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5:00

찬송가 563 - UCLA CD -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 지방교회들 찬송가


찬송가 563 - UCLA CD -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 지방교회들 찬송가


646-악한 원수 이기려면

1- 악한 원수 이기려면 주의 보혈 의지해 보혈 효능 능력으로 기필코 승리하리2- 주의 승리 보혈로써 참소자를 대적해 보혈 너를 변호하고 참소 비난 물리쳐3- 주의 승리 보혈로써 신실하심 믿게 돼 너를 위한 속죄피로 하나님 널 사했네
4- 주의 승리 보혈로써 너의 위치 선포해 영원하신 승리 보혈 원수 패배케 하네
5- 주의 승리 보혈로써 주의 권능 취하네 예수 보혈 적용하면 이기고야 말리라6- 주의 승리 보혈로써 하늘 한계에 앉아 승천한 주 권능으로 원수 무장 해제해
(후렴) 악한 원수 이기려면 주의 보혈 의지하라 보혈 효능 능력으로 기필코 승리하리

1.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Overcome the enemy;
By its virtue and its power You will win the victory.

Chorus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Overcome the enemy:
By its virtue and its power You will win the victory.

2.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Counter him who doth accuse;
By the blood for you defending All the sland’rer’s blame refuse.

3.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God’s sure faithfulness believe;
Thru the blood of your Redeemer God’s forgiveness now receive.

4.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position now declare;
Thru the blood, prevailing ever, All His vict’ry fully share.

5.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Claim His full authority;
Just apply the blood of Jesus And defeat the enemy.

6. By the blood of Christ the Victor Standing in the heavenlies;
In the pow’r of Christ ascended,Tread the principalities.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5:00

말씀과각주 330 - 로마서 9장 21절 - 지방교회들 말씀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로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위를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5:00

에클레시아를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간략한 반박 (2)


저는 비록 부족함이 있긴 하지만 이런 교회론에 관련된 진지한 논의를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시고자 하는 일이 곧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는 것'(마16;18)이고, 주님의 종들인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자와 교사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 또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엡4:11-12). 그런데 저와 HJ 님의 최근의 논의에서 보이듯이 교회 또는 에클레시아에 관해서는 매우 복잡하고도 다양한 논점들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역사상으로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 침묵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을 깃점으로 카톨릭과 개신교에서 교회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가 있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합의된 정의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수 많은 경쟁적 선언들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교통 정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 우리의 토론의 대상은 어떤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인가? 

케빈길레스는 그의 '신약성경의 교회론'(기독교문서선교회, 1999)에서 현재 우리에게 교회에 대한 합의된 정의가 없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고 하는 니케아 신경을 그대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교회'에 대한 합의된 공식적인 정의가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15쪽) 

  위 책을 번역한 홍성희 님도 역자 서문에서 위 케빈길레스의 말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론에 관한 책은...이미 나와 있는 것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각각의 교회, 교파, 교단에 따라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어서 교회에 대한 통일된 교리가 아직도 나와 있지 않은 형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토론대상이 되는 교회의 정의에 대해서 HJ님과 제가 약간의 혼동을 빚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라도 우리가 토론하는 대상인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처음부터 밝힌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단수의 '우주교회'가 복수로 나타나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문제제기 한 것임으로 당연히 마태복음 16장 18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신 바로 그 교회를 염두에 둔 교회개념을 토론의 전제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16에서 목자(사)와 교사들 등의 주의 종들이 세워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HJ 님은 '에클레시아'라는 원어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개념과 범위를 내포한 교회개념을 토론의 대상으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교회(에클레시아)개념 안에는 HJ 님이 소개한 것처럼 사도행전 19:32, 39, 41에서 보듯이 '불법적인 이방인의 폭도들의 모임'까지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그 교회 개념 안에 과연 이런 폭도들의 모임이 끼여들 여지가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편차가 쌍방에게 약간의 오해와 혼잡을 가져온 원인이었습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 우리가 토론하려는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주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특징들을 통해 에클레시아이되 그에 부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배재시킴으로 토론대상을 더 명확히 하는 시도를 해 보겠습니다. 

(계속)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7. 01:30

지방교회 - 워치만 니의 공로를 치하하여

 - 

미국 하원 국회 의사록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20:23

국제현충일집회 - M3 승리하신 그리스도 - 지방교회들 집회

국제현충일집회 - M3 승리하신 그리스도 - 지방교회들 집회

1. 

