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범주에서는...어떻게든 자꾸 노출되고 대중에게 각인되어야 여러 가지 기회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눈 도장'이라는 말도 생겨 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든 '튀어야 ' 살아 남는다 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인 교회의 범주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교회라고는 하나 세상의 원리가 지배하는 그런 영역은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자 그분 자신의 충만인 그 영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때 앞서서 봉사를 하던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건 지금은 그렇지 못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 무리의 동료들이 비슷한 시기에 교회생활을 시작했는데...지금은 자기 외에 대부분은 어떤 위치에 도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소외 되었거나, 자신이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예전에는 인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뒤로 밀려나서 아무도 관심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 때...그런 외적인 상황이 자신의 내면의 영적 실재를 악화시킬까요...
비록 인간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참기 어려운 기간일 수 있으나 영적인 시각에서는 이런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저는 며칠 전에 성경을 읽다가 감옥에 갇힌 세 사례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간 후 결례의식을 행하다 일어난 소동 이후 전개되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숨막히는 긴장과 사건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오고, 공회가 열리고, 바울을 죽이려는 결사대가 생기고, 밤 9시에 병력이 바울을 호위하여 약 60킬로(150리)를 이동시키고, 유대인들이 변호사를 대동하여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고, 총독이 말씀을 듣고자 하니 바울은 의와 심판을 강론하고
이렇게 긴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다가 갑자기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울에게 돈을 받을까 하여, 더 자주 그를 불러내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해가 지난 후에 보르기오 베스도가..."(행24:26-27).
위 구절에서 짧게 언급된 '두 해가 지난 후' 라는 부분이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신약경륜을 수행하던 바울사도에게 2년 동안의 감옥 생활은 낭비요 큰 제약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복역 성경은 27절의 각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두 해 동안 사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사도는 이 땅에서의 주님이 움직임을 위하여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그가 로마에서 상소하는 동안에 썼던 그의 서신들, 즉 신성한 계시에 있어서 가장 비밀하고 깊고 풍성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서신들이 역대로 교회에 가져다 준 공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한 동역자 형제님이 주님을 오랫동안 전 시간으로 섬기는 비결에 대해서 말씀을 공급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리가 본 이상이 객관적인 현실을 통해 시험받을 때 ...를 잘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두 종류의 꿈을 꾼 후, 그가 직면한 상황 특히 감옥에 갇힌 가운데서도 요셉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는 모습...
특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창40:8)의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이와 과련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다스리지 못하면 나와서도 어렵다는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그 다음 요점은 감추인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고...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라는 말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바울의 2년 감옥 생활, 요셉의 감옥 생활,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20년 감옥생활은...하나로 엮어져 제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회생활은 영광의 때만 있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지체들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잊혀질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따로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기회가 아닌 땅에 묻혀 썩어 자신의 생명의 성숙과 다른 지체들의 성장을 위한 거름이 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마지막 때까지 “두 남자가 밭에 있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다가” 데려감을 당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밭을 갈고, 맷돌질하는 등 여전히 주어진 생업에 충실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위 본문을 묵상하면서 깊이 다가온 말씀은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주님의 오심을 두고 우리에게 명령문 형태로 요구하는 한 가지는,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앞으로 어떤 환경이 닥쳐오든 “그분 안에 거함”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느 때 우리 앞에 나타나셔도 여전히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영, 즉 연합된 영 안에서 늘 그분 안에 거합니다(고전 6:17).
또한, 이 연합된 영이 우리의 혼을 통과하여 우리의 삶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의가 표현된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보고 그가 거듭난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요일 2:29).
그러나 우리 안의 기름 바름의 가르침(요구)을 거절하고, 대신에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과 자신의 감정대로 살아갈 때, 주님과 우리의 혼 사이에는 일종의 긴장과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제게는 위 ‘그분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가능하면 이러한 불일치를 만들지 말며, 부득이하게 그런 상황이 생겼다면 빨리 주님께 돌이켜 죄들을 자백함으로써 그분과의 교통을 회복하고 또 계속 유지하라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3) 그분 안에 거하지 못한 채 그분이 오시면 어떻게 되나요?
