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7.03 05:00

이교에 물든 기독교-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 으로 가득한 기독교

이교에 물든 기독교

이교 사상과 인간 전통으로 가득한 기독교

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가 함께 쓴 '이교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 '팩트'(fact)입니다.  물론, '팩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1.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맥박이었다. 주님의 그들의 생명이었고,호흡이었고, 대화의 핵심이었다. 신약성서적 교회는 모든 것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놓았고, 또 최우선으로 놓았다. 

  2. 신약성서적 교회는 예배의 고정된 순서가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신자가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를 나누고,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고, 서로 덕을 세우려고 애쓰는, 모두가 참여하는 열린 모임을 했다. 거기에 구경꾼은 없었다. 모두가 참여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이 교회 모임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몸 안에서 상호 간에 덕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함을 통해 주님이 밖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 모임은 종교적 "예배 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스럽고, 자발적이고, 즐거운 분위기로 충만한 비공식적인 모임이었다. 그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또 교회에 속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사역 또는 은사 받은 사람을 위한 무대로 쓰이지 않았다. 

  3. 신약성서적 교회는 친밀한 공동체로 살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집합적인 예배와 덕을 세우려고 모였지만, 교회가 단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 모이려고 존재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신자들은 나누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정기적인 모임 밖에서 서로 돌봤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말이 주는 바로 그 느낌대로 진짜 그렇게 살았다. 

  4.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서 의식, 성직자, 그리고 신성한 건물이 없다고 알려진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종교였다.

교회가 생긴 다음처음 3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집에서 모였다. 특별한 경우 에는, 기독교 사역자들이 때때로 더 큰 장소를 사용했다. - 솔로몬의 행각 같은 곳(요 10:23; 행 3:11)과 두란노 서원(행 19:9) - 그러나 그들에겐 신성한 건물의 개념이나 건물에 큰 돈을 들이는 개념이 없었다. 또 건물을 "교회" 또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알았던 유일한 신성한 건물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5. 신약성서적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다. 

카톨릭 사제와 개신교 목사 같은 것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교회는 교회를 개척하고 돌보는순회 사도적 일꾼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꾼들을 특별한 성직자 계급에 속했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일부였고, 교회를 섬겼다. (거꾸로 교회가 그들을 섬긴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기 다른 은사와 기능을 소유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분의 사람들 위에 권위를 행사할 독점적인 권리를 갖고 계셨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장로의 역할과 목자의 역할이 단 두 가지 은사였다. 장로들과 목자들은 특정한 은사를 가진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직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 모임에서의 사역을 독점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교회의 지체들을 자연스럽게 돌보고 또 교회 전체를 감독하는 일을 하는 경험 많은 그리스도인이었다. 

  6. 신약성서적 교회에서의 의사결정은 교회 전체의 어깨에 달렸었다. 

순회 교회 개척자들은 때때로 지침을 주고 방향을 설정해주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교회 전체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그 지역에서 결정을 내렸다. 함께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따르는 교회의 책임이었다. 

  7. 신약성서적 교회는 조직적이지 않고 유기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직책을 주고, 프로그램을 짜고, 의식을 제정하고,상명하복식 계급이나 명령계통 구조를 조직해서 함께 묶은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였다. 그것은 태어나서 자랄 것이었고, 그 유전자(DNA)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사역과 기능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교회가 아름다운 여자, 곧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녀는 땅에서 나온 인간이 만든 조직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식민지였다. 

  8. 십일조는 신약성서적 교회의 관습이 아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재정을 교회 밖의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그들 중의 가난한 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아울러 그들은 복음이 널리 퍼져서 다른 곳에도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도록 순회 교회 개척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죄책감이나 의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능력대로 드렸다. 목사/성직자의 사례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요, 사역자요, 몸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였다. 

  9.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을 때, 새로운 지위를 얻었음을 표하는 간증으로 즉시 그 사람들에게 물로 침례(세례)를 베풀었다. 주의 만찬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또 주님의 몸과 하나가 되었음을 재확인하는 지속적인 표현이었다. 주의 만찬은 교회가 기쁨과 잔치의 분위기로 함께 즐겼던 온전한 식사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식이나 특별한 제사가 결코 아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였다. 

