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 신앙과 생활>이라는 신앙고백서에서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태도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분명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반드시 지방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으며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주교 안에, 교파들 안에, 독립된 단체들 안에, 피로 씻음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거듭난 참된 믿는 이들이 많다고 인정하며 그분들을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로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들이 지방교회에 대하여 생소하게 느끼고 심지어 어느 정도 교제의 벽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문제가 있는가? 우선 외부적 요인으로는 ‘자기네만 교회라고 한다’ ‘지방교회에 와야만 구원이 있다’라고 한다는 식의 지방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유포시킨, 사실과 다른 말들이 걸림돌이 되었을 수 있다. 이 점은 기성교회들이 사실에 근거한 바른 인식을 가짐으로 풀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지방교회 내부적인 요인들도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에 익숙지 않은 진리항목과 실행들 그리고 그들의 기성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교회측은 이렇게 해명하고 있다.
1. 진리와 실행상의 차이점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한 노선, 즉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소위 형제회’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특징들 중 일부를 공유한 것이 있다. 그 외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했던 진리항목들이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것들은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교계 내에는 잘 소개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첫째,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 강조이다.
워치만 니는 자신의 영적 유모와도 같은 마가렛 바버 선교사를 통해 앤드류 머레이, 제시펜 루이스, 이반 로버츠, 오스틴 스팍스 등을 통해 이어져 온 그리스도에 대한 주관적인 체험에 대한 진리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위트니스 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노선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위 신비주의로 분류되는 마담 기용, 페네롱 신부, 윌리암 로우 등과도 관련이 있다.
한편 한국교계는 이런 방면 전체를 ‘신비주의’로 보고 이것을 경계하는 시각이 강하다. 따라서 일반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이 방면의 서적을 읽거나 공개적으로 동조하기에는 주저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성경을 벗어난 그릇된 영성이나 잘못된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저 하늘 보좌와 동시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골 1:27),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은 사실’(롬 6:6),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갈 2:20),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마 16:24) 등의 말씀을 어떻게 삶 속에서 체험하고 실제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과제이다.
둘째, 교회생활 관련 진리와 실행이다.
교회 역사를 볼 때, 존 넬슨 다아비로 대표되는 형제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이러한 형제회의 유산이 지방교회를 대표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 교계에서는 다아비의 신학이 세대주의를 기초로 하고 평신도-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엡 4:12)는 주님의 위임과 루터가 주장했던 ‘만인 제사장 제도’를 어떻게 실행하고 또 완성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더 깊은 관심과 추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셋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강조한 진리 항목들이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경륜’ ‘그리스도의 몸’ ‘새 예루살렘’ ‘신화’(神化, deification)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진리 항목들은 하나님의 주권, 선택, 예정 등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교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딤전1:4, 엡 1:9, 3:2)은 사도 바울의 사역 안에서 거듭 강조되었고 ‘그리스도의 몸’ 역시 그러하다(마 16:18, 엡 1:23). ‘새 예루살렘’(계 3:12)은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을 가리키며 요한계시록의 결론이자 핵심주제이다. 신화 진리 또한 정통 초대 교부인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에서 강조한 진리로서 ‘하나님이 사람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러한 사상은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로 현재도 가르쳐지고 있다.
따라서 지방교회와 기성교회는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서로 배우는 자세로 교제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2. 지방교회 성도들의 기성교회를 향한 태도
지방교회는 본의야 어떻든 기성교회를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 그것이 상호 교류에 장애가 된 면이 없지 않다. 어찌되었건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할 대목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벧전 5:5). 사실 워치만 니도 다음과 같이 신앙적 교만을 경고하고 있다.
“주님께서 정하신 교회의 노정은 빌라델피아이다. 빌라델피아의 노정을 가는 사람의 가장 큰 시험은 바로 교만이다. 즉 “우리가 당신들보다 낫다! 우리의 진리가 당신들의 진리보다 분명하고, 우리가 당신들보다 더 많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교만이 없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토해내신다. 우리는 결코 교만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워치만 니, 50 필수과정(V), 한
국복음서원, 2002년, 135쪽).
미국 교계는 지방교회를 일체 이단시하지 않는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만 전적으로 출판하는 Living Stream Ministry(LSM)가 ‘미국 복음주의 출판협의회’(ECPA) 의 투표권 있는 정회원 중 하나로서 교계 지도자들과 이미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고, 신학잡지인 ‘확증과 비평’을 수년 째 발간해 옴으로 교계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지방교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있다. 그 결과 최근에 풀러신학교측은 지방교회측이 성경적인 정통 그리스도인들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미국교회의 선례는 한국교회에서도 참고가 될 만하다. 따라서 지방교회측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성교회측에 다가감으로 교제의 폭을 넓히고, 기성교회측은 대국적 관점에서 “나와 다소 다르나 주 안에 참된 형제들을 받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롬 15:7).