추구하면서 바로 이 부분이 본문에서 가장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개역 성경은 언뜻 읽으면, 주님 재림 때에 당연히 담대함과 부끄럽지 않음을 얻을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회복역은 해당 부분을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번역해서, 본문에서의 부끄러움(혹은 수치 당함)이 재림하신 주님(의 임재)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임을 더 선명히 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 ‘아포’를 일부 번역처럼 ‘before’(앞에)가 아니라 ‘from (Him)’(로부터) 혹은 ‘away from (Him)’(로부터 멀리)라는 원래의 뜻을 살려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몰래 어떤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갑자기 불이 켜지자, 스스로 빛을 피해 다른 곳으로 숨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지금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능하면 늦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든 그 날은 올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재림이 어떤 이들에게는 아래 말씀처럼 준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서 떠나가십시오(마 7:23).
-그를 엄하게 처벌하고 위선자들이 받을 벌을 내릴 것이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24:51). (이것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과 그분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임재에서 끊어져, 신실한 노예들이 누리게 될 왕국의 출현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각주 1).
-그러자 왕이 종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22:13).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은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기는 생명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천년왕국 동안 왕국의 누림에 참여할 자격을 얻지 못하고 시대적으로 다룸을 받는 것이다.-각주 2, 오는 왕국 시대에 바깥 어둠 속에 던져지는 것은 천년왕국 후에 영원토록 불 못에 던져지는 것과 다르다.
어떤 분들은 위와 같은 말씀을 불신자를 가리킨다고 오해하나, 전후 문맥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믿는 이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다른 부류에게 돌려서 억지 평안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타조가 다급히 쫓기다가 모래 속에 자기 머리를 파묻고 상황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읽기 진도를 따라 아침에 아래와 같은 요한계시록 2장 1절 말씀을 읽고 또 먹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전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으시고 일곱 금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임으로, 성경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내쉬신 호흡을 우리 존재 안으로 들이마시는 방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먼저 해당 본문을 천천히 여러 번 읽습니다.
그리고 그 본문 중에서 마음에 와 닿는 부분으로 이렇게 주님께 기도합니다.
‘오 주 예수님, 여전히 말씀하심을 감사합니다. 저로 들을 귀가 있게 하소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일곱별을 붙잡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오 주님, 일곱별이 무엇인지 제게 더 계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 실재를 경험하고 또 누리게 하소서’.
위와 같이 기도할 때, 갑자기 빛이 임하여 말씀이 깨달아지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예를 들어 ‘일곱 별’이라는 키 워드가 마음 안에 계속 남아 있어서 온종일 그 말씀으로 기도를 이어가기도 하고, 영적 서적 등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으면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번 주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제 안에 일곱별에 관해 남게 된 한 가지는, 지금은 영적으로 밤이고, 개 교회마다 존재 자체가 신성한 빛으로 적셔진 사람이 필요하며, 그들이 교회의 실질적인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열쇠
일반적으로 말해서 요한계시록은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읽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거나, 읽더라도 자기 방식으로 엉뚱하게 이해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결과 본문에서의 원래 의미와는 동떨어진 해석과 설교들이 인터넷상에 떠돌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이 기회에 지금까지 제가 도움받은, 계시록을 바로 이해하는 두 가지 원칙을 함께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첫째,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계 1:1). 따라서 이 책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하심이 핵심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한 내용을 ‘표징들’ 즉 ‘영적인 해석이 필요한 상징들’을 통해 서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읽을 때 666이나 대환란 이런 자극적인 단어들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묘사된 부분에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사도 요한은 계시록 끝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이것들”(계시록 내용)을 증언하게 한 것은 바로 “교회들을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교회들은 그분의 몸이 각지에 나타난 ‘금등잔대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사도 요한이 영 안에서 보았던 네 가지 이상들인 교회들(1-3장), 세상의 운명(4-16장), 큰 바빌론(17-20장), 새 예루살렘(21-22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계 1:10). 즉 세상은 큰 바빌론으로 발전하다가 훗날 한순간에 멸망할 것이나, 주님의 몸의 실제적인 표현인 교회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되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 계시록의 핵심 내용입니다.
