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8) 그럴 뿐만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또한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D.L. 무디가 젊었을 때 그는 누군가가
“한 사람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점유하시도록 한다면 이 땅에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서 즉시 반응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해 그분의 길을 그처럼 멀리까지 전진시킬 수 있으셨던 비결이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이 교통을 받아 주님께 “주 예수님, 제가 아직 젊음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어떤 것에도 고정되거나 정착되거나 점유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새로운 움직임을 위해 당신께 전적으로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이 땅에서 당신의 최근 움직이심을 위해 제게 오셔서 저를 점유하시고 취하시며 소유하소서.” 라고 말하기 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시대를 전환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로 알려져 있는 로칼처치(local church)에 대한 오해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그 이유로 워치만 니의 신학사상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교회는 한국교회 외에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측은 한국교회에 왜곡 전달된 자신들의 신앙과 실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1. 오해 받고 있는 내용들
첫째, 지방교회가 삼위일체 신관에 대해 양태론을 믿는다는데 대해; 지방교회 성도들은 삼위일체 신관의 양태론을 이단사상으로 오히려 정죄한다고 밝혔다. 지방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고 상호내재(相互內在) 하시며, 영원히 동시존재하신다는 칼케톤 신조를 굳게 믿는다. 삼위일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삼위의 동시 존재를 믿는 양태론’은 성립될 수 없음을 잘 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사야 9장6절에 “아들은 … 영존하시는 아버지”, 또 고린도후서 3장17절에 “주는 영이시니” 처럼 본문자체가 존재론적 위격 간의 동일시를 말하는 듯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에서의 삼위 간의 동일시는 ‘존재’가 아닌 경륜적인 ‘기능상’의 동일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함께 이같은 ‘경륜적 삼위일체’ 방면을 가르친 것을 일부 인사들이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방교회가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한다는데 대해; 이 말은 위트니스 리가 다른 근본주의 교사들의 동일한 해석에 동승하여 요한계시록 17장5절의 ‘큰 바벨론, 음녀’를 로마 천주교로 본 것을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악의적으로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교회는 기성 교회 안의 거듭난 성도들을 형제로 보고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사제도를 부인한다는데 대해; 지방교회도 개교회의 인도자로서 복수의 ‘장로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는 세속 직업을 가진 경우도 있고, 기성 교회처럼 전 시간으로 교회만을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기성 교회의 목회자 역할을 감당한다. 다만 지방교회는 이들을 ‘목사’라고 호칭하지 않고 ‘장로’라고 부를 뿐이다. 칼빈도 두 종류의 장로론을 가르쳤고, 장로교 헌법에도 ‘목사’를 ‘장로’ 반열에 두고 있다. 또한 초대교회는 주후 4세기 경까지 목회자를 ‘장로’로 호칭했다.
넷째, 지방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한다는 데 대해; 구원은 각 개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특정 단체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다고 믿는다. 우주적 그리스도의 교회는 참되게 거듭난 교인들의 공동체이고, 또 그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믿는다.
다섯째 지방교회만 교회라고 한다는 데 대해; 참되게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다” ‘우주교회’(마16:18)의 일원임과 동시에 그가 거주하는 지역을 범위로 하는 해당 ‘지방교회’(local church)의 일원이다(행8:1, 계1:11). 예를들어 지방교회가 ‘서울교회’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2. 지방교회가 지향하는 것
지방교회 성도들은 성경 그대로 믿고 가르치되, 특히 성경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고 실행하기를 힘쓴다. 지방교회는 생명 되신 그리스도(요11:25, 골3:4)와 그분의 몸인 교회를(엡1:23) 건축하는 것(엡4:16, 마16:18)이 성경의 중심 진리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이 최종 완성된 모습이 어린양의 신부인 새예루살렘이라고 한다(고후11:2, 계21:2, 9-10).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수백 권의 저술들은 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내용으로 쓰여졌다.
지방교회는 또한 최대한 성경대로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의 고백이다. 그래서 침례(행8:36-39)를 선호하고, 또 매주 예배시간에 성만찬을 실행하고 있다(행20:7).