눅23:33-34 그들이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범죄자들도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군인들은 그분의 못을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를 뽑았다.
우리는 '회개한 강도가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이구동성으로 주 예수님을 비웃다가 왜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변해서 그리스도를 믿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누가복음 23장 34절의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긍휼, 이러한 자애, 이러한 온유와 충만한 은혜가 이 강도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의 선입관을 없애고 악한 마음을 녹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함께 못 박히신 분이 참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십자가는 그의 마음을 딱딱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비웃게 했지만, 주 예수의 십자가는 그로 회개하게 하고 구주를 믿게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좌우편의 두 명의 강도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나타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죄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기의 죄를 지지 않았고, 멸망받은 강도는 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영원히 멸망받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소위 '에클레시아 용법'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H.J 님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클레시아가 다만 '특정목적을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구별된 명칭을 가진 명실상부한 교회로 볼 것인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H.J 님은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므로 H.J 님은 사도행전 8:1은 예루살렘에 정관사 the 로 특정된 하나의 교회만 있었다고 명백히 말함에도 그렇지만 그 하나의 교회 안에 수 많은 복수의 교회들이 있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모임도 각각의 특화된 교회들로 보는 H.J 님의 독특한 교회관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에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한 경우와 단지 어떤 집에 모임이 있으니 그것을 에클레시아로 본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이것은 어떤 하나의 교회(예를 들어 런던 양무리 교회 또는 서울 사랑의 교회)가 여러 지역 또는 가정에서 정기적인 소그룹 모임을 갖지만 그 소그룹 모임 하나 하나를 별도의 특화된 교회 이름을 붙여 부르지(호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H.J 님이 선호하시는 개혁신학에서도 어떤 집에서 예배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독립된 별도의 교회로 인정하고 특정 교회 이름으로 호칭해 주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개혁교회 신학은 예루살렘 교회 안의 집집 마다 있었던 모임처럼 다만 모임을 갖는 것 외에 교회가 참으로 바른 교회인지를 분별하는 별도의 징표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즉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제 18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 29조는 말씀, 성례, 권징을 교회의 세가지 징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바른 말씀의 선포가 있는지, 성경적인 성례전이 제대로 집행되는지, 또 합당한 권징이 있는지 여부를 보고 그 모임이 성경적인 교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더구나 실행적으로는 예배당이 아니라 각각의 집에서 주일 날 별도의 설교가 행해지고 집 단위 교회별로 권징이 가해지고 집 단위로 성만찬과 세례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개혁신학이 과연 허용할지도 의문입니다. 이처럼 H.J 님의 교회관은 개혁신학의 이론과 실제와는 상당한 간격이 있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단지 에클레시아 라는 조건만 충족하면 그것을 교회라고 주장하는 H.J 님과 달리 어떤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위 교회의 세 가지 징표를 감안하여 교회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장로교단(개혁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H.J 님은 이처럼 본인이 선호하는 개혁신학의 입장과도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실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5장 5조는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단의 회라고 할만큼 깊이 타락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음으로 '에클레시아' 모임 자체만으로 별도의 독립된 교회로 인정하는 듯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고 또 성경적이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교단신학을 한후 목사안수를 받아 개척한 모임들 중에는 참되게 거듭나지도 않은 인도자가 설교하고 인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입니다. 이런 모임은 에클라시아 일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H.J 님은 그리스도가 그 모임 안에 있는지를 보는 것이 자신의 또 다른 교회에 대한 조건이라고 항변할지 모르나.... 다만 모임이면 에클레시아로 보고 별도의 교회로 보는 교회관과 그것이 어떻게 조화되며 '누가' 어떻게' 그 모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여부를 판단할 것인지를 보완하여 말해주지 않는 한 스스로 모순을 가진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모임의 의미를 갖는 에클레시아 개념을 갖는 것 외에 특정 명칭으로 호칭되는 에클레시아인가(예를 들어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등), 합당한 장로직분이 세워지고 행사되는가(행14:23, 딛1:5),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분열의 결과로 나타난 모임은 아닌가(고전 1:10, 11: 28-29)등등의 추가적인 일종의 검증장치를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클레시아 라는 개념은 교회의 특징 중 일부일 뿐 그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특징들을 다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H.J 님의 모임(에클레시아) 개념을 기초로 한 교회관은 헛점과 모순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회에 대하여 토론할 소위 '기초문법'에 해당된다는 주장은 너무 자기 중심적인 주의 주장일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상세하게 반박 비판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여호와여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아멘 시편 139:23-24, 1-3
오늘은 레위기 LS 메시지 12번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만족을 위해 누리는 소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 번째로 소개 말씀을 드리겠다.
