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8. 13:08

찬송가 533 - 교회의 기능 - shulammite son


혹시 내가 늦어지게 되더라도 그대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기반 교회는 그리스도와 교회 이 진리의 실재를 지탱하네 모두가 인정하듯이 경건의 비밀은 위대합니다 그분은 육체로 나타나셨고 그 영 안에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모든 민족 가운데 전파되셨네 세상이 그분을 믿었으며 그분은 영광 안으로 들려 올라가셨네

디모데전서 3장 15절 - 16절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8. 05:00

말씀과각주 318 - 로마서 8장 14절 - 지방교회들 말씀



로마서8장14 :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 영의 인도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생명의 영의 법, 그 영, 생명의 영으로 이루어진다. 이 절에서는 그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보다 우리가 그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그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우리가 먼저 주도적으로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6. 1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5) - 생명을 영접해요?


-보통은 처음에 기독교인이 된 것을 말할 때 '예수님을 믿었다' 거나 '교회 나가기 시작했다'라고 하는데, 지방 교회측 분들은 '생명을 영접했다' 라고 말하기도 하나요?  


생명을 영접했다는 말은 저희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은 아닙니다. 보통은 '구원받았다' 또는 '거듭났다' 라는 말을 쓰지요. 어떤 경우는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주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믿음 생활의 시작임을 잘 알고 있지요. 

  - 왜 요 3장 16절에도 예수님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영생'은 멸망의 반대말이고, 죽지 않고 천국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영생'(eternal life)을 죽지 않고 오래사는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데 어떤 분은 그런 개념이라면 심지어 지옥간 사람도 거기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더군요. 물론 고통이지요. 예수 믿으면 물론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그러나 위 문맥에서 <영생>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영원한 생명이신 분, 즉 주 예수님 자신을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는 믿는 우리 안에 실제로 들어 오신다는 것인가요? 

 예. 이해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0절은 (생명이신)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고 하고, 또한 34절은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고 말합니다. 둘 다 사실이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 하지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보혜사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목사님들이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무튼, 주 예수님이 직접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은 조금은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지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교리는 주로 장로교단 쪽 분들이 하시는 주장인데, 그 근거로 요일 3:24를 제시하더군요. 사실 이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조금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분들이 성경 본문을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아래 출처에 가셔서 정리된 글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http://blog.chch.kr/7777/32684.html )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 자체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고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심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골3:4는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했고, 고후13:5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 했고, 골1:27은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5:11-12도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주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를 생명이다 라고 소개한 곳도 있지요(요11:25, 14:6).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한 곳에 모아서 이야기를 해 주시니까 또 다른 느낌이 있군요. 그런데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면 어디로 오신다는 말씀인지요? 

 평범하면서도 예리한 질문이십니다. 사실 개혁신학을 하신 분들은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조금은 주저하는 편입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Finitum non sapax infinit)는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인데, 사실 이 문제는 주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 이미 깨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유한한 참 사람으로서 무한한 참 하나님을 그 안에 '담으신' 분이라고 할수 있으니까요(요1:14). 그것은 그렇고, 대개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계신다 라고 하지요.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생명이신 주 예수님은 우리의 거듭난 영 안에 계십니다(요3:6, 고전6:17). 그후 우리의 마음으로까지 점차적으로 그분의 거처를 확대해 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엡3:17). 

  -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신다면 나중에 공중 재림하신다는 말씀은 안 믿으시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장차 재림하실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 아멘입니다. 현재 우리 안에 생명으로 계신 것과 나중에 재림하시는 것을 그리피스 토마스(W.H. Griffith Thomas)라는 저명한 신학자는 자신의 <성령론>에서 미래에 있을 재림 즉 '파루시아'와 구분하여 오늘날 주님의 내주하심을 '현재의 파루시아'로 표현했더군요 

  -'생명'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다보니 앞으로 시간을 내어 제대로 한번 이 주제에 대해서 연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끝으로 지방 교회 측은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낳으신 것이 아니고 양자로 삼아 주신 것이다' 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런 오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간격을 너무 강조하고, 또 '양자의 영'(롬8:15)에서 보듯이 개역 성경이 번역시 '양자'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양자로 번역된 '휘오데시아'(5206)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양자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직접 낳지 않고 법적으로 입양한 자녀를 양자라고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법적인 상속을 받을 만큼 장성한 자녀를 가리킵니다(엡1:5, 갈4:5 참조). '장성한' 이란 말을 잘 새겨야 합니다. 히2:11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함으로 거룩케 하시는 주 예수님과 거룩케 함을 받고 있는 그분의 많은 형제들(롬8:29)이 다 한 근원인 아버지에게서 난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오늘은 너무 많은 것들을 다룬 것같아서 이 주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다루고 싶네요.

  -긴 시간 제 질문에 대해 성의있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대화가 서로 간에 알게 모르게 쌓였던 오해를 해소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다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요.