일곱별
그렇다면 계시록에서 네 번 언급된 일곱별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선 성경은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전달자’(사자)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계시록이 말하는 ‘전달자’는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가 해석되어야 합니다. 항간에는 일곱별인 ‘교회의 전달자’가 첫째) 개 교회 수호천사들이다, 둘째) 요한에게 편지를 받아오도록 파송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급사(急使)들이다, 셋째) 지역 교회 감독들 혹은 장로회이다, 넷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도록 자기 귀를 열어 놓은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덧붙여 아래 해석은 ‘일곱별’이 개 교회의 공식적인 인도자인 장로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달자(사자)들은 교회들 안에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증거를 짊어질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별들과 같이 하늘에 속한 본성을 지녀야 하며, 또 하늘에 속한 위치가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장로들은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관리하는 인도자들이었다.
장로 직분은 다소 공식적인 것인데, 이 책이 기록되었을 때에는 교회의 타락 때문에 교회들 안에 그러한 직분이 변질되었다.
이 책에서 주님은 영적인 실재에다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장로들보다도 교회들의 전달자를 강조한다.
일곱 별이 되는 길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계시록에서 언급된 “등잔대와 별은 모두 밤에 빛을 내기 위한 것이다.
한 지방에 있는 교회를 나타내는 등잔대는 집합적인 단위이지만,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전달자를 상징하는 별은 개별적인 실체이다. 교회 타락의 어두운 밤에는 집합적인 단위들인 교회들과 개별적인 실체인 전달자들이 모두 빛을 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지상 교회들의 교회답지 못한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본질적으로 무엇이 문제이며 어디서부터 해결점을 찾을 것인가?
위 ‘(일곱) 별’과 ‘(일곱) 금등잔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낸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주님은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들”에게 “큰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후에는 세상의 빛으로서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신약 사도였던 바울도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 돌아가게”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믿기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영접한 후에, 비로소 빛의 자녀요 심지어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빛이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빛 안에서 행하며, 빛의 실재를 더 얻고,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일곱별이 되는 길이라고 묵상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모 대기업에 갓 입사한 그 무렵, 그 당시 미혼 자매들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저의 의도와 무관하게 결혼 이야기가 거론되었습니다.
마침 지방으로 장가를 가는 한 형제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미혼 청년들이 전세 버스 한 대를 빌렸습니다.
주님의 주권 가운데 약간 관심이 있던 한 자매와 함께 앉게 되었고, 결혼식장 가는 차 안 인지라 자연스럽게 결혼 관련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몇 마디를 주고받지도 않은 어느 순간, ‘아, 이 자매는 나하고는 안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성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그 자매의 기질이 동생 셋에 시골 출신 부모를 가진 장남인 제 처지에 조금 부담스러웠습니다.
쉽게 말해, 이 자매와 결혼하면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취향의 자매를 선호하는 형제도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성경 읽기 진도를 따라 아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결혼생활에서 아내와 남편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주님 앞에서 되새겨 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 여러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말씀에 불순종하는 남편들일지라도, 그들은 말씀이 아닌 아내의 품행을 통해서 얻어질 것입니다.
... 온유하고 정숙한 영의 썩지 않을 장식으로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단장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값진 것입니다(벧전3:1, 4).