3. 지방교회의 특징
지방교회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 승천, 재림 등에 관한 객관적인 가르침에 더하여 ‘그리스도의 충만으로서의 그분의 몸’(엡1:23)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그러한 객관적 진리를 토대로 삼되 더 전진해서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1:27)와 그분에 대한 체험을 강조한다. 이것은 골로새서 1:27-29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본을 따른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성직자 제도의 폐해를 보고 만인제사장을 주창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론에 비해 실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방교회는 에베소서 4장12절의 권면을 따라 성도들을 온전케 하길 힘씀으로 만인제사장 제도를 실제로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롬15:16), 모든 성도들이 목양하며(요21:15),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도록 격려해 왔다(고전14:1, 4, 23-26, 31).
지방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며(엡4:4) 주님은 분열을 책망하신다고 믿는다(고전1:10-13). 따라서 가급적이면 분열의 요인들은 피하고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함 등 몸의 하나를 이루는데 필요한 미덕들을 더 소유하기를 힘쓴다(엡4:2-3참조).
4. 지방교회의 신앙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대표되는 지방교회의 신앙은 한국복음서원이 발행한 신약의 결론(총8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지방교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교회, 구속과 구원 등 핵심 신앙에 있어서 성경뿐 아니라, 성경에 따라 결의된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의 결정을 존중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초대교부들의 정통 가르침과 교회 역사상 주께 쓰임 받았던 주의 종들을 통해 밝혀진 진리들을 귀히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복음서원도 ‘2천년 교회사 순례’(214쪽)라는 책을 번역 발간한 바 있다.
따라서 주의 회복은 성경과 교부들과 역대의 주의 종들을 통해 계시된 건전한 가르침들을 이어 받은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침에 아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책망받은 한 가지인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주님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그냥 사랑도 아니고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요?
오 주님, 저의 우둔함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당신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의 그 마음을 만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책망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첫째가는 사랑을 버린 것이다(계 2:4).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련 성경 구절과 참고 자료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다음 두 가지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후서 : 물론 성경에 에베소후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신약 사도들로부터 두 번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쓴 에베소서이고(엡 1:1), 두 번째는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계시록 2장 1-7절입니다(계 2: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일곱 서신중 첫 번째 서신은 ‘에베소후서’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J. N. 다비(Darby)는 “신약 안에 있는 ‘후서’는 모두 교회의 황폐함을 말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모두 6장으로 된 에베소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았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졌으며,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어 가고 있었고, 사랑 안에서 행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 후에, 그들은 “행위”와 “수고”와 “인내” …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면에서는 인정받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서는 주님께 강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의 교통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사람일 것입니다.
모든 일은 우리와 주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이야기여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교회는 훗날 가장 근본적인 이 항목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신부와 신랑에게 사랑의 무게감 :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은 한 가지’만 책망받고 그 외의 여러 가지에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으니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가 또한 주님의 사랑스러운 신부임을 생각한다면, 둘 사이의 사랑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한 신실한 성경 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반드시 사랑 안에서 주님과 교통을 가져야 하고, 사랑의 느낌이 있어야 하며, 그분에 대한 신혼 때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헌신이 있어야 하며, 새로운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주여 저는 제가 처음 당신을 사랑한 것같이 당신을 사랑하며, 당신과 저는 신혼 때와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말한 신혼 때의 사랑이다.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하여 그들과 주님 사이에 그 신혼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당신은 그분께 “주여, 저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당신은 어떠신지요? 저는 당신이 기뻐하는 바를 알기 원합니다. 당신의 명령이 아닌 곧 당신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마음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의 명령이 아닌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여,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주님의 종은 주님의 연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만약 아가서에서 나오는 술람미의 위치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된 구절에 대한 추가적인 묵상 : 주님 앞에서 이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때 주님은 다음과 같은 부분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11절은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을 잡는 섬김을 말하고, 15-16절은 나 곧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데, 후자는 오직 사독의 후손만이 가진 특권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은 위에서 “여호와 자신을 섬기는 것”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위 에스겔 44장에서의 두 종류의 섬김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일”을 하는 노예가 밭에서 돌아와서 “내 저녁부터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너는 허리에 띠를 동여매고 시중을 들어라”는 주인의 명령을 이행하는 신약에서의 사례와 유사합니다. 복음전파와 목양은 귀한 것이지만,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또 그런 섬김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어야 합니다.
