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6:40
성경말씀 

(벧전1:16~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여러분이 체류자로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오늘의 만나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이신 거룩한 분은 거룩한 아버지와 거룩한 자녀들이 있는 거룩한 가정을 산출하기 위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거룩한 자녀들인 우리는 거룩한 행실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는 우리의 거룩하지 않음을 처리하기 위해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거룩한 본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내적으로, 생명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외적인 심판으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분의 심판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우리의 일과 처신함에 따라 집행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체류자로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6:35
성경말씀 

( 마9:17) 또한 그 누구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만약 넣게 되면, 가죽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됩니다. 

 오늘의 만나

 
 새 포도주에서 ‘새’의 헬라어 단어는 ‘시간상 새로운’ ‘최근의’ ‘새로 소유한’을 의미합니다. 여기의 새 포도주는 활력으로 가득찬, 감동시켜 사람들을 열광케 하시는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왕이신 구주는 왕국 백성의 누림을 위한 신랑이실 뿐 아니라 그들을 외적으로 입힐 새 옷이신데 그것은 그들에게 결혼식에 참석할 자격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분은 그들을 내적으로 감동시켜 그분을 그들의 신랑으로 누리게 하는 그들의 새 생명이십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것은 열광시키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어떤 종교 안에 넣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자들과 오순절파 사람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형태의 종교적 의식과 형식과 실행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합니다. 왕국 백성은 결코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6:30
성경말씀 

(엡1:5)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뜻의 기쁨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아들의 자격을 얻어 하나님 자신께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께서 미리 우리를 점찍으시는 것은 우리의 운명이 아들의 자격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창조되기도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도록 그분에 의해 거듭나야 합니다. 아들의 자격은 아들의 생명뿐 아니라 아들의 위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점찍으신 사람들에게는 그분의 아들들이 되는 생명이 있고 그분을 유업으로 받을 위치에 있습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안에 넣으신 다음 그분의 본성을 우리와 연합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요 절차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목적 곧 목표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결되어 특별한 형태나 모양 즉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포함하여 전존재를 ‘아들화’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6:25
성경말씀  

(고전3:12~13) 누구든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건축하면, 그날에 각 사람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그 일을 밝혀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불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검증해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라심으로 산출되는 보배로운 재료들인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 안에서 산출되는 나무와 풀과 짚으로 건축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므로 몸의 모든 지체들인 우리는 각 사람이 어떻게 건축하는지 즉 어떤 재료로 건축하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나무와 풀과 짚은 믿는이들의 천연적인 배경, 예를 들면 유대교나 다른 종교들, 철학이나 문학 등에서 나오는 지식과 깨달음과 성취한 일들 그리고 천연적인 생활 방식을 상징합니다. 금과 대조되는 나무는 천연적인 사람의 본성을 상징하고, 은과 대조되는 풀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지 못했고 거듭나지 않은 타락한 사람 곧 육체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보석과 대조되는 짚은 땅에서 나와 성령에 의해 변화되지 않은 일과 생활을 상징합니다. 가치없는 이 모든 재료들은 믿는이들이 그들의 배경에서부터 모은 그들의 천연적인 사람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러한 재료들은 불태워지기에만 적합합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6:10
성경말씀 

( 고전10:3~4) 모두 똑같은 영적인 음식을 먹었고, 모두 똑같은 영적인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영적인 반석에서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의 만나

 
영적인 음식은 ‘만나’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위한 매일의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우리 믿는이들은 모두 영에 속한 양식을 먹어야 하며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인 물은 갈라진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를 가리키며 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 만유를 포함한 음료이신 그영을 예표합니다. 우리가 경주하려면 우리 모두는 동일한 영적 음료를 마셔야 하며 만유를 포함한 영 외에 어떤 것도 마셔서는 안 됩니다. 쳐서 갈라져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위해 생수를 흘러 보낸 반석은 물질적인 반석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것을 영적인 반석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치심을 받고 갈라져 생명의 물을 흘러 보내 그분의 믿는이들의 목마름을 만족시켜 준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영적인 반석이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된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믿는이들을 따라다니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5:45
성경말씀  

(롬7:6)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여 있던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나서, 문자의 낡음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움으로 섬깁니다. 