예전에 한 동역자 형제님이 결혼식에서 이 대목으로 권면의 말을 하면서, 결혼 생활에 관한 총 일곱 구절 즉 벧전3:1-7 중 여섯 구절이 아내에게 한 말이고, 남편에게는 단 한 구절만 언급했음을 환기해 준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독교계 안에도 ‘여성 해방’ 내지는 ‘남녀평등’ 사상이 만연한 요즘,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의 풍조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위 말씀들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의 본성과 위치를 고려한 이러한 권면을 통하여 현실이 제 위치를 찾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위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아내는 더 약한, 여성의 그릇”이니 “지식에 따라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한다” (7절)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지식을 따라’는 “이지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혹은 “여성의 약한 면을 인식”하면서 아내와 함께 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아내를 향하여 ‘나는 머리이고 남편이니, 무조건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태도는 성경적으로나 체험적으로나 통하지 않습니다.
둘째, 적지 않은 아내들의 논리는, 성경이 아내들에게 복종하라고 했지만, ‘남편이 먼저 사랑하면’, 혹은 ‘남편이 남편답게 행동하면’ 나도 남편에게 복종하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 1절의 ‘마찬가지로’라는 말씀과 충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집 하인 여러분, 여러분의 주인에게 모든 일에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뿐 아니라,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2:18)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즉 착하고 날 사랑하는 남편뿐 아니라 ‘못된 남편’에게도 복종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내들이 ‘못된 남편’에게도 복종할 때, 남편들은 “여러분의 순결한 품행을 눈으로 지켜보다가”(2절), “말씀이 아니라 아내들의 품행을 통해 얻어질 것”입니다(1절).
결혼 초기에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소위 기 싸움이 있을 수 있고, 남편이 아내에게 쥐여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세상 심지어 교회 생활 하는 가정에서도 관찰될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런 가정에는 영적인 축복은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조정기를 거친 후에는 위 베드로의 권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는 결단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아내 된 쪽에서 남편을 향하여 이러한 태도 변화를 갖지 못하면, 아래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은 공허한 교리이거나 걸리적거리는 규율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사도 베드로는 아내들이 “마음에 숨겨진 사람” 즉 “온유하고 정숙한 영”을 단장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속 존재를 ‘온유’하고 ‘정숙’하게 되도록 다듬으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말솜씨로 남편을 이겨 먹거나 자기주장이 강한 아내, 심지어 남편에게 화를 내거나 말다툼을 서슴지 않는 아내의 경우는 위 ‘온유’ 혹은 ‘정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틀린 것으로 억지를 부리는 남편에게 함께 틀려 주거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순복의 영으로 지혜롭게 조언을 하는 아내가 위 말씀에 가까울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고리타분한 훈계를 하고 있느냐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 생각은 충분히 거역적이며 세상의 하락에 영향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거룩한 여인들도 이렇게 자신을 단장하고 자기 남편에게 복종했다”(5절), “선을 행하고 어떤 무서운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사라의 딸”이라고 말씀합니다(6절).