  1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젊은 일꾼들을 훈련시키려고 성서학교나 신학대학원을 설립하지 않았다. 

기독교 일꾼들은 교회생활의 토양에서나이 든 일꾼들에 의해 교육되고 훈련되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배웠다. 예수님은 12제자를 키우실 때 이 '현장에서'훈련하는 최초의 모델을 선보이셨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젊은 이방인 출신 일꾼들을 훈련할 때 그 모델을 복제했다. 

  11. 초기 그리스도들은 자신들을 여러 교파로 나누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이해했고 그것을 모든 도시에서 눈에 띄게 표현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한 도시에 교회는 하나뿐이었다. (교회가 그 지역 전체에서 여러 다른 가정집에 흩어져서 모였겠지만) 만일 당신이 1세기 그리스도인이었다면, 한 교회에 속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은 잘 지켜졌다. 그들을 나누는 것("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베드로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은 분파와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전1:12을 참조) 

 이교에 물든 기독교, 프랭크 바이올라와 조지 바나, 대장간, pp 311 - 314

출처:good news fellowship                          글쓴이:maple

이교에 물든 기독교
국내도서
저자 :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조지 바나(George Barna) / 이남하역
출판 : 대장간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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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6 16:35
성경말씀 

 (롬14:16~17)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것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화평,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마28:20下) 나는 이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오늘의 만나 

 어떤 의미에서는 왕국이 여기에 있고, 다른 의미에서는 왕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 자신과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여기 계시지만 다른 의미에서 주님은 오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동안에도 그분은 여전히 외적으로는 오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외적으로 오시어 왕국의 나타남을 가져오실 때에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왕국의 나타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왕국의 실제 안에 산다면 상점이나 식당에서 잔돈을 더 많이 받았을 때 곧 돌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러한 상황을 통해 이익을 취하지 않는 사실을 보고 놀랍니다. 사람들에게 여분의 돈을 돌려주고 다른 이들의 이익을 취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는 왕국의 실재의 한 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이것이 왕국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왕국의 나타남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왕국의 나타남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6 14:50
성경말씀 

 (고후6:17)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다.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분별되고,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셨고 

 오늘의 만나

 
 여러분은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에서 모두 떠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세상 사람이 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각각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정합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끝난 것입니다. 당신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도 이런 일을 하느냐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러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끝난 것입니다. 가령 당신이 어떤 장소에서 이방인에게 발견되어 그가 당신에게 “그리스도인도 이런 장소에 오십니까?”라고 말한다 합시다. 물론 이방인들은 많은 장소에 갑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런 곳에 간다면 그는 당신도 갈 수 있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들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들에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4 14:30
성경말씀 

 (시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오늘의 만나

 
 어떤 나이든 그리스도인이 팔십 세 생일 때, 하인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저녁 때에 이 노인은 하인들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한 손에 금박으로 칠해진 아주 좋은 가죽 성경을 들고서 요리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자, 이 성경책과 돈 이십 불 중 네가 원하는 것을 아무거나 골라라." 요리사가 말했습니다. "주인 어른, 저는 글을 모릅니다. 돈을 주십시오." 노인은 그에게 이십 불을 주었습니다.  또 여종에게 물었습니다. " 너는 글을 읽을 줄 아니 성경책을 줄까? "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너무 바빠서 성경을 볼 시간도 없습니다. 제게도 돈을 주세요." 마지막으로 마당을 쓸고 편지 배달을 하는 하인에게 물었습니다. "너에게도 이십 불을 주겠으니 가서 어머니께 옷 한 벌 해 드리거라." 그 하인은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성경을 갖고 싶습니다." 노인이 깜짝 놀라서 "너는 글도 모르는데 성경을 갖고 무엇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하인은 "네. 어머니는 성경을 날마다 제게 읽어 주십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성경책은 너무도 낡아서 한 권 사다드리려 했으나 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성경책을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면 이십 불을 드리는 것보다 더욱 기쁘게 해 드릴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기특하구나! 너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하인이 받아 펼쳐보니 그 안에는 백 불짜리 지폐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보고 놀라 잘못 고른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축복을 잃는지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읽는다면, 반드시 그 속에서 넘치는 풍성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금은보다 승하니이다."(시119:72)
출처:온전케 하는 예화들(1)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1 20:20
성경말씀  