3) 안디옥 교회에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을 불러 일을 시키셨습니다”(행 13:1-2). 이 말씀 역시 주님을 위하여(for)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섬김(to)을 말씀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맡겨진 사역은 이러한 친밀한 섬김의 결과임을 알게 합니다.
요약하면,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첫째가는 사랑)은 “주님 앞에 서서” “주님 자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한 어떤 것이 이보다 우선이 될 때 우리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아침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자백하고, 말씀을 통해 그분을 생명나무로 먹음으로써, 그와 연합되는 “처음 행위(첫째가는 행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묵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어떤 영적인 봉사가 주님 자신보다 더 우리 존재를 사로잡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가 참된 위기요 즉시 회개해야 할 순간임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불의한 일로 주님께 책망받은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상태 때문에 책망받은 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오 주님, 당신을 위한 어떤 봉사가 주님 자신을 대체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더 깊이 연합하는 일이 우리의 최우선의 관심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우리의 공통된 믿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논쟁없이 받아들여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판한 사역의 글들 중 일부를 읽은 몇몇 분들은 우리의 이해가 정도(正道)를 벗어났다고 느끼고, 심지어 어떤 분은 더 나아가 우리를 이단시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상당 부분은 우리의 책자들을 제한적으로만 접한 것에 기인한다고 믿으며, 때로 우리의 글들이 전체 문맥이 무시된 채 발췌되어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오늘날 일부 ‘이단감별사들’의 가슴 아픈 행태이며, 우리만이 그들의 이러한 권한 남용의 유일한 피해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취한 입장 때문에 오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일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에 대한 참된 논의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 사상가들, 믿는 이들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참되게 믿는 것처럼 우리는 이들 항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참된 것으로 믿으며, 일부 진리 항목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해나 상대방의 이해 모두에 대해 존경과 관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우리는 논의가 필요한 이러한 진리 항목들을 우리의 기본 신앙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즉 그러한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으로 받거나 거절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풀러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 우리 스스로가 해 온 것처럼, 모두가 이런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연결하시는 그 영의 하나를 손상시킴 없이 믿는 이들이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또는 동의할 수 있는) 항목들로 다루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이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 우리와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곧 우리가 이 진리항목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믿는 것처럼 그들도 믿는 것이 우리의 간절하고도 커다란 소망이지만, 이것들은 논쟁의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부분 전체를, 모든 신성한 진리와 실재 안으로 우리 모두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와 실재의 영께 일임하고자 합니다(요 16:13).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독특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지만 동시에 일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우리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몇몇 진리의 항목들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워치만 니(Watchman Nee)와 위트니스 리(Witness Lee)의 저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기독교계에 매우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저서들 중 일부는 교계 전반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m Life)」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성경교사인 위트니스 리는 지방 교회들 외부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간혹 그에 대해 의심하는 눈초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영적 도움과 영적 양식이 되는 가르침과 경건한 본을 보아 온 터라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의 책자들을 조금이나마 인용하여 제시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오해들을 떨쳐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간략한 소개를 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1905년 중국 북부지방에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9세 때 그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혔고 즉시 그의 남은 일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 드리기로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그의 사역 초기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니를 만났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인도 아래서 그와 함께 동역했습니다. 1934년에 워치만 니는 그의 출판의 일을 수행하던 상해복음서원의 책임을 위트니스 리에게 맡겼습니다. 1949년,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이 (중국본토 공산화로 인해-역자 주)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워치만 니와 그의 동역자들은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에게 대만복음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 그의 출판의 일을 계속하도록 했는데, 현재 대만복음서원은 영어권의 LSM과 함께 워치만 니의 저서를 출판하는 곳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습니다. 대만에서의 위트니스 리의 일은 주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피난한 350여 명의 성도들이 전부였던 대만에 있는 교회들은 5년 사이에 2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62년에 위트니스 리는 미국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를 느끼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에서 35년간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지속적으로 주중 집회와 주말 특별 집회에서 말씀을 공급하여 수천 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들의 대부분은 800편 이상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책들 중 많은 수가 14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91세인 1997년 2월에 그의 마지막 공식 특별 집회를 가졌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의 실제적인 하나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관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돌봄 아래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기능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표는 좁은 분파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지방교회(local church)는 특정장소에서 모이는 기독교 기구를 말한다. 지방교회란, 사도행전 8:1, 13:1, 요한계시록 1:11에서 보듯이 참되게 거듭난 모든 우주교회의 일원은 각자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를 단위로 하는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성경원칙을 가리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 역사상 ,워치만 니에 의해 시작되고 위트니스 리에 의해 계승된 지방교회 모임을 지칭하기도 한다.