돌이켜 보면,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최소한 두 번 그러한 호칭에 걸맞은 태도로 살았습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갔을 때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아내인 사래에게 누이라고 거짓말하게 시킨 것입니다. 이때 사래는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감을 당해도 말없이 순종했지만, 여호와께서 급히 개입하셔서 파라오의 집에 역병을 내리심으로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창12:10-20). 그 후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관계에서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때도 사라는 복종했고,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 그가 남의 아내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아슬아슬한 상황이 종결되었습니다(창20:2-8). 요즘 말로 하자면, 이런 못된 남편 아브라함이 행한 것을 생각하면 사라는 이혼을 했어도 열 번은 더 해야 했지만, 그 둘이 이혼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한번은 제가 있는 교회에 두 분의 동역자 부부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만찬 집회 후에 처음 오신 분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중 한 자매님이 ‘아무개 형제 아내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한 형제님이 웃으면서, ’자매님 성함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그 자매님은 거듭 ‘아무개 형제 아내입니다’라고 하더니, 웃으면서 ‘ 00자매입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저는 이때 80세가 다 되어가는 백인 자매님이 여전히 머리인 남편 아래의 위치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나 우리 중에나 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글을 쓰면서 미혼 자매님들을 포함한 아내 된 자매님들이 ‘마음에 숨겨진 사람을 단장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가정들에게 큰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소망을 품어 봅니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책망받은 한 가지인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님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그냥 사랑도 아니고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오 주님, 저의 우둔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당신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그 마음을 만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계 2:4).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련 성경 구절과 참고 자료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후서 : 물론 성경에 에베소후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신약 사도들로부터 두 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쓴 에베소서이고(엡 1:1),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계시록 2장 1-7절입니다(계 2: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일곱 서신중 첫 번째 서신은 ‘에베소후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J. N. 다비(Darby)는 “신약 안에 있는 ‘후서’는 모두 교회의 황폐함을 말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두 6장으로 된 에베소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졌으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어 가고 있었고, 사랑 안에서 행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그들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 …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면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주님께 강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통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모든 일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훗날 가장 근본적인 이 항목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부와 신랑에게 사랑의 무게감 :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은 한 가지’만 책망받고 그 외의 여러 가지에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으니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가 또한 주님의 사랑스러운 신부임을 생각한다면, 둘 사이의 사랑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하고, 사랑의 느낌이 있어야 하며, 그분에 대한 신혼 때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헌신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주여 저는 제가 처음 당신을 사랑한 것같이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과 저는 신혼 때와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말한 신혼 때의 사랑이다.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여 그들과 주님 사이에 그 신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당신은 그분께 “주여,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는 당신이 기뻐하는 바를 알기 원합니다. 당신의 명령이 아닌 곧 당신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주님의 종은 주님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만약 아가서에서 나오는 술람미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된 구절에 대한 추가적인 묵상 : 주님 앞에서 이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부분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11절은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을 잡는 섬김을 말하고, 15-16절은 나 곧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데, 후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은 위에서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 에스겔 44장에서의 두 종류의 섬김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노예가 밭에서 돌아와서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너는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시중을 들어라”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신약에서의 사례와 유사합니다. 복음전파와 목양은 귀한 것이지만,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또 그런 섬김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어야 합니다.
3)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행 13:1-2). 이 말씀 역시 주님을 위하여(for)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섬김(to)을 말씀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러한 친밀한 섬김의 결과임을 알게 합니다.
요약하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한 어떤 것이 이보다 우선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자백하고,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생명나무로 먹음으로써, 그와 연합되는 “처음 행위(첫째가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어떤 영적인 봉사가 주님 자신보다 더 우리 존재를 사로잡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가 참된 위기요 즉시 회개해야 할 순간임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불의한 일로 주님께 책망받은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상태 때문에 책망받은 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오 주님, 당신을 위한 어떤 봉사가 주님 자신을 대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더 깊이 연합하는 일이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 사역했던 바울과 바나바와는 쉽게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과 베드로는 그동안 전혀 별개의 사도들로만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아래 말씀을 여러 번 읽고 관련 구절들을 찾아본 결과, 두 사도 사이에 접촉점이 의외로 많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 2장의 책망 사건>을 알고 있었기에, 베드로가 바울을 가리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쓴 부분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 또한 자기가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들에 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어떤 것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무식하고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부분도 잘못 풀이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벧후 3:15-16).
제 기억으로는 자기가 쓴 서신에서 다른 사도의 서신을 거론한 것은 위 경우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자기보다 뒤에 사역을 시작했고, 심지어 책망하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던 바울을 베드로가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른 것과 바울이 쓴 어떤 내용은 자기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백한 것은 같은 사도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관련 각주도 그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각주2) 베드로가 이렇게 추천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신약의 믿음에 대해서 바울에게 면전에서 책망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갈 2:11-21).
