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8:10
성경말씀 

 (요1:13) 그들은 혈통에서나 육체의 뜻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오늘의 만나

 
 요한복음 1장 13절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출생이 아니며, 우리에게 어떤 국적을 갖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출생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용어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성한 출생에 대해 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사람의 왕국 안으로의 첫 번째 출생 외에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의 또 다른 출생이 있었음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으로 우리는 신성한 생명과 본성으로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새로 태어나는 문제가 다시 대두됩니다. 헬라어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나거나 위로부터 나는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는 땅의 출생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출생도 있습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3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8:00
성경말씀  

(요1:1) 태초에 말씀께서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1:14) 말씀께서 육체가 되시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니,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게서 온 독생자의 영광이었다 

 오늘의 만나

 
우주의 역사 가운데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창조입니다. 창조 전에는 하나님 자신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시작되었을 때, 하나님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것들을 창조하셨지만 그것들의 외부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위대한 사건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을 때 있었던 성육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존재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로 이끌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하나님이셨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땅 위에 사셨고, 하나님은 더 이상 그분의 피조물 밖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사람 안으로 들어오셨고,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둘 다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사람이십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3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7:50
성경말씀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매사에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확대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의 ‘확대되다’는 확장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자신 안에서 표현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여러분 안에서 확대되신다는 것은 그분이 어떤 제한도 없이 나타난 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나 겸손은 피상적이며,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3장 18절과 19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우주적이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의 차원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당신의 가족은 당신의 모든 미덕들을 금방 바닥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측량할 수 없고 다함이 없는 풍성을 가지신 이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만드시게 해야 합니다. 그분의 풍성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짐으로써 확대됩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7:40
성경말씀 

 (엡3:17)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 

 오늘의 만나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게 하시며’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거처를 마련해 드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거처를 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놀라운 곳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에게 여러분이 없다면 그분의 거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만들기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 작아서 크신 그리스도를 담을 수 없으며, 그분은 멀리 떨어져서 셋째 하늘에 계신다고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여러분 사이에 존재해야 할 친밀한 관계입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7:30
성경말씀  

(행20:32)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건축할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이들 가운데 있는 유업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풍성하게 배설하신 잔치를 신실하게 먹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는 수단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인 방식으로 이 말씀 앞에 나아가 그분께 열어 드릴 때, 그분은 우리의 몸이 거룩하게 되고 휴거되어 그분의 임재 앞에 나아갈 때까지 우리 존재의 각 부분으로 확장되실 것입니다. 먹는 것이 곧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하루 여러 차례 말씀의 식탁에 나아와서 그 풍성한 자양분을 취해 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질그릇에서 보석으로 변화되며 그분의 처소로 건축될 것입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7:25
성경말씀 

 (눅15:23)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오늘의 만나

 
 우리는 능력이나 마술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먹음으로써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살진 송아지’는 공허한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음식으로 우리 안에 취하여 들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는 그림입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을 열고 그분의 말씀을 기도로 읽으므로 그분을 취하여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상을 이루며,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영양 공급을 얻기 위해 말씀을 읽을 때는 한 번에 적은 양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한 입에 삼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루 서너 차례의 소식(小食)이 점진적이고 꾸준한 영적 성장과 변화에 가장 좋습니다. 예수를 먹는 것이 신약의 초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홀히 되어 왔습니다. 말씀을 기도로 읽으므로 예수를 살진 송아지로 먹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7:15
성경말씀 

 (눅15:23下)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오늘의 만나

 
 즐거움은 우리가 살진 송아지를 먹고 즐기는 데서 옵니다. 우리의 구원은 먹음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공급하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우리의 살진 송아지, 우리의 생명의 떡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옷과 반지와 신과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먹은 송아지는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그것은 소화되고 동화되어 우리 존재의 조직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능은 우리를 강화시키고, 능력을 주고, 떠받치고, 지지하고, 안위하고, 만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관적인 구주가 우리에게 바로 그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먹음이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이유입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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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7:10
성경말씀 

 (눅15:23)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거워하자. 

 오늘의 만나

 
 하나님의 구원은 입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먹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의복을 입든지 얼마나 여러 번 씻든지 간에 우리의 내적 존재는 바뀌지 않습니다. ‘살진 송아지’는 입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한 것입니다! 먹는 것은 밖의 어떤 것을 안으로 취하여 들인 후 그것을 소화시킴으로 유기적으로 우리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만일 당신이 진주를 삼킨다면 그것을 먹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이는 당신의 몸이 소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진 송아지는 여러분의 존재 안에 들어간 다음 몸에 동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먹는 것은 유기적으로 그리고 신지대사적으로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변화시킴, 새롭게 함, 거룩하게 함 등의 용어는 이런 변화를 말하며, 이것은 외적인 모양을 개선함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공급하신 양식을 취하여 들임으로 일어납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6:55
성경말씀 

 (눅15:22下)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오늘의 만나

 
 아버지는 또한 노예들에게 아들의 손에 반지를 끼우라고 하십니다(눅15:22). 이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것에 대한 그림입니다(엡1:13, 4:30). 반지는 성령을 가리키며, 우리가 아버지의 소유라는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들의 발에 신기운 신발은 에베소서 6장 15절에서 언급된 신발과는 다릅니다. 에베소서에서의 신발은 전쟁에서 견디고 버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에서의 신발은 행하기 위한 것, 이 땅과의 접촉으로부터 오는 먼지와 오물과 진흙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5. 13. 16:50
성경말씀  

(눅15:22上)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노예들에게 ‘어서 그 제일 좋은 겉옷을 내어다 입히고, 

 오늘의 말씀

 
 탕자는 모든 방면에서 가련한 거지가 되어 집에 돌아 왔습니다. 아들은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자백하지만 아버지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노예들에게 ‘그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고 하십니다. ‘그 옷’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면 입을 수 있도록 미리 특별히 준비해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그 옷을 입음으로 외적인 면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어울리는 의롭다 함을 받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화려한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 제일 좋은 옷은 의이신 그리스도를 표징합니다. 그러나 옷은 단지 객관적인 의를 대표하며, 외적인 가림만을 줄 수 있을 뿐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출처 : 생명 메시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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