2.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5:00

찬송가 562 - 주 예수 이름 불러 만질 때 - Shulammite Son - 지방교회들 찬송가

찬송가 562 - 주 예수 이름 불러 만질 때 - Shulammite Son - 지방교회들 찬송가

주 예수 주 예수 이름 불러 만질 때 더욱더 더욱더 우리 속에 자라네
황금 꽃 피우며 영원히 자라게 하소서 우리 속 주님을 모두 알게 될 때까지

Jesus Lord, Jesus Lord. How we long to touch Thee,
More and more, more and more, That You may grow within us.
“Blossom of Gold” may You bloom and grow. Bloom and grow forever
Then all will see, all will know, You are the Lord within us.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5:00

말씀과각주 329 - 로마서9장 1-2절 - 지방교회들 말씀

말씀과각주 329 - 로마서9장 1-2절 - 지방교회들 말씀

로마서 9:1-2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함께 증언하는 것은 나에게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5:00

지방교회 변호와 확증 - 복음의 확증 (5)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구별되는 두 본성


우리의 가르침 중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또 다른 항목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를 모함하는 이들은 우리가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주의하지 않은 채, 단지 이단적인 사상을 전달한다고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이 단어를 우리가 사용한다 해서 문제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연합 안에서 훼손되지 않고 구별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우리의 이러한 믿음을 늘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글에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으며 아래의 내용은 그 중 하나를 발췌한 것입니다. 

그분 [그리스도]은 성령을 통해 그리고 동정녀를 통해 이 두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성령을 통해 그분은 신성한 본질을 받으셨고 사람인 처녀를 통해 그분은 사람의 본질을 받으셨다. 연합이란 두 요소가 결합되어 함께 연합되지만 그 두 요소가 그들의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 함께 결합되어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이 태어나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하나님-사람이 되셨으며, 두 본성과 두 생명, 곧 신성한 본성과 신성한 생명 그리고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생명을 소유하셨는데, 이 둘은 하나로 연합되었지만 조금의 혼동도 없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 삼의 본성이나 제 삼의 요소가 되는 어떤 것도 산출하지 않았다. <장로 훈련 2권: 주의 회복의 이상>, 13쪽 

연합’이라는 용어에 대한 위트니스 리의 정의가 타당한 것인가를 검토하는 작업은 잠시 보류하고, 여기서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관한 진리를 말할 때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기독교 교리사에 밝은 분들은 위 예문에 칼케돈 신학과 칼케돈 신조 (주후 451년) 자체가 극명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은 그 특징을 유지하며”라고 말하면서 정통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두 본성이 연합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유티커스 주의 (Eutychianism) 를 가르친다고 정죄했지만, 그는 분명히 두 본성이 “함께 결합되어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유티커스 주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위트니스 리는 두 본성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확증하기 위하여 칼케돈 신조의 표현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두 본성이 “조금도 혼동되지 않고, 그 특징적인 본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제 삼의 본성이나 제 삼의 요소를 산출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이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단락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합’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트니스 리는, 연합이란 두 요소가 그 특별한 본성을 잃지 않고 결합되는 것, 즉 두 본성이 그 특징을 유지하며 결합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이 연합’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연합이란 여러 요소와 본성의 혼잡을 가리키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합당하게 믿고 있는 것과 상반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연합의 의미가 그러할지 모르나 표준 영어 사전들은 연합의 의미를 결코 그렇게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웹스터  국제 대사전 제3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은 연합을 “어떤 것을 함께 두거나 결합시켜, 그 결합 안에서 구성 요소들이 서로 구별된 채로 남아 있는 것” (Springfield, MA: Merriam-Webster, 1993) 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 해리티지 영어사전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rth Edition) 의 인터넷 판 역시 연합을 “통상 각

각의 특성들을 유지한 채 결합하거나 섞는 것.” (http://www.bartleby.com/61/31/M03131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섞다 (mix)’ 라는 말을 찾아 그 유의어들을 살펴보면, 연합이라는 용어가 갖고 있는 아래와 같은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유의어들과의 비교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연합은 개별적인 특성들을 상실하지 않는 결합을 가리킨다. “존경과 놀람이 함께했다 (mingled).”—월터 스코트 경 (Sir Walter Scott). “그의 동료들은 자유롭고 즐겁게 토박이들과 어울렸다 (mingled).”—워싱턴 어빙 (Washington Irving). (http://www.bartleby.com/61/25/M0352500.html, 2006년 6월 19일 접속)