 맞습니다. 저도 이런 진지한 대화가 매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계속 교제를 이어 갔으면 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6. 05:00

찬송가 533 - I Take Thy Promise - 지방교회들 찬송가
앨범 : Unto Christ the Lord Always - UCLA CD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6. 05:00

생명이만나 325 - 교만은 자아의 다른 표현 - 지방교회들 이만나

교만은 자아의 다른 표현

성경말씀

(약4:6)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자아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할 때, 자신을 마땅히 알아야 할 그 이상으로 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자처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인식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게 보는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모든 교만한 사람들은 다 사람들이 자신을 높게 말해 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 아래 복종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아멘!!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8. 6. 15. 05:48

 

 

모란

 

 

 

모란에 갔다

짐승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살점 말리는 바람 내음 같은 것이 흘러오는

모란에 가서 누웠다

희게 흐르는 물베개를 베고

습지 아래로 연뿌리 숙성하는 소리를 들을 때

벽 너머 눈썹 검은 청년은 알몸으로 목을 매었다

빈 방엔 엎질러진 물잔, 물에 젖은 유서는

백년 나무로 환원되고 있었다

훠이훠이 여기서는 서로가 벽을 뚫고 지나가려한다

서로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온다

어른이 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기도 한다

한낮 같은 세상을 툭 꺼버리지 말고

그냥 들고 나지 그랬니

무덤들 사이에 아이처럼 누워

어른임을 견딜 때,

궁창의 푸른 갈비뼈 틈에서 솟는 악기 소리

먹먹한 귓속에 신성을 쏟아붓는다

슬픔이 밀창을 열고

개다리 소반에 만산홍엽을 내 오는 곳

모란에 가서 잤다

오색등 그늘 밑에서 잤다

내력들이 참 많이 지나가는 곳에서

사람의 아들, 그의 불수의근을 베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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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5. 05:00

찬송가 532 - 고린도전서 결정연구 표어 찬송 - 지방교회들 찬송가

2002년 겨울 훈련 집회 표어

고린도전서 결정-연구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교통 안으로 부르셔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분깃이신 그리스도께 동참하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게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 안에서 생명 주시는 영으로 누리는 것이 교회 안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며,

교회 건축을 위해 생명의 성장을 가져온다.

신약의 본질은 한 영으로 함께 연합된 두 영 - 신성한 영과 사람의 영 - 이다.

사랑은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가장 탁월한 길이며 신언하는 것은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탁월한 은사이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5. 05:00

생명이만나 324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지방교회들 이만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성경말씀

(눅6:38)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줄 것인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여러분의 품에 안겨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되어 주는 그 되로 여러분도 되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형제자매님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도록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부류의 사람에게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데, 이 부류는 기꺼이 남에게 주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아주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여 “후히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실 때 항상 풍족히 주시며 결코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넓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잔은 항상 넘칩니다.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능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당신에게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계산해 가면서 분명히 계산하여 남에게 준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감동하여 당신에게 주실 때에도 분명히 계산하여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5. 05:00

갓멘에세이 86 - 목욕탕은 절대 함께 가지 마라 - 지방교회들 에세이

목욕탕은 절대 함께 가지 마라 

목사님과 성도들은 가깝고도 먼 사이이어야 하는가 봅니다. 

너무 가까우면 목사 알기를 우습게 여기고 같이 놀자고 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친밀감이 없으니 정작 어려울 때는 그냥 각자 실익을 따라 처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자와 양의 사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괴리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경험에 의하면, 함께 축구를 해도 좋고 등산을 함께 가도 좋지만 목욕탕만은 함께 안 가는 것이 좋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성도들과 사이를 적당히 유지할 수 있는 이런 저런 노우 하우가 알음알음 전수되나 봅니다. 

여기서 웬 목사 처신 비법을 거론하나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6. 15. 05:00

 지방교회들의 핵심진리 (4)- 주님이 생명주는 영이시라구요?

-지방 교회들 서적들을 보거나 거기 사람들을 만나 보면 '생명주는 영'이라는 말을 많이 하던데, 성경에 있는 말인가요? 


, 당연히 성경에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5절 하반절에 보면, "마지막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요? 개역성경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가만 있자, 고전 15장이라고 했지요? 45절이고..."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되어 있는데요? 

 우선, 첫 사람 아담은 영어로 'living soul' 이니까 '산 혼' 이 맞구요, '살려주는 영'도 'life- giving Spirit ' 이니까 '생명 주는 영'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회복 역 말고 권위 있는 영어 성경 중에 'life-giving Spirit'이라고 번역한 것이 있는지요?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그대로 직역한 핸드릭슨사의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Bible' (Jay P. Green 번역)도 'a life-giving Spirit' 이라고 되어 있구요(932쪽), 참고로 NIV 도 'life-giving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좋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주는 영'은 한 마디로 누구입니까? 성령님이신가요? 