지방교회[1](local Church) 또는 작은 무리(The Little Flock) 등으로 알려진 이 모임은 일반적으로는 그의 영어 이름인 워치만 니(Watchman Nee)(1903-1972)로 알려진 니 수추(Ni Shu-Tsu)에 의해 중국에서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Nee는 그의 할아버지가 회중교회 목사이고 그의 부모들은 신실한 감리교신자들인 중국인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들을 깨우는 목적을 가진 종치는 자라는 것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생각나게 하려고 본래 이름인 니 수추(헨리 니)를 니 토생(워치만 니)으로 바꿨다.[2]
이름뿐인 종교적 청년기로부터 그는 감리교 복음전도자인 도라 유(Dora Yu)에 의해 회심되었고, 곧이어 독립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Magaret E Barber)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녀를 통해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와 폐쇄파 플리머스 형제회의 저술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교회조직에 있어서 다비의 반교파적 접근을 채택했고 곧이어 소규모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 무리의 인도자로 부상했다. 1920년대 말에 그는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가 이끄는 형제회의 한 부류와 접촉을 가졌고 그들의 초청으로 1933년에 영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스틴 스팍스가 관장하는 비형제회 모임인 HOCF(Honor Oak Christian Fellowship)과 허가받지 않은 교통을 하였다는 이유로 니와의 관계를 곧 단절했다.
복주에서의 소규모 시작으로부터 니의 운동은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넓은 지역을 여행하며 기독교의 하나됨의 기본적인 표현으로서 (분열적인 교파주의에 맞서) 각 도시마다 오직 한 지방교회(회중)만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근거한 회중들을 만났다.
1922년부터 1952년(중국혁명이 기독교의 확산을 차단했던 때인) 사이에 200개 이상의 지방교회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일어났다. 니는 또한 50권 이상의 책을 썼는데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생활에 관한 것들이다. 교회에 관한 그의 성숙된 견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사역의 재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영에 속한 사람'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몸 혼 영으로 구성된 사람의 세 부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발전시켰다.
1949년에 권력을 장악한 중화인민공화국은 니를 (또한 그와 제휴함으로 관련이 있는 교회들을) 미국과 국민당 정부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다고 고소했다. 그는 처음에는 상해에서 축출 되었고 그후 1952년에 투옥되었다. 그는 1972년 감옥에서 죽었다.