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 사전들이 이와같이 ‘심원한’ 정의를 제공하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이 단어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연합’이라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사실상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논쟁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많은 이들 중에서 월터 스코드 경과 워싱턴 어빙은 지나치게 문학적이었다고 치부하여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인터넷 상에서 쉽게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실생활 속에서의 용례들을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은 루즈벨트의 연설문에서 인용한 글들을 읽으며 함께 어울렸다 (mingled). (Doug Struck, “Clinton Dedicates Memorial, Urges Americans to Emulate FDR,” Washington Post, 1997년 5월 3일자, http://www.washingtonpost.com/wp-srv/local/longterm/tours/fdr/history.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종종 남부의 파리라고 불리는 애쉬빌은 건축양식과 문화가 독특한 조화 (mingling) 를 이루어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 함께 국제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Community Tour”, Coldwell Banker Kasey and Associates [Web site], http://www.coldwellbankerkasey.com/community_tour.htm, 2006년 6월 19일 접속)

이러한 예에서 ‘양복과 넥타이를 차려입은 어른들’과 ‘티셔츠를 입은 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구별하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각 계층의 뚜렷이 구별되는 속성들이 이러한 자연스러운 어울림 (mingling)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남부의 파리인 애쉬빌이라는 도시에 있는 국제적인 분위기는 분명히 애팔라치아 지방의 정취와는 구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말을 쓴 부동산 중개인은 어떻게 두 문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맛보고 감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유사한 예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전과 일반적인 용례는 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에 관련하여 우리가 채택한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관해 우리를 줄기차게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따가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두지 않으려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부지런히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두 본성에 대한 역대의 논점들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어떤 단어를 사용하기만 하면 그들의 생각 속에서 적신호가 켜지게 됩니다. 그들이 ‘연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그 단어가 두 본성을 구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반대편 극단으로 치우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합’이라는 단어가 위격의 혼잡과 변질을 의미한다며 우리를 반대하는 경고를 외치지만, 정작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은 “나뉨도 없고 분리도 없으시다.” (칼케돈 신조) 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적신호로 인식되는, 그리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연합’ (mingling) 이라는 단어를 왜 포기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위트니스 리 자신도 이 용어에 관련된 역대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연합’이라는 단어야말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설명하는 최적의 용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결합을 묘사하는 성경적인 방식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레위기2장에 있는 소제가 신성하면서도 인간적인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섞인’ (mingled)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이 단락에서 성경적인 예표에 대한 그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거듭해서 두 본성에 대한 합당한 이해가 무엇이며 합당하지 못한 이해는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레위기 2장에서 섞인 (mingled)’ 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는데, 성령은 하나님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갖고 계신 갈망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5절은 소제를 준비할 때 기름이 고운 가루와 함께 섞여야 한다고 말한다. 기름은 성령이신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며 (눅4:18, 히1:9),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름이 고운 가루와 섞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성과 연합되신 것을 상징한다. 기름과 고운 가루는 두 가지 다른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함께 연합된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은 제 삼의 본성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본성은 그러한 결합 안에서 여전히 구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체험함>, 영문판 32쪽

어떤 사람들은 위트니스 리가 두 본성을 묘사하는 적절한 용어를 찾기 위하여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지만, 그러나 위트니스 리가 비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고유 권한이며, 그가 그러한 방법을 사용한다 해서 그를 (또는 우리를)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합이라는 용어가 레위기 2장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거리낌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위에서 보아 온 것처럼 이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는 데 확신이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말이 우리가 가진 가장 완벽한 표현이자 두 본성이 갖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비밀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 귀한 진리에 대한 더 탁월한 이해와 표현을 제공하는 이 단어를 쉬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회피하기보다는 기꺼이 진리와 함께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비록 현대 신학계에서 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그리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위트니스 리만이 유일하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저명한 신학자인 윌리암 밀리간 (William Milligan)도 정확히 동일한 맥락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신성한 영께서 우리의 영 안에 내주하신 이후의 둘의 관계를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이 영 안에 거처를 만들 때, 즉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오실 때, 그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보석을 금테에 물릴 때에는 금은 금으로, 보석은 보석으

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께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실 때에는 이와 같지 않다. 대신에 그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기체가 서로 안으로 확산되어 전체적으로 섞이는 것처럼 연합되며, 그 결과 두 기체는 함께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매 입자 속에서 발견된다…그분 (그 영)은 그들의 존재에 스며드시며, 그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신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The Ascension and Heavenly Priesthood of our Lord, [London; New York: Macmillan, 1984], 183-184쪽)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6. 01:26

지방교회 영상 - 하늘에 속한 이만나


posted by 지방교회 스토리 2018. 7. 15. 05:00

찬송가 561 -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 지방교회들 찬송가

찬송가 561 -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 지방교회들 찬송가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

지금 주님은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네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