이것은 베드로가, 요한과 바울과 자기 자신과 같은 초기의 사도들이 비록 일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용어와 말하는 방식과 어떤 일에 대한 관점과 가르침을 제시하는 법은 서로 달랐을지라도, 그들이 동일하고 유일한 사역, 곧 신약의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담대하게 인정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참고로 베드로는 총 여덟 장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두 서신에서, 창세 전 영원 과거부터(벧전 1:2, 20) 영원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까지(벧후 3:13)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각각 계시와 지혜를 받았지만, ‘새 하늘들과 새 땅’ 만 제외하면 바울 역시 베드로와 같은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위에서 바울을 거론한 것은 특별히 그가 모든 믿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적인 징계와 심판을 언급한 대목에서였습니다.
바울도 그 점을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문득 그렇다면 바울과 베드로는 사역하는 동안에 언제 어떤 식의 만남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즉 바울이 회심 후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후 삼 년 뒤에 내가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 동안 머물렀으나(갈 1:18)(여기서 <방문하다> (‘히스토레오’)는 “헬라어로 ‘친분을 맺기 위하여 방문하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관련 각주). ”혈육과 의논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다른 지체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도 그릇된 것이다. 계시를 받은 후 합당한 시간에, 우리는 앞서 주님을 안 주의 몸의 다른 지체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 이런 종류의 교통은 필요한 것이다”.
-(십사 년 후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기둥같이 여겨지는 야보고와 게바(베드로)와 요한도 나에게 주신 은혜를 알고서, 나와 바나바에게 교통의 악수를 하였습니다(갈 2:9).
-그러나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나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면전에서 그를 책망하였습니다(갈 2:11). (“신약에서 최소한 두 번 베드로가 소극적인 길로 앞장을 섰고 다른 이들이 그를 따랐던 것을 본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는 고기잡이하러 가는 데 앞장을 섰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2장에서 베드로는 위선을 행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따랐다”(LS, #6)).
-여러분이 각각 나는 바울에게, … 나는 게바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1:1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생명이나 …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이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십니다(고전 3:22-23).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게바처럼, 아내인 자매를 동반하고 다닐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단 말입니까(고전 9:5)? 성경대로 제삼 일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 마지막으로는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전 15:4-8).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하였다. … 그때 사도들과 장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그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선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다(행 15:6-7, 22).
이런 추구를 통해,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가 가르친 진리 내용은 물론이고 인간적으로도 서로를 알 기회들이 여러 번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고’ ‘갈라 선’(행 15:39)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사도이고 분량 있는 사역자라고 해도 다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름대로 업적이 생기고 지위를 얻게 되고, 심지어 따르는 사람들이 생긴 후에는(고전 1:12)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일이 초신자 때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위 베드로후서를 쓸 때의 베드로는 바울 앞에서 위선 된 모습을 보였던 때보다는 더 변화되고 넓어진 사람이 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들을 위한 사도 직분”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 직분”을 받아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유일한 신약의 사역을 가르쳤고, 한 몸 안에서 한 교통을 추구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엘 그레코가 그린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렘브란트 반 레인이 그린 ‘논쟁하는 두 노인’이라는 그림 속에서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둘은 모두 네로 황제 시절, 비슷한 시기에 순교했습니다. 전언에 의하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는 방식으로 처형되었고, 바울 사도는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다른 듯하면서 같은 베드로와 바울의 삶이, 한 몸 안에 있는 우리 많은 지체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각자의 타고난 기질은 다르지만, 신약의 사역에 신실하고, 한 몸을 존중하며, 자신을 비우고, 형제 사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베드로와 바울을 통해서 또 말씀하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이 아침에 “여러분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여러분 각 사람은 그 지체들입니다.”라는 말씀을 되새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사진 발췌 1. EL GRECO 베드로와 바울(1587-92) oil on canvas, The Hermitage at St. Petersburg 에르미타주 박물관 http://www.andong-ch.org/webgallery/42833 2. 1628|패널에 유채물감|72×60㎝|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https://www.jejudo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