레위기 2: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릴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 번제와 소제의 비교
번제의 주된 항목은 피이다(1:3, 11). 소제의 주된 항목은 기름과 유향이다(2:1). 기름은 섞고 기름 붓기 위한 것이며, 유향은 소제 위에 놓이기 위한 것이다.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런 실수도 범하지 않고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하고 온전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전적으로, 끝까지 절대적인 사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완전히 절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 3:23). 이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면에 있어서 죄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절대성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절대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몇몇은 상당한 정도로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완전히 철저히 절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람이신 예수가 이 땅 위에 사셨을 때만큼 하나님을 위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사복음서에서 그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분으로 묘사된다. 우리들 중의 어느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며,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는 구속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속죄는 또한 우리와 하나님간의 상황, 곧 화목이 없는 상황을 화평케 하기 위한 것이다. 속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상황을 누그러뜨리며 어떤 문제들을 해결한다.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번제이신 그리스도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체험한 것만큼만 번제로서 그리스도를 드릴 수 있다. 속죄에는 피가 필요하다. 오직 동물들만이 번제가 되기에 적합한데, 이는 동물들만이 속죄를 위해 뿌려질 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1장의 번제물은 생축 중의 소나 염소나 양 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여야 했다.
소제에서는 동물의 생명에 속한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식물의 생명, 곧 밀과 밀알과 밀 이삭들이다. 그리스도의 예표인 식물의 생명은, 사람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산출, 번식, 증가를 가리킨다. 우리는 소제에서 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기름과 유향을 본다. 기름은 소제에 부어져서 그것과 연합되며, 유향은 소제 위에 뿌려진다. 피와 기름과 유향에 관해서 우리는 번제와 소제와의 매우 의미심장한 차이점을 본다.
제물들은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누림을 갖기 위한 하나님과 우리 모두를 위한 음식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며, 그분만이 그것을 드신다. 하나님의 「입」은 번제를 태우는 불이며, 그 불은 계속 밤낮으로 탄다. 번제를 드시는 신성한 드심은 아주 질서정연하다(레 1:7-8).
번제는 속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드실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속죄를 위한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번제를 먹을 수 없다. 우리는 번제는 먹을 수 없지만 소제의 일부분은 먹을 수 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의 봉사는 거룩하며 그들의 음식 또한 거룩하다. 만일 우리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제사장의 음식, 곧 우리의 거룩한 봉사에 걸맞는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 음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한다. 소제는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족이신 그리스도이다. 먼저 하나님이 그분의 분깃인 소제의 부분을 누리며, 그런 다음에 우리의 누림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누림은 공동의 누림(co-enjoyment), 곧 하나님의 누림과 함께한 누림이다.
유향과 고운 가루와 기름이 단 위에서 불살라짐(레2:9)
모든 유향과 고운 가루의 부분과 기름의 부분은 단 위에서 불살라진다(2:2). 이것은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완전하고, 그 영으로 충만되고, 부활로 적셔진 생활의 상당한 부분이 하나님의 누림을 위하여 음식으로 하나님께 드려졌음을 상징한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사람의 생활은 탁월하였으나, 이 탁월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그분의 속성과 미덕들의 높은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수준은 얼마나 높은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전에 인류 가운데 그러한 수준은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고, 연합되고, 충만된 하나님-사람이시다. 더우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부활을 표현하셨는데, 심지어 바리새인들에게 화내시고(마 23:1-36),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요 2:12-17)조차도 부활을 표현하셨다. 이 땅 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의 탁월함은 그분의 인간성과 그분의 신성함에 있었다. 즉 그것은 그 영 안에 있고 부활과 함께한 그분의 인성과 신성 안에 있었다. 이것이 사복음서가 그분의 탁월함 안에서 그분을 계시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하다. 그분은 고우시고, 고르시며, 완전히 균형잡히신 분이며 어떤 것도 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으셨다. 더우기 그분은 그 영으로 충만되신 분이며 부활로 적셔진 분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행하셨을 때 항상 그 영으로 충만되셨으며 부활로 적셔지셨다.
소제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을 위한 것임(레2:3,10)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 2:3). 이것은 하나님이 누리신 후에 우리도 우리의 음식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먼저 하나님은 만족케 되시기 위해 그분의 분깃을 받으셔야만 했다. 남은 것은 우리의 만족을 위한 우리의 분깃이다. 레위기 2장의 예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한 그림이다. 고운 가루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고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기름 섞인 고운 가루, 곧 기름과 연합된 고운 가루를 산출하기 위해 기름과 가루가 연합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영에 의해 예수님을 먹고자 한다면, 오늘날 그 영은 말씀 안에 합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접촉할 때, 말씀 안에 합해져 있는 그 영을 접촉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주 예수님의 사람의 생활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생활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대하여 말씀을 기도로 읽음으로 우리의 영을 훈련함으로써 어느 때든지 예수님을 취할 수 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며 그 영은 우리에게 우리의 영양공급이신 예수님을 공급한다. 자연히 우리는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거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음식이신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생활을 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훈련하고 말씀을 기도로 읽을 때, 우리는 그 영을 접촉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을 누린다. 이것이 소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