우리에게 도달한 ”여러분이 얻을 은혜” 곧 “이 구원”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통과해야 했고, 천사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신언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했는지를 묵상해 볼 때, 우리가 소위 <은혜의 시대>에 살면서 매일 매일 족한 은혜를 누리고 있음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위 본문은 은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반드시 거쳐야 할 메시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에 관하여, 먼저 구약의 신언자들이 예언했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가 장차 고난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22편 1절, 6-8,절 12-18절, 이사야 53장 2-10절, 12절, 다니엘서 9장 26절, 스가랴 12장 10절, 13장 6-7절 등에서 묘사되어 있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에 대해서는 시편 16편8-10절, 22편 21-22절, 118편 22-24절, 110편 1, 4절, 118편 26절, 스가랴 14장4-5절, 시편24편 7-10절, 72편 8-11절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신언자들은 위와 같은 내용을 자신들의 입으로 예언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언제 일어날지, 또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것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신약의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계시를 얻었을 뿐”입니다(벧전1:12).
그런데 이것은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었다 제삼 일에 살아나게 된다는 것”(마16:21)을 주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너무나 엉뚱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며 주님을 책망했고, 세베대의 아내는 곧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께 자신의 두 아들의 출세를 청탁했고, 다른 열 제자는 그런 두 형제에게 분개했습니다.
한편 우리에게 은혜로 오시기까지 거치셔야만 했던 이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문제는 부활 후에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잠시 더 머무시던 때에 아래와 같이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심으로 조금 더 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에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여러분에게 말한 것, 곧 모세의 율법과 신언서와 시편에 나에 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생각을 열어 주시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 일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모든 일의 증인들입니다(눅24:44-48).
그 결과 신약의 초기 증인들이었던 사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으로 삼았습니다. 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고, 그 실재를 체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분의 죽음의 효능과 부활의 능력이 은혜로 우리에게 오신 부활하신 주 예수님, 즉 생명 주는 영 안에 녹아 있음을 참으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또한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신 주 예수님을 우리 존재 안으로 영접하는 것이요, 완전한 구원은 이 은혜가 우리의 영으로부터 혼으로 또 몸으로까지 적셔지고 확대되는 것임을 알기까지는 제게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오, 구약의 신언자들은 물론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몸을 내밀고 목을 길게 빼고” “자세히 보기를 갈망”한 그 실재를 우리는 지금 직접 체험하고 누리고 있다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지금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벧전1:5).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매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다만 이 은혜를 얻고 누리는 것뿐입니다. 그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 되신 그분을 버리는 것이요,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입니다(렘2:13)!
묵상이 이 대목에 이를 때 제 안에 다음과 같은 찬송가 가사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은혜에 대한 참된 정의는/ 아들 안에 주신 하나님 자신/ 은혜는 어떤 사물 아니요/ 내 분깃 되신 하나님 자신(376) 주님과 함께 죽고 사니/ 내가 할 일이 무엇이랴/ 허공을 치듯 분투 않고/ 새 생명 좇아 행함으로/ 주님께 영광(364).
오 주 예수님,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리스도 당신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셨던 그 은혜”(딤후1:9)!
어제는 그 동안 사도행전을 쭈욱 읽어 온 터라 19장을 그것도 '소란' 이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을 읽게 되었습니다.
은으로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팔아서 먹고 사는 지방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 라고 말함으로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며..." 그 도시를 온통 소란스럽게" 하는 전후 사정을 적은 대목입니다.
우리는 19장 끝부분인 "이렇게 말하고, 그는 그 집회를 해산시켰다" 라는 구절까지 읽었지만 처음엔 마땅히 기도에 도움이 될만한 요절이 잡혀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란의 극치를 이룬 대목들 중 한 곳인 32절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외쳐대니,모인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으며, 대부분은 자기들이 무엇때문에 모였는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위 구절을 먹을 때 여기서 무슨 빛을 얻겠나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체들과 함께 반복해서 먹을 때 조금씩 만져지는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사람들은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하며 외쳐 대지만 선악지식이나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경우 많은 때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고, 모임의 근본 목적을 망각할 때가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믿는 이들 간에도 부부 간의 대화에서, 봉사 집회로 모일 때, 심지어 기도하러 모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명의 흐름을 벗어날 때 그 모든 주장들 말들은 다 무엇인가...한참 무엇인가를 고집하며 말하다 보면 깊은속에서 너(너희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음성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입으로는 한 마디 안 해도 생각 속에서 '외쳐대는' 경우도 있고 그 현장에 안 가더라도 그 모임에서 결정된 소식을 듣고 이러니 저러니 '외쳐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외침들은...그것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기여하지 않는 것이라면...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고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면...듣는 사람을 어둠에서 돌이켜 빛가운데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면...
군중심리에 이끌려 몰려나와 이렇게 저렇게 외쳐대나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고 모르는 저 군중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빛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먹되, 그 안에서 생명과 빛(요1:4)과 씻는 물(엡5:26)과 젖(벧전2:2)을 얻기까지 계속 그 말씀 안에 머문다면...내용이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생명이 자라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먹고 그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이 제일 손 쉬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