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듯이 바울이 딤전1:4에서 말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자신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 안에 분배하심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할 단체적인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본 사도 바울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그의 온 힘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골1:28).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보지 못했던 시절의 그는 가는 곳마다 옳은 것으로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정죄하고 핍박하는 인생을 살았었습니다(딤전1:13, 빌3:6).
생명되신 그리스도 자신을 살고 공급함으로 사람의 참된 필요를 채우는 길을 걷는 사람과 성경이 하라 하지 말라고 한 율법적인 요구에 묶여 결국 사람들의 참된 필요를 외면하고 오히려 정죄하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그 열매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바울과 사울의 대비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2장을 읽었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심사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보였습니다. 즉 주 예수님은 안식일 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 잘라 먹은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도 잘못이 없다며 그들을 두둔하는 입장에 서셨습니다. 물론 '그들의 참된 필요인 배고픔'도 돌아보는 마음이 있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이에 더하여 비록 안식일이긴 하지만 손이 오그라들어서 불편한 사람의 참된 필요도 관심하셨고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제단에 차려 놓았던 진설병을 먹었으나 죄가 되지 않았던 사실(삼상21:6),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은 점(민28:9-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안식일 제물을 드리기 위해 일해야 했음),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점(호6:6) 등의 진리적 당위성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는 사실만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범한 제자들을 두둔할 뿐아니라 한 수 더떠서 자신이 직접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 안식일을 깨뜨리신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도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서 안식일을 범한(그들의 눈에) 주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counsel)를 열었습니다 (마12:14).
이러한 사건은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에스겔 20:12, 신명기 5:15 등의 구절들을 예수님을 정죄할 근거말씀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 자신은 성경을 잘 지키는 정통이지만, 성경내용의 바로 그 주인공이신 주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이단이요 비성경적인 분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단편적인 성경지식은 있으되 그러한 안식일의 주인(마12:8)이신 주 예수님 자신을 보는 영적인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을 보는 눈이 먼 것이 소위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인들의 치명적인 약함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한 부분만을 붙잡고 '배고파 밀 이삭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많은 때 그들은 배고파 밀 이삭 잘라 먹는 사람들을 위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주고자 하시는 그들의 주인 그들의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하시고 품으시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짓밟고 정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주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데서 더 전진하여 주님 자신까지도 극렬하게 반대하며 저지하고 심지어 죽이려 듭니다(마12:14).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는 사람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데 이러한 그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밖의 율법을 준수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공격받고 그영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없이 다만 사랑하시고(요3:16) 그들에게 주님자신인 생명을 주시고 또 주심으로(요10:10) 그들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인 주님자신으로 충만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가시고(엡1:23) 마침내 거룩하고 흠없는 신부로 단장해 가시는(고후11:2, 계19:7, 21:2, 9-10) 현재의 주 예수님의 일 하심에 다만 아멘하고 동역하기를 갈망합니다.
이집 저집에서 모이는 가정집회가 교회의 기초이다. 대집회는 일종의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 타는 것과 강다. 사실상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가정집회이다. 큰 집회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만일 가정집회가 없다면 교회의 번식과 돌봄은 없을 것이다. 가정집회는 교회 번식의 생명선이다. 사도행전 2장은 성전에서 모이는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장에 들어왔다. 그리고 스케이트장에서 나가 이집 저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일단 어떤 사람이 가정집회에 들어가면 그는 보호되었다. 오늘날 웅장한 건물은 세상의 허영과 육체의 자랑에 속한 것이다. 집회장소의 기능은 교육과 섞임과 훈련이다. 대집회는 사람들을 경직되게 하고 수동적이 되게 하고 듣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성경에서 유대인들은 항상 특별한 집회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지었다. 초기 교회 사도들도 이런 습관 때문에 건물을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건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주후 70년에 통곡의 벽만 남겨놓고 다 무너졌다.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건물을 짓기 위해서 헌금했다는 기록이 없다.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가기 위해서 가정집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새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생아임을 앎
우리는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다룸같이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유치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다룬다.
우리가 대학원생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대학 졸업생들이라는 것을 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의 어린 아기로 생각해야 된다.