(마25:1~4)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처녀와 같습니다. 그들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현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져갈 때에 기름을 가져가지 않았으나, 현명한 처녀들은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마태복음 25장의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신분이 슬기로운 처녀처럼 깨끗하고 단순해야 하며, 빛이 있는 등을 들고 흑암을 비추는 상태여야 하며, 주님을 원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나오는 길을 가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 생활을 해야 함을 분명하게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이 세상은 그분을 거절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까지도 이 세상에 두지 않고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신랑이신 분을 영접하기 위해 나와야 합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분이며 어떤 상태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상태를 비춰볼 때 우리는 자신이 마땅히 가져야 할 상태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빛을 발하는 등을 들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싫어하는 세상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신분과 상태와 길과 생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시작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생활의 기점입니다.
출처 :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숙하는 길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11 14:45
성경말씀  

(사41:10~1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오늘의 만나

 
 그리스도인인 군관 부부가 있었습니다. 군관은 아주 열렬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부부가 함께 유람을 하고 있는데 도중에 험한 풍랑으로 작은 배가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공포에 질려서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편은 웃으면서 총을 들고 부인의 가슴을 겨누면서 물었습니다. “무섭소 안 무섭소?” 부인이 “권총이 당신 손 안에 있는데 내가 무서워할게 뭐가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어요. 나도 안 무서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구주이시고 나의 친구니까”
출처 : 온전케 하는 예화들2