위트니스 리
1930년대에 니는, 체후(Chefoo)에 있는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장로가 된 전 개신교 목회자(former Protestant minister)인 위트니스 리를 동역자로 얻었다. 그는 1932년에 니의 사역에 동참했고 몇년 내에 니의 가장 소중한 동역자가 되었다. 폐결핵과 싸우던 3년간의 부재 후에 위트니스 리는 중국혁명 직전인 1948년에 전시간 사역자로서 니와 재결합 했다. 니는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는데 그곳의 교회들은 번성하여 태평양 연안으로 확산되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성도들은 그 운동을 서부 해안으로 가져왔다. 위트니스 리는 1962년에 미국으로 이주해서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LSM)를 설립했다. 그는 지방교회들 가운데 인도적 지위에 있는 전시간 사역자로 인정받아온 이래, 지방교회의 확산을 위해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해 왔다. 그는 또한워치만 니의 저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몇가지 신학적 강조점들을 소개함으로 그 운동 안에서 혁신을 위한 근원이 되었는데 예를들면, "기도로 말씀먹기" "주의 이름을 부름"과 같은 몇가지 실행들은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조직
지방교회는 교회의 하나, 교회생활의 단체성,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머리 역할을 주장한다. 주된 강조점은 교회생활, 함께 모임(일주일에 여러번),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교회(회중)생활의 의무를 분담함에 있어 각 지체들의 기능과 책임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것을 거절함에 있어, 교회생활의 실제적인 표현을 위한 본이 세워져 왔다.
지방교회는 한 도시에 하나인 독립적 회중들의 교통으로서 조직된다. 각 회중은 그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일반적인 행정일을 하는, 회중들이 인정하는 인도자들 중에서 나온 2-5명의 소규모 장로그룹에 의해 인도된다. 또한 사도적 기능을 가지고 교사와 리더쉽훈련가로서 지방교회들을 순회하고 지방교회가 아직 없는 도시에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기도하는 소규모의 사람들도 있다. 지정된 사역자들은 다소간 공식적으로 그들의 수고들을 독립된 사역으로 조직한다.
예를 들어, 위트니스 리의 경우에 그의 사역은 리빙스트림 미니스트 리로서 합병되었고 그것은 현재 지방교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도적 노력(endeavor)이다.
다비의 반 교파적 자세가 문제를 일으켰던 플리머스 형제회처럼 니의 운동도 분파적인 이름을 갖지 않았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다만 교회라고 부른다. "지방교회"라는 말은 편의상의 호칭이지 이름이 아니다. 지방교인들은 그들 자신들을 "(어느 도시에 있는) 교회"라고 부른다.
지방교회는 새로운 도시에 회중을 조직하고자 하는 교인들의 자발적인 운동에 의하거나 사도적인 사역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미국에 있는 교회들은 처음에 대만으로부터 이주해 온 성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위트니스 리의 권고로 지방교회는 새로운 전략을 채택해 왔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의 원칙" 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새로운 모임을 탄생시킬 단일한 목적으로 한 작은 무리의 교인들이 새로운 지방으로 이주하는 것이다.
신앙
지방교회들은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풍부한 저술 안에서 발견되는 가르침을 따른다. 간결한 요약은 (미국종교백과사전 중 '신조(Creeds)'안에서 재인쇄된) '지방교회의 신앙과 생활'[3]이라는 소책자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선언은 플리머스 형제회와 유사한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있으며,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님의 처녀탄생, 대속적인 구속, 예수님의 부활, 그분의 재림, 성경의 축자영감의 신앙을 확증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특별한 주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하나를 취급하는데 주어진다. 종파주의, 교파주의, 범교파주의를 모두 거절하고 각 지방 안에 있는 모든 믿는이들의 하나됨을 주장한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성경적인 교회의 회복(또는 복구)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사도시대 이래 완전한 교회생활과 그 하나됨이 상실되었지만,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으로 회복이 시작되었고 진젠돌프 백작과 모라비안(Moravians), 요한 웨슬리와 감리교도들, 더 최근에는 플리머스 형제회의 경건주의 회복을 통해 계속되었다.
지방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풍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예를 들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누림)과 성경에 근거한 교회생활의 실행이 회복되고 있다. 회복의 일부 요소들은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기도로 (말씀)읽기"는 기도의 말로서 성경 말씀을 사용하는 경건한 실행이다. 기도하는 중에 개인이나 단체들은 성경으로부터 단어나 구절들을 반복해서 말하면서 찬양이나 감사의 말을 자주 삽입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체험이 성경말씀을 통해 기도하는 사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것이다. 실행의 명칭 자체가 가리키고 있듯이, "주의 이름 부름"은 " 오 주 예수"라는 문구의 반복에 의한 하나님에 대한 기도이다.