 오늘의 만나

 
 옛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거듭난 새사람은 이제 옛사람의 율법에서 벗어납니다. 율법은 아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옛사람인 옛남편에게 주어졌고 옛사람인 옛남편은 십자가 위에서 죽었으므로 아내인 새사람도 옛사람의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영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사람의 거듭난 영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새롭고 우리 영에서 나오는 모든 것도 새롭습니다. 우리의 거듭난 영은 새로움의 근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께서 거듭난 영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5:40
성경말씀 

( 요삼:2)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혼이 잘되는 것같이, 모든 일이 잘되고 몸이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만나

 
 사람은 영, 혼, 몸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혼은 몸과 영 사이에서 중재하는 기관입니다. 이 혼에는 자의식이 있어서 사람은 자기의 개성을 갖게 됩니다. 혼은 몸 안에 담겨 있으며 또한 영을 담는 그릇입니다. 믿는이에게는 거듭난 영 안에 그영이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또 믿는이의 영에서부터 퍼져나가 혼을 적시는데 이는 혼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이의 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을 통하여 우리의 혼을 점유하고 다스린 결과 혼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다스리며 사용할 때 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5:30
성경말씀  

(히1:4) 그분은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셨으므로,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셨습니다. (8~9) 그러나 아들에 관해서는 “오, 하나님, 주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 주님의 왕국의 왕권은 공평의 왕권입니다. 주님은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 큰 기쁨의 기름을 주님께 부으시어 주님의 동반자들 위에 두셨습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의 만나

 
 히브리서를 쓴 의도는 히브리인 믿는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교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천사들, 모세, 대제사장 아론, 그리고 구약과 구약의 봉사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첫 번째로 뛰어난 것은 하나님일 뿐 아니라 표현되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그는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모세보다, 아론보다 뛰어나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생명의 새언약이 문자에 속한 옛언약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밝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분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반자들로서 신성한 권익에 참여합니다. 그분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으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분과 함께 이 기름 부음에 참여합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5:25
성경말씀  

(딛3:5)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긍휼에 따라 새로 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만나

 
 ‘의로운 행위’는 의의 요소와 범위 안에서 행한 의로운 행위로서, 의의 참된 행위를 가리킵니다. 심지어 그러한 의의 참된 행위라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의 근거와 조건이 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받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우리는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새로 남의 씻음은 우리의 거듭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새창조의 과정 곧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인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계속됩니다. 그것은 생명을 사용하여 진행하는 일종의 고치는 것, 새사람을 입는 것 그리고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모두 이 놀라운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새로 남의 씻음으로 우리 옛사람의 옛본성에 속한 모든 것이 씻어지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신성한 요소인 새로운 어떤 것이 우리 존재 안으로 분배됩니다. 이 안에서 우리의 옛상태는 완전히 새로운 상태로 나아갔고 옛창조에서 새창조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모두 새창조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 온 일생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출처 : 내마음의 보물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7. 15:20
성경말씀  

(히11:8)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름을 받고서 장차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10)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기초가 있는 성을 간절히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15~16)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계속해서 그리워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더 좋은 곳인 하늘에 속한 고향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아브라함은 첫 번째 히브리인 즉 강을 건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저주받은 우상의 땅인 갈대아를 떠나 큰 강인 페라스 강 즉 유브라데 강을 건너 축복의 좋은 땅인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약속의 땅에서 순례자처럼 심지어 추방당한 사람 즉 망명한 사람처럼 우거하면서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면서 자신의 본향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땅에 속한 편에서 하늘에 속한 편으로 또 다른 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삭과 야곱은 그와 동일한 발자취를 따랐으며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출처 : 내 마음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