posted by 달콤한 지방교회 스토리 2018.05.03 15:30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몇몇 항목에 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우리의 공통 신앙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논쟁 없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판한 사역의 글 중 일부를 읽은 어떤 분들은 우리의 이해가 정도 (正道) 를 벗어났다고 느끼고, 더 나아가 어떤 분은 심지어 우리를 이단시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상당 부분이 분명 우리의 책자들을 제한적으로만 접한 것에 기인한다고 믿으며, 때로 우리의 글이 전체 문맥이 무시된 채 발췌되어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과는 동떨어진 내용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오늘날 일부 ‘이단 감별사들’의 가슴 아픈 행태이며, 그들의 이러한 권한 남용의 유일한 피해자는 우리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취한 입장 때문에 오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진리의 몇몇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에 대한 참된 논의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며, 우리의 이해가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나 사상가들이나 믿는 이들의 관점과 다르지 않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진심으로 믿는 것처럼 우리는 이들 항목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진심으로 믿으며, 일부 진리 항목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항목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이해나 상대방의 이해 모두에 대해 존경과 관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논의가 필요한 이러한 진리 항목들을 우리의 기본 신앙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즉 그러한 항목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의 교통 안으로 받거나 거절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풀러 신학 대학에 있는 우리 형제님들과 우리 스스로가 해 온 것처럼, 모두가 이런 문제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연결하시는 그 영의 하나를 손상시킴 없이 믿는 이들이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또는 동의할 수 있는) 항목들로 다루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믿는 이들이 그러한 항목에 대해 우리와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 곧 우리가 이 진리 항목들에 대해서 확고하게 믿는 것처럼 그들도 믿는 것이 우리의 간절하고도 커다란 소망이지만, 이것들은 논쟁의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부분 전체를, 모든 신성한 진리와 실재 안으로 우리 모두를 이끄시겠다고 약속하신 진리와 실재의 영께 일임하고자 합니다 (요 16:13). 우리는 이 부분에서 우리의 독특한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일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우리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진리의 몇몇 항목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이해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워치만 니 (Watchman Nee) 와 위트니스 리 (Witness Lee) 의 저술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워치만 니는 기독교계에 매우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저서 중 일부는 교계 전반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일한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성경 교사인 위트니스 리는 지방 교회들 외부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간혹 그를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에게서 많은 영적 도움과 영적 양식이 되는 가르침과 경건한 본을 보아온 우리는 이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여깁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의 책자들을 조금이나마 인용하여 제시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오해를 떨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트니스 리 형제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하여 간략한 소개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1905년 중국 북부 지방에서 태어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19세 때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혀 즉시 그의 남은 일생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그의 사역 초기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저술가인 워치만 니를 만났습니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인도 아래 그와 동역했습니다. 1934년에 워치만 니는 그의 출판 일을 수행하던 상해복음서원의 책임을 위트니스 리에게 맡겼습니다. 1949년에 워치만 니와 그의 동역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이 (중국 본토 공산화로 인해—역자 주)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에게 대만복음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에서 그의 출판 일을 계속하도록 했는데, 현재 대만복음서원은 영어권의 LSM과 함께 중국 밖에서 워치만 니의 저서를 출판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대만에서의 위트니스 리의 일에는 주님의 넘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피난한 350여 명의 성도들이 전부였던 대만 교회들은 5 년 사이에 2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62년에 위트니스 리는 미국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를 느끼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습니다. 미국에서 35년간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지속적으로 주중 집회와 주말 특별 집회에서 말씀을 공급하여 수천 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대부분은 800 권 이상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며 이 중 많은 책이 14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91세인 1997년 2월에 그의 마지막 공식 특별 집회를 가졌습니다. 위트니스 리의 사역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그리스도의 몸인 믿는 이들의 실제적인 하나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관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돌봄 아래 있는 교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기능에서 성장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표는 편협한 분파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신성한 삼일성 (또는 삼위 일체 Trinity) 안에서 아들이 갖고 계시는 특징
아마도 우리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란이 있었던 신학적 주제는 신성한 삼일성 내에서의 세 위격 (인격) 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일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그러한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핵심 구절에 어느 정도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구절들은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라 (사 9:6).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a living soul)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 (a life-giving Spirit) 이 되었나니 (고전 15:45). 주는 그 영 (the Spirit) 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여기에서 첫 번째 구절은, 아들이 아버지라 불리신다고 말하고, 두 번째 구절은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세 번째 구절은 아들이 그 영이시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적인 단순화라고 하며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신학적 개념과의 일치를 위해 성경의 표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학적 개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의 사실을 존중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관계에 관한 성경에 따른 정확한 관점은, 성경에서 아들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신다고 말하고, 아들이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다고 말하고, 아들이 그 영이 되셨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구절들에 동반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들이 있고, 다양한 해석자들이 신중한 고려 없이 이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 모든 내용을 여기서 전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것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부활 안에서 영적 존재를 취하셨으므로 이제 영이시라고 불릴 수 있지만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있는 ‘주’라는 표현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인 주 예수님을 가리키는 특별한 칭호가 아니라 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이므로 그것은 삼일성 안에 있는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해석이나 이와 유사한 해석들이 어려움을 일소해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신격 안에 존재하는 심오한 실재에 관해 기록한 사실임을 믿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해석들이 그 모든 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입니다. 비록 우리가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심오한 실재의 충분한 깊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에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해가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그렇게 보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는 몇 단락의 글을 위트니스 리의 책에서 발췌하여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 더 간단히 말해 양태론자들이라고 정죄받아 왔습니다. 즉,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은 영원히 구별되지 않는 유일한 신격의 일시적인 (그리고 임시적인) 존재 양태들일 뿐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monarchia) 곧 유일성(unity)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한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근거 중 일부인 다음의 발췌문은 이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영께서 내려오신 것은 그리스도께 기름 부으신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라는 증거였다. 이것은 신성한 삼일성의 그림인데, 아들은 물에서 올라오셨고, 그 영은 아들 위에 내려오셨으며, 아버지는 아들에 관해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께서 동시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신약 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3장 17절 각주2 나는 성경에 따라 성부가 영원하시며,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 또한 영원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존재하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라고 말한다. 이 두 구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동시에 현존하신다.<삼일성에 관한 진리>(The Truth concerning the Trinity), 영문판[1] 10-11쪽 신성한 삼일성의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시며, 그 동시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시작과 끝이 없다. 아버지는 영원하시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에 의해 증명되는데, 그 구절은 아버지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칭한다. 또한 아들도 영원하시다. 아들에 관해서 히브리서 1장 12절은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3절도 그분을 두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함으로써 그분이 영원하시다는 것을 지적한다. 더욱이 그 영도 영원하시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언급한다. 따라서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하시다… 요약하면,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모두 영원부터 영원까지 똑같이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나 끝이 없으시고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37-38, 42쪽