"불태움(Burning)"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접촉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음의 메시지로 감동시킬 때 그 사람은 "불태워진 것"으로 본다. "불태움"은 또한 어떤 사람의 그리스도인 이전의 생활이나 미지근한 헌신의 상태들이 불 속에서 태워지는 실행이다. 문자적으로 재침례인 "장사지냄(burying)"은 그리스도인 헌신의 보다 새로운 단계의 상징하며, 지방교회 성도들은 한번 이상 침례 받을 수 있다.
구성원
1991년에 지방교회는 6개 대륙에 교회(회중)들이 있었다. 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들 안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있다. 대만에 200여 교회 6만명의 성도들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는 265개 교회 1만 5천명의 성도들이 있다. 남 아메리카와 중앙 아메리카의 스페인어 모임 안에 1만 6천 5백명이 있다. 유럽,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도 교회들이 있다. 혹독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중국 본토에도 생존하는 성도들이 있어 보이며, 이 운동은 지난 기간 동안 실제로 수십만의 성도들에게 확산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지방교회는 동유럽과 러시아에 복음 사역을 시작했고 1992년에 모스크바와 성 페테스브르크에 교회가 생겼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사역을 발전시키고 있다.
특기사항
1970년대에 지방교회와 보다 큰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 단체 안의 일부 유력한 대변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1980년대의 일련의 법적 조치의 과정 속에서 절정에 달했다. 일부 신흥종교들을 소위 "이단(cults)"라고 공격하는 전쟁을 통해서 알려졌던 일부 저술가들이 지방교회를 이단(heresy),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에 대한 독특한 형태를 발전 시킨다고 공격했다. 여러 권의 책들이 쓰여졌고 지방교회에 관한 여러 항목들이 그리스도인 "이단퇴치" 문서들 안에 등장했다. 문서에 의한 명예훼손과 그들의 사역이 불공정한 비판들에 의해 손상당하지만 (다른 방법으로는) 사과를 받아내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며, 지방교회는 여러 개의 소송 사건을 통해 지방교회를 공격하는 한 권의 책을 출판한 사이비이단연구소(the Spiritual Counterfiets Project)를 제외한 모두에게 비난책자의 회수와 사과문을 받아냈다. 위 연구소에 관한 사건은 법정 판결까지 갔고 1985년에 사이비이단연구소가 명예를 훼손한 것에 대해 천 백만불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최근 동향
최근[언제?] 미국 기독교계 내에서는 지방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대한민국에도 다수의 목회자들이 수학한 바 있는 풀러신학대학은 지방교회와의 2년 간의 광범위한 대화를 마친 후에 "지방교회들과 그 구성원들의 가르침들과 실행들이 본질적인 모든 방면에서 진실하고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대표한다"고 선언했으며[4], 크리스천 리서치 인트티튜트(이하 CRI)의 대표인 행크 해네그래프는 지방교회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우리가 틀렸었다.[5]"고 발표, 한기총 앞으로 서신을 보내 지방교회에 대해 재평가해줄 것을 요청했다.[6][7]
주석
이동↑(J. Gordon Melton, <<Encyclopedia of American Religions(미국종교백과사전), 5th Edition>>, 500-501쪽(제5판)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국 트럼프와 북한 김정은의 회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각자의 관점에 따라 해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문가들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이 회담을 최대한으로 선전하고 있다. 회담이 끝나고 북한은 ”70년간 첨예하게 대립해오던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끝장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확고한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양국 수뇌가 세기의 만남과 회담을 진행했다.“는 식으로 TV 방송을 반복해서 방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이 먼저 북한의 핵이 무서워서 김정은에게 회담을 요청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세계정세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이는 물질세계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구약시대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물질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였다. 다니엘은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영적인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무역 등에서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볼 수 있다. 만약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소위 그 방면에 전문가들은 한 마디씩 하겠지만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만 알고, 영적인 세계는 알지 못한다. 보이는 물질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그 영역이 다르다.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우주가운데는 세 가지 의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지요, 둘째는 사탄의 의지요, 셋째는 사람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영원하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의지인 사탄의 의지는 무엇인가? 우리는 사탄의 의지를 알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첫 번째 창조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1잘 2절은 “그러나 땅이 황폐하고 공허하게 되었으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을 품고 계셨다.”한다.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실 때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욥기 38장 7절은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그 때는 땅의 기초를 놓을 때를 말한다(욥38:4). 1장 2절에서 ’그러나‘로 시작한 것은 1절과 2절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을 보면 이 사건이 사탄의 반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사장 루시퍼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보고 교만해져서 “뭇별들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말하면서 반역을 일으켰던 것이다(사14:13).