새로운 사람이 "성경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린 아기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바른 말을 해야 하고, 태도나 어조도 합당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많은 질문을 할 때 이러한 비결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열 것이고, 우리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말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들은 매우 관심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16-217쪽)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새 신자들을 양육함
우리는 어린 아기를 돌보고 있다는 것과 아기를 위한 음식으로 갓난아이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을 먹일 때 너무 많이 먹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너무 많이 먹이면 그들은 소화불량에 걸려 입맛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말, 향기가 좋은 것이나 달콤한 것으로 먹여야 한다. 주 음식의 맛이 달콤하다면 그들은 잘 먹을 것이다.
첫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떻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가이다.
새 신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최선의 길은 찬송이다.
늙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찬송하기를 좋아한다. 찬송하는 것은 정말 달콤하다.
우리는 짧고 간단하며 부르기 쉬운 찬송을 배워야 한다.
두 번째는 찬송을 부르면 귀 기울여 듣고 나서 그것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세 번째 우리가 그 찬송을 부르면 그들이 함께 부를 것이다.
우리가 갓난아기를 도우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항상 기쁘게 해야 하고 그들의 기분을 좋게 해야 한다. 그 후에야 그들은 우리가 주는 것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47-248쪽)
새 신자와 '놀기'를 배움
아기를 양육하는 어머니는 어린 아이들을 먹일 뿐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으로 소중히 품는다. 그들과 노는 것이 그들을 소중히 품는 것이다. 아기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고 기쁨을 느끼고 나면 어머니는 그들을 먹인다. 우리는 반드시 새 신자들과 함께 '어떻게 노는지' 배워야 한다. 그들과 함께 놀면서 우리의 손은 그들을 먹인다. 새 신자가 크리스마스라는 질문을 할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크리스마스 주제에 점유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크리스마스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님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가져야 합니다. "라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조금씩 크리스마스에 관한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라는 실제로 돌이키게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교통을 통해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어서 기뻐할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잊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새 신자들에게 자양분인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훈련과 실행, 257-258 쪽)
가정 집회에 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을 만지고,
열게 하고, 소생시켜야 한다
새로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의 영을 만져야 한다. 우리는 생명 공과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어떤 중점이나 구절이 새로운 사람의 영을 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사람의 영이 만져진바 되면 우리는 좀 더 전진된 빛 비춤이나 계시를 주어야 한다.
"우리는 속에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영 안에 사시기 위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영이 이제 한 영이 되기 위하여 연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새 신자가 생각 안에서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영을 만지도록 이끌려 질 것이다.
우리가 그 영을 접촉한 체험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체험이 있다면, 우리가 설명해준 후에 그는 즉시 이해할 것이다. 가정 집회에 갈 때에, 체험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을 만져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열려지게 하고 그들의 영을 소생시켜야 한다. (복음의 확산을 위한 예비, 60-61쪽)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내주 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분별함 - (2) 지방교회 진리변호확증 자료
2.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곳'의 양면성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롬8:34는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롬8:10은 동시에 또 다른 방면에서 주 예수님이 거듭 난 사람 안에 (생명으로) 계심을 증거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고 또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 안에 살고계십니다(골1:18, 엡1:23).
그러나 로마서 8:10은 위 양 방면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되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지만)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 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거듭난 우리의 영>은 살았고, 심지어 생명(조에) (spirit is life) 이라고까지 롬8:10 후반부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 안에 계신다는 사실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한 고전6:17에서 더 선명하게 확증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 불신자였을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습니다(엡 2 :1).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생명으로 영접할 때 그분은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십니다. 이 영이신 주님이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심지어 우리 영과 연합하여 한 영(one spirit)이 되셨다고 고전6:17은 말합니다. 이제 이분은 여기서 더 전진하여 우리의 영 뿐 아니라 마음(heart)에도 거처를 얻기 원하시며(엡3:17), 우리의 죽을 몸, 사망의 몸에게도 생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롬7:24, 8:11). 이것이 구속의 피로 인한 죄사함 이후에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생명에 의한 유기적인 구원의 과정입니다(롬5:10, 빌2:12). 이러한 지속적인 생명의 역사 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되고 마침내 영광 안으로 이끌려 질 것입니다(히2:10). 이것이 로마서 8장 전체에 흐르는 사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쟁점이 되는 것은 롬8:10이 말하는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 할 때의 영이 과연 사람의 영인가 아니면 성령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원래 신약원문 상의 영을 가리키는 '(푸)뉴마'는 대 소문자 구별이 없음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인지, 사람의 영인지는 전후 문맥을 따라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캘빈을 포함한 소수의 신학자들은 이 영을 성령으로 보지만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롬8:10이 언급하는 이 영을 사람의 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장로교단 내에서 존경받는 주경 신학자인 이상근 박사의 아래 자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 영(롬8:10)을 성령으로 보는 학자가 있으나(Calvin, Dickinson), 신자의 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Meyer, Bengel, S&H, Vincent 등). 전구(몸)와 댓귀적 성격으로 보아 후설이 타당하다(고전2:11). 영이란 인격의 본질이며 영성의 최고의 부분으로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좌소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이다'(이상근, 신약 주해 로마서, 성등사, 205쪽).