 생명주는 영은 한 마디로 '부활 후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후 예수님을 성령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삼위는 본체적으로 영원토록 구별되심으로 부활했다고 해서 2격이 3격이 될 수는 없겠지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바울은 '부활 전 예수님'이 '부활 후 예수님'이 되셨다는 말을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의하시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방면에서는 부활 전 이건 후이건 전혀 차이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않으십니다. 
 부활 전 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주로 그분의 사람 방면에서 그렇습니다. 즉 그분의 인성은 부활 후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으로 변형되신 것입니다(고전 15:44, 빌3:21). 
 더 쉽게 말한다면, 부활 후 그분의 인성은 보이다가 갑자기 안 보이는 분(눅24:31), 문이 다 닫혀 있었는데도 불쑥 들어오실 수 있는 분(요20:26)이 되신 것입니다. 

  -그거야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요? 구태여 강조하여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주와 생명으로 영접한 분이 바로 이 부활하신 예수님 즉 생명주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고전 6:17은 '주님과 연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한영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한 주님은 바로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와 연합되신 <부활하신 예수님> 즉 '생명주는 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 2:20에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성령이 내 안에 사신다고 하지 않고)라고 말할 수 있었지요. 

  -성령님이 주 예수님을 '대리'해서 우리 안에 계시니까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배웠는데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 하늘에 남아 있게 하시고 우리 사람 안에는 성령만 계시게 하는 신학구조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저 하늘에서 중보 기도하실 뿐 아니라(롬8:34) 동시에 생명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심(롬8:10, 골3:4, 1:27, 갈2:20)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양면 모두를 믿는 것이 더 균형잡힌 믿음이겠지요. 

  -'그영'과 '생명주는 영' 그리고 '성령'과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우선 요7:39은 그 당시 기준으로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께서 아직 계시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 여기서의 '그영'은 '영원 전부터 계시는 성령님'과는 구별된 개념입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말하는 '그영'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신 시기인 부활을 깃점으로 그후에 존재하셨다는 점에서 고전 15장 45절의 '생명주는 영'과 동의어로 볼수 있습니다. 

  - '그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안 계신 것이라기 보다는 믿는 이들 안에 (저희에게)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닌가요? 

언뜻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의 '저희에게' (영어성경의 givin)는 원문에는 없고 후대에 임의로 써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이탤릭체로 되어 있지요. 
 그러므로 헬라어 원문 그대로 읽으면 'the Spirit was not yet, 이고 그 이유는 'because Jesus was not yet glorified' 입니다. 즉 그영 자체가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시기인 부활 전까지는 안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생명주는 영 즉 아들하나님과 그 안에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게 상호내재 하시는 아버지와 성령님 그리고 아들이 성육신 때 입으셨던 인성까지 영화되어 포함된 그영이 예수님 부활 이후에 비로소 계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고전 15:45 말고 그런 그영을 말하는 구절이 또 있나요? 한 곳만 말해 줄수 있나요? 

계시록 22장 17절입니다. 개역성경은 '성령과 신부'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은 'the Spirit and the bride'입니다. 
우선 여기서 언급된 영은 'the Holy Spirit' 즉 성령이 아니라 the Sprit 즉'그영'입니다. 전후 문맥을 보더라도 그렇고 신부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아도 여기서의 '그영'은 신랑이신 어린양 즉 부활하신 주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영은 다만 주 예수님 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님이 존재론적으로 상호내주 하시는 아들 하나님 그러니까 삼일 하나님 전체이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론적인 삼위일체에서는 어느 한 위격을 말할 때는 다른 두 위격이 늘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세 위격은 구별되나 분리되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지방)교회 측에서는 주님을 성령님이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할 때는 우리도 똑같이 성경을 따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후 3:17은 '주는 영이시니' 라고 말합니다. 명망있는 신학자인 헨리 알포드는 앞의 '주'는 그리스도를, 뒤의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the Lord,' as here spoken of, 'Christ', 'is the Spirit' is identical with the Holy Sprit: not personally nor essentially)(Alford's Greek Testament, 648쪽)

그런데 이것은 본체론적으로 주님이 성령이라는 말이 아니지요. 경륜적인 삼위일체 방면에서 본 기능에 있어서 주님은 성령과 동일시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국내에서는 양태론으로 오해를 했지만, 합동 신학원의 박형용 박사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개핀 교수는 경륜적인 방면 즉 기능에 있어서 위 본문은 주님= 성령을 말한다고 제대로 가르칩니다(차영배, 성령론-구원론 부교재, 49쪽). 


  -대화를 할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예, 그렇지요.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바로 아는 비결은 어떤 신학체계 안에 본문 말씀을 담으려 하지 말고, 그냥 성경 말씀 그대로를 다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전15:45, 요7:39, 고전6:17, 골1:27, 3:4, 요일 5:11-12, 고후3:17 그리고 골 2:9, 요14:10-11, 롬8:34, 10 같은 말씀들이 그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위 본문들을 차분히 묵상하면서 주님께 빛 비춰 주시기를 간구하면 주님이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깊은 진리는 머리로 알기 이전에 주님이 우리 마음을 열어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무튼 질문들에 대해서 성의있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더 교제하기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