사탄의 의지
하나님은 반역한 천사장과 악한 천사들을 하늘에서 추방시켰고, 하늘들과 땅을 심판하셨다. 그 결과 땅은 황폐하고 공허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모든 천사들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했었다. 첫 번째 창조의 주인공은 천사들이다. 천사들의 으뜸인 천사장은 교만 때문에 악한 의도를 품게 되었는데 그 악한 의도가 사탄의 의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의지에 더하여 추가로 사탄의 의지가 있게 된 것이다. 우주가운데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천사장의 반역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사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고 있다. 모든 영적 전쟁의 근원은 두 의지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사탄의 의지가 신성한 의지에 대항하여 일어나기 전에는 우주 안에 전쟁이 없었다. 우주 가운데 싸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천사장의 배역에서 시작되었다. 그 배역은 인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국가 사이에, 종족 사이에, 사회 계층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제 1차, 2차 세계 대전도 그 배후에 사탄의 반역에서 비롯되었다. 영적 세계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계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는다면 밖으로 시시각각 변화는 정세에 대하여 동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비판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 간의 전쟁이 배후에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오늘날의 다니엘이 되어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와의 전쟁은 교회와 사탄과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 안에 혼란과 다툼과 냉담함이 있는 것은 그 원인이 타락한 사탄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탈취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의지와 사탄의 의지가 충돌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세 번째 의지인 사람의 의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사탄을 처리해야 한다. 현시대는 바로 교회가 이 땅에서 주님의 승리를 실지적으로 실현하는 시기이다. 머리가 승리하셨기 때문에 몸 또한 승리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셨고, 부활생명으로 교회를 건축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승리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우주 안에 하나님의 왕국도 있고, 사탄의 왕국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언급한 영적 전쟁은 이 두 왕국간의 전쟁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에 우리가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립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함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교회의 위치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교회의 책임은 그리스도께서 싸우셨던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것이다. 교회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계시록 12장 10절,11절에 있는 것처럼 밤낮으로 형제들을 참소하는 참소자에 대해서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로 마귀의 참소를 이겨야 한다. 그들은 또한 죽기까지 자기들의 혼 생명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사탄의 입지는 우리 가운데 없어질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다. 사탄의 왕국은 사탄이 왕이고, 반역한 천사들이 부하들이고, 더러운 귀신들이 하인들이고, 사탄의 지시를 받는 타락한 사람들이 한 패거리들이다. 교회와 사탄과의 전쟁은 우리와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다. 우리는 사람 속에 있는 사탄은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대표하여 사탄을 처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는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사탄을 처리하지 않으시고, 피조물인 사람에 의하여 그를 처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었다. 적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소극적인 의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고 하나님을 대표함으로 그분의 원수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원수를 처리하는 이중 목적을 완성하였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의도는 사람이
1)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정복하고
2) 사탄에게 강탈당한 땅을 회복하며
3)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마6:10,13). 따라서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악한 영들인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은 사탄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반역할 때 사탄을 따랐으며, 지금은 하늘들의 영역에서 세상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배역한 천사들이다. 오늘날 이 세상은 완전히 마귀의 어두운 통치아래 있고, 마귀는 악한 천사들을 통해 다스린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변하는 세상의 흐름보다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예의 주시하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하나님 편에서 싸워야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