이외에도 롬8:10의 영을 사람의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수 의견임을 인정하는 자료로는 죤 머리의 로마서 주석(권혁봉 역, 생명의 말씀사) 33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문맥을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위 롬8:10이 언급하는 영은 사람의 영이며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의하면 여기에 언급된 영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 하는 조건하에서만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생명이심에는 어떤 특별한 조건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앞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에서의 몸이 사람의 몸을 가리킴으로 뒤의 '영은 의로 인하여 생명이라'에서 영도 당연히 사람의 영을 가리켜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없으니 우리 안에 성령만 계신다는 사상은 매우 위험한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삼위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것이 정통 삼위일체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빛 가운데 거하심으로 사람 안에 오면 타 죽고 성령님은 사람 안에 오실 수 있다는 주장은 성령님이 아버지와 다른 본성 또는 열등한 본성을 가진 하나님이라야 말이 되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둘째로, 상호내재 하시는 삼위는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럼에도 성령만 우리 안에 계시고 아들 하나님 자신은 '구겨지지 않는 한' 사람 안에 계실 수 없다는 말(기독신문 게시판 안0식 목사님 주장)도 삼위를 분리시키는 이단적인 주장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말들은 참된 신자가 소유하는 아들 안에 있는 생명(요일5:12)이 본인에게는 아직 없음으로 자신이 가라지라는 부끄러운 고백이 될 뿐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삼위일체론 뿐 아니라 기독론과 구원론에 있어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주장입니다.
PS: 누구든지 성경해석에 오해가 있어서 잠시 성경적인 가르침과 다른 주장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또 틀린 것은 고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 성경적이고 이단적임이 선명하게 밝혀졌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고 오히려 성경적인 가르침을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런 비 진리와 비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유다서 1:3은 우리에게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 싸우라'고 명합니다.
3:7 여러분은 반드시 다시 나야 한다고 내가 그대에게 말한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8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붑니다. 그대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그 영으로 난 사람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9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어떻게 이런일들이 있을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그대는 이스라엘의 선생님이면서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하십니까?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것을 증언하지만,여러분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12 내가 여러분에게 땅의 일들을 말하였는데도 믿지않는데, 하늘에 있는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습니까?
13 하늘에서 내려온이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하늘에 올라가 본 이가 없습니다.
누림
헬라어에서 바람과 영은 같은 단어이다. 거듭난 사람은 우리가 느낄수는 있지만,이해할 수는 없는 바람과 같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사실, 곧 하나의 실제이다. 여기서 `땅의 일들`이란 구속과 거듭남을 포함하여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킨다. 같은 원칙으로 이 절에서 `하늘에 있는 일들`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킨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에 부패한 세상 가운데 있는 해 아래의 타락한 인류의 인간생활에 관하여 기술한 것입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하늘 아래서 행해진 모든 일을 추구하고 살폈으며, 자연 현상에 따라 모든 것이 순환되어 행해지면서 그대로 있고,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모든 것이 괴로우며 아무것도 새것이 없음을 관찰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가장 높고도 고상한 목표를 가지고 창조되었는데, 이는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 마귀 사탄이 끼어들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창조하신 사람 속에 자신을 죄로 주입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람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통치 아래 두신 모든 피조물들은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한 세상에 있는 인생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온전히 깨달았으며, 그의 서술에서 이 점을 최고도로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서 완전히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 허무함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길은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사람의 모든 것, 구속, 생명, 부, 누림, 즐거움, 만족으로 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께 쓰임받아 그분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도록 사람에 대한 그분의 원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전1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