우리는 신성한 삼일성의 세 위격이 영존하시고 또한 영원히 구별되신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붙드는 동시에, 각 위격이 나타나시거나 구별된 움직임을 가지실 때에도 항상 세 위격 모두가 분리되지 않고 (그러나 여전히 구별되게) 일하심을 또한 인정합니다. 신격 안에 존재하는 이러한 실재를 가리키기 위해 신학자들은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말을 사용해 왔는데, 위트니스 리는 주로 이 상호 내재의 사상에 기초하여 성경이 어떻게 때로 삼일성의 한 구별된 위격을 다른 위격과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이것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은 동시에 존재하실 뿐 아니라 상호 내재 (相互內在) 하신다. 삼일 하나님에게 적용되는 상호 내재 (coinherence) 라는 용어는 그 셋—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서로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14장 7절- 10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다. 이때 주님은 그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요한복음 14장 10절 외에도 14장 20절, 10장 38절, 17장 21절, 23절에서 발견된다. 이 다섯 구절은 모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서로 안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신성한 삼일성이 셋이자 하나라는 비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상>, 42-43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하는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일성 안에서 볼 수 있는 각 위격의 명백히 구별되는 행동과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의 미묘한 관계를 가장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즉 아들과 아버지께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명백히 구별되는 아들의 행동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은 아버지의 운행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명백한 성령의 행동에 세 위격의 분리할 수 없는 운행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요한복음 16장 13절부터 15절까지에서 발견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느니라" 삼일성 안에는 상호 내재라는 이러한 놀라운 실재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록 미묘한 차이에 둔감한 조직 신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자주 위격들을 서로 동일시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조직 신학자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실재에 대해 무감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질이 하나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해 준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의 인격에 관해서는 구별되는 존재인 반면에, 그 위격 간에 상호 왕래 (inter­communion) 가 있으며 한 신성한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어 이로 인해 한 위격의 고유한 일이 다른 두 위격 중 하나에게 속하는…것을 가능케 한다. 또한 한 위격의 나타남이 다른 위격의 나타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 왕래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구별이 이들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왕래는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45절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었나니”) 과 고린도후서 3장 17절 (“지금 주는 그 영이시니”) 에서 보듯이 그리스도를 ‘그 영’으로, 그 영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지칭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찰스] 고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218쪽—“거룩한 삼일성의 위격들은 분리된 개체들이 아니다. 각 위격은 다른 위격들을 포함하며, 한 위격의 오심은 다른 위격들의 오심이다. 그러므로 그 영의 오심은 분명히 아들의 오심을 포함했다고 보아야 한다.” (A. H. Strong, Systematic Theology: A Compendium [Old Tappan, NJ: Revell, 1960, c1907] 332-333쪽)


위의 글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일성 안에 상호 내재라는 실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신 모든 행동에서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분리되지 않는 운행을 동반하셨고, 이로 인해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불린다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단지 구약에서 사용된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여겨 그 의미를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전달하는 엄청난 의미를 사장시켜서도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구절이 육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영감으로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육체 되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셨고 그분께서 하신 일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의 운행이었다고 이해함으로써 그 구절의 원문이 갖고 있는 풍성한 의미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이것은 삼일성의 세 위격 사이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하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위트니스 리 또한 어떤 사람들이 공격하듯이 그러한 구별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의 첫 번째 단계 안에서 삼일성이 어떻게 일하셨는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하실 때,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과 함께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그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획하는 일을 하셨다고도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그 다음으로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고 수행하는 삼일 하나님의 두 번째 단계에서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두 번째 단계인 성취의 단계에서는 아들께서 모든 일을 하셨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영에 의해 성취하는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영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아들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에 의해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로 가셔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아버지 예수의 피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다고 말해야 한다 (요일 1:7). 우리는 아버지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으며, 아버지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 훈련 3권: 이상을 실행하는 길>, 112쪽


우리는 삼일성의 세 위격이 결코 분리되실 수 없다는 것과 한 위격이 일하실 때 세 위격 모두가 운행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 확고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 안에 뚜렷이 구별되는 행위의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신성한 한 위격을 다른 위격들과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동일시를 알기 바라며, 더 나아가 그들의 그리스도인 체험에 이러한 동일시를 적용하기 바랍니다.

 
[1]  본 고에서 인용된 LSM자료들의 대부분은 한국복음서원을 통해 한국어로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로 미출판된 자료인 경우에는 ‘영문판’으로 표시하였습